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났다.(B.C. 551년, 노양공 22년). 그의 조상은 원래 송나라의 귀족이었으나 노로 망명하였다. 공자의 아버지 공흘은 자가 숙량이었다. 그러므로 보통 숙량흘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어머니 안징재는 공자를 낳을 당시 10대의 어린 소녀였다. 60세가 넘은 숙량흘은 안씨의 셋째 딸을 후처로 맞이한 것이다.
공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다. 즉 어머니가 이산에 기도를 드려 공자를 낳았다고 한다. 그의 머리 가운데는 들어가고 나온 데가 있어 이름을 구(丘 : 언덕)라고 했다고 한다. 무인이었던 공자의 부친은 그가 세 살 때 돌아가시고, 모친은 그가 24세 때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어릴 적에 제기를 벌여놓고 예를 베푸는 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이는 그가 어려서부터 비범한 자질을 보인 것이라고 하겠다.
그에게는 고정된 스승이 없었다. 그는 다만 타인의 장점을 본받고, 단점을 타산지석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공은 "우리 선생님께서야 어디에서나 배우시지 않은 데가 있겠습니까? 또한 어찌 정해진 스승이 있겠습니까(자장-22)?"라고 말한 것이다.
공자는 19세 때(B.C. 533년) 견관씨의 딸과 혼인하여 다음해 아들 리를 낳았다. 그는 결혼하던 해에 벼슬길에 나아갔다. 노나라 계씨의 창고 관리직을 맡은 그는 곡물출납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리고 21세 때 가축을 관리하는 일을 맡에 그 번식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이미 30대 청년시절에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노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이는 삼환씨였다. 이들은 국토를 채읍으로 삼고 군대와 가신을 길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소공은 계평자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삼환씨의 단결된 무력에 패하여 그는 제나라로 도주하였다. 공자도 패배한 임금의 뒤를 쫓아 제나라에 갔다(B.C. 517년, 공자 35세 때).
제나라 경공을 만난 공자는 정치의 요체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안연-11)."라고 말해 주목을 받기도 한다.
제나라에서의 관직 등용에 실패한 공자는 악장을 만나 순임금의 소를 듣고 큰 감명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 음악으로 인해 석달 동안 고기맛을 잊었다고 한다(술이편). 공자가 다시 노나라에 돌아온 뒤에도 정치는 어지러워만 갔다. 임금인 정공은 아무런 실권이 없었고 계씨는 계씨대로 가신들의 발호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즉 가신 양화가 공산불뉴와 손잡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의 반란은 계환자의 계략으로 간신히 수습되었다.
공자는 51세 때(B.C. 501년) 노나라 중도의 재에 임명되었다. 중도 고을은 그가 다스린지 1년만에 치안과 질서가 바로잡혀 다른 고을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 해 노나라 정공과 제나라 경공이 협곡에서 회맹하였다. 이 때 경공은 무력으로 정공을 위협했으나 공자는 그의 야비한 처사를 꾸짖었다. 이에 제나라는 사과하는 뜻에서 이전에 빼앗았던 세 고을을 노나라에게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이런 공로로 공자는 다음 해(B.C. 499년, 53세 때_ 사공(건설부 장관), 그리고 다시 다음해에는 대사구(법무부 장관)로 승진하였다. 그는 곧 삼환씨의 세력 근거지인 세도성을 허물기로 하였다. 이는 바로 임금의 권위와 실권을 회복시키고자 한 조처였다. 이 일은 맹손씨 가신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B.C. 496년(56세 때) 정승의 일까지 겸직하게 된 공자는 관리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대부 소정묘를 처형했다. 이렇게 되자 이웃 제나라에서는 노나라의 국력이 비대해짐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들은 대부 여서의 책략을 채택하여 노래와 춤에 능한 미녀 80명과 말 120필을 노에 보냈다. 정공과 계환자는 이 선물을 받고 사흘이나 조회를 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공자는 이들과는 큰 일을 함께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벼슬을 버린다.
자신의 경륜을 펼치기 위해 주유천하의 길을 나선 공자는 위·조·송·정·진·채·초를 방문하였다. 공자는 여행 중 여러 차례 고난과 박해를 당해야 했다. 그는 송나라에서는 생명의 위협을 겪었고, 또한 광에서는 양호로 오인되어 닷새 동안 잡혀 있기도 했다. 또한 진·채에서는 7일간이나 양식이 떨어져 고생하였다. 이렇게 공자는 13년 동안이나 여러 나라를 순방하며 자기의 도덕정치를 채택할 임금을 찾았으나 끝내 만날 수 없었다. 당시의 제후들은 공자의 주장을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으로만 생각했다. 그것은 이들이 무력에 의한 영토 확장과 권모술수에 의한 권력 유지에만 급급했기 때문이다. 제후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공자는 후진의 교육을 위해 13년 동안의 유랑생활을 마감하고 다시 노나라에 돌아온다(B.C. 484년, 68세 때).
고국에 돌아온 그는 시·서·역·예·악·춘추를 재편찬하여 이를 정식 교재로 채택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조처는 후진들이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그러나 교육에 전념하는 그에게 슬픈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즉 그의 외아들 리가 5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B.C. 483년, 공자 69세).
리가 죽은 다음해인 B.C. 482년에는 그가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이 또 죽었다. 이때 그는 "아! 하늘이 나를 망쳤구나! 하늘이 나를 망쳤구나(선진-8)!"하고 탄식하며 절망에 잠겼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시 2년 후에는(B.C. 479년(노애공 16년, 73세) 4월 기축일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는 만년에 자기의 한평생을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는 뜻이 뚜렷하게 섰으며, 마흔 살에는 판단에 혼란이 없게 되었고, 쉰살에는 하늘이 내린 사명을 알게 되었으며, 예순 살에는 듣는 대로 그 뜻을 저절로 알게 되었고, 그리고 일흔 살에는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게 되었다(위정-4)."
공자는 이처럼 자기 완성을 위해 한평생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만대의 사표가 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공자의 정치관
공자의 정치철학은 가족관념의 확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가정에서 아버지는 장애로써 가족을 돌보기 마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자는 자애와 덕으로써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그는 위정자는 먼저 자기의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만 백성들이 따르게 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백성을 형벌로 다스리면 법망을 피하고자 할 뿐 수치심이 없게 되나, 덕으로 다스리면 부끄러움을 알고 또한 착하게 된다고 했다. 공자는 또한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폴이라고 하여, 바람이 지나가면 풀은 눕게 된다(안연-19)고도 했다. 이는 위정자 자신이 모범과 준법정신을 보이면 백성도 따라 선행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자는 사회적 혼란의 수습책으로 정명론을 내세운 바 있다.
자로가 공자께 위나라 임금이 정치를 맡긴다면 무슨 일부터 하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명분을 바로잡겠다고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자로-3). 또한 제경공이 정치의 요체에 대해 묻자, 그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대답하였다. 이는 곧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뜻이다. 즉 이름만의 임금이나 아버지가 아닌 이름에 값하는 임금이나 아버지가 되어 그 책임과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제나라 경공은 실권을 대부인 진환에게 빼앗긴 채 허위를 지킬 뿐이었다. 또한 노나라도 삼환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중 계손씨는 노나라 영토의 2/4를 채읍으로 차지했으며, 맹손씨와 숙손씨가 그 나머지를 절반씩 나누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임금은 실질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영토가 없는 셈이다. 계손씨는 이렇게 비대해진 자기 세력을 믿고 천자만이 줄 수 있는 팔일무를 자기집에서 추게 하였다. 공자는 이와 같은 권신들의 무도한 행위에 대해 노여움을 품고 있었다. 그의 정명사상은 명분을 바로잡고 신분질서의 확립을 통해 정치적 무질서를 추방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위정자는 백성들에게 예치와 인정을 베풀어 그들을 심복케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덕치주의는 법가계열의 권력 지상주의와 냉혹한 인간 조종술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군주들에게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으로만 인식되었다. 그가 끝내 정치적으로 아웃사이더의 입장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당대 위정자들의 이와 같은 편견 때문이었다.
공자의 생애를 그린 그림(공자성적도)은 대략 명나라 시기에 출현하였으며, 채색본, 목판본, 석각본이 있다.
비단에 채색하여 그린 채색본은 모두 36부이다. 그림 제작은 주로 ‘사기-공자세가’를 근거로 하였으며, 문장도 원작을 많이 사용하였고, 공자 일생 중 비교적 중요한 행적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여러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원본이 모두 보존된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것이 잔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고 있다. ‘성적도’는 중국의 현존하는 가장 이르고, 인물의 사적을 위주로 반영하였으며, 완전한 이야기의 줄거리가 갖춰진 연환(연결)그림이다. 이 연환그림은 그림과 문장이 다채롭고, 공자 일생의 주요한 행적을 요약하고 있는, 하나의 형상화된 공자의 일대기이다. 색칠이 선명하고 그림이 정교하며, 인물들이 생동감있어, 비교적 높은 역사,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공자가 아직 태어나기 전에, 한 마리 기린이 공부(孔府)에 나타나 ‘하늘이 내린 책’을 토해 놓는데, 위에 글씨가 써있었다. : ‘옥(수정)의 아들, 쇄락한 주나라를 이어 왕이 되다’ 공자의 어머니는 기이하게 여겨 자수 놓은 천을 기린의 뿔에 묶어 두었는데, 이틀 밤을 지나서야 떠나갔다. 공자의 모친은 11개월 동안 임신하여 공자를 낳는다
공자가 태어날 때, 공자의 어머니 안씨(顏氏)는 방에서 하늘의 음악 소리를 들었고, 또한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다. “하늘이 성자의 태어남에 감동하시어, 화평과 기쁨의 노래를 내리셨다” 그래서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범인과 다른 면이 있었는데, 모두 49가지의 자취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이마 한가운데 뼈가 불거져 있다던가, 강과 같이 눈언저리가 평평하고 길다거나, 큰 바다같이 입이 크고 깊은 것 등이다. 가슴에는 또 ‘세상을 안정시킨다’는 뜻의 무늬가 있었다고 한다.
공자가 35세 때에, 노나라 소공이 계손씨, 맹손씨, 손숙씨에게 패하여 제나라로 도망갔을 때, 공자도 그를 따라 제나라로 간다. 공자와 제나라 태사가 음악에 관해 담론할 때, 공자가전설상의 순임금이 만들었다는 음악인 ‘소악’을 듣고는, 그 음악에 심취하여, 세 달 동안 고기의 맛을 음미하지 못했다.
※ 논어 ; 술이(述而) 제13장
『子在齊聞韶하시고 三月不知肉味하사 曰 不圖爲樂之至於斯也호라』
『공자(孔子)께서 제(齊)나라에 계실 적에 소악(韶樂)을 들으시고, <배우는> 3개월 동안 고기 맛을 모르시며 “음악(音樂)을 만든 것이 이러한 경지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하셨다.』
공자가 제나라에 있을 때,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국가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에 관해 물었을 때, 공자는 그에게 재물을 아끼라고 요구하였다. 제나라 경공은 매우 기뻐하며 니계의 전지를 공자에게 하사하려 하였으나, 대신인 안영의 반대에 부딪쳐, 이에 공자는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노나라 정공 10년(BC 500년) 봄, 제나라와 노나라 양국의 임금들이 협곡에서 만난다. 술잔을 나눈 뒤, 제나라에서 변방 국가들의 음악을 연주하자, 공자는 두 나라 군주가 서로 만난 자리에서 오랑캐 음악을 연주하면 안 된다 하여, 제나라 경공으로 하여금 기악과 무용을 물리도록 하였다. 제나라가 다시 궁중의 음악을 연주하게 되었고, 이후 공자는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제후들을 미혹시켜 제나라 경공이 음악가들을 벌하게 만들었다. 노나라 외교상 한 차례 승리를 얻게 한 것이다.
노나라 정공 11년(BC 499년), 공자는 대사구(대법관)로 인하여 재상 임무를 대행하였는데, 정치를 혼란하게 만든 사대부 소정묘를 사형에 처한다. 국가의 대사에 참여한 지 삼 개월 만에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워가는 사람이 없고, 남녀가 분별이 생기고, 물건을 파는 자가 가격을 속이지 않는 등, 나라에 큰 치덕의 모습이 드러났다.
노나라 임금이 제나라에게 속아넘어가, 여자 악사를 보러 가서는 종일 돌아오지 않고, 국가 정사에 태만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에 관례에 따라(按照)사대부들에게 나누어 주던 제사지낸 고기를 나눠주지 않았다(沒有). 공자는 이에 사직하고 떠나, 열국을 주유하기 시작하였다.
(膰, 胙 : 祭肉 번, 祭肉 조)
※논어 ; 미자 제4장(第四章)
『齊人이 歸女樂이어늘 季桓子受之하고 三日不朝한대 孔子行하시다』
『 제(齊)나라 사람이 여악(女樂)『[미녀(美女)의 악공(樂工)]』을 보내니, 계환자(季桓子)가 그것을 받고 3일(日)을 조회(朝會)하지 않자, 공자(孔子)께서 떠나셨다.』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갔고, 위나라에서 다시 진나라로 가는데 광나라 땅을 지나야 했다. 노나라의 양호(陽虎)가 이전에 광나라 사람들에게 폭정을 하였는데, 공자의 모습이 양호와 닮았다하여, 광나라 사람들이 공자 무리를 닷새 동안 잡아두었다. 공자는 수종자를 위나라 대부 녕무자에게 보내 도움을 구해서 풀려나게 되었고, 광나라 땅을 떠나게 된다.
※논어 자한(子罕) 제5장
『子畏於匡이러시니』
『공자(孔子)께서 광(匡)땅에서 경계심을 품고 계셨다.』
『曰 文王旣沒하시니 文不在玆乎아』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문왕(文王)이 이미 별세하셨으니, 문(文)이 이 몸에 있지 않겠는가?』
『天之將喪斯文也신댄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어니와 天之未喪斯文也시니 匡人이 其如予何리오』
『하늘이 장차 이 문(文)을 없애려 하셨다면 뒤에 죽는 사람[공자]이 이 문(文)에 참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이 문(文)을 없애려 하지 않으셨으니, 광(匡)땅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공자가 위나라를 떠나 포나라 땅에 도착하였고, 한 달 쯤 뒤 다시 위나라로 돌아왔다. 하루는, 위나라 령공과 부인이 함께 수레를 탔는데, 공자로 하여금 뒤따라오는 수레에 앉게 했다. 이때 공자가 화를 내며 말하였다. “나는 이제껏 여자를 사모하는 것처럼 덕을 사모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에 위나라를 떠났다. (丑=醜)
論語˙衛靈公 12장『子曰 已矣乎라 吾未見好德如色者也로라』
“어쩔 수 없구나! 내 덕(德)을 좋아하기를 여색(女色)을 좋아하듯이 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노나라 애공 삼년(BC 492년, 공자 60세), 공자는 조나라를 떠나 송나라에 도착한다. 큰 나무 아래에서 제사 예절을 연습하는데, 송나라의 사마환퇴가 공자를 죽이려고 큰 나무를 베어버렸다. 제자들은 공자에게 빨리 떠날 것을 권하였지만, 공자가 말하길 “하늘이 나에게 이러한 품격과 덕을 주셨는데, 환퇴가 나를 어쩔 것인가?”라고 하였다.(老天:하늘 / 怎:어찌 즘)
공자가 진나라에 왔을 때, 사성정자의 집에 기탁하여 살았다. 일 년 남짓 지나, 매 한 마리가 진나라 궁정에 날아들어 죽었는데, 새 순으로 만든 화살대와 돌로 만든 화살촉으로 된, 길이가 50cm에 달하는 화살에 맞아 있었다. 진나라 민공이 사람을 보내 공자에게 물으니, 공자가 말하길, 이는 숙신 사람의 화살로서, 무왕이 상나라를 무찌른 후, 진나라에 나눠준 것이라 하였다. 진나라 민공이 궁정 창고에서 조사해보니, 과연 이 종류의 화살을 찾을 수 있었다.
공자가 포나라에서 위나라로 갔다. 제자들과 같이 (의례용) 종을 치는데, 한 광주리를 멘 사람이 문 앞에서 지나가며 말하였다. “깊은 뜻이 있도다, 종을 치는 자여” 잠시 후 또 말하기를 “천박하도다, 쨍쨍거리는 경박한 종소리, 그만 치는 게 낫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시경의 포유고엽(박은 쓴 잎을 가지고 있다네)’ 중의 시구절로 공자에게 권면하기를 “물이 깊으면, 옷을 입은 채 지나며, 물이 얕으면, 옷을 걷어 올리고 지나갑니다”라고 하였다.
(穿著:입다 / 撩起;걷어 올리다)
※논어 헌문(憲問) 제42장
『子擊磬於衛러시니 有荷蕢而過孔氏之門者曰 有心哉라 擊磬乎여』
『공자(孔子)께서 위(衛)나라에서 경쇠를 두들기셨는데, 삼태기를 메고 공씨(孔氏)의 문 앞을 지나가는 자가 듣고서 말하였다. “깊은 마음이 있구나. 경쇠를 두들김이여!”』
『旣而오 曰 鄙哉라 硜硜乎여 莫己知也어든 斯已而已矣니 深則厲요 淺則揭니라』
『조금 있다가 말하였다. “비루하다. 너무도 딱딱하구나! 자기를 알아주지 못하면 그만두면 그 뿐이니, 물이 깊으면 옷을 입고 건너고, 얕으면 옷을 걷고 건너야 하는 것이다.”』
공자가 양에게 거문고 치는 것을 배우는데, 열흘이 지나도 곡을 바꾸지 않았다. 양자가 그에게 다른 곡을 연습할 것을 권하자, 공자는 아직 이 곡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이후에 양자가 다시 두 차례 그를 보았는데, 그는 역시 이 곡의 포부와 품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나중에야 비로소 이 곡이 주나라 문왕이 만든 거문고 곡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공자가 위나라에서 중용되지 못하자, 진나라로 가서 조간자를 만나고자 했다. 황하 강변에 다달아 진나라가 현명한 사대부인 두명독, 순화를 죽였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강가에 이르러 탄식하며 말하였다. “군자는 같은 군자를 해치지 않는다.” 이에 다시 위나라로 돌아갔다.(諱:꺼릴 휘)
노나라 애공 2년(BC 493년), 공자가 위나라에 돌아온 첫 날, 령공이 공자에게 어떻게 군진을 배치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다. 공자는 예와 의를 강조하고 전쟁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배운 적이 없다고 답하였다. 령공은 매우 불쾌하였다. 둘째 날, 공자와 이야기할 때, 령공은 날아가는 기러기를 바라보았다. 공자는 이에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갔다.
공자가 진나라에서 채나라로 갔다가 다시 엽나라로 갔다. 엽나라에서 또다시 채나라로 돌아올 때, 함께 밭을 갈고 있는 장저와 걸익을 만나서, 공자가 자로를 보내 나루터가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걸익이 말하길 “홍수처럼 못된 것들이 도처에 깔렸는데, 당신들은 누구하고 같이 개혁을 하겠다는 거요?, 당신 차라리 공자하고 같이 못된 사람들을 피하는 게 낫지, 어떻게 우리를 따라와 이 혼탁한 사회를 피할 수 있단 말이요?”라고 하였다. (碰到:우연히 만나다)
애공 6년(BC 486년), 초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공자를 초대하여 초나라로 갔다. 진나라와 초나라의 사대부들은 초나라가 공자를 중용하여 진나라와 초나라에 위험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걱정하여, 함께 병사를 보내 공자와 제자를 빈들에서 포위하였다. 양식이 바닥나고, 따르던 사람들도 배고파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공자는 여전히 시와 서를 읊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하였다. 나중에 자공을 초나라로 보내, 구원병을 보내달라고 청하고 나서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공자가 초나라에 도착한 뒤에, 초나라 소왕이 서적 간행을 위한 땅 칠 백리를 그에게 하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초나라 집정관 자서가 공자에게는 현명한 제자가 서로 돕고 있는데, 영지까지 그에게 봉한다면 초나라에 불리하다 생각하였다. 초나라 소왕은 이에 공자에게 영지를 하사하려던 생각을 취소하였고, 공자도 초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돌아왔다.
공자가 노나라에 돌아온 뒤, 십 여 년 열국을 주유하던 생활을 마치게 된다. 그러나 노나라는 공자를 임용하지 않았고, 공자 역시 관직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고대 문헌인 서(글), 전(예의), 산(시), 정(음악), 찬(자연원리)을 정리하였으며, 시서예악으로 제자를 가르쳤다. 제자가 삼천이었고, 육예를 체화한 자가 72인이었다.
공자의 저작이 완성된 후, 몸을 정결히 하고 북두성을 향해 완성을 고하려고 할 때, 갑자기 붉은 무지개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노란 옥이 되었다. 거기에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공자는 하늘의 명을 받들어 일을 하고, 하늘의 법에 순응하여 정성으로 만들어 냈다.” 공자는 무릎을 굽혀 절을 하고 받았다.
애공 14년(BC 481년) 봄, 노나라에서 한 마리 이상한 짐승을 사냥하여 죽였는데 형상이 마치 노루 같았고, 살로 된 뿔이 자라나 있었다. 공자는 기린이라 여겼다. 기린은 인애(사랑)의 동물로서, 세상에 도가 있으면 겨우 출현하는 것인데, 지금 천하가 무도하니, 기린이 나타나자마자 죽임을 당하였다고 여기고 ‘내 道가 다했구나.’ 라고 하여, 노나라 역사서 ‘춘추’의 편찬을 중지하였다.
애공 16년(BC 479년), 공자의 병이 중하여, 자공이 문안하였는데, 공자가 자공에게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물으며, 슬픔에 찬 노래를 하였다. “태산의 무너짐이여, 대들보의 부러짐이여, 현인의 쇠약함이여!” 눈물이 노래와 함께 흘렀다. 공자가 말하길, 어제 꿈에 제사 성전 양 기둥 사이에 앉았는데, 흡사 은나라 사람이 상을 치르는 의식을 하는 것 같아서, 자기가 곧 죽을 거라 했다. 4월 을축시(북경시간 1시~3시)에 죽었다.
공자 사후에, 사람들은 매년 시기에 맞춰 공자묘에 제사를 지냈다. 공자의 옛 집은 사당이 되었고, 공자 생전에 사용하던 옷, 관, 거문고, 수레, 책을 보관하였다. 한나라 고조 류방은 곡부를 지날 때, 태뢰(돼지, 양, 소 세 가지 희생물)를 바쳐 공자에게 제사지냈다.
서양의 학자들이 본 공자의 생애와 신념
서지문 (고려대 영문학과 교수)
162 회
2001년 11월 22일(목)
본부관 학술회의장
인사말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논어>에 대해서 강연을 하게 되니까 아주 쑥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어디 가서 {논어}에 대해 강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요. 제가 {논어}를 배운 것은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직후였는데, 외국문학을 공부하면서 제가 너무 동양인의 의식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공부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공부하면서 혼자 즐거워하고 감격하고 하면서 나만의 보배로 소중히 간직했는데,
올 연초에 텔레비전에서 <논어>를 강의하는 분이 공자의 인품과 가르침을 너무 훼손한다고 생각되어서 비판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공자에 대해 강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논어>논쟁에 휩쓸리게 되어서 <논어>의 해설서도 더 읽어보게 되고, 또 <논어>의 영역서들도 들추어보면서 {논어}에 대한 외국 학자들의 번역과 논평에 깊은 관심과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논어> 주요구절들의 여러 영역자들이 어떻게 해석해서 영어로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검토해 보는 <영어로 배우는 논어>라는 책까지 쓰게 됐어요.
오늘은 그 영역본과 해설서를 통해 서양의 학자들이 공자와 그의 가르침을 어떻게 보았는지, 그리고 공자의 사상이 서양에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을 유럽에 소개
14세기초에 나온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서양인에게 동양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촉발시켰습니다. 마르코 폴로 견문록의 성공 이후 많은 유럽인들이 중세와 근대 초기에 동방 여행기를 써서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 중 대부분은 황당한 허구로 중국의 문화와 사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 말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하여 중국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중국 왕실과도 친교를 갖게 되면서 서양인에 의한 중국의 정신 문화 연구가 본격화되었고 예수회 본부로 보내진 그들의 서찰에 의해 유럽은 처음으로 중국의 진면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책으로 출판되어 중국에 관한 중요한 학습자료가 되었던 이 편지들은 프랑스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는데,
그 후 예수회 선교사들의 중국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잘못된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어요. 그것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청나라의 황제와 고급관리들의 굉장한 우대를 받고 중국에 대해 너무 호의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논어}에 실려 있는 공자 사상이 당시 중국의 국가 이념이요 통치 철학인 것 같이 소개한 것도 나중에는 비판을 받게 되었어요.
사실 청나라가 유교를 국시로 하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공자의 사상으로 다스려지지는 않았죠. 명말에서 청조에 이르는 중국의 통치 이념은 공자의 이념이 아닌 신유학 또는 성리학이었습니다.
성리학이 공자를 시조로 삼고 있기 때문에 서양의 선교사들은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논어}를 읽었고, 그 도덕적인 고결성과 백성을 위한 통치이념에 크게 감명을 받아서 당시 서양의 여러 사회적인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사상이라고 열성적으로 소개했던 것입니다.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미친 영향
기독교 동양 선교의 위대한 개척자 마테오 리치는 당시 중국의 철학이 원래의 유학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는 사실에 놀라워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서양의 동양학 학자들은 성리학이나 역대 중국 왕조의 통치 사상이 공자 자신의 가르침과 관계가 적다는 사실을 놀라워 하면서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리학이 공자의 가르침의 일부분만을 발전시킨 이념이라는 마테오 리치의 지적은 청나라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성리학의 절대적인 권위 때문이었는지 처음 마테오 리치가 이 점을 지적했을 떄 중국에서는 그것을 얼른 수긍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테오 리치의 사후 청대의 학자들은 성리학을 비판하고 정통 경학의 고전적인 분석 방법을 도입하여 금석학, 고증학 등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마두 마테오리치 신부
마테오 리치가 유럽에 미친 영향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선교사들이 소개한 중국의 사상은 유럽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됩니다. 당시 유럽은 문예부흥기의 지적흥분과 사회변동을 겪고 나서 중세적인 세계관이 아닌, 좀더 인간 중심적이고 평등지향적인 사회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상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능력과 인격을 검증 받은 관료가 통치하는 관료주의 통치 원칙과 공자의 만인 협동적 세계관은 세습적 귀족제도의 폐단을 혐오하고 평등사상에 입각한 세계관을 갈구하던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특히 기독교가 민중을 영적인 노예상태에 묶어 두고 있다고 생각했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공자의 무신론적인 면모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공자는 18세기 계몽주의의 수호성자가 되었다고 H. G. 크릴은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유학과 중국에 대한 견해는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들만큼 대접받지 못했던, 그리하여 중국에 대해 인상이 좋을 수만은 없었던 다른 유럽인들에 의해서 강력한 반박을 받게 되고, 중국이 공자의 사상에 입각해서 통치되는 나라가 아니며 중국대륙을 정복한 청나라가 얼마나 탄압적인 통치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지적이 활발히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상가들은 중국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않았지요. 정치의 목표가 국민의 복지여야 한다는 공자의 사상과, 세습귀족이 아닌 과거를 통해 선발된 능력 있는 관료가 통치를 하도록 되어 있는 중국의 제도를,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당시 유럽의 절대왕정을 붕괴시킬 수 있는 기폭제라고 생각하고 열렬히 수용했어요.
그러니까 공자의 가르침이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에 사상적으로 기여했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라이프니츠
그 때 볼테르와 라이프니츠 외에 많은 사상가들이 동양사상에서 유럽이 지향해야 할 미래상을 보았고몽테스키외는 중국의 사상에 대해서 상당히 회의적이었으나 한편으로 공자, 맹자의 피치자 중심의 정치 사상을 환영했습니다.
또한 당시 유럽의 상류층들이 광적으로 수집했던 중국 예술품들은 유럽의 예술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신고전주의적인 견제와 조화의 미학에서 벗어나 파격적이면서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 표출되는 낭만주의적 미학이 형성되는 요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중국 사상이 서양인들의 기독교의 내세 지향적인 인생관을 현세 지향적인 인생관으로 전이시켰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볼테르
본명은 프랑스와 마리 아루에
(Francois Marie Arouet, 1694∼1778)
물론, 기본적으로 르네상스를 연 휴머니즘의 공로이지만, 볼테르는 동양의 발견이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도덕적, 물리적 우주를 열어주었다고 말했지요. 즉 유럽의 전통과 관습에 위배되는 것은 성립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관념을 깨고 수많은 이단적인 사상이 대두될 수 있는 토양을 형성시켰다는 말이지요.
논어의 부분 번역자 멘도사 [16세기 말]
{논어}는 16세가 말 스페인인 멘도사의 {중국대제국사}에 부분적으로 번역, 소개되었고 17세가 말에 불어로 완역이 되었다고 합니다. 공자의 이름으로 고유명사화 된 'Confucius'는 공부자(孔夫子)의 서양식 발음으로, {논어}가 처음 유럽에 소개될 때 쓰여져 고착되었습니다. 영역은 19세기에야 처음 이루어졌는데 1861년 첫 완역 <논어>가 나온 후, 영국과 미국 사람 또는 중국 사람에 의한 영역본이 잇달아 간행되었어요. 1990년대에는 제가 아는 것만도 다섯 개의 완역본이 나왔습니다.
논어 최초 영어 완역본 제임스 레그 [1840년]
논어를 처음 영어로 완역한 제임스 레그는 1840년부터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중국의 고전을 연구해서 사서 삼경을 모두 번역했는데, 원문뿐만 아니라 주요 주석서들까지 참고하여 세세한 주를 덧붙였어요. 레그의 작업은 감탄을 자아낼 만한 방대한 작업인데 그가 선교사로서 자기의 직책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이룬 이 업적을 보면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학자는 많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동양학자들 중에는 서양인이 {논어}를 제대로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러나 제가 살펴본 몇 편의 서양인의 번역서는 해석과 번역이 지극히 우수했어요. 아주 100퍼센트 흡족한 번역은 없었지만, 동양학자의 해설서 중에서도 100퍼센트 흡족한 해설서는 아직 접하지 못했습니다.
서양인이 <논어>를 제대로 이해,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려면 <논어>의 서양어 번역이나 해설을 자세히 읽어보고 나서 해야 할텐데, 동양학자들은 무조건 서양인은 동양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양학자들은 서양의 문학이나 철학을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자인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런 학문적인 편견은 빨리 버리는 것이 자신의 학문적 성장을 위해서 좋습니다.
유학의 본고장에서는 논어가 종교적인 경전으로 외경의 대상이 되어 학자나 일반인이 공자의 풍부한 인간미와 사상의 핵심적 면모를 감지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반해 서양인들은 신선한 시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인간적인 공자를 되살려 냈다는 크릴의 주장은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영미 역자들의 해석과 주석에서 보여지는, 공자의 사상과 인품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깊은 이해에 저는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논어}의 최초 영문 번역자인 제임스 레그(James Legge)는 중국을 서양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중국의 고전을 전부 번역한 훌륭한 학자인데도 공자를 싫어했다고 해요. 그러나 선교사 생활에서 은퇴하고 런던 대학에서 동양학 강의를 하면서는 읽을수록 공자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공자가 정직하지 못했고 중국인들이 정직하지 못한 것도 공자의 영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그가 기독교 선교사로서 기독교 사상이 유학 사상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의무를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공자를 현존했던 생생한 인물로 느껴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해요.
그는 공자가 정직하지 못했다는 증거로, [양화편] 20장에서 유비(?)가 찾아 왔을 때 공자가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고는 그가 돌아갈 때 그에게 들리도록 거문고를 탄 일화를 지적했습니다. 물론 공자는 유비(?)에게 자신이 그를 일부러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거문고를 탄 것이었지요. 그러니까 그것은 매우 정직한 '알림'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고지식한 선교사였던 레그는 그런 정직함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레그와 같이 초기 영역자들 중에는 기독교에 대한 충성심에서인지 공자를 오해하고 폄하한 사람이 몇 명 있었던 것 같아요.
라이오널 자일즈 [1907년]
라이오널 자일즈(Lionel Giles)의 {The Sayings Of Confucius}는 1907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이것은 {논어}의 완역이 아니고 그 일부를 몇 개의 범주로 묶어서 정리한 부분역입니다. 완역이 아니어서 몹시 아쉽지만 이 책은 제가 좋아하는 여러 구절들을 훌륭히 번역해 놓아서 마음에 꼭 들어요. 뿐만 아니라 그의 서문에 들어 있는, 서양인들의 공자와 유학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해에 대한 반박도 매우 흡족합니다.
자일즈는 위대한 중국학자인 레그가 일생을 바쳐 해석한 역서에서 공자 사상의 진수를 놓쳤다는 게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레그는 {논어}에 쓰인 같은 한자를 어느 문맥에서나 같은 뜻으로 파악한 경직성 때문에 의미의 미묘한 차이를 짚어내지 못했다고 비판했습니다.
나아가서 자일즈는 레그가 공자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충분히 감안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자가 혼란한 시대 상황에서 어떠한 품위와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처신했는가를 감지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공자 사상의 근저에 있는 충(忠)과 서(恕), 인(仁), 예(禮)의 개념을 자세히 설명했으며, 공자는 레그가 말한 것 같이 형식적인 예의 노예가 아니었고 오히려 진정한 선의에 어긋나는 인습적인 예와 도덕률을 무시하는 데에서 고귀한 용기를 보여주었던 인물이라고 말하면서 공자야말로 중국인에게서 편견의 멍에를 벗겨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자일즈는 {논어}에 관한 여러 핵심적인 사항들을 정확하게 해설해 주었습니다. 특히 유교는 사후의 징벌이나 보상을 전혀 약속하지 않으면서도 단지 도덕이 인간이 행해야 할 고귀한 도리이기에 행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므로 세속적인 기독교보다 진일보한 윤리 체계라고 주장했어요.
그리고 공자가 세속적인 지혜를 중시하는 공리주의자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위대한 이상주의자였으며 그의 영향력은 그가 실제적으로 성취한 것에 힘입은 게 아니라 그의 고결한 상상력과 윤리적인 확신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설파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공자가 엄격하고 완고한 인간이 아니라 언제나 밝고 평온한 인간이었고 그를 따라 고난스러운 망명생활에 동행한 제자가 그토록 많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애로운 스승이었던가를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임어당 [20세기 초]
20세기초에 중국과 중국인을 서양인에게 이해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임어당은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만을 온전한 사상으로 생각하는 서양 독자들을 위해 {대학}과 {예기}를 중심으로 공자의 사상을 소개했고 {논어}에서는 그가 좋아하는 구절들만 몇 십 개씩 뽑아 소개했어요. 미적 감각이 풍부했던 임어당은 공자가 지극히 세련된 예술적 감각을 갖고 있었으며 인생의 아이러니를 초연한 자세로 즐겼던 인물로 규정하고 그의 재치와 유머를 강조했어요. 그가 발췌한 구절들은 대개 짤막한 경구들로 이것들을 아주 유연하고 경쾌하게 번역해 냈는데 어떤 부분은 좀 경박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이 간과했던, 공자가 살던 시대의 혼란과 민초들의 극심한 고통을 잘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임어당의 해석은 송대(宋代)의 주자학자들이 공자를 비인간적이고 교조적인 인물로 만든 것에 대한 강력한 반발에서 비롯되었는데, 공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자를 기질적으로 자기와 비슷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유머 감각과 미적 감각이 뛰어났던 임어당은 공자를 자기와 비슷한 기질의 인물로 파악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자의 미적 감각은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지만 공자를 위대한 인물로 만든 것은 그의 재치나 미적 감각보다는 무서운 좌절을 극복해낸 인(仁)의 힘이라고 믿기에 임어당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유학에 대한 임어당의 간략한 해설은 동양 사상에 문외한인 서양인들에게 유학과 공자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임어당은 유학이 인간의 동료인간에 대한 책임을 강조해서 합리적인 사회 질서를 수립하려 했으며, 독특하게 정치와 윤리를 구별하지 않았고 법가 사상처럼 법치로써 국력을 키우려는 사상이 아니고 도교처럼 세상에 대해 부정적이며 냉소적인 사상도 아닌, 현세적인 인도주의 사상이라고 설명했어요. 그리고 도덕적 이상의 힘을 믿는다는 점에서 유학과 기독교 사이에 유사성이 있으며 공자의 가르침이 정치, 사회는 물론 생활의 모든 영역에 걸친 것이라는 점에서 모세의 가르침과 비교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아더 웨일리 논어 영역본 [1938년]
중국과 일본의 고전 연구에 통달했던 탁월한 동양학자 아더 웨일리(Arthur Waley)의 {논어} 영역본은 1938년에 나왔습니다. 웨일리는 {시경}의 연구와 번역으로 기념비적인 업적을 쌓았고, {서유기}도 번역한 영국인 학자입니다. 그는 공자의 생애를 다룬 모든 기록이나 저서를 불신하는 입장에 서서 {논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공자의 전기적 사실과 인간적 면모만을 소개하고 {논어}에 나오는 여러 관념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청대 고증학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웨일리는 {논어} 전권에 공자 자신의 말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팔일편]에서 [태백편]까지를 동일한 저자가 기록한 가장 신빙성 있는 텍스트로 보고 [향당편]과 [요왈편]은 공자의 말과 전혀 관계가 없는 유교의 교리 또는 훈시로, [헌문편]에서 [양화편]까지는 유교에 적대적인 글들이 삽입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일부 학자들이 이런 견해를 가진 데에는 [헌문편]에서 [양화편] 사이에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논하는 구절이 있고 공자와 도가(道家) 인물과의 대화에서 공자가 조금 밀리는 듯한 인상을 주는 구절이 있다는 데 기인한 것이죠. 그는 중국 경전과 문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공자 말씀 중에 여러 귀절을 당시의 속담이나 유행하던 말에서 공자가 인용한 것으로 처리했고 {시경}에서 인용한 부분은 시로 번역했어요. 노련한 문학 번역가의 작품답게 간결하면서도 의미가 강력히 전달되는 구절이 많은 반면 또 자신의 배경지식을 충분히 반영하느라고 장황하게 된 구절도 상당 수 있습니다.
크릴
영국과 미국의 동양학 강좌에서 학생들이 가장 유용하게 참고하는 책 중에 하나인 크릴 (H. G. Creel)의 {Confucius and the Chinese Way}는 <공자와 중국의 길> 또는 <공자와 중국의 道>라고 번역할 수 있겠죠. 원래 {Confucius: the Man and The Myth}라는 제목으로 나왔던 책인데 이 책은 공자라는 인물과, 중국에서의 공자 사상의 수용과 변천 과정, 그리고 공자의 사상이 유럽과 현대 중국에 미친 영향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설득력 있게 해설한 책입니다.
그는 공자가 보통 완고한 보수주의자로 인식되어 있으나 사실은 위대한 혁명가 중의 한 사람이라 보았고 공자의 사후 몇 세기 안에 중국에서 세습귀족이 사라진 것은 누구보다도 공자의 영향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아가서 공자는 마음속으로 세습군주제를 폐지하고 싶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 상황이 군주제가 폐지된다면 온 중국이 겉잡을 수 없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힘없는 백성은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에 군주를 그대로 두고 덕이 있는 신하가 실권을 가지고 통치하는 관료 중심제로 개편하려는 무혈혁명을 기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크릴은 춘추 시대가 제후국 간, 제후국 내의 패권다툼으로 살벌한 시대였고 백성을 위한 정치라는 개념이 지극히 미약했기 때문에, 공자가 한 제후국에서 법치로써 백성을 편안케 하면 다른 제후국의 백성들이 그 제후국으로 이주를 하고 싶어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른 제후국들도 존립을 위해서라도 덕치를 베풀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등용하여 통치 이념을 구현하게 해줄 제후를 찾아서 천하를 주유한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공자가 출신 계급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두뇌와 열의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제자로 받아들여 관료 후보로 양성했던 점을 들어 그를 민주적인 신념과 자세를 지녔던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크릴은 묵자, 맹자, 한비자 등이 어떻게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고 변용시켰으며, 중국 역사 속에서 어떻게 공자의 사상이 세력을 얻게 되었고 그것이 통치 이념으로 채택되면서 어떻게 왜곡되었는가를 분석했습니다. 또한 공자의 원칙에 투철하면서도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가식 없는 인품, 그리고 수많은 좌절과 시름 속에서도 변함없었던 자애로움을 강조하며 후대 유학에 의해 왜곡된 공자가 아닌 진정한 공자의 모습을 다시 발견함으로써 동양인이나 서양인이나 올바른 인간 관계를 회복하는 데 도움 받을 수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칼 야스퍼스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물론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논어}의 번역서와 중국 사상에 대한 해설서만 읽고 책을 썼는데 공자의 사상과 인품에 대해 깊은 공감을 갖고 핵심적인 면을 아주 쉽게 해설해 놓은 점이 놀라웠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공자의 통합적 인간관에 관심을 두고 국가라는 공동체는 그 구성원 전원의 정신이 형성하는 것이고 인간은 상호관계 속에서 성숙할 수 있다는 공자의 근본 명제를 파악했습니다.
공자 사상의 합리적, 실용적인 면모와 함께 그의 인생에 대한 경건한 태도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아름다움과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공자의 염원을 지적했고, 공자의 삶의 원동력은 권력욕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주체가 되려는 의지라고 설명했습니다. 자신의 철학과 매우 다른 공자의 사상을 이 정도로 이해하고 존경할 수 있다는 것이 야스퍼스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돼요.
70년대 이후
70년대 이후의 영역자들은 대개 전통적 해석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해석을 채택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번역이 매끄럽게 읽히기보다는 아주 이론적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영역자들도 이전의 번역자들과 같이 공자의 교조적인 이미지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공자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과 인간적인 매력을 강조했지요.
그리고 현대로 오면서 더 많은 역자들이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공자의 전기를 지극히 불신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문학적으로 제일 제 마음에 든 번역자인 사이먼 레이즈(Simon Leys)는 벨기에 출신으로 중국 문학을 오래 강의한 학자이자 소설가인데 간결하고 정곡을 찌르는 번역 때문에 매우 인상이 깊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의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해설하고 교육자로서의 공자를 논하는 한편 독자들에게 공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볼 것을 권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소설가답게 공자가 {논어}에서 말하지 않은 것 또는 말하기를 삼가한 것을 주목하라고 권합니다.
맺음말
전반적으로 {논어}의 영역자들과 해설자들은 동양이 학자들과 달리 유학의 중압감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위대하고 투철한 신념을 지녔으면서도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고 가식이 없었던, 만인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공자를 되살려 내는 훌륭한 작업을 해냈습니다. 그래서 서양학자의 시각이 우리에게 공자의 참모습을, 그리고 그의 가르침의 진실을 새롭게, 진정으로 인식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