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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가첩(院豐家牒) (31)
풍산 김은 (豊山金氏) | 원풍가첩(院豐家牒)
우림 2011.04.03 16:49
우리 풍산 김은 (豊山金氏)
1).본관(本貫) : 우리 金氏의 본관은 豊山(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이다
2).우리의 시조 : 김문적[金文迪]
풍산 김씨(豊山金氏)의 시조(始祖) 휘 문적(諱 文迪)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11세손으로, 풍산현(豊山縣)에 살면서 고려 제23대 고종 때 벼슬을 하여 나라에 공을 세우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어 판상사(判 相使 : 밀직사의 종 2품 으뜸 벼슬)에 올라 풍산백(豊山伯)에 봉 해졌다. 그리하여 우리후손들이 시조(始祖)로 기일세(起一世)하여 관향(貫鄕)을 풍산(豊山)으로 삼게 되었다.
3). 본관 및 시조의 유래
풍산(豊山)은 경상북도 북동쪽에 위치한 고장으로 본래 신라의 하지현(下枝縣)이었는데 영안(永安)으로 고쳐 부르다가 서기 923년(고려태조6)에 순주(順州)로 하였고, 뒤에 풍산(豊山)으로 한 후 안동(安東)에 포함시켰다.
선대의 시복전거(始卜奠居) :시조(始祖) 豊山伯公의 증손인 4세 좌우위보승랑장공신공(左右衛保勝朗將功臣公)휘 연성(諱 鍊成)께서는 계림 (지금의 경주)에서 안동 성릉촌으로 이거하고 오릉촌(지금의 오미리)에 별서를 두어 전거하였으며
송도거주(지금의 개성): 5세(世) 지숙천사공 (智肅川事公 )휘 합(諱盒) 진사 공의 맏자제 6세 進仕 公휘 윤덕(諱 允德 )둘째자제 판종부시사공(判宗簿恃事公) 휘 윤보(諱 允珤), 끝자제 別坐公 휘 윤견(諱 允堅) (별장이라고도 함)과 별좌공의 자제 7세 三司左尹公 휘 안정(諱 安鼎)의 從班門一族에 이르기까지 고려에 벼슬하면서 송도(지금의 개성)에서 살았다.
그 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 초기에 송도에 있는 士族을 한양으로 강제 이주시키므로 그에 따라 모두 한양으로 옮겨 살았다.
이때 7세 三司左尹公 휘 안정(諱 安鼎)의 둘째자제인 8세 직장공(直長公)휘 자순(諱 子純)은 한양 장의동으로 이주하였다.
판종부시사공(判宗簿恃事公) 휘 윤보(諱 允珤)의 후손은 포항 청하와 황해 은율에 입향 세거하고 있다.
別坐公 휘 윤견(諱 允堅) (별장이라고도 함)과 별좌공의 자제 7세 三司左尹公 휘 안정(諱 安鼎)의 후손은 다음과 같이 입향 하였다.
⑴ 한죽헌(寒竹軒)(8세)公 후손의 입향세거 7세 三司左尹公 휘 안정(諱 安鼎)의 맏자제 한죽헌(寒竹軒)휘 자량(諱 子良. 五曹判書歷任.왕자의 란에 연루되어 賜死됨)公의 후손은 경기도 송도(개성)충청 충주. 경기도 장단. 경북 안동등지에 입향 세거하고 있다.
⑵ 7세 三司左尹公 휘 안정(諱 安鼎)의 둘째자제이신 8세 직장공(直長公)휘 자순(諱 子純)은 백씨 한죽헌(寒竹軒)(8세)公의 변고에 크게놀라 화를 피하여 한양 장의동에서 高祖 휘 연성(諱 鍊成)께서 전거한 풍산 오릉동 (지금의 오미리) 으로 내려와 시거하시었다.
그 후 직장공(直長公)의 맡자제 9세 靜庵(諱 從水.진사)公의 후손은 경기김포에 둘째자제 別侍衛公 휘 종석(諱 從石)과 公의 손자 허백당공(虛白堂公)의 후손은 영남북부지방 안동풍산, 봉화, 영주를 비롯한 함북 길주, 경기파주, 평북 벽동, 황해 연백, 충남 당진, 등지에 입향세거하고 있다.
록선청백사 허백당공(錄選淸白史 虛白堂公)께서는 진산군수공(諱 徽孫) 독자로 태어나셔서 정효항(鄭孝恒)의 문하에서 학문(學問)을 배우고, 1497년(연산군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내직으로 승저원 주서공조참판 동지중구 부사에 이르렀고 부수찬(副修撰)에 올라 연산군(燕山君)이 모비(母妃) 능묘(陵廟)의 호를 추존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예천(醴泉)에 유배되었다
그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형조좌랑(刑曹佐郞)·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내고, 경주부윤(慶州府尹)·전라도(全羅道)·황해도 충청도 3도 관찰사(3道觀察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대사간(大司幹 )간쟁과 논박을 맡았던 사간원의 정 3품 으뜸벼슬)을 거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청빈한 관리로서 뒤에 안동(安東)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신암공(愼庵)의 맏자제 휘 진(諱 鎭)은 1549년(명종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字)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가 수찬(修撰)·이조 좌랑(吏曹佐郞) 등을 거치고, 종 1품의 관계인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 등을 지냈으며,
14世 유연당공(悠然堂公) 휘 대현(諱 大賢)은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성 혼(成 渾)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선조(宣祖)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 임진왜란 때 고향에서 향병(鄕兵)을 모아 안집사(安集使) 김 늑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1595년(선조 28) 학문과 덕행(德行)으로 천거되어 찰방(察訪)(성현도: 경산 청도)과 현감(縣監)을 지냈다.
한편 西村公(서촌공) 셋째자제 둔곡공(遁谷公)휘 수현(諱 壽賢)은 1602년(선조 3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광해군(光海君) 때 정주목사(定州牧使)로 나가 통정대부 되었으며 그 후 형조, 병조참의 좌승지 우승지 도승지에 이어 선정(善政)을 베풀어 당상관에 오르고, 승지(承旨)와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후 이조(吏曹)와 예조(禮曹)의 참판(參判)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했다.
한편 유연당공(悠然堂公) 자제 8형제모두가 사마시험에 합격하고 이분들중 오형제분이 문과에 급제하니 인조임금께서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 크게 칭찬(1629)하고 마을이름을 오미동(五美洞)이라 사명하였다.(과거에 司馬榜을 蓮榜, 문과방을 桂榜이라고도 하는데서 나온말이며 또 八司馬五大科의 미칭이기도하다) 맏인 학호 휘 봉조(諱 奉祖)공, 둘째 忘窩 휘 영조(諱 榮祖)공, 넷째 深谷 휘 경조(諱 慶祖)공, 여섯째 鶴沙 휘 응조(諱 應祖)공이 유명했는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학호(鶴湖)공은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전적(典籍)·감찰(監察)·지평(持平) 등을 거쳐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올랐으며, 아우忘窩 휘 영조(諱 榮祖)공과 함께 영남지방에서 문명(文名)을 날렸다.
忘窩 휘 영조(諱 榮祖)공은 광해군(光海君)4년(1612)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와 전적(典籍)을 지낸 후 당시 광해군의 혼란한 정치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10년간이나 은거하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삼사(三司)의 관직을 거쳐 여섯 차례나 어사(御使)로 나갔으며, 뒤에 대사간(大司諫)·부제학(副提學)을 지내고 병조(兵曹)와 예조(禮曹)의 참판(參判)을 역임했으며
그외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절도사(節度使)로 종군(從軍)한 深谷(휘 경조(諱 慶祖)공 부사(府使) 응윤(應胤), 현감(縣監) 시필(時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항일운동가(抗日運動家)로 유명한 종휴(宗烋)·순흠(舜欽)· 지섭(祉燮)·의탁(義倬) 등이 가문의 전통을 이어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독립운동에 몸 바쳤으므로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산김씨(豊山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2,755가구, 11,3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豐山 金氏의 인물
김휘손(金徽孫):1438(세종 20, 무오)∼1509(중종 4, 기사). 본관 豐山. 자는 子美. 從石의 子. 부친의 早沒로 春川朴氏의 가르침속에 스스로의 行身을 잘닦아 그 行檢이 나라안에 소문이 나자 參判 閔孝閱이 그 사람됨을 보고 사위로 삼았음. 孝廉으로 上林院別坐를 거쳐 珍山郡守 재임시는 郡民에게 慈惠를 베풀어 그가 떠난 후에도 백성들이 못내 사모하였다고 함. ▣참고:「墓碣銘」(南袞 撰) 집필:김태안
김양진(金楊震):1467(세조 13, 정해)∼1535(중종 30, 을미). 본관 豐山. 자는 伯起. 호는 虛白堂. 金徽孫의 子. 鄭孝恒 門人. 1489年 진사시 합격. 1497년(연산군 3) 文科 급제. 전라관찰사(1520∼1521)로 부임해서는 祿俸을 털어 가난한 백성을 救恤함에 盡力했으며, 黃海監司(1529)로 부임해서는 각 고을의 弊端을 嚴命으로 一掃하여 善政을 폄으로써 칭송 받았음. 工曹參判 역임. 中宗朝 淸白吏에 錄選됨. 고향 別廟에 不遷位로 奉安됨. 제향:勿溪書院(예천). ▣참고:「神道碑銘」(鄭士龍 撰) 집필:김태안
김의정(金義貞):1495(연산군 1, 을묘)∼1547(명종 2, 정미). 본관 豐山. 자는 公直. 호는 幽敬堂•潛庵. 金楊震의 長子. 1516年 진사시 합격, 1526年(중종 21) 문과에 급제. 曆法에 精通하여 曆書를 편찬한 바 있으며, 깊은 학문으로 書筵에서 종종 絶讚을 받기도 하였음. 仁宗의 승하후 고향으로 돌아와 詩文으로 自適함. 시호:文靖. 저서:『潛庵逸稿』. ▣참고:「神道碑銘」(鄭元容 撰) 집필:김태안
김순정(金順貞):1497(연산군 3, 정사)∼1577(선조 10, 정축). 본관 豐山. 자는 和直, 호는 愼庵. 金楊震의 次子. 1528年 司馬兩試 합격. 榮川(榮州)郡守로 在任時 鄕校를 補修하여 청소년들의 敎學을 振興케 하고, 해마다 養老宴을 열어 老養의 禮를 극진히 함. 軍器寺副正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김태안
김 농(金農):1534(중종 29, 갑오)∼1591(선조 24, 신묘). 본관 豐山. 자는 明甫. 호는 華南. 金義貞의 子. 琴軸을 師事. 薦으로 司憲府 監察•龍宮縣監•禮賓寺判官 역임. 掌隸院司議 在任時에는 해묵은 복잡한 訟事를 公正히 처리하여 주위 사람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음. 저서:『華南集』. ▣참고:「墓碣銘」(鄭侙 撰) 집필:김태안
김대현(金大賢):1553(명종 8, 계축)∼1602(선조 36, 임인). 본관 豐山. 자는 希之. 호는 悠然堂. 農의 子. 成渾 문인. 1582년 생원시 합격. 1592년 壬亂에 鄕兵을 조직. 按執使 金玏 휘하에 들어가 항쟁. 난중에 飢民의 구제와 병자의 규휼에 진력. 1595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省峴道 察訪이 됨. 1601년 山陰縣監 재직시 봉록을 털어 향교를 중건하고 敎學에 힘씀. 증직:吏曹參判. 제향:鷗湖書院(영주). 저서:『悠然堂集』. ▣참고:「墓碣銘」(鄭經世 撰) 집필:이원걸.
김봉조(金奉祖):1572(선조 5, 임신)∼1630(인조 8, 경오). 본관 豐山. 자는 孝伯. 호는 鶴湖. 大賢의 長子. 柳成龍 문인. 柳袗•金坽•金光繼 등과 교유. 1601년 진사시 합격. 1611년 정인홍의 이황과 이언적에 대한 무고사건을 규탄하는 상소에 疏首로 활약. 1613년 增廣文科 급제. 屛山書院 創設主役. 司(도)寺直長을 거쳐 典籍•監察•持平 역임. 壬亂에 郭再祐 휘하의 火旺山城戰鬪에 참여. 제향:鷗湖書院. 저서:『鶴湖集』. ▣참고:「墓碣銘」(金尙憲 撰) 집필:이원걸
김영조(金榮祖):1577(선조 10, 정축)∼1648(인조 26, 무자). 본관 豐山. 자는 孝仲. 호는 忘窩. 大賢의 次子. 金誠一의 사위. 1601년 생원시 합격. 1612년 增廣文科 급제. 承文院正字를 거쳐 典籍에 승진. 광해군 혼정 때문에 10년간 은거. 1623년 인조반정으로 復官. 예조•병조의 낭관 역임. 여섯 차례 御史로 나가 민정을 살핌. 1633년(인조 11) 世子(孝宗) 冊封 奏請副使로 明나라를 다녀옴. 대사간을 거쳐 부제학 역임. 병조•형조•吏曹의 참판 및 三司 역임. 제향:龜江書院(영주). 저서:『記行錄」』•『西征日錄』•『南征日錄』•『忘窩集』. ▣참고:「墓碣銘」(李敏求 撰) 집필:이원걸
김창조(金昌祖):1581(선조 14, 신사)∼1637(인조 15, 정축). 본관 豐山. 자는 孝彦. 호는 藏庵. 大賢의 第3子. 1605년 진사시 합격. 權濬•鄭榮邦과 교유. 광해군 등극후 과거에 응하지 않음. 1621년 영남 유생이 疏를 올려 權奸을 斬하기를 청할 때 公事有司를 맡아 權臣들의 질시를 받음. 병자호란에 의병 安邦俊에게 俸米를 내어 군량을 도움. 三田渡의 굴욕 소식을 듣고 벼슬을 사직하고 돌아오다가 光州 莞洞에서 病死. 저서:『藏庵集』. ▣참고:「墓誌銘」(金應祖 撰) 집필:이원걸
김경조(金慶祖):1583(선조 16, 계미)∼1645(인조 23, 을유). 본관 豐山. 자는 孝吉. 호는 深谷. 大賢의 第4子. 1609년 생원시 합격. 1629년 內侍敎官에 제수됨. 主簿를 거쳐 1633년 宜寧현감에 부임하여 善政을 베품. 1640년 尼山현감 재직시에도 治績을 남김. ▣참고:「行狀」(李光庭 撰) 집필:이원걸
김연조(金延祖):1585(선조 18, 을유)∼1613(광해군 5, 계축). 본관 豐山. 자는 孝錫. 호는 廣麓. 大賢의 第5子. 柳成龍 문인. 柳袗과 교유. 1610년 진사시 합격. 1612년 문과 급제. 承文院 正字역임. 29세를 일기로 요절. 저서:『廣麓集』. ▣참고:「墓碣銘」(金尙憲 撰) 집필:이원걸
김응조(金應祖):1587(선조 20, 정해)∼1667(현종 8, 정미). 본관 豐山. 자는 孝徵. 호는 鶴沙. 大賢의 第6子. 金誠一의 孫婿. 柳誠龍와 張旅軒의 문인. 1613년 생원시 합격. 광해조 때 입사할 뜻을 두지 않고 爲己之學에 힘씀. 1623년 謁聖文科 급제. 내외 관직을 거쳐 密陽府使 재임시에 拱辰館과 禮林講堂을 지어 敎學에 힘씀. 漢城府右尹에 이름. 제향: 勿溪書院(예천)•義山書院(영주). 저서:『追遠錄』•『鶴沙集』•『辯誣錄』•『四禮問答』. ▣참고:「墓誌銘」(李世澤 撰) 집필:이원걸
김염조(金念祖):1589(선조 22, 기축)∼1652(효종 3, 임진). 본관 豐山. 자는 孝修. 호는 鶴陰. 大賢의 第7子. 壽賢에게 출계. 1635년 생원시 합격. 여러 관직을 거쳐 宗親府 典籤에 이름. 1636년 果川縣監 재직시, 관악산에서 오랑캐와 대치•항전하여 과천을 사수. 1639년 定山郡守 재임시 향교를 중수하여 인재양성에 주력. 1641년 安山郡守 재임시 흉년을 만난 군민들에게 녹봉을 나누어 구휼함. 증직:通政大夫 承政院左承旨. ▣참고:「墓碣銘」(李光庭 撰) 집필:이원걸
김숭조(金崇祖):1598년(선조 31, 무술)∼1632(인조 10, 임신). 본관 豐山. 자는 孝達. 호는 雪松. 大賢의 第9子. 1624년 진사시 합격. 1629년 문과 급제. 1632년 承政院注書에 제수되어 仁祖의 총애를 받음. 痘疫에 걸리자 仁祖가 內醫를 명하여 치료케 했지만 35세의 일기로 죽음. 저서:『雪松集』. ▣참고:「墓誌銘」(金冑燮 撰) 집필:이원걸
김시침(金時忱):1600(선조 33, 경자)∼1670(현종 11, 경술). 본관 豐山. 자는 終卿. 호는 一慵齋. 榮祖의 子. 외조는 義城 金誠一. 1635년 생원시 합격. 西氷庫別提에 제수됨. 병자호란 이후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 저서:『一慵齋集』. ▣참고:「墓碣銘」(權相圭 撰) 집필:이원걸
김시설(金時卨):1602(선조 35, 임인)∼1667(현종 8, 정미). 본관 豐山. 자는 舜卿. 慶祖의 子. 1636년 천거로 武科에 오름. 長鬐를 비롯한 14곳의 縣監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품. 1650년 암행어사 金弘郁과 1654년 경상도관찰사 許積이 그의 治績에 대해 狀啓를 올려 孝宗으로부터 諭書와 熟馬 한 필을 받음. 鐵山都護府使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정수(金鼎壽):1636(인조 14, 병자)∼1693(숙종 19, 계유). 본관 豐山. 자는 台老. 延祖의 손자. 時佐의 子. 1673년(현종 14) 생원시 합격. 堤川縣監•忠州鎭管兵馬節制都尉 역임. 제천에 善政碑가 있음.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김휘벽(金輝璧):1646(인조 24, 병술)∼?. 본관 豐山. 자는 叔章. 호는 梅石. 時止의 子. 1681년(숙종 7) 진사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김휘봉(金輝鳳):생몰년 미상. 본관 豐山. 자는 德章. 무과 급제. 龍驤衛 副司勇 역임. ▣참고:『豐山金氏譜』 집필:권진호
김근신(金謹臣):1651(효종 2, 신묘)∼?. 본관 豐山. 자는 君弼. 時常의 子. 1675년(숙종 원년) 진사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김 간(金侃):1653(효종 4, 계사)∼1735(영조 11, 을묘). 본관 豐山. 자는 士行. 호는 竹峯. 時卨의 손자. 弼臣의 子. 외조는 禮安 李天標. 妻父는 全義 李基遠. 李惟樟 문인. 權斗經•李栽•趙德鄰•李浹•安鍊石 등과 道義交를 맺음. 1693년(숙종 19) 진사시 합격. 1710년(숙종 36) 문과 급제. 1701년(숙종 27) 金長生의 文廟從祀를 반대하는 상소에 疏首로 추대됨. 1728년(영조 4) 이인좌 난에 鄕人들과 倡義. 특히 察訪시절에 流弊를 제거하여 치적을 쌓음. 黃山道察訪•禮曹正郞 역임. 제향:洛淵書院. 저서:『竹峯集』. ▣참고:「墓碣銘」(權相圭 撰) 집필:권진호
김 성(金성):1661(현종 2, 신축)∼?. 본관 豐山. 자는 君錫. 甲壽의 子. 1715년(숙종 41) 생원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김 정(金정):1670(현종 11, 경술)∼1737(영조 13, 정사). 본관 豐山. 자는 士達. 호는 蘆峯. 應祖의 증손. 輝鳳의 子. 외조는 奉化 琴聖徽. 1696년(숙종 22) 진사시 합격. 1708년(숙종 34) 문과 급제. 兵曹正郞•司諫院正言•濟州牧使 역임.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반란에 副將으로 추대됨. 그 후 揚武原從勳 一等에 책록됨. 외직에 있을 때는 民風을 혁신하고 民瘼을 제거하는 등 治績을 쌓음. 淸白吏에 錄選됨. 제향:梧川書院(봉화)•象賢祠(제주). 저서:『蘆峰集』. ▣참고:「行狀」(權載大 撰) 집필:권진호
김서운(金瑞雲):1675(숙종 1, 을묘)∼1743(영조 19, 계해). 본관 豐山. 자는 虞徵. 호는 喜懼齋. 侃의 子. 부모에 대한 孝善이 극진하여 만년에 아버지 묘소 아래 한 칸 집을 얽어 거처하며 손수 주위에 소나무를 심었는데, 오가는 사람들이 ‘효자솔’이라고 함. 李山斗가 그의 篤行에 감복하여 ‘喜懼齋’라는 편액을 써 주어, 결국 자신의 號로 삼았는데, ‘어버이의 생존을 기뻐하면서 한편 그 노쇠함을 두려워한다’는 『論語』 구절에서 취한 것임. 증직:司憲府持平. ▣참고:「行狀」(柳台佐 撰) 집필:권진호
김서봉(金瑞鳳):1677(숙종 3, 정사)∼?. 본관 豐山. 자는 來徵. 佫의 子. 1723년(경종 3) 생원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김서정(金瑞鼎):1677(숙종 3, 정사)∼?. 본관 豐山. 자는 來徵. 佫의 子. 生父는 侹. 1723년(경종 3) 생원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김달룡(金達龍):1683(숙종 9, 계해)∼?. 본관 豐山. 자는 鱗徵. 호는 綯軒. 儉의 子. 1723년(경종 3) 생원시 합격. ▣참고:『司馬榜目』•『嶠南誌』 집필:권진호
김서한(金瑞翰):1686(숙종 12, 병인)∼?. 본관 豐山. 자는 遠徵. 侃의 子. 1714년(숙종 40) 생원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김서천(金叙天):1690(숙종 16, 경오)∼?. 본관 豐山. 자는 士常. 偍의 子. 1721년(경종 1) 생원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김서화(金瑞華):1692(숙종 18, 임신)∼?. 본관 豐山. 자는 叔美. 俅의 子. 1738년(영조 14) 생원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김서호(金瑞虎):1694(숙종 20, 갑술)∼?. 본관 豐山. 자는 靈徵. 侹의 子. 1727년(영조 3) 진사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김서도(金瑞圖):1694(숙종 20, 갑술)∼?. 본관 豐山. 자는 羲祥. 偀의 子. 1735년(영조 11) 생원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김서일(金瑞一):1694(숙종 20, 갑술)∼1780(정조 4, 경자). 본관 豐山. 자는 用萬. 호는 戰兢齋. 慶祖의 玄孫. 侹의 子. 李山斗•李景翼과 교유. 1727년(영조 3) 진사시 합격. 童蒙敎官•資憲大夫•同知中樞府事 역임. 經傳을 깊이 연구. 학문탐구와 후학양성으로 일생을 마침. 저서:『戰兢齋集』.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서구(金叙九):생몰년 미상. 본관 豐山. 자는 士常. 숙종 때 사마시 합격. ▣참고:『豐山金氏譜』 집필:권진호
김좌원(金左源):1711(숙종 37, 신묘)∼?. 본관 豐山. 자는 伯逢. 敍天의 子. 1754년(영조 30) 증광생원시 합격. ▣참고:『司馬榜目』 집필:권진호
김필원(金必源):1722(경종 2, 임인)∼1770(영조 46, 경인). 본관 豐山. 자는 幼達. 호는 三衢堂. 榮祖의 5대손. 瑞庭의 子. 1756년(영조 32) 생원시 합격. 1758년(영조 34) 문과 급제. 承政院注書•司憲府持平 역임. ▣참고:『國朝榜目』 집필:권진호
김서복(金瑞復):1743(영조 19, 계해)∼1793(계축, 정조 17). 본관 豐山. 자는 景心. 호는 三陽齋. 榮祖의 玄孫. 倎의 子. 1777년 알성 문과 장원 급제. 홍문관 正字•金郊察訪•成均典籍을 거쳐 吏曹佐郞에 오름. ▣참고:「傳」 집필:이원걸
김상온(金相溫):1760(영조 36, 경진)∼1812(순조 12, 임신). 본관 豐山. 자는 友直. 호는 避烟棲. 應祖의 후손. 長源의 子. 1789년 司馬兩試 합격. 1809년 增廣文科 及第. 典籍 역임. 저서:『避烟棲集』.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종규(金宗奎):1765(영조 41, 을유)∼1830(순조 30, 경인). 본관 豐山. 자는 聖文. 호는 獨山. 侃의 玄孫. 相辰의 子. 1810년 생원시 합격. 1827년 문과 급제. 전적•사헌부감찰•사간원정언 역임. 유학 흥기를 자기의 임무로 여겨 도림사에서 近思錄을 강의. 신계서당에서 중용•대학을 강론. 저서:『獨山集』. ▣「墓碣銘」(李晩佐 撰) 집필:이원걸
김종휴(金宗烋):1783(정조 7, 계묘)∼1866(고종 3, 병인). 본관 豐山. 자는 聖浩. 호는 書巢. 應祖의 後孫. 相溫의 子. 1822년 생원시 합격. 1855년 영남 유생들이 장헌세자 추존을 청하는 萬人疏를 草함. 저서:『書巢集』. ▣참고:「行狀」 집필:이원걸
김중하(金重夏):1784(정조 8, 갑진)∼1860(철종 11, 경신). 본관 豐山. 자는 穉常. 호는 桐巢. 榮祖의 後孫. 宗鳳의 子. 1835년 증광문과 급제. 전적•정언•사헌부지평 역임. 1852년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이어 敦寧府都正•병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 저서:『桐巢集』. ▣참고:「墓碣銘」(許傳 撰) 집필:이원걸
김종태(金宗泰):1800(정조 24, 경신)∼1883(고종 20, 계미). 본관 豐山. 자는 季鎭. 호는 翠軒. 정의 玄孫. 相定의 子. 1837년 생원시 합격. 1850년 문과 급제. 홍문관부수찬•부교리•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兵曹參判 역임. 저서:『翠軒遺稿』. ▣참고:『國朝榜目』 집필:이원걸
김규운(金奎運):1801(순조 1, 신유)∼1881(고종 18, 신사). 본관 豐山. 자는 景會. 호는 梧村. 榮祖의 後孫. 重夏의 子. 1850년 문과 급제. 대사간•대사헌•홍문관제학을 거쳐 刑曹參判 역임. 저서:『梧村集』. ▣참고:『國朝榜目』 집필:이원걸
김두흠(金斗欽):1804(순조 4, 갑자)∼1877(고종 14, 정축). 본관 豐山. 자는 文一. 호는 洛厓. 慶祖의 後孫. 重佑의 子. 1843년과 1866년 문과에 두차례 급제. 지평•정언•수찬•同副承旨 역임. 玄風縣監 재직시 몸소 재해 현장을 찾아 실정을 살피고, 향교를 중수하여 유생들에게 학업을 권장하여 文風을 크게 떨침. 교리로 있을 때 三政矯救疏를 올려 三政의 문란으로 인한 극심한 폐단을 밝히고 그 대책을 제시함. 저서:『洛厓集』.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순흠(金舜欽):1840(헌종 6, 경자)∼1908(융희 2, 무신). 본관 豐山. 자는 穉華. 호는 竹圃. 慶祖의 後孫. 重瓘의 子. 1896년 이강년과 함께 항일투쟁을 하다가 이듬해 해산함. 1905년 일제의 침략행위와 乙巳五賊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討五賊文」을 지어 전국의 유림들에게 배포함. 1907년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진력함. 1908년 일본 관헌들이 세금을 거두어 일본군에 납부하자 부당성에 항거하여 22일간 단식 후 순국함. 추서:건국포장(1977년). 저서:『竹圃實記』.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규회(金奎會):1850(철종 1, 경술)∼1913. 본관 豐山. 자는 啓文. 榮祖의 後孫. 重鉉의 子. 1901년 무렵 예천 지방에 큰 가뭄과 흉년이 들자 앞장서서 관계 기관에 진정하여 면민들의 세금을 감면토록 주선함. 死後 1915년 4월에 면민이 공을 기려 碑를 수립함.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면수(金冕秀):1854(철종 5, 갑인)∼1930. 본관 豐山. 자는 彛卿. 호는 聽山. 奉祖의 後孫. 洛龍의 子. 羅州郡守 역임. 저서:『聽山遺稿』.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낙기(金洛耆):1855(철종 6, 을묘)∼1910(융희 4, 경술). 본관 豐山. 자는 英老. 호는 可石. 慶祖의 後孫. 宇欽의 子. 義城郡守 역임. 豐山金氏의 事蹟을 읊은 歌辭 「春遊曲」을 창작.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인흠(金寅欽):1857(철종 8, 정사)∼1939. 본관 豐山. 자는 羲賓. 호는 石隣. 慶祖의 後孫. 重佑의 子. 1905년 봉화군수 재직시 춘양면 석현동에서 해마다 바치는 토산품 닥을 면제시킴. 이듬해 동민들이 선정비를 세움. 1907년 상주군수 재직시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과 민원을 적극 해결. 奎章閣副提學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낙세(金洛世):1869(고종 6, 기사)∼1944. 본관 豐山. 자는 世叔. 호는 河菴. 崇祖의 後孫. 翼欽의 子. 1911년부터 1943년까지 32년간 尙州郡 銀尺面 于基里에서 東學敎堂을 개설하여 副敎主가 되어 자신이 저술한 각종 자료로 포교활동과 항일자주독립•민족정신교육에 전력함. 1943년 10월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1년 6월의 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1944년 11월 옥중에서 순국함. 저서:『河菴日記』.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병기(金秉夔):1871(고종 8, 신미)∼1910(융희 4, 경술). 본관 豐山. 자는 敬一. 慶祖의 後孫. 洛麟의 子.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여 문장력이 뛰어나 고종의 측근에서 근무하도록 발탁됨. 侍從院侍從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낙헌(金洛憲):1874(고종 11, 갑술)∼1919. 본관 豐山. 자는 致尹. 寅欽의 子. 1895년 法部主事에 임명됨. 刑事課長 겸 檢事課長•嘉善大夫 法部刑事局長 역임. 1905년 法官養成所長으로 法官을 양성함. 그 해 9월에 『刑法大典』을 편찬하여 韓國法祖의 명성을 얻음.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병도(金秉度):1875(고종 12, 을해)∼1947. 본관 豐山. 자는 星彦. 호는 儉山. 崇祖의 後孫. 洛龜의 子. 法學에 통달하여 고종의 특명으로 법관에 발탁됨. 1908년 慶興裁判所 判事•辯護士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응섭(金應燮):1878(고종 15, 무인)∼1957. 본관 豐山. 자는 景章. 호는 東田. 慶祖의 後孫. 秉璿의 子. 漢城法官 養成所 졸업. 咸興裁判所 檢事 역임. 경술국치후에 사퇴하고 辯護士가 됨. 1919년 上海로 망명하여 上海 臨時政府法務次長. 1922년 滿洲西露軍政署法務司長. 1927년 吉林省 韓民族勞動黨 조직. 1928년 在滿農民同盟代表 역임. 1931년 滿洲 吉林省에서 日警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됨. 1933년 국내에서 지하독립운동을 전개. 1948년 3월 南北協商次 金九와 동행.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병필(金秉泌):1879(고종 16, 기묘)∼1930. 본관 豐山. 자는 惠蒙. 崇祖의 後孫. 洛書의 長子. 盈德郡守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지섭(金祉燮):1884(고종 21, 갑신)∼1928. 본관 豐山. 자는 衛卿. 호는 秋岡. 崇祖의 後孫. 秉斗의 子. 상주보통학교 교원. 錦山 裁判所 서기로 재직 중 1910년 국치로 사직하고 귀향함. 1920년 중국 上海로 망명. 1922년 의열단에 加盟. 1924년 1월 6일 개최키로 된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는 요인을 암살코자 폭탄 3개를 지니고 上海에서 日本 석탄상선에 몰래 승선. 일본측의 회의 개최 연기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일본 皇居인 二重橋 위에서 폭탄 3개를 투척. 모두 불발로 실패. 일경에게 체포됨. 1928년 2월 20일 일본 千葉刑務所에서 순국. 추서:건국공로훈장(1962년). 저서:『秋江逸稿』. ▣참고:『獨立有功者功勳錄』 집필:이원걸
김재봉(金在鳳):1891(고종 28, 신묘)∼1944. 본관 豐山. 자는 周瑞. 호는 槿田. 慶祖의 後孫. 文燮의 子. 1908년 大邱啓聖學校卒業. 1921년 조선독립단 문서전달 혐의로 징역 6월의 옥고를 치른 후 滿洲로 망명. 1922년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 러시아 革命者大會에 참가하여 중앙위원으로 선임. 1923년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朝鮮共産黨 創黨을 주도함. 1925년 4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주도하고 一次朝鮮共産黨責任秘書로 選任됨. 제1차 조공검거사건 당시 체포되어 징역 6년의 옥고를 치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만수(金萬秀):1893(고종 30, 계사)∼1924. 본관 豐山. 자는 會一. 慶祖의 後孫. 洛雲의 子. 嶧洞義塾에서 수학. 1915년에 만주로 망명. 李相龍의 휘하에서 군사 지식과 기술을 습득. 1920년 이상룡 군정부의 의용군에 입단. 1922년 군정부의 헌병 단원. 1923년 만주•장춘•하얼빈 등지의 日人을 토벌코자 崔炳鎬•柳基東과 함께 계획을 세움. 1924년 4월 8일에 日警 10여명과 대치해 총격을 벌여 일경의 우두머리 國吉을 사살하고 4월 9일 최병호•류기동과 함께 순국. 추서:건국공로훈장(1963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완섭(金完燮):1898(광무 2, 무술)∼1975. 본관 豐山. 자는 致吉. 호는 晩松. 秉度의 子. 日本 明治大 졸업. 辯護士試驗 합격. 법학박사. 1946년 大檢檢察官 및 成均館大學 敎授. 1949년∼1952년 審計院次長. 辯護士. 高麗大學校 출강. 藏書一萬餘卷을 고려대학교에 기증함.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구현(金九鉉):1900(광무 4, 경자)∼?. 본관 豐山. 자는 範疇. 慶祖의 後孫. 在悳의 子. 普城專門 중퇴. 1919년 3월 17일 예안 장날의 만세 운동에서 주재소를 점령하여 경찰직원 3명을 포로로 앞세워 만세 시위를 전개. 안동장터에서 시위중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름. 추서:건국훈장 애족장(1995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병순(金秉洵):1901(광무 5, 신축)∼1974. 본관 豐山. 자는 惠叔. 崇祖의 後孫. 洛書의 子. 大邱高普 졸업. 1948년 內務部 邑面係長. 1952년 釜山市 內務局長. 1954年 釜山市 副市長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영섭(金暎燮):1901(광무 5, 신축)∼1975. 본관 豐山. 冕秀의 子. 京畿高普 졸업. 京城醫學專門 중퇴. 全南海南郡守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헌섭(金憲燮):1901(광무 5, 신축)∼1986. 본관 豐山. 자는 致章. 호는 東溟. 崇祖의 後孫. 秉穆의 子. 1919년 五陵學術講習會創設 主役. 日本 明治大 졸업. 1945년 大田地法 判事. 1953년 大邱高法 部長判事. 1960년 光州地法院長. 1969년 大田 辯護士會長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용섭(金庸燮):1902(광무 6, 임인)∼1942. 본관 豐山. 자는 時中. 崇祖의 後孫. 秉澈의 子. 大邱高普 졸업. 1922년부터 尙州普通學校訓導. 상주모서보통학교 校長事務取扱(署理) 역임. 1940∼1942년 金泉甑山初等學校 校長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진섭(金晉燮):1903(광무 7, 계묘)∼?. 본관 豐山. 호는 聽川. 冕秀의 子. 日本 法政大 졸업. 成大敎授. 6•25 당시 납북됨. 저서:『人生禮讚』•『生活人의 哲學』•『敎養의 文學』•『聽川隨筆 評論集』이 있음.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의탁(金義鐸):1904(광무 8, 갑진)∼1954. 본관 豐山. 一名 芝鉉. 자는 士馨. 호는 究峰. 慶祖의 後孫. 在璇의 子. 日本 法政大 졸업. 大衆運動社 社員을 거쳐 1923년 安東地方農民會를 지도함. 1925년 朝鮮文壇社 講演 事件으로 日警에 체포됨. 저서:『興國方途』•『우리 國民性 大建設』.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병국(金秉國):1905(광무 9, 을사)∼1940. 본관 豐山. 자는 聖韶. 崇祖의 後孫. 洛淵의 子.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大阪에서 막노동을 하며 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 大阪朝鮮勞動組合東南支部 執行委員으로 활약하다가 1926년 일경에게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름. 1930년 또 체포된 후 탈옥을 시도하다가 5년형을 선고받아 2년간의 옥고를 치름. 1940년 재차 체포되어 日警의 모진 구타로 사망함.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병문(金秉汶):1905(광무 9, 을사)∼1959. 본관 豐山. 자는 惠道. 崇祖의 後孫. 洛書의 子. 滿洲師道學校 수료. 1948년 豊北初等學校 校長. 1951년 豊山初等學校 校長. 1956년 平恩初等學校 校長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원재(金元在):1906(광무 10, 병오)∼1994. 본관 豐山. 자는 汝善. 호는 桂庭. 奉祖의 13대손. 昌燮의 子. 嶠南學校에서 修學. 1983년부터 安東 鄕校 顧問 및 元老會員. 1983년부터 安東 鄕校 復設推進委員會長으로서 1987년 鄕校를 현재(安東市 松川洞)의 자리에 移基重建하는데 기여. 安東大學校 設立 推進委員長 및 陶山書院 院長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정재(金定在):1907(융희 1, 정미)∼1979. 본관 豐山. 자는 公安. 慶祖의 後孫. 履燮의 子. 日本大專門部 졸업. 1941년 滿洲國行政科高等試驗 합격. 1953년 포항여자중•고교장. 1963년 봉화고등학교교장. 1967년 영해중•고등학교교장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영재(金寧在):1907(융희 1, 정미)∼?. 본관 豐山. 자는 公伯. 慶祖의 後孫. 奎燮의 子. 京城帝大 졸업. 日本 高等文官試驗 합격. 1946년 서울地檢 檢事. 1949년 서울地檢 次長檢事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하섭(金河燮):1908(융희 2, 무신)∼1980. 본관 豐山. 자는 天卿. 호는 西坡. 崇祖의 後孫. 秉泌의 子. 國民大 졸업. 高興郡守. 1953년 大邱副市長. 1959년 保健社會部 總務課長. 1961년 社會事業指導者訓鍊院長 理事官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보섭(金普燮):1911∼1942. 본관 豐山. 호는 石泉. 冕秀의 子. 光州高普 졸업. 1929년 11월 3일(광주고보 5학년때) 光州學生事件 때의 主動人物로 일경에 체포되어 4개월간 拘禁됨. 1930년 光州學生秘密結社(讀書會) 事件으로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름. 추서:건국훈장 애족장(1990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경섭(金經燮):1915∼1970. 본관 豐山. 자는 華卿. 崇祖의 後孫. 秉濟의 子. 延禧專門 중퇴. 總警. 1961년 安東警察署長. 1962년 蔚山警察署長. 1967년 尙州警察署長을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시섭(金時燮):1916∼1980. 본관 豐山. 자는 春甫. 崇祖의 後孫. 秉準의 子. 日本 聖峰中學校 4년 중퇴. 1950년 農林部 事務官. 1955年 審計院 檢査官. 1965년∼1972년 서울市 企劃專門委員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우섭(金佑燮):1918∼1979. 본관 豐山. 자는 預卿. 崇祖의 後孫. 秉讚의 子. 尙州農蠶學校 졸업. 1970년 韓一銀行忠州支店長. 1972년∼1976년 (株)東洋고무産業社長•(株)풍영화성社長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창현(金昌鉉):1930∼1992. 본관 豐山. 奉祖의 後孫. 在淵의 子. 서울대 졸업. 1969년 齒醫學 博士.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김재성(金在晟):1935∼1986. 본관 豐山. 崇祖의 後孫. 理事官 河燮의 子. 延世大 졸업. 外務考試 합격. 1974년 駐英國大使館參事官. 1980년 外務部 情報文化局長. 1981년 駐요르단 全權大使 역임. ▣참고:문중자료(金在億) 집필:이원걸
효부김씨(孝婦金氏):생몰년 미상. 본관 豐山. 宗道의 딸. 裵達周의 처. 시집간지 한달 만에 남편이 죽자 시부모 봉양 때문에 죽지 못하고 정성을 다해 시부모를 봉양함. 權璉夏가 傳記를 지음. 참고:『嶠南誌』 집필:이원걸
열녀김씨(烈女金氏):생몰년 미상. 본관 豐山. 柳弘春의 처. 남편이 관의 곡식을 축냈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욕된 형을 받고 歸家하자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 김씨가 혈서를 써 상경하여 錚鳴을 울리고 그 진상을 조정에 고하여 남편의 누명을 푼 다음 자결함. 1793년(정조 17) 정려가 내려짐. 참고:『嶠南誌』 집필:이원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