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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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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저자사항: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그림책』 / 야콥 폰 윅스퀼 지음 ; 게오르그 크리사트 그림 ; 정지은 옮김
Uexküll, Jakob von / Kriszat, Georges
정지은
발행사항: 서울 : b, 2012
형태사항: 263 p. : 삽화(일부천연색) ; 20 cm 총서사항(b판고전 ; 07)주기사항색인수록
원저자명: Jakob von Uexküll, Georges Kriszat
원표제: Streifzüge durch die umwelten von tieren und menschen (1934), Bedeutungslehre (1940)
원표제: Mondes animaux et monde humain (Denoël, 1965)
프랑스어로 번역된 독일어 원작을 한국어로 중역 표준번호/부호ISBN 978-89-91706-55-2 03470: \13000
분류기호한국십진분류법-> 490 [182.9] 듀이십진분류법-> 590 [156]주제명동물 행동학[動物行動學] 비교 심리학[比較心理學]
출판사 제공 책소개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9759576
도서출판 b의 시리즈는, 아직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고전의 품격을 지닌 저술을 발굴하는 ‘숨은고전찾기’와 함께, 종래의 번역본의 오류를 보다 ‘정확한 번역’을 통해 바로잡아 독자에게 양질의 독서를 제공하겠다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동서양은 물론이며 학술과 예술 등 다양한 내용으로 채워나갈 것이다.
***
이 책은 야콥 폰 윅스퀼의 환경세계론이 담긴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이다. 흔히 다윈의 진화론과 견줘지는 생물학 고전으로서 한국어로 처음 번역 출간되었다. 윅스퀼의 주저에 해당하는 Streifz?ge durch die Umwelten von Tieren und Menschen(1934)과 Bedeutungslehre(1940)을 완역하여 합본한 것이다.
윅스퀼은 당시 주류 생물학이라고 할 수 있는 기계론적 생물학이나 생기론적 생물학에 반대하면서 “환경세계umwelt”라는 새로운 개념과 함께 생물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그렇지만 그의 이론은 당시의 생물학계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생물학계에서 무시되었던 그의 사상은 오히려 철학계에서, 특히 현상학계에서 진지하게 적극적으로 수용된다. 대표적인 인물이 M. 셸러,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들뢰즈 등이다. 이 철학자들은 모두 인간 주체가 환경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전제 아래, 그러한 관계에 의한 세계의 여러 양상들, 닫혀있음, 열려있음, 상징성과 같은 것들에 주목했다.
이 책에는 일반 독자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의 환경세계 이론을 쉽게 풀어쓴 책이라는 그의 소개가 달려있다. 그가 그렇게 했던 것은 단순히 그가 당시에 추상화된 생물학을 구체화하려 했기 때문이 아니다. 거기에는 동물을 단지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고유한 세계를 갖는 하나의 주체로 바라봄으로써 우리의 세계, 다시 말해 인간과 인간의 고유한 환경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또 부제로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그림책”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세계와 동물들의 여러 세계가 구조적으로 다르다는 것, 우리는 우리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들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만 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제1부로 이루어진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서 생명체를 물리학적ㆍ생리학적 법칙들이 적용되는 영역으로 환원시키는 태도를 비판하고, 동물도 주체이며 이러한 동물주체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와 지각적으로, 그리고 행위적(능동적)으로 관계한다는 점을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증명한다. 이러한 관계가 “기능적 원환”인데, 이러한 원환에 따라서 각 동물 종은 수용 기관(지각 기관)과 실행 기관(운동 기관)을 매개로 자신에게 고유한 환경세계를 형성한다. 제2부 <의미의 이론>은 1940년 당시 윅스퀼이 자신의 호적수인 막스 하르트만(Max Hartmann)의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씌어진 책으로, 그는 여기서 환경세계가 그 세계의 주체에게 유의미한 세계라는 이론을 내놓는다.
윅스퀼이 이 책에서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어째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부터, 다시 말해 그런 당연한 경험들로부터 “가능한 어떤 유일무이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일까?”이다. 그는 자본주의적 진보의 이론을 생물학에 적용시키려 했던 진화론자가 결코 될 수 없었다. 그는 일차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구성하는 세계, 주체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의 틀을 가시화하려 했던 칸트주의적 생물학자에 더 가까이 있다.
윅스퀼
[ Jakob von Uexküll]
출생 - 사망
1864년 9월 8일 ~ 1944년 7월 25일
에스토니아 출신의 생물학자. 에스토니아의 구트 케블라스(케블라스트)의 독일계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다. 도르파트(현 타르투) 대학에서 동물학을 공부하며, 이어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동물의 운동 기관에 대한 생리학적 연구를 진행하는 가운데 당시 지배적이었던 기계론적인 사고방식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생물학 사상인 <환경세계 이론>을 구상하여 20세기의 생물학에 혁명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개척했다. 오늘날의 생태학과 동물행동학도 이를 원천으로 한다.
윅스퀼은 드리슈(Hans Driesch 1867-1941)의 생기론에 가까운 입장을 취하며, 동물을 어디까지나 그 환경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환경세계란 각각의 동물이 지각하고 반응할 수 있는 자극, 요컨대 그 동물에게 있어 유의미한 자극의 총체로 이루어지고 당연히 지각하고 반응하는 주체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것인바, 감각기관과 운동기관의 종류와 구조의 다름에 따라, 즉 종에 따라 다르다. 파리에게는 파리의, 섬게에게는 섬게의 환경세계가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생물학에 <주체>와 <의미> 개념을 도입하고, 환경세계를 말하자면 주관적인 것으로 보는 이 사상은 윅스퀼 자신도 인정하듯이 칸트의 사상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동물의 환경세계와 내적 세계』(1909), 『생물학적 세계관을 위한 초석』(1913), 『이론생물학』(1920) 등에서 전개된 이 사상은 당시의 생물학계에서는 전적으로 이단시되며, 윅스퀼은 오랫동안 대학에 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가까스로 1924년에 함부르크 대학이 실험 비상근 강사의 직을 부여하고 '환경세계연구소'를 설치하여 제공하지만, 그것도 실체는 수족관 안의 담배 매장이 연구실이라고 말해진 것이었다. 조야한 인종이론을 내세우는 나치즘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며, 1940년에는 은퇴하여 카프리 섬에 이주하고 제2차 대전 종결 직전에 거기서 사망했다.
그러나 생물학계에서 무시된 그의 사상은 일찍부터 카시러와 오르테가, 셸러와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어 넓은 지적 세계에 소개되고 있었다. 이것이 한편으로는 특히 셸러를 매개로 하여 K. 로렌츠, A. 포르트만, F. J. J. 보이텐디크, L. v. 베르탈란피, V. v. 바이츠제커 등 다음 세대의 생물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셸러, M. 플레스너, A. 겔렌, M. 란트만 등의 <철학적 인간학>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아마도 셸러의 <세계개방성> 개념을 매개로 하여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 개념 형성에 윅스퀼의 환경세계 이론이 모종의 역할을 수행한 것은 하이데거의 1928년 여름학기와 1929년 겨울학기 강의로부터도 분명하다.
-기다 겐(木田 元)
[네이버 지식백과] 윅스퀼 [Jakob von Uexküll] (현상학사전, 2011. 12. 24., 노에 게이이치, 무라타 준이치, 와시다 기요카즈, 기다 겐, 이신철)
한스 아돌프 에두아르트 드리슈
[ Adolf Eduard Hans Driesch ]
요약
실험발생학 연구의 선구자인 독일의 동물학자·철학자. 성게의 2세포기의 배(胚)를 진탕법으로 2분하여 각 할구의 발생과정을 조사하였고 나아가 같은 성게의 배에 압력을 가하여 발생과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여 조절란의 성질을 밝혔다. 발생연구를 통해서 기계론적 생명론에 의문을 품고 동적 목적론을 도입하면서 엔텔레히(Entelechie) 인자의 존재를 가정한 신생기론(新生氣論)을 제창하였다.
출생-사망
1867.10.28 ~ 1941.4.16
국적
독일
활동분야
동물학, 철학
출생지
독일 바트 크로이트나흐
바트 크로이트나흐 출생. 프라이부르크 ·뮌헨 ·예나대학에서 수학한 뒤, 1891~1900년 나폴리의 임해실험소에서 동물의 발생을 연구하였다. 1911년 하이델베르크대학 조교수, 1920년 쾰른대학 교수, 1821년 라이프치히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892년에는 성게의 2세포기의 배(胚)를 진탕법으로 2분하여 각 할구의 발생과정을 조사하였다. 나아가 1893년에는 같은 성게의 배에 압력을 가하여 발생과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여, 조절란의 성질을 밝혔다.
실험발생학 연구의 선구자인 그는 발생연구를 통해서 기계론적 생명론에 의문을 품게 되었고, 동적 목적론을 도입하면서 엔텔레히(Entelechie) 인자의 존재를 가정한 신생기론(新生氣論)을 제창하였다. 이와 같은 동향에서 그는 철학자라고도 할 수 있으며, 1909년 이후부터는 발생학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생명론자로 더욱 크게 활동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스 아돌프 에두아르트 드리슈 [Adolf Eduard Hans Driesch] (두산백과)
베르그손과 드리슈(드리쉬)
<글모음집의 출판 이전에 발표되었으나 전집에 누락 된 글들 중 살펴 볼 문헌은 베르그손이 카이절링(Keyserling) 백작과 프레졸리니(Prezzolini)에 보낸 편지이다. 카이절링은 잘 알려진 철학자는 아니지만 쇼펜하우어, 니체, 베르그손 그리고 인도 사상 등의 영향을 받았고 이성과 과학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생의 개념과 직관을 강조하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카이절링이 1906년 자신의 책을 베르그손에게 보내면서 시작되었고 베르그손은 감사의 말과 더불어 카이절링의 사상에 호의적인 답장을 한다. 카이절링은 계속해서 자신의 저서나 논문을 베르그손에 보내고 베르그손은 카이절링의 관점에 공감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카이절링은 1907년 뮌헨의 “알게마이네 자이퉁(Allge- meine Zeitung)”지에 베르그손에 관해 매우 호의적인 글을 쓰기도 했다. 두 철학자는 1910년 빠리에서 처음 대면하여 다양한 철학적 문제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카이절링이 베르그손에게 철학사 연구를 위한 조언을 구할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가까워진다. 베르그손도 자신의 편지에서 여러 번 카이절링의 사상에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1911년 볼로뉴에서 열린 국제철학대회에 두 사람은 함께 참석하였고 카이절링은 베르그손과 독일의 생기론 철학자인 한스 드리쉬(Hans Driesch)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베르그손은 카이절링의 발표 논문이 도덕과 형이상학지(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에 실릴 수 있도록 주선한다. 1913년 베르그손이 런던에서 심리연구회(Society for psychological research)의 회장으로 취임하고 이를 기념하여 <살아있는 것의 환영(Fantômes de vivants)>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을 때도 축하하기 위하여 직접 참석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당시의 많은 프랑스와 독일의 지식인들 사이에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두 사람의 관계는 전쟁 이데올로기의 선전이 난무하는 가운데 급속히 냉각되었고 두 사람의 접촉은 끊어지고 만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카이절링이 1932년 다시 베르그손에게 자신의 저서를 보내면서 두 사람간의 서신 교환이 다시 이루어지지만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베르그손의 편지글은 두 철학자의 인간적 관계를 잘 드러내 주지만 그들 사이의 직접적인 사상적 영향을 알아내기엔 한계가 있다. 일반적으로 카이절링의 철학은 베르그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베르그손, 딜타이, 셸러, 카이절링을 함께 묶어 생철학의 범주로 분류하기도 한다. 반면에 베르그손에 대한 카이절링의 직접적 영향은 미미한 것처럼 보인다. 만일 있다고 한다면 인도 사상에 심취했던 카이절링의 글이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준비하던 베르그손에게 약간의 도움이 되었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 (유지석 “베르그손 철학의 문헌학적 접근 ― 새 문헌의 발간과 그 의의 ―”, 2006)
역자 : 정지은
역자 정지은은 연세대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 미학과를 수료한 뒤 프랑스로 건너가 부르고뉴 대학교에서 레비-스트로스 연구와 메를로-퐁티 연구로 철학석사와 철학박사를 취득했다. 현재 홍익대와 대진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현상학과 정신분석학, 예술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여러 논문들을 발표했다. 편저서로 「기억과 몸」, 「일상 속의 몸」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퀑탱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가 있다.
들뢰즈와 윅스퀼
가령 거미와 거미줄,벼룩과 머리,진드기와 포유류의 피부 약간; 이런 것들이 철학적 짐승이요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아니다. 정감을 촉발시 키는 것,변용할 수 있는 권력을 실현하게 하는 것을 신호라고 부른다. 가령 거미줄은 흔들리고 머리는 주름지고 피부는 노출된다. 광악한 검은 방의 별들처럼 오직 몇몇 기호(signe)들만이 있다. 거미되기, 벼룩-되기, 진드기-되기,강하고 모호하고 완고한 하니의 미지의 삶. -들뢰즈
“동물의 세계를 규정하면서 폰 윅스퀼은 동물이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개체화된 배치체 속에서 짐승이 취할 수 있는 능동적 정감들과 수동적 정감들을 찾아내려 했다. 예컨대 ‘진드기’는 빛에 이끌려 나뭇가지 끝까지 오르고, 포유동물의 냄새를 맡으면 포유동물이 가지 밑을 지날 때 자신을 떨어뜨리고, 가능한 한 털이 적게 난 곳을 골라 피부 밑으로 파고 들어간다. 세 개의 정감, 이것이 전부이다. 나머지 시간에 진드기는 잠을 잔다. 때로는 수년간이나, 광대한 숲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무관심한 채. 진드기의 역량의 정도는 두 가지 극한 사이에, 즉 죽기 전에 행하는 포식이라는 최상의 극한과 굶으면서 보내는 기다림이라는 최악의 극한 사이에 놓여 있다. 진드기의 세 개의 정감은 이미 종과 속의 특성들을, 다리와 주둥이 같은 기관들과 기능들을 전제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생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 그와는 반대로 윤리학 의 관점에서 보면, 기관의 특성들은 경도와 그 관계들로부터 또 위도와 그 정도들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이 할 수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그만큼 몸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다. 즉 몸의 정감들은 어떤 것들인지, 그것들이 다른 정감들과, 다른 몸의 정감들과 어떻게 조합되거나 조합되지 않을 수 있는지, 그 결과 다른 몸을 파괴하는지 아니면 그것에 의해 파괴되는지 또는 다른 몸과 능동들과 수동들을 교환하는지 또는 다른 몸과 함께 더 강력한 몸을 합성하는지 등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MP 313-314. 강조 인용자)2
이와 유사한 내용들은 다음 저술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D74-77; SPP 167-168; PLB 122-123; QP 175-176.
김재인, 「들뢰즈의 스피노자 연구에서 윅스퀼의 위상」, 철학논구 제 36집, 222~223쪽.
1. 들뢰즈의 1차문헌 및 약어표
1953, Empirisme et subjectivité. essai sur la nature humaine selon
Hume, Paris: P.U.F. 1953. ― ES. ― 영역본: Empiricism and
subjectivity. An Essay on Hume’s Theory of Human Nature,
tr. and intro. by Constantin V. Boundas,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1. (인용시 영역본과 병기함)
1962,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aris: PUF. ― NP.
1968, Spinoza et le problème de l'expression,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 SPE.
1977, 1996 증보판, Dialogues, avec Claire Parnet, Paris: Flammarion.
― D.
Cours Vincennes sur Spinoza, 1978-1981 in http://www.webdeleuze.co
m/php/sommaire.html ― CS.
1980,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t. 2, avec Félix
Guattari,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 MP.
1981, Spinoza. philosophie pratique,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 SPP.
1988, Pli. Leibniz et le Baroque,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
PLB.
1990, Pourparlers,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 P.
1991, Qu'est-ce que la philosophie?, avec Félix Guattari,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 QP.
1993, Critique et Clinique,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1993. ―
CC.
1996, L'Abécédaire de Gilles Deleuze, avec Claire Parnet ― ABC.
2002, 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 textes et entretiens 1953-1974,
édition préparée par David Lapoujade,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 ID.
2003, Deux Régimes de Fou.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édition
préparée par David Lapoujade, Paris: Les éditions de Minuit.
― DRF.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생성과 창조의 철학사 , 박정태 편역, 서울:
이학사, 2008.
서평
자연의 의미
윅스퀼의『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와 “의미의 이론”을 합책한 책이다. 각각이 1부와 2부이다. 원서의 언어는 독일어인데,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이렇게 합책하여 나왔고, 번역자는 그 프랑스어 본을 번역하였다.
의미란 무엇일까? 특히 이 책의 2부는 내게 “의미”<bedeutung, signification>를 다르게 생각해보게 돌려 세웠다. 윅스퀼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옐름슬레우를 빌려서 말해보자면, 기호가 내용/표현이라면, 우리가 좁게 생각하는 의미는 표현면과 내용면이 상응하여 용례(usage)가 규범(norme)에 맞는 그 순간이지만, “의미”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통상은 눈앞에 나타나서 우리가 진드기라고 하는 표현실체와 진드기에 대한 개념적인 실물인 내용실체(meaning)가 상응할 때, 진드기에 대한 규범적 정의에 들어맞는 내가 사용한 진드기 용례의 지대가 의미이며 의미론적 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윅스퀼의 사유는 이보다 훨씬 더 깊다: 그에게 생명은 활동하는 기호일 수밖에 없다. 활동하는 기호는 ‘환경세계’ 안에서 이 내용과 표현을 끝없이 뒤섞으며, 한 흐름을 만들어내는데, 이 뒤섞임 양태에 대한 분석은 그 자체로 중요할지라도, 그 흐름을 헤아리는 것과 함께해야 하며, 그 흐름이 바로 이 생명 기호의 “의미”(purport)로서 마땅하다.
(1)표층적인 작업은 이렇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생명체에 대한 분석은 기호학자라면 내용/표현이라고 단정할, 다차적인 이중분절을 허용한다. 그레마스의『기호학사전』에서 “다방면기호계”(sémiotiques pluriplanes)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예컨대 한 생명체는 그가 놓인 환경이 미치는 영향들이 교차하는 장소이고, 이 영향들의 내용과 표현 쌍들을 허용한다. 윅수퀼은 그 쌍 중에, 외부면과 내부면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여기서 그치고 이것을 이렇게 개체적인 시각에서 보기만을 만족하면, 이 작업은 한 생명을 약간 더 오묘한 시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정지된 기호로 보는 것일 뿐이다. 베르그송이라면 지성의 공간화 작업이라고 비판했을 것이다.
윅스퀼이 2부에서 열정을 다해 말하는 (2)심층적인 작업은 이렇다: 이 차원에서 기호의 분절들은 기호라는 장소에 영원히 묶여있을 수밖에 없는 크기가 다른 합동도형 같은 것이 더는 아니다. 생명이 때때로 같게도 다르게도 만들어내는 이 분절들은 이 생명의 특색으로서 그 자체가 신호들이다. 생명의 순간, 순간들을 질의 연속으로 신호로 가정해보자. 생명의 이 신호는 눈앞의 시간으로 좁게 보았을 때는 앞서 보았듯이 매우 조밀하게 중첩되어 있어서 연구된 규범 안에서의 용례를 갖지만, 달리 말해 표층적인 의미를 갖지만, 지구의 시간으로 넓게 보았을 때는 반대로 그 사이를, 예를 들어 중간화석들을 찾아내기 힘들 정도로 달라지고 나누어져 있어서, 용례를 따르지 않는 이질적인 흐름의 연속을 띠므로, 달리 말해 심층적인 생성 그 자체가 “의미”이다. 육상에 있었던 선조고래는 눈앞의 환경에서 자기 자신으로 있을 뿐이지만, 긴 시간 안에서 그는 놀라울 정도로 이질적인 신호들을 매순간 보냈고, 그 신호들이 신호 서로 사이 어떤 영향을 미쳤든지 간에, 그 신호가 어떤 사건 앞에 주춤했든지 반대로 내달렸든지 간에, 그중 우리에게 지금 닿은 신호가 현존하는 고래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발달한 생물학에 힘입어서, 이 진화사 안에서는 다른 어떤 환경에서 무엇보다 중대한 어떤 요소와 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어떤 요소가 이 새로운 신호를 만들어내게 된 것인지, 그 맞닥뜨림의 순간을 심지어 윤곽그릴 수 있기까지 하다. 좁게 보았을 때는 제자리걸음하는 점일 뿐이지만 넓게 보았을 때는 생명은 틀림없이 내달리는 선이다. 나아가서 이 신호의 강도를 어느 정도에서 묶느냐에 따라서, 개체부터, 종, 생명계 자체까지 우리는 폭을 조정하여 분간해낼 수 있다. 심지어 태초의 원형세포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가(에르베르 기야데르, 『분류와 진화』참조).
이렇게 윅스퀼은 이 신호들이 만들어내는 흐름을 “의미”라고 말한다. 여기서부터 나는 그가 과학자라기보다는 스토아주의 생명철학자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자연은 ‘특이점’을 만드는 방식으로 자기 창조한다. 태초에는 물질이 있었다. 그런데 이 물질은 ‘특이점’까지 치달아서 어느 순간 생명이라는 신호가 되고 자연에 이 신호를 보낸다. 사실상 우리는 이 ‘특이점’들만을 고찰할 수 있고, 여기에 좁은 의미를 부여한다. 이 신호는 멈추지 않고 이 특이점 너머까지 스스로를 창조하고 자연계로 미분화될 뿐만 아니라, 이 미분화된 생명체들도 제각각 자신들의 특이점을 지니면서, 그 특이점이라는 신호를 통해 서로의 신호에 간섭한다. “광막한 검은 방의 별들처럼 오직 몇몇 기호(signe)들만이 있다. 거미되기, 벼룩-되기, 진드기-되기,강하고 모호하고 완고한 하니의 미지의 삶.”(들뢰즈) 이런 식으로 자연은 준안정계를 동력으로 거듭 자기를 창조하면서 그 자체로 생성의 신호가 된다. 이때 생성의 신호는 온자연을 “의미”한다.
조금 더 기호론적으로, 이 특이점들이 “의미”를 구성하는 ‘의미소’들이라고 볼 때, 우리는 정적인 의미지대에 집착하는 표상론적 의미장이 아니라, 동적인 의미 생성을 소묘하는 재현론적 의미장에 들어설 수 있다. 예를 들어 언어의 “의미”는 드러내고/나타내고자 하는 인간의 본유적 권능이 자기자신을 끌어올린 육체적, 영혼적 자질들 즉 특이점들과 그 산물로서의 말이 우선 실증될 것이고, 이 자질들이 미분화하여 충돌하고 조율하는 궤적 자체가 언어가 의미하는 바가 될 것이다. 단 주의할 것은 비록 대체로 정교화되어가는 이 미분화의 경향성 때문에 오해하기 딱 쉽더라도, 이것들은 진보의 상장(賞狀)들이 아니라, 자연이 매순간 스스로를 드러내는 질들의 양태들이다.
윅스퀼이 지극히 시적인 언어로 방법론을 암시하기를, 우리는 종들의 위계가 아니라 위상을 파악하면서, 종들의 질서가 아니라 배치를 알 수 있고, 이 배치를 통해서 이 흐름이자 “의미”를 감지할 수 있다(아래 *를 참조하라). 그리하여 온자연의 “의미”는 우리가 비록 작은 부분에서 확대하여 들여다볼 수밖에 없을지라도, 이 부분이 아니라 온자연 그 자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매 절 말하고 있다. 스피노자는 실체는 오직 하나이며 그 자체로 있는 것이고 개체들은 그 양태들이되 이 양태는 그 자체로 실체라는 것을 설명할 때 오묘해졌다. 이처럼 윅스퀼은 의미는 오직 온자연이며 온자연인 의미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인데, 종들은 온자연의 신호들이면서도 이 신호는 바로 온자연이라 역설하면서, 자연이 거대한 ‘카리용’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 외에는 더는 자세히 설명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너무나 이르게 단호해져 버린다.
* 의미는 생명의 한 권능이다.
* [‘겪어내는 의미’에 내가 쓴 각주이다] 한 종 안에서 특별한 개체가 유능하여서 살아남게 되는 것이 진화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달리, 그 종 자체가 자연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동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당연히 앵글로색슨 사상사의 진화론과는 다른 결의 진화론을 암시한다. 이렇게 볼 경우, 개체 사이의 무한 경쟁이 아니라, 종들 사이의 유연한 역할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종들이 떠맡는 역할로서의 행위 자체가 자연이라는 행위 자체이다. 자연이 행위라는 말이다.
더 나아가서, 이 종 자체의 구별마저도, 근대 분자생물학 아래 통합되는 계통사 앞에서는, 가시적인 식별 너머에 있는 광의의 종을 드러낸다. 예컨대 고래가 멧돼지보다 하마와 유전적으로 가깝다는 식이 그것이다. 그렇게 더 극한까지 올라가면, 우리는 베르그송이 분간했듯이, 식물, 동물, 인간의 단순한 분간까지 볼 수 있을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형찾기나, 수렴하기가 아니라, 종들이 어떤 계기들 안에서는 그에 걸맞게 서로 교통할 여지가 있다는 그것이다(좀뒤영벌과 청담꽃 사례). 이 교통에는 소통은 물론이고 단절까지도 포함하는 어떤 생물학적 정보 전달이 있을 것인데, 이 역사에 대한 생명철학적 고찰이 『창조적 진화』의 많은 지면을 채우고 있다.
온자연의 운영을 진화라고 말한다면, 이 진화가 좁은 의미에서 우리 눈앞에서는 개체들의 경쟁을 통한 생존의 운영으로 보일지라도, 실상의 진화는 넓은 의미에서: 서로를 완전히 절단하지 않는 방식으로 분화하는 종들이 세계에 이리저리 응하며, 구불구불 오가는(évoluer) 거대한 하나의 흐름이다.
이 진화사 안에서는 경쟁과 쟁취를, 상이와 상동의 개념으로, 들뢰즈의 용어를 빌리자면, 차이와 반복의 개념으로 바꾸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철학자가 강제하는 형이상학의 바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 가는 필연적인 형이상학, 차라리 질료형이상학의 용어론이다.
// 이런 류의 사고를 한 진화론자들의 계보가 있을 것이다. 몹시 궁금하지만 잘 모르겠다. 차일에 다음을 읽어보자. 이정희, 19세기 생물학적 조직화개념의 재조명 2005.
*예를 들어 우리는 언어에 있어서도, 눈앞에 있는 언어뿐만 아니라, 언어의 장구한 시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 직관이 가능한 한에서 언어의 총체적인 의미 그 자체일 생명론적 다양체를 이해하고 예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만의 일은 아니리, 고명한 학자부터, 벽지의 촌로까지 함께하는 사람들과 서로의 예지를 나누면서.
본문
제1부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1. 진드기와 진드기의 환경세계
우리는 간단히 이렇게 질문한다. 진드기는 기계인가,기술자인가? 진드기는 단순한 대상인가,주체인가? 생리학자는 진드기에 대해 마 치 그것이 기계인 양 말할 것이며 이렇게 진술할 것이다 “진드기에게 서 우리는 수용기들-감각 기관들—과 실행기들-능동적 기 관들——을 구분할 수 있으며,이 기관들은 어떤 방향 장치에 의해 중추신경계 안에서 서로 연결된다. 전체는 하나의 기계이지만 우리는 어디에서도 기술자를 볼 수 없다.” 생물학자는 대답할 것이다 “바로거 기에 오류가 있다. 진드기 몸의 작은 단편마저도 기계와 유사하지 않으며,어디에서나 기술자는 일하고 있다.” 생리학자는 당황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할 것이다. “우리는 진드기에게서 모든 행동들이 궁극적으로 반사들2에 근거한다는 것을,그리고 반사궁(arc reflexe)이 모든 동물 기계의 토대를 형성한다는 것을 안다(<그림 2>). 그것은 수용기에서, 다시 말해 열기와 낙산과 같은 몇몇 외부의 유체만이 침투되게 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하는 기관에서 시작된다. 그것 은 걷기의 기관이든 포착의 기관이든 실행기를 작동시키는 근육에 의해 완성된다.’’
15~16.
이제 우리는 기능적 원환 운동의 도식에서 진드기를 주체로,포유류를 진드기의 대상으로 설정한다. 우리는 세 개의 기능적 원환 운동 이 논리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안다. 포유류의 지질 소 포는 첫 번째 원환 운동의 지각적 특징들의 담지자로서 구성된다. 낙산의 자극이 지각 기관 안에서 특정한 지각 신호들을 유발하고, 이 신호들이 후각적 특징으로서 외부로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 각 기관 안의 과정들은—여전히 수수께끼적인 현상으로 남아있는 — 유도(induction)에 의해 그 과정들에 상응하는 추동력을 행위의 기관 안에서 일으키며,이러한 추동력이 [진드기의] 다리들의 이완과 낙하를 야기한다. 아래로 떨어진 진드기는 포유류의 털에 충격이라는 능동적 특징을 부여하는데, 이 특징은 진드기에게 촉지각적 특징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특징에 의해 낙산의 후각적 특징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지각적 특장은 열기의 지각적 특징 때문에 사라 지기 전까지 탐사 운동을 야기하며,[열기의 지각적 특징이 나타나는 그때j 진드기는 자신이 찌를,털이 없는 장소에 도달한다.
분명히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세 가지 반사작용들인바,이 작용들은 상호적으로 제어되며,객관적으로 확인가능한 물리적 • 화학적 효과들에 의해 언제나 야기된다. 그러나 이러한 확증에 만족하고,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자는 진정한 문제를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문제는 낙산의 화학적 자극이 아니며——털이 야기한——기계적 자극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그것은 피부의 열 자극 도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문제는 포유류의 신체로부터 나오는 백여 가지의 효과들 가운데 으로지 세 가지가 진드기에 대해 지각적 특징 들의 담지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어째서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 세 가지인가?
우리는 두 대상들 간의 힘의 교환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주체와 그것의 대상 간의 관계들을 다룬다. 그리고 이 관계들은 전혀 다른 장에서,다시 말해 주체의 지각 신호와 대상에서 유래하는 자극 사이에서 기능한다.
진드기는 숲 속 빈터의 잔가지 끝에 움직이지 않고 매달려 있다. 이러한 위치는 그 아래로 지나가는 포유류 위로 떨어질 가능성을 제공한다. 주변을 모두 통틀어도 거기에 진드기를 건드리는 자극은 전혀 없다. 그런데 자,포유류가 가까이 오고 있다. 포유류의 피는 진드기가 자손들을 번식하는 데 꼭 필요하다.
그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포유류의 신체가 끌어내는 모든 효과들 가운데 오로지 세 가지가 어떤 질서 속에서 자극들이 된다. 진드기를 둘러싼 거대한 세계 속에서 세 자극물들이 암흑 속 빛의 신호처럼 반짝이괴 진드기가 목표를 향하도록 틀림없이 인도하게 될 지시물의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진드기는 수용기들과 실행기 들을 구비한 자신의 신체 바깥에서,지각적 특징들로 변형될 수 있는 세 가지 지각 신히을 제공받는다. 그리고 진드기의 행동들은 그러 한 지각적 특징들에 의해 강력하게 규정되어 전개되기 때문에,진드 기는 분명하게 결정된 능동적 특징들만을 산출할 수 있다.
진드기를 둘러싼 세계의 풍부함은 세 가지 본질적인 지각적 특징들과 세 가지 본질적인 능동적 특징들로 구성된 빈약한 형태로 축소된 다 진드기의 환경세계(Umwelt). 그러나 환경의 빈약함은 행동의 확실 성의 조건이 되며,확실성은 풍부함보다 중요하다.
21~23.
결론
우리는 저 대비와 동일한 것을 파동의 전문가들과 음악학자의 환경 세계들 속에서 관찰한다. 한편에서는 파동들만이 있을 뿐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소리들만이 있다. 그러나 이 두 현상들은 모두 실제적이 다.
매 영역에서 사정은 모두 같다. 행동학자에게, 자연의 환경세계 속에서 신체는 정신을 산출한다. 심리학자의 세계 속에서 정신은 신 체를 구축한다.
여러 다양한 환경세계들 속에서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수행하는 기능은 분명히 모순적이다. 우리가 그것의 객관적 .특징들을 수집하려 고 한다면 우리는 혼돈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환경세계들은 각각의 특수한 환경세계를 초월하는 총체성에 의해 전달되고 보존된다. 그 모든 환경세계들 뒤에서 그 세계들을 탄생시키고 영원 히 현전하면서도 자신을 숨기는 주체 : 자연.
135~136.
제2부 의미의 이론
1. 의미의 담지자들
돌의 형태,돌의 무게,돌의 다른 물리적 특징들은 변화하지 않았다. 그것의 색,단단함, 결정형의 형태 둥둥은 동일하게 남아있다. 그럼에 도 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즉 그것의 의미(signification)가 변한 것이다.
140.
이 사례에서 우리는 어째서 스콜라 철학자들이 대상의 특징들 속에 서 본질(essentia)과 우유(accidentia)를 구분했는지를 이해한다. 그들은 의미의 담지자들만을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주체와 관계하지 않은 대상들의 특징들은 그러한 위계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특징들을 지배적인 것[essentia]과 이차적인 것[accidentia]으로 분리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오로지 의미의 담지자가 주체와 맺는 다소 밀접한 관계이다.
142.
이러한 사실에 의해 우리는 관심은 살아있는 자연의 근본적인 특질들에서 나타나는 모순으로 향하게 된다. 신체의 질서지어진 배치와 환경세계의 질서지어진 배치는 서로 대립하며,서로 모순적인 것처럼 나타난다. 환경세계의 배치가 신체의 배치보다 덜 질서지어져 있다고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각 환경세계는 자기 안으로 닫힌 하나의 단위를 구성하며,환경세계의 주체에 대해 환경세계의 부분들 각각은 그 부분들이 수용하는 의미에 의해 결정된다. 동물이 생명적 역할을 수행하는 무대는 이 ᅩ대가 동물에 대해 갖는 의미에 따라 다소 커다란 공간을 아우르는데, 이 공간의 장소들은 그 수에 있어서나 크기에 있어서 동물의 감각 기관들의 판별능력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여자아이의 시각 공간은 우리의 시각 공간과 유사하며,암소의 시각 공간은 초원을 넘어선다. 반면에 개미의 환경세계에서 시각 공간의 반경은 1/2미터에 불과하며 매미의 환경세계에서 시각 공간은 단지 몇 센티미터에 불과하다. 매 공간에서 장소의 분배는 다양하다. 개미가 꽃의 줄기를 따라 기어가면서 더듬는 섬세한 포장도로는 여자아이의 손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으며,암소의 큰 입에 대해서는 더욱 더 그렇다.
146.
의미의 담지자들은 다양한 환경세계들 속에서 내용적으로 차이를 가지면 가질수록 구조적으로는 서로 유사해진다. 환경세계의 주체에 게 의미의 담지자들은 그것이 지닌 일부의 특징들에 의해 지각적 특징들의 담지자들이 되며,다른 측면들에 의해서는 능동적 특징들의 담지자들이 된다.
147.
이처럼 각 행동은 그 지각적 구성성분과 능동적 구성성분을 가지고 모든 중립적 대상에 대해 의미를 각인하고 각각의 환경세계에서 그 대상을 주체와 밀착된 의미의 담지자로 만든다.
각 행동이 어떤 지각적 특징의 생산과 함께 시작되고 동일한 의미의 담지자에게 어떤 능동적 특징을 부여하면서 마무리되기에,우리는 의미의 담지자를 주체와 연결하는 기능적 원환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기능적 원환은 그것의 의미 때문에 가장 중요하며,대부분의 환경 세계에서 만나게 되는바,생태학적 원환,영양의 원환,적의 원환, 성적 원환이 그것이다.
각각의 의미의 담지자는 기능적 원환 안에 자리를 잡으면서 동물 주체의 보체가 된다. 특징들은 지각적 역할이나 능동적 역할을 수행 하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핵심적인 중요성을 갖거나 이차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때때로 의미의 담지자의 몸체 대부분이 그저 분화되지 않은 환경으로서만 사용될 수 있으며 그때 그것은 지각적 특징들을 전달하는 부분들을 능동적 특징들을 전달하는 부분들에 연결시키기 위해서만 존재하게 된다[이 책의 20쪽 <그림 3> 참조].
148~149.
환경세계와 주거지
장 뭘러(Jean Müller)[의 발견] 이래 우리는 생명 현상들의 전개와 관련된 기계론적 설명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들이 낯선 물건을 눈앞에 들이대었을 때 눈을 감는 반사작용 역시 물리적인 원인-결과의 연쇄작용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지각에서 시작해 서 행위로 끝나는 간소화된 기능적 원환이다. 이 경우에 기능적 원환 이 대뇌피질을 포함하지 않고 하위중추들을 통과한다는 사실은 기능 적 원환의 본질을 전혀 변형시키지 않는다. 가장 단순한 반사작용조 차 지각적-행위적 인도이며,반사궁(arc réflexe)5은 단지 고립된 세포들의 연쇄로만 이루어져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이것을 장 될러가 각각의 살아있는 조직이 물리적 에너지와 나란하게 존재하는 어떤 “특수한’ 생명적 에너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비활성적 기계론과 구분된다는 사실을 보여준 이래 확실 하게 주장할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근육과 종을 비교 해보자. 확실히 우리는 종에 어떤 운동을 전달할 때에만 종의 “반응” 을,어떤 울림을 획득할 수 있다. 종을 울리려는 모든 다른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가열,냉각,산이나 염기 처리,자석 혹은 전류는 효과가 없다. 종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그 특정한 행위가 수축으로 이루어지는 살아있는 근육은 모든 외부 자극이 최소한의 효과를 가질 만큼 충분할 때,그러한 외부 영향의 작용에 의해 수축된다. 종은 효과들을 따르기만 하는 죽은 사물처럼 움직인다. 살아있는 근육은 모든 외부 효과들을 주체의 개입을 촉발하는 동일한 자극으로 변모시키는 주체처럼 움직인다.
우리가 제각각 여러 다양한 소리를 내는 살아있는 종들의 집합을 소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것들을 가지고 기계적으로만이 아니라 전기에 의해서 혹은 화학적으로 울릴 수 있는 카리용을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각 종이 그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음색을 가지고 각종 자극 에 응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이 살아있는 카리용이 가질 수 있는 의미는 아니다. 화학적으로 움직이든 전기에 의해 움직이든 결국 카리용은 여전히 아무런 유용성도 갖지 않는 개별적 음색들로 채워진 단순한 메카니즘 으로 존재한다.
살아있는 종들로 구성된 카리용은 단순히 기계적인 추동력의 영향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어떤 단순한 멜로디의 효과로서 자신의 연주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때 각각의 소리는 정해진 멜로디 선율에 따라 다음에 이어지는 소리를 유도할 것이다.
153~155.
3. 의미의 이용
동물이 거주하는 세계,그리고 동물 주위로 펼쳐지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그 세계는,바로 그 동물의 시점으로 우리 자신을 이동시킬 때 우리의 환경세계로 변모한다. 가장 다양한 의미의 담지자들이 그 공간으로 밀려든다. 식물이 거주하는 세계,식물의 터 주변으로 원을 그림으로써 우리가 그 한계를 정할 수 있는 세계는 우리가 그 식물의 시점으로 우리 자신을 이동시킬 때,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여러 다양한 의미의 담지자들이 결합되어 있는 주거지로 변모한다.
동물의 생명적 과제와 식물의 생명적 과제는 그 고유한 조직화 계획올 따르는 의미의 담지자들이나 의미의 요소들을 이용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157.
따라서 모든 생명체에게서 의미에 관한 물음은 최초의 중요성을 묻는 것이다. 우리가 인과적 결정들을 탐지할 수 있는 것은 일단 이러한 물음이 해결된 다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과적 결정들은 언제나 지 극히 한정되어 있는데,이는 살아있는 세포들이 각자 개별적인 음색 의 지휘를 받으면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발달의 멜로디나, 생식 세포들의 개별적 음색들을 지휘하는 발달의 절대적 요청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발달의 절대적 요청 은 우선적으로 우리가 아른트의 필름에서 보았듯이 하나의 질서이며, 이 질서는 지대들을 조직하는 규정된 형태들을 취하고 그런 다음 각 지대 속에 있는 모든 세포들이 수렴되는 기술적인 중심을 만들어 낸다 개별 세포들의 운명은 오로지 그 세포들이 구성하는 중인 형태 안에서 각 세포가 차지하는 자리에 달려있다.
아른트의 필름에서 뚜렷하게 증명된 생식 세포들의 본래적인 등가성은 이미 드리슈(Driesch)가 성게 알들에 관한 유명한 연구를 통해 제시한바 있다.
대부분의 동물들의 생식 세포들은 우선 산딸기의 형태를 띠다가 그 극점들 가운데 한 부분이 함입된 오목한 구체의 형태를 띠는데, 이 구체는 단번에 세 개의 배엽으로 나누어진다. 이렇게 낭배(gastrula)가 형성된다. 세 개의 배엽들을 가진 낭배는 대부분의 동물들의 시원적 형태를 구성한다. 모든 고둥 동물의 생명을 개시하는 것은 그러한 단선적인 멜로디이다.
159~160.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이빨로 심장이 팔딱거리는 먹이를 잡아 무는 데 친숙한 육식동물이,오로지 풀들을 섭취하기에 적당한 원추형의 구개를 가진 초식동물의 주둥이를 가지고 있다면 매우 놀라울 것이다 어떻게 그러한 교체가 가능할 수 있을까? 이식된 세포 조직이 살아있 는 카리용을 표현하고,이 카리용의 개별적 반향들이 “육식동물의 아가리”를 의미하는 배치를 수용할 때 그 반향들은 “초식동물의 주둥이”라는 멜로디에 앞서 맞춰져 있을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의미를 획득하는 질서와 형태를 획득하는 질서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된다.
163.
어쨌든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 쉽게 잊어버리듯이,생명체는 기계와 반대로 부분들로 조합되는 것이 아니라 기관들로 조합 된다. 하나의 기관은 언제나 “개별적 음색”을 소유하고 있는,살아있 는 세포들로 구성된 구조이다. 전체로서의 기관은 “기관의 음색’’을 소유한다. 우리는 스페만의 실험들에서 그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 다. 그리고 이러한 기관의 음색은 기관의 세포들의 개별적 음색을 지배한다. 아른트의 변형균류에서 의미의 계획이 아메바로 하여금 곰팡이의 몸체를 형성하도록 제약했던 것처럼. 의미의 음색은 갑자기 개입해서 그때까지 유사했던 요소 세포들의 개별적 음색들 한가운데 에서, 전체의 형태를 붙잡는 배치를 만들어낸다. 요소 세포들의 개별 적 음색들은 이제 구분된 음색들로서,그렇지만 하나가 다른 하나와 조화를 이루면서 서로 분리되는 미리 고정된 어떤 멜로디에 일치하는 형태를 구성한다.
스페만의 실험은 생명체의 기관들이 기계의 부분들과는 정반대로 본래적인 의미의 음색을 소유하고 있으며,따라서 원심적 방식이 아닌 다른 식으로는 그 형태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배아 형성의 세 단계는 최초의 기관의 형성이 시작되기 전에 완성되었어야 한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최초의 기관 각각은 그 것의 세포들이 구조화되고 형태를 변화시키기 전에 자신의 음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마침내 기관의 음색들의 조화를 낳는 것은 동물 전체의 살아있는 음색이다. 살아있는 동물은 바로 신체적 메카니즘 이상의 것이며, 기관들의 세포들은 전체의 형태를 획득하도록 정해진 질서에 일치하 여 구성된다.
살아있는 음색이 사라질 때 동물은 죽는다. 몇몇 기관들의 존속 덕분에 신체적 메카니즘이 일정 시간 동안 계속해서 기능할 수 있다. 의미의 개념에 입각해서 세워진 자연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화가 여전 히 모든 종들에 관한 탐구를 요청한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도 “사유의 음색’’을 소유할 것임에 틀림없는 뇌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전히 의미의 개념은 신체적 과정과 비신체적 과정 사이에 가교를 놓는다. 마치 악보와 멜로디 사이에서처럼.
167~168.
4. 거미줄에 관한 해석
애벌레가 터널과 문을 건설하는 것은 초시류에게 있어 대단히 중대하며,매우 빈번하게 치명적이 될 때도 있다. ❶실제로 작은 맵시벌은 가시모양의 산란관을 이용하여 극도로 정밀한 방식으로 문과 터널을 뚫고 들어가 방어 능력이 없는 콩바구미의 애벌레 속에 알을 낳는다. ❷알에서 벌의 애벌레가 나오며,이것은 자신의 포동포동한 집주인을 안에서부터 먹어치운다. ❸그런 다음 이 애벌레는 맵시벌로 변모하고 자신의 먹이가 준비해 놓았던 경로를 이용해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원각숫자는 옮긴이 표시>
이 경우에 우리는 본래의 악보 속에서의 삼중주,세 가지 의미의 시리즈들을 연결하는 삼중주를 이야기할 수 있다.
174.
5. 발달의 규칙과 의미의 규칙
우리의 감각기관들, 눈, 귀,코,구개,피부는 오로지 외부 세계의 작용들에 대해서만 반응하는 스웨덴 성냥들의 원리를 따르면서 만들 어진다. 이 작용은 뇌로 유도되는 자극의 파동을 유발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뇌 안에, 감각 기관들의 내부면(face intérieur)에 살아있는 카리용 같은 것을 가지고 있으며,이 다양한 종류의 종들(신경세포 들)은 그 개별적 음색에 따라 울린다.
179.
동물의 수용 기관들은 외부 신체면(face corporelle de l’extérieur)의 산물인가? 아니면 감각의 비신체적인 내부면의 산물인가? 우리,인간에게서 감각기관들이 외부면과 내부면을 연결하기 때문에,동물들에게서도 이 두 면들이 동일한 기능을 완수하며 동물들의 감각기관들의 구조가 외부면만이 아니라 또한 내부면에 의한 것이라 는 점이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우리가 동물들의 감각기관들을 외부면의 산물로만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는 물고기들에 의해 제공된다. 물에 녹을 수 있는 물질과만 접촉해 있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물고기들은 미직 기관뿐만 아니라 후각 기관도 가지고 있다. 반대로 저 두 기관들을 구성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가진 새들은 후각 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181.
살아있는 세포의 종들이 갖는 개별적 음색들은 리듬과 멜로디에 의해 서로 연결되며,바로 이 리듬과 멜로디에 의해 개별적 음색들이 환경세계 속에서 반향된다. 우리는 마틸드 헤르츠(Mathilde Hertz)의 실험들에 의해, 인간이 지각하는 빛의 파동 스펙트럼과 비교했을 때 꿀벌의 색채 지각 신호들의 스펙트럼이 보라색 쪽으로 위치가 이동되 어 만들어졌다고 가정할 수 있다. 꿀벌의 눈의 외부면이 인간의 눈의 외부면과 겹치지 않는 데 반해서,두 눈의 내부면은 일치한다. 여전히 우리는 그러한 위치이동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추측들만을 내놓을 수 있을 뿐이다.
182.
앞에서 보았듯이 발달 규칙은 채식성의 올챙이에게 뼈가 뾰족하게 튀어나온 주둥이를 갖추게 하고 육식성의 도마뱀에게는 진짜 이빨들 로 구성된 아가리를 갖추게 한다. 도처에서 의미의 규칙은 처음부터 배아발달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식물성 영양물’이나 “육질 성 영양물’이라는 의미의 담지자로 향하도록 발달하게 될 영양물의 사용 기관이 적절하게 자리를 잡는지 감시한다. 그러나 이식 때문에 발달의 규칙이 잘못 되었을 때,그러한 잘못을 바로 잡는 의미의 규칙 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의미의 영향을 받는 것은 형태들의 발달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로서의 배치의 규칙이며,이 규칙은 의미의 규칙에 종속된다.
184.
6. 두 가지 근본적인 규칙들을 일치시키는 의미의 규칙
모든 유기적 주체들과 그 기관들의 멜로디들은 다함께 참나무라는 유기체의 교향곡을 연주한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교향곡을 참나무의 본래적인 이미지,참나무의 원형처럼 생각할 수 있다.
세포의 개체적 음색으로부터 기관의 멜로디와 유기체의 교향곡까지의 주체성의 점진적인 발달을 나타내는 이 모든 과정은 어떤 대상 이 다른 대상에 대해 행하는 작용을 정립하는 모든 기계적 과정과 완전하게 대립된다.
오히려 전자의 과정은 모든 음악 작품의 구성과 동일한 차원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실제로 식물들에게서는 의미의 요인들이,동물들에 게서 의미의 담지자들이,이러한 의미들을 유기체 안에서 타당하께 만드는 무엇[기관들]과 일치하는 방식에서 위와 같은 과정을 본다. 마치 두 목소리가 이중창을 부르면서 음표에는 음표로 쉼표에는 쉼 표로 조화를 맞춰야하는 것처럼 의미의 요인들과 의미의 활용은 자연 속에서 대위법적 관계를 유지한다. 그로부터 자연적 구성의 이론을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생명체의 발달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89.
7. 자연적 구성의 이론
주체의 유기적 신체는 의미의 이용자를 만들거나 아니면 적어도 의미의 수용자를 만든다. 이 두 요인들이 동일한 의미 속에서 결합 된다면,이것들은 [이미] 자연에 의해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때 개입된 규칙들이 자연적 구성의 이론의 내용을 형성한다.
살아있는 두 존재가 조화로운 의미적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 먼저 우리는 두 유기체 가운데 무엇을 주체로서 취할 것인지,무엇 을 의미의 담지자로서 간주할 것인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 고 우리는 양쪽 모두에서 점(point)과 대위점(contrepoint)의 역할이 수행하는 특징들을 찾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례가 주어졌을 때, 우리가 문제가 되는 주체를 의미의 담지자와 연결하고 [그리하여] 의미의 원환들을 구성할 수 있는 기능적 원환에 대해 충분한 지식 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지각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능동적 측면에서도 대위법들을 발견하는 게 가능해질 것이고 그리하여 그러한 구성을 주관했던 특정 의미의 규칙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192.
첫 번째 사례로 문어를 들어보자. 문어는 의미의 담지자인 해수에 대해 주체로서 존재한다.
물의 비압축성은 유영하는 근육질의 주머니를 구성하는 데 있어 선결적인 조건이 된다. 유영하는 주머니의 펌프 운동은 비압축적 물에 대해 기계적으로 타용하여 동물이 뒤로 나아가게 한다. 해수의 구성을 지배하는 규칙은 문어 배아의 원형질 세포들의 살아있는 카리용을 구성하는 요인으로서 개입하며,[문어의] 발달의 멜로디에 물의 특징과 일치하는 대위점들을 부과한다. 우선적으로 기관이 생 산되며, 기관의 근육질 내벽은 비압축적인 물에 대해 교대하는 펌프 운동을 실행한다. 여기서 헤엄치기는 점과 대위점을 연결하는 의미의 규칙을 제시한다.
193~194.
사람들은 이런 내용이 그저 진부할 뿐이라고 내게 응답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째서 사람들은 그러한 경험들로부터 가능한 어떤 유일무이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다시 말해 자연 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우연에 의하지 않으며,어디에서건 매우 내밀한 의미의 규칙이 동물을 그의 물리적 환경세계와 연결시 키고 그 둘을 이중주 안에서 통일시킨다는 사실,그러한 이중주 속에 서 저 두 파트너의 특수성들이 하나의 대위법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어째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일까?
의미를 자연적 요인으로 인식하지 않으려고 고집하는 자들만이 수컷과 암컷이 성차(빈리의 기능적 원환 속에서 그들의 상호적인 의미에 따라 서로에게 맞춰진다는 것을 부인할 것이며,생명 세계 속에서 수천 가지의 변주로 제시되는 사랑의 이중주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이 단지 우연의 결과라고 주장할 것이다.
195.
자연적 구성이 성공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 강조해야 하는 첫 번째 요청은 의미의 담지자가 의미의 수용자의 환경세계에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극도로 다채로운 지각적 특징들 이 바로 저 목적에 이바지한다.
196.
8. 겪어내는 의미
자연의 [작품]구성을 해독하는 것,그리고 주체가 외재적인 의미에 복종하는 이런 저런 경우에,작용하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규명하 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두 가지 관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조금 전 서술했듯이 주체의 복종이 종의 이득을 위해 건강하지 않고 저항력이 없는 모든 주체들을 제외시킴으로써 초과된 개체들을 제거 하든지, 아니면 초과된 주체들의 제거가 자연의 평형이라는 일반적 이득을 위해 일어나든지.
그리하여 K. E. 폰 바에르(K. E. von Baer) 에 따르면 초과된 파리 유충은 물고기들의 먹이로 사용되고 실제로 그렇게 해서 올챙이들을 대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는 초과된 자손들의 파괴를 “더 잘 적응한 것들의 생존”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근거로 생명체들의 진화 속에서의 진보 이론을 정초하면서 근본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적응한 개체의 생존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종 그 자체의 지속을 위한 정상적인 개체의 생존이다.
211.
9. 자연의 기술
내가 기억하는 한 그것은 암스테르담의 콘체르토헤보우<Con-cert-gebouw)에서 멩겔베르그(Mengelberg)가 훌륭하게 지휘했던 말러의 교향곡이었다. 남성 합창단과 여성 합창단에 의해 보강된 거대 오케 스트라의 위대하고 승고한 멜로디가 높이 울려 퍼졌다.
내 옆에는 악보 속에 완전히 빠져있던 한 청년이 앉아 있었는데,그는 마지막 화음이 울려 퍼질 때 족스러운 긴 숨을 내쉰 뒤 자신의 악보책을 덮었다.
나는 내 음악적 교양의 부재로 인해,그에게 그의 귀가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그 음들을 눈으로 따라 읽을 때 어떤 쾌감을 느낄 수 있느냐 고 물었다 나의 질문이 그의 열정을 홀러넘치게 만들었고 그는 내게 악보를 따라가야지만 음악작품에 관한 정확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인간의 목소리 혹은 악기의 소리는 즉자적으로 존재하지만 점과 대위점에 의해 다른 소리 속으로 녹아들어간다고 그렇게 확장된 통일성은 한층 더 풍요롭고 아름다워지며 이러한 총채 성 속에서 우리는 작곡가의 영혼에 접근할 수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계속해서 그는,우리가 악보를 읽으면서 마치 성당의 힘찬 기둥들처럼 솟아나와 작품의 궁륭을 떠받치는 개별적인 소리들의 발전과 분화를 따라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바로 이것이 오케스트라 작품 의 복잡한 구조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식아라면서 말을 마쳤다.
무척 설득력 있게 들렸던 그 말들은 내게 질문올 불러일으켰다으 생물학의 과제는 자연의 악보를 기록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미 하나의 환경세계가 다른 환경세계와 맺는 대위법적 관계들을 검토한 적이 있으며 그리하여 꽃줄기의 경우와 이것이 네 가지 환경세계들과 맺는 관계들을 전개했었다.
여자아이는 자기가 장신구로 이용했던 꽃다발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준다. 그렇게 꽃줄기는 사랑의 이중주를 연주하게 될 것이다 줄기 를 도로처럼 이용했던 개미는 꽃의 씨방에 도착하기를 재촉했는데, 이는 진딧물의 배설물을 추출하기 위해서이다. 반면에 소는 줄기가 포함된 사료를 우유로 변형시켰다. 매미의 애벌레는 줄기의 수액을 이용해서 만든 거품모양의 집에서 성장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성 충이 된 매미가 달콤한 사랑 노래로 초원을 가득 채웠다-
이러한 것들에 다른 환경세계들이 추가된다. 대위법적 관계에 의해 꽃의 향기, 색,형태와 관계하는 꿀벌들이 갑자기 몰려온다. 그리고 꿀벌들은 꽃꿀올 배불리 먹은 다음 풍부한 표현적 춤-프리쉬(von Frisch)가 이 춤에 대해 세부적인 묘사를 했다-도 을 추면서 벌집의 다른 거주자들에게 초원에서의 자신들의 거주지를 통보한다.
꽃의 색이 꿀벌들과 우리에게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꿀벌들에게 확실한 지각적 특징으로 이용되는데,왜냐 하면 꿀벌들과 꽃들이 대위법에 의해 상호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 이다.
이것은 분명 겸손한 시작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연의 악보가 우리에게 던지는 문제에 대한 하나의 접근이다.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소리들을 카리용처럼 병렬시킨다면 우리는 모든 악기들을 하나의 공통분모와 관련시킬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바이올린에 대해서 바이올린의 소리들로만 구성된 매우 풍부 한 카리용을 얻고,하프에 대해서는 더 단순한 또 다른 카리용을, 트라이앵글에 대해서는 더욱 더 축소된 카리용을 얻는다.
모든 음악적 구성은 한 악기가 내는 음색들로 이루어진 카리용에서 선율을 이루는 소리들을 가려내고,이 소리들을 다른 악기들의 카리 용들에서 유래하는 음색들과 조화롭게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연결은 사람들이 다양한 소리의 음들을 하나의 악보로 모을 수 있는 방식을 규정하는 대위법의 규칙들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러 나 작곡가는 대위법에 의해 어떤 악기의 소리일지라도 다른 어떤 악기의 소리와 연결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닌다.
동물들을 악기들과 같은 공통분모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중추신경계를 카리용처럼 간주하고 중추신경계의 살아있는 세포들의—지각적 특징들로서 외부로 이전된—지각 신호들을 “지각적 음색들’ 로 명명하기만 하면 된다. 반면에 운동적 결과를 야기하는 추동력들 은 “능동적 음색들”이 된다.
모든 악기처럼 각 동물은 다른 동물들의 음색들과 대위법적 관계를 맺는 일정 수의 음색들을 전달한다. 기계론자들처럼 악기에 대해 오 로지 청각적 진동들만을 방출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청각적 진동들을 가지고는 어느 누구도 멜로디나 화성을 구성할 수 없으며 악보를 쓸 수도 없다 인간의 청각 기관에서 진동들은 소리가 되며,오로지 인간의 청각 기관에 대한 청각적 진동의 관계가 멜로디 와 화음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며 악보를 쓰게 만든다.
또한 초원의 동물들과 식물들에게 그들의 색,소리,냄새를 공간 안에 퍼뜨리는 것 외의 다른 기능을 허락하지 않는 것도 충분치 않다이것들{색, 소리,냄새]은 우선적으로 다른 동물들의 환경세계 안으로 수용되어야 하며,거기서 지각 신호들로 변화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들이 서로 간에 맺는 관계들을 음악의 영역 속으로 이전시킬 수 있으며,조밀한 대위법에 따라 서로 간에 관계하는 여러 다양한 동물 주체들의 지각적 음색들과 능동적 음색들 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자연 속에서 서로 다른 다양한 동물들의 지각적 음색들은 대위법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따라서 박쥐들의 환경세계 속에서의 박쥐의 호출 신호는 동시에 나방의 환경세계에서 경고가 된다.
연체동물이 짊어지고 나르는 집은 이 동물에 대해 주거지의 음색을 지닌다. 그러나 동물이 죽고 집이 빈 채로 남을 때 그 집은 소라게에 대해 고유한 어떤 새로운 거주자의 음색을 얻는다. 이러한 협화음은 연체동물-소라게의 구성에서 유리하게 이용된다.
교향곡의 작곡가가 악기들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제한받지 않는 것처럼 자연은 자신의 대위법에 의해 연결짓고자 하는 동물들의 선택 에 있어 완전히 자유롭다. 아귀(lophius)의 미끼는 희생물을 유인해야 하는 도식의 먹이-음색에 관한 대위법을 형성한다. 음색,먹이, 주거 지라는 개념들은 우리가 음악적 비유를 동물에 적용시키면서 음악의 고유한 성질과 관련된 이론을 포기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이올린이나 하프의 음색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실제로 우리는 먹이나 주거지에 대해 조금도 말할 수 없올 것이며, 또한 한 잔의 음료-음색이나 의자의 자리-음색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올 것 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청각적 음색의 개념을,의미의 담지 자로서 주체의 환경세계 속으로 진입하는 대상들의 의미의 음색으로 까지 확장시킴으로써, 생물학적 장에서 음악적 유비가 지닌 풍성함을 알 수 있다.
연체동물의 환경세계 속에서 껍데기에 부여된 주거지의 음색이 소라게의 환경세계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주거지의 음색과 대위법 을 이룬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우리는 저 두 음색들 이 동일하지 않지만 하나의 자연적 [악보의] 구성에서 다른 자연적 [악보의] 구성으로 이행될 수 있다고 제안하려 한다. 왜냐하면 저 둘은 동일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음악 악보에서 화음을 이루는 것이 자연의 악보에서는 의미가 되며,이것은 연결 기관으로 이용되거나 더 정확히는 두 가지 자연적 요소들 간의 가교로서 이용된다.
가교는 자신이 연결하는—점과 대위점과 같은——두 개의 연안에 걸쳐있다. 음악에서 화음이 동일한 기능올 수행하고 자연에서는 의미가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우리가 독자를 지치게 할 정도로 제시했던 수많은 사례들은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실제적인 자연적 요소들이지 논리적 개념들이 아니라는 것을 중명한다. 따라서 우리는 의미들의 악보를 자연에 대한 어떤 기술(빼)처럼 파악할 수 있다 정확히 악보의 음표들이 그 악보 의 음악을 기술하는 것처럼.
이제 오케스트라로 잠시 눈길을 던져보자. 우리는 각 연주가의 악보대 위에서 각 악기에 일치하는 악보를 본다 반면에 전체의 악보는 지휘자의 악보대 위에 놓여 있다 또한 우리는 악기들 자체에 눈길을 돌리면서,이 악기들이 음색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구조에 의해서도 역시 서로 일치하는지를 묻는다. 다시 말해서 악기들이 단지 음악적 통일성만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하나를 기술하는 통일성을 형성하는지를 묻는다.
개별적으로 취해진 오케스트라의 대부분의 악기들이 음악의 부분들을 연주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위의 질문에 대해 그렇다는 대답 을 너무 성급하게 내놓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광대 음악가가 소음(징들, 소방울 둥둥)을 내는데 사용되는 도구들을 다루는 것올 들었던 자는 그러한 오케스트라가 불협화음을 연주할 수는 있지만 교향곡을 연주할 수는 없다는 사실올 어렵지 않게 이해할 것이다.
잘 검토해보면 오케스트라의 악기들은 그 구조 자체 속에서 대위법적인 작동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초원이 제공하는 오케스트라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의 오케스트라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난다. 우리의 네 가지 환경세 계들 속에 위치한 꽃을 생각해보면 된다 가장 뚜렷한 것은 꽃의 구조 와 꿀벌의 구조 사이의 관계이다. 우리는 이 관계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꽃이 꿀벌에 대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꿀벌이 꽃에 대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결코 저들은 화합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모든 자연적 기술(技術)의 근본 명제를 진술한다. 우리는 거기서 괴테의 지혜를 알아본다:
눈이 태양에 대해 만들어지지 다면
결코 눈은 태양올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저 금언을 이렇게 완성한다
태양이 눈에 대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태양은 어떤 하늘에서도 빛나지 않을 것이다
태양은 하늘의 빛이다. 그러나 하늘은 눈의 산물이다. 눈은 하늘에서 환경세계의 공간을 감싸는 자신의 지평을 구성한다. 눈을 빼앗긴 살아있는 존재들은 하늘도 태양도 알지 못한다.
213~219. 전문.
10. 대위법,발달과 형태발생의 모터프
커피 잔은 “커피에 대해’’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상투적인 표현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진술은 언뜻 알려 지는 것 이상의 풍부한 함의를 갖는다 실제로 이 진술은 잔의 기능이 커피를 담는 것이지만 또한 이러한 기능이 잔을 제작하는 데 있어서 모티프 자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의 이론은 이러한 관계를 발견하는 데서 정점에 이른다.
우리에게 있어서 일상적 대상의 의미는 그 대상이 완수하는 기능에 놓여 있으며,그러한 기능은 언제나 대상과 인간 사이에 놓인 어떤 대위법 의 점으로 보내어진다. 이 대위법의 점은 또한 대상의 실존을 결정하 는 모티프를 구성한다.
222.
바구미의 사례는 자연적 기술이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수수께끼들을 제출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분다 대위법적으로 구성된 두 파트너가 마주한다 작은 바구미는 자르는 용도의 톱 모양의 홉관 을 가지고 있으며,자작나무의 커다란 잎을 톱질하기 시작한다. 톱질 은 추후에 곤충이 잎의 아랫부분을 원뿔처럼 말아,거기에 자신의 알들을 낳을 수 있는 방식으로 행해져야 한다.
특징적인 곡선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그러한 [톱질의] 경로는, 비록 자작나무의 잎이 그러한 곡선의 혼적을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고 할지 라도 바구미에게는 항구적인 척도를 갖는다. “항구적인 경로,,는 그 자체가 그러한 경로의 출현의 모티프가 될 수 있을까?
이런 것이 자연적 구성의 비밀들, 말하자면 우리가 자연의 기술들을 탐험하면서 끊임없이 만나게 될 그런 비밀들에 속하는 것이다.
라마르크는 자연의 기술이라는 문제에 몰두한 최초의 연구자였다. 여하간 기린의 목이 늘어나는 현상을 종려나무 가지들의 높이에 의해 설명하려던 그의 시도는 대위법적 행동에 대한 그의 최초의 직관을 포함한다.
나중에 사람들은 자연의 기술에 대한 관심을 모조리 잃어버렸다. 특히 헤켈(Haeckel)은 그것을 [동물들]선조들의 영향에 대한 사변으로 대체했다. 그러나 도대체 누가 양서류들이 물고기들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에서 [자연 구성의] 기술적인 성공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인가? 소위 “혼적 rudimentaire” 기관들에 대한 환영은 진정한 기술적 문제들에 기울였던 관심의 방향을 돌려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오로지 드리슈가 제공한 증거 —— 성게의 수정된 난자가 성게의 두 반쪽들을 낳았던 게 아니라 반쪽으로 축소된 두 개의 완전한 성게를 낳았다는 것 — 만이 자연적 기술에 대한 더욱 심오한 이해를 열어놓았다. 신체적인 물질은 모두 칼로 잘려질 수 있지만 멜로디는 그럴 수 없다. 살아있는 종들의 카리용이 연주하는 노래의 멜로디 는 변하지 않는다. 비록 그 멜로디를 낼 수 있는 종들의 수가 반만 남아있을지라도 말이다.
225~226.
11. 진보
레오폴트 폰 랑케는『근세사의 여러 시기들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쓴다 “만약 매 시대가 인류의 삶을 한 단계 고양시키는 것으로 진보가 이루어진다고,그리고 그 결과 매 세대가 이전 세대를 완전히 넘어서게 되고 이전 세대는 다음 세대로 향하는 이행기로서만 이용됨으로 써 최후의 세대가 언제나 가장 혜택 받은 세대가 될 것이라고 가정한 다면, (……) 우리는 신의 부정의(저대)와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일종 의 매개된(강등된) 한 세대는 즉자적으르 그리고 대자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게 될 것이다,그 세대는 다음 세대를 인도하는 등급 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이며 신성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은 것으 로 나타날 것이다. 반대로 나는 모든 시대가 신에 대해 동일한 직접성의 관게를 맺고 있으며 각 시대의 가치는 그 시대가 생산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실존 자체 안에,존재 안에 있다는 점을 주장한다.”
랑케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의 진보를 부정하는데,왜냐하면 모든 시기들이 직접적으로 신에 의존하기 때문이며,따라서 그 어떤 것도 다른 것들보다 더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대’’를 어떻게 이해해 야 할까? 랑케가 채택한 의미에서,아니면 제한된 몫의 시간 내부에서 인간적 환경세계들과 결합한 어떤 집합으로?
따라서 사람들은 이러한 집합의 모든 환경세계가 신과 직접적으로 관계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왜냐하면 모든 환경세계들이 동 일한 [작품]구성에 귀속되며,랑케는 이러한 구성의 행위자를 신의 이름으로 지칭하기 때문이다.
“신’’이라는 단어가 모든 유물론자들에게 단지 어떤 도발처럼 작용하는 반면에 사람들이 그들에게,세계가 시작된 이래 힘과 물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보편적이고 영원한 효 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약간이라도 양피인정]하기만 한다면 유 물론자들은 어마어마한 시간이 경과하는 동안 탄생하게 된 어떤 우연 적인 구성을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229~230.
우리가 분석에 제공되는 다양한 환경세계들올 주파할 때, 어떤 물질의 속성도 항구적이지 않다. 하나의 환경세계에서 다른 환경세계로 [이행할 때],변하는 것은 단지 대상의 의미만이 아니라 대상의 모든 물질적 • 형식적인 특징들의 구조이다.
인간의 환경세계 속에서 물질은 우주가 놓여있는 듯한 청동 바위산(rocher de bronze)이다. 그럼에도 이 물질은 하나의 환경세계에서 다른 환경세계로 이행할 때 사라진다.
그렇다. 유물론자들이 그토록 고집하는 물질의 항구성은 세계의 일반적인 개념화에 도움이 될 견고한 토대를 제공하지 못한다.
대상들의 항구성보다 훨씬 더 견고한 것이 주체들의 항구성이다. 유물론자들은 이 렇게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주체들은 물질로 구성 되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주체들에게 고유한 신체적 물질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이행할 때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
각 개체는 자신의 부모로부터 극소량의 물질만을 전달 받는다 분열이 가능한 배아 세포와 자극 물질 입자들의 건반 매 세포 분열마다 두 개의 분기 세포들로부터 전해 받은 유전자들. 실제로 위[물질 입자 들】의 건반 위에서는 마치 피아노 건반들 위에서와 같이 발달의 멜로 디가 연주되고,그리하여 형태의 완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 활동을 시작한 각각의 자극 물질 입자는 차별화된 충격처럼 세포의 원형질에 영향을 미치고,각각의 구조를 원형질에 부여한다.
이처럼 구조화된 발달의 멜로디들은 환경세계 속에서 만나게 되는 다른 주체들의 발달 멜로디로부터 모티프를 빌린다.
꽃이 꿀벌에 대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꿀벌이 꽃에 대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결코
저들은 화합하지 못할 것이다.
231~232.
요약과 결론
나는 서로 다른 네 가지 환경세계 속에 위치한 동일 대상이 어떻게 서로 다른 네 가지 의미를 얻고 매 번 그 특징을 완전히 변화시키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현상은 단 하나의 설명만을 인정할 수 있을 텐데,그 설명은 대상들의 모든 특징들이 란 실상 그 대상들이 관계하는 주체가 부여한 지각적 특징들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신체가 살아있는 세포들로, 그 전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카리용을 형성하는 살아있는 세포들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해야만 한다. 살아있는 세포는 어떤 특수한 에너지를 소유하며,이 에너지는 살아있는 세포로 하여금 자신이 영향을 받는 모든 외부 작용에 대해 개별적인 음색으로 응답할 수 있게 허락한다. 개별적인 음색들은 멜로디들에 의해 서로 연결될 수 있으며,한 음색이 다른 음색에 작용하기 위해서 각 세포 신체들의 기계적인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236~237.
우리는 스톡홀름의 국립 박물관에서 쥘(Jul,Noël, 크리스마스를 의미하는 스웨덴 단어)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바르 아로세니우스(Ivar Arosenius)의 작은 그림,자신의 무릎 위에 아들을 앉힌 젊은 엄마를 재현하고 있는 작은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섬세한 후광이 마돈나의 머리 주위를 감싸고 있었고,감동적인 젊은 마돈나는 아주 검소한 방 안에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대상들은 매우 일상적이었으나,모두 — 탁자,램프 커튼, 장롱,식기들—성스러움을 호흡하는 것처럼 보였다.
작품은 우리가 그 회화를 잊어버리고 자연의 작은 기적을 관조한다고 믿을 만큼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마돈나라는 주제는 여기서 의미의 근원이다. 다른 모든 대상들은 멜로디가 구체화되면서,그로 부터 자연스럽게 홀러나오는 듯하다. 우리는 동시에 낯선 그 어떤 것도 침입하지 않는 순수한 환경세계 안을 바라본다는 인상을 가진다. 모든 것이 점과 대위점처럼 상호적인 의존 속에 있다.
240.
우리 고유의 신체적인 주거지와 이 주거지에 밀착되어 있는 정원을 외부에서 바라보도록 시도하면서 우리의 글을 마무리하자. 이제 우리 는 우리의 하늘에서 빛나는 태양과,식물들,동물들,인간들이 가득한 우리의 정원이 자연적 구성의 상징들에 불과하며,이러한 구성이 모 든 것을 포괄하고 모든 사물을 서열과 의미에 따라 배치한다는 것을 안다.
이러한 관점은 또한 우리가 우리의 세계의 한계들을 알 수 있게 한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더 정확한 도구들을 이용해서 사물들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어떤 보충적인 감각 기관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대상들의 모든 특징들은,비록 우리가 그것들을 최종 요소들로—원자들과 전자들로——분해한다고 할지 라도,언제나 우리의 감각의 지각적 특징들로,그리고 표싱들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저 태양,저 하늘,저 대지가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들은 미래 세대들의 환경세계들 속 에서 유사한 형태들을 가지고 계속해서 실존할 것이다.
사물들은 공간과 시간이라는 두 차원들 속에서만 배치되어 있지 않다. 세 번째 차원이 거기에 추가되는데,그것은 환경세계들의 차원 이고 그 안에서 대상들은 언제나 새로운 형태들을 따르면서 재현된다.
수적으로 무한한 환경세계들은 이 세 번째 차원에서, 자연이 초-시간적(supra-temporel)이고 가외-공간적인(extra-spatial) 의미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건반을 제공한다. 우리의 일은 살아있는 동안 우리의 환경세계와 함께,비가시적인 어떤 손이 미끄러지듯 연주하는 그런 경이적인 건반들 속에서 하나의 건반을 구성하는 것이다.
244~245.
첫댓글 상기 서평에서 내가 충분히 자세히 썼듯이, 출판사 책소개에 있는 윅스퀼이 칸트주의자라는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본인이 어떻게 생각하였든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