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공로 내 공로 / 사 49:1-7, 벧전 2:22-25
오늘은 뜻깊은 주일이다. 주보 앞면을 보면 사순절 여섯째주일(마지막 주일)이며 종려주일이고 고난주간이며, 4‧19혁명주일이고 또한 성찬주일이다. 그리고 장애인주일임과 동시에 교회 생일이기도 하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명칭들이 겹치는 날이 거의 없었다. 사순절이란 주님의 고난을 회상하는 절기이다. 부활절 전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이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생명을 돌보고 사랑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주님이 고난 당하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었다. 종려주일이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백성들이 주님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종려가지를 들고 흔들며 환호한 것을 기념하는 주일이다. 고난주간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셋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군병들에게 잡혀가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것을 기념하는 주간이다.(월요일 - 성전정화, 화요일 - 감람산에서 기도하심, 수요일 - 제자에게 배반당하심(가룟 유다가 돈을 받고), 목요일 -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성만찬을 베푸심, 금요일 - 십자가에 달리심, 무덤에 안치, 토요일 - 무덤 속에 계심) 4‧19혁명기념주일은 지난 60년 이승만 독재에 항거해 학생들이 분연히 일어나 독재타도를 외쳤고,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게 한 전국적인 학생시위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이다. 성찬주일은 세계교회가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성찬을 베풀며 행하신 것을 기념하며 예수의 고난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주일이다. 장애인주일은 우리 사회에 많은 신체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들을 생각하며, 우리도 잠깐 실수로 장애인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장애인들을 돕고자 제정한 주일이다. 마지막으로 교회 생일이다. 교회가 세워지기는 1928년도에 선교사들의 복음전도에 의해 설립했으나 설립날자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1943년 일제에 의한 용담댐 건설을 위해 조선전업을 통해 수몰지역의 땅을 귀속시키게 되어 교회가 포함되어 폐교회가 되었다가 1953년 법원에서 수몰민 지역의 땅을 돌려주라는 판결에 의해 4월15일 교회를 재설립한 날을 기념하여 지금까지 교회 생일로 지켜왔다. 많은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지금까지 교회를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고통을 당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대개의 사람들은 단지 눈앞의 고통만을 면하려고 한다. 그러나 면해도 또 오고 또 올 것이다. 근본적으로 고통을 해결해야 한다. 고통의 근본은 죄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단절되고 마귀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단절을 해결하고 죄의 대가를 지불해 준 존재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밖에 아무도 없다. 세례 요한의 말처럼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지신 어린양이시다.
노르웨이의 어느 도시에 ‘양의 교회’라는 크고 유명한 교회가 있다. 이 교회의 종 탑 밑에 어린 양을 새긴 데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이 교회를 세울 때 있었던 일이다. 교회의 종 탑을 만들기 위해 꽤 높은 곳에서 일하던 인부가 그만 실수로 발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미끌어지고 말았다. 종 탑 아래는 단단한 아스팔트였기 때문에 떨어지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 바로 그때 그 밑을 지나가던 양치기와 그가 이끄는 한 무리의 양떼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모여선 사람들이 ‘저런, 저런’ 하고 있는 동안 그 사람은 지나가던 양떼 위에 ‘퍽’하고 떨어졌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모두들 걱정스런 표정으로 수군거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인부가 아무데도 다친 곳이 없이 그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인부가 일어난 자리 밑에는 불쌍하게도 한 마리의 어린 양이 죽어 있었다. 이에 그 교회의 교인들은 사람의 목숨을 대신하여 죽은 그 어린 양을 두고두고 기념하기 위하여 짓고 있던 교회의 이름을 ‘양의 교회’라 하고, 종탑 밑에 양을 새겨 넣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죄를 인하여 대신 죽은 또 하나의 어린양이 있으니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의 고난과 십자사 상에서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었다. 그 은혜를 받은 우리가 이제는 그의 대속이 헛되지 않도록 매사에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순종하며 고난에도 인내함이 마땅하지 않은가? 고난받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라. 죄를 짓는 것을 무서워하라. 만일 여러분이 고난과 죄, 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가장 작은 죄보다는 가장 큰 고난을 선택하기 바란다. 세상적인 생각으로는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이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결코 쉽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구주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러나 이를 스스로 감당하시고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셨다. 이와 같이 우리도 불의한 자에 대해 친히 보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기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일주일 동안 두 차례에 걸쳐 24시간이 넘는 척추교정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진통제 주사를 계속해서 맞아도 통증은 가시지 않았다. 이러다가 죽고 말 것이라는 깊은 절망에 빠졌고, 병석에 누운 그녀는 끝없이 비명을 질렀다. 옆에서 간호하던 남편은 아내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바라보면서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리고 하나님께 아내의 고통을 대신하여 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환자의 몸부림이 점점 심해지자 간호사는 진정제 주사를 놓고 두 팔과 두 다리를 침대에 묶어 놓으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남편은 아내가 고통당하며 주사를 맞고 사지가 침대에 묶인다는 것을 생각하니 나무도 고통스러웠다. 그 대신 자신이 직접 아내를 진정시키겠노라고 사정을 한다. 그리고선 아내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며 몸부림을 치는 아내를 붙잡고 눈물을 흘린다. 남편의 쉴새없이 흐르는 눈물과 한없이 쏟아지는 땀이 뒤범벅이 되어 몸부림을 치던 아내의 이마에 떨어져 혼비백산해 있던 그녀를 깨운다. 그 순간 여인은 자기 위에 누워 두 팔과 두 다리를 누르면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진정시키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저항을 멈추고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남편의 정성스런 간호와 진한 사랑을 받은 이 여인은 빠른 회복을 보여 이내 병원에서 퇴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아파하고 고통하는 남편의 사랑을 받은 아내는 놀랍고 신비한 치료를 받은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짐을 지며 살아가기에도 한없이 버겁고 힘겨운 이 세상에서 남과 함께 고통을 나눈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고통을 함께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을 함께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한다. 진정한 사랑은 함께 고통을 나누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사랑의 행위와 표현은 함께 고통을 나누는 사랑이다, 고통을 나눌 때 비로소 참사랑이 된다. 우리 인간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역시 이와 같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온갖 죄짐을 지고 신음하고 고통을 부르짖는 우리 인간들을 바라보시며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다.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주셨다. 더욱이 이러한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대신 고통을 져주시기까지 하셨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고통이요, 십자가의 사랑이다.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곧 우리 자신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자유롭게 하는 은혜가 된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큰 사랑을 받았으므로 고통하는 이웃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사랑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때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들 안에 충만할 것이다.
스코틀란드에 부르스라는 애국자가 있었다. 그가 스코틀란드를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그만 에드워드 황제의 군대에 포위를 당했다. 공교롭게도 그의 고향 뒷산에서 당한 일이었다. 죽을둥 살둥 홀홀 단신으로 도망했지만 점점 포위망은 좁혀져 왔다. 기진맥진하여 ‘ㅇ[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고 절망에 빠져있을 때였다. 어디에선지 귀에 익은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군대가 부르스의 애견을 풀어 주인의 냄새를 맡게 하고 부르스를 찾아내도록 꾸민 것이었다. 그는 좌절의 밑바닥까지 빠지게 되자 마지막으로 한번 더 몸부림을 쳐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온 몸이 성처투성이가 되도록 기고 기어서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부르스가 산꼭대기에서 그 너머 골짜기를 보니 이게 웬일인가? 시냇물이 흐르고 있지 않겠는가? 너무나 반가워서 뒹글다시피 하여 시냇가까지 내려갔다. 그리고는 황급히 물 속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곧 뒤따라 개들이 시냇가를 향해 오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주인의 냄새가 없어져버렸으므로 개들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물가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맥없이 짖어댈 뿐이었다. ‘아, 이제는 살았구나. 저 개들이 더 이상 나를 찾아내지 못하겠구나.’ 부르스는 이렇게 하여 살아날 수 있었다. 훗날 부르스는 그 경험을 통해서 큰 진리를 깨달았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절대 살지 못해.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너는 소용이 없어. 너 과거에 지은 죄를 한번 생각해 봐, 너 같은 죄인이 어떻게 의인이 된단 말이야?’라고 마귀의 힐책을 받고 때때로 심한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십자가에 흐르는 보혈의 강물에 몸을 던지고, 그 피 속에 자신이 잠기기만 하면 따라오던 마귀도 더 이상 추격하지 못하게 되고, 율법이 자기를 정죄하지 못하게 되며, 죽음이 자연히 덮치지 못하는 새생명을 앋는다는 진리를 그가 깨달은 것이다.
우리도 이 십자가의 피에 믿음으로 나 자신의 몸을 담그기만 하면 이제는 죄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은 자가 된다. 이제는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믿음의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만 남았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모든 죄에서 자유함을 얻기를 바란다. 주님은 여러분이 십자가를 등지고 돌아서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지금도 여러분을 간절히 부르고 계신다. 복음성가 ‘예수님 찬양’에보면 ‘예수님 권세 예수님 권세 예수님 권세 내 권세’란 가사가 있다. 예수님 권세는 내 권세이고 예수님 공로는 내 공로이다. 이런 확신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00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