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성도
2023. 4. 23(주일낮예배) 골로새서 2:16-19
폴 브랜드 박사는 인도에서 20년, 미국에서 30년동안 나병환자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이렇게 나병환자를 위하여 헌신한 폴 브랜드 박사가 영국에 출장을 가서 여러 지방을 다니며 업무를 보았다. 그리고 호텔에 들어가서 양말을 벗는데, 깜짝 놀랬다. 왜냐하면 발뒤꿈치에 감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병전문의인 폴 브랜드 박사는 나병균에 감염되면 피부와 말초신경의 감각이 마비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발뒤꿈치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자, 폴 브랜드 박사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날카로운 것을 가지고 다시 발뒤꿈치를 찔렀지만, 역시 감각이 없었다. 폴 브랜드 박사는 드디어! 라는 생각으로 침대에 누워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다시 날카로운 것으로 발뒤꿈치를 찔렀다. 혹시 라는 마음으로 폴 브랜드 박사는 발뒤꿈치를 찔렀는데, 그 순간 얼마나 아팠던지 아~ 하고 고함을 칠 정도였다. 그런데 폴 브랜드 박사의 마음에는 기쁨과 감사가 넘쳤다. 그 일이 있은 후 폴 브랜드 박사는 칼을 사용하다 실수로 손가락을 베어서 손가락이 시릴 때에도 감사하고, 길을 가다 넘어져 무릎이 아파도 기뻐했다고 한다.
왜 폴 브랜드 박사가 기뻐했겠는가? 폴 브랜드 박사가 인도에서 나병환자를 돌볼 때 그 병원은 환경이 열악하여 쥐가 득실거렸다. 그런데 어느날 폴 브랜드 박사가 근무를 하다가 병실을 돌아보고 있었는데, 잠자는 나병환자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쥐가 갉아 먹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인은 감각이 있기 때문에 벌떡 일어났겠지만, 감각을 잃은 나병환자는 자기의 손가락을 쥐가 갉아먹고 있는데도 코를 골며 자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본 폴 브랜드 박사는 고통이 없는 지옥이라는 말을 한다. 폴 브랜드 박사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성장하고, 성숙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를 낳았다. 그러면 아이가 키도 자라고, 또 걸음마도 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가 성장하지 않고, 성숙되어져 가지 않으면 그 아이는 부모의 근심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거듭났으면 이제 새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져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가지고 있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오늘 본문은 AD 62년 경에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골로새교회에 쓴 옥중서신이다. 커피브레이크에서 배운 것처럼 당시 에베소는 로마의 아시아 수도였다. 그래서 정치, 경제, 문화가 발달된 곳이었다. 그러나 에베소에서 160Km 정도 떨어진 골로새는 시골의 작은 도시이다. 그런데 시골의 작은 교회였던 골로새 교회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래서 골로새서 2장 5절에서 이렇게 기록한다.
(골 2: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질서 있게 행한다는 말은 군인들이 제식훈련(의장대사열)을 할 때 오와 열을 맞추어서 걷는 모습을 말한다. 그래서 그 틈에 아무 것도 들어갈 수 없는 상태가 질서 있게 행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그리고 믿음이 굳건한 것에서 굳건하다는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을 정확하게 완수하는 상태를 말하는 군대용어이다.
이것이 골로새 교회의 모습이다. 골로새교회는 성도들 간에 연합이 잘 되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 내는 그런 건강한 교회였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보면서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골로새 교회에 철학과 속임수로 노략하는 자들이 들어왔다. 그래서 골로새 교회는 많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혼란에 빠진 골로새 교회를 노진준이라는 목사님은 이해하기 쉽게 이렇게 설명하여서 제 생각을 조금 넣었다.
시골에 순수한 모습으로 신앙생활하는 골로새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방문하였다. 그 사람들은 예배하는 자세가 남달랐고, 또 기도도 아주 거룩하게 하었다. 뿐만 아니라, 음식을 먹을 때도 부정한 음식은 먹지 않고, 교양있어 보였으며, 정한 때에는 며칠동안 금식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사람들을 볼 때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생활하는 모습과 달라서 혼돈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그 사람들이 한 말과 행동은 자신들의 신앙생활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면서 그들은 부러움에 빠져 버렸다. 그래서 18절을 보면 꾸며낸 겸손과 천사숭배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꾸며낸 겸손은 거짓된 겸손이다. 그리고 천사숭배는 천사를 높이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처럼 아름다웠다는 것이다(천사숭배-4세기). 그래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은 나도 저렇게 예배를 드리고, 또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다고 부러워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꾸며낸 겸손과 예배에 사로잡힐까 주의하라고 경고한다.
왜 사람들이 보기에 겸손해 보이고, 또 환상적인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주의하라고 하는가? 이제 오늘 본문 18-19절을 읽기 바란다.
(골 2:18-19)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9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여기서 자라나게 하다(αὔξησις)는 말은 거짓된 겸손과 함께 천사와 함께 예배하는 듯한 화려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바울이 말하는 자라나게 하다는 말은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견고한 연합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골로새교회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질서있고,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더욱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빈틈없이 순종해 나가는 그러한 모습이 성숙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이런 성숙을 가지고 있는가? 지난 주 수요일에 이기현 목사님이 어린아기의 뒤집기 이야기를 하였다. 어린아이가 뒤집기를 하고 나면 얼굴이 벌겋게 되어져 있다. 그만큼 아이는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들은 너무 신기해서 힘들게 뒤집은 아이를 다시 바로 눕힌다. 그리고 동영상 찍어서 할아버지 보여 드려야 한다고 또 다시 뒤집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뒤집는 것을 영상으로 찍어서 할아버지에게 보내 드리면 할아버지는 그 영상을 보고 보고 또 본다.
왜 할아버지는 그 영상을 계속 보겠는가? 겨우 뒤집은 아이를 바로 눕히는 것은 아이에게 고난이다. 그런데 아이가 힘들게 뒤집는 모습을 보는 할아버지는 내 손자가 이렇게 커가구나 하면서 기뻐한다. 그런데 하나님도 우리를 통하여 이런 기쁨을 가지고 싶어하신다. 그래서 때때로 우리에게는 고난이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져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가는 그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성숙하는 것을 이렇게 기뻐하는가?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에 배운 송아지와 중고등학교 때 배운 이별의 노래가 있다.
●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은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여대생과 제주도로 도망갔다가 돌아오면서>
이 노래를 누가 작사하였겠는가? 청록파 시인 박목월의 시이다. 그런데 박목월 선생의 아들인 박동규 교수가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쓴 글이 있다. 당시 가난한 시절에 책상이 없었다. 그래서 저녁식사를 하신 아버지는 밥상을 찾았다. 그때 어머니는 밥상을 깨끗이 닦아서 아버지 앞에 두고 3개월 된 동생을 업고 나갔다.
그 날도 그랬다. 늦게까지 글을 쓰시던 아버지는 옆에 잠이 든 박동규 교수를 깨우면서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어가니 어머니를 찾아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밖에 나갔더는 눈이 와서 무릎까지 왔는데,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아랫동네 친구 집에 계신 것같아 그리로 가다가 보자기를 머리에 쓰고 골목길을 서성이는 엄마를 보았다. 그 추위에 동생을 업고 서성이는 그 엄마의 모습을 박동규 교수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박동규 교수는 그때 왜 바깥에서 그렇게 떨었는지를 물었다. 그 말에 엄마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네 아버지는 밤에 그렇게 시를 다 쓰고 나면 발표하기 전에 제일 먼저 나보고 읽어 보라고 해
박목월은 돈도 벌지 못하였고, 또 아내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여대생과 함께 제주도로 도망하버린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엄마는 그러한 아빠를 위하여 모든 헌신과 희생을 다하였다. 그러면서 남편이 쓴 글을 누구보다 먼저 읽는 것으로 족해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박목월 시인의 아내 유익순 여사는의 섬김과 헌신을 통하여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 만들어 진 것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그 많은 시가 나온 것은 박목월의 탁월함이 아니라, 사실 유익순 여사의 섬김과 헌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성숙한 성도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골로새서와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에베소서를 보면 사도 바울은 왜 자신이 갇힌 자가 되었는지? 또 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받았는지? 그 이유를 에베소서 3:1-2절에서 말하고 있다.
(엡 3:1-2)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2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언약의 백성이 되었고, 그 표로 할례를 받았다. 그런데 그들은 그 할례를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였을 때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나누는 막힌 담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위함이 될 때에 우리는 그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과 차별을 두게 된다. 그래서 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많이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 성격이 좋은 사람과 성격이 좋지 못한 사람사이에는 막힌 담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막힌 담을 허물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래서 이제 구원을 받은 바울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그것이 너희를 위한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조나단 에드워드가 부흥운동을 할 때 가장 많이 사용했던 단어는 Beauty and accellence(아름다움과 탁월함)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교회의 부흥이 끝났을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I” 였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하는 말을 할 때 교회의 부흥은 멈추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저와 여러분의 신앙에 “나”가 주인공이 되어져 있지 않는가? 비록 외적으로 화려함이 없고, 사람들 앞에 보여줄 것이 내게는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탁월하심을 알며,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면 저와 여러분은 성숙한 자리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숙한 사람은 결국 또 다른 사람을 세워가는 사명자, 사역자가 되어져 있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의 탁월함으로 사람을 세워나가는 복된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