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가지 해탈[八解脫]
35. “아난다여, 참으로 여덟 가지 해탈[八解脫](*1)이 있다. 무엇이 여덟인가?
(*1) “해탈(vimokkha)은 무슨 뜻에서 해탈이라 하는가? 벗어남(adhimuccana)의 뜻에서 해탈이라 한다. 그러면 이 ‘벗어남의 뜻'이란 무엇인가? 반대되는 법들로부터 잘 벗어난다는 뜻이며 대상을 즐기는 것을 벗어난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무릎에서 사지를 늘어뜨리고 잠든 아이처럼 거머쥐고 있지 않은 상태로 어떠한 의심도 없이 대상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뜻은 맨 마지막의 [여덟 번째] 해탈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처음의 7가지에만 있다.”(DA.ⅱ.512~13)
“벗어남의 뜻은 상수멸이라는 마지막 해탈에는 없다. 다만 해탈했음의 뜻만 적용된다. 즉 상수멸은 마음과 마음부수 모두가 소멸된 경지이므로 반대되는 법들이니 대상이니 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남이라는 해탈의 뜻은 적용되지 않고 오직 해탈했음이라는 근본적인 뜻만이 적용된다는 말이다.
① 여기 비구는 [안으로] 색계에 속하는 [禪에 들어] 밖으로 물질들을 본다. 이것이 첫 번째 해탈이다.(*2)
(*2) ‘색계에 속하는 선에 들어 밖으로 물질들을 본다’고 옮긴 원어는 rūpī rūpāni passati인데, 직역하면 ‘물질을 가진 자가(rūpī) 물질들을(rūpāni) 본다(passati)'이다. 주석서에서는 “안으로 머리털 등에서 푸른 색의 까시나 등을 통해서 생겨난 색계선들의 물질이 그에게 있다고 해서 물질을 가진 자라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어서 이와 같이 의역하였다.
그리고 계속하기를 “‘밖으로 물질들을 본다.’는 것은 밖으로도 푸른색 등 의 까시나의 물질들을 禪의 눈(jhāna-cakkhu)으로 본다는 뜻이다. 이것을 통해서 안과 밖의 토대들을 가진 까시나들에서 생긴 禪을 가진 사람의 네 가지 색계 선들을 보이신 것이다.”((DA.ⅱ.513) 라고 설명하고 있다.
요약하면 이 수행자는 안의 물질을 대상으로 삼아서도 색계 선에 들고 밖의 물질을 대상으로 삼아서도 색계 선에 든다는 의미이다. 물질을 대상으로 선을 닦으면 거기서는 반드시 표상(nimitta)이 일어나는데, 표상은 근접의 표상→ 익힌 표상→ 닮은 표상으로 발전하고, 닮은 표상이 확립될 때 그것을 대상으로 본삼매에 든다.
② 안으로 물질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서 밖으로 물질들을 본다. 이것이 두 번째 해탈이다.(*3)
(*3) “‘안으로 물질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서’라는 것은 자신의 머리털 등에서 색계선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밖으로 준비단계의 수행을 짓고서 밖으로 禪을 일으킨 사람의 색계선들을 보이신 것이다.” 즉 안의 물질을 대상으로 삼아서는 삼매에 들지 않고 밖의 물질을 대상으로 삼아서 색계 선에 드는 사람을 말한다.
③ 깨끗하다[淨]고 확신한다. 이것이 세 번째 해탈이다.(*4)
(*4) “‘깨끗하다[淨]고 확신한다.’라는 것은 이렇게 해서 아주 청정한 푸른색 등의 색깔의 까시나들에 대한 禪들을 보이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떠한 본삼매의 안에도 깨끗함이라는 즐길거리는 없다. 그러나 청정하고 깨끗한 까시나를 대상으로 삼고서 머무는 자에게는 깨끗하다고 확신한다는 설명이 적용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④ 물질[色]에 대한 인식(산냐)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의 인식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네 번째 해탈이다.
⑤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알음알이[識]’라고 하면서
식무변처(識無邊處)에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다섯 번째 해탈이다.
⑥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여섯 번째 해탈이다.
⑦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를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일곱 번째 해탈이다.
⑧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滅, 인식과 느낌의 그침)(*5)을 구족하여 머문다.
이것이 여덟 번째 해탈이다.
(*5) 상수멸로 옮긴 원어는 saññā(상)-vedayita(수)-nirodha(멸)이다. 이 경지를 상수멸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 경지에서는 인식[想]과 느낌[受]이라는 마음의 상카라들[心行]이 완전히 없어지기[滅] 때문이다. 이 상수멸의 경지는 불환자 이상의 성자들만이 체득할 수 있는 경지다.
아난다여, 이것이 여덟 가지 해탈이다.
맺는 말
36. “ 아난다여, 이 여덟 가지 해탈을 순서대로도 증득하고,
역순으로도 증득하고, 순서대로와 역순으로도 증득한다.
그리고 그는 원하는 곳마다 원하는 때마다
원하는 만큼 증득하기도 하고 출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의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문다.
아난다여, 이를 일러 비구는 양면해탈(*1)을 한 자라고 한다.
아난다여, 이 양면해탈과는 다른 더 높고 더 수승한 양면해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설하였다.
아난다 존자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1) “양면해탈이란 두 부분으로 해탈한 것이니 무색의 증득으로 물질의 무리(rūpakāya, 色身)로부터 해탈하였고,
도(道)에 의해 정신의 무리(nāmakāya, 名身)로부터 해탈하였다는 뜻이다.
이 양면해탈은 공무변처 등의 어떤 경지로부터 출정하여 아라한과를 얻는 것과,
불환자가 된 뒤 멸진정으로부터 출정하여 아라한과를 얻는 것으로 모두 모두 다섯 가지가 있다.(DA.ⅱ.514).
여기서 보듯이 양면해탈은 반드시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공무변처부터 비상비비상처까지의 4무색계정 가운데 하나에 들었다가 출정해서 아라한도를 증득해야한다.
아라한도 등의 [네 가지] 도는 반드시 위빳사나를 통해야 가능하다.
이렇게 사마타를 통해서 4무색정 가운데 하나를 증득하고 위빳사나를 통해서 아라한이 되는 것을 양면해탈이라 한다.
한편 통찰지의 해탈은 색계 4선 이하를 증득한 뒤 출정하거나,
아예 禪의 증득 없이 위빳사나를 통해서 아라한도를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주석서를 통해서 보면 마음의 해탈[心解脫]은 크게 두 가지 문맥으로 설명된다.
첫째는 “모든 오염원과 족쇄로부터 해탈한 아라한과의 마음과 동의어다.”(DA.ⅰ313)라거나
“여기서 마음이란 아라한과와 함께 한 삼매이다. … 사마타의 과가 마음의 해탈이다.”(MA.ⅰ.164~65)라는
주석서의 설명을 종합해볼 때 마음의 해탈은 양면해탈과 동의어로 간주해야 한다.
둘째, “마음의 해탈이란 색계와 무색계에 속하는 마음의 해탈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여덟 가지 증득들 가운데 어떤 하나의 증득이라고 하였다.”(AAⅲ.153)이라고 하였다.”
(AAT.ⅱ.321)라는 설명을 통해서 보면,
마음의 해탈은 단지 색계4선과 무색계 4선 가운데 하나의 경지를 얻은 것,
즉 사마타의 경지를 말하기도 한다.
「대인연경」이 끝났다.
출처 : 각묵스님 옮김. 『디가니까야』 2권. 153쪽-15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