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동시 감상
남 진 원
귀뚜라미 우는 밤
김영일
도로 또로 또로
귀뚜라미 우는 밤.
가만히 책을 보면
책 속에 귀뚜라미 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귀뚜라미 소리만 듣는다.
또로 또로 또로
멀리 멀리 동무기 생각난다.
** 가을을 상징하는 곤충들 중에는 잠자리, 귀뚜라미가 대표적이다. 가을이 되면 책을 읽는다. 그럴 때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면 마치 귀뚜라미 소리가 책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 은은하고 아름다운 소리에 책 읽는 것도 멈추고 귀뚜라미 소리만 듣는다. 귀뚜라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문득 문득 그리운 친구 얼굴도 떠오를 것이다. 귀뚜라미 소리만 듣고 있어도 행복한 가을밤일 것이다.
고 또래 그 만큼
김동극
여울의 아기 붕어
다 커서 어디론지
가고 없어도
고 또래 그만큼
그때 그 여울
골목의 아이들
다 커서 어디론지
가고 없어도
고 또래 그만큼
그때 그 골목
** 이렇게 좋은 명시를 보는 게 행복이다. 이 동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학교에서는 매년 고 또래 그 만큼의 어린이들이 입학을 하고 졸업을 한다. 어디 학교 뿐이겠는가. 한 살 두 살 먹는 나이대로 사람들은 또 고 또래 그만큼 젊게 살다가 늙어간다. 20대는 모두들 청년들이라고 부른다. 그 청년들이 70이 되면 모두들 노인이라고 부른다. 나이 먹는 만큼 고 또래 그만큼씩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네 인생 살이의 곳곳이 모두 「그때 그 골목」이다.
봄이 오는 길
임인수
고개 넘어 가는 길
봄이 오는 길
봄길 쪼르르르
눈이 녹는다
길은 진흙기
산으로 가는 길
나무하러 자박자박
짚신 신고 가는데
봄길 쪼르르르
눈이 녹는다.
** 추운 겨울을 견뎌내고 기다리는 봄이 오는 길, 얼마나 설레는 길일까요? 내렸던 산기슭의 눈도 녹으니 햇빛 드는 날이면 산색은 물에 젖어 반짝입니다.
고개 넘어 가는 길, 봅이 오는 설레는 길입니다. 길은 진흙으로 덮여 흙냄새도 마음에 푸근하지요. 짚신 신고 나무하러 산에 가는 길입니다. 나무하러 가지만 봄맞이를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경쾌하고 즐거운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짚신 신고 나무하러 갈 때이니 매우 오래 전의 이야기네요. 짚신은 짚으로 만든 신입니다. 짚신 신고 가면 편안하지만 못이나 날카로운 것을 만나면 발을 다칠 수도 있어 조심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모두 짚신을 신고 다녔습니다. 과거 시험을 보러 갈 때면 먼길이라 짚신이 곧 닳아 없어지니까 몇 켤레를 가지고 가기도 했습니다.
요즘 짚신을 신고 다니면 더 멋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임인수(1919 – 1967) 선생님은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조선신학교를 졸업하였고 1944년 [아이생활]에 동시 <봄노래>, <겨울밤>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습니다. 일제 말 암흑기의 문학운동에도 힘썼습니다.
자연의 멋스러움도 담긴 동시라서 매우 좋아합니다. 특히 나무를 하러 가면서 봄이 오는 걸 기뻐하는 모습이 은연중에 담겨 있어서 더욱 감동이 깊습니다. 쉬우면서도 편안한 동시입니다.
가을밤
장수철
멀리서 들려 오는
기적 소리에
나도 모르게 창문을 열어보았다
영이네 지붕 위엔
호박이 서너 개
달빛에 둥글둥글 살이 찌었다.
꽃밭 구석에서
벌써 우는 귀뚜라미 소리 ……
올 가을이
참 빠르다.
** 사람들이 계절 중에서 제일 기다리는 계절은 아마 봄과 가을일 것입니다. 봄은 생명이 솟아오르는 계절이어서 기쁨을 주고 가을은 사람의 감정을 평화롭게도 만들고 조금은 그리움 속으로 데려가기도 하니까요.
장수철 선생님은 동화와 소년소설을 많이 쓴는 분이지만 이렇게 좋은 동시도 있습니다. 읽으면 자연스럽습니다. 지붕위에서 딩굴딩굴 박이 익어가는 것처럼 아주 편안합니다. 나는 장수철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몇 번 만났지만 워낙 과묵한 분이라 말씀을 많이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 대신 선생님의 동시를 보면 즐거움에 잠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가을밤에 멀리서 들려오는 기적소리는 마음을 흔드는 아름다운 소리입니다. 그 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는 그 마음이 또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그런데 기적 소리 덕분에 양이네 지붕위에서 자라는 살찐 호박을 보고 흐뭇한 가을의 정취에 잠깁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귀뚜라미 소리에 가을이 왔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올 가을은 참 빠르다고 하였지만 내심으론 가을이 왔음을 반겨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가을을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산골 물
문삼석
하도
맑아서
가재가 나와서
하늘 구경합니다.
하도 맑아서
햇볕도 들어와
모래알을 셉니다.
** 산골 물이 얼마나 맑은지를 가재와 햇볕을 데려와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가재가 놀고 맑은 햇볕이 물속에서 더욱 사물들을 깨끗하고 밝게 비춰줍니다.
사람들 마음도 이렇게 맑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닭
강소천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모금 입에 물고
구름 한 번 쳐다보고.
** 사람들이 바쁘게 살다 보니 하늘을 쳐다보거나 구름을 보며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닭은 물을 먹으면서도 하늘을 보고 구름을 보는 걸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물론 닭이 하늘 보고 싶어 물 한 모금 먹고 쳐다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면에 숨은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놀라운 일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늘을 보기도 하고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여유롭고 행복하게 살아보자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보여집니다.
사람의 감정은 마음속에 깃들어 있지만 별로 나타내기는 힘듭니다. 아름다운 서정시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숨어있는 도는 잠들어 있는 감정을 끌어내오 풍요롭게 해 줍니다. 시의 큰 효용성입니다. 좋은 시를 많이 읽으면 행복해지는 이유입니다.
눈앞에, 코앞에
남진원
가을 절기인 백로가 지난 지도 10일이 지났다. 그런데도 한가위 날, 오늘은 여름 중에 가장 무더운 34도이다. 문을 열고 나가니 세상이 온통 찜질방이었다.
태어나 추석날에
처음 겪는 폭염이다
세상에 세상에, 입만 벌어졌다
말로만 떠들던 기상이변이 눈앞에, 코앞에 왔구나!
( 2024. 9. 17 )
시골 정거장
송명호
어디쯤 왔을까
창 밖을 내다보면
코스모스 활짝 핀
시골 정거장
능금 파는 아이는
경상도 사투리
정거장은 경상도
어디쯤일 것야.
내리는 사람
타는 손님
하나도 없는데
기차는 왜 설까,
쓸쓸한 마음.
푸른 깃발 흔들며
금테줄 단
늙은 역장님
호각을 불면
기차는 잠깐 쉬다
이내 떠나네.
코스모스
활짝 핀
시골 정거장
능금 파는 아이는
경상도 사투리
날 찬찬히
쳐다보는 걸 보면
서울이 무척
가고픈 게지.
칙칙 폭폭 워-- 워--
기차가 굴다리를
들어서기 전
창 밖으로 정거장을
돌아다 보면,
능금 파는
경상도 아이가
혼자 그림처럼
서 있네.
가을 바람
부는 데로
코스모스 같은
손을 흔드네.
송명호 선생은 1938년 함경남도 함흥 출생이다. 1956년 국도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시골정거장’이 당선되었다. 위의 작품은 당시 신춘문예 당선작품이다.
1989년 내가 한정동아동문학상 수싱식을 강릉에서 할 때였다. 송명호 선생이 축하하러 내려오셨다. 그때 한국화 하나를 선물로 받았다. 은은한 학의 그림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강릉 택시부 광장 사거리에 표구사가 있었다. 지금은 복권방으로 바뀌었다. 그 표구사에 맡겼는데 그 뒤 그 가게가 없어져버렸다. 표구하기로 한 그 작품을 그렇게 잃고 말았다. 송명호 선생에겐 이런 일이 늘 미안함으로 남았다. 국도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시골 정거장’ 동시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작품이다. 시골 역의 모습과 거기에서 사과를 피는 아이가 코스모스와 크로즈엎되면서 신선하고 쓸쓸한 정감을 보여준다. 그런 모습이 감정을 순화하여 아름다움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늘 만나면 얼굴에 만면의 미소를 머금던 송명호 선생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