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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연예 원문보기 글쓴이: 너없는지금도
서산 대사의 문하에 천재 소년 소요(逍遙)가 있었다.
소요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비하여 성동(聖童)이라고 고을 사람들한테 칭송을 받았다. 13세에 출가하여 17세에 이미 일대시교(一代時敎)를 통달하고 운곡(雲谷), 송월(松月)과 더불어 법문 삼걸(法門三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 소년 강사(講師) 소요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처님의 경전을 아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생사 일대사(生死一大事)를 마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묘향산에 있는 서산 대사를 찾아가서 법을 가르쳐 줄 것을 청하니, 대사는 보자마자 법기(法器)임을 알고 그날부터 시봉을 시키면서 능엄경 한 구씩을 매일 가르쳐 주었다. 이미 경전을 통달한 강사인지라 능엄경을 모를 리 없지만 대사의 가르침이라 매일 배우다 보니 3년이 다 지나갔다. 소요는 생각해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대선사요, 대도인이라 하여 찾아왔는데 법은 가르쳐 주지 않고 이렇게 다 알고 있는 능엄경만을 가르쳐 주니 화가 나는 것이다.
그러나 참고 계속 배워 가는데 소요가 잠깐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대사는 웬일인지 때묻은 작은 책을 보다가는 곧 안주머니에 집어넣곤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여러 번 계속되고 보니 소요는 그 작은 책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아졌다. 하루는 대사가 잠자는 틈을 타서 그 작은 책을 보려고 하자 대사는 깜짝 놀라 깨어나서 그 책을 더욱 소중히 감추는 것이었다. 그러니 무슨 책인지 점점 의심이 커졌다.
하지만 그 작은 책을 보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단속이 심하고, 또 그냥 그대로 아무런 법도 얻지 못한 터라 소요는 결국 더 이상 화를 못 참고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하직을 고하니 그때서야 비로소 대사가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던 그 때 묻은 작은 책을 주었다.
“가려거든 이 책이나 가지고 가게.”
대사가 준 책을 펴보니 거기 게송(偈頌)이 하나 적혀 있었다.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다가
물 가운데 거품을 태워 다할지니라.
가히 우습다 소 탄 자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斫來無影樹
哨盡水中嘔
可笑騎牛者
騎牛更覓牛
소요는 이 게송을 가지고 호남으로 내려가 20년간을 참구했으나 깨닫지를 못했다. 나이 40에 이르러서야 다시 묘향산에 돌아가서 대사를 뵈니 감개가 무량하여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20여 년간을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던 스승이었다.
대사가 물었다.
“공부가 어떻게 되었느냐?”
“떠날 때 주신 게송의 의지를 아직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대사가 말했다.
“가히 우습다 소 탄 자여,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
그 순간 소요는 언하에 확철 대오했다.
(이것이 이른바 활구 법문(活句法門)이다. 서산 대사의 말은 너무도 견고해서 이빨이 들어갈 데가 없다. 금강석이다.
그렇다면 나도 여기서 한 마디 해볼까 한다.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다는데 이것은 무슨 도리인가? 그 찾는 소는 그만두고 탄 소만 데리고 올 줄 알면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다니 나는 그렇게 이르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일단 말을 건다.
“그러면 그대는 어떻게 이르겠는가?”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다.”
이 소식을 아는가, 마는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줄 알아야 이 공안을 확실히 아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천 마디 만 마디 해보았자 그게 다 헤매는 짓이다.)
하지만, 이렇게 부처님의 정법이 대대로 밀전(密傳)되어 오다가 제74대 만화 보선(萬化普善)에게서 그만 끊어지게 된다. 그 혜명의 등불이 아주 꺼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끊어진 법맥을 다시 이은 이가 바로 경허(鏡虛)였다. 실로 그 조등(祖燈)이 꺼져버린 100여 년간의 암흑세계에 비로소 경허가 동해의 태양처럼 출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중흥조(中興祖)라고 부른다. 가위 ‘한국의 달마’라 할 수 있는 위대한 선지식이다. 이제 경허는 제75대이다.
그는 전북 전주 출생으로 속명은 동욱(東旭)이요, 성은 송(宋)씨이며,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9세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불과 20여 세 때부터 대강사(大講師)로 이름을 떨치다가, 생사의 절박함을 크게 경험하고 돌아와 비로소 발심(發心), 화두를 참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활연 대오(豁然大悟)를 했다. 때는 1879년 11월 보름께였고,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리고 그는 그 뒤 보임처(保任處)를 충남 서산 연암산 기슭의 천장사로 옮겨 다시 처절한 용맹정진에 들어간 지 1년만에야 오도송을 읊었다.
이것은 그의 오도송(悟道頌)이다.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깨닫고 보니 삼천 대천 세계가 이 내 집일레.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이 일없이 태평가를 하는구나.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家
六月燕巖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다시 한번 자세히 이 오도송을 들여다보라. 이 가운데 어디에 티끌이 한 점 묻어 있는가. 팔만대장경 속에는 글자가 있지만, 그러나 이 오도송 속에는 글자가 한 자도 없다. 글자가 있으면서 또한 글자가 없다. 그야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다. 그럼에도 이것은 팔만대장경의 결집이요, 그 마지막 돌파구이다. 이것이 바로 조사선(祖師禪)이다.
대저 오도송이나 전법게, 열반게가 제대로 된 것이라면 이렇게 그 속에 글자가 단 한 자도 없어야 한다. 요즘의 선시(禪詩)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곧 무문인(無文印)이며, 부처님의 심인(心印)이다. 공(空)이면서 공이 아니요, 공이 아니면서 또한 공이다. 마음은 마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이다.
글자가 있으면 그것은 똥이다. 두고두고 냄새가 나는 고약한 똥이다.)
이제 그 경허의 법은 만공(滿空)과 혜월(慧月)이 각각 이어 받는다. 이들은 제76대이며, 이것이 이른바 양대 산맥이다.
만공의 속명은 송도암(宋道岩)이요, 법명은 월면(月面)이다. 13세에 출가하여 23세 때 깨달음을 얻었고, 34세에는 경허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았으며, 그 후 덕숭산에 주석하면서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고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다.
이것은 만공이 읊은 오도송이다.
빈 산의 이치 기운 고금 밖인데
흰 구름 맑은 바람이 스스로 오고 가누나.
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건너왔는고?
축시엔 닭이 울고 인시엔 해가 뜨느니라.
空山理氣古今外
白雲淸風自去來
何事達摩越西天
鷄嗚丑時寅日出
(세상에 이보다 더 확실한 불법(佛法)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오도송이야말로 그대로 글발 없는 인(無文印)이다. 마치 인장을 허공에 찍은 것과 같다. 그러면서 그야말로 만인의 향기로운 등불이다. 누가 되었든 이 오도송의 뜻만 알면 그 역시도 그대로 견성(見性)이다. 그렇다면, 닭 울음소리는 무엇이고 또 해가 뜬 소식은 무엇인가?)
“천하에 살인하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으니, 그게 누구입니까?”
효봉이 어느 날 덕숭산에 있는 만공에게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이에 만공이 즉시 답했다.
“오늘 여기서 보았노라.”
효봉이 다시 물었다.
“화상의 머리를 취하고 싶사온데 허락하시겠습니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만공이 목을 길게 빼어 내미니, 효봉이 문득 예배를 드렸다.
다음은 만공이 물었다.
“제석천왕이 풀 한 줄기를 땅에 꽂고 부처님께 여쭙기를 ‘범찰을 이미 지어 마쳤습니다.’ 함에 부처님께서 미소를 지었다고 하니,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
효봉이 말했다.
“스님은 참으로 절 짓기를 좋아하신다 하더니, 과연 그 말씀이 옳습니다.”
이에 만공은 그냥 한바탕 웃어 버렸다.
효봉(曉峰)은 14세 때 이미 과거에 장원 급제를 했으며,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10여 년간 판사직에 종사하다가 세속에 염증을 느껴 다 때려치우고 어느 날 엿판을 메고 떠돌기 시작했다. 엿장수로 3년간을 방랑하던 끝에 마침내 스승 석두(石頭)를 만나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했고, 깨달음을 얻었으며, 75세 때는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참으로 아귀가 잘 맞는다. 서로 깊이 정곡을 찔러 버렸다. 바로 이것이 진실로 깨친 경지이다. 이것이 조사선(祖師禪)이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다. 이 속에 부처가 두 번이나 모습을 나타냈다. 역대 조사들 중에도 이처럼 실답게 깨친 이들이 극히 드물다. 이분들이 사실 이 시대의 중생들을 위해 그 마지막 사자후(獅子吼)를 토한 도인들이다.)
어느 날 만공이 한가로이 앉아 있을 때 19세의 시자 진성(侍者眞性)이 차를 달여 가지고 왔다.
만공이 말했다.
“아무 일도 않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차를 대접하는고?”
그러자 진성이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노스님! 한잔 더 잡수십시오.”
만공은 그만 허허허, 하고 웃었다.
진성은 원담(圓潭)의 법명이다. 전북 옥구에서 독자로 태어나 12세 입산했고, 16세에 벽초(碧超)를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으며, 그때부터 만공을 시봉(侍奉)하기 시작하여 만공이 입적할 때까지 줄곧 시자를 했다. 지금은 덕숭산 수덕사 방장(方丈)으로 납자들을 지도하고 있으며, ‘만공 법어’ ‘경허 법어’를 번역, 간행하기도 했다.
(가위 그 사자의 그 새끼이다. 만공은 이렇듯 어린 도인의 시봉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만공의 독특한 가풍(家風)이다.)
전강(田岡)은 전남 곡성 출생으로 속성은 정(鄭)씨이다. 16세에 출가하여 경을 보다가, 도반의 죽음으로 무상함을 느끼고 선방에 나가 용맹정진하던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만공에게서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제77대이다.
전강이 어느 날 고봉, 석암과 함께 수덕사 아래 수덕 고개에 있는 주막집에 들어가 술을 사먹게 되었다. 참선 공부에 있어서 한창 바람둥이 시절의 세 사람이었다. 각기 잔마다 술이 넘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막 그 잔을 들려고 할 때였다. 세 사람 가운데 누군가 말했다.
“우리 술 도리나 한 마디씩 이르고 마십시다.”
그러자 고봉은 노래를 하고, 석암은 퉁소를 불었다. 그런데, 전강은 느닷없이 일어나더니 술상을 냅다 발길로 차버렸다. 그리고는 가는 곳마다 이 술 도리를 들어서 자랑을 했다.
후일 여기에 대해 혜암이 전강에게 말을 걸었다.
“나 같으면 스님과 같이 그렇게 아니하겠소.”
그러나 전강은 그 술 도리를 뺏으려고 하는 것을 미리 눈치 채고 말했다.
“천하없어도 뺏기지 않겠소이다.”
그러자 혜암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 깍쟁이!”
(하지만 나 같으면 전강처럼 그렇게 술상을 냅다 발길로 걷어차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또한 개가 흙덩이를 쫓아가는(韓盧逐塊) 격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나는 냅다 그 ‘술 도리를 이르고 마시자’고 한 사람의 멱살을 움켜잡고 외쳤을 것이다.
“이게 바로 술 도리다.”)
어묵동정 한 마디 글귀를
이 낱 가운데 누가 감히 부딪힐 것이냐?
나에게 동정을 여의고 이르는 말을 묻는다면
곧 깨진 그릇은 서로 맞추지 못한다고 하리라.
語?動靜句
箇中誰敢着
問我動靜離
卽破器相從
이것은 혜암(惠庵)의 오도송(悟道頌)이다.
혜암의 속명은 최순천(崔順天)이요, 법명은 현문(玄門)이다. 12세에 출가를 했으며, 23세 때 발심, 34세에는 비로소 대오(大悟)를 했고, 45세 때 만공에게서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제77대이다.
어느 해 여름 해제하던 날이었다. 만공이 천천히 승당(僧堂)에 내려와 대중을 두루 돌아보며 말했다.
“올 여름 대중들은 용맹스럽게 정진을 잘들 하였다. 그러나 나는 홀로 하는 일 없어 그저 그물을 하나 폈더니라. 그런데 오늘 와서 이 그물 속에 한 마리의 고기가 걸려든 것이다. 자, 대중들은 일러라. 어떻게 해야만이 고기를 구해내겠는가?”
그때 대중 가운데 한 선객이 일어나 입을 들먹하자마자 만공이 무릎을 탁 치며 하는 말이,
“옳다! 한 마리 걸려들었다.”
했다. 다시 한 선객이 벌떡 일어나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자마자 만공은 무릎을 탁 치며,
“옳다! 또 한 마리 걸려들었다.”
했다. 그렇게 대중이 누구든지 입만 들먹하면 무릎을 탁 치며 똑같은 말을 하자, 혜암이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만공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큰스님! 어서 그물에서 나오십시오.”
(이것이 바로 법거량(法擧揚)이다. 가위 확철 대오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법이란 이렇게 철저하고 정확한 것이다. 사실 지금 이 시대에는 우리 중생들의 갈증을 해갈해 줄 만한 이런 선지식(善知識)을 찾기가 어렵다.)
혜암은 자기 문하(門下)의 한 제자에게 전법게(傳法偈)를 내려준다. 그래서 그 문인(門人)은 제78대이다.
여기서 잠깐 그 전법게에 대해서 한마디 할까 한다.
전법게란 무엇인가? 법(法)을 전(傳)해 주는 게송(偈頌)이다. 그만큼 전법게는 수행(修行)의 결정체이다. 도인 면허증이다. 그래서 전법게는 원래 친필로 써서 내려주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그 당시 혜암은 건강상 친필로 써서 내려줄 처지가 못 되어, 그 제자에게 전법게를 내려줄 때 시자 일묵(侍者 一?)한테 대필(代筆)을 시켰고, 또 거기에 필히 <전법게>란 말까지 넣으라고 했다 한다. “그 전법게란 말을 꼭 넣어야 한다!”고.
대필은 왜 시키는가? 혜암의 전법게임을 증명하기 위함이다. 말하자면 그렇게 확실한 증인을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혜암의 친필도 아니고 시자의 대필도 아닌 것을 가지고 전법게라고 한다면 그것은 조작한 가짜이다.
또한 혜암은 전법게를 내려줄 때는 “이것은 전법게다”라고 말했고, 분명히 “거기에 전법게란 말을 넣으라.”고 했으니, 누가 되었든 그것이 틀림없는 전법게라면 그 제자 뒤에 받은 전법게에도 당연히 <傳法偈>란 말이 들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다같은 전법게라면, 왜 그 제자에게만 전법게란 말을 넣으라고 했겠는가.
혜암은 그렇게 해서 그것이 전법게임을 정확히 구별해준 것이다. 이 사실을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위조문서(僞造文書)이다. 혜암은 오직 그 문인 외에는, 그 뒤 아무에게도 전법게를 내려주지 않았다는 것은 그 문하에서 다 공공연히 아는 사실이다.
참회게(懺悔偈)는 삼보(三寶)에 귀의(歸依)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다 주는 게송이다. 그러므로 참회게는 그냥 혜암이 불러주는 대로 본인이 직접 받아 적어도 되고, 아무나 한문을 잘 아는 자가 대신 받아 적어 줘도 된다. 어차피 그것은 자기 한 개인의 기념비적인 것일 뿐이지, 전혀 어떤 상속문서(相續文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그 전법게와 참회게도 하나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혜암 문하에 그런 자들이 몇 명 있는데, 그중 청봉이라는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 묻기를 “스님은 불법(佛法)을 아시오?” 했다고 한다.
“모릅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물었다.
“무엇을 모르시오?”
“그저 모릅니다. 그럼 스님은 무엇을 모르오?”
이에 그는 말했다.
“모르는 그놈을 모르오.”
그러고 나서 그는 그 뒤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도대체 안다는 병이 크게 든 자요. 저런 자들이 불법을 잘못 말하고, 도인인 체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흐리게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불교계의 풍토요. 법을 잘못 말하는 자는 그 과보를 크게 받을 것이며, 그것은 부처님 몸에 피를 내는 것과 같은 짓이므로 때려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법이오.”
한 후, 손바닥을 한번 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그놈을 모른다.’니? 모르는 그놈을 어떻게 모르는가? 정말로 모르는 그놈을 모른다면, 모른다는 말은 왜 하는가? 그래서 그것이 사구(死句)인 것이다. 자기들 끼리 굴러다니던 공안 파설(公案破說) 몇 개 주워들은 걸 끝내 못 버리고 잔머리를 굴려 선문답(禪問答)에 이리저리 꿰어 맞춰서 원숭이 흉내를 내본들 그게 다 말장난일 뿐 자기 분상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그 모른다는 무명(無明)에 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답을 해야 하는가? ‘그럼 스님은 무엇을 모르오?’ 하고 물었을 때 “아는 것을 모른다.”라고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활구(活句)이다.
그럼에도 그는 혜암에게서 전법게(傳法偈)를 받아 경허, 만공, 혜암으로 이어진 법맥(法脈)을 전수한 제78대 선지식으로 자처하고 있다 하는데, 도무지 혜암이 주지도 않은 전법게를 어떻게 받았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그 받았다는 전법게 원본을 한번 당당하게 내놓아 봐야 할 게 아닌가. 혜암 생존시에는 누구든 그 앞에서 감히 전법게란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일생을 학처럼 청결하게 살다 간 혜암이거늘 심히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일이다.
혜암으로부터 법(法)을 이어 받은 그 문인이 스승이 열반한 뒤 그 법어집(法語集)을 출간하려 할 무렵이었다고 한다. 그가 혜암에게서 받은 참회게를 그 문인에게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그 참회게도 법어집에 넣기 위해 자세히 보니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 제대로 받아 적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법에 딱 맞아 떨어지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문인은 부득이 스승을 대신해서 그 참회게를 고칠 수밖에 없었다. 앞의 두 구(句)는 원문 그대로 놓아두고(上方春日花如霰 異鳥聲中午夢甘), 뒤의 두 구를 자기 임의대로 빼고 다시 다른 말로 법에 맞게 채워주었다(萬法通光無證處 唯有揷天是淸峯)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그대로 법어집에 넣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또한 그 문인은 그 법어집을 번역할 때도 혜암과 의논하여 원문까지도 고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그 고쳐준 참회게를 가지고 혜암으로부터 받은 전법게라고 사람들을 속인다면 혜암은 무엇이 되며, 또 그 문인은 무엇이 되겠는가. 또한 그렇다면 그것이 과연 누가 내려준 전법게가 되겠는가. 거기다가 더구나 그가 그걸 가지고 혜암의 가짜 전법 제자(傳法弟子)로 행세하며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말도 되지 않는 그 거짓 전법게를 만들어서 내려주고 있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사람이 돈 몇 푼을 사기 당해도 억울한 일인데, 하물며 그 인생을 사기 당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그 받았다는 전법게 원본을 한번 당당하게 내놓아 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거사가 그에게 전법게를 보여 달라고 하자, 그가 그 거사에게 한다는 말이 자기의 전법게를 그 문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또 어느 지면을 보니 그가 하는 말이 “그 문인이 스스로 엮어 쓴 혜암의 법어집 <늙은 원숭이>에 내 전법게를 올려놓았다”고 한다는데, 혜암이 그에게 주지도 않은 전법게를 그 문인이 어떻게 그 책에 올려놓겠는가. 그렇다면 고작 그 문인이 고쳐준 참회게(上方春日花如霰 異鳥聲中午夢甘 萬法通光無證處 唯有揷天是淸峯)를 가지고 끝내 전법게라 하고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정작 자기가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참회게를 받을 때 그것이 잘되었는지 잘못되었는지부터 알 수 있었을 게 아닌가. 무엇보다도 첫째는 깨달음(見性)을 얻어야 한다. 전법게는 그 다음의 일이다. 사람이 언감생심, 아무리 욕심을 낼 게 따로 있지, 언제까지 그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는가. 혜암이 여러 문도(門徒)들에게 참회게를 줄 때, 시자 일묵이 일일이 다 불러주는 대로 옥편을 찾아가며 받아 적어 주었고, 그의 참회게도 분명한 일묵의 필체였으니, 그 참회게의 원본 글씨를 확인해 보면 금방 모든 것을 다 명백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분명히 밝혀 둘 것은, 그 문인이 15년 혜암을 모시는 동안 그 문하에서 견성(見性)을 했다고 인가 받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고, 다만 그 문인이 그에게 오도송(悟道頌)을 포함해서 무자 화두(無字話頭)에 대한 것을 준 것은, 그 당시 그가 그 문인한테 공부를 하고 있을 때여서 더욱더 분발해서 공부하여 자기한테 인가(印可)를 받기로 한 약속 때문이라고 한다.
조주의 무자를 누가 감히 깨달아 얻을 것인가.
부처라도 입만 열면 살인검이 내리리.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묻는 이가 있다면
어젯밤 삼경에 이미 달이 달을 삼켰다고 하리라.
趙州無誰敢得悟
佛開口下殺人劍
若人問我當何事
昨夜三更月呑月
이것이 바로 그 문인이 그에게 준 오도송이다.
그리고 그 조주의 무자 화두에 대해 ‘무라고 한 뜻이 무엇이냐?’고 묻거든 “무엇을 삼키고 무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하라 시켰고, 다시 더 묻거든 “다시 더 이를 것이 없습니다. 그 무 다음에 입만 열면 목이 떨어집니다.”라고 하라 시켰으며, ‘그 도리는 어디서 보았느냐?’고 묻거든 “달이 뜨는 곳에서 보았습니다.”라고 하라고만 시켰을 뿐이어서 그는 그 속에 담긴 뜻은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종탈 법문(從脫法門)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을 힘으로 뺏지 말고 말로 빼앗아 가보라’고 말하면, 무엇이 되었든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내보이며 “스님이 이것을 힘으로 뺏지 마시고 말로 빼앗아 보시오.”라고 말하라 시켰을 뿐 그 도리는 감히 말해 주지 못하는 법이니, 그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왜 그런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도(道)는 오직 다 버리고 본래의 마음(本心)으로 돌아갈 때 자기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지, 남이 아무리 설명을 해서 가르쳐 준다고 해도 그 깨달음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도는 바로 자기 진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문인은 그것을 자기 스스로 참구해서 직접 깨달아 인가(印可)를 받으라고 했다는 것인데, 그때 그가 그 인가를 받기 위해 혼자 조용히 앉아서 자기 공부나 열심히 하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렇다면 사실 아무 문제도 없을 일이다.
하지만 일이 결국 이렇게까지 되고 보면, 그 문인이 설사 좋은 의도에서 개인적인 공부 차원으로 그렇게 해서라도 한 사람을 이끌어 주고 싶은 충정이었다 해도,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었다. 어찌 그리 쉽게 인간을 믿었는가. 더구나 그가 아무리 요구를 해도 완강히 거절해야 했는데, 공(公)과 사(私)를 신중히 구별하지 못하고 ‘기어이 해냈구나’느니, ‘종탈 법문’이라는 말을 만들어서 그것들을 혜암의 법어집 <늙은 원숭이>에 넣어준 것은 그 문인의 심각한 실수이다. 거기다가 그 문인은 ‘혜암 현문 선사 행장기’까지 자기가 쓴 것을 그의 이름으로 넣어주었다고 한다.
그 결과, 그는 오히려 엉뚱하게 그것까지 악용해서 꿈에도 생각 못할 너무나 엄청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일이 결국 이렇게 되었다면 그 문인은 그리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한 사람을 이끌어 주려다가, 오히려 불행하게 사람을 하나 버려놓은 꼴이 된 셈이다. 왜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사람이 본심(本心)으로 돌아가 진실하고 깨끗하게 살기 위해 도를 닦는 것이거늘.
그래서 그 문인은 백번 그 책임을 통감하고, 우매한 불자들을 데리고 서로 피차 더 이상의 피해를 입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만인 앞에 이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그것을 말미암아 더 씻을 수조차 없는 죄업을 쌓기 전에 이제 도로 회수할 것은 회수하고,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아서, 다시 본래대로 되돌려놓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인은 이후 어쩌다 본의 아닌 그 한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지 않고 그냥 산야에 묻혀 아무 이름없이 피었다 지는 풀꽃처럼 혼자 숨어 살기로 했다고 한다.
선(禪)은 바로 진실의 결정체이다. 이제라도 그는 더 이상 혜암을 팔며 그 이름을 더럽히는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고 다시 초발심(初發心)으로 돌아가 부단히 공부를 해서 깨달음을 얻어 누구한테서든 인가(印可)를 받아야 할 것이다. [공안 파설(公案破說) 몇 개 주워들은 걸 끝내 못 버리고 잔머리를 굴려 선문답(禪問答)에 이리저리 꿰어 맞춰서 원숭이 흉내를 내는 그 말장난도 이제 그만 때려치우고.] 바로 자기 자신의 인생이다. 어찌 색신(色身)의 일을 믿겠는가. 안광 낙지시(眼光落地時)를 생각해 보라. 깨달음만 얻는다면, 누구한테 인가를 받든 법(法)은 하나이니 그게 다 그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고는, 자기 자신도 인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남을 인가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운전대도 한번 잡아보지 못한 자가 운전 면허증을 받았다고 하는 것보다 더 위험천만한 일이다. 아무리 남의 글들을 긁어모아 그것이 마치 자기의 말인 것처럼 책을 내어 위장을 한다 해도 법(法)을 모르면 빈 그릇의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가짜는 언젠가 그 가면이 처절하게 벗겨지기 마련이다.
일체의 법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요, 있고 없는 두 가지가 다 공(空)하여 없는 것도 아니다. 일체의 법은 일체의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이다. 진실로 깨달으면 바로 그 자리이지만, 깨닫지 못하면 아득히 멀고 컴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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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의 법을 분명히 요달해 알면
자성에 있는 것이 없다.
이 법 성품이 이런 줄 알면
곧 노사나를 보리라.
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卽見廬舍那
이것은 경허가 혜월에게 내려준 전법게(傳法偈)이다.
혜월(慧月)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으며, 속성은 신(申)씨, 법명은 혜명(慧明)이다. 12세에 출가하여 글 한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가, 24세 때 경허를 만나 참선의 관문을 두드리게 되어 깨달음을 얻었고, 40세 때 경허로부터 전법게를 받았으며, 20여 년 동안 덕숭산에 주(住)하다가, 61세 이후로는 남방의 제선방(諸禪房)을 두루 유력하면서 납자를 제접했다. 제76대이다.
혜월이 양산 내원사에서 주석하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혜월은 논밭을 만들기 위해 공부하는 스님들을 동원해서 황무지 개간 사업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대중울력만 호되게 시킬 뿐 먹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소홀했다.
하루는 혜월이 부산에 가고 없는 틈을 타서 고봉이 몇몇 스님들과 같이 소를 끌고 양산 시장에 나가서 팔아 없앤 후 그 돈으로 술을 실컷 사 마시고 와서 남은 돈을 원주에게 주며 대중공양에 맛있는 반찬을 장만해 드리라고 부탁했다.
며칠 뒤 혜월이 돌아와 보니 소가 없었다.
“누가 내 소를 가져갔느냐?”
하고, 혜월은 큰 소리를 치며 소를 찾아오라고 야단을 했다. 대중은 놀라 전전긍긍할 뿐 한 사람도 나서서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그때 고봉이 갑자기 옷을 홀랑 벗어 버리고 조실 방에 들어갔다.
“음매, 음매…….”
송아지 소리를 내면서 그는 사방으로 기어 다녔다. 혜월은 벌써 고봉의 장난인 줄 알고 그의 볼기짝을 찰싹 때리며 문 밖으로 쫓아냈다.
“내 소는 애비 소요, 에미 소이지, 이러한 송아지가 아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혜월이나 고봉이 아무 말썽없이 지냈다고 한다.
고봉(古峰)은 21세에 출가, 25세 때 팔공산 파계사 마당가에 있는 바위 위에서 좌선을 하다가 홀연히 견성을 했다고 한다. 만공의 법제자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고봉은 그렇게 옷을 홀딱 벗고 기어 다닐 필요까지도 없었다. 다만 그 울음소리 하나를 잘못 내었을 뿐. 고봉 자기가 바로 그 소라 생각하고 그리 기어 다녔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만약 고봉이 어미 소의 울음소리를 냈더라면 혜월은 어찌했을 것인가? 그때도 문 밖으로 쫓아낼 수 있었을까. 혜월은 아예 꼼짝도 못하고 그냥 좋게 지나갔을 것이다. 안 그러면 그 소는 그만두고 당신은 목숨까지 잃어야 한다. 물론 혜월이야 그 소가 지금 어디에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내 소는 애비 소요, 에미 소이지 이러한 송아지가 아니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혜월이 찾고 있는 그 소는 어디에 있었는가?
안불견(眼不見)이요, 이불문(耳不聞)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그 소는 안산(案山)에서 홀로 울고 있습니다.”)
http://blog.daum.net/dph0108/7165937
경허대선사
그 해 여름 다시 영남 지방으로 가서 통도사(通度寺), 내원사(內院寺), 백운암(白雲巖), 표충사(表忠寺) 등 여러 사찰을 순력(巡歷)하면서 선풍을 크게 떨치고, 그 얼마 뒤 대승사(大乘寺), 윤필암(潤筆庵), 동화사 (桐華寺), 파계사(把溪寺) 등에서도 선원을 창설하여 납자(衲子)들의 안목(眼目)을 열어 주었다.
57세 때인 1902년 범어사에서 『선문촬요』(禪門撮要)를 편찬하고, 가을에는 마하사(摩訶寺)의 나한전 개분불사(改粉佛事)를 증명하였다.
58세 때인 1903년 해인사 조실로 있으면서 한글과 한문 혼용인 「참선곡」「가가가음」과 순 한글로 씌어진「법문곡」「중 노릇하는 법」등을 지어서 누구든지 불법을 알게 하고 해탈도를 얻게하였다.
59세 때인 1904년 해인사에서 인경불사(印經佛事)를 매듭 짖고, 2월에 천장암에 도착해서 법제자 만공에게 전법게를 준 뒤 후래(後來) 불법을 부촉(咐囑)하고 천장암을 떠나 짚신에 法身을 담고 북녘으로 향하였다.
천지에 홀로 가니 누가 그와 더불어 짝할 것인가?
만공은 며칠 전에 시자(侍者)들을 시켜 장터에서 새로 사온 담뱃대와 쌈지를 마지막 선물로 경허에게 바친다. 만공이 바친 이 담뱃대와 쌈지는 훗날 경허가 열반한 후 스승 경허의 眞身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 경허선사가 만공에게 내린 전법게
운월계산처처동(雲月溪山處處同):구름, 달, 시냇물, 산 곳곳마다 같은데,
수산선자대가풍( 山禪子大家風):수산선자의 대가풍이여,
운근분부무문인(慇懃分付無文印):은근히 무문인을 분부하노니,
일단기권활안중(一段機權活眼中):한 조각 권세기틀 안중에 살았구나.
경허의 제자와 수법제자 가운데 침운과 혜봉에 대해서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으며, 수월 . 혜월 . 만공 . 한암이 잘 알려져 있다.
수월 . 혜월 . 만공을 흔히 세 달(三月)이라 일컽는 데, 수월은 주로 만주지방에서 20여 년을 머물면서 북녘 하늘에 뜬 상현달이 되고, 혜월은 주로 영남지방에 머물면서 남녘하늘에 뜬 하현달이 되고, 만공은 주로 호서지방에 머물면서 보름달이 되어 일제의 탄압과 수탈로 신음하는 한반도와 만주 산하에 지혜의 달빛을 비추고 자비의 손길을 드리웠다.
法弟子 慧月에게 준 傳法偈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일체법을 요달해 알면.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 자성에는 있는 바가 없도다.
여시해법성(如是解法性): 이와 같이 법의 성품을 알면,
즉견노사나(卽見盧舍那):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그 해 봄에 경허는 오대산 월정사를 지나게 되었는데 월정사 방장인
유인명 스님이 경허에게『화엄경』설법의 요청을 받고 3개월을 강의 한 뒤 금강산을 유람하며 무려 175편의 연작시「금강산유산가」와 2편의 「금강산명구」, 2편의 「제헐성루」등 주옥같은 詩를 남긴다.
「경허집」에는 175편의 연작시「금강산유산가」와 450여편의 禪詩가 실려있다.
가을 무렵 안변 석왕사(釋王寺)에 으르러 마침 오백나한 개분불사에 증명법사로 참여하고 영월루(映月樓)에서 詩한수를 남긴다.
상방춘일화여산(上方春日花如霰):산사의 봄날 꽃은 싸락눈 같고,
이조성중오몽감(異鳥聲中午夢甘):기이한 새소리에 낮잠이 달다.
만덕통광무증처(萬德通光無證處):온갖 공덕과 신통광명을 증명할 수없는 곳에,
압천효장벽어람(押天曉 碧於藍):하늘에 꽂힌 새벽 봉우리 남쪽보다 더 푸르도다.
첫댓글 오늘 아침 무심결에 이 말씀들을 단숨에 읽었다는 것을 자랑해야 하나?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지?
처음 부터 새칠로 읽어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