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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태안 해양유물 전시관(國立泰安海洋遺物展示館) /충남 근흥면 신진도(新津島)
*. 한국의 해양 유물
충남의 신진도(新津島)는 초행길이다.
낯선 고장 그것도 이름도 생소한 섬인 신진도를 처음 찾아가는 길이라서 기대도 컸다.
신진도(新津島)는 서산시 근흥면의 정죽반도(程竹半渡) 끝자락에 위치한 섬이다.
면적은 1.4㎢, 해안선 길이 7km, 인구 251(1985)명이 주로 어업에 종사하며 멸치, 참치, 우럭, 노래미 등과 해삼, 전복을 양식하고 살던 한적한 조그마한 섬이었다.
신진대교(新津大橋)가 설립되면서 신진도는 정죽반도의 그동안 중심항구였던 안흥항(安興港)을 제치고 신진항이 중심이 되어 크게 발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요 조그마한 섬에 웬 다리가 이렇게 우람하고 멋진가. 양쪽으로 자전거 도로까지 나 있다. 생각보다 많은 차들도 오가고 있다.
그 신진도의 선착장을 가기 위해서 신진대교를 막 넘어서려는데 좌측에 '국립태안 해양유물 전시관(國立泰安海洋遺物展示館)' 이란 이정표가 발길을 잡는다.
이번 태안 여행에서 꼭 보고 싶어 벼르던 해저 유물의 실물을 드디어 내가 오늘 신진도에서 보는구나 하였다.
그동안 내가 갖고 있는 해저유물의 대한 상식으로는 신안해안유물(新安海岸遺物)에 관한 약간의 지식이 전부였다.
1976년 산안군 앞바다 해저 20m 지점의 해저에서 옛날 일본으로 향하던 중국 선박 무역선(貿易船)에서 인양되었다는 송(宋), 원(元) 나라 시대의 세계적인 도자기 유물 1만 9천여 점의 실물을 이제야 보게 되었나 보다 하였다.
전시된 태안 해저 유물들을 둘러보다 보니 이곳 유물은 신안에서 발견한 도자기가 아니고 '국립태안해양유물 전시관'이란 이름처럼 태안(泰安) 앞 바다에서 인양된 유물들이었다.
경기 대부도(大阜島)에서 군산 비인도에 이르기까지 지역에서 난파된 배에서 건져올린 신라시대부터 고려, 조선조 무렵의 유물들이었다.
옛날 안흥(安興) 앞 바다는 연중 안개가 낀 날이 많고, 물길이 험하여 조난 사고가 잦아서 뱃사람들이 항행하기를 꺼려하는 지역의 바다였다.
그래서 이 항구의 이름을 '난행량'(難行梁)'이라고 부르던 섬이다. 항행하기 어려운 량(梁)이란 뜻이다.
항구 이름을 '안흥(安興)'이라 부르게 된 것도 편안한 여행을 기원하는 뜻에서 편안한 '安(안) 자를 써서 '난행량'을 '안흥(安興)'으로 고친 것이다.
다음은 이 전시장에서 수집한 태안 유물(遺物)에 대한 이야기들다.
태안 앞 바다는 과거에 중국 사신(使臣)의 왕래와 무역선(貿易船) 그리고 세곡선(稅穀船)이 항해하거나, 항행 중 머물던 곳으로 서해의 중요한 항로였다.
그러나 그 무렵의 서해안 바다는 지금 처럼 잔잔한 바다가 아니고 과거에는 밀물과 썰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때를 소리로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물살이 빠르고 거세던 바다다. 게다가 주변에 암초가 곳곳에 산재하여 있는 위험한 바다였다. 거기에 서해안은 수시로 짙은 안개가 끼는 지역이라서 해상사고가 많았던 위험한 바다였다.
지금까지 한국의 해안 수중 발굴을 통하여 건져 올린 수중 문화재는 난파 된 배 14척에서 건져 올려 보관하고 있는 총 10만여 점이다. 그중 5만여 점을 국가문화재로 등록하여 소장 관리하고 있었다.
그후 2007년에0 충남 태안 대섬과 마도 앞바다에서 5척의 난파선(難破船)에서 2만 8천여점의 유물이 발견되면서 해저 유물의 중심지는 신안에서 태안으로 옮겨져서 태안은 새로운 해저수중유물의 중심지로 부각하게 되었다. 태안 마도 앞바다는 '바다 속의 경주' 라 불릴 만큼 아직도 건져 올리지 못한 유물이 더 많은 곳이라 한다.
그래서 태안은 한국 수중 유무 발굴의 메카가 되어 이를 관리하는 해양유물 전시관이 필요하개 되어 신진도에 2019년 11월 18일에 '국립태안 해양유물 전시관(國立泰安海洋遺物展示館)'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이를 보려 전국에서 벌써 이 한적한 고장에 5~6만 명이 다녀간 모양이다.
이 국립태안 해양유물관에는 현재 인천, 경기, 충청해역에서 발굴된 난파선 8척과 수중문화재 3만여 점을 관리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 수중문화재 전체의 1/3 정도에 이른다.
*.복원된 고려 선박 '마도 1호선'
전시관은 지하와 1, 2층으로 된 최신식 시설로, 이 전시실을 둘러보다 보니 유물은 신라 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조에 이르는 유물들이었다.
그중 이 태안 해양 수중 보물 중에 압권은 지하에 고려 시대 전통배 '마호1호선'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작은 것보다는 큰 것에 가치를 더 부여하는 세상이어서 그런 것 같다.
마도1호선은 고려시대인 1208년 봄 전남, 해남, 장흥 등지에서 거둔 세곡(稅穀)을 싣고 개경(開京, 개성)으로 향하다가 태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고려시대 대형선박이다. 길이는 10.8m, 너비가 3.7m 선박으로 곡물 1,000섬(51톤)을 싣고 가던 배다. 배의 높이가 2.89m으로 깊고, 바닥이 넓은 것이 이 배의 특징이다. 갯벌에 묻혀 남아 있던 모습을 복원 재현한 배로 당시의 배들은 여러 번 수리해서 다시 써야 하기 때문에 선체를 분리할 때 부식하기 쉬운 쇠못 대신에 나무 못을 사용하여 소로 연결하였다.
*. 서해 수중 해저에서 잠들었던 도자기들
침몰한 거의 모든 배가 실어 나르던 것은 조운선(漕運船)의 세곡(稅穀)과 도자기(陶瓷器)여서 곡물은 썩어 흔적이 없어졌고, 남아 있는 것은 썩지 않는 도자기였다.
그 도자기들은 생산지에서 소비지로 운반하던 도중에 침몰된 배여서 도자기들은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한 새상품르로 일부는 선적될 당시 포장된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은 것으로 발견된 것이어서 보존 가치가 높은 것들이었다.
게다가 당시 고려 청자기의 수준은 세계적이어서 세계적 보물 수준의 도자기가 많았다.
*.뱃사람들의 유물(遺物)
난파선에서 우리들의 눈길을 끄는 것들은 사공들이 남긴 당시 배에서 쓰던 일상 용품이 많았다. 유물을 통하여 시대를 뛰어넘어 발견할 수 있는 신라, 고려, 조선인들의 삶의 몸습이었다.
선원들 구성으로는 총책임자 향리(鄕吏)와 선장(梢工)과 뱃사람들이다.
당시의 배들은 목선(木船)이요 범선(帆船)이어서 국내인 경우에도 20~30일의 항해를 하여야만 했다.
그 항해 중에 뱃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하였을까를 알게 하여 주는 유물도 많이 발견된다.
그 중에 뱃사람들이 사용하던 식기류로 청자, 도기, 청동 등이 있다. 그중 좋은 식기는 물론 책임자의 것일 테고, 보통의 뱃사람들은 1인당 식기로는 대접과 접시 각 1~2개, 수저 1벌, 병은 3~4 명이 공동 사용하였던 것 같다.
숟가락은 청동이고 젓가락은 드물었다. 숟가락은 책임자 급이 쓰던 것이고, 사공들은 대나무나 나무로 다듬은 것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주식으로는 곡류로 찐밥이나 죽이었고, 반찬은 젓갈류와 장류였다.
뱃사람들이 잡아 먹었을 것으로 보이는 사슴, 개, 소, 고라니, 오리, 닭, 가아우지 등 짐승들의 뼈도 전시되어 있었다.
난파선에는 빗, 동곳 같은생활용품이나, 망치 같은 공구 있지만 여가 생활을 보여주는 장기(將棋)돌 등도 보인다.
*.최초로 발견된 수중 인골(人骨)
난파선에서 사람의 뼈가 처음으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키 160cm 키의 30대 고려 남성이었다.
남파선은 육지를 가까이 두고 항해하기 때문에 배가 침몰하면 뱃사람들은 수영을 잘하는 이가 많아서 가까운 육지나 섬으로 수영으로 피해 나올 수 있았다. 여기서 발견된 뱃사람 인골은 화물에 깔려 빠져 나오지 못하고 배안에서 그대로 유명을 달리한 것 같았다.
이 모든 해저 유물들은 장기간에 걸쳐서 조개를 캐거나, 낚지를 잡거나 고기를 잡던 어민들의 신고에 의해 이루어진 나라와 주민들의 힘이 합친 자랑스런 유물들이다.
그런데 인양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이 '태안 인근해역은 수중 유물의 경주'라 할 정도로 아직도 건져 올릴 수중 해저 유뭃이 더 많다고 한다.
*. 수중 문화재 보호 서약
이상에서 말하는 수중 고고학 유물들은 한국의 문화재로 값나가는 보물들이라서 이를 인양하면서 흑심을 품는 다는 것은 죄가 되는 일이다. 그래서 인양과 관계되는 고고학 관계자들은 굳은 도덕성이 필요하였다. 다음은 믿음직한 해저 유물 인양자들이 한 수중보호 서약의 일부다.
1. 수중 문화재는 아끼고 보호하여 후손에게 물려 주어야 할 소중한 보배이자 인류문화의 자산이다.
1. 우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수중문화재 발굴조사를 수행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더불어 수중문화재 보호의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1.우리는 위의 내용을 마음 깊이 새겨 소중한 수중문화유산 보호에 앞장설 것을 서약한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도자기 등이 발견 될 수 있었던 것은 태안 연안의 수심이 비교적 얕고, 긴 세월동안 유물들을 갯벌이 덮어주고 염분의 바닷물이 붇식을 막아주었기 때문이요, 거기에 해안 주민들의 신고 정신이 투철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이에 문외자이만 그분들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
-2019년 세모에
첫댓글 저도 골동품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요. 태안 바다 물속으로 잠수복 입고 탐사를 하고 싶어집니다.
태안유물을 찾아서요. 지금도 계속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만 성철용 선생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