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 성철 스님은 청담 스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간월암을 나와 법주사 복천암에 들었다. 복천암에 들어섰을 때 청담 스님이 달려와 봄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청담이 없는 복천암은 살림이 엉망이었다. 당장에 공양주도 없었다. 이때 조실스님이 나서서 공양주를 자처했다. 그러자 너나없이 공양주를 자처했다. 그래서 결국 돌아가며 보름씩 공양을 책임지기로 했다. 성철은 공양주를 맡은 적이 없음에도, 또 자신은 생식만을 하고 있음에도 공양주 역할을 잘해냈다고 한다."
성철과 청담은 1943년 봄에 만나 함께 정진하자고 약속했다. 성철은 약속대로 간월암을 나와 도반 청담이 머물고 있는 법주사 복천암에 들었다.
법주사 큰 절에서 오른쪽 샛길로 근 10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복천암은 720년(신라 성덕왕 19)에 창건된 천년 고찰이다. 옛날부터 절 옆 큰 바위에서 나오는 약수가 효험이 뛰어났다고 한다.
물만 마셔도 병이 나았으니 복(福)이 깃든 샘[泉]일 것이다. 또 이곳에 절을 지어 부처님 말씀으로 영혼을 씻었으니 이 역시 복천이었을 것이다.
고로 예부터 이곳에서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헹궜을 것이다. 고려 공민왕은 수시로 머물렀고, 극락전에 ‘無量壽(무량수)’라는 친필 편액을 내렸다. 조선시대에도 세종, 세조, 문종 등 여러 왕이 이 작은 절을 챙겼다고 한다. 특히 세조는 병든 몸으로 복천암을 찾았다.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고 형제와 수많은 인재들을 죽였다.
권력을 잡기 위해 유교의 근간인 충효사상에 피를 뿌렸다. 임금을 죽여 대역죄를 범했고, 단종을 지켜달라는 부왕 세종의 유지를 어긴 대불효자식이었다.
왕으로 13년을 살기 위해 인륜과 천륜을 어겼다. 이로써 왕조의 정통성이 짓밟혔다. 역적을 임금으로 섬겨야했던 백성들은 참담할 뿐이었다.
세조는 말년에 악성 피부병을 얻었다. 백성들은 업보가 달라붙은 천형이라며 한양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종기에서 나오는 피고름은 왕이 죽인 사람들의 피라 믿었다. 세조는 마지막으로 엎드릴 곳을 찾았다. 궁궐을 나와 복천암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복천이 있었고, 또 아끼던 신미대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미대사는 한글창제에 깊숙이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세조가 험하고 거친 길을 헤쳐 멀고 먼 복천암을 찾아가자 숱한 일화가 생겨났다. 속리산 정이품송 얘기도 그중 하나이다.
세조가 법주사를 향해 가는데 유독 가지가 처진 소나무가 서있었다. 소나무 아래를 막 지날 때였다. 아무래도 가마가 가지에 걸릴 것만 같았다.
왕이 “연(輦)이 걸린다”고 말했다. 그러자 소나무는 제 가지를 위로 들어 가마가 지나가도록 했다. 소나무가 기특해서 세조가 정이품의 벼슬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속리산은 소백산맥의 가운데에 있고, 복천암은 속리산의 배꼽[俗離山臍中]에 위치해 있다. 그것은 ‘가운데의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음이었다.
복천암은 금강산 마하연, 지리산 칠불암과 함께 당시에는 손에 꼽는 수도처였다.
경허, 동산이 정진했고 1930년에는 전강이 조실을 맡아 선승을 지도했다. 성철은 월현, 경봉, 금포, 현칙, 영천 스님 등과 정진했다고 전해진다.
성철은 속리산 봉우리들이 아직 잔설을 이고 있을 때 복천암에 들어섰다. 도반 청담이 달려 나와 봄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그 옆에 청담을 따라 속리산에 들어온 도우가 있었다. 도우는 성철을 복천암에서 처음 봤는데 이후 대승사, 봉암사, 천제굴까지 성철을 따라가 시봉했다.
성철은 복천암에서 생식을 했다. 도우의 증언이다.
“성철 스님은 복천암에 오시자마자 생식을 하셨는데 염분 있는 것은 일체 안 드시기로 하여 부식은 없고 쌀 2홉에 들깨 약간 넣고 맷돌에 갈아서 그것을 물 한 대접에 나눠 잡수셨다. 무나 감자가 생기면 한쪽씩 들깨에 찍어서 먹으니 맛이라고는 없었다.”
성철은 복천암에서 생식과 무염식을 했지만 그 이전부터 소금과 화식을 멀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특유의 ‘실행 후 말하지 않는’ 성품으로 미루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성철은 무염식은 평생 지속했고, 생식은 스승의 건강을 염려한 제자 법전이 간절히 화식을 권하는 바람에 천제굴 수행 시절에 중단했다.
도우(1922~2005)는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13세에 임제응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1942년 직지사 천불선원 안거를 시작으로 서울 선학원, 문경 대승사 쌍련선원, 문경 봉암사, 창원 성주사, 합천 해인사 등 여러 선원에서 안거했다.
특히 1947년 봉암사 결사 때는 선학원에서 열린 전국비구승대표자회의에 참석했고, 1954년 봉암사 주지 때는 불교정화운동에 동참했다.
부석사와 고운사 주지를 지냈고, 1980년 이후 서울 삼각산 도선사에 주석했다. 도우가 성철과 인연을 맺은 것은 어쩌면 ‘가난’ 때문이었다.
절마다 먹을 것이 없었다. 일제의 수탈이 심해져 강산의 생명붙이들은 배가 고팠다. 선승도 먹어야 도를 닦았다.
수행승 도우는 수행 중에 먹을 것이 없어 도토리를 주워 도토리밥을 해먹었다. 그렇게 날마다 도토리를 찾아 산을 뒤지다 옴이 올랐다.
온 몸이 부어올랐지만 약도 구할 수 없었다. 탁발에 나선 도우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서울 선학원이었고, 그곳에 마침 청담이 있었다.
도우는 마땅히 갈 데가 없어 속리산으로 떠나는 청담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복천암에서 성철을 만난 것이다. 성철의 첫 인상을 도우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눈동자에서 밝은 빛이 나고 아는 것도 많으시고 참 명랑하셨습니다.”
이때 도우 나이 22살이었으니 청담과는 스무 살, 성철과는 열 살 차이가 났다. 도우는 평생 성철을 높이 받들었다.
“큰스님은 법에 있어서는 고불고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태고 스님이나 나옹 스님 이후 성철 스님만한 도인이 없다고 믿습니다. 법문 하나를 봐도 완전히 불조에 계합한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법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 하던 근래의 명안종사로서는 성철 스님만한 도인이 없다고 믿습니다.”
복천암도 양식이 턱없이 모자랐다. 절에서 내놓는 밥과 찬은 보잘 것이 없었다. 선방에서 소쩍새 울음을 듣고 있으면 배가 더 고팠다.
그럼에도 원주를 맡은 노장이 술을 좋아했다. 큰절에서 양식을 타오면 몰래 복천의 물로 술을 빚었다. 저녁 무렵 복천암에는 노을처럼 술 냄새가 퍼졌다.
배고프면 냄새에 민감했다. 술 냄새만으로도 선방 대중들이 취할 정도였다. 청담이 참다못해 큰절 법주사로 내려가 담판을 지었다. 복천암 원주는 걸망을 져야만 했다.
청담 일행이 선방을 접수하고 얼마 자나지 않아서였다. 정확히 부처님 오신 날에 복천암에 큰일이 났다.
사실상 선방 살림을 끌어가고 있던 청담이 왜경에 잡혀간 것이다. 왜경은 3.1만세운동에 가담했던 청담을 요시찰 인물로 줄곧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청담에게 누구와 독립운동을 모의했으며 누구를 숨겨주었는지 캐물었다. 일제의 광기는 깊은 산속까지 스며들었던 것이다.
청담이 없는 복천암은 살림이 엉망이었다. 당장에 공양주도 없었다. 이때 조실스님이 나서서 공양주를 자처했다.
“모인 스님들 면면을 보니 든든합니다. 이번에는 내가 공양을 맡을 테니 여러분은 공부나 하십시오.”
큰 어른이 공양주를 하겠다고 나서자 모두 민망했다. 남의 절에 와서 도리가 아니라는, 그럴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성철이 나섰다.
“조실스님의 신심을 들어드립시다. 그래야 어른의 밥 얻어먹는 우리도 더 열심히 공부할 것 아닙니까. 그래도 미안하니 제가 먼저 공양주 노릇을 하겠습니다. 그런 후 조실스님께 부탁드려 보지요.”
그러자 너나없이 공양주를 자처했다. 그래서 결국 돌아가며 보름씩 공양을 책임지기로 했다. 성철은 공양주를 맡은 적이 없음에도, 또 자신은 생식만을 하고 있음에도 공양주 역할을 잘해냈다고 한다.
도우는 성철이 곡식 한 톨도 흘리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소임을 해낸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성철은 그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복천암 한 철을 조실스님이 해준 공양을 얻어먹고 잘 살았지.”
배가 고파도, 없이 살아도 서로의 공부를 위해 자신을 낮췄던 선방 일화들이 이곳저곳에서 꽃처럼 피어났다. 진정 서로를 아껴주고 남을 위해 나를 비웠던 산사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청담은 상주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왜경은 누구와 독립운동을 모의하고 누구를 숨겨주었는지 불라고 했다. 청담이 답을 할리 없었다. 왜경은 모진 고문을 가했다. 고문은 두 달간 지속됐고, 짓이겨진 몸뚱이에 이질까지 걸렸다. 청담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죽음이 어른거렸다. 그때서야 병자들을 수용하는 피병사(避病舍)로 청담을 옮기고 복천암에 연락을 주었다. 젊은 도우가 달려가 죽어가는 청담을 지켰고, 속가에서 부인이 찾아와 수발을 들었다. 청담은 조금씩 차도를 보였다. 그리고 7개월 만에 풀려나 상주포교당으로 옮겨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성철이 찾아왔다.
빼앗긴 산하에 다시 가을이 깃들 때였다. 그 날의 만남과 당시의 대화를 작가 윤청광은 ‘구도소설 청담 큰스님’에서 이렇게 그리고 있다.
“속리산 복천암에 있던 성철, 순호(청담) 스님께 문안드리오.” “내 귀에는 마치 문상드리러 왔다는 소리로 들리는구먼 그래, 허허허” “열반에 드셨으면 문상이 될 것이요, 아직 살아계시면 문안이 될 것입니다.”
순호 스님과 성철 스님은 방문을 사이에 두고 농을 건넸다. 순호 스님이 방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들어오시오.” “허허 이거 부처님의 설산고행도를 스님이 몸소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려.” “부처님의 설산고행상을 친견했거든 마땅히 삼천배는 올려야 할 것이오.” “원 참 스님두, 그토록 고행정진을 마치고도 아직도 욕심이 그리 많단 말씀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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