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강 여섯 번째 증명, 사라와 하갈의 비유(갈 4:21-31)
1. 율법을 모르는 율법주의자(4:21-23)
“율법 아래에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여, 나에게 말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율법이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합니까?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여종에게서 태어나고 한 사람은 종이 아닌 본처에게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육신을 따라 태어나고, 본처에게서 난 아들은 약속을 따라 태어났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논증이 시작됩니다. 핵심은 창세기 16-21장에 나오는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해석하는데 담겨있습니다. 아브라함(아직까지는 아브람)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본처인 사라(원래 이름은 사래)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그녀는 자기의 여종인 이집트 여인 하갈을 남편에게 보내어 아이를 갖게 합니다. 그런데 여종 하갈이 임신을 빌미로 주인 사래를 깔보았습니다. 남편에게 사래가 호소하자, 아브람은 하갈의 처분을 그녀에게 맡깁니다. 그래서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사막으로 도피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너무 많아 출산은 꿈도 꾸지 못하던 사래가 아들을 출산하게 됩니다. 그 아들이 바로 이삭입니다. 주의 사자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예언할 때 사래가 듣고 웃었기 때문에 아들의 이름이 ‘이삭’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나에게 말해보시오! 당신들은 율법의 지배아래 있으면서, 과연 그 율법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이 말에 <율법> 대신 <성경>으로 바꾸어 넣어보십시오. 그러면 바울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말해보시오! 당신들은 성경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면서, 그리고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라면서, 그 성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가르치는지 알고 있습니까?”라는 말로 들리지 않습니까?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을 준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조차도 이런 내용을 몰랐을 것이라며 바울이 예로든 이야기가 창세기에 나오는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집트 출신 여종 하갈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은 “육신을 따라 태어난 아들”이고, 본처인 사라에게서 태어난 이삭은 “약속을 따라 태어난 아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가 “알레고리적인” 방식으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육신>과 <약속>이라는 두 가지 모형이 정립됩니다.
2. 알레고리란 무엇인가?(4:24-26)
“이것은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두 여자는 두 가지 언약을 가리킵니다. 한 사람은 시내 산에서 나서 종이 될 사람을 낳은 하갈입니다. ‘하갈’이라 하는 것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을 뜻하는데, 지금의 예루살렘에 해당합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은 그 주민과 함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이 아닌 여자이며,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알레고리(allegory)라는 영어는 헬라어에서 나왔습니다. 바로 지금 ‘비유’라고 번역한 헬라어가 알레고레오(ἀλληγορέω) “비유적으로 표현하다”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본래는 알레 아고레우오(allo agoreuo)라는 말이 어원인데, 그 의미는 “달리 무엇인가 말하다.”입니다.
여기서 나온 다른 단어가 아고라(Arora)인데,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에서 시민들이 모여 집회를 열고 토론하는 광장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도 나옵니다. 마태복음 11:16절에서 예수님이 “이 세대를 무엇이 비길까?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마11:16-17)라고 하실 때 나온 <장터>가 바로 아고라입니다.
그러므로 알레고리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쓰인 것이 말하는 의미의 배후에 무엇인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과 사라가 낳은 이삭 사이의 갈등과 선택의 이야기 뒤에는 많은 것들이 감추어져 있는데, 그 비밀을 바울이 해설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갈은 아라비아의 시내산인데, 현존하는 예루살렘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 의미는 유대교의 본산이고 율법규정에 얽매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예루살렘은 그 옛날 시내산 시절의 하갈과 같은 존재인데, 하갈은 종이었으므로, 지금의 예루살렘 역시 도시와 주민 모두가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종이 아닌 여자’ 다시 말하면 우리의 어머니는 지상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것입니다. ‘종이 아닌 여자’라는 말은 개역성경에서는 ‘자유자’로 번역하였습니다. 원문대로 직역하면, “위의 예루살렘은 자유로운, 즉, 우리 어머니이다.”로 할 수 있습니다. 사라는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라는 것을 통해서, 지상의 예루살렘은 종노릇하게 시키는 율법주의의 지배하래 허덕이고 있지만, 약속에 따라서 아들을 낳은 사라는 진정한 예루살렘이며 신앙의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따를 것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의 지배로 인도하는 거짓교사들을 따라 종의 도시인 예루살렘 아래도 들어갈 것인지, 자유를 상징하는 하늘의 예루살렘을 향하여 복음의 약속을 따라 갈 것인지 선택하라는 요청입니다.
3. 이사야 예언자의 신학(4:27-29)
“성경에 기록하기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여, 즐거워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여자여, 소리를 높여서 외쳐라. 홀로 사는 여자의 자녀가 남편을 둔 여자의 자녀보다 더 많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신을 따라 난 사람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을 박해한 것과 같이, 지금도 그러합니다.”
여기서 성경은 이사야 예언서를 말합니다. 54장 1절을 보면, “임신하지 못하고 아기를 낳지 못한 너는 노래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겪어 본 적이 없는 너는 환성을 올리며 소리를 높여라. 아이를 못 낳아 버림받은 여인이, 남편과 함께 사는 여인보다 더 많은 자녀를 볼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라는 이사야 예언서인데, 이사야 전체의 맥락을 따르면, 54장은 제 2이사야(40장-55장)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써 바벨론 포로기의 암울한 상황에서 기록된 성경입니다. 그래서 “반전”을 기대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현실은 고통스럽지만, 다시 회복하실 하나님을 기대하고 찬양하는 문서입니다.
사라의 나이가 많아서 출산이 불가능하다고 모두들 믿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아들을 주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 약속을 듣고도 사라는 믿겨지지 않아서 웃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끌어들여 인용하는 이사야의 신학은 반전(反轉)의 신학입니다. 어떻게 아이를 못 낳아서 홀로된 여인이 남편 있는 여인보다 더 많은 자녀를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육신으로 낳은 것이 아니라, 약속으로 낳은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육신을 따라 난 사람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을 박해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다는 의미가 담겼습니다. 갈라디아 거짓 교사들이 바울과 바울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를 가하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가만히 보면, 진리가 아닌 것이 진리를 깔고 앉아 주인노릇을 하려고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도처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바벨론 제국이 세계를 지배할 때, 유다왕국을 진멸하고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노예로 부릴 때, 유다백성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바벨론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길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치 이집트에서 살 때처럼 종살이라도 좋으니 굶지 않고 살면 만족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언자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말합니다. 주인도 아니고 진리도 아닌 것에게 굴복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은 육신을 따라 난 사람들의 박해에 굴복하면 안 됩니다.
이스마엘이 큰형이니까 어린 이삭을 괴롭혔습니다. 형이 동생을 사랑해야지 괴롭게 해서는 안 되는데도 말입니다. 창세기 21장 9절에 보면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것을 사라가 보는 장면이 아옵니다. 하갈이 사라에게서 쫓겨났다가 이스마엘을 낳고 돌아와 함께 살았는데, 또 다시 사라의 눈 밖에 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자기의 고민을 아뢰자, 하나님께서 다시 하갈과 이스마엘(뜻: 하나님께서 들으심)을 바란 광야로 이주시키게 됩니다.
4. 자유인 그리스도인(4:30-31)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아라. 여종의 아들은 절대로, 종이 아닌 본처의 아들과 함께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이다.’(창21:10)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를 가진 여자의 자녀입니다.”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었을 때 아브라함의 이름은 아직 <아브람>었습니다.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의미이고, 아브라함은 “많은 사람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사래는 “귀하다”는 의미이고, 사라는 “공주”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할례를 받은 후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이름으로 사라에게서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자연적인 능력으로 얻는 육신의 아들이지만, 이삭은 자연적인 능력이 상실된 후에 약속에 따라 얻은 아들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창세기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만의 반전의 신학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에게도 요청합니다. 인간의 능력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할 것인지 말입니다.
종의 자녀로 종노릇 하며 살 것인지, 아니면 자유의 자녀로서 살 것인지 바울은 선택하라고 합니다. 유대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본산인 예루살렘에 자리를 잡고, 성전과 율법에 의지하는 옛 계약 백성들로 살기 원합니다. 그것이 바울의 눈에는 율법주의의 종노릇하는 종교로 보였습니다.
반대로 이방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 기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새 계약의 백성들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어떤 가르침을 남겼는지에 집중하는 종교가 바로 그리스도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는 말로 바꾼다면, 표층종교에 머물러 살면서 형식주의의 종노릇 하지 말고, 그리스도교의 저 깊은 심연까지 이르도록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신뢰를 높여가라는 것입니다.
하갈과 사라의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통해서 우리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은 종과 자유인의 관계와 마찬가지이고, 오늘 우리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말해줍니다.
2024년 9월 1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