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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정/KBS 아나운서: 2년전(2016년) 이맘때쯤이죠, 광화문에서 열린 촛불집회, 국정농단을 규탄하며 모인 촛불 뒤, 결국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꿨습니다. 120년전인 1898년 10월 1일, 대한제국에서도 1만명의 군중이 모인 대규모 집회가 있었습니다. (2차 萬民共同會).
德壽宮 仁化門 앞에서 십일 동안 장작불을 피우면서 철야시위에 나선 사람들, 이들은 왜 광장으로 나온 것일까요? 자, 오늘의 이야기에는 서재필, 윤치호, 이완용, 주시경, 이승만 근현대사의 굵직한 인물들이 총출동합니다. 역사저널 그날 120년전 대한제국을 뜨겁게 달군 대규모 집회, 만민공동회, 그 광장의 기억을 소환합니다. 자, 1만 군중이 모였다고 합니다. 대단하죠!
류근: 그 시대에 1만 군중이란 건 정말 놀라운 일인데 근데 한번 확인을 해보아야 될 것 같애요. 그게 경찰측 추산입니까? 주최측 추산입니까? 경찰이 없었으니까 포도청 추산인지---,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大韓帝國의 포도청은 그런 추산을 안합니다. 저 당시의 한성 인구가 (1890년대 후반) 20만명 정도예요. 20만명 도시에서 1만명이 모였다는 거죠. 그러니 저 1만명이 얼마나 대단한 숫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때는 날이 추우니까 밤에 장작불을 피웠어요. 그래서 장작불이 타올라 가지고 불빛이 하늘로 치솟았다 라는 기록까지 있는데요. 그래서 엄밀히 이야기 하면 대한제국판 촛불 집회가 아니라 장작불 집회, 이렇게 얘기할 수 있죠.
이윤석/방송인: 20명 중에 한 명 꼴로 참가를 한 건데 이 정도면 광장정치의 시작이라고 봐야 되나요?
류근: 그렇죠.
이윤석: 그런데, 다만 이때는 아직 사람들이 民主主義 란 개념은 몰랐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대규모 집회를 누가 주최를 하고 또 결성을 했는지 상당히 궁금합니다.
김종준/청주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萬民共同會는 獨立協會가 주축이 돼서 진행한 대규모 집회였죠. 1898년 3월부터 12월까지 큰 것만 네차례 정도 열리게 되는데요. 獨立協會 회원들과 상인, 노동자, 그리고 일반 백성까지 각개 각층이 참여 하였습니다.
류근: 獨立協會는 하도 많이 들어가지고 아는게 많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는게 별로 없더라고요. 어떤 단체였습니까. 일단 독립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는 걸 보니까. 상식적으로 일단 항일단체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딱 오는데,
이윤석: 그런데 한일강제병합이 1910년 그렇죠? 그러면 12년전 일인데, 시기상으로 좀 안맞는 것 같거든요.
심용환/역사작가: 독립이란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일제로 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원론적인 자주 독립이란게 정확한 것 같고요. 재밋는 사실은 이때 獨立協會 결성을 주도했던 사람이 필립 제이슨, 미국인입니다.
최원정: 외국인이라구요?
류근: 우리나라 獨立協會를 미국인이 만들었다는 겁니까?
------------1895년 11월말, 미국인 필립 제이슨이 조선을 떠난 지 12년만에 다시 돌아옵니다. 그는 스무살 청년시절, 갑신정변에 가담한 죄로 역적이 되어 쫓기듯이 미국으로 망명한 풍운아, 徐載弼이었다. 미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의학을 전공하고 의사가 된 서재필, 힘겨운 망명생활을 이겨내고 미국 시민권까지 획득해 필립 제이슨으로 살아가던 그는 왜 고국으로 돌아올 결심을 하게된 것일까?
최원정: 아, 우리가 아는 그 서재필! 그분이 필립 제이슨이었군요!
류근: 그 시대에 조선인 출신 미국인이라면 얼마전 나왔던 영화 “미스터 션사인”에서 이병헌씨가 연기했던 유진 초이였죠. 그런데 甲申政變 때 도망간 사람이 어떻게 미국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혹시 진짜 유진 초이 처럼 미국 군대에 입대하게 되는 겁니까?
김종준: 사실 徐載弼은 甲申政變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이 실패하고 자신 때문에 부모와처자식, 형제가 모두 처형 당하고 자살하거나 굶어 죽게 됩니다. 그는 혈혈단신 미국으로 망명하여 돈 한푼 없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 일을 하다가 한 미국인 독지가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게 됐고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미국 시민권도 획득하게 되죠. 조선으로 돌아오기 일년전에는 미국인과 결혼도 했습니다 (아내: 뮤리엘 암스트롱).
이윤석: 그러면 유진 초이 하고는 다르네요. 군대가 아닌 의대를 갔네요. 그리고 의사가 돼서 맨손으로 미국여인과 결혼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아메리칸 드림의 원조이네요!
최원정: 대단한 분이네요.
류근: 徐載弼 같은 경우는 甲申政變 주동자로 몰려서 처자식, 형제까지 다 잃은 경우잖아요. 저 같으면 조선의 ‘조’자만 들어도 치가 떨렸을 것 같은데 어떻게 돌아올 생각을 했을까요?
이윤석: 그때도 비자가 있었을까요?
류근: 비자 만료?
최원정: 아니면 사실 사진에서 봤지만 뭔가 표정이 미국사회에서 주류가 아니잖아요. 조선에 와서 내가 주류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류근: 금의환향? 그야말로?
이익주: 어떤 마음으로 귀국했는지는 와서 어떤 활동을 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알겠죠. 다만 중요한 것은 甲午改革을 하면서 십년전에 있었던 甲申政變의 주모자들, 이 사람들에 대한 반역혐의를 전부 벗겨주는 조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徐載弼이 마음을 먹으면 조선에 돌아올 수 있는 환경은 甲午改革 때 만들어진 거죠.
김종준: 徐載弼은 미국에서 옛 동지였던 朴泳孝를 만나 그런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아마도 지금이야 말로 제대로 된 개혁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귀국을 결심했을 겁니다. 당시 개혁파 내각에서는 미국인인 그에게 내각 자문기구인 中樞院의 고문관을 맡기게 돼죠.
최원정: 한때는 역적으로 몰렸다가 이제 금의환향을 한 건데 徐載弼 박사는 조선으로 돌아와서 무엇을 할려고 했던 걸까요?
심용환: 제가 힌트를 드리겠습니다. 여기 달력에 표시된 2018년 4월 7일은 무슨 날일까요?
최원정: 본인 생일인건 아니죠?
심용환: 아닙니다.
류근: 4월 7일은 ‘껍데기는 가라’를 쓴 신동엽 시인의 기일이예요. 그래서 저는 저 힌트가 徐載弼이 조선의 껍데기 같은 권력자들에게 복수하겠다. 혹시 그런 의미에서 보여주신 건 아닌가?
최원정: 복수? 죽은 가족들의 회한?
류근: 저는 끝까지 복수 생각이 나요.
이윤석: 4월 7일을 제가 지금 보니까 보건의 날이에요. 의료 봉사왔네.
류근: 서재필 박사가 한국에 돌아온 날을 기념해서 세계 보건의 날이 지정됐다는 거예요?
심용환: 4월 7일은 신문의 날입니다.
최원정: 4월 7일이 우리나라 신문의 날이에요? 아!
심용환: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간신문인 獨立新聞이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된 걸 기념하기 위해서 신문의 날로 하게 됐구요. 우리가 방금 얘기했던 徐載弼이 獨立新聞을 창간한 사람입니다. 그가 와서 정부에 건의를 합니다. 창간준비금 그 당시 돈 3천원, 가옥구입비 1400원 이렇게 제공 받기로 약속도 하고 일본에다 인쇄기계를 주문합니다. 貞洞 쪽에 있었던 정부소유의 가옥을 얻어서 신문지국을 설치하게 되면서 신문발행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된 거죠.
이윤석: 돌아와서 병원을 개원했다가 아니고 신문을 창간했다고 하니까 조금 뭔가 이상하긴 해요.
류근: 이 분이 미국에 살면서 매스컴의 영향력을 봤을 것 아네요. 그러니까 조선에도 제대로 된 신문이 필요하다 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애요. 정말 開化派의 원조다운 거죠.
이윤석: 하긴 乙未事變 때 일본의 언론 플레이를 저희가 봤잖아요. 그때 일본이 명성황후를 죽여놓고 마치 실종된 것처럼 날조를 하고 또 흥성대원군이 직접 개인이 한 것처럼 왜곡을 하고, 이런 걸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분노를 했습니까? 아마도 徐載弼도 똑같이 분노를 했을 것 같고, 고종도 이런 사실을 아니까 창간 하는데 또 돈을 대기도 하고 그런 것 같네요.
이익주: 충분히 가능한 추정입니다. 서재필은 한국인 이지만 국적이 미국이에요. 이점 때문에 俄館播遷 이후에 그 세력을 키우고 있었던 러시아가 함부로 못할 것이다. 눈치 보지않고 기사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서재필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죠.
최원정: 언론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그 정신은 진짜 마음에 듭니다.
김종준: 이게 바로 지금 이야기 된 1896년 4월 7일에 발행한 독립신문의 창간호입니다. 보시면 1면부터 3면까지는 논설, 관보, 잡보, 외국통신, 광고 등을 실었고, 4면은 인디펜던트 라고 해서 국내소식을 영문으로 작성했습니다.
류근: 그 시대에 영문기사까지 낸 걸 보니까 외국인들 한테도 국내소식을 제대로 알리겠다는 의지가 투철한 거예요. 화목토, 주3회, 발행 이후 1898년 7월 1일부터 일간지로 변경이 됩니다.
이윤석: (독립신문 창간호를 보면서) 창간일 4월 7일 맞네요! 그리고 보니까 띄워쓰기가 된 거 같애요. 옛날 한글을 보면 붙어써져 가지고 어려웠는데 많은 백성들 보기 편하게 하려고 아마 이렇게 띄워쓰기 한게 아닌가.
이익주: 한글신문을 내는데 말하자면 교정작업이죠. 이 교정작업을 한 분이 바로 한글학자 周時經 선생입니다. 이제 한글신문을 내게 되니까 표기법을 통일을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이것을 같이 의논하고 연구해 가면서 요즘 우리의 문법이 점차 정리되어 나가는데, 이때 독립신문에서 띄워쓰기의 원칙을 세워 나가는 거죠.
최원정: 우리가 참 많은 빚을 세종대왕에게 지고 있지만 또 역시 周時經 선생한테도 감사해야 돼요. 띄워쓰기 안했으면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쉽게 글을 이해하겠어요.
이윤석: 아주 중요하죠. 커플들은 “사랑해 보고싶어” 띄워쓰기, 쏠로들은 붙어있어요 “사랑 해보고싶어”. 띄워쓰기에 있어서 뜻이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周時經 선생님 덕분에 커플이 가능한 거예요.
김종준: 기존의 신문은 순한문으로 간행되었던 반면에 이 독립신문은 한글로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신문이었구요. 당시 인기가 폭발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거리를 돌아다니는가 하면 각 점포마다 신문을 펴놓고 읽는 광경이 펼쳐졌다 라고 전해집니다.
류근: 우리도 예전에 읽든 못읽든 타임지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나 배운 사람이거든 하면서 폼 잡고 다닌 적이 예전에 있었습니다. 그 시대엔 獨立新聞을 옆구리에 끼고 나 신문 보는 사람이거든 했다는 말입니다.
최원정: 여성들도 이러고 폼 잡고 있으면 정말 신여성이에요.
심용환: 실제로 신문이 나오자 마자 인기가 좋았어요. 기록에 따르면 창간호에서 2천부를 발행했는데 즉각 3천부로 발행을 늘려야 했다 라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고요.
류근: 마치 류근 시집같네요.
일동 웃음: 심의준수-시집 PPL(Product Placement-간접-협찬광고) 안됩니다!
심용환: 판매했던 기록도 있는데 한 장에 한 푼 신문이오. 읽고나면 창호지도 되고 밥상 덮는 상보도 되는 신문 한 장에 한 푼이오 하는 이런 일화가 기록된 게 있구요. 그리고 일단 신문을 사면 혼자 보는 게 아니라 돌려가며 보는 문화가 있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최대 200명 까지 돌려본 사례까지 있으니까 속된 말로 신문이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읽었던 거죠.
류근: 요즘도 동영상 회원수 6만이면 광고수익 꽤 짭짤 한데, 그런데 수익이 엄청났겠어요.
심용환: 이걸 보면 광고를 많이 실린 걸 볼 수 있습니다. 한 부에 광고가 평균 11개 정도 실렸는데 실제 독립신문에 실렸던 광고들을 확대해서 가져와 봤습니다.
최원정: 제가 이걸 먼저 읽어볼까요? 자행거가 나왔는데 값이 저렴하오니 없어지기 전에 많이 사가시기 바라오며 또 우리 점포에 류성기와 전기로 치는 종과 또 여러가지 좋은 물건이 많이 있사오니 처음 군자는 많이 찾아와 사가시기를 바라나이다.
류근: 자행거는 자전거, 류성기는 분명히 축음기일 것 같애요.
최원정: 전기로 치는 종은?
이윤석: 자명종 같은거 아닐까요?
이익주: 초인종
최원정: 초인종이예요?
류근: 그 시대에도 초인종이 있었다구요?
이익주: 벨을 누르면 울잖아요.
최원정: 보통 이리 오너라~ 해야 되는데, 그게 없어지는 거예요?
이윤석: 쳠 군쟈? 처음에 오는 손님? 얼리 어답터?
심용환: 쳠이 여러 첨 僉+君子는 신사=그러니까 신사 여러분~
최원정: 레이디즈 젠틀맨,
이윤석: 그리고 저기서 갑이 렴 하오니 ->값이 저렴하오니 없어지기 전에 많이 사가심을 바라오며 이거 아니에요. 이게 사실 매진임박 주문폭주 이 얘기인데,
최원정: 장사할 줄 아시는데---,
이윤석& 류근: 저게 원조네요.
이익주: 저도 하나 읽어 볼까요? 우리 가가에서 제죠하야 파난 OOO 히이로 난 여러분의 거록 하신 은혜 만분의 일을 갑고져 하나 히이로 오십개를 노흔 큰 함 속에 필년 우개한 샹품 하나흘 노흘 거시니 원컨대 대한 여러분게셔 일젼보다 갑절이나 사가심을 쳔만이나 바라옵나이다.
이윤석: 사줘야 될 것 같아요~
이익주: 그런데 중요한 건 뭘 사달라는 걸까요?
최원정: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이 정도면,
류근: 거룩하신 은혜! 웬지 성경 같은데, 그런데 오십개가 또 걸려요.
최원정: 성냥, 왜 전에 성냥이 굉장히 인기상품이었다구
류근: 거룩하신 은혜? 성냥?
이윤석: 오십개를 주고 하나를 더 준다. 주류 소주 50개를 사면 양주 한병 드려요.
최원정: 소주 50병? 밑지는 장사 아닌가요?
이윤석: 그런 느낌 아닐까요?
이익주: 아무튼 그 물건의 이름은 히이로 입니다.
이윤석: 히이로, 술과 함께 희로애락을~
이익주: 한번 열어볼까요? 권년초, 얇은 종이로 말아놓은 담배, 궐련 그래서 여기 보면 이렇게 그림도 그려놨어요. 히이로 담배! 50개를 사면 하나를 더 준다는 끼워팔기가 지금 여기 등장해요.
최원정: 지금은 담배가 굉장히 천덕꾸러기 인데 이때는 정말 귀한 대접을 받았군요.
이윤석: 요즘은 금연광고를 보면은 흡연도 갑질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런데 대한제국 시대는 흡연은 갑님이에요.
류근: 이런 것도 있어요. 외국 부인에 털노짠 이불을 일허스니 누구든지 졍직한 사람이 이거술 엇엇거든 이거살 가지고 독립신문 샤로 오면 샹금을 만히 탈티이오—이게 지금 외국 부인의 털로 짠 이불을 분실했어요.
이윤석: 이불을 잃어버렸다, 아.
류근: 얼마나 인간적인 광고에요.
최원정: 워낙 구독열이 좋은 신문이다 보니까 이렇게 하면 찾을 수 있죠.
이윤석: 가져간 사람이 부담스럽지 않게---정직한 이가 가지고 있거든, 마음을 위로해 주고 상금도 줄 거야.
최원정: 이게 사실 보는 재미가 정말 쏠쏠하네요. 독립신문이 아기자기 하게,
이윤석: 외국 사람이 가져갔을까봐 영어까지 냈어요.
심용환: 독자적으로 광고영업도 하고 광고칸도 만들어 놓고 외국기업 한테도 받아들이고 하는 건 독립신문이 처음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심용환: 독일의 무역상사 세창양행은 600여회를 독립신문에 광고했을 정도니까 어떤 최초 영업을 보여주는 모델이기도 하고요.
김종준: 어쨌든 이런 광고들 덕분에 신문물이 빠른 속도로 전파될 수 있었죠. 또한 독립신문은 전근대적인 사회제도를 비판하고 근대적인 시민의식을 소개해서 민중들을 계몽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조선에 체류하고 있던 한 외국인은 독립신문이 국민을 계몽하는데 큰 효과를 발휘하여 여론을 불러 일으켰다고 평가했습니다.
최원정: 정말 민중의 삶과 생활을 담은 민중을 이끌 줄 아는 진정한 대중 매체 매스미디어 역할을 했네요.
김종준: 獨立新聞을 통해 민중의식이 날로 성장하자 徐載弼은 이러한 여론을 반영한 단체를 만들어야 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정동 구락부를 주축으로 해서 자주독립과 자유민권을 목표로 하는 근대적인 정치집단을 만들게 돼죠. 그것이 바로 獨立協會입니다. (정동구락부-1890년대 서울 정동에 있던 외국인과 조선 개화파 중심의 사교모임).
류근: 우리는 독립신문을 독립협회의 기관지로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보니까 신문이 먼저고 협회는 나중이네요. 그러면 그 회원은 어떤 사람들이었어요?
심용환: 獨立協會의 초창기 성격은 관변단체적인 성격이 강해요. 예를 들면 미국인이었던 徐載弼이 고문을 맡았구요. 그리고 당시 정부측의 고위관료였던 안경수가 초대회장,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여태까지 많이 봐왔던 이완용이 2대 회장을 맡게 됩니다.
이윤석: 그 이완용이 우리가 잘 아는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입니까?
심용환: 네, 네.
이윤석: 아니, 역사의 아이러니네요.
최원정: 이완용은 안끼는데가 없잖아요. 매주 나와요. 역사저널 그날 근대사 보빙사, 을미사변, 독립협회 편에 연속 3회에 나와요.
김종준: 당시 정부 관료였던 이완용이 회장직을 맡긴 맡는데 잠시 맡았던 것이고요. 회원들 중에는 한글학자 周時經, 독립운동가 李商在, 도산 安昌浩 등 들으면 이름을 알만한 인물들이 많이 있었어요. 나중에는 각 지역까지 생겨서 회원수가 무려 4천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하게 돼죠.
최원정: 호응이 굉장했다고 하는데 그 비결이 뭔가요?
김종준: 獨立協會는 우선 獨立新聞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민중을 계몽하는데 앞장 섰습니다. 그 회원들은 민중을 계몽하기 위하여 매주 일요일 마다 오후 3시에 토론회를 열게 돼죠.
이윤석: 저만 해도 암기식 교육위주였어요. 토론은 거의 못해왔기 때문에 토론에 굉장히 취약합니다. 겁이나고, 그리고 내 생각이 달라서 누가 앞에서 얘기하면 아 그게 저 말이 맞아 이렇게 되어 버려요. 그런데 이게 120년전에 토론회를 열었다고 하니까 대단합니다. 엄청 빠르네요.
류근: 요즘과 같은 형식의 토론회 였을까요? 어떤 방식으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참 궁금합니다.
최원정: 그래서 특별히 독립협회 토론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독립협회 엄경철의 심야토론---------------
엄경철/KBS 취재주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심야토론입니다. 오늘은 120년전으로 돌아가 매주 일요일 독립관에서 열리는 독립협회 토론회 현장에 나와 있습니다.
시대를 고민하는 심야토론, 1897년 8월부터 대한제국 이대로 좋은가? 기획시리즈로 진행되고 있습니다--------독립협회 토론 주제-----------------
제1부 조선의 급선무는 인민의 교육이다를 시작으로,
제2부 대한의 인민들이 지금까지 부유하고 공명한 것은 각기 조상의 묏자리를 잘 써서이다,
제3부 도적을 막으려면 밤에 길가에 등불을 밝히는 것이 옳다 까지 찬반 토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과연 오늘은 어떤 주제로 토론이 펼쳐질지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윤석: 그때도 사회자가 있었을 거예요.
엄경철: 네, 오늘의 토론 패널부터 모시겠습니다. 이분들 덕분에 토론 열기가 날로 치솟고 있죠.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이숭만 독립협회 네분 자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는 방청인 약 5백분이 자리를 함께해 주셨는데요. 주제가 선언되면 여기 계신 네분이 찬반으로 나뉘어서 토론을 이어갑니다. 다른 회원과 방청인들도 토론에 참가해서 자신이 지지하는 쪽을 지원 연설하실 수 있고요. 토론 후의 승부는 참석한 후 회원과 방청인의 다수 의견에 따라서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주제 공개하겠습니다. 대한제국 일일종가 제4부 부녀를 교육하는 것이 의리상, 또한 경제상에 마땅하다. 지금부터 독립협회 찬반토론 시작하겠습니다.
일동: 웃음,
최원정: 토론의 현장, 오늘 독립협회 엄경철 앵커는 시대를 넘나드네요. 120년전에로 돌아가서 저렇게 진지하게 이야기 하네요.
류근: 살아 있네, 살아 있어.
최원정: 이게 너무 재밋어요. 밤에 등불을 켜는게 중요하다 부녀들도 교육을 해야한다. 이러고는 또한 찬반토론을 펼쳐요.
류근: 심지어는 말이죠 대한의 인민들이 지금까지 부요하고 공명한 것은 각기 조상 묏자리를 잘 써서이다. 이거 카더라 통신아닙니까? 카더라 통신이 나와야 되는건데,
김종준: 실제 獨立協會 토론회에서 나온 주제들입니다. 당시 토론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부문들에 걸쳐서 긴급한 문제를 주제로 다루었죠. 총3차례 열리게 되는데 주로 조선의 옛 풍습을 비판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주제나 大韓帝國의 자주 독립 등을 주장하는 그런 주제를 다루는 토론이었습니다.
심용환: 어떤 특정한 주제가 크게 화제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요. 기생 문제하고 첩제도를 다루고있었던 여성 속박과 관련된 사회제도를 주제로 해서 토론을 했는데 이게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당시 실제 기생들이 이 토론회에 너무 감동을 받아가지고 獨立協會에다 후원금, 성금을 보내왔었다는 사례가 있었구요.
류근: 그 시대에도 페미니즘 주제를 다뤘다는 거 아닙니까.
심용환: 모여서 토론을 하니까 거기서 깨이고 집단적 어떤 연대감도 생기고 정치의식도 올라가는효과도 컸을 것 같애요.
이윤석: 지금 방청인이 아까 오백명이라고 한 것은 실제 오백명 이었을까요?
김종준: 네, 기록에 나옵니다.
이윤석: 실제로 오백명이요? 독립협회 토론회에서죠? 그렇게 많이요?
심용환: 매주 했는데 인기도 정말 좋았고 끝나고 나면 승패도 정하고 그럴 정도로 아주 인기가 좋았답니다.
류근: 그걸 벤치마킹한게 지금 심야토론인데요.
이윤석: 요즘도 토론회 스타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독립협회가 가장 핫한 거 같고 우리가 아는 근현대사의 중요한 인물들이 속속 출현해요.
이익주: 이를테면 대중정치인이 이제 탄생하는 거죠. 토론을 지켜보면서 지켜본 사람들의 의식이 날로 높아지게 되는 겁니다. 이런 고무적인 발전이 大韓帝國을 근대국가로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도 하게 돼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近代化라고 하는 것이 우리만 잘 한다고 되는게 아니라 계속 大韓帝國을 침탈할려고 하는 외세와 맞서야 되는 이런 또 하나의 문제가 있잖아요. 그래서 역시 외국과의 문제, 여기에서 이제 벽에 부딪히는 운명에 처합니다.
최원정: 자, 그렇다면 대한제국과 열강들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대한제국 뉴스 전해 주시죠.
-----------------이상협 특파원-----------------
최근 러시아가 부산 앞 바다에 위치한 절영도에 해군 석탄 저장고인 저탄소를 짓겠다며 조차, 즉 절영도를 내어달라고 요구하여 파문이 일고 있습니다. 부산 절영도는 앞으로 후손들이 영도라고 부르며 영도다리를 세운 바로 그 곳인데요. 어쨌든 러시아는 지난 俄館播遷 이후에 광산채굴권, 삼림벌채권, 저탄소 설치 등 이미 각종 이권을 챙겨간 상황입니다. 또한 취재 결과 1897년 현재까지 미국은 금광채굴권과 철도부설권, 프랑스는 철도부설권, 일본은 연안어획권과 전신 부설권과 철도부설권 등 각종 이권을 침탈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일각에서는 이러다가 나라까지 통째로 넘겨주는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류근: 근데 근대사에서 각종 개발권, 이권 침탈권이라고 배웠는데 왜 이권 침탈이 된다는 거죠?
이상협: 이와 관련해서도 자세한 이야기 들어보겠습니다. 김종준 교수님!
김종준: 광산채굴권과 삼림벌채권이라고 하는 것은 광산을 개발하고 나무를 베어갈 수 있는 권리, 즉 자원을 개발하고 그에 따른 이득을 가져갈 수 있는 권리를 뜻합니다. 미국의 경우, 운산금광에서 40여년 동안 약 9백만톤을 채굴해서 순수익만 1500만불을 올렸다고 하죠. 170억원이 넘는 돈입니다. 금광채굴권을 통해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걷어갔던 것이죠.
이윤석: 거의 눈뜨고 코 베가는 그런 느낌이군요!
류근: 그러네, 이권 침탈이 분명하네.
이익주: 大韓帝國 정부한테는 나름의 계산이 있었어요. 우리 자원이 많은데 기술이 우리한테 없잖아요. 그래서 외국 자본과 기술을 들여와서 우리의 자원을 개발한다는 생각을 한 거죠. 문제는 이제 협상의 기술, 또 운영의 경험, 이런게 없다 보니까 계속 당한 거예요.
최원정: 러시아가 절영도에 석탄저장고를 짓겠다는 건 뭐가 큰 문제인 건 가요?
김종준: 租借라고 하는 것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영토를 일정기간 동안 빌려서 통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국이 청나라로부터 租借한 곳이 바로 홍콩이었죠. 아시다시피 홍콩은 불과 이십년전만 해도 영국의 통치를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러시아가 석탄 저장고를 짓기 위해 租借하겠다는 것은 결국 땅을 내어 달라는 것과 같았죠.
심용환: 사실상 여기를 租借하면 부산 앞 바다가 러시아 바다가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러시아라는 나라는 북쪽에 있으니까 언제나 원하는게 不凍港, 사시사철 얼지않는 항구를 찾고 있었고, 사실 이때 절영도를 租借한다는 건 부산항을 얻기 위한 전단계가 아니냐 하는 걸 우리가 느낄 수 있는거죠.
이윤석: 뺏긴지 조차 모르게 뺏는 수법!
이상협: 민중들 조차 이를 몰랐을 리가 없죠~ 그런데 종로에서 독립협회 회원들과 수천명의 민중들이 모여서 러시아의 절영도 租借요구를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이상 대한제국 늬우스의 이상협이었습니다.
김종준: 獨立協會는 열강의 이권침탈 소식을 듣고 분노했습니다. 1898년 3월, 종로에서 獨立協會를 주축으로 해서 대규모 집회를 열게 돼죠. 이것이 바로 제1차 萬民共同會입니다. 만여명의 민중들이 모여서 러시아의 절영도 租借요구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요. 또한 러시아가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파견한다고 했는데 철수시키라고 요구하였고 또 한러은행을 폐쇄하라고 요구하게 돼죠.
류근: 대한제국의 백성들이 이렇게 급속도로 민중의식이 발전할 수 있다는 건 참 놀랍지 않습니까!
심용환: 이 집회를 주관하고 참석했었던 徐載弼의 감격이 남아있는 글이 인상적인데, “보시오! 내 말이 그대로 맞지 않았소. 우리 민족은 워낙 자질이 뛰어난 민족이기에 교육만 제대로 받으면 아무 민족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거라 했던 말이 그대로가 아니오.” 프라이드가 있었던 거죠. 그래서 현장에는 萬民共同會를 후원하는 손길들도 자연스럽게 많이 일어나게 되었구요.
최원정: 당시가 풍족했던 시대는 아닌데 어떤 사람들이 만민공동회를 후원했을까요?
----------------------(이윤석씨가 거지로 분장등장 연기) 한 푼만 주세요~한 푼만 주세요~ 뭐요? 이게 아니, (책상 위에) 독립협회 모금함 항아리 누가 남의 영업장에 밥 그릇을 들이미냐! 독립협회 모금함 항아리 여보시오! 댁들이 찾는 것이 여기 있는거 같은데 좀 와 보시오!?? 한 여자가 돈주머니를 항아리 넣고 나가다. 온종일 콩나물 판 돈을 왜? 오늘 애들 다 굶기겠네 군밤장수, 군밤 팔아서 버선하고 짚신 산다며! 성금을 항아리에 넣다. 계속되는 후원열기 과일장수가 밤새도록 시위하다가 배고픈 사람한테 전해주래? 근데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것 같애, 불안하다고-에잇! 나 배운 거지여! 내가 제대로 전해줄게 걱정하지 말어! 땔감 형님! 밤새도록 고생하는 사람들 추울텐데 땔감을 다 보태고 싶다고! (땔감기부). 형님도 추울텐데 다들 이렇게 한 마음인데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구먼-나도 은행에 가서 내 돈을 다 찾아오겠슈~ 돈이 구파발 지점이오. 내 전재산 1원! 이것을 나도 보태겠슈 내가 비록 걸인이지만 러시아 놈들한테 나라를 내줄 수 있는 꼴을 어찌 보고만 있겠소! 자, 다같이 외칩니다! 대한제국 만세! 난 이제 진짜 거지요 난 이래도 행동하는 거지, 행동거지요!
류근: 행동거지가 그게 뭐냐?!
최원정: 정말 평범한 여인네들로부터 모두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저는 그 행동거지를 응원합니다.
류근: 거리엔 행동거지! 아 진짜 감명받았어요
심용환: 방금 본 사연들이 연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獨立新聞에 실제로 실렸습니다. “농촌에서 서울에 콩나물을 팔러 왔던 한 농촌 부인은 콩나물 판 돈을 모두 獨立協會에 헌납하였다”-독립신문, 제3권, 제185호, 1898년 11월 9일자 <잡보(콩나물 장수의리)> “군밤 장수가 5전을 독립협회에 헌납하였다”-독립신문, 제3권, 제160호, 1898년 10월 10일자 <잡보> 참조
아까 보신 것 처럼 나무 장수들 있잖아요. 실제로 장작 수십바리를 가져와서 밤샘하는 땔감용으로 기부했고, 마지막으로 왔었던 걸인들도 가지고 있었던 1원씩 보조했다 라고 하니까 정말 한 마음으로 절실했던 순간이고 장면이었습니다.
최원정: 실제 상황이군요.
심용환: 네, 실제 상황입니다.
류근: 우리도 촛불집회 때 커피며, 음료를 나눠주면서 서로 힘내라고 응원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잖아요. 120년전에도 똑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고 하니까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이윤석: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는데 고종도 민중들의 시위에 당황했을 것 같애요.
김종준: 고종과 친러 보수파는 민중들의 시위압박에 못이겨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요구를 거부했고 러시아도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시켰으며 한러은행도 폐쇄했습니다.
이윤석: 완벽한 성공이네요.
김종준: 집회를 통해서 민중의 힘을 보여 주었던 것이죠. 그러자 獨立協會는 경축회를 열고 만세를 부르며 경축분위기에 휩쌓였습니다. 자, 이제 대한제국에도 희망이 보이는듯 했습니다.
-대한제국 광무2년(1898년) 9월 11일, 그날도 구수한 가비, 즉 커피향이 황실을 가득채웠다. 커피애호가였던 고종을 위해 정성스럽게 내린 커피가 준비됐는데 커피를 마시려던 고종, 커피에서 뭔가 이상한 냄새를 감지하고 손을 멈칫한다. 누군가 황제의 커피에 아편을 넣었던 것이다. 범행을 사주한 이는 한때 고종의 신임을 얻었던 역관 김홍륙이었다.
최원정: 황제를 독살하려고 한 거 잖아요? 김홍륙, 왜 이런 일을 벌인거죠?
이윤석: 그러게 설마 일본이 명성황후에 이어 고종까지 살해하려고 한 건 아니겠죠?
심용환: 김홍륙이라는 사람은 러시아 통역관 출신으로 俄館播遷 당시에 러시아와 조선이 가까워지니까 그 시점에 러시아를 등에 업고 고종의 신임을 받으면서 세도를 누렸던 사람입니다. 살펴보니까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알게 되고 고종이 내치게 되는데요. 흑산도로 유배를 가니까 본인이 잘못한 건 생각하지 않고 억울하고 화가 나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고종에게 앙심을 품고 사람들을 매수한 다음에 커피에다 아편을 탔던 거예요.
최원정: 조선이 러시아를 몰아낼려고 하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심용환: 개인적으로 이권을 누리다가 모양새가 잘못된 게 드러나니까 고종이 신임하면 안되니까하나 하나씩 내치게 된 케이스인데---,
류근: 배후에 러시아가 있었다는 뜻은 아니에요?
심용환: 네, 그래서 그 사건 당일날 고종이 혼자 마신게 아니고 세자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데 고종은 다행히 무사했고 오히려 세자는 커피를 마시고 상당히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었죠.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거죠.
류근: 아무리 유배를 가게 되었다고 해도 황제와 태자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것은 당시 법 감정상 3족이든 9족이든 멸문을 면치 못할 대역죄 아닙니까
김종준: 그렇기 한데 甲午改革 이후에 전근대적인 형벌은 폐기된 상황이었죠.
류근: 아, 그래요.
김종준: 그런데 보수파 정부는 이런 김홍륙을 극형으로 다스리자면서 이미 폐기된 노륙법, 즉 대역죄인의 자손들을 연좌해 사형에 처하는 법을 부활시킬려고 했습니다. 獨立協會는 이것이 부당한 옛법을 부활시키는 것이라며 비판했고 민중들은 보수파 정부를 규탄하며 2차 萬民共同會를 열었습니다.
이윤석: 김홍륙은 정말 죽을 죄를 졌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악법이 부활하는 것을 막기는 막아야겠네요.
류근: 그런데 고종의 입장에서는 이건 정말 대단한 극악무도한 죄인인데 백성들이 또 죄인의 편을 드는 형국이잖아요. 상당히 기분 나빴을 것 같은데요.
이윤석: 섭섭할 수 있죠.
이익주: 獨立協會나 민중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제 법을 고치고 악법을 없애고 근대국가로 나아가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이런 사건에 대해서 갑자기 폐지한 악법을 부활한다고 하는 것이 뭔가 뒷걸음질 친다고 하는 식으로 받아들여졌겠죠. 처벌하는 건 맞는데 그렇다고 해서 뒤로 돌아갈 수 없다. 새로 만든 법에 의해서 처벌을 해야 된다 라고 주장을 한 겁니다.
류근: 그러면 선진적 사고를 하고 있었네요.
심용환: 그리고 투쟁을 해요 萬民共同會는 보수파 대신을 파면하라고 요구하고 그런 과정 속에서 상소도 올리고 철야투쟁도 하고 밤에는 50명의 대표를 남긴 다음에 仁化門(경운궁의 옛정문)을 지키기도 하고 낮에는 민중대회를 열면서 결국은 이제 관철시켜내는 과정이 보여지니까 이 정도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나 정치의식이 바뀌었다 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민중의식이 성숙했다, 성장했다 라고 말해도 무방하겠죠.
김종준: 獨立協會는 萬民共同會가 열린 1898년을 전후로 해서 그 성격이 바뀌게 됩니다. 1898년 3월에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반대했던 萬民共同會와 10월초 보수파 정부의 퇴진을 요구했던 2차 만민공동회에 이어서 국정개혁을 요구하는 3차 만민공동회를 열게 됩니다.
만민공동회 일정
1차 1898년 3월 10, 12일-러시아 침략, 간섭규탄
2차 1898년 10월 1~12일-노륙법 및 연좌접 부활저지, 보수파 대신들 해임
3차 1898년 10월 28일~11월 2일-의회 설립요구, 국정개혁 추진
4차 1898년 11월 5일~12월 23일-체포된 독립협회 지도자 17명 석방요구, 보수파 정부 재수립규탄
류근: 의회라고 했습니까, 의회? 난 이거 처음 듣는 얘기인데, 120년전에 민중들이 의회를 열겠다는 거 잖아요. 오, 이거 정말 신선한 충격 아닙니까?
최원정: 그러니까 왕은 상징적으로 놔두고, 총리와 내각이 실질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것을 주겠다는 건데,
이윤석: 그러면, 대단하네요.
이익주: 立憲君主制! 헌법을 만들어서 그 헌법으로 군주의 권한을 제한한다. 의회가 중심이 되어서 국가를 다스리는 이런 정치제도가 만들어지죠 (立憲君主制-헌법을 통해 군주의 권한을 제한, 의회가 중심이 되어 국정을 논의하는 정치제도).
류근: 아무리 萬民共同會의 목소리가 크다고 해도 고종황제 위에 법이 존재하는 立憲君主制를 받아들인다? 저는 심각할 거 같은데요.
김종준: 고종의 생각은 달랐죠. 고종과 보수파는 법률이나 국가기관에도 구속되지 않고 절대권한을 행사하는 專制君主制를 원했습니다. 당시 독일이나 러시아가 바로 그런 형태의 專制君主制 였었죠. 고종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면 의회가 있을 경우에 어떠한 법을 수정한다 라고 하는 것이 매우 힘들지만 專制君主制 하에서 라면 군주의 명령 한마디로 그런 법을 쉽게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의회제 보다 이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죠.
이윤석: 그런데 독립협회와 민중들의 의식이 굉장히 지금 근대적으로 변화를 하고 있는데 상대적으로 고종도 그런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을 좀 들거든요.
김종준: 어쩌면 열강들이 大韓帝國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고종이 취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해 볼 수 가 있습니다. 고종은 나름 강력한 君主權을 바탕으로 해서 강한 國權을 꿈꿨던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이후의 역사를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결과적으로 진짜 강한 국권을 가진 나라들은 공통적으로 自由權, 民權, 人權에 바탕한 정치제도에서 가능했다는 점에서 그 당시로 돌아가 보아도 고종이 영국 같은 사례를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필 후진적인 러시아나 독일의 사례를 받아들릴려고 했다는 점은 그 당시 관점으로 보아도 시대에 역행하는 측면이 있죠.
최원정: 그런데 1차 때는 러시아 몰아내는 것에 민중의 힘을 발휘했었겠지만 이건 좀 어렵지 않았을까요?
심용환: 받아들여집니다. 받아들여졌구요. 獨立協會가 의회를 구성하는 법안인 中樞院 新官制 라는 걸 만들게 되고요 (中樞院 新官制-기존 중추원을 의회로 활용하는데 합의). 황제가 재가를 하고 그 해 (1898년) 11월 4일에 공포를 하게 되고 (의회설립안), 大韓帝國의 의회가 설립하게 되는, 단, 이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투표를 해서 뽑는게 아니고 고종이 25명 그리고 독립협회가 25명 추천을 해서 운영을 하고 운영범위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입법부 같은 것 보다는 이권문제 라든지 특정 주제에 한해서는 고종의 의지와 독립협회의 의지간에 타협의 산물 정도로 보시는 게 좋습니다.
이윤석: 독립협회가 법안을 올렸고 고종이 재가를 했어요. 그런데 그걸 뒤에서 민중들이 지지해 주고 밀어주었다는 거죠.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적인 정치제도가 생겨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으니까 상당히 뿌듯합니다.
이익주: 그 스스로의 힘이라는 것이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힘이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죠. 그런데도 의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한 그걸 선언한 바로 그날 가짜 뉴스가 나와요! 獨立協會가 立憲君主制를 주장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하는 공화정을 꿈꾼다 라는 소문이 도는 거예요. 그래서 고종이 이 소문을 빌미로 해서 약속을 번복하고 獨立協會 회원들을 체포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가짜 뉴스가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 라는 아주 중대한 사례입니다.
최원정: 아, 이걸 팩트 체크를 언론에서 했었어야 했는데요!
류근: 그러니까요!
심용환: 獨立協會가 반역을 꿈꿨다 라는 가짜 뉴스가 막 활개를 치게된 거구요. 결국은 당시 지도부에 187명 정도되는 사람들을 체포구금을 하고 내각도 단숨에 엎으면서 보수파 내각으로 바뀌게 되요. 그래서 민중들이 흥분할 수 밖에 없죠. 민중들이 광장으로 나옵니다. 제4차 萬民共同會(1898년 11월 중순~12월말)가 열리게 되고 여기에서 장작불을 피우면서 한달간 철야시위를 하게 되는 한국역사에 아주 보기드문 장면이 펼쳐지게 되는 거죠.
류근: 고종도 내심 立憲君主制를 원하지 않았던 거겠죠. 그러니까 알면서도 그냥 탄압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윤석: 대통령제 얘기가 막 나오고 그러니까 역모, 폐위 그런거 제일 무서워 하잖아요.
심용환: 그래서 결국은 최악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철야농성 17일째 되는 날 보부상을 중심으로 한 황국협회 회원 2천여명이 몽둥이로 무장한 채 집회장을 급습 합니다. 그 이후에는 병력까지 동원하여 결국은 저항하던 민중들을 갈기갈기 찢어내면서 獨立協會 활동 또 萬民共同會의 활동을 무산시켜 버리게 되고요. 여론의 주최였던 獨立新聞 자체도 폐간시켜 버리게 됩니다 (1899년 12월 4일).
최원정: 신문까지 폐간시켰어요? 저는 비로서 망국의 기운이 느껴지네요.
류근: 무력동원은 어디서 많이 보던 패턴 같지 않습니까. 우리가 고종을 아무리 좋게 평가하고 싶어도 이런 근시안적인 권력욕 때문에 편들어주기가 참 어렵습니다.
이익주: 이거는 누가 뭐라고 해도 고종이 책임져야할 문제예요. 민심을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그 강화된 왕권을 가지고 근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버려요.
심용환: 그 당시 尹致昊가 실패하고 나서 화가 나서 쓴 일기 구절이 있는데, “이것이 국왕이라니!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배신적인 어떤 비겁자 라도 대한의 대황제 보다 더 천박한 일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정부는 친일 노예 유기환과 친러 노비 조병식의 수중에 있다.” 절망감 이런 것이 당시 협회장의 일기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윤석: 그래도 그 당시 백성들이 어떤 민중의 힘을 경험해 보았잖아요. 그러니까 경험과 기억은 사라지지가 않고 희망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계속 살아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최원정: 그 광장의 기억은 결국은 나중에 3.1운동으로도 이어지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이들의 핏방울이 한 방울씩 다 있는 것 같애요. 촛불을 들었던 그 힘을 다시 한번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류근: 우리나라는 원래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들이 저지르면 백성들이 수습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獨立協會도 萬民共同會도 백성의 각성이 권력의 각성으로 이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었는데 그게 또 왜곡된 기득권에 의해서 좌절되고 말았다는 사실이 참 기가 막히기 짝이 없습니다.
이윤석: 저는 서재필이 갑신정변 때는 위로 부터의 개혁은 실패했다라는 걸 느끼고 민중이나 아래로부터 백성들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언론사도 열고 獨立協會도 열고 萬民共同會로 이어지잖아요. 그리고 의회설립 계획까지 가고 스스로 근대화가 가능하다 라는 증명이 되는 것 같애서 그 부분을 그래도 뿌듯하게 지켜 봤어요.
이익주: 우리가 개항한 것이 불과 이때부터 20년전 일이에요. 20년 만에 조선의 백성이 大韓帝國의 국민으로 거듭납니다. 이 사이에 중요한 사건이 身分制를 폐지한 거죠. 그래서 조선에서는 너와 내가 다르다 였지만 이제는 身分制가 폐지된 상태에서 우리가 하나의 국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그런 가운데 굉장히 빨리 민중의 정치의식이 성장도 해요. 결정적인 한 장면이 萬民共同會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고 이제는 민중이다 하는 이런 점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죠.
김종준: 고종도 사실은 조선 후기 이래 성장하고 있던 民의 이런 역동성을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한계도 있었죠. 고종은 民을 여전히 자신의 지시에 순응하는 존재로 여겼고 獨立協會는 民을 계몽과 정치적 동원의 대상으로 여긴 점은 한계 라고 생각합니다. 어찌보면 이후의 역사는 이렇게 동원의 대상이었던 民들이 스스로 정치적 주체가 되어 나가는 긴박한 과정이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심용환: 우리가 이제 이 역사 얘기를 해 나가는 데 있어서 고종, 명성왕후 이렇게 가다가 드디어 獨立協會로 가면서 자연스럽게 역사의 주인공이 특정한 권력자가 아닌 일반대중, 백성, 국민, 시민들에게로 왔다는 그 자체가 저는 되게 뿌듯하고 그런 면에서는 아무리 이 때가 결과적으로는 절망적이래도 과정 자체는 희망찬 발걸음이었다 라는 생각을 다시 해 보겠습니다.
최원정: 獨立協會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습니다만 오늘은 적어도 萬民共同會를 통해서 근대를 향해서 스스로 나아가려는 大韓帝國의 民衆들의 저력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6회, “독립신문,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그리고 입헌군주제”에서 정리).
①1884년 조선의 개화파는 변화와 개혁을 위해 甲申政變을 일으켰으나 淸의 무력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 개화파의 한 사람인 徐載弼은 역적으로 쫓기듯 혈혈단신 미국으로 망명한다. 조선을 떠난지 12년만에, 1895년 11월에 서재필은 미국 시민 필립 제이슨으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독립신문 창간, (KBS역사저널 그날 32회 참조). 개화파는 金玉均, 洪英植, 朴泳孝, 徐光範, 徐載弼,
② 徐載弼이 조선에서 처음 착수한 일은 조선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일본에서 신문인쇄기계를 구입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간신문 독립신문을 발행한다. 이때 독립이란 일제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원론적인 자주 독립이다. 왜냐면 이때까지는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지는 않했다. 을사늑약이 1905년, 경술국치가 1910년이다.
③ 徐載弼은 독립신문을 통해 민중의식이 날로 성장하자 여론을 반영한 단체를 만든다. 정동 구락부를 주축으로 자주독립과 자유민권을 목표로 근대적인 정치집단인 獨立協會를 1897년 7월 2일 만든다. 독립신문이 먼저고 나중에 독립협회다. 徐載弼은 獨立協會의 고문, 초대회장은 정부측 고위관료 안경수가, 이완용이 2대 회장, 회원 4천명 중에 주시경, 이상재, 안창호 등,
④ 獨立協會는 주로 토론을 통하여 조선의 옛 풍습을 비판하고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大韓帝國의 자주 독립 등을 주장하는 주제로 총3회 토론을 벌였고 특정한 주제로 기생 문제와 첩제도로 여성 속박과 관련된 사회제도를 주제로 토론을 했는데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토론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부문에 걸쳐서 긴급한 문제를 주제로 다루었다.
⑤ 獨立協會는 열강의 이권침탈 소식을 듣고, 1898년 3월, 종로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게 됐다. 이것이 제1차 萬民共同會, 만여명의 민중들이 모여서 러시아의 절영도 租借요구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러시아가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파견한다고 했는데 철수시키라고 요구하였고, 또 한러은행을 폐쇄하라고 요구했다. 이로 인하여 서재필은 1898년 5월 14일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⑥ 1898년 10월 11일, 러시아 통역관 김홍륙이 고종을 독살하려다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 유배가게 되는데 고종과 보수파는 김홍륙을 극형으로 다스리려고 이미 폐기된 노륙법, 즉 대역죄인의 자손들을 연좌해 사형에 처하는 법을 부활시킬려고 했다. 獨立協會는 부당한 옛법을 부활시키는 것을 비판했고, 민중들은 보수파 정부를 규탄하며 2차 萬民共同會를 개최,
⑦ 1898년 10월 28일 3차 萬民共同會부터 獨立協會는 정치성을 나타낸다. 고종에게 입헌군주제를 요구한다. 민중의 정치의식이 급속도로 높아졌다. 고종에게 심각한 사건이다. 1898년 11월 4일에 고종은 전제군주제를 원하지만 독립협회의 의회 설립안을 재가한다. 기존 50명 중추원을 고종이 25명, 독립협회가 25명 추천해서 구성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⑧ 그러나 고종은 獨立協會가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하는 공화정을 꿈꾼다는 가짜 소문을 빌미로, 의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그날, 약속을 번복하고 독립협회 지도자를 체포구금하고 내각도 보수파 내각으로 바꾼다, 1898년 11월 중순부터, 민중들은 체포된 독립협회 지도자 석방과 보수파 정부 재수립 규탄을 하며 광장에서 한 달간 철야 시위한 게 제4차 만민공동회다.
⑨ 고종은 철야농성 17일째 되는 날 보부상을 중심으로 한 황국협회 회원 2천여명을 동원하여 몽둥이로 무장한 채 집회장을 급습한다. 병력까지 동원하여 저항하던 민중들을 갈기갈기 찢어내면서 獨立協會 활동 과 萬民共同會 활동을 무산시켜 버리고, 1899년 12월 4일 독립신문 자체도 폐간시킨다. 고종의 배신과 근시안적인 정치적인 결정에 獨立協會의 지도자들은 크게 실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