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공동체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준 프랑스 철학자 -
엠마누엘 무니에(Emmanuel Mounier)

엠마누엘 무니에(Emmanuel Mounier)는 1905년 5월 1일에 프랑스의 그로노블(Grenoble)에서 태어났으며, 1950년 3월 22일 44(45)세의 나이로 샤테나이-말라브리(Châtenay-Malabry)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철학 잡지 에스프리(la revue Esprit)의 창시자이며 프랑스의 인격주의 운동(le mouvement du personnalisme)의 출발점이 된 철학자이다.
무니에는 1924년에서 1927년까지 그로노블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는데, 여기서 쟈크 슈발리에(Jacques Chevalier)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끊임없이 추구하는 철학적 탐구의 정신을 물려받았다. 2차 대전 당시 슈발리에는 무니에로 하여금 ‘철학교수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결코 잊어버리지 않토록 하는 역할을 하였다. 아직 학생의 신분으로 무니에는 슈발리에가 창시하고 리용(Lyon)의 빅토르 까를리앙(Victor Carlhian)이 후원한 「공동연구 그룹」에서 철학자 쟝 귀통(Jean Guitton)의 비서 역할을 하였다. 22세 되던 해인 1927년에 무니에는 슈발리에의 지도하에 「데카르트 철학 안에서 인간중심주의와 신중심주의 갈등」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DEA학위를 받게 되는데, 이 논문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무니에의 첫 철학적 저작이 되었다. 이후 그는 소르본느에서 철학교사 자격시험(agrégation)을 준비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철학교사 자격증을 획득한 무니에는 이차세계대전 중에 리옹의 파흐 고등학교(lycée du Parc), 비엔느의 호벵(lycée Robin) 고등학교 등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그로노블의 안제르(Angers) 고등학교와 샤테나이-말라브리 고등학교는 현재 그의 이름을 따 ‘엠마누엘 무니에’ 고등학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사상적으로 그는 파리에서 가장 먼저 레옹 브랑쉬빅의 관념론과 마주하였으나, 결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였고, 이는 그로 하여금 헨리 베르그송을 만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스승 슈발리에의 권유로 뿌게(Pouget)신부를 자주 방문한 무니에는, 그를 통해 당시 프랑스의 민주시민운동의 소명을 가지고 있었던 현대 토미스트 자크 마리텡(Jacques Maritain)을 알게 된다. 그리고 쟈크 마리텡과의 만남은 철학자로서의 그의 평생의 소명을 가지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1930년 초 ‘20세기 인간의 위기’에 맞서 인격주의자들의 지향성에 대한 반성과 연구가 붐을 일으키면서 ‘새로운 질서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 운동의 일환으로 무니에는 「철학 잡지 에스프리(la revue Esprit)」를 창간하였다. 이차세계대전까지 무니에는 “인격주의와 공동체주의 혁명”의 제 방향들을 심화시키는 데에 집중하였는데, 이러한 운동은 당시에 유행하였던 ‘파시즘’이나 ‘전체주의’ 혹은 ‘스탈린주의’ 등에 빠지지 않고 ‘유럽의 무질서’를 치유하는 일이 주목적이었다. 비시(Vichy)정부의 ‘젊은 프랑스 만들기’라는 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철학 잡지 ‘에스프리(정신)’를 발간하였으나, 1941년부터는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그해 8월에 ‘정신’지는 출간 금지를 당하였다.
전쟁 이후에 그는 다양한 인물들과 접촉하였으며,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에 참여하였고, 유럽의 ‘재-창조’의 진정한 출발점을 모색하는데 주력하였다. 1948년에는 새 독일 정부와 교류하기 위한 ‘프랑스 위원회’가 창설되었는데, 무니에는 여기서 총 비서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무니에의 인격주의는 이차세계대전 이후에 찢겨지고 부서진 유럽사회의 재건을 위해 그 근원적인 지반이 될 철학적 이념을 제공하고자 하는 일종의 사회적, 정치적인 소명에 의해서 출발하였다.
무니에의 ‘인격주의’는 ‘공동체적 인격주의(personnalisme communautaire)’라고도 불리는데, 이 사상은 하나의 체계도 아니며 그렇다고 ‘도그마’는 더욱 아니다. ‘에프프리’지의 책임자를 맡았던 장-마리 도메나쉬(Jean-Marie Domenac)는 인격주의를 ‘철학적 메트릭스(matrice philosophique)’라고 불렀다. 도메나쉬가 말하고자 하는 ‘철학적 메트릭스’란 하나의 중요한 철학적 관념으로 이것을 중심으로 다른 모든 사상들이 교류하고 소통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공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럽인들이 새롭게 건립하고자 하는 세상에 대한 반성의 공간으로서 이 공간에서 크리스천, 이슬람인, 유다인, 불가지론자, 무신론자 등이 서로 소통하고 교류가 가능한 그러한 정신적인 지대인 것이다. 오늘날 27개의 유럽국가들이 하나의 헌법 아래 유럽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엠마누엘 무니에의 철학적 매트릭스로서의 ‘인격주의’는 새로운 유럽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기여를 하였음이 분명하다. 인격주의는 비록 크리스천의 믿음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지만, 크리스천의 사상이 아니다. 인격주의는 인류의 공동의 가치와 다양한 관점으로부터 대화와 소통을 가능하게 할 형제애를 창조하고자 하는 철학적 이념이다.
엠마누엘 무니에는 44(45)세의 나이로 죽었지만, 그가 창시한 ‘에스프리’와 ‘인격주의’와 관련된 그의 저작들은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유럽 전체가 그의 정신에 영향을 받았고 유럽을 하나의 공동체로 형성하는데 도움을 받고 있다. 그의 정신은 오늘 날 여전히 그의 정신을 이어 받은 프랑스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발전 되고 있는데, 그 후세들은 ‘에티엔 보른(Étienne Borne), 쟝-라크르와(Jean Lacroix), 가브리엘 마디니에(Gabriel Madinier), 요셉 비알라토(Joseph Vialatoux) 등이다.
= 엠마누엘 무니에의 저작들(출간 년도 순) =
『샤를르 뻬기의 사유』, Plon, coll. « Roseau d'Or »,1931.
『인격적 그리고 공동체적 혁명』, Paris, Éd. Montaigne,1934.
『자본주의의 속성과 인간의 속성』, Desclée de Brouwer, 1936.
『인격주의를 위한 문제제기』, Éd. Montaigne,1936.
『평화주의자 혹은 전쟁주의자』, Paris, Éditions du Cerf,1939.
『크리스천의 대응』, Neuchâtel, Éditions de la Baconnière,1944.
『단편들』, Fribourg, L.U.F., coll. « Le Cri de la France »,1945.
『조건 지워진 자유』, Paris, Éditions du Seuil,1946.
『성격에 관하여』, Paris, Éditions du Seuil,1946.
『실존주의 입문』, Paris, Denoël,1946.
『인격주의란 무엇인가?』, Paris, Éditions du Seuil,1947.
『검은 아프리카의 각성』, Paris, Éditions du Seuil,1948.
『20세기의 작은 공포』, Paris, Éditions du Seuil,1948.
『크리스천성의 불』, Paris, Éditions du Seuil, 1950.
『힘겨운 확실성들』, Paris, Éditions du Seuil, 1951.
『무니에와 그의 후예들』 (서간 및 철학노트 모음 집), Paris, Éditions du Seuil,1956.
첫댓글 너무 젊은 나이에 새상을 떠나서 아쉽군요,,,,,좋은 분 소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