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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역사여행] 세상 즐거움 버리고 조선의 전염병과 싸우다닥터 셔우드 홀과 고성 김일성 별장
입력 : 2020-08-07 17:23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50180&code=23111654&sid1=ser
1938년 완공된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의 성’ 풍경. 의료선교사 윌리엄 홀 부부의 아들 셔우드 홀 부부의 안식처였다. 그러나 황해도 해주 구세병원 사역을 했던 셔우드 부부는 일제 말 미국으로 쫓겨난다. 이어 남북이 갈리면서 김일성 별장이 됐다. 원래 2층이었으나 군 관리 시기 3층으로 증축됐다.
‘김일성 별장’
강릉과 속초를 찾는 이들이 안보관광 코스로 잡는 곳이 김일성 별장이다. 이 별장은 ‘이승만 별장’ ‘이기붕 별장’과 더불어 패키지로 묶인다. 이기붕은 이승만 대통령 때 부통령이었다. 이 세 곳의 별장 가운데 관광객은 주로 ‘화진포의 성’이라고도 불리는 김일성 별장을 찾는다. 해안 절벽의 성채 같아 전망이 좋기 때문이다. 이곳을 기준으로 이기붕 별장이 130m, 이승만 별장이 1㎞ 지점에 있다.
지난 7월 말. 폭우에도 불구하고 휴가를 즐기려는 많은 사람이 ‘화진포의 성’을 찾았다. 몸을 가누기 어려울 만큼 해풍이 거셌다. 이 건물은 독일인 베버가 한 선교사의 발주를 받아 독일 건축 양식으로 1938년 완공했다. 그런데 1948년 남북이 38선을 기준으로 갈리면서 북한 땅이 되어 김일성 별장이 됐다. 그리고 6·25전쟁을 통해 수복되면서 이승만 이기붕 정·부통령의 공간이 됐다.
여기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 보자면 이 화진포 일대는 사실 ‘화진포 선교유적지’라고 해야 맞다. 지리산 노고단·왕시루봉 선교 유적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셔우드 홀 (1893~1991)
‘화진포의 성’ 발주자는 1893년 서울 태생 셔우드 홀과 영국 출신 캐나다인 메리안 버텀리(1896~1991) 부부다. 셔우드는 의료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과 로제타 셔우드 부부의 장남이다. 로제타가 1890년, 윌리엄이 이듬해 조선에 도착했고 두 사람은 1892년 결혼했다. 윌리엄이 캐나다, 로제타가 미국인으로 선교 모임을 통해 알던 사이였다.
윌리엄은 1894년 평양선교기지 개척 책임자였다. 그해 청일전쟁 전쟁터 평양에서 많은 전염병 환자와 부상 군인을 치료하다 자신도 전염병으로 순직한다. 이듬해 로제타는 유복자 에디스 마거릿을 출산한다. 한데 안타깝게도 셔우드가 누구보다 예뻐했던 여동생 에디스마저 1898년 평양에서 감염병으로 죽고 만다.
어머니 로제타 홀을 모시고 기념 촬영한 셔우드 홀 부부.
유년의 셔우드는 질병과 전쟁, 아버지와 여동생의 죽음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와중에도 공부를 위해 조선을 떠나 미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생활했다. 남편 순직 후 일시 귀국했던 로제타는 뜻을 잇기 위해 1897년 다시 조선에 입국했다. 몇 달씩 걸리는 여정의 배 안에서 어린이들이 감염병에 걸렸고 셔우드와 에디스도 회복과 감염이 반복됐다.
1925년. 2세 셔우드 부부가 조선에 입국했다. 셔우드는 열아홉 살에 캐나다로 가 토론토의대 과정을 마치고 의사가 됐다. 아내가 된 메리안은 필라델피아여자의대를 졸업한 수재였다. 노벨상 수상자 퀴리 부인이 조선행을 안타까워했을 정도다. 하지만 부부는 ‘세상 즐거움 버리고’ 이역만리에서의 복음 사역을 택했다.
해주 구세병원 관계자 등과 함께한 셔우드 홀(앞줄 왼쪽 네 번째).
셔우드 부부는 황해도 해주에 선교부를 구축하고 전도·의료·교육에 힘썼다. 무엇보다 폐결핵 등 전염병 예방을 위해 공중위생 교육에 최선을 다했다. 환자들은 ‘신통력’에 놀라 구세병원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전염병이 날로 퍼졌다. 다섯 명에 한 명이 결핵 환자였다. 부부는 격리 병동을 추진했다. 최초의 요양원이었다. 노턴 기념병원(해주구세병원)은 그렇게 설립됐다. “요양원에서 환자가 죽으면 폭동이 일어날 텐데요”라고 스태프가 염려했으나 부부는 “전지전능한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야지요”라며 의지했다. 당시 로제타는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사역하고 있었다.
셔우드는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실 발행 사업을 펼쳤다.
1932년 12월 3일. 셔우드는 결핵 퇴치를 위한 크리스마스실 위원회 회장을 맡아 마침내 조선 최초의 실을 발행했다. 배재학당 헨리 아펜젤러 목사가 첫 구매자였다. 일제의 수탈이 본격화되면서 사람들은 도탄에 빠졌고 그럴수록 미신을 신봉했다. 1937년 중일전쟁과 함께 선교사에 대한 압박도 날로 심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수병(광견병)에 걸린 미친개가 메리안과 자녀, 동네 어린이를 물어 대혼란에 빠졌다. 백신이 부족했고 있다 하더라도 토끼 척추에 주사해 생성해야 하는 등 과정도 복잡했다. 주민들은 “선교사 집 개에서 시작된 미친 개 병”이라며 흥분했다. 셔우드는 이때의 심정을 ‘나는 예수님께서 고쳐 주신 그 힘을 베풀어 달라고 매달렸다’(셔우드 저 ‘조선회상’ 중)고 적었다. 부부는 개에 물린 지 14일 만에 죽는다는 공수병을 기적적으로 물리쳤고 탈진해 버렸다.
1984년 서울 양화진의 아버지와 여동생 묘역을 방문한 셔우드 부부.
부부는 안식을 위해 평안도와 함경도 선교사들의 안식처 원산을 찾았다. 당시 여름이면 선교사들은 수양회를 겸한 휴가를 비대면 지역에서 갖곤 했다. 서울 선교사들은 남한산성, 호남·경상도 선교사들은 지리산이었다. 그런데 일제가 원산 선교부 수양관 해안을 군사용 시설로 쓰겠다며 밀어버렸다. 그리고 내준 곳이 원산에서 160㎞ 지점 강원도 고성 화진포였다. 선교사들은 화진포 호수를 중심으로 5㎞ 반경 내에 안식처를 다시 지었다.
‘화진포의 성’ 계단. 김정일이 여동생과 사진 찍은 장소라고 표시돼 있다.
그때 셔우드는 ‘화진포의 성(城)’이 될 줄 꿈에도 몰랐다. 부부는 수양시설을 지을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독일인 베버에게 맡겨 놓고 해주 사역에 힘써야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무렵 장티푸스 전염병이 심하게 돌아 병원을 떠날 수 없었다. “용케 시간을 내어 ‘작은 오막살이 별장’을 보러 화진포에 갔다. …한마디로 경악 자체였다. 조그마한 막사가 아니라 그야말로 작은 성이었다.”(‘조선회상’) 셔우드는 아버지 순직 생명보험금을 기반으로 건축비용을 막았다. “그 성에서 몇 번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이란 소용돌이로 곧 우리의 성마저 일제에 빼앗겼다.”
이승만 별장(위쪽)과 이기붕 별장. 1930년대 말 화진포 선교사 안식처를 활용한 별장이었다. 일제 강압으로 함남 원산 안식처가 폐쇄되자 이곳에 조성했다.
다시 ‘김일성 별장’. 김일성 아들 김정일은 유년기 이 성 계단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일성 부모는 한때 기독교인이었다. 이승만·이기붕 부부는 또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다. 있는 그대로 기록할 필요가 있다. 화진포는 선교유적지다.
[한국기독역사여행] 선대가 심은 믿음의 씨앗, 아들·손자 거치며 거목이 되다
장씨 가문 3대 신앙과 충남 부여 칠산침례교회
입력 : 2021-07-02 17:02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98357&code=23111654&sid1=ser
충남 부여군 임천면 칠산침례교회 예배당과 칠산리 마을 풍경. 금강을 끼고 있는 한적한 농촌 교회다. 근대도시 군산과 강경 사이 나루터 마을로 19세기 말 침례교 펜윅 선교사 등에 의해 복음이 전해졌고, 칠산리 향반 장씨 가문 3대가 내륙으로 복음을 날랐다. 15년 전 부임한 조용호 목사가 강경교회·공주교회(현 꿈의교회)와 함께 ‘기독교한국침례회 3대 교회’의 위상을 되찾았다. 아래 흑백 사진은 1918~1949년 무렵 두 번째 예배당.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마 9:31)
충남 부여군 임천면에 칠산리라는 평범한 농촌 마을이 있다. 면사무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국도나 지방도가 지나는 곳도 아니다. 다만 금강과 접해 있다는 것이 유일한 특색이다. 이 마을은 금강 하구 군산항에서 상류를 향해 37㎞ 지점 강 북쪽에 위치한다. 여기서 12㎞를 더 가면 조선 3대 장으로 호황을 누렸던 강경에 닿는다. 개항 도시 군산부와 일제강점기 급성장한 상업도시 강경 사이에 칠산리가 있었다. 칠산리는 너른 평야를 가졌다. 비산비야(非山非野)였던 곳에 둑이 조성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됐다. 지난 주말 68번 지방도를 벗어나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해발 19m 동산에 시옷(ㅅ) 자형 칠산침례교회 예배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100여호 되는 제법 큰 동네다.
금강권 선교 개척자 펜윅 선교사의 백마를 이용한 전도 행차 모습. 조용호 목사 제공
1894~1895년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을 전후로 금강 권역에도 복음이 전해졌다. 1889년 내한한 선교사 펜윅(1863~1935)과 미국 침례교 선교사들이 금강 권역과 함경도 원산을 중심으로 순회 전도에 나섰다. 인동 장씨 가(家)는 200여호에 이르는 칠산리의 사족이었다. 독자로 태어난 향반, 장기영은 자신도 독생자밖에 두지 못해 늘 불안했다. 한데 이 귀한 아들 장석천이 정신질환을 앓았다. 장기영은 용한 의원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1901년 무렵 펜윅과 그 수제자 신명균 등이 금강권 전임 사역자 스테드맨의 선교지를 인계받아 지금의 충남 지방 사역을 본격화했다. 이들은 불편한 육로 대신 제물포~군산 간 배편을 주로 이용했고 바닥이 낮은 한선으로, 군산~칠산리~강경~부여~공주 등을 순회했다. 강경교회·칠산교회·공주교회(현 꿈의교회)가 초기 침례회 3대 교회인 이유다.
한국침례회 발상지 논산시 강경읍의 강경교회 현재 모습. 초가는 강경교회 최초의 예배지 ㄱ자 교회로 900m 지점 옥녀봉 정상에 위치한다. 2013년 복원됐다.
장기영은 집안 당숙 장교환에게 전도받고 야소교에 호기심을 가졌다. 대처 군산과 강경의 야소교 신자들이 행세깨나 한다는 소식도 향반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야소(예수)를 믿어야 시세에 뒤처지지 않을 거라는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그가 서양 귀신을 믿는다는 소식은 금방 퍼졌고 장기영은 사람들의 비난에 흔들렸다. 1902년 펜윅과 신명균이 공주를 거쳐 칠산 순회 목회에 나섰다. 이때 장기영은 근심거리였던 아들 판순(훗날 석천으로 개명)의 병세를 호소했다. 한학자 출신의 엘리트 신명균은 축사 은사가 강했다. 이들은 판순을 붙잡고 귀신을 쫓아냈다. 초기 한국 기독교의 이러한 영적 승리는 복음 확산의 기폭제가 됐다.
이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장기영은 신분 사회의 특권을 벗어 던지고 기쁜 소식을 온 땅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머슴에게도 예를 갖췄다. 그리고 석천을 신명균과 펜윅에게 맡기고 예수의 종으로 써달라고 간구했다. 펜윅은 자서전을 통해 그들 부자가 1902년 침례를 받았다고 했다. 아마도 금강에서였을 것이다. 한국침례교회사연구소 오지원 소장의 얘기다.
“장석천은 원산의 신명균 집에서 5년간 살며 성경과 한문을 익히고 신앙 훈련을 받았습니다. 명석했던 그는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주요 절수를 암송해 ‘걸어 다니는 성구 색인’이라 불렸을 정도죠. 그는 신명균 등이 세운 공주 성경학원의 첫 입학생이며 1906년 교사(전도사)가 됐습니다.”
교사 장석천은 강경·공주 구역에 파송됐다. 펜윅은 “그가 인도하는 부흥회는 ‘우레의 아들’임을 입증한다. …우리는 가는 도시마다 수백 명의 사람에게 예배당과 뜰을 내주고 교회 밖에서 집회 참가자를 맞이해야 했다. …불과 넉 달 사이에 새 교회가 36개가 더 생길 정도로 강하게 사역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장석천은 1910년 전후로 한 ‘백만구령운동’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고 침례회 성장의 동력이 됐다.
1대 장기영 감로가 아들의 신유 은사에 감사해 기증한 선교선.
한편 장기영은 옛사람을 버리고 온전히 자신을 예수에 맡기고 칠산교회 감로(장로)로 교회를 섬겼다. 그는 선교사들을 위해 선교 배를 헌물했다. 금강변 23개 예비 신자들이 이 칠산교회 나룻배를 타고 성경학습을 다녔다.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고 깨끗하게 된 나아만과 같은 삶이었다. 아들 석천이 공부를 마치고 훗날 칠산교회 목사가 됐다.
1930년대 일제의 신사참배와 동방요배 강요가 이어졌다. “천황 폐하도 불신 시 멸망하는가.” “그렇다.” 침례신도들은 이렇게 거침없이 답했다. 일제는 재림과 천년왕국 사상을 고무한다는 이유로 1942년 침례회 지도자 32명을 함흥형무소에 가뒀다. 장석천도 끌려갔다. 회유와 협박, 고문이 이어졌다.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1년 반 만에 병보석으로 출소해 칠산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재수감되어 원산구치소에 갇혔고 5년 집행유예를 받았다. 교단은 강제 해산됐다. 그사이 칠산교회 예배당도 일제에 의해 헐렸다. 그런데도 성도들은 마을 회당을 빌려 예배를 올렸다. 하지만 장석천은 고문 후유증으로 기력을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
금강과 초가집을 배경으로 한 칠산교회 성도 기념 사진으로 1950년대로 추정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칠산교회도 재건됐다. 장석천도 교단 재건을 위한 3인 목사가 되어 교단 재건 회의를 칠산교회에서 소집했다. 칠산교회와 장 목사가 교단의 구심점이었다. 그는 온 땅에 복음을 전파하고자 했으나 끝내 고문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의 외아들 장일수 목사가 훗날 침례회 총회장 되어 아버지의 뜻을 이었다.
칠산리 주민이 야학 및 빈민 구제에 힘쓴 장일수 목사를 기려 세운 공덕비.
칠산교회 아래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그 옆에 좀처럼 보기 드문 ‘목사 공덕비’가 서 있다. ‘장일수 목사는 일제시대 문맹 퇴치를 위해 야학을 열어 주었고, 해방 후 치안 유지를 위해 의열청년단을 조직했으며 빈민구제와 고학생에게 장학금을 제공하셨다.’
부여·논산=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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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역사여행] “복음 위해 섬 끝까지 가리다”… 소명, 끝섬에 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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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70년대 전북 군산 앞바다 고군산군도 11개섬 복음화에 힘쓴 추명순 전도사를 기리기 위한 활동이 시작됐다. ‘기도의 어머니’로도 불리던 추명순 전도사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이고 목회자가 된 이들은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사진은 1980년대 추 전도사가 섬과 섬 사이를 잇는 노둣길을 따라 전도에 나서는 모습이다. 추명순 전도사 기념사업회 제공
그날 선주가 말했다.
“군산항에서 이곳 끝섬까지 닿으려면 2박 3일 노 저어 와야 할 때도 있었어요. 돛을 단 풍선이었죠. 그때 섬은 바람만 조금 불어도 발이 묶여요. 물도 부족하죠… 사람 살 데가 못 됐어요. 그런데 전도사님이 여자 몸으로 그 많은 섬을 돌며 아픈 사람, 배 곯는 사람, 못 배운 사람 등을 거둬요. 지금 세상에 그런 분이 있을까요?”
지난 한글날 연휴. 전북 군산 앞바다 새만금 방파제는 수많은 관광객으로 교통 체증을 빚었다. 방파제가 군산~부안으로 이어지는데 그 중간쯤 고군산군도 6개 섬이 방파제로 이어졌다. 야미도 신시도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 대장도이다. 천지개벽한 이곳은 상가와 펜션 등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자본의 논리로 돌아가는 관광지가 됐다.
그 여섯 개의 관광지 섬 가까이 네 개의 섬 관리도 방축도 명도 말도가 있다. 버려진 섬처럼 을씨년스럽다. 밤이면 선유도 등 여섯 개의 섬이 휘황찬란한 LED 전등으로 빛을 발하지만 말도 등 네 개 섬은 인적조차 드물다. 섬마다 분교마저 폐교된 지 오래됐고 노인들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경로당 문도 굳게 닫혔다. 그러니 예배당이라고 온전할 리 없다. 11개 섬이 군도를 이루는 고군산의 오늘날 모습이다.
1960년대 초로 추정되는 말도교회 모습.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군도에만 9곳의 교회가 있다. 명도교회 1곳을 제외하자면 나머지 모두가 성결교회다. 1959년 추명순 전도사가 이 고군산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사실상 군도 전체가 복음화됐다. 당시 51세의 전도사가 “섬 끝까지 가리다”며 이곳 끝섬 말도로 들어온 것이다. 추명순은 생전 ‘고군산의 마더 테레사’로 불렸다.
추명순 전도사 (1908~1994)
추명순은 충남 보령시 웅천 출신의 유교 집안 무남독녀였다. 그리고 열다섯에 인근 서천으로 시집을 갔다.
“참으로 지옥이었습니다. 남편의 난봉으로 연놈들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했어요. 관상쟁이한테 가니 정화수 떠놓고 새벽마다 기도하래요. 3년을 했어요. 한데 어느날 일가뻘 할머니 한 분이 ‘그런 기도 아무리 해도 쓸데없다. 예수 믿어야 한다’고 하시대요. 십리를 걸어 서천 비인성결교회를 다녔습니다. 원한을 통회하고 자복했어요.”
하지만 그는 산 채로 묻혀야 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였다. 가끔 한 번 집에 들어온 남편이 그를 마구 때리더니 예수 귀신이 씌었다며 목만 내놓게 한 채 땅속에 묻고 가버린 것이다.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땅이 갈라져요.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교회에 봉사했어요.”
1989년 무렵 말도교회 3대 임봉학 목사와 설립자 추명순.
그렇다고 연단이 그치지 않았다. 1943년 일제의 예배당 강제 폐쇄를 거부하고 제단을 지키다 투옥되고 고문당했다. 게다가 천금보다 귀한 아들이 병으로 죽었다. 남편 집안에선 그를 쫓아냈다. 그는 비인교회 예배당을 방주 삼아 더욱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리고 지방신학교를 나와 전도사가 됐다. 6·25전쟁 후 서천 원두교회, 김제에 교회를 개척했고 충남 안면도교회 등에서 사역했다.
그러던 어느날 군산중동교회 김용은(1918~2009) 목사가 이끄는 부흥회에 참석했다. 김 목사는 전쟁 때 자신이 설립한 정읍 두암교회에서 어머니와 아들, 동생 등 친인척 22명이 좌익에 살해당할 때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사역자였다. 추명순이 그를 찾아갔다. “섬에 가서 개척 전도하겠느냐” 물었다. “복음 전하는 곳이면 섬 끝까지라도 가오리다” 답했다. 끝섬 말도에 그렇게 부임했다.
그렇게 김용은의 섬 선교 지원으로 추명순은 1970년대 중반까지 8개의 교회를 개척하거나 일으켜 세웠다. 섬사람들은 아이가 죽으면 큰 나무 중간에 달아 풍장을 했고, 산모가 산기가 있으면 용왕님이 피를 싫어한다며 마을 밖에 움집으로 내쫓던 시절이었다. 무녀들의 방해와 협박으로 목숨이 위태로울 때도 있었다. 추명순은 기도를 무기 삼아 노를 저어 섬마다 돌았다. 섬 아이들이 누구보다 그를 반겼다. 군산중동교회 등이 보내오는 성경책과 구호 물품이 많은 사람을 구했다.
“전남 신안에 문준경 전도사님이 계신다면 군산 고군산에는 추명순 전도사님이 계십니다. 섬의 기도하는 어머니셨어요. 당신의 몸이 쇠약해져 교역자 안식처인 대전 성락원에 가실 때까지 24년을 헌신하셨어요. 술과 미신으로 새해를 맞고 풍어제를 지내던 섬사람들은 추 전도사님이 들어오고서 예배로 축복해 달라고 바뀌었어요.”
현 말도교회가 있는 마을의 드론 사진. 군산중동교회 서종표 목사 제공
‘추명순 섬선교 행전’에 동행한 서종표 군산중동교회 목사가 이같이 말했다. 서 목사는 선유도교회 오흥덕 목사 등 고군산의 사역자, 교단 및 한국교회와 함께 ‘추명순 전도사 기념사업회’를 조직해 뜻을 이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추명순 주 사역지인 말도의 방치된 경로당 건물을 매입, 기념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1억여원이 모였다. 말도교회는 현재 강원관광대 교수 출신으로 혈액암과 싸우고 있는 김상남 목사와 성도 6~7명이 ‘굳건하게’ 추 전도사의 끝섬 선교의 비전을 이어가고 있다.
말도교회 앞 폐경로당. 추명순 전도사 기념관 예정지다.
하지만 한국교회 쇠퇴가 눈에 보이면서 말도 관리도 방축도 등 ‘섬 밖 섬’ 교회는 유지가 쉽지 않다. 올여름 태풍으로 예배당과 사택이 파손되거나 누수로 망가지면서 임시 처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상황. 그런데도 목회자들은 “영적 스승 추 전도사님 헌신에 비하면 지금의 어려움은 별것 아니다”며 “죽으나 사나 섬 주민들과 함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들은 “추명순 전도사는 우리 생애에 가장 아름다운 한 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말도교회. 선원들을 대상으로 와플·커피 빵 전도를 한다.
고군산열도=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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