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문>
시몽당 지학대종사 각령위覺靈位 전에
시몽당 지학대종사님이시어! 1월 9일 입적했다는 소식 듣고 정말 놀랐습니다.
동대병원에서 치료 받고 돌아온다고 했는데 기어이 가셨군요.
하고 싶은 일이 참으로 많았는데 훨훨 벗어버리고 가시다니 가슴이 아픕니다.
사바세계를 떠나 어디로 가시는지요?
극락으로 가십니까? 도리천으로 오르십니까?
승속의 만남이었지만 도반인 듯 형제인 듯 긴 세월 함께했습니다.
붓다와 공맹과 노장을 얘기하고 정치 사회의 대립 상을 걱정했지요.
당신에게서 지혜를 얻고 노고를 무릅쓴 헌신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홀연 ‘나를 위해 돌 한 점 세우지 말라’며 가시니 꿈인 듯 아스라합니다.
꿈처럼 와서, 꿈처럼 살다, 꿈처럼 가시는군요. 애통합니다.
젊은 시절 하원 법화사 주지로 부임한 때를 돌아봅니다.
부지는 삼천여 평, 대웅전은 돌담 벽 함석지붕, 허름한 요사채 하나
4.3과 6.25가 쓸고 간 폐허에 세워진 초라한 절이었지요.
하지만 스님은 주어진 현실을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참구해 280인의 노비가 지키던 비보사찰임을 알고
해야 할 일이 여기에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웅장했던 모습을 재현하려는 큰 꿈을 꾸셨지요.
여러 사람의 힘을 모아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4만여 평 대지를 확보하고, 8차의 발굴 조사와 6차의 학술 세미나를
제주와 서울에서 번갈아 열어 법화사의 문화적 가치를 조명했습니다.
‘지원6년기사시중창 지원16년기묘필'이란 명문 기와 출토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고려말 창건설이 중창이었음을 확인하고, 얼마나 놀라고 얼마나 기쁘셨는지요.
이로써 신라 해상왕 장보고 창건설을 받쳐 줄 근거가 됐습니다.
대웅전을 비롯한 다섯 채의 전각과 구품연지를 복원하고
고고학자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중국 산동성 법화원과
완도 청해진 법화사, 하원 법화사 등, 삼사가 해상왕 장보고의 창건임을 밝히는
김문경 박사의 비문을 받아 대비를 세우고, 장보고 석상도 세웠습니다.
잠자던 천년의 전통 불교문화가 시몽당 당신의 발심으로 재현됐지요.
그 시절 스님은 법화사의 복원에만 천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주불교신문’을 창간하고, 서귀포 불교문화원 창립에도 앞장섰습니다.
제주불교연합회장을 맡아 사암의 고른 발전을 도모하고
23교구 본사 관음사의 파행 운영을 바로잡아 정상화에 이바지했습니다.
하지만 스님이 백양사로 가신 뒤 법화사에 변고가 발생했지요.
장보고 대사의 비도 석상도 쓰러뜨려 땅에 묻어버린 것입니다.
법화사 중창에 이바지한 승속 누구에게도 대화 한마디 없이
문헌적 근거가 없고, 관련 유물도 출토되지 않았다고 하여
성물을 철거해버렸습니다. 그 소식 듣고 얼마나 허허로웠을까요.
시몽당 지학대종사님이시어, 또 해야 할 얘기가 있습니다.
백양사 주지 재임 시엔 조계종 쇄신책을 제안하셨지요?
사찰 주지 임면 및 운영 개선책도 제안했고요.
독선적 총무원장 선거 개선책도 제안했었고요?
힘으로 절을 빼앗는 탈법을 그만두라는 소리도 내질렀지요.
승려라면 가난을 배워야 한다는 쓴소리도 서슴지 않았지요.
출가할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자 함이었습니다.
승가를 바로 세워 한국불교 발전을 이루려는 충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승가 권력에의 도전으로 낙인찍어 핍박받으셨습니다.
오명을 둘러쓰고 백양사를 떠나면서도 말 한마디 않으셨지요.
인연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 게 도리라 여겼을 것입니다.
인욕바라밀을 행함이 얼마나 강고했는지를 알게 합니다.
인천 대복사 한주로 있으면서도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팔만대장경을 한 권의 책으로 묶는 ‘우리말 불교 성전’ 간행을 꿈꾸셨지요.
학승과 불교학자와 기업인들을 찾아 서울과 지방을 쉼 없이 오가고
기독교 대한성서공회의 성경 간행 역사와 실상도 연구했지요.
그리하여 재단법인 ‘우리말불교성전간행위원회’ 창립에 힘을 쏟으셨습니다.
한국 불교의 세계화를 위한 결의에 찬 활동이었습니다.
그뿐입니까. 대복사를 인천의 명품 사찰로 개창, 인천항을 오가는 세계인들이
지친 마음을 쉬어가게 하려는 참선 도량 건립 계획도 세우셨지요.
법화사에서 이루지 못한 국제선원 창립의 꿈을 인천에서 이루려 했습니다.
꿈은 꾸는 자의 것이라 했지만 당신이 사바를 떠나시니 누가 그 꿈 이루리까.
어느 무더운 여름날 모시옷 입고 구화루 아래 앉아 얘기를 나누던 일이 떠오릅니다.
스님은 구품연지에 피어오른 연꽃을 지긋이 바라보며
“햇살이 드는 날이면 구름도 한라산도 연지에 와 쉬어가고.
밤이면 달과 별들이 연지에 와서 사랑을 속삭입니다.”라고 하더이다.
사위가 오수에 젖어 법당도 꿈꾸듯 조는 정오였습니다.
하얀 모시옷 입고 앉아 있는 스님은 한 마리 학이었습니다.
아닙니다. 흰 구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었습니다.
그때 당신의 얼굴엔 무한한 즐거움이 번져 있었습니다.
나는 장자가 말한 ‘至樂은 無樂이다’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스님은 즐거움 자체를 뛰어넘은 선경에 들어 있었습니다.
시몽당 지학대종사님이시어! 법화사복원에 힘 모았던 추진위원들도 이미 갔습니다.
세상사를 밥상 위에 올려놓고 갑론을박하던 친구 벽산 고창실 거사도 갔습니다.
인재 거사가 피안으로 갈 때면 여법하게 보내겠노라고 말했던 당신도 가시는군요.
슬프다. 인재 홀로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을 읖조립니다. 여몽환포영을 절감합니다.
바라건대 도솔천에 올라 부처님 만나 성불하시고
사바세계로 다시 오시어 못다 한 일 다 이루소서,
삼광사 신도회장 도법 오홍식 거사와 함께 두 손 모아 간절히 기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2024년 2월 18일
忍齋 조명철 삼가 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