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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2, 3」 토론 기록 일시 : 2020년 5월 15일(금) 오후 7시- 장소 : 카페 쏘렐라(송현동) 사회 : 권샘 참석 : 8명 |
<감상평>
태: 책을 읽으면서 이 정도 지식인이 우리나라에 있다는 사실에 열광하였다. 각자 총평을 짧게 하고 토론에 들어가자.
영: 2권에 들어서 저자의 여정을 따라가며 푹 빠져 읽었다. 3권의 시가 나오는 부분은 너무 많아 모두 음미하지 못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여유롭고 편안해서 좋았다. 주석과 함께 실린 사진이 내용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숙: 열과 화로 가득찬 책! 기본지식이 있어야 쉽게 읽히는 책. 부담도 크고, 꼼꼼하게 읽기 어려웠다. 우선 읽고 토론을 거친 후 다시 읽어보겠다는 나 자신과의 타협을 해야했다. 2권에선 저자의 학구열, 방대학 독서량, 메모능력, 여행을 위한 깊은 선지식이 잘 드러난다. 실로 저자는 다방면으로 박학다식한 천재이다. 3권은 쉽게 넘어갔다. 미신적인 문제에선 웃기는 부분도 있었다. 단, 선지식이 있고 서구문물을 받아들인 경우라도 시대적 한계는 있었던 것 같다. 마테오 리치와 예수교 부분에 특히 관심이 갔다. 저자의 다른 책들도 이를 계기로 더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은: 이 책에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사실 많았다. 지금과 같은 풍족한 환경에서도 여행일정을 이렇게 꼼꼼하게 짜고 결과를 기록한다는 것이 어려운데 저자는 대단한 일을 했다.
협: 열하일기 총 3권에는 조선에서 열하까지, 열하에서 다시 북경을 거쳐 조선에 오기까지 만나고 보았던 모든 것들을 다방면으로 기록하고 있다. 실로, 대단한 일이다. 이 책은 어려운 것이 맞다. 저자의 아들 박종채가 쓴 과정록('나의 아버지 박지원')을 읽어보면 저자의 인품, 살았던 시대상 등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읽은 열하일기 개정판은 기존판과 다르다. 3권에 기존판에는 없던 부분들이 실려 있다.
환: 코로나사태로 인해 독서가 힘든 상황이어서 다 읽지는 못했다. 여행지에서 사람 만나는 재미가 있는데 그럴때마다 출신을 물으면서 대화를 트고 다방면으로 이야기하게 되는데, 저자의 열하일기에도 비슷한 패턴이 존재한다. 읽으면서 저자의 박학다식함을 엿볼 수 있었다.
정: 2권의 핵심은 양고기 이야기가 나오는 망양록, 3권의 핵심은 허생전이 아닌가 한다. 특히, 망양록에선 왕곡정과 모국의 명예를 건 긴장감있는 대화가 오고가서 흥미로웠다.
주: 최근 연암집을 읽었는데 여기서 나오는 내용들이 많이 담겨져 있었다. 참지식인의 모습을 저자에게서 보았다. 아는 것은 많은데 삶이 그것을 못 따라가면 모르는 것보다 더 나쁘다. 알고 있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하는 저자. 동료 북학파 박제가와 홍대용이 먼저 청나라를 다녀오고 연암은 그 뒤에 다녀왔다. 열하일기와 박제가의 북학의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부분이 있는데, 연암은 시대고민이, 실천을 위한 번민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존경할 만한 인물인 것 같다.
태: 그간 조선을 왕 중심으로, 단선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성리학을 위에 붕 띄운 상태로 세계질서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일본에 망한 나라로만 생각했다. 나도 저자가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시대를 뒤집어 엎는 생각을 했다. 임금도 아니고 권력도 없는 퇴락한 선비가 이 시대에 북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신기하다. 연암은 분명 목적의식을 갖고 북경에 갔다. 다른 북학파 2명이 먼저 다녀오고 나서 갔다. 그들의 이야기에 연암은 많이 놀랐을 것. 그래서 그의 기록도 당연, 관찰도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선비가 조선에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나. 읽으면서 가슴이 뛰었다. 학문이 세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 최초의 학자가 아닌가. 감동받았다. 자, 이제 토론하고 싶은 내용을 말해보자.
<토론주제 1: 실학이란?>
주: 실학사상을 실사구시, 이용후생 등의 용어들과 함께 학교에서부터 배웠다. 흔히 실학을 실용적 학문 정도로 얘기하는데 실학이 뭘까?
태: 성호 이익에서부터 실학이 시작했다고 알고 있다. 그 당시 퍼지려하다가 말았다.
영: 경제적(자본) 관점에서는 서양 > 청 > 조선의 순서였다. 실학은 실생활에서 뭔가를 해보려는 노력이 아닐까? 예로, 유학에서 인의예지를 배웠으면 그게 삶에서 바로 나오도록 하는 것처럼. 그러나 책에서 읽은 연암의 실학과 나의 실학은 다른 것 같다. 저자의 말에 동의하게 되는 부분이 적었던 것 같다. 벽돌 이야기에선 아이디어가 좋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다른 부분에선 공감하기 힘들었다.
주: '실학파는 없다'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학문을 함에 있어 이론에 집중하냐 실제에 집중하냐의, 학문을 행하는 태도의 차이이지 학문적 분파로 실학이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연암의 이용후생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 즉, 복지를 높인다는 의미로 들린다.
태: 인의예지만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 이론적 바탕이 안되면 과학기술의 다음 단계로 옮겨가지 못한다. 성리학은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사화를 기점으로 시작된 말싸움으로 인해 변질된다. 나의 헤게모니를 위해 사소한 것을 놓고도 편을 가르는 행태가 있었다. 저자는 영조 이후 태어난 사람으로 영조 시절에 탕평책을 시행했지만 그 당시까지도 말싸움이 심했다. 실학파가 청에 가 보고 많이 놀랐을 것이다. 청은 그즈음 성리학에서 양명학으로 탈바꿈하면서 동서양의 교류를 시작했다. 저자는 북학을 단순히 기술공학적 측면이 아니라 계급이 가져온 학문과 민중의 괴리를 줄이는 수단으로도 보았을 것이다.
협: 지주제를 폐지하고, 농업 뿐 아니라 상업과, 화학과 같은 기술공학도 연구해야 함을 저자는 역설했다. 실학파가 학문의 한 분파라는 얘기는 절대 저자의 입에서 나온 적이 없다. 저자는 문물을 개혁하고 실생활에 선진기술을 도입하자고 주장했고, 25년 뒤, 정약용에 의해 저자의 주장이 일부 실행되기도 했다.
주: 청을 먼저 여행한 3명의 선비들에게 청에 대해 물어보면 제1선비는 오랑캐에게 배울 것이 뭐가 있냐고 답하고, 제2선비는 단순히 대단하다고 말하고, 제3선비는 오랑캐이든 누구든 배울만하면 배워야한다고 말한다는 부분이 나온다. 이 부분은 기존의 계급을 허무는 말로, 실학은 학문이상의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상에 반기를 드는 것이었으니.
영: 선입견 없이 보고 받아들이며, 그 누구와도 대화하고, 배울건 배우는 그 열린 마음이 대단했다.
협: 저자의 아들이 쓴 내용을 보면 어렸을 때 저자가 우울증을 앓았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썼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대화한 것으로 나온다. 이미 그런 열린 자세가 몸에 배었을 것이다.
영: 사람에 대한 파악도 굉장히 빨랐다.
은: 청의 인사들과 필담을 많이 나눴는데, 필담 후 화근이 될까 종이를 태우는 부분들이 보였다. 굉장히 아쉬웠다.
태: 중국사에서 가장 긴 태평성대를 이뤘던 청의 건륭제. 영토도 가장 넓었다. 그가 권모술수가 강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조선에서 구하기 어려운 것은 청에 진상할 필요가 없다고 해주는 등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저자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여유로운 호의 과시를 통한 '덤비지 마라' 메시지의 강한 전달이라 여겼고, 따라서 청의 건륭제를 무서운 통치자로 해석했다.
숙: 공자로부터 시작된 성리학(주자학)은 인본주의, 개혁주의를 표방한 철저한 인간중심의 사상이었다. 그런데 조선에 들어오면서 변질된 면이 있다. 공자는 시대변화에 맞춰 사고체계를 바꾸는 것에 동의했으며, 인간의 삶과 행복에 위배되는 학문을 한 사람이 결코 아니다. 조선에서 이 성리학이 자기 권력을 다지는데 활용되면서 변질된 것이다. 저자가 명을 그리워하고 청을 업신여기는 듯한 말투도 간혹 나온다. 받아온 교육의 틀에서 자유롭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신지식인인 것이 '사기'의 요약본이랄 수 있는 '자치통감'을 공부할 정도로 독서량도 많았고, 금서도 많이 읽었다. 역사를 바로 알려고 노력한 것 같다. '고려사'도 왜곡이 많았는데 그런 환경에서도 제대로 알려고 노력했다. 청에서 선진문물을 가져와 전파하려 힘쓰기도 했다. 과거시험은 스스로 포기했는데, 아마도 자신의 생각과 다른 획일적 정답을 써내는 것을 싫어했던게 아닐까.
태: 홍대용 등 실학의 동료들과 나눈 이야기를 보면 기하학, 천문학에까지 범위가 미친다. 서양에서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느냐 묻어버리느냐는 큰 의미의 차이가 있다. 성리학 기반의 자치통감, 사서삼경 등을 위주로 사회를 지배한 지배층 vs. 서양문물을 접한 동료 지식인들. 둘 중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 후자로 생각을 돌리는게 대단한 일이다. 저자가 살았던 정조 시절에도 실제 백성들의 삶은 크게 나아진 것이 없었다.
협: 홍대용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백탑파에서는 기술공학에 대한 토론도 많이 했다. 연암은 처삼촌인 이양천과 대화하며 많은 지식을 다졌고 50대에 연경을 다녀온 뒤 허생전을 썼다. 허생과 저자 사이에 유사점도 많다. 덩치도 크고 술도 잘 먹었으며, 농민들한테도 솔선수범하여 평소에 편하고 털털하게 대한 인물이었다.
서번(티베트) 승려를 만나는 장면 (2권 p.174)에서는 황실이 승왕을 극진히 대접하는 모습에서 서번을 경계하는 건륭제의 외교, 안보적인 장치와 생각을 저자는 읽어낸다. 최근 발행된 '지리의 힘'이란 책에서도 똑같은 의미가 제시되는데 250년 전에 이미 저자에게는 그러한 통찰력이 있었다.
은: 저자와 같은 이런 사람이 외교부장관을 해야 한다.
<토론주제 2: 열하일기를 통해 본 박지원의 문학>
영: 개인적으로 이 책에 실린 문장들이 좋았다. 요즘 글에는 없는 독특한 표현법이 처음에는 낯설다가 점점 읽을수록 묘미가 있어 좋아졌다. 특히, 一夜九渡河記(2권 p.505)의 "나는 오늘에서야 도道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도다."로 시작하는 부분이 인상깊었다. 코끼리를 묘사한 부분 (p.524)도 있는데 읽기만해도 그 모습이 그려지더라.
주: 저자의 외교적 감각, 북학파로서의 생각과 더불어 그의 문학적 성과도 따져봐야 한다. 그의 수필집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말하는 '연암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당시 정조가 연암체로 글 쓰는 것을 금했다는 말도 있다.
숙: 통속적이기도 한 사실적인 묘사가 연암체일 것이다. 연암체로 쓰지 말라는 말은 당시 기득권층인 사대부들의 근엄하고 점잖은 표현으로 쓰라는 말이었을 것. 이번에 읽은 개정판에서 그나마 사실적인 묘사의 글들이 실린 것 같다.
협: 김혈조씨 역자 서문에 언급되어 있다. 기존 필사본이나 번역본들의 윤색과 왜곡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첫째, 명, 청의 국호와 연호를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 둘째, 우리말을 살려서 이를 한자화하여 표현한 문제. 셋째, 천주교 및 서양과 관련한 용어나 관심에 대한 문제. 넷째, 연암의 자유분방한 사고와 행동, 풍속이나 사회통념에 맞지 않는 내용에 대한 문제 등. 일반인들은 연암체가 좋았을 것이다. 책이 완성되기 전에 필사본이 돌 정도로 인기가 있었으니. 그런데 과거에 응시한 선비들조차 그렇게 쓰니까 문체반정이라며 정조가 막은 것이다.
주: 이상호씨에 의하면 호질, 양반전, 허생전 등의 내용, 표의문자 대신 표음문자를 쓴 형식, 사실적 묘사 방법 등 모든 것이 당시 지배층의 입맛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연암체를 형성하지 않았을까?
숙: 一夜九渡河記(2권 p.506)의 "소리와 빛깔이란 내 마음 밖에서 생기는 바깥 사물이다."로 시작하는 단락이 좋았다. 내용도 좋았지만 "연암협 속 골짝으로 돌아가 다시 앞 시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이를 징험해 보리라."에서처럼 반성이나 각오를 기행문에 쓴다는 것이 대단했다. 그 당시 글에는 율격, 율조가 있었는데 이를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썼다.
주: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하는 모습이 보인다.
은: 太學留館錄(2권, p.83~)의 우리는 말을 기르고 다루는 법을 잘 몰라 우리 말이 청의 말에 비해 작고 약하다는 안타까움과 玉匣夜話(3권, p.281~)의 허생전 이야기가 특히 흥미로웠다. 바늘을 먹었을 때의 대처법과 흑진국 사람들의 이야기는 특히 재미있고 웃음이 났다.
영: 이 책에는 만주족이 사용한 만주어가 소개되어 있다. 중국에 대해 관심이 있고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만주 글자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태: 건륭제는 비록 당시 만주족이 중국을 다스렸으나 언젠가는 다시 돌아갈 것으로 예견하고 그들에게 한자와 함께 만주어를 기억하라고 하여 2개 국어를 공부하게 하였다.
협: '혼불' 7권에 보면 최명희 선생도 열하일기를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주: 책을 읽을수록 저자의 고민에 공감하게 된다. 18세부터 앓았던 우울증, 가난한 삶 등 저자의 배경이 하층민들의 삶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했으리라. 실질적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숙: 저자는 야소교를 믿었을까? 黃圖紀略(3권, p.343)의 "나는 그가 두려워서 처음에서 멈칫거리다가 물러나 피하려고 하였다. ~ 이것이 이른바 야소(예수)의 모습인가?"를 읽으면서 저자가 이 종교에 대해 더 연구했을까? 그의 글이 후세에 영향을 미쳤을까? 궁금했다. 또 홍순언(p.277)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예전에 아이들과 함께 본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그 돈은 공금이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우리나라에 와서 해만 끼쳤다고 지금의 역사가들은 이야기한다. 그런데 저자는 명나라를 고마워한다. 명에 대한 사대정신이 당시 저자에게도 있었다는 뜻. 지금의 상식과 달라서 혼란스러웠다.
주: 중국에게는 우리가 변방의 부족국가 수준이었을 것이다. 중국은 황제, 우리는 임금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숙: 황금대 이야기(p.353)에서 "나는 바란다, 천하의 사람들에게. 황금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기뻐할 일도 아니요, 없다고 해서 반드시 슬퍼할 일도 아니다." 부분은 특히 저자의 돈에 대한 관념을 보여준다. 이득을 취하면 오히려 뒤를 돌아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한동안 그 사자성어를 맘 속에 새기고 지냈다. 일하지 않고 큰 돈을 버는 사람을 신지식인이라 오해한 적도 있지 않나. 자신을 늘 경계해야 한다.
태: 저자는 돈욕심이 있었을까?
주: 저자의 수필집에 죽은 누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조카들과 섬에 들어가 살게 되는 남은 가족들을 보며 통곡하는 저자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분명 돈은 필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은: 저자는 돈욕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본문 중에 '베낀 책은 열 권에 심은 뽕나무는 몇 그루'라는 문장이 나온다. 관직에 나가 입신양명할 수도 있었으나 하지 않았다.
태: 돈이 없는 주변사람들을 불쌍히 여겼다. 그러나 그걸 완벽하게 갖춘 기득권 양반들의 삶을 보니 살만한 그들에게 생존의 문제는 중요치 않았다.
열하를 오가는 숨막히는 일정 중에 한고비 쉬는 부분이 있다. 夜出古北口記(2권, p.494)에는 한 밤 상현달 넘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유년시절을 반추하는 솔직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 인상깊었다. 그의 문장력에 감탄. 솔직하기도 하고, 스러져가는 조선의 미래를 걱정하는 감상도 들어 있었다.
영: 반면, 지루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숙: 3권의 시들 중 106페이지의 반추루의 시가 인상깊었다.
"시름 깊은 이내 심사 화공에게 부쳐 논하고
처량하게 늘어진 가지 강촌을 꿈꾼다...."
정: 104페이지 「낮잠을 자며」도 좋다.
협: 이 책에는 벽돌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실제로 저자는 북경을 다녀와서 조정에 건의를 했고, 이것이 수원화성 축조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주: 보통 수원화성 하면 거중기가 대표적으로 떠오르는데, 벽돌도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
<마치며>
태: 마지막으로 각자 꼭 하고싶었던 이야기가 있다면 하고 토론을 마치자.
협: 완독한 내 자신에게 고맙다. 아베체가 아니었으면 못했을 일이다. 배선생님이 일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맞느냐? 틀린 게 있지 않느냐? 늘 반추해야 한다. 그러려면 길을 나서든 여행을 떠나든 해야 한다."고 쓰셨다. 이 책이 그런 인사이트를 준다.
태: 현재 우리의 여행은 소비에 치우쳐있다. 목적을 갖고 만나는 사람과 소비를 위해 만나는 사람은 분명 다를 것이다. 열하일기에서의 중국은 현재의 중국과 다르다. 그 당시 중국은 우리에게 세계의 중심이었으나 지금은 그런 세계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박지원만큼 현재를 고민하는 지식인은 없어보인다. 참지식인이 우리에게 있나? 전세계의 도서관 책들을 다 볼 수 있음에도 우리는 아직도 베끼고 있다. 자기 것을 갖고 뭘 해보고자 하는 사람이 없다. 중국을 모방하듯 미국을 모방하는 것이 안타깝다.
환: 참지식인이란 어떤 지식인인가?
주: 참된 지식인이란 자기의 삶이 자신의 지식과 부합하는 사람이 아닐까?
환: 박지원은 하층민의 삶을 고민하고 함께 했기 때문에 참지식인이 아닐까?
숙: 논어에서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知之爲知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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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토론기록은 항상 수정중이오니 이상한 부분이 있으시면 냅다 말씀해주세요.
천선생님. 혹 만이불일(滿而不溢) 아닌가요? 네이버 찾아보니 돈을 경계하는 사자성어로 추천해줍니다. 혹, 맞다면 본문 수정하겠습니다. 생각나시면 알려주세욤^^
천샘 얘기중에 야수교 -->야소교
오타입니다~^^
@카이저 소제 수정했습니다~^^
다니엘님의 노고에 늘 고마움을 느낍니다.
서기로 다니엘 샘의 생각, 느낌을 다 공유하지 못해 아쉬움이 있지만,
덕분에 '열하일기' 3권을 완독하게 되어 감사해요.
"뭔가 하지않고 있으면 큰 일날 것 같은 우리의 위기감이
당시 청나라문물을 눈앞에서 본 박지원의 심경과 비슷할 것 같다."라는 다니엘샘의
의견에 공감을 보내며....수고하셨어요.
종합선생님 덕분이지요. 전 그냥 묻어갔습니다.ㅎㅎ
‘열하일기’의 감동을 좀 오래 붙들고 싶었는데
생생한 토론기록이 있어 걱정을 덜었네요 ㅎ
실학의 미진한 수용으로 말미암아 정조 이후 급격히 무너져버린 조선의 운명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과제와 태도는 어떤것일지, 착잡하고 무거운 기분마저 드네요 ㅠ
수고하셨습니다. 손샘^^
감사합니다^^
정리글을 읽으니토론내용과 분위기가 올올이 생생하게 떠오르네요.
한자어도 많아서 정리하는데 품이 더 들었을듯요.
손샘 노고에 박수를 보냅니다~
Thank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