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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디 여린 어휘인 ‘푸나무’라는 말을 생명의 닻 삼아 광풍마냥 밀려드는 힘든 한 시절을 버텨내면서, 이 여림 속에 담긴 뜨겁고도 묵직한 생명을 발견하고는 ‘이 뭣고’하며 다시금 푸나무라는 어휘를 화두로 산책하고 명상하는 시기를 가져보았습니다. 걷고 기도하는 중에 다시금 와 닿은 목소리들과 이미지들이 있습니다.
“집 짓는 사람들의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의 눈에는 기이한 일이 아니랴?” 성서 시편118:22,23
“주님께서 이 땅에 새 것을 창조하셨으니, 그것은 곧 여자가 남자를 안는 것이다.” 성서 예레미야31:22
又此挽近以來 一世之人 各自爲心 不順天理 不顧天命 心常悚然 莫知所向矣
“또 이 근래에 오면서 온 세상사람이 각자위심하여 천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천명을 돌아보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항상 두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동경대전 포덕문 4
人是天天是人 人外無天天外無人
“사람이 바로 한울이요 한울이 바로 사람이니, 사람 밖에 한울이 없고 한울 밖에 사람 없느니라.“ 해월신사법설 4-7
푸나무는 우리(만)의 유별난 생각이 아닙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많은 선생들이 ‘다가올 세상을 품어낼 보이지 않는 얼굴님들’로서 끝없이 바라고 호출했던 삶이 있었고, 이 삶은 큰 틀에서 대체로 푸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살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몇몇 선생의 예만 살펴도 좋겠습니다. 예수의 ‘산상수훈’, 노자(老子)의 '무위이화(無爲而化), 동학사상의 ‘후천개벽’, 정역(正易)사상의 ‘기위친정(己位親政)’, 강증산의 ‘음개벽’은 모두 그간 세상을 지배했던 남성/지식인/자본이 아니라 여성/아이/영성이 세상을 품어 낼 것이라는 일관된 예언자적 음성을 들려줍니다.
‘오심’이 아니라 ‘모심’입니다.
푸나무는, 저 멀리서 우리를 구원하겠노라 말로만 약속의 메아리로만 ‘오고 있는’ 메시아가 아니라, 이미 우리 가운데 ‘와 버린’ 말 못하는 해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실 일을 바랄 게 아니라 모실 일에 힘쓸 일입니다. 지금까지는 ‘선생’과 ‘이론’의 ‘오심’을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이미 오신 ‘푸나무’를 모시며 푸나무들과 더불어 잘 먹고 살 살 궁리를 해보려 합니다.
김지하의 음성에는 그간 푸나무의 어떠함을 사모했던 역사적 간절함의 맥락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 음성을 짜깁기하는 시원찮은 일로나마 푸나무 터 닦기의 첫걸음을 떼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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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천개벽사상
'후천개벽'은 19세기 조선시대에 남한 일대에서 일어난 남조선 사상사 전반에 일관된 문명관, 시국관으로서 1860년 4월, 5월 동학(東學)의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에게 내린 한울님의 계시가 그 시작이다. 이후 20년 뒤의 충청도 연산의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 또한 그 20년 뒤의 전북 모악산 구릿골의 강증산(姜甑山), 또 그 과정에서의 전북 진안(鎭安)의 이연담(李蓮潭)과 김광화(金光華)의 오방불교(五方佛敎) 및 남학(南學), 그리고 일제 하 전남 영광 등지의 소태산(小太山) 박중빈(朴重彬)의 원불교(圓佛敎) 등이 그것이다.그러나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고려 말 신돈(辛旽) 개혁 실패 이후 금강산과 지리산을 거점으로 형성된 하급 불교 승려들의 비밀조직인 '당취(党'가 일관되게 추구했던 '화엄선(華嚴禪)'의 전통 역시 개벽운동으로서 나는 그것을 '화엄개벽'의 선구로서 파악한다. 이는 신라 말, 고려시대 내내 국가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우주와 세계 통합질서로 가능했던 화엄 사상을 개체 중심의 선(禪)으로 민중적 차원에서 해체 개벽하고자 시도한 것이다.이들 노선들 간의 상호 혼효(混淆) 현상은 매우 복잡한 것이나 예외 없이 후천개벽 사상 안에서 유·불·선과 기독교가 혼합 통일돼 있음이 특징이다.후천 개벽은 선천(先天) 개벽이 5만 년 전, 떼이야르 드 샤르뎅 진화론에 의하면 '호모 사피엔스 에렉투스(Homo sapiens erectus) 즉, '생각하는 직립인간'의 바다에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 즉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는 인간, 반성적 인간'의 출현 사태를 말하는 것에 비해 현대에 와서 우주 최초의 혼돈적 에너지가 극점(오메가 포인트)에 이르러 다시금 우주 생명계에 편만ㆍ지배하면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바다 속에서 이제는 놀랍게도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디비나(Homo sapiens sapiens divina)' 즉 새로운 인간인 '신인간(神人間)'이 출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이것은 '혼돈적 질서(東學의 運元之一氣· 弓弓太極이거나 正易의 呂律, 한민족 신화인 1만4000년 전 마고성의 八呂四律, 강증산의 陰開闢 등)'의 출현이다.
또는 이연담(李蓮潭), 김광화(金光華), 김일부(金一夫)의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影動天心月)'라는 개벽적 명제 속의 바로 그 '그늘(影)' 그리고 소태산(小太山) 박중빈(朴重彬)의 '개벽적 일원상(開闢的 一圓相)' 등과 한 계열의 사상으로 결국은 당취 조직의 비원(悲願)인 '화엄개벽'의 거대한 혼돈적 질서(chaosmos)의 이미지 안에 수렴되는 것이다.동학은 '한울을 모신다(侍天主)' 또는 '사람이 한울이다(人乃天)'라는 슬로건 안에 후천개벽을 압축하고 있는바 동학 수행의 초점인 주문 38자 降靈呪文, 本呪文, 實踐呪文 등 三種呪文 안에 총괄된 '화엄개벽'을 오늘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는 우주, 지구, 세계, 사회와 생명 및 영성의 대변동을 생생하게 살리고 예감하고 모시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역(正易)
주역(周易)은 알아도 정역(正易)은 잘 모른다. 중국 중심, 군자의 통치술 중심의 삼천년 전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역(易)을 읽는 사람은 많지만, 백이십여 년 전 한국 충청남도 연산(連山) 사람 일부(一夫) 김항(金恒) 선생의 새 시대의 세계역, 후천한국역, 민중적 개벽역, 여성과 혼돈 중심의 생명역인 정역을 읽은 사람은 거의 없다.
정역(正易)의 저자 김항(金恒)은 1826년(순조 26년)에서 1898년(고종 36년)에 걸쳐 충청도 연산(連山) 땅 인내강변에서 살던 역의 대가로서 자는 도심(道心)이고 호는 일부(一夫)다.일찍이 당대의 일대 기인(奇人)인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 선생 밑에서 동학의 최제우, 남학(南學)의 김광화(金光華)와 함께 공부하며 그로부터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연담선생은 최제우에게 선도(仙道)의 부활을, 김광화에게 불교의 혁신을, 그리고 김일부에게는 크게 천시(天時)를 받들어 역(易)을 새로이 정하라 하고,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影動天心月)'란 화두를 줬다.선생은 이 화두를 들고 19년의 노력 끝에 '정역'을 깨우쳤으니 수양방법은 '서경(書經)'의 거듭된 독서와 '영가무도(詠歌舞蹈)'의 춤과 노래에 의한 수련이었다.그는 허공에서 수년간 거듭 새로운 팔괘를 보고 이것을 '정역팔괘(正易八卦)'로 획정, 설명하면서 1881년 공자의 환영과 함께 '대역서(大易書)'를 계시 받는다. 그리하여 1885년 공식적으로 '정역'을 공표한다.
기위친정(己位親政)
정역은 후천개벽이 '기위친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기위(己位)'는 우주의 12간지(干支) 중 여섯 번째인 '대황락위(大荒落位)'로 '저주받은 꼬래비 위상'이다. 이 저주받은 위상에 떨어져 있던 지구자전축이 '친정(親政)' 즉 임금 위치를 회복한다는 뜻이니 이때가 후천개벽, 우주 대변동의 때라는 것이다.정역은 동양의 경우 주(周)나라 성립 전후한 2800여년 또는 3000년 전에 북극 중심에 있던 지구 자전축과 그에 따른 북방 천공의 성운군이나 북두칠성, 북극성, 북쪽 은하 등이 다 함께 서남방(西南方)으로 45° 정도의 각도로 크게 경사(傾斜)되었다가 때가 되면 본디의 제 자리인 북극의 정위(正位)에로 복귀 이동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지구자전축이 '기위'에서 북극 중심으로 복귀('친정위치')하면 그때 후천개벽이 본격화한다는 말이다.
십일일언(十一一言)
정역은 '기위친정'이 우주에서 현실화할 때는 인간사회, 더욱이 맨 먼저 우리 민족 속에서 '십일일언'이라 명제화한 정치현상이 나타난다고 했다.이것이 무엇일까?
'기위친정'은 그동안(3000년 동안) 내내 '꼬래비' 즉 '저주받은 위치(大荒落位)'에 떨어져 소외받았던 힘(지구 자전축)이 임금의 위치(본디의 자기 자리-북극)를 되찾는다는 것이다. 북극이다.스티븐 호킹은 전 우주적으로 물과 생명이 태어난 곳은 오직 지구의 북극뿐이라고 했다. 우주 진화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물과 생명의 탄생지가 최고 가치의 지점이니 우주 정치의 임금 자리라 하겠다.'십일일언'의 십(十)과 일(一)은 합하면 '흙(土)'이니 우주의 중앙이고 밑바닥 민중의 메타포가 된다.그렇다면 그 누가 바로 이 우주와 지구와 생명과 문명의 중심(親政)에 들어선다는 것일까?꼬래비(己位)가 누구인가?정역은 '십일일언'을 이렇게 해설한다.'이십 세 미만의 어린이, 미성년과 여성이 현실 정치의 중심에 나선다.'길고 긴 선천(先天)시대 모든 동서양 고전에서(예: 구약) 어디에나 나타나는 일반적 현상이 있다.내우외환(內憂外患)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감당(정치 주체)하는 것은 중년 남성전문집단과 그를 밑받침하는 힘센 남성청년들이다. 그리고 그 주체들이 그때마다 늘 걱정하는 피보호대상은 예외 없이 '어린이, 미성년과 여성들'이다.이들이 곧 '꼬래비'요 신약에서 예수의 산상수훈의 대상인 '저주받은 자(네페쉬 하야)'들이다. 이들은 상징적, 은유적, 신화적, 전설적, 영성적 표현 영역의 예외 이외엔 고대정치시대 이후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정치 주체가 된 적이 없다.
올해 초 5월과 6월 시청 앞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인 광장에 켜진 촛불은 과연 무엇이었는가?더욱이 그들이 들고 나온 정치 아젠다는 전문 정치 집단들의 그것들과는 거리가 먼 먹을거리, 물, 가스, 생태, 운하 공사, 생계와 교육 같은 구체적인 생활자치, 생동하는 생명정치의 아젠다였다.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정치 형식은 주모자도 조직도 동원 체계도 책임자도 없는 고대의 '화백(和白)'과 같은 직접민주주의였으니 다름 아닌 네오 르네상스, 후천개벽의 다른 말인 '고대회복(古代回復)'이었고 그들의 정치 양식은 철저히 문화적이고 비폭력 평화와 해학, 풍자, 사랑, 화해, 상생, 친화력, 혼돈성, 개체성, 우연성, 자발성, 창발성과 춤과 노래였으니 '풍류(風流)'였고 또 가장자리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호혜시장(互惠市場)인 낮은 단계의 '신시(神市)'까지 나타났었다.특히 유모차 부대 엄마들을 앞장으로 하는 과천(果川) '지역통화'와 '품앗이 패 여성들'과 여러 '생명운동 여성들'의 적극적 역할은 고대 모권제 사회의 여성정치의 창조적 부활을 예감시켰다. '촛불'은 노자의 고대정치 '무위이화(無爲而化)' 즉 '선각자, 지도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민중 스스로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하는 태양의 정치(我無爲而民自化)'의 부활이었고 '하느님은 창조하고 민중은 진화하는(동학 '進化' 즉 '창조적 진화'의 내용이 바로 '무위이화(無爲而化)'이니 곧 內有神靈 外有氣化)' 창조적 진화론에 입각한 '모심의 정치'의 출현이었다.또한 온라인과 오프라인 전 과정에서의 무수한 개체 네티즌들의 불꽃 튀는 쌍방향 소통에서 저마다 제 나름의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창조적 의견들의 무한 무궁한 '시끄러운 야단법석'에 의해 도달한 '살아 생동하는 개체-융합(identity-fusion)의 자기 조직화(self-organization) 자체로서의 또 하나의 내부공생(endosymbiosis)의 실현인 '집단지성(集團知性)' 현상은 무수한 보살들이 그물코마다 모두 일어나 저마다 저 나름의 깨달음을 시끄럽게 떠들어댐으로써 고요한 온 우주 그물의 비로자나 부처의 말없는 합의(寂寂惺惺)에 이르는 '화엄개벽'(동학의 모심의 내용인(一世之人 各知不移, 또는 萬事知의 구체적 내용인 數之孝가 知基道而受基知하는 후천개벽의 대 해탈)의 광활한 대규모 문명 전환 운동의 발단이었다. 이것을 후천개벽이라고 하지 않으면 무엇이라 이를 것인가?이것이 곧 4월 29일에서 6월 9일에 이르는 첫 촛불의 십일일언이니 바로 그 뒤에 붙는 '일언(一言)', 한 마디야말로 이제껏 설명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