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명상을 열정적으로 남에게 감염시키려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명상의 길은 사적이며 고도로 고독한 길일 것이다.
독서 체험도 그와 비슷하다고 믿는다. 나는 독서의 몰입에서 그 누구도 부럽지 않다. 그 곳에 도달하는 길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건강한 자든 병약한 자든 결국 자기가 직접 그 자리까지 가야 하고, 그걸 남에게 줄 수도 남에게서 가져올 수도, 남이 대신 해줄 수도 없다. 이 체험을 누구에게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하자. 명상과 마찬가지로 독서 체험을 구구절절 면밀히 설명할수록 얼치기 사이비가 된다. 글로 쓸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남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는 자연스럽게 해낸다.
그녀의 소설은 끊임없이 펼쳐지고 접히는 종이 조각 같다. 보통 하나 아니면 두 셋, 혹은 대여섯 개의 카메라를 따라 시선을 움직이는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끊임없이 어떤 지점에서 다른 방식으로 펼쳐질 지 모르는 소설의 진행은 한동안 읽는 리듬을 잃게 만들고 따라가던 시선은 엉뚱한 것을 보게 된다. 소네치카를 두 번째 읽었을 때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보다는 접혀지는 곳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소네치카가 책을 열심히 읽었던 20년 기간을 접어버렸고, 세 번이나 책을 읽기 시작하는 소네치카의 이야기로 글을 접는다.
우리는 책 읽기를 통해 무엇을 얻을까? 개개인마다 너무 달라 무엇이라 또렷히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인간에게는 가짜 감정이란 없고,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은 진짜라는 이야기. 우리가 허구의 이야기를 읽고 보며 느끼는 감정들은 전부 진실이다. 소네치카도 소네치카를 읽는 우리도 책을 읽기 시작하면 인생에서 재생되던 감정을 멈추고 책의 감정을 재생한다. 그러자 이 페이지들 속에 있는 단어의 완벽함과 구현되어 있는 고상함으로부터 오는 조용한 행복이 소냐를 비추었다.
단편 속에서 소냐는 외롭다. 작가는 소냐에게 자신이 읽었던 책들을 이야기할 상대를 결코 주지 않는다. 소네치카는 아무도 일하지 않는 집에서 몇십 년간 일용할 양식을 벌어다 날랐고,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만든 그 집을 사기 위해 몇십년 동안 돈을 아껴 모으느라 늙었다. 의외로 책을 읽는 두 번째 사람, 야샤는 배우가 되기 위한 실용론적 목적으로 책을 읽는다. 야샤가 그 집에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소네치카가 오랜 기간 그렇게 그 공간을 만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까지도 소냐는 많은 편지를 주고받아 야샤에게 가족을 돌려준다.
책에서 잘 묘사되지 않지만, 이야기의 행간에서 인물들이 굉장히 괴로운 시기를 버텨내고 있다. 전쟁은 계속되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같은 학교를 다녔던 친구들도 몇 년 사이 하나 둘 죽어나가기도 한다. 아주 긴 기간 궁핍하게 살고 평생을 일해 얻었던 따뜻한 집도 국가에게 휘둘리며 순식간에 뿌리채 뽑힌다. 책 읽기가 위로가 된다고는 하지 않겠다. 좀 치사하지만 다른 이의 글을 인용하며 이 글을 접어본다.
나는 허구에 대해 생각했다. 때로는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해방이라는 명목으로, 때로는 삶의 의미라는 구실을 내세워 다가오는 허구들. 나는 그 허구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쉴 새 없이 허구를 만들어내고 그 허구 속에서만 살 수 있는 존재다. 심지어 나는 그 일로 돈을 벌려하고 있다. 허구는 익사에 대한 공포와 수면 위로 탈출할 수 있다는 믿음이며, 바닷물이자 산소통 그 자체다. 어떤 허구에는 다른 허구로 맞서고, 어떤 허구에는 타협하며, 어떤 허구는 이용하고, 어떤 허구에는 의존할 수 밖에 없다. ( 5년 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
첫댓글 서정님의 글을 읽은 체험을 설명하기 어렵네요. 설명하려할수록 얼치기사이비가 되니까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독서를 체험이라고 생각을 못 해 봤어요. 와~ 서정님도 곧 책 내셔야 할듯요! 구독자 한 명 추가요~~~
그런데 TV가 해상도가 좋아야 더 선명하고 옛것은 화질이 구질구질하듯이, 독서라는 체험도 체험 재생기(?)가 좋아야 더 잘 보이는 것 같습니다 ㅋㅋ.
저는 주인공이 정말 독서를 통해 위로를 받았을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독서로 마음의 안식을 찾는 모습이 너무나 평범하여 과연 그것으로 위안이 된 것인지 알기 어려웠습니다. 그냥 어떤 의식적 행위가 필요했고, 마침 그게 주인공에게는 독서였을까요. 인생 전체로 보면 실제로도 그렇겠지만, 독서에 대한 비중도 생각보다 작았고요. 어쩌면 저도 독서를 통해 궁극적인 위로를 받지 못하였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의 다양한 문제를 독서로 해결할 수 있는 한계는 엄연히 존재하니까요. 그래도 저는 독서라는 행위 자체는 좋은거 같습니다. 현재 각종 OTT 서비스로 인해 많은 비중을 잃고 있지만요.
저는 위로를 받았다고는 쓰지 않았어요. 삶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핵심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한 진정한 위로라는건 성립하지 않는다고 믿고요. 책 읽기란 삶에서 한눈 팔기, 한숨 돌리기, 기분 전환하기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인생을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특정 시간동안 다른 행위로 채울 수 있다는게 중요하네요. 어떤 문제로 인해 8시간 계속 괴롭지만 2시간 책을 읽는다면, 6시간 괴롭고 2시간은 다른 감정을 재생하는 거니까요. '어떤 의식적 행위'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다른 것들과 뭐가 다를까, 차이를 따져보는 것도 흥미롭겠습니다. 영상은 영상이 내게로 그대로 투영되고, 서핑이나 등산 같은 행위는 내가 그 환경 안에 들어가 하나가 된다면, 책 읽기란 암호같은 단어 조각들이 머리 속에서 재구성되는 과정이 진행된다는게 꽤 다른 것 같아요. 머리를 완전히 쓰는 것도 안 쓰는 것도 아니고 절반만 쓴다고 할까요. (이런 설명은 하루키의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계산사 묘사가 아주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여튼 그렇게 한눈 팔게 도와주는 것이 좋죠. 이 모든게 허구라 하더라도.
@서정 서정님 글에 대한 반론이 아니라, 정모에서 못다한 저의 이야기입니다. 확실히 영상에 현혹되어 시청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마음 한 구석은 뭔지 모를 불편감이 있습니다.
@Astroboy 아, 그러셨군요. 그런 찝찝함, 불편함, 죄책감이라고 할까 그런게 들 때면 교육 받은대로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ㅋㅋ.
독서는 혼자될 수 있어서 좋아요
외롭기도 하고 고독하기도 하군요.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뭔가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환상이 사람을 책앞으로 끌어들이게 만들죠.
그것이 위로든 깨우침이든 뭐든 말입니다.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이 얼마나 멋진 판타지인가요~~ㅎㅎ
무슨 일이든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근거림으로 열어봅니다. 로또와 비슷한 확률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