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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과 사랑 / 시 131:1-3, 요 13:31-35
어제는 비가 와서 어떻게 야외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비오면 비오는대로 지붕 있는 곳에서 모이면 통제가 더 쉬울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여러분, 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오늘 진안지역의 기장교회가 같이 모여 하나님이 창조하시 자연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게 되어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이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수고한 분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이렇게 5개 교회가 같이 모여 연합으로 야외예배를 드리는 것은 매우 오랜만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앞으로는 5교회 뿐 아니라 진안지역의 기장교회 모두가 함께 모일수 있었으면 한다.
오늘은 어린이날이다. 사흘 후면 어버이날이고, 그 일주일 후는 스승의 날이다. 그래서 5월은 가정의 달, 청소년의 달, 부모 공경의 달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이런 여러 가지 행사가 있는 중에 주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이 주신 자연 속에서 한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기에 이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믿음은 여럿이 모여 조화를 이루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모이게 된 것도 믿는 대상이 같기에 같이 모여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가끔 읍내에서 다른 교회 교인들 비슷한 사람을 보면 저 분이 어느 교회 교인인가 아닌가 실수할까봐 아는 체를 못했다. 잎으로 만나면 먼저 아는 체좀 했으면 한다. 왜냐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이다. 믿는 자들에게 꼭 있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듯이, 우리에게는 믿음 소망 사랑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믿는 자들이 모였기에 소망과 사랑에 대해서 말씀드리겠다.
먼저 소망은 열린 마음을 가져다 주고, 절망은 닫힌 마음으로 이어진다. 소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너그러워지지만 절망 속에 묻히면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소망을 가진 사람은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고 매사를 창조적으로 처리하지만, 절망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모든 일에 소극적으로 파괴적으로 대처한다. 소망은 우리들의 삶의 방향을 생명으로 향하게 하고 절망은 죽음으로 향하게 한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일컬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했다. 소망은 우리들의 삶의 지평을 가능성으로 열려 있게 하지만, 절망은 가능성이 배제된 좌절과 체념으로 닫아버린다. 단테는 그의 작품에서 지옥의 입구에 ‘이곳에 들어가는 자는 모든 소망을 버리시오’라고 써 붙였다. 이렇듯 소망은 생명을 살아있게 하는, 생명으로 생명되게 하는 생명의 동력이라 하겠다. 소망은 기다림을 특성으로 갖고 있다. 소망은 이미 가진 것이 아니요 이미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가진 것을 기다릴 필요나 까닭이 없다. 소망은 이미 손에 쥔 것이 아니라 아직은 없는 것, 그러나 꼭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고 있다. 공동번역 롬 8:24-25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소망을 말할 때에 우리는 깊이 물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소망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은 무엇이나 모두가 소망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욕구나 야망에 불타는 가장 탐욕적인 인간일수록 소망을 가진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이기적인 욕망이라고 해야 옳지 소망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유는 이와 같은 욕망은 이웃과 사회를 소망이 아닌 절망의 상황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제가끔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고 날뛴 나머지 결국 소망과는 거리가 먼 세계를, 병들고, 살벌한 절망적인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지 않나?
오늘 본문 시편 131편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녀야 할 바른 소망이 무엇인가를 깨우치고 배워야 하겠다. 본문을 다시 한번음미해 보자. 공동번역으로 읽어드리겠다. ‘야훼여, 내 마음은 교만하지 않으며, 내 눈 높은 데를 보지 않사옵니다. 나 거창한 길을 좇지 아니하고, 주제넘게 놀라운 일을 꿈꾸지도 않사옵니다. 차라리 내 마음 차분히 가라앉혀,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 내 마음 평온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야훼께 두어라.’ 이 경건한 시인의 소망은 엄청나게 기이한 일도, 야심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야욕도 아니다. 그가 가치있게 생각하는 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평온하듯이 오직 하나님 안에 거하는 일이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생활,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소망이요 생활이다. 자신의 소욕을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소망으로 삼고 사는 생활, 여기에 이 세상이 바로 되고 인류와 역사의 미래에 비로소 절망이 아닌 소망이 깃들게 된다 하겠다.
어릴 때 서부 영화를 좋아했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 타고 다니던 역마차에 대해 한말씀 드리겠다. 역마차는 좌석 구분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기차나 비행기처럼 특별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좌석의 등급을 매겼을지 궁금하지 않나? 그 구분은 이렇다. 1등석 표를 산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마차에 앉아 있을 수 있다. 이것이 1등석이다. 에를 들어 마차 바퀴가 빠졌다고 하자. 그래도 아무 상관없이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 1등석 손님이다. 2등석은 마차가 고장났을 때 일단 내려서 길 옆에 서서 구경하는 자리이다. 이에 비해 3등석은 마차가 고장나면 팔을 걷어붙이고 마부와 함께 수라해야 하는 표이다. 교회 안에도 이 1등 성도, 2등 성도, 3등 성도가 있다. 항상 대접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1등 성도이다. 2등 성도는 ‘잘 해봐라’ 하면서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3등 성도는 주방에서 열심히 일하고 자나깨나 이름없이 빛도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당신은 놀라운 사실을 아는가? 천국에 가면 이 순서가 뒤바뀐다는 것을요. 이 땅에서처럼 1등, 2등, 3등 성도 순으로 천국문을 향해 입장하면 좋겠는데, 천국에 다오면 주님이 이렇게 명령하신다. ‘뒤로 돌아 앞으로 왔!’ 그러면 누가 제일 먼저 들어가나? 3등 성도가 제일 먼저 입장한다. 섬기는 자, 애쓰고 땀흘리는 사람이 제일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 팔짱끼고 구경만 하던 사람들은 천국에서 받을 상이 있을지 심각하게 고려애 보아야 할 줄 안다.
신약 본문 34절 말씀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새 계명’이란 ‘사랑의 명령’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은 사랑의 명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아마 ‘사랑을 명령할 수 있나요?’라고 반문하고 싶은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사랑을 명령하셨다. 사랑이 주님의 명령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당연히 순종해야 한다. 주님은 이성적인 분이시다. 사랑이 순종할 수 없는 명령이라면 우리에게 요구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 서로 사랑할 수 있다. 사랑에 왜 명령이 필요한가? 예수께서는 우리의 감정이 허락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 ‘저 사람만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제발, 그 인간만은 제외시켜 주십시오’라고 대답하기 때문에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시고 우리의 사랑하지 못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순종이다. 주께서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면 우리는 어느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사랑을 결심합시다.’ 사랑의 시작은 여기서부터이다. 감정이 아닌 의지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는 마음 자세에서 비롯된다.
그러면 새 계명을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옛 계명인 율법을 통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 이제 새 계명을 통해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다. 34절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에서 사랑의 모본을 찾아볼 수 있다. 요 13장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의 행위를 보여 주신 다음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사랑은 추상적이지 않다. 주님의 사랑은 구체적인 섬김이었다.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35절 말씀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소크라테스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나는 양심껏 산다. 나는 정직하게 산다’를 소크라테스의 제자된 증거로 삼았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며 그 율법을 보존하는 것으로 그들이 바리새인인 것을 나타냈다. 주님 당시에 광야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던 에세네파의 재자들은 절제생활과 금욕을 실천하며 자신들이 에세네파의 제자인 것을 자랑했다.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된 증거는 무엇인가? 저 유명한 복음주의 기독교의 별, 프란시스 쉐퍼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제자된 유일한 표지이다.’ 주님은 ‘너희가 성경을 갖고 다니면 내 제자일줄 알리라. 너희들이 찬송가를 잘 부르면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되게 하는 가장 독특한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사건이다. 주님은 어떤 분인가? 그분은 철저하게 사랑한 분이다. 사랑 때문에 자신을 내어 주기까지 하신 분이다.
신앙생활의 진정한 출발은 교회에 출석하는 날이 아니고 우리가 세례받은 날도 아니다. 신앙생활의 진정한 출발은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신뢰하고 거듭나는 날부터이다. 거듭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다. 누가 대신 할 수 없는 일이다. 부모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자녀가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법은 없다. 부모가 휼륭한 신앙생활을 한다해도 그 자녀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체험을 반드시 해야 한다. 설교자 무디가 한 유명한 얘기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하나님은 손자가 없다.’ 하나님에게는 자녀들만 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 할아버지’ 하고 부르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개인적인 신앙 체험을 통해서만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개개인이 신앙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거듭나게 되면 우리는 교회라는 하나의 공동체 안에 속하게 된다. 교회생활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경험이다. 이제부터 신앙성장은 어떠한 공동체 안에서 어떤 경험을 하며 자라느냐에 달려 있다.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무엇을 경험했는가, 또 어떤 것을 경험했는가에 따라 우리들의 신앙 모습이 결정된다. 거듭난 성도가 처음 교회에 나가는 것은 아이가 태어나는 것과 같은 일이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가정이다. 가정에서 무엇을 경험했고, 가정이 그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가 그 아이의 성장 방향을 결정한다. 특히 그 가정의 인간관계, 가족들간의 사랑과 형제간의 우애가 얼마나 돈독한가가 아이의 인격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오늘 어린이 날에 우리 모든 성도들의 가정이 자녀들에게 관심을 갖고서 소망과 사랑을 심어줄 수 있는 가정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럴 때 우리의 어린이들은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자라고 소망과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자라므로 이 나라의 큰 기둥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역군들이 될 수 있다. 믿음 소망 사랑으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진안지역 5개 교회가 즐거운 하루를 보내기를 바란다. (1996-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