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링 위를 달리는 말 / 신혜정(대한)
분홍빛 말이 나를 유혹했어요.
말을 타려고 하는데 해진 바지 사이로 무릎이 보이네요
말장사 아저씨가 입은 회색 점퍼 소매에도 눈런 솜털이 삐죽거려요
아까부터 아저씨는 저기 공장굴뚝처럼 기침을 토하고 있어요
나는 달리고 있었거든요
달리는 말 위에서 달리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나는 말 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위로 솟으면 초록과 빨강 줄무늬 천막이 보이고
내려오면 내 바지처럼 군데군데 구멍난,
쓰레기더미 같은 판자집이 보였어요
연탄재들은 오늘 아침 차에 실려 떠났어요
말장사 아저씨는 네발 달린 의자에 안장처럼 앉아 있네요
아저씨가 움직일 때마다 의자가 삐그덕 소리를 냈어요.
나는 달리고 있었거든요
달리는 말 위에서 달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말발굽 소리 대신 녹슨 프르링만 자꾸 삐그덕거렸어요
창호지 바른 우리집 창문에 불이 켜지네요
이제 말들이 리어커 바퀴에 실려 떠날 거예요
나는 달리고 싶었거든요
다리가 없는 분홍빛 말 위에서 나는 달리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엄마, 연탄재는 왜 또 내놓으세요?
이층에서 본 거리 / 김지혜(동아)
1
모시 반바지를 걸쳐 입은 금은방 김씨가 도로 위로 호스질을 하고 있다 아지랑이가 김씨의 장딴지를 거웃처럼 감아 오르며 일렁인다 호스의 괄약근을 밀어내며 투둑 투둑 흩뿌려지는 幻의 알약들
아 아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아
뻐끔뻐끔 아스팔트가 더운 입김을 토하며 몸을 뒤튼다 장딴지를 감아 올린 거웃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일제히 용두질을 시작한다 한바탕 대로와 아지랑이의 질펀한 정사가 치러진다 금은방 김씨가 잠시 호스질을 멈추고 이마에 손을 가져가 짚는다 아 아 정말 살인적이군, 살인적이야
금은방 안, 정오를 가리키는 뻐꾸기 시계의 추가 축 늘어져 있다
2
난간, 볕에 앉아 졸고 있던 고양이가 가늘게 눈을 뜬다 수염을 당겨본다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한다 등을 활선처럼 구부린다 앞발을 쭈욱 뻗으며 온몸의 털을 세워본다 그늘은 어디쯤인가 幻想은 어디쯤인가 졸음에 겨운 눈을 두리번거린다 난간 아래에 굴비 두름을 줄줄이 꿴 트럭 한 대가 쉬파리를 부르며 멈춰져 있다 백미러에 반사된 햇빛이 이글거리며 눈을 쏘아댄다 하품을 멈춘 고양이, 맹수의 발톱을 안으로 구부려 넣는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선을 거두고 어슬렁, 난간 위의 시간으로 발을 뻗어본다 빛의 알갱이들이 권태의 발끝에 채여 후다닥 흩어진다 권태가 이동할 때마다 幻想도 한걸음씩 비켜 선다 이윽고 권태가 지나간 난간 위로 다시 우글거리며 모여드는 햇빛,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쩌억쩍 하품을 뿜기 시작한다
3
건너편의 창. 적색 커튼이 휘날리고 있다. 시간이 들고난 것처럼 휑하다. 안은 보이지 않는다. 일몰 쪽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 동굴 같다. 그러나 그 동굴에도 전등 켜지던 밤이 있었다. 불 밝힌 창 아래에서 토악질하던 사내. 목구멍에 검지를 집어넣고 속을 뒤집고 있었다. 돌아가 잠들기 위해 영혼을 뒤집던 사내는 전신주처럼 깡말랐었다. 깡마른 영혼들이 분주하게 오가던 골목은 그러나 이제 텅 비워져 있다. 깨진 유리창. 찢겨 울부짖는 적색 나일론 커튼. 절벽처럼 캄캄해지고 절벽처럼 늙어가는 창. 영영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아직 닫히지 못한 창을 나는 바라보고 있다. 창도 그런 내가 끔찍할 것이다. 영원히 다물리지 않을 것만 같은 입구들이 키를 쥐고 있음을. 그 안엔 환상도 캄캄하리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창의 건너편에서 나는 매일 꼼짝않고 있으므로.
개신고물상 / 박옥순(경향)
1
충대우 6로 29번지
언제부턴가 이곳에
버려진 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냉매가 지나던 혈관이 터져 버린 후
감옥 같던 마음의 빗장을 열어둔
문짝 떨어진 냉장고
가난한 사람의 소박한 꿈으로
바퀴 탱탱하게 부풀었을
젊음이 짐스럽지 않던
페달 부러진 늙은 자전거
굴착기의 굉음에 허리 끊어지기 전까지
어느 건물, 어느 다리의 튼튼한
뼈대였을 등 굽은 철근조각
지상에서의 마지막 눈물인 듯
눈 질끈 감고 삼키던 독한 시름
제 허리 꺾어가며 위로해주던 소주병
그리고, 불개미 같은 세월의 녹을 달고
달동네의 겨울을 기억하는 연탄집게까지
2
맞은 편엔 몇 달이 멀다고
간판이 바뀌는 상점
고물상 옆 커피숍이 어울리지 않았는지
어제는 뼈다귀 해장국 간판을 달았다
이 골목의 상점들이 어느새
폐허처럼 버티고 선
고물상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 것일까
한 자리에서 십여 년 넘게 버텨온 뚝심
이제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은 없다고
세상의 낮은 곳 쉬지 않고 살피는 눈
저녁에는 낡은 호미자루 같은 등으로
수레 가득 폐지를 싣고 오는 노인들
수유리에서 / 장만호(세계)
함부로 살았다, 탕진할 그 무엇도 없었다
그대에게 말할까 말까, 사랑하는......
어머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석달 열흘
한줌의 마늘과 쑥을 드시고도,
강림하지 않는 아버지를 우리가 기다릴 때
그대를 만나고 미아리나 수유리 저녁을 만날 때
간혹 희망은, 뽑지 않은 사랑니처럼
아팠다. 생애의 묽은 죽을 반추하거나
희망과 혁명을 바꿔 부르기도 했지만,
집 근처 국립묘지의 무덤과 무덤들
푸르고 단단한 입술들이 일러주던 또 다른 피안은
시대의 낙엽들 되돌아 갈 길을 묻고 있었다
그렇게도 읽을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갔다
세상은 징검다리였다
삶은 금간 항아리 같았다
성급한 이해가 한 생애를 그러쳤으므로
점자를 읽듯 세상을 더듬거렸으나
잇몸인 물과
행간에서 깊어지는 한숨 같은 우물들
읽을 수도 채울 수도 없는 세상을
탕진할 것 하나 없는 시절을
한 켤레 벙어리 장갑처럼, 함부로
나는 살았다.
뿌리 / 정임옥(조선)
나무 뿌리에 앉아 잠이 들었다
뿌리가 말을 걸어왔다
바람이 이따금씩 그 말을 끊어 놓았다
빈깡통이 재활용 쓰레기통에서
꽃으로 피어나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다시 뿌리가 말을 걸어 왔다
이번에도 바람이 귀를 막아버리자
뿌리가 가지 끝으로 손을 내뻗었다
만져지지 않았다
네가 만져지지 않던 지난날의 내가
저 뿌리와 같았음을 알겠다
네 마음 끝까지 오르지 못한 내가
나무의 빈 물관에 불과했음도 이제는 알겠다
네가 잠 속까지 따라 들어왔다 잠에게 말을 걸자
꽃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바람도 숨을 죽였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아침
가지 끝에 매달린 뿌리를 본다
복숭아 / 서광일(중앙)
비닐 봉지가 터졌다
우르르 교문을 빠져나오는 여고생들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복숭아
사내는 자전거를 세우고
떨어진 것들을 줍는다
길이가 다른 두 다리로
아까부터 사내는
비스듬히 페달을 밟고 있던 중이었다
허리를 굽혀 복숭아를 주울 때마다
울상이던 바지주름이 잠깐 펴지기도 했다
퇴근길에 가게에 들러
털이 보송보송한 것들만 고르느라
봉지가 새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알알이 쏟아져 멍든 복숭아
뱉은 씨처럼 직장에서 팽개쳐질 때
그리하여 몇 달을 거리에서 보낼 때 만난
어딘가에 부딛혀 짓무른 얼굴들
사내는 아스팔트 위에사
그것들을 가지런히 모아두고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얼마만에 사들고 가는 과일인데
흠집이 있으면 좀 어떤가
식구들은 둥그렇게 모여
뚝뚝흐르는 단물까지 빨아먹을 것이다
사내는 겨우 복숭아들을 싣고
페달을 힘꼇 밟는다
자전거 바퀴가 탱탱하다
그 노인이 지은 집 / 길상호(한국)
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준비해둔 문을 달았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쁨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
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불 켜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라고 봉숭아 마른 꽃잎도 넣어둔,
문까지 달고 그는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못 없이 흙과 나무, 세월이 맞물려진 집이었기에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 아귀를 맞춰나갔다
토닥토닥 망치 소리가 맥박처럼 온 집에 박혀들었다
소리가 닿는 곳마다 숨소리로 그 집 다시 살아나
하얗게 바랜 노인 그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밀란 쿤테라를 생각함 / 고현정(문화)
세계 풍물전이 벌어지고 있는 서점안에
모형낙타가 탁자 위에 우뚝 서 있다
아무도 들쳐 봐 주지 않는 책들을 풀죽은
그들의 이마를 모형낙타는 가슴까지 곧게 뻗은 털을
휘휘 저으며 둘러보고 있다
권태로운 오후 두시의 사막을 걷고 있던 나는
네 모습에 빨려들 듯 단숨에 다가간다
카멜색의 길고 부드러운 잔등의 털
네 개의 발과 발톱들, 두눈은 흙빛 플라스틱이다
먼 길을 걸어 오느라 많이 닳아 있다
튀어나온 코와 그 아래엔 구멍은 뚫려 있지 않고
정교하게 붓으로 모양만 그려져 있다
그러나 네 개의 다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이 찾는 책의 사막을 단단히 딛고 서 있다
사막이 만들어 냈다는 등에 솟은 두 개의 혹이 눈물겹도록
의연해 보여 나는 두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어 본다
오후 두시의 도시 사막을 혼자 타박타박 걷고 있는
모형낙타의 메마른 슬픔이 내 손 바닥의 무수한 잔금들을 통해
전달되어 심장을 쿵쿵 울려 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