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사상 최대 히트 곡 ‘목포의 눈물’
글 : 하일사랑
1. "목포의 주인공’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타향살이‘(1934)로부터 열려졌던 본격적인 트로트 가요 시대는
‘목포의 눈물’(1935)에 와서 개화하여 우리 가요의 전성기, 황금기를
있게 했다. 뿐만 아니라 ‘목포의 눈물’은 그 후 70여 년간 계속되는
트로트 중심의 대중가요 시대가 있게 했고, 항상 트로트가 우리 가요의 중심에 있게 했던 상징으로 우뚝 서 있었다.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로 된 단조 트로트
‘목포의 눈물’은 이제 모든 국민의 가슴에 새겨진 민족의 노래가
된지도 오래되었지만, 특히 목포에서는 이 노래를 ‘목포애국가’라고도
할 정도로 애창되고, 호남에 베이스를 둔 해태 타이거스
(지금은 기아 타이거스)의 응원가가 될 정도로 호남인의 정신적
기둥이 되는 노래이었고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곡가 손목인이 일본에서 돌아와 얼마 안 된 시기인 ‘58년,
’목포의 눈물‘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의 한 에피소드는
목포 사람들이 ‘목포의 눈물’ 을 어느 정도로 깊이 인식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한 예로 볼 수 있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영화 ‘목포의 눈물’은 하한수가 감독하고 눈물의 여왕 전옥(본명 전덕례)이 주연했으며, 손목인이 주제음악을 맡았던 영화였는데, 제작하는 과정에서, 손목인은 다음과 같은 일을 겪었다.
주제음악 제작을 위해 감독, 카메라맨 등 제작진들과 함께 목포로 내려갔었는데,
목포 역 출구에 철조망이 쳐져있고 경찰에서 일일이 신분증을 검사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신분증을 보여주고 다 역 출구를 통과하고 있었으나
나는 신분증을 소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른 제작스태프들은 목포역을 다 빠져나가고 있는데 나 혼자만 쭈삣거리며 남아있자, 신분증 검사를 하던 경찰이 수상하다는 듯한 눈초리로 다가왔다.
"당신은 왜 나가지 않고 있어" 반말조로 그는 내게 말을 붙였다.
"어디 신분증 좀 봅시다" "죄송하지만 없습니다"
"당신이 대한민국 사람이야, 이름이 뭐야" 그는 온갖 인상을 다 써가며
아주 허리춤까지 잡아챌 기세로 나왔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손목인이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갑자기 얼굴표정이 변한 그는 "아니,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손목인 선생이시라구요? 틀림없습니까?"하고 되물었다.
나는 그에게 ‘목포의 눈물’ 영화촬영을 위해 목포에 내려왔다고 이야기했더니,
그는 ‘목포의 주인공‘이 왔는데 몰라봐서 죄송하다“고 몇 번이고 사죄했다.
내가 음악을 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자랑스러운 순간이었다.
(손목인의 산수기념 자서전, ’못다 부른 타향살이‘, 1992)
이 만큼 목포에서 '목포의 눈물’은 전 시민의 가슴 가슴에 각인되어 있는 노래인 것이다. 북한에서도 목포의 눈물‘이 널리 불리고 있다고 하니,
그 만큼 이 노래는 우리 민족에게는 널리 퍼져서 익숙해져 있는
노래인 것이다.
목포 시민들은 이 노래를 부른 목포출신 가수 이난영은 물론이고,
작곡가 손목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경찰관은
손목인을 ‘목포의 주인공’이라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이 노래는 목포 시민뿐 아니라 전 민족이 부르는 노래가
된지도 70년이 넘어 있다.
필자도 어릴 적부터 사촌 누나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부르는
이 노래를 듣고 나도 모르게 따라 불렀고, 초등학교 6학년 때
밤공부를 마치고 하교할 때, 주위에 논. 밭뿐인 캄캄한 밤길을
오면서 무서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5, 6명의 친구들과 함께 악을 쓰며
부르던 여러 곡 중에 이 노래도 빠짐없이 들어 있었다.
다른 노래도 마찬가지지만, 뜻을 알고 부른 것도 아니었고,
그저 가사와 가락을 따라 불렀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이 노래의 슬픈 이미지와 가락은 왼지 모르게
가슴에 와 닿아 가끔 흥얼거리는 노래 중의 하나가 되었고, 어쩌다
노래방이라도 가서 이 노래를 부르면 나도 모르게 이 노래가 지닌
비감에 젖어드는 것 같아 더욱 슬픈 감정으로 불렀던 그런 노래였다.
지금 젊은 세대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는 노인냄새 물씬거리는
냄새나는 노래일지 몰라도..... 1930년대에 나이 많은 층의 대중에게
인기가 있었던 신 민요가 그 수요층이 늙어감에 따라 서서히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것을 생각하면, ‘목포의 눈물’과 같은
트로트 곡들도 이제 가요 시장에서 서서히 퇴출하는 길을 밟고 있지
않은가 생각되기도 한다.
10여 년 전만 하드라도 노래방의 벽에 붙어 있는 100대 인기곡
명단에 ‘울고 넘는 박달재’ 등과 함께 ‘목포의 눈물’도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한곡도 그 리스트에 없는 것을 보면 그 옛날
노래들이 어쩌면은 완전히 비인기곡으로 밀려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난영(李蘭影, 1916-1965)의 코맹맹이 같은 비음이 색감을 내면서
들려주는 ‘목포의 눈물’은 듣는 이의 마음을 산란케 하고 가슴을
저리게 한다. 거기에 가사가 함축하고 있는 항구에서의 이별이나 설움
이상의 민족의 원한과 슬픔이 가슴에 와 닿게 되면, 이 노래는 우리의
심금을 울려 비감마저 들게 하는 영혼의 노래로서 와 닿는 것이다.
우리 가요계에서는 이 ‘목포의 눈물’을 작품성으로 보아 ‘황성 옛터’(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노래), ‘산유화’(이재호 작곡, 남인수 노래)와 함께
우리 가요의 3대 명곡으로 꼽고 있는 것도 이 노래가 지닌 노래 말의
뜻과 상징성, 가락의 음악성이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 목포의 눈물 >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 오케레코드, 1934)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三鶴島 파도 깊이 숨어드는 때
부두의 새악시 아롱져진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木浦의 설움..
三栢淵 願安風은 蘆積峰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情調
儒達山 바람도 榮山江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木浦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가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의 맺는 절개 木浦의 사랑..
이 노래의 노래 말을 지은 문일석은 목포 사람으로서 당시의 목포항의 풍경과
사람들의 정서를 노래 말에 적절하게 함축시켜 놓았다..
목포의 눈물..

일제는 1897년에 개항한 목포항에 먼저 일본영사관을 설치하여 일본인을 본격적으로 입식시키면서,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장악하였다.
목포 앞바다의 고하도에 신품종의 면화를 시배하고 퍼뜨려 섬유공업의 원료산지로 삼고, 호남평야의 쌀을 내어가도록 하는 등 전형적 수탈 경제의 고장이 되게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목포항은 과거의 고기잡이 하던 어항이나 부근 섬들로 나가는 부두로서의 기능을 훨씬 능가하는 근대적 항구로 발전하였으나, 그 경제적 부는 일본인이 차지하고, 오히려 목포의 농민들은 새로운 토지제도에 의거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만 했다.
그렇기에 발전된 목포항은 우리 민족에게는 호황의 항구도 아니었고
발전의 항구도 아니었으며, 토지를 잃고 타향살이하러 떠나는 이별의
항구로 밖에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일석은 그런 시대의 목포항의
분위기를 사랑과 이별이라는 테마로 분식된, 적절하게 억제되고
의제화한 용어로서 노래 말에 담았던 것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조선일보사와 오케레코드가 전국 6대 도시의
향토찬가를 모집하였을 때, 목포 청년 문일석이 응모하여 1등으로
당선됨으로써 빛을 본 것이다. 당시 조선일보와 오케레코드는 지역문화와 지역정서 개발을 통한 민족문화 창달을 위하여, 그리고 신문구독과 가요 및 음반 수요 확대를 위하여 향토 노래의 가사를 모집하였던
것인데, 목포 청년 문일석이 지은 ‘목포의 노래’(‘목포의 눈물’이
아니었음에 유의)가 1등으로 당선되었던 것이다.
문일석은 본명이 윤재희로서 목포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전주고보를
나와 와세다 대학 철학과를 나온 인텔리 청년으로, 이난영의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과는 목포공립보통학교의 동창으로 친구사이가 되어
나중에 ‘목포의 추억’ 등 네 곡을 더 작사해 주기도 한다.
그는 전도유망한 지식인이었으나 징용을 피하여 돌아다니다가 병을
얻어 1944년 28세의 약관의 나이에 별세했다.
오케레코드의 이철 사장은 이 ‘목포의 노래’ 가사를 손목인에게 주었으나 쉽게 창작이 되지 않았다. 마침 손목인이 작곡한 ‘갈매기의 노래’라는 곡을 고복수가 취입하려고 연습하고 있었는데, 이철 사장은 손목인과 의논하여 이 곡에다 ‘목포의 노래’를 붙여 이난영에게 부르도록 하고,
노래 제목을 ‘목포의 눈물’로 바꾸어 내놓았던 것이다.
목포의 눈물’은 나오자마자 크게 히트하여 레코드를 수요에 맞추어 내놓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이에 지방의 레코드 상회 사람들이 음반을 빨리 구해 가기 위하여 종로의 공급소에 선금을 내놓고, 부근의 여관에 진을 치고 기다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목포의 눈물가사지이렇게 음반이 잘 나가자 종로경찰서에서 이 노래의 가사에 대해 트집을 잡았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라는 가사가 의미하는 것이 “일본을 향한 원한이 아니냐“ 란 것이었다. 손목인이 그때를 회고한 다음 글은 그 상황을 잘 말해준다.
이 곡이 크게 알려지면서 종로서 고등계에서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며 이철 사장을 불렀다.
일본 경찰이 시비를 건 부분은 ‘목포의 눈물’ 2절 가사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에서 '원한 품은' 이었다.
일본경찰은 이 구절이 자신들에 대한 원한이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이때 이철 사장은 기지를 발휘, '원한'은 인쇄과정에서 착오가 일어나 '원앙'을 잘못 표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사실상 ‘목포의 눈물’은 가사 그대로 한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분노를 노래한 것이었다 .‘목포의 눈물’ SP판은 이 사건을 겪으면서 더욱 잘 팔려나갔다.
(손목인, 앞의 자서전)
사실 “삼백년 원한 품은” 에 함축된 의미는, 이 고장이 정유재란 때
고하도(古下島)에 주둔하던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을 이겨낸 유서 깊은 곳인데, 어찌하여 삼백여 년이 지난 그 시점에서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그 치하에 신음해야 하는가 하는 사무친 원한을 말한 것이었다.
정유재란 때에 우리 수군은 군사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이엉을 엮어 노적봉 바위를 덮어, 마치 그것이 군량미를 쌓아놓은
노적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군복을 입혀서 노적봉 주위를 계속 돌게 해서
마치 많은 대군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게 하고, 영산강에 백토 가루를
뿌려 바다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쌀뜨물로 보이게 하여 왜적들에게
아군의 군세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였던 것이다.
사실 ‘삼백연 원앙풍은 노적봉 밑에....“는 의미도 상징성도 없는
그저 갖다 끼운 말의 유희에 불과했다.
당시 노적봉을 돌던 전술은 훗날 문화예술로 승화되어, 강강수월래로
발전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이 노래로 일약 대스타가 된 이난영은 우리 가요사에서 여성 토로트
가요계의 원조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녀 나이 열여덟 살이었던 때였다.
본명이 이옥례(李玉禮, 호적부와 학적부에는 李玉順으로 되어 있으나,
등재할 때의 미스로 보고 있음)인 이난영은 1916년 목포시 양동에서
철공소에서 막일하던 이남순(李南順)과 박소아(朴小兒)의 1남 1녀 중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지독하게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어머니는 제주도로 식모살이하러
가버렸고, 이난영은 학교에도 제대로 다닐 형편이 못되어
목포공립여자보통학교(현 북교초등학교)의 1학년과 3학년을 각각 재수할 정도였다.
생활이 어려워 재수하던 시기에는 오빠가 다니는 조면공장에 가서
일하기도 하였다. 성적은 다른 과목은 ‘5’ 또는 ‘6’ 등으로 좋지 않았으나, 음악과에 해당하는 창가 과목만은 ‘9’로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난영의 아버지 이남순은 그녀가 가수로 데뷔하여 인기를 얻기 시작하던 시기인 1933년에 돌아갔고, 어머니는 1950년에 돌아갔다고 이봉룔의 호적부에 기록되어 있다.
이난영(이옥례)의 학적부; 기재상의 실수로 이옥례가
이옥순으로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옥례가 4학년 때에 결국 오빠 이봉룡은 동생을 제주도의 어머니에게
보내게 되는데, 이것이 그녀가 가수에의 길을 가게 하는 계기가 된다.
엄마가 식모로 있는 일본인 집에서 옥례는 생전 처음 축음기를
보았고, 귀동냥으로만 듣던 축음기의 노래 소리를 그대로
흉내 내어 흥얼거리기도 했다.
옥례의 노래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집주인이
자신의 극장에 온 순회 악극단에 소개하여 '막간 가수가 되게 했다. 12살짜리 어린 소녀 가수였다.
그러다가 1932년 16세 되던 해, 태양가극단 단장이 옥례를
"무대가수로 키우겠다"고 하면서 즉석에서 특별단원으로 채용했다.
그리고, 이옥례라는 본명 대신 난영(蘭影)이라는 예명을 지어 주었다.
반년 후 재일조선인 위문공연차 일본원정을 떠나는 태양가극단에
섞여 일본의 오사카로 갔으나, 오사카에서는 흥행이 잘 안 되어
가극단이 해체될 지경이 되었다.
극장의 무대 분장실 뒤의 방에서 거처하며 가극단원들의 빨래까지
해 줄 정도로 고달프게 살던 난영은 한 악기점 주인의 소개로
흥행계의 거물 OK레코드 사장인 이철(李哲)에게 소개되었다.
오케레코드의 전속이 된 후 이난영이 내놓은 데뷔 음반은 1933년 10월에 발표한 ‘향수’이다. 이 보다 먼저인 그 해 8월, 이난영은 태평레코드에서 창극 춘향전 전집 음반(총 5장)을 취입한 적이 있다.
그녀의 첫 육성노래‘시들은 청춘'과 ‘지나간 옛꿈‘은 이 음반과 함께
나온 것으로 그녀가 처음으로 취입한 가요이다.
‘33년 11월 발표한 ‘불사조’(김능인 작사, 문호월 작곡)는
이난영의 첫 히트곡이 되었다. 이어 이듬해 2월에 발표한
‘봄맞이’(윤석중 작사, 문호월 작곡)가 또 다시 인기를 얻으면서
그녀는 단숨에 촉망 받는 신인가수로 떠올랐다.
그 해 가을 도쿄에서 열린 전국 명가수 음악대회에 한국인 가수로는
혼자 출전하여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1935년에 내놓은 ‘목포의 눈물’이 세 번째 히트곡이 되는
셈이지만,‘목포의 눈물’은 앞의 두 노래와는 달리 그때까지
나왔던 가요계의 모든 노래를 능가할 정도로 바람을 일으켰다.
2. 목포의 노래, 민족의 노래
목포 사람에 의해 노래 말이 지어지고, 목포 출신 가수가 노래를 부른
'목포의 눈물’은 나오자말자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휘어잡고
전국적으로 히트하게 되었다.
그렇게 히트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상황과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영남대 이동순 교수는 이것을 아무래도 이 노래의 행간에 스며있는
민족적 정서의 애절함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이 애절한 정조를
작곡가 손목인이 그의 작곡상의 세련된 솜씨로 한껏 고조시켰으며,
이를 목포 출신의 가수 이난영이 비음 섞힌 독특한 음색으로 흐느끼듯
불러내어 노래의 전반적 효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했다.
일본의 엔카(演歌)나 우리 가요가 대부분 한 시대와 사회의
상황이 반영된‘눈물과 탄식’이듯이, 필자는‘목포의 눈물’도
1930년대 중반 식민지 지배 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 좌절을 억제되고 세련된 시어로 삭혀내고, 4박자의 단조 트토트 노래 가락의 음감으로 조화시킨 슬픔과 탄식의 노래라고 생각하면서
이 노래가 지닌 구조적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로 노래 말이 지역을 소재로 하는 향토색 짙은 것이지만,
전국 어디서나 공감할 수 있는 이별, 설움, 그리움, 절개 등의
신파적 소재를 내세움으로써 전 민족이 공감하는 노래가 되게
했던 것이다.
가사의 1절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새악시 옷자락을 눈물로 아롱지게 한 님과의 이별이고, 그로 인한 설움이며,
2절은 비록 이별을 했지만 그 자취는 아직 완연한 님에 대한 그리움과, 그 마음을 풀어내는 노래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3절에서는 이별의 옛 상처를 되새기면서도, 아주 못 올 님은 또 아니기에 그 님에 대한 마음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하며, 님에 대한 절개와 사랑을 드러내고 있다.
언뜻 보아서는 별 연관이 없어 보이는 각 절이지만, 이별과 설움 - 그리움과 노래 - 절개와 사랑으로 그 주제를 이어 놓고 보면, 과거 - 현재 - 미래의 상황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서사적 구조의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다.
'목포의 눈물'은 이러한 구조에다가 목포라는 항구 도시의 지역색을 적절하게 섞어 표현해 내고 있지만(이준희, 앞의 글), 노래 말이 지향하는 것은 당시의 우리 민족의 생활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접하고 느낄 수 있는 소재이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면서도 그 간절함이나 애절함이 어필되어 있었던 것이다.
둘째로, 식민지 민족의 좌절, 원한, 울분 등이 잘 스며들어 있어서
누구나 이 노래를 부르면서 마음속으로나마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저항의 노래로서 매우 적합했던 소재를 지닌 노래였다는 것이다.
토지의 상실과 이향, 타향살이의 설움, 생산력은 향상되나 내 몫은 자꾸만 줄어드는 경제 구조, 쌀과 면화 등 식량과 원자재의 반출 등으로 갈수록 어려워지는 사회경제적 상황에다가, 무엇보다도 내선일체를 내세우면서도 차별대우를 받아야 하는 불평등 구조 등
울컥해질 수밖에 없는 식민지 상황의 좌절, 원한, 울분을 이 노래를 불러봄으로써나마 풀어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목포의 눈물’은 이처럼 우리의 원한과 슬픔을 나타내고 있는 민족의 흐느낌이었고,
한국인 개인마다 가슴에 묻어 두고 있는 원한과 비분강개를 달래는 그런 영혼의 노래로 전환되어 불려질 수 있는 명곡이기도 했다.
(정영도, 철학교수와 대중가요의 만남, 화산문화, 2008, p.114)
셋째로, 본격적인 트로트 곡이 지닌 음악성에 대중들이 차츰 익숙해지고 매료되어가는 시점에 이곡이 나와, 대중 속으로 더욱 가깝게 갈 수 있었던 것이다.
4뱍자의 단조 트로트 곡인 이 ‘목포의 눈물’은 이른바 일본 엔카의 요나누키 단음계의 노래와 같은 양식을 취하여 당시에 유행하던 신민요나 동요, 가곡류의 장조 양식보다 세련된 노래로서 대중에게 다가 가게 된 것이다.
지금은 뽕짝으로 비하되고 있지만, 당시의 상황으로는 이 단조 5음계의 트로트는 신식 노래의 새 물결이었던 것이다.
사실 한국 가요사에서 ‘목포의 눈물’과 이난영은 장세정, 황금심,
백난아, 백설희, 이미자, 하춘화, 주현미 등으로 이어지는 장구한 트로트의 역사에서 원조 격으로 자리 매김 되고, 어쩌면 후시대를 한참이나
리드하는 노래와 가수로서 긴 생명력을 지닌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넷째로, 이난영의 비음 석힌 간드러진 목소리가 무엇보다 대중에게 가장 어필했을 것이고, 목포의 노래를 목포 출신이 불렀다는 의미 또한 무시 못할 흥행요소였다.
이난영의 목포관련 노래 시리즈는 ‘목포의 눈물’(1935)을 시발로 하여 ‘해조곡’(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1937), ‘목포의 추억’(문일석 작사, 이봉룡 작곡, 1939), ’목포는 항구다‘(조명암 작사, 이봉룡 작곡, 1942)로 이어지는데, ’목포는 항구다’‘는 ’목포의 눈물‘ 못지 않을 정도로 히트했으며, '목포의 추억’은 작사, 작곡, 노래를 담당한 분이 모두 목포 사람이었다.
목포의 추억(1939년 1월 오케레코드)
(문일석 작사, 이봉룡 작편곡, 이난영 노래, 1935)
고하도 등대불이 깜빡이는 선창에서
목놓아 몸부림쳐 자즈러질 때
륜선(輪船)은 칼섬으로 돌아 나갔소
이것이 악착한 사랑의 판결이라 아-
그대로 순종하고 내 고향 땅을 버렸소..
어차피 가서본들 별수 없는 고장이나
눈물의 타국에서 내 울 때마다
갑바우 뜨는 달이 뒤께 지면은
굴 캐는 아가씨 노래에 잠이 드는
남쪽의 저 하늘가 고향 목포에 가고파..
다섯째로, ‘목포의 눈물’이 단숨에 음반 시장을 장악하고, 전민족의 노래가 되도록 한 것은, 가사와 음률의 우수함과 이난영이라는 가수의 기량이 삼위일체로 조화를 이룬 덕택이라 하겠지만, 거기에는 오케레코드의 이철(본명 이억길, 1904-1944) 사장의 탁월한 안목과 기획력, 그리고 경영수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난영을 오사카로부터 데려와 전속가수로 키우고, 테이코쿠음악학교 1학년 학생 손목인의 가능성을 알고 아르바이트를 시키면서 작곡가로 이끈 점, 흥행의 관점에서 노래제목을 ‘목포의 노래’에서 ‘목포의 눈물’로 바꾸게 하는 등 탁월한 기획 능력이 있었기에
‘목포의 눈물’이 전민족의 노래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지닌 흥행에 대한 안목과 능력은 감각적으로 탁월하여 히트 곡
제조기라 할 정도였다. 그는 이런 안목과 능력을 토대로 하여 후발 오케레코드가 한국음반 시장을 장악하도록 했던 수완 있는 경영자이기도 했다.
그가 스카우트하거나 이끌어내어 성공시킨 인물은 작곡가로서 손목인, 박시춘, 김해송, 이봉룡 등이 있고, 가수로는 고복수, 이난영, 김정구, 남인수, 이화자, 장세정, 고운봉 등이 있는데 모두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인물들이었다.
3. 이난영의 기구한 가요인생

이난영
‘목포의 눈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이난영은 이 인기를 바탕으로 ‘36년 ‘오카란코(岡蘭子)’란 일본 예명으로 일본 가요계에 진출해 데이지쿠 레코드에서 ‘이별의 뱃노래’(일본어판 ‘목포의 눈물’)를 발표하기도 했다.
‘37년, 그녀는 오케레코드의 작곡가이면서 오케그랜드쇼단의 기타리스트겸 작,편곡자, 지휘자였던 김해송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김해송은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진 인물이지만, 여자를 너무 밝힌다는 소문을 달고 다니면서 많은 염문을 뿌리고, 사고를 치기도 한 인물이어서 이난영의 속을 꽤나 썩혔다고 한다.
이난영도 지방 순회공연 중에 그에게 겁탈을 당하고 임신하여 할 수 없이 결혼했다는 글도 보인다. 그러나 이난영은 남편의 그런 바람끼에 관계없이 원만한 가정생활과 자녀양육을 하면서, 흔들림 없이 그녀의 가요인생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어떤 노래라도 자기 것으로 소화하여 그럴듯하게 불렀다. 그녀는 신 민요풍의 봄맞이(윤석중 작사, 문호월 작곡, 1934)나 블루스풍 재즈곡 ‘다방의 푸른 꿈’(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1939)과 같이 트로트가 아닌 곡도 독특한 창법으로 잘 불렀다.
‘다방의 푸른 꿈'은 남편 김해송이 이난영을 위해 작곡한 곡으로서 국내 최초 블루스 곡이라고 하는데, 지금 들어봐도 조금도 어색한 감이 없는 탁월한 창법이다. 그러니까 이난영은 트로트만을 잘 부르는 가수가 아니라 신민요, 만요, 재즈 등을 넘나드는 전방위 가수였던 것이다.
‘40년까지 왕성한 음반 발표를 한 이난영에게 ’42년 7월에 발표한 오빠 이봉룡의 곡 ‘목포는 항구다’가 마지막 히트 곡이었다. 이후 태평양전쟁으로 생필품조차 부족한 현실 때문에 음반 제작보다는 무대공연 위주로 활동을 했다.
당시 이난영이 소속된 오케레코드 소속 오케그랜드쇼단이나 조선악극단은 최대 공연단체였다. 이때의 멤버들은 고복수, 이난영, 남인수, 김정구, 송달협, 이인권, 장세정, 이화자, 이은파 등 가수들과 무용단 20명, 코미디언 이종철, 이복본 등이었다.
이난영은 극단에서 연기와 노래를 함께 하는 탤런트로서의 재능를 발휘하기도 하는데, 이는 뮤지컬을 중요시했던 남편 김해송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빠인 이봉룡도 김해송에게 악기 연주와 화성법을 배워서 본인도 작곡자로 성공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악극단 시절에 이난영을 중심으로 저고리시스터즈, 아리랑시스터즈라는 여성보컬그룹이 구성되고, 운영된 적이 있다. 이는 정식의 보컬로 구성된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순회공연 중에 급조된 것이어서 정식 보컬로 인정하기에는 문제가 있지만, 우리 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보컬이 무대에 섰던 것만큼은 인정하고 평가 받아야 할 사실이다.
이 보컬은 악극단의 다양하고 풍성한 볼거리를 위해 급조된 일종의 프로젝트성 여성보컬 팀이었다. 멤버는 ‘조선악극단 무대의 여왕’으로 군림한 이난영을 주축으로 장세정, 김능자, 홍청자 등 4인조였다. 그리고 이난영은 장세정, 신카나리아, 황금심 등 당대 유명 여가수들과 ‘아리랑 시스터즈’라는 이름으로 팀을 결성해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이난영의 결혼 생활은 이난영의 노력으로 원만하게 지속되어 자식을 열두 명이나 낳았다고 하기도 하고 아홉 명을 낳았다고도 하지만, 어릴 때 여읜 자식이 있어 광복 후에는 7남매가 있었다고 한다.
이난영은 이 칠남매를 키우느라 가수 활동을 광복 전후 한동안은 접어야 했다. 다시금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46년 남편인 작곡가 김해송이 KPK악극단을 결성하여 활동할 때부터이다. 그녀는 당시 최대 규모의 악단인 KPK악단에서 출연은 물론 악단 운영에 필요한 여러 가지 허드렛 일들까지 가리지 않고 하여 대모로 불리어지기도 했다.
'진정한 한국의 뮤지컬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KPK악단은 1950년 4월 명동 시공관에서 '로미오와 쥴리엣'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산되었다. 6. 25 사변이 발발했고, 단장이었던 김해송이 납북되었기 때문이다.
김해송은 납북 도중에 의정부 부근에서 미군 비행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는 설도 있고, 북에서 적응이 안되어 탄광으로 보내어져 비참한 생활 끝에 죽었다는 설도 있으나, 1950년에 별세했다는 사실만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홀로 된 이난영은 1.4후퇴 때 7남매를 거느리고 오빠 이봉룡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 내려가, 그곳에서 오빠와 함께 남편의 땀과 정신이 담겨 있는 KPK악단의 재건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여의치 못했다. 다만 딸 영자, 숙자, 애자, 그리고 오빠 이봉룡의 딸 민자에게 회초리를 쳐 가며 노래를 가르쳐서 미군 부대 무대에 출연시켜 식구들의 호구를 해결했다. 이들 딸들은 후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보컬이 된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이난영과 이봉룡은 생계를 위해 음악 재능이 뛰어났던 숙자, 애자, 그리고 오빠의 딸 민자를 묶어 'KPK 쇼단'을 구성했다. 바로 여성트리오 '김씨스터즈'가 공식 출범 한 것이다. 이들은 수도극장 등 민간 무대를 포함, 주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했다.
1950년대 말 뮤지컬 영화 '청춘쌍곡선'에 간호사 역할을 맡아 영화에도 진출했을 만큼 김씨스터즈의 인기는 높았다. 미8군 무대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김씨스터즈는 1959년 미국인 흥행사 '톰 볼'의 주선으로 꿈의 무대인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진출했다. 최초의 해외진출 여성 보컬 팀 탄생이었다.
자식들을 이역만리로 떠나보내고 혼자가 된 이난영은 외로움을 술로 달래기 시작했다. 이 당시 그녀의 쓸쓸한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던 사람은 동료가수 남인수였다. 전쟁 후 남편을 여의고 자식들마저 타국으로 떠나보낸 뒤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녀에게 최고의 인기 가수 남인수는 경제적인 도움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남인수는 자신보다 2살 연하였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차츰 사랑으로 변해갔다. 예나 지금이나 말 많고 탈 많은 연예계에 두 사람의 로맨스는 참새들의 입 방아에 단골메뉴로 올랐다. 하지만 외로운 처지의 두 정상의 남녀가수는 그런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사랑을 키워나갔다.
남인수와의 사랑으로 꿈꾸듯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이난영에게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애인 남인수가 병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불치병으로 여겨지던 폐결핵이었다. 지극 정성으로 간호했던 그녀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남인수는 사랑하는 여자를 두고 1962년 훌쩍 세상을 떠나버렸다.
또 다시 혼자가 된 이난영은 견디기 힘든 외로움에 절망했다. 성공한 자식들이 사는 미국으로 오빠와 함께 건너가 새로운 생활을 시도해 보았지만, 적응하기가 힘들어 1963년 다시 서울로 돌아와 큰 아들 집에 머물렀다.
인생의 허무함에 몸서리쳤던 이난영의 유일한 친구는 술이었다. 1965년 9월 11일 새벽 이난영은 알코올 중독으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한 많은 생을 살아온 이난영은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의 사망 소식에 김씨스터즈 세 자매는 망연자실했지만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장례식에도 참석 못하는 불효의 한을 남겼다.
한국연예협회장으로 치러졌던 그녀의 장례식에서는, 소복을 차려 입은 후배가수들이 그녀의 집이 있던 회현동에서 시민회관(지금 세종문화회관) 까지 운구를 따라 ‘목포의 눈물’을 부르며 걸으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목포의 눈물 노래비
3년 뒤인 1968년 6월23일 오전 11시 '목포의 눈물'이라는 민족가요를
남긴 고 이난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목포 중앙극장(지금의 하나 백화점 자리)에서 제1회 난영가요제가 개최되었다. 이 가요제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목포시 대안동에서 악기점을 운영하던 '박오주'씨가 민족가요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목포의 눈물' 노래비 건립을 위해 당시로선 거금인 600만원을 기탁해, 1969년 6월10일 목포 유달산에 '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세워졌다. 국내 대중가요사상 최초의 노래비가 된 이 노래비는 목포를 상징하는 조형물로 목포시민들의 자존심이 되었다..

2002년, 이난영의 생가터(목포시 양동)에 조성된 이난영 소공원의 모습.
노래비가 시민들의 힘으로 세워진 지 28년여의 세월이 흐른 뒤,
지난 2003년 목포시 양동 이난영의 생가 터에는 소공원이 조성되었다.
당초 생가를 복원하여 공원화 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좁은 장소와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이난영의 흉상을 세운 소공원으로 변경 조성되었다.
김씨스터즈 세 자매는 1967년 초 줄줄이 국제결혼으로 가정을 이뤄 안정을 찾자 1970년 5월 고국을 떠난 지 12년 만에 귀국해 5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소를 찾아 오열했다. 시민회관에서 열린 4일간의 귀국공연에서 어머니의 히트곡 '목포를 눈물'을 흐느끼며 부르자 공연장 전체가 울음 바다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난영 유해의 수목장 나무
이난영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는 경기도 파주의 용미리 공원묘지에 안장돼 있던 이씨의 유해를 2006년 3월 25일 목포로 옮겨 '목포의 눈물' 가사에 나오는 삼학도에서 수목장을 지냈다.
화장된 이씨의 유해는 가족과 시민 등 1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20년생 백일홍 나무 밑에 편안히 묻혔다. 타계 41년만에 고향인 목포 시민들의 품에 안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