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 관념 / 김석수
비행기는 나하 공항을 이륙한 지 두 시간이 지나서 인천 공항 2터미널에 가볍게 내렸다. 창밖을 내다보니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산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다. 오키나와의 맑은 하늘과 따뜻한 날씨가 그립다. 비행기는 고래가 바다에서 노니는 것처럼 천천히 활주로 위를 움직인다. 시계를 보니 예약한 고속버스 출발 시간이 40분 남았다. 예전에는 귀국 수속을 마치고 수하물을 찾은 뒤 밖으로 나와서 매표소에서 표를 샀지만 이번에는 오키나와 공항에서 출발 전에 모바일 앱으로 예약했다. 도착장 입구까지 가는 동안 안전띠를 매고 기다리라는 안내 방송을 귓등으로 듣고 선반에서 가방을 내렸다. 아내는 일정이 빠듯하다고 못마땅해하는 눈치다.
화장실에 잠깐 들른 뒤 입국 수속하는 곳으로 갔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순조롭게 수속이 끝났다. 짐을 따로 부치지 않아서 수화물 찾는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 신고할 물건도 없으니 세관 직원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공항 밖으로 나왔다. 버스 출발 시간까지 20분이 남았다. 찬 공기가 갑자기 내 볼을 스친다. 아내가 추운 듯이 어깨를 웅크린다. 집에 도착해서 늦은 저녁을 먹을 수 있겠다 싶어서 서둘렀다. 온라인 표를 종이 표로 바꾸어야 한다. 매표소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렸다.
버스 두 대가 서 있는 2번 정류장으로 캐리어 가방을 끌고 갔다. 그곳에 매표소는 없었다. 아내는 얼굴을 찡그렸다. 예전에 광주로 내려가는 버스는 10번이나 12번에서 출발했던 것 같다. 다시 10번 정류장으로 무거운 가방을 끌고 갔다. 그곳에도 매표소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어디서 버스를 타야 한다는 말인가?’ 지나가는 사람도 많지 않아서 물어볼 사람을 찾지 못했다. 남은 시간은 10분이다.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한다. ‘도대체 매표소는 어디에 있고 버스는 어디에서 타는지? 분명히 우리나라 맞는데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아.' 출입구 쪽을 쳐다보니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박스 오피스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다. 그곳으로 재빠르게 갔다. 아내는 짜증이 난 표정이다.
그 건물도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버스 출발 시간은 5분이 채 남지 않았다. 입국장 쪽으로 다시 들어갔다. 안내소에서 물어보니 지하 1층에 매표소와 버스 타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캐리어 가방의 손잡이를 꽉 쥐고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계단에 올라서자마자 캐리어 가방을 들고 뛰었다. 지하에서 매표소가 있는 곳을 몰라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다시 물었다. 모른다고 해서 근처 제과점으로 가서 직원에게 물었다. 그녀는 모퉁이를 돌아서 곧바로 가면 나온다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빙상장에 있는 아이스하키 선수처럼 미끄러지듯이 캐리어 가방의 바퀴를 굴리면서 매표소 쪽으로 갔다. 매표원은 “조금 전에 버스가 출발했어요. 표가 매진이 돼서 다음 버스는 여덟 시간 뒤 자정에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예매한 표는 결제한 금액에서 30퍼센트 공제하고 환급할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온몸의 힘이 쭉 빠졌다. 공항 호텔에서 자고 내일 집으로 가자고 했더니 아내는 그냥 가자고 대꾸한다. 하는 수 없이 자정에 출발하는 버스표를 끊고 매표소 앞 카페로 갔다.
차 한 잔을 시켜 놓고 멍하니 있으니 아내가 웃으면서 좋은 경험 했다고 한마디 한다. “이제 좀 여유가 있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앞만 보지 말고 옆도 보고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해외에서 돌아오면 대부분 1터미널로 도착해서 이곳이 2터미널이 아니라 1터미널로 착각한 것이다. 1터미널은 입국장에서 공항 건물 밖으로 나오면 1층에 바로 버스 매표소와 정류장이 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집에 빨리 갈 생각으로 다른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옆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가 된 것이다.
차를 마시고 매표소로 다시 가서 혹시 ‘취소한 표’가 없냐고 직원에게 물었더니 아홉 시 우등 고속 버스표가 두 장 나왔다고 한다. 식당 층으로 올라가서 저녁을 먹은 뒤 그 버스에 몸을 실었다. 공항을 빠져나오니 착륙할 때 찌푸렸던 하늘은 없어지고 컴컴한 하늘 아래 울긋불긋한 야경이 차창 밖으로 보인다. 캐리어 가방을 끌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내가 창밖에서 어른거린다. 매표소와 버스 정류장이 반드시 1층에 있다는 고정 관념이 나를 꽉 잡고 있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조금만 했어도 예약했던 버스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에게 미안했다. 그녀는 피곤했던지 내 옆자리에서 벌써 잠이 들었다. 이번 학기에도 고정 관념을 줄이면서 좀더 많이 나를 ‘객관화’하려고 ‘일상의 글쓰기’를 시작한다.
첫댓글 사모님이 참 인자하시고 현명하시네요. 고생하신 게 실시간으로 느껴집니다.
고맙습니다.
공항에서 이리저리 뛰는 모습이 그려지네요.
고생한 보람이 재미있는 글 한 편으로 남았네요.
고맙습니다. 이제는 차분고 느긋하게 다니려고 하는데 잘 될런지 모르겠네요.
저도 작년에 똑같은 고정관념으로 고생한 적이 있어요. 2터미널 내리는 곳이 1터미널하고 비슷해서 더 그런 것 같아요. 무사히 오셔서 다행입니다. 하하.
맞아요. 안내 표지판이 눈에 띄었으면 합니다.
급한 상황 묘사가 생생해서, 예전 제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고맙습니다.
맞아요. 내가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잘 안 돼요. 빡빡 우기다 창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네요.
잘 읽었습니다. 제가 다 숨차네요. 하하.
고맙습니다. 숨이차지 않게 다니려고요.
외국보다 국내에서 더 고생하셨네요.
네, 그렇습니다. 고맙습니다.
예전에는 외국 나갈 때만 버벅거렸는데 이제는 서울이나 인천 등 낯선 지역에 가도 두렵더라고요.
지방 사는 애환이 바로 이런 것이지요.
열몇 시간 고생해서 겨우겨우 날아왔는데 집은 또 다섯 시간 이상 더 가야 데 있다는 것.
새로운 여행기 기대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순발력이 떨어지니까요. 고맙습니다.
마음 졸이면 읽었습니다. 버스 놓치실까봐. 좋은 경험이라 얘기해 주시는 따뜻한 사모님, 금방 여유를 찾으시는 선생님께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