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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음식 | 옷 |
소재(제재) | 요리감 | 옷감 |
구성 | 양의 조절, 취사 순서결정, 보조 요리감의 결정 | 본뜨기, 시치기 |
문장 | 취사 | 바느질 |
주제(중심사상) | 맛 내기 | 모양 내기 |
퇴고(정리) | 맛보기 | 다듬기 |
이때 선택되는 재료는 글의 소재요. 맛과 멋은 바로 주제다. 낙엽 한 잎을 보고도 수십 편의 각기 색다른 주제로 글을 쓴다. 특히 제재를 자기화하고 의미화하는 창작수필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상(소재)은 늘 객관적이지만, 그를 작품화하는 과정에서는 개성적이고 경험적이고 때로 심경적이다.
소재의 자기화, 즉 소재에서의 동화나 관조, 의미화의 과정이 구성 단계다.
예컨대, 며칠째 내린 눈이 뜰에 가득 쌓인 날, 먹이를 찾다 지친 참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애원하듯 개밥바라기를 한다면 이는 소재며 현실의 결과다.
① 마당 한 귀퉁이를 쓸고 한 줌 쌀을 뿌려줄 수도 있고
② 산 너머 양지쪽엔 눈 녹은 사래 긴 밭이 있으니, 그리로 날아가라 밀어 낼 수도 있고
③ 쫓아도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올 줄밖에 모르는 텃새이니 가엾지만 옛날 논밭이었던 여기 보금자리를 그리며 개밥바라기나 하라고 조용히 방문을 닫을 수도 있다. ①②③은 수필가의 제재에 동화함으로 자기화 한 주제, 생각해낸 결상, 즉 결구일 수 있다. 그래서 수필 구성은 제제(소재)로부터 주제에 이르는 과정의 쳬계화 내지는 질서화라 할 수 있다. 원활한 질서화를 위해 수필가는 우선 연상작용의 산물인 ①②③ 중에서 시점을 고정시켜 결상이 모아지면 버릴 것은 버리고(헤쳐) 취할 것은 취해(다시 모여) 주제에 걸맞게 재조정, 재정렬 시켜야 한다. 이를테면 ‘헤쳐’ ‘다시 모여’의 구성방법이다.
구성의 각도
꽃을 보려고 창문을 열었다
꽃을 보다가 창문을 닫았다
구도1
① 거지-눈 쌓인 날 개밥바라기하는 참새를 의인화
② 소심 인간상- 남향받이 밭 먹이로 가라는 생각
③ 선심-먹이를 주리라, 마당 한 귀퉁이에 눈을 ‘쓸고
구도2
① 걸객-비록 개밥바라기하는 처지지만 와그르르 몰려 들어 소란을 피우지 않고 예절 발라 거지를 걸객
② 수구정신 산 넘지 않음은 소심해서가 아니라 탯자리를 떠나지 않으려는 본능적 고집이니 수구정신으로 관조(참새는 후조가 아니라 텃새임을 강조)-명리를 좇아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인간사에 견주어본다. -참새의 탯자리는 본래 논밭이었음을 확인시킨다. 월조의 사향思을 텃새의 수구정신으로 접맥
③ 실향의 아픔-먹이를 주리라, 마당 한 귀퉁이에 눈을 ‘쓸고 대신 오늘만안 눈이 ’쌓여 오갈 데 없는 오늘만은 재발 바닥까지 싹싹 핥아 빈그릇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산을 높이기 위해 반대로 산의 골짜기를 더 깊이 파는 역리적 구성법. 나무의 그늘을 효과적으로 취하기 위해 나무 대신 집의 위치를 과감하게 옮길 수도 있다-참새의 옛 낙원이 시멘트로 페허화 됐음을 실증-잔디밭을 후비거나 나무의 볏짚옷을 파고드는 참새의 본능적인 몸짓을 실향에어ㅣ 아픔으로 상징 처리-실향의 아픔(주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먹이를 주지 않고 계속 개밥바라기를 시킨다.-눈이 계속 내리고 있음을 쓴다.
<구성에는 신선미가 있어야 한다>
짧든 길든 신선미, 즉 변화가 있어야 한다 너무 안이하거나 평이하게 흐르면 독자의 흥미나 긴장감을 놓치기 쉽다. 그래서 문단과 문단 사이에 적당한 명암, 적당한 기복, 적당한 압축점을 두어 감동을 주어야 한다.
지적인 내용에는 명언, 경구가 효과적, 정적 글에는 문단의장이거나 희현사명어ㅣ 신선하고 함ㄹ축적, 상징적 문장 삽입이 효과적
<걸객>-오창익
우리 집엔 열이 넘는 걸객이 있다. 하지만, 그 걸객은 밥을 빌어먹는 사람이 아니라 참새다. 개밥 찌꺼기를 얻어먹으며 건건히 목숨을 이어가는 참새 가족이다.
그런데 그 참새 가족에겐 개에게서 볼 수 있는 충은 없다. 그에 못지않은 예가 있어 늘 눈길을 끈다. 비록 개가 먿다 남긴 찌꺼기를 빌어먹기는 하나 결코 와그르르 몰려들어 소란을 피우는 뭊빌서는 없다. 서로 내차지다. 낵 먼저다 물어뜯고 싸우는 아귀다툼도 없다. 까만 부리에 다갈색 몸털이 하나같아서, 어느 쪽이 어미고 새끼인지 분간키는 어려우나, 반반씩, 때로는 서너 패로 나뉘어 차례대로 ㅈ날아든다. 얻어는 먹지만, 얻어먹는 자세만은 깍듯하다. 질서정연하다.
할애비새는 상지에 앉고 아비 새는 중지에, 아들 새는 말지에 앉는다는 3지례가 까마귀나 까치에게 있다더니, 우리 집 참새가족에게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개밥그릇에 먼저 들어가 몇ㄹ 번 부리질을 한 패는 으레 다음 조를 위해 미련 없이 자리를 양보한다. 잔디밭으로 옮겨가 부리를 씻는가 하면, 감나무 가지에 앉아 한 가족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언제 보아도 단정한 매무세, 예절바른 몸짓이다.
그런 걸 보면, 그 옛날, 참새의 조선祖先은 꽤나 지체가 높았던 족속이 아니었나하는 생각도 든다. 해서 나는 비록 개밥을 빌어먹는 처지이나 염치불구 덤비는 떼거지나 상거지가 안지깅데, 그런대로 의관을 정제한, 몰락한 양반의 후예다눙 체모이기에 그를 일러 감힌 걸인ㅇ디 아닌 걸객이라 부른다.
참새는 후조가 아니라 유조다. 이름하여 텃새라 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제 것을 제 것대로, 예 것을 옛것대로 지키려는, 조금은 맹맹하고 답답은 하지만, 수구나 온고에의 고집이 있다.
누군가를 찾아 봄내 여름내 피울음 울던 접동새도, 인가에 끼어 들어 살뜰한 정붙이를 해주던 제비도 때가 되면 나 몰라라 다들 가버리지만, 참새는 그러지를 못한다.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배꼽 떨어진 제 고장을 떠나지 않는다.
어쩌다 하늘 높이 날다가, 산 너머엔 사래긴 밭이 있고, 강 건너엔 너른 벌판이 손짓하고 있있음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그 산과 그 강을 결코 넘지 않는다. 금을 그어 제 하늘의 경계를 표시라도 하듯 몇 바퀴 돌다가는 결곡 제 마을, 제 탯자리로 내려앉고 만다.
더욱인자 주객이 전도되어, 시멘트로 논과 밭을 매대기질 한 인간들에 의해 삶터는 유린되고, 그 작은 몸집 하나 의지할 데 없는 무주택자, 몰락한 걸객의 신세가 되었음에도.....
4,5십년 전,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까지도 없다. 내가 사는 이곳은 경성부가 아닌 경기도 은평구가 아닌 은평면 산신사리로서, 게 잡고 붕어 낚던 곳이다. 풀어헤친 낟가리 같은 초가집이 산 밑으로 드문드문 자리했을 뿐 논과 밭이 질펀한 세상, 그들만의 천국이었거니.
슬픈 일이다 주리거나 굶거나 간에 제 고장을 버리지도 못하고, 제 한 몸 사그라져 죽을 때에도 배꼽 떨어진 제 땅에 도로 묻히는 운명적인 텃새, 그래도 그는 주어진 그 운명을 단 한 번도 거역하지 않는다.
호마는 의북풍하고, 월조는 소남지하고, 여우는 수구초심을 한다더니, 참새야 말로 수구首丘인가 수구守舊인가? 그 마음 탯자리를 지키려는 그 고집은 결코 그들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편하게, 좀 더 넉넉하게들 살겠다고 제 나라 제 고향을 헌 신짝처럼 버리고 떠나는 우리네에 비하면, 분명 그들은, 그들이 먼 조선은 보다 지체가 높았던 족속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인가, 몰락한 종족의 후예들에게 넌 도시 허욕이란 게 없다. 분수 넘치게 남의 것을 탐하지도 않고, 눈 가리고, 눈 속이고 남의 것을 훔치지도 않는다.
간혹, 사람이 심어놓은 곡식들을 조금씩은 축을 낸다 하지만, 그건 애초부터 하늘이 정한 그들의 몫이었던 것, 고대 이스라엘 민족이 ‘열의 하나’를 남겨두고 밀밭걸이를 했던 것이나 우리 선대들이 까치, 까마귀밥이라 하여 가지 끝의 감이나 논밭의 이삭들을 줍지 않고 그냥 두었던 게 그 좋은 예다.
어쨌거나 참새난, 우리집의 열이나 넘는 걸객들은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다. 아침 한나절 개밥바리기를 하다가도, 그 밥주인이 뱝알 하나를 남기지 않고 그릇 바닥을 싹싹 핥아도 그저 그것으로 그만이다. 섭섭하다 미련을 두고 머뭇거리지도 않는다. 포로롱 이웃 쌀가게나 쓰렉 적환장 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하지만 거기서도 먹거리가 시원치 않는지 번번히 내집 마당으로 되돌아오곤 한다. 와서, 잔디밭에 앉거나 정원수의 겨울옷으로 입힌 볏짚가리에 앉아 하릴없이 부리질을 한다 볏집을 후벼대기만 한다.
그러나 지난 여름, 밀거름만을 축낸다하여 씨가 여물기도 전에 싹싹 밀어버린 잔디밭에, 더욱이나 탈곡기에 요리조리 둘러가며 깡그리 털어낸 볏집 속에 저들의 먹이가 남아있을 턱이 없다. 그러나 저들은 파고덜기만 하다. 왜일까? 먹거리도 없는데 왜 거기서, 왜 그짓을 매일처럼 되풀이하는 것일까?
겨울옷을 죄다 풀어 헤치면 나무는 동상을 입는다. 해서, 나는 그것을 말리려고 다가서려 한다. 하지만 곧 발을 멈춘다. 그 짓은 그 부리짓은 단순한 놀이나 먹이 찾기만이 아닌, 흡사 엄마 젖무덤에 코를 박고 잠들려는 젖먹이의 몸짓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저들 나름의 평화요, 신뢰요, 무조건의 위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랴. 거긴 이미 말라붙은 젖가슴, 이미 폐허화 된 그들의 천국인 것을.
대한을 앞둔 날씨가 그물그물 하더니 그예 밥사이에 눈이 내렸다. 내린 정도가 아니라 발목이 묻히도록 많이 쌓였다. 지붕에도 눈, 나무에도 눈, 저들의 놀이터이자 고향이기도 했던 잔디밭에도 눈 천지다. 어디서들 추운 밤을 보냈을까?
이른 새벽이라 아직은 눈에 띄질 않으나 포롱, 포로롱 마구에 날아 들 것이다. 날아들어 어느 나뭇가지에서건 마음 조이며 예의 그 개밥바라가리를 할 것이다. 오늘만은, 눈이 쌓여 오갈 데가 없는, 오늘만은 제발 바닥까지 싹싹 핥아 빈 그릇을 내놓는 일만은 없어주기를 빌면서 빌면서…….
눈은 쌀가게 앞에도 쓰레기 적환장에도 발목이 묻히도록 쌓여있을 테니까.
<서두 쓰기>
서두는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첫인상이고 작가 입장에서는 일기예보다.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써지는 것이 수필이라면 서두야 말로 ‘그 고치에 달라붙어 고착되어 있는 실끝을 찾는 일’일 것이다. 안병욱의 수필 <인생은 예술처럼>에서 ‘사랑은 하나다’ 라든가, 피천득의 수필 <순례>에서 “문학은 금싸라기를 고르듯이 선택된 생활경험의 표현이다.”라는 문장이 중심사상의 핵을 앞세운 예의 서두다.
-나무는 덕을 가졌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 안다-<나무> 이양하
-육상으로 수천리를 돌아온 시절의 선물, 송이의 향기가 한꺼번에 가을을 실어왔다<청포도의 사상> 이효석
<제목 달기 에피소드>
-세익스피어가 작품을 완성해놓고도 제목을 달지 못해 고민하다가 식당에서 먹고 있던 햄과 옴렛에서 그 결정적 명작의 명표제를 얻어 ‘옴렛’에서 옴을 빼고 마침내 ‘햄’과 ‘렛’을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표제인 관계로 대상을 관조하고 그를 작가으 ㅣ가치관이나 인생관으로 자기화 하고 의미화하는 능력 없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때 ㄴ증력은 작자의 개성이나 독창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미괄식 문단(귀납식)
펼친 그물을 끌어당겨 한 곳의 정점으로 추를 모으는 원리와 같은 것으로 귀납적인 구성이다.
*중괄식 문단
미괄식고 두괄식의 복합형으로, 전반부는 귀잡적이고 후반부는 연역적인 구성법이다 잔후반의 연결성과 통일성이 중요하다.
*양괄식 문단
마무리 문장과 앞에 나선 소주제문이 표현형식으론 서로 다른 두괄식에서처럼 보이나 내용상으론 맥을 같이 하는 동일개념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가장 가련한 것이 일하고도 먹지 못하는 것이요. 그 대신 가장 가증한 것은 놀고도 잘 먹는 것이다. 인간의 온갖 불평과 눈물의 반이상이 여기에 연유함이란 해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먹을 만큼 살게 되면 지난날의 가난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보다 가난은 결코 환영할 것이 못되나, 빨리 잊을수록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가한한 날의 축복>김 운
-릴케가 로댕을 말한 것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로댕은 자기의 명성을 얻기 위해 고독하였다. 이윽고 그가 얻은 명성은 아마도 더욱 그를 고독하게 하였다. 명성이라는 것은 결국 새로운 이름, 주위에 모여든 모든 오해의 총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명성> 한무숙
-내가 바빌종에 찾아가서 그곳의 자연을 바라보고, 아직도 소박한 그 고장 농민들을 만나보았을 때 밀레럴 사모함이 간절했다. 인류의 가슴에 사랑과 진실이 있는 한, 자연과 전원이 있는 한 밀레의 생명은 영광 속에 계속할 것이다. 어찌 밀레 뿐이랴. 인생의 모든 광영은 언제나 가시밭에서 자란다.ㅡ<씨 뿌리는 사람들>,유달영
-그후 부르그람의 암놈 죽은 지 보름 가량이 지났다. 한국팀이 홈런을 날려 이기고 있을 때였다. 네 살짜리 꼬마가 들어오더니 “아빠, 이리와 봐!”하고 손을 이끄는 것이다 “무언데 말해 봐!” 내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꼬마는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간다. “아빠, 저 나비 봐. 죽은 부르그람이 왔잖아!”
부르그람을 묻은 코스모스꽃에는 두 마리의 흰 나비가 날아와서 앉아 있었다.<나비 이야기>의 결말-서정범
-죽음의 선 위에서 다시 삶으로 켜져오는 한 줄기 불빛, 볼에 핏기가 비친다. 진실로 허허로운 새벽의 적막, 깊은, 깊은 적막, 여섯 시, 아내는 눈을 떴다. “여보, 살았구려!”-<아내의 수술>결말- 박목월
<발발이>-이효석
‘치로’는 시게같이 정확하다.
오정때만 되면 어느 길을 어떻게 빠져나오는지, 거리를 나와 마을길을 거쳐 먼 사무실까지 오는 것이다. 사무실에 들어오기가 바쁘게 코를 증긋거리고 꼬리를 흔들며 사람을 흘끔 흘끔 쳐다보면서 책상과 책상 사이를 삿삿이 돌아다닌다. 점심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지치면 난로 앞에 가서 몸을 휘젓이 펴고 누워 하품을 하면서 따라서 눈물을 게슴츠레 흘리면서 사란ㅁ드으 움지기는 눈치만 살핀다. 눈을 실검실검 감으면서도 기실은 신경이 날카롭게 일어선 것이다. 점심 그릇이 책상 위에 올라 수저 부딪치는 소리가 덜그럭 나기 시작하면 치로는 소리도 없이 민첩하게 사쁜 일어나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고 코를 훅훅 울리면서 쏜살같이 눈팡에 보이는 책상께로 달아난다. 이때부터 그의 싸움과 벌이가 시작된다.
의자 옆에 가 쭈그리고 앉아서 끈기있게 사람의 처분만 기다린다. 언제까지든지 기다리다가도 소식이 없고 무시를 당할 때에나 주의를 끌기 위하여 기묘한 소리를 지른다. 그래도 중 대꾸가 없으면 앞발을 넘칫 쳐들고 재주를 보이다가 그것도 효과가 없을 때에는 마지막으로 들었던 발로 양복바지를 쥐어뜯는다. 요행 선심을 입어 고기점이나 국수오리나 빵조각을 얻게 되면 게눈 감추듯 먹어버리고 다음 것을 기다린다. 그러나 오래도록 소식이 없을 때에는 벌써 그 곳은 단념하여야 햔다.
다음 책상으로 가서 같은 계제로 같은 거동을 되풀이하나 처음에는 재롱을 보려고 귀여하던 것이 요사이 와서는 어느 책상이나 퍽 냉정하게 된 것을 느낀다. 무시만 하는 책상이면 오히려 수치는 아니나 어떤 책상에서는 처음부터 꾸중을 하여 붙이지 않거나 심하면 구두끝으로 차서 쫓는 곳까지 있다.
다정하면서도 냉정한 사람의 마음을 느끼면서 치로는 하는 수 없이 주인 책상 옆으로 가나 주인은 더한층 무돈작하며 때로는 성가스런 마음에 으레 문밖으로 내쫓는 것이다 .자기의 기른 짐승이 동관들 앞에서라도 멸시를 받고 귀잖게 여김을 보는 것이 면피스러운(면하여 피함) 것이다. 집에도 당부하여 두고 낮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발을 금하는 것이나 짐승은 어느 틈으로 어떻게 묘하게 빠지는지 오정 때면 으레이 사무실에 나타나는 것이다.
치로는 벌써 대엿섯 살이 넘었으나 나무로 치면 악마디 솔 같이 적고 잔망하고 마디차다. 마을에는 그의 소생도 많이 퍼졌지만 언제나 노티가 없이 장난감 같은 몸둥아리에 부글부글한 털을 부르르 날리며 꽃술 같은 꼬리를 휘저으며 사무실을 찾는다, 주인은 한다하는 포수다. 따라서 여러 마리의 사냥개를 기른다, 늠름하고 허울 좋은 사냥개에 비하면 잔망한 발발이는 보잘 것 없는 장난감인데다가 실제로 말하더라도 사냥개가 더 긴하므로 주인의 사랑은 그 편으로 더 많이 기우는 모양이다. 자연 치로에게는 끼니 때의 차지도 적음이 사실인 같다. 치로는 그 벌충을 학교에서 대려는 것이다.
치로는 사무실에 들어와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인의 책상을 바라본다. 마음이 송구스러운 까닭일까. 그 날은 그때 요행이 주인의 자태가 보이지 않았다. 치로는 즉시 점심이 시작된 한편 책상께로 가서 코를 울리며 발을 들고 늘 하던 자세를 하였다. 그런 책상 임자는 홀홀히 그의 수단에 걸리지 않을 뿐 더러 개굿하게 얼굴을 찡그리고 두어 마디 호되게 꾸짖고는 옆 동관(어린 사내아이)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귀찮은 즘생, 꼬락서니 하구. 똑 무엇 같지 않은가.” “아무렴, 똑 떼어 붙였지. 잔망(얄밉도록 맹랑함)한 것이며, 암팡진(몸은 작아도 힘차고 다부지다) 것이며, 발발한 꼴이 꼭 주인아씨를 붓으로 그려놓으면 그렇겠나.” “
하긴 짐승을 기르자면 보람있게 그렇게 기를 것이야.”
모르는 결에 깔깔깔깔 웃음이 터진다. 떨어져 있는 동관들에게도 급기야 웃음이 옮아버렸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은 짐승의 주인인 동관 양주의 체격과 성격의 희극적 대조에서 오는 것이었다. 물론 양주의 간특한 사교가 평소부터 동관들의 미움을 사고 있었던 것에도 원인이 있다 웃음이 수습되기도 전에 문제의 주인공인 짐승의 주인이 들어왔다.
그는 치로를 보고 웃음을 들은 순간 거의 직각적으로 민첩하게 그 자리의 공기를 느낀 모양이었다. 검도 3단의 20관에 가까운 유들유들한 몸집에 ㅇ피가 솟아 짐승의 목덜미 같은 얼굴이 금시에 시뻘겋게 질렸다. 불쑥 돋아난 두터운 입술이 떨리고 조그마한 눈이 살기를 /듸이더니 기어코 고함이 터져 나왔다.
“나가라. 이놈의 짐승!”‘
분풀이는 치로에게 쏠렸다. 겁에 떠는 짐승은 엉겁결에 책상 아래에 숨어 버렸다. 주인은 분이 머리끝까지 뻗쳐 재차 소리를 치며 책상을 차니 짐승은 하는 수 없이 그곳을 빶벼 발발발발 문께로 달아나 구르는 방울 같이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안 된 짐승.”
주인의 성은 좀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뚜벅뚜벅 책상 앞으로 걸어가 의자를 드르륵 끌고 풀석 주저앉는- 그 모든 거동이 거칠고 퉁명스럽다.
“노여할 것 있소. 애매한 짐승을”
보기 거북하여 동관의 한 사람이 말을 걸었으나 위인은 들은 채 만 체 하고 입술만을 부울숙 내밀었다.
아마도 집에 돌아가 야단과 단속이 심하였던지 치로는 다음날부터 잠시 동안은 사무실에 까딱 자태를 내놓지 않았다.
주인에게 대한 애증심리는 기른 짐승에게까지 흔히 비치는 모양이다. 치로는 주인에게 대한 동관들의 미움의 감정에 희생당한 셈이다. 집에 가 분풀이로 흠뻑 얻어맞았을 애매한 짐승의 꼴이 가엾게 생각된다.
오정 때가 되어도 꼴을 보이지 않는다. 치로는 시계같이 정확하지 못했다.
1934. 4. 중앙
쓰레기통에선 장미가 필 수 없다고 하지만 주의 깊게 관찰 하면 장미보다 더 값지고 생명력 있는 힘을 발견할 수도 있다. 예컨대, 못쓰게 된 비닐우산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뒤따르던 학생이 그 우산을 주웠다. 우산의 비닐을 벗기고 매끄럽게 다듬어진 대나무 살이 있고 살로는 재료가 없어 미루어 오던 꽃바구니를 예쁘게 만들 수 있다. 역시 마음이 있는 곳에 뜻이 있음이다.
*작가의 자연예찬은 25%로 가장 많다.
여름-한흑구
나는 신록을 보면 언제든지 살고 싶은 욕망이 끌어 오른다. 나무 밑둥에 귀를 대면 물 빨아올리는 소리가 꿀덕꿀덕하고 들리는 것 같이 기운이 난다. 아직 우거진 그늘 속에 검은 그림자도 들어서지 않은 그 신록의 밝고 푸른빛을 한참 들여다보면 가슴 속이 왼통 시퍼래지는 것 같다.
-이따금 이 푸른 호수 위로 제비들이 재빨리 날아다니는 것은 잠자리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먼 바다 위를 날아갈 수 있도록 날기를 연습하는 것이다.
*제비가 나는 것은 잠자리를 잡아먹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생명연습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가끔 이질적으로 소외되는 자신을 자연에 투영시킴으로써 존재의미를 재확인하려했던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었다.<들밖에 비행기 높을 때>-한흑구
흑구는 서양에서 죽음과 성실과 애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흑구는 외로운 색, 어느 색에도 물들지 않는 굳센 것들을 상관하지 않고 다만 외로운 색, 죽어도 나라를 사랑하는 대표 색이라 했다.
*20년대의 수필 양산이 쉽고 20대라는 시대적 특수요인의 내외작용, 즉 문학 환경의 영향이 더 컸다. 외인이라면 1919년 일본인 총독에 의해 시행된 소위 문화정치 표방에 따른 국내 출판물의 대량 출현이다. 1920년 3월에 창간된 <조선일보>와 <장미촌>을 필두로 10년 동아 4종 신문과 월간 잡지는 무려 200여종이다. 무상으로 글을 쓰덙 시절이라 국ㄴ재외의 20대 청년작가들이 핝 두 차례 작품 발표하는 것으로 당당히 문인행세를 하며 쟁명했다 거기에다 당연직인 듯 문인대우를 받던 잡지, 신문 기자들까지 가세ㅐ되어 20대의 수필가는 실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일인들의 원고 검열을 피하기 위해 연문화 작업이 직접적 요인으로 크게 작용. 정확한 문장 비판은 유연한 문장을 선택해 썼다.
따라서 20대 수필은 시인, 작가 수필가들의 전유물이 되었고 법조인, 정치인, 학자, 예술가 등 당대 지성을 대변하는 시대의 노래, 민족의 분노와 저항심을 농축한 서사시로 각광을 받았다 이러 여건 속에서 평론 같은 수필, 소설 같은 수필이 양산됨으로써 20년대 수필은 형식에서 뿐만 아니라, 양질에서도 당대 산문문학을 선도하는 문학적 지위를 확보했다.`
<20년대 문형>
수필 문형은 수상문, 기행문, 서간문, 수상문. 일기문으로 나누는데 수상문이 67%. 기행문이 19%, 서간문이 12%, 일기문이 2%다. 20년대는 단적으로 기행, 서간문0의 개화기이면서 그 정성기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