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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의 만유 구원론과 구원론의 새로운 지평
들어가는 말
1995년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은 『오시는 하나님』(Das Kommen Gottes)이라는 저술을 출간시켰다. 이 저술은 20세기가 마감되면서 나온 매우 중요하고도 충격적인 저술이었다. 이 저술의 중요성과 충격성은 여러 면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하고 충격적인 것은 이 저술에서 몰트만이 만유 구원론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이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은 20세기 중엽에 칼 바르트(K. Barth)가 그의 예정론에서 만인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선택을 주장했고 또한 화해론에서 만인 화해론을 기술하면서 세계 신학계에 끼친 충격의 결정판이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믿는 소수의 사람만이 구원받고 믿지 않는 다수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 이중적 심판론을 가르쳐 왔다. 그런데 이런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충돌하면서 몰트만은 만유 구원론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만유 구원론이 가능하며 몰트만에 의해 새로이 열린 구원론의 새로운 지평의 핵심 내용은 무엇일까?
Ⅰ. 칼 바르트에서 위르겐 몰트만까지의 신학적 발전
1. 칼 바르트의 예정론
바르트의 예정론은 20세기 신학의 금자탑 가운데 하나이다. 바르트는 전통적 예정론의 수많은 신학적 오류들을 밝혀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예정론을 이룩하였다. 바르트의 예정론의 가장 큰 공헌은 하나님의 예정은 밝은 것이고 기쁜 것, 곧 복음의 총화라는 데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영원 전에 일군의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기로 작정하고 지옥 갈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계신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적 예정론은 두 기둥으로 구성된 예정론이었다. 즉 전통적 예정론은 선택과 유기로 구성된 예정론이었는데, 이 가운데 유기에 관한 교리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교리였다.
하나님이 영원 전에 일군의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기로 작정했고 이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이 사람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실패하고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된다는 이 교리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르친 교리 가운데 걸림돌이 되는 교리였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은 예정의 교리를 비판했고 예정론을 거부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칼빈은 유기의 교리의 정당성을 강변하면서 유기의 교리를 비판하는 자들은 자신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성서와 바울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롬 9:13)고 바울이 기록하고 있고 “천하게 쓸 그릇”(롬 9:21)을 토기장이가 만들 권한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로마서 9장을 쓴 바울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 내지 못한 것이었다. 칼빈은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이 일군의 사람들은 버리고 형벌에 처하는 유기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잘못이었다. 로마서 9장의 바울은 칼빈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유기의 교리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복음은 인류를 향한 기쁜 소식인데 반해서 일군의 사람들을 예정해서 지옥의 형벌에 처하는 유기의 교리는 어두운 교리이다.
바울은 이 무시무시한 어두운 교리를 전하기 위해 로마서 9장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토기장이의 비유나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관한 비유이고 말씀이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 절대주권으로 일군의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기로 작정하신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유기의 교리에 해당한다고 믿었지만, 바울은 그것이 복음에 해당한다고 가르쳤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은 과거에 알지 못했던 놀라운 은총의 법을 계시하셨다. 유대인들은 육신의 아브라함의 후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상속자이고 이방인들은 모두 멸망의 자손들이라고 굳게 믿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사람을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바울에 의하면 새 법이 계시 되었다는 것이다. 율법과는 다른 은총의 법이,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는 새로운 법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바울에 의하면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롬 9:20)는 것이 유대인들의 비판에 대한 답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요 하나님의 자유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유와 절대주권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법을 작정하셨고 마침내 이를 계시하셨다. 그것은 은총의 법이고, 기쁘고 살리는 법이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이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이”(롬 10:1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롬 10:11)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율법으로는 모두 망할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은 율법 밖의 인류를 구원하는 법을 마련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은총의 계획이고 작정이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밝히 계시 되었고,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총이 이렇게 크고 넓다 해서 하나님께 반문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로 불렀다(롬 9:24~25) 해서 하나님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의 법을 전하고 있었다. 바르트는 로마서 9장의 바울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바르트에 의하면 십자가에 계시 된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자신이 짊어지고 죽으시는 극단적인 사랑의 하나님이다. 즉 인류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시는 놀라운 은총이 신의 십자가에 계시 되어 있다. 이 놀라운 은총의 신이 영원 전에 일군의 사람들을 미워해서 지옥에 보내기로 작정하시고, 지옥에 갈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있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론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런 신은 천상의 폭군인데,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적 예정론에서 그와 같은 신이 그려져 있고, 그런 공포의 신이 중심 교리로 나타난 것은 하나님을 그리스도 밖에서 찾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고 바르트는 보았다. 참된 하나님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발견되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발견되는 신은 인류를 사랑하시고, 인류를 선택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신이다. 인간을 유기하는 신은 없다. 하나님은 지옥으로 가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신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십자가에 계시 된 하나님은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다. 인간을 결단코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계시 되어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은 십자가의 사건이 그 핵심이었는데 십자가의 사건은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은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을 버리지 아니함을 뜻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극단적인 사랑의 결의를 의미하는데, 곧 스스로 인간의 고통과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인간을 살려내는 하나님의 극단적 사랑의 대속의 행위, 극단적 대리적 교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분 버림받으신 분”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시고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계획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났는데, 그것은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하나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모든 인간을 살려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그러므로 예정론은 기쁘고 즐겁고 위로해주는 복음이지 공포와 기쁨이 섞인 어떤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에 의하면 예정론은 복음의 총화이다.
바르트의 예정론과 칼빈의 예정론을 비교해 볼 때 가장 두드러지는 분명한 차이는 칼빈은 인간을 버리는 하나님이 성서에 계시 되어 있다고 보고 있는 데 반하여 바르트는 인간을 버리기로 작정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을 버리기로 작정한 신은 십자가에 계시 된 하나님과 극단적으로 모순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은 유일한 분이시고, 모든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어 있다. 그렇다고 바르트는 모든 인류가 현재 구원을 받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자들은 현재 구원에 이르고 있는 자들은 아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은 아니지만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해 행하신 은총의 뒷면, 곧 저주의 그늘이 그들을 뒤덮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아직도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바로 이 자리에 바르트의 예정론이 남긴 신학적 숙제가 존재한다. 바르트가 십자가 사건에서 하나님의 의지의 극단적인 은총의 측면을 발견한 것은 대단히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택을 받았다면 역사의 마지막 날이 되면 어떻게 될까? 현존하는 역사 속에는 저주의 그늘 아래 살고 있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는 바르트의 주장을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역사의 마지막 날이 되면 그때까지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될까?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는데, 역사의 마지막 날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하게 버림받으신 분이라는 바르트의 예정론의 결정적인 기둥이 무너지게 될 것이다. 또한 바르트의 예정론에 의하면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다. 물론 인간의 결단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1942년에 발표된 『교회교의학』 제2권의 예정론에 의하면 인간의 믿음의 결단은 성령의 활동의 결과이다. 즉 인간의 믿음의 결단은 신율(Theonomie)의 큰 원 속에 있는 작은 원과 같다. 인간의 자율(Autonomie)은 신율의 큰 틀 속에 존재한다. 이런 구조 속에서는 역사의 마지막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은 성령이 그를 부르지 않은 것과 같이 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인류를 선택하신 하나님께서 선택은 해 놓고 역사의 마지막 날까지 믿음으로 부르지 않는 자들이 있게 되는 이상한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이 모순은 바르트의 예정론이 남겨 놓은 어려운 신학적 숙제였다.
2. 칼 바르트의 화해론
예정론에 대단히 큰 신학적 족적을 남긴 바르트는 1953년에 출간된 그의 『교회교의학』 제4권의 화해론에서도 대단히 큰 신학적 족적을 남겼다. 바르트가 화해론에서 남긴 큰 신학적 족적 가운데 대단히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그의 객관적 화해론이다. 바르트는 그의 『교회교의학』 제4권에서 과거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주관적 화해론을 비판하고 객관적 화해론의 체계를 완성하였다.
전통적으로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되는 순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으로 가르쳐져 왔다. 즉,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주관적으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이 죄의 용서가 일어나고 하나님과 화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와 같은 화해론은 바르트에 의하면 주관적 화해론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이 주관적 화해론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되는 순간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이 아니고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순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민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던 순간이 만민의 죄가 해결되는 순간이었고, 모든 인류가 하나님과 화해되는 순간이었다. 바르트에 의하면 만민의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는 2,000년 전 십자가에서 객관적으로 일어났다. 화해가 객관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들의 주관적 태도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든지 그를 거부하든지 상관없이 우리의 죄는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해결되었고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화해되어 있고 그들의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되어 있다. 바르트는 십자가의 사건은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주관적 화해론은 잘못된 것이고 객관적 화해론이 옳다고 밝혔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또한 심각한 신학적 문제가 제기되었다. 만민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관계없이 그들의 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되어 있고 하나님과 화해되어 있다면, 만민이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 바르트는 만인 구원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닐까? 이 심각한 신학적 질문에 대해 바르트는 일단 긍정하지 않았다. 바르트에 의하면 자신의 주장은 만인이 화해되어 있다는 만인 화해론이지 만인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만인 구원론은 아니라고 분명히 했다. 바르트는 만인 화해론과 만인 구원론은 신학적으로 다른 이론이라고 주장했다.
만인 화해론과 만인 구원론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바르트는 두 가지 중요한 예를 들어 설명했다. 첫 번째 예는 나치 시절 어떤 사람이 나치를 피해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깊은 산 속으로 피신을 했다는 것이다. 알프스의 산 속에 피신해서 사는 사람은 한 마디로 비인간적인 삶 자체일 것이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는 사이에 마침내 나치가 망했다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나치가 망한 사건이 화해의 사건이다. 즉, 사단이 망하고 고통의 뿌리가 뽑혀 나간 사건이다. 그런데 나치가 망했지만, 오스트리아의 산 속에 있는 사람은 아직 이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은 나치가 망한 기쁜 소식을 오스트리아의 산 속의 이 사람에게 전했을 때 나타날 사건이다. 나치가 망한 기쁜 소식을 듣고 이를 믿고 자유와 기쁨이 물결치는 오스트리아의 도시로 내려올 때 그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는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대통령의 사면이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사면은 선포되었지만, 아직 이 소식이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형무소까지 전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화해의 사건은 나치가 망한 사건, 사면이 선포된 사건과 같다는 것이다. 현재의 시간은 바로 이 화해와 구원 사이의 시간인데 이 시간이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의 시간이고 교회의 시간이고 선교의 시간이다.
우리는 위의 예에서 바르트가 말하는 화해와 구원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만민이 화해되어 있지만 만민이 구원받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바르트의 주장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인 화해론과 만인 구원론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심각한 신학적 질문은 남아있다. 그것은 만인 화해론은 결국 만인 구원론으로 가지 않겠느냐 하는 질문이다. 대통령의 사면이 선포되었는데 영원히 형무소에 남아있을 사람이 있겠으며, 나치가 망했는데도 끝까지 오스트리아의 산 속에 남아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그의 『교회교의학』의 화해론을 쓰면서 그의 예정론에 존재하고 있었던 인간의 자율이 신율의 원 속에 들어있는 구조를 파괴시키고, 인간의 자율을 신율의 원 속에서 떼어 내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업적을 남겼다. 바르트에 의하면 화해는 객관적으로 일어난 하나님의 사건이었지만 구원은 이 하나님의 사건에 대한 인간적 응답이다. 구원은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인간적 행위를 통해 구현화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은총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저주의 그늘 아래 있는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 전적으로 인간의 공로가 아니다. 그것은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인 동시에 인간의 행위라는 바르트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태양이 비취면 사람들이 두꺼운 옷을 벗어 던지는 행위로 이해하면 된다. 태양이 따뜻하게 비춰도 두꺼운 옷을 벗지 않고 버틸 수 있다. 그렇게 버티는 것은 인간의 자유이다. 태양은 인간에게 강제로 옷을 벗기지 않는다. 그러나 태양이 따뜻하게 비취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옷을 벗게 된다. 두꺼운 겨울의 옷을 벗고 자유롭고 따뜻한 삶을 살게 된 인간은 그것이 전적으로 자신의 행위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태양의 은혜인 것을 안다. 바로 이와 같은 관점으로 바르트는 신율의 큰 틀 속에 들어 있던 인간의 자율을 해방시켜서, 인간의 자율에 진정한 주체성을 부여하면서도, 인간이 구원에 이름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도 동시에 강조했다.
바르트의 화해론은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만인 화해의 객관성을 강조했고 인간의 진정한 자율을 강조한 이론이었다. 그것은 2,000년 그리스도교 역사에 획을 그을만한 놀라운 내용을 갖고 있는 이론이었다. 그러나 이 바르트의 만인 화해론은 만인 구원론과 다르다는 바르트 자신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또한 인간의 자율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만인 구원론에 이를 것이라는 수많은 추측을 낳게 만들었다. 마지막 날, 심판의 날에 그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는 자들은 과연 어떻게 될까? 하나님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용서하셨는데 그들을 심판할 수 있을까? 그의 신학대전인 『교회교의학』의 화해론을 쓴 바르트는 계속해서 구원론을 쓰기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 구원론은 종말론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세계의 신학자들이 위의 질문에 대한 바르트의 신학적 답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에 깊은 관심을 갖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바르트는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을 주지 못하고, 구원론을 쓰지 못한 채 1968년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말았다. 그리하여 바르트가 그의 예정론과 화해론에서 남긴 신학적 문제는 20세기 후반의 최대의 신학적 숙제로 남게 되었다. 십자가에서 만민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은 만민을 구원하실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 날에 복된 자들과 저주받은 자들로 나누어질 것인가?
3.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
바르트의 만인 화해론은 그 이론이 갖고 있는 신학적 중요성에 걸맞게 격렬한 신학적 반응이 나타났다. 한때 바르트의 신학적 동지였고, 히틀러 시절 ‘자연과 은총'(Natur und Gnade)이란 글을 썼다가 바르트로부터 호된 비판의 글인 ‘아니다!’(Nein!)라는 비판을 받았던 에밀 브룬너(E. Brunner)는 바르트의 만인 화해론은 성서적 정당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브룬너에 의하면 “성서는 모든 사람의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이중적 결과에 대해, 곧 몰락과 저주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브룬너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인데 우리가 믿는 경우에만 구원을 주시는 말씀”이라고 못 박았다. 브룬너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은혜로우신 분이시지, 그리스도 밖에서는 진노하시는 분이시다.” 이와 같은 브룬너의 신학적 입장과 동일하게 게르하르트 에벨링(G. Ebeling)도 “성서는 명백하게 천국과 지옥이라는 상징으로 마지막 날의 이중적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브룬너와 에벨링과는 조금 다르게 파울 알트하우스(P. Althaus)는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에게 대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에 대해서는 하나의 비밀이다”라고 언급하면서 “신학적으로 다음의 것을 가정하는 것은 불가피한데 첫째는 영원히 멸망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둘째는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신뢰, 그리고 이 두 가지에서 다음의 것이 뒤따르게 되는데, 셋째 이중적 심판과 만인 구원이라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우리가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알트하우스의 관점은 바르트의 관점과 이를 비판하는 브룬너와 에벨링의 관점을 종합한 것인데 물론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다.
만일 바르트가 그의 『교회교의학』을 계속 써 내려가서 구원론을 완성했다면 바르트는 만인 구원론을 주장했을까? 이 질문은 물론 가정법의 질문이지만 다수의 신학자들은 결국 바르트는 만인 구원론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대한 확실한 답을 모른다. 그리고 바르트의 신학적 결론이 만인 구원론에 이를 것이라고 해도, 만인 화해론과 만인 구원론 사이에 놓여있는 수많은 신학적 난제들에 대해 어떻게 그 문제들을 해명하고, 걸림돌들을 제거할 수 있을지의 문제는 더욱 관심이 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이미 브루너와 에벨링의 비판에서 볼 수 있듯이 만인 구원론에 이르는 길은 신학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바르트가 그의 『교회교의학』의 구원론을 쓰지 못하고 아쉽게 죽은 지 27년이 지난 1995년에 바르트의 신학은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이라는 20세기 후반의 신학의 천재에 의해 바르트가 남긴 신학적 숙제가 해결되어 나타났는데, 그 결론은 만유 구원론이었다. 몰트만은 바르트의 예정론과 화해론에서 결정적인 신학적 통찰을 얻었고 이 신학적 통찰에 기초하여 바르트가 남긴 신학적 숙제를 해결했다. 1995년에 출간된 몰트만의 『오시는 하나님』(Das Kommen Gottes)은 바르트의 예정론에서 시작된 20세기의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구원론의 기나긴 여정의 완성이었다. 몰트만은 이 저술에서 만인 구원론을 넘어 만유 구원론이 그리스도교의 바른 구원론이라고 밝혔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만인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는 만유를 구원하는 것이었고, 역사의 마지막은 하나님께서 만유를 구원하시고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는 것이라고 몰트만은 주장했다.
몰트만이 바르트의 예정론과 화해론에서의 신학적 통찰을 이어받아 만유 구원론을 확립했다면, 브룬너와 에벨링의 비판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길이 쉬운 길이 아닌 것이 틀림없는데, 무엇을 근거로 만유 구원론에 이르렀을까? 만유 구원론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수많은 신학적 걸림돌들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만인 구원론은 성서에 모순된다는 비판은 어떻게 될까? 성서에 언급되고 있는 지옥은 없단 말인가? 그리고 만인 구원론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 만유 구원론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우리는 이 문제들을 다음의 항목에서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Ⅱ. 만유 구원론을 위한 신학적 지평
1. 만유 구원론이 성서적으로 가능한가?
칼 바르트의 만인 구원론적 신학에 대해 에밀 브룬너와 게르하르트 에벨링은 성서에 충돌된다고 비판했다. 이들에 의하면 성서는 이중적 심판론을 가르치고 있지 만인 구원론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몰트만에 의하면 이중적 심판론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성서 본문은 마태복음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위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의 대립 외에도 마태복음 25장의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의 비유 및 양과 염소의 비유 등은 대표적인 이중심판론을 근거하는 마태복음의 본문들이다. 이 마태복음의 본문 외에도 마가복음 9:45은 지옥에 대해 말하고 있고, 누가복음 16:23은 음부에서 고통하고 있는 부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마가복음 9:48은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위와 같은 이중적 심판론을 말하고 있는 성서 본문을 앞에 두고도 어떻게 만유 구원론을 언급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몰트만은 물론 저주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영원하겠는가 하는데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영원을 나타내는 헬라어 아이오니오스(aionios)는 같은 의미의 히브리어 올람(olam)과 마찬가지로 끝을 제한할 수 없는 긴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지 헬라 형이상학의 절대적 의미에서의 영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 단어들은 복수형 아이오네스(aiones)와 올라민(olamin)이 존재하고 있다.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저주의 기간을 나타내는 영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끝을 제한할 수 없는 긴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지 절대적 의미에서의 영원은 아니다. 몰트만에 의하면 마가복음 9:48의 지옥의 불은 교육적 형벌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정화의 불이다. 마태복음 25장의 축복과 저주의 대립은 결단코 같은 높이의 대칭적 대립은 아니다. 왜냐하면 축복받은 자들을 위해 예비된 나라는 “창세로부터”(마 25:34) 예비된 나라이지만 저주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불은 창세로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세상 끝까지 존재할 수 없다. 발터 미하엘리스(Walter Michaelis)는 저주와 심판과 영원한 죽음은 종말론적으로 관찰할 때 최후의 것의 지평 속에 있는 “한 단계 이전의 것”으로 보았는데 몰트만은 이를 매우 정당하게 평가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있어서 저주와 지옥은 최후의 것이 아니다. 최후의 것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이다.
몰트만은 성서에는 이중적 심판론을 근거 지을 수 있는 본문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만유 구원론을 근거 지을 수 있는 가르침이 있다고 보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사도행전 3:21에 “만유를 회복하실” 하나님에 대해 언급되고 있다. 에베소서 1:10에는 하나님의 예정과 경륜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골로새서 1:20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건은 인간만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만유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고자 하는 화해의 사건으로 만유의 구원을 향하고 있는 사건이었다. 몰트만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피조물, 심지어는 불순종에 떨어져 있는 천사까지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화해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나로 통일되는 인격화된 창조의 지혜를 나타내 주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 본문들은 만유의 회복에 초점이 있는 본문으로 몰트만은 이해하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마지막 날은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는 만인 구원의 날일뿐만 아니라 만유가 회복되는 만유의 구원의 날이다.
몰트만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뿐만 아니라 만유 구원론을 정초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성서 본문으로 빌립보서를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빌립보서 2:6 이하의 그리스도 찬가는 만유 구원의 결정적 비전을 보여 주고 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그날이 되면 그의 원수들까지도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게 되고(고전 15:25),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된다는 이 비전은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어두운 지옥에서 이를 갈면서 강제적으로 복종 당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되면 안 된다. 몰트만은 이 비전을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마침내 그리스도의 원수들까지 굴복시켜서 변화된 그들이 그들의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땅 아래 있는 자들도 하늘에서 어둠의 세력을 만들고 있는 불순종의 천사들까지도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위대함에 사로잡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다. 바로 이날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고전 15:28)이 되는 날이다.
몰트만은 바울 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유형론도 만유 구원론의 중요한 근거로 이해하고 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느니라”(고전 15:22). 몰트만에 의하면 성서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은혜가 만민에게 미치는 보편성을 언급하고 있지 제한성을 말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그리스도의 은혜는 만민에게 미치는 긍휼이고 하나님은 바로 이런 긍휼로 만민을 구원하고, 만유를 구원하고자 하신다.
몰트만은 성서에 이중적 심판론과 만유 구원론이 공존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인간이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이 복 받는 상태에 들어가는 것은 신앙과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앙이냐 불신앙이냐 사이의 결단은 복과 저주로 나누어지는 길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매우 진지하게 이중적 심판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몰트만은 보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결단해야 하는 존재이고 이 결단의 실패는 끝없는 저주 아래 사는 삶이다. 그만큼 인간의 결단은 심각하고 진지한 일이다. 그것은 시간의 세계 속에 사는 인간이 겪게 되는 운명적 결단이다. 인간의 자유는 보장되어 있고 인간은 저주받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저주가 끝없이 계속될 수 있다. 그러나 몰트만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궁극적 계획은 만유를 구원하는 것이고 만유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이 십자가 속에 밝히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이 선택한 저주받는 삶이 끝없이 계속될 수는 있지만 영원할 수는 없다.
2. 지옥은 영원한가?
몰트만은 자신의 만유 구원론을 발전시키면서 우선 지옥의 영원성에 대해 질문을 제기했다. 예로부터 교회의 전통은 영원한 지옥에 대해 가르쳤다. 그런데 몰트만은 ‘지옥이 정말로 영원할까?’라는 질문을 제기한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몰트만 자신의 답은 지옥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몰트만은 아직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 있을 지옥의 경험을 부정하지 않는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비롯한 성서의 여러 곳의 지옥에 대한 표상들은 아직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 겪을 지옥의 가능성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몰트만은 그러한 지옥이 영원하다면 십자가에 계시 된 은총과 자비의 신은 무의미해진다고 보고 있다.
지옥의 영원성에 대한 반대는 17세기와 18세기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중 첫째는 계몽사상의 영향 아래 휴머니즘이 강조되면서 나타났다. 세속적 휴머니즘의 대표자들은 지옥과 지옥의 영원성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었다. 그런데 지옥의 영원성에 대한 반대로 몰트만이 중요하게 생각한 흐름은 이 세속적 휴머니즘이 아니고 성서만을 사랑했고 성서를 일생토록 읽고, 설교했던 독일의 뷔르템베르크의 경건주의 신학자들이었다. 벵엘(Johann Albrecht Bengel, 1687~1752)에 의하면 천국과 지옥은 있지만 그 모든 것은 마지막 건설될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봉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옥의 고통은 영원하지 않다. 하나님이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는 날에는 지옥의 고통도, 지옥도 없을 것이다. 벵엘의 제자였던 외팅어(Fr. Chr. Oetinger, 1702~1782)는 스승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는데, 외팅어에 의하면 은혜의 선택이 하나님의 길의 시작이라면 만유의 회복이 그것의 목표의 종국이다. 외팅어는 특별히 만유의 회복이라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몰트만은 이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와서 독일 뷔르템베르크의 경건주의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요한 그리스토프 블룸하르트(Johann Chr. Blumhardt, 1805~1880)와 그의 아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 Blumhardt, 1842~1919)이다. 이 블룸하르트 부자에게 있어서 만유 구원은 희망의 고백이었다. 아버지 블룸하르트는 아들 블룸하르트에게 터키인 노예도 이집트인 노예도 신앙인으로 대할 것을 언제나 가르쳤다. 왜냐하면 그들도 그리스도의 은총에서 제외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정신을 이어받은 아들 블룸하르트는 구원과 멸망을 대칭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는 잘못되었다고 가르쳤고 하나님의 구원이 영원하기 때문에 비참이 영원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하나님의 구원이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구원 아닌 것은 중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들 블룸하르트의 신념이었고 가르침이었다.
몰트만은 이 뷔르템베르크 경건주의 신학자들의 가르침이 옳다고 보았다. 즉, 하나님의 구원이 있는 한 언젠가는 구원 아닌 것이 종결될 수밖에 없다. 지옥의 고통과 경험은 현존하고 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는 그날에는 그 모든 것은 폐기되고 없어질 것이다. 지옥이 있고 지옥에서 고통 하는 자들이 있는 한 하나님은 아직 모든 것을 완성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지옥도 없애고 지옥을 경험하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지옥 여행과 파괴된 지옥
몰트만에 의하면 지옥은 열려져 있고 파괴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옥을 열기 위해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시고 지옥을 열었기 때문에 지옥의 고통도 출구가 없는 고통이 아니다. “그가 지옥의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모든 희망이 떠나갈 수밖에 없는 그곳에도 희망은 존재하게 되었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지옥의 고통의 경험으로 지옥의 문이 열린 것뿐만 아니라 지옥을 감싸고 있는 성벽이 무너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고난으로 그리스도는 지옥을 파괴시켰다.” 몰트만은 지옥을 파괴시켰다는 표현을 고대 교회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 표현이 바른 표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옥은 파괴되었고 더 이상 “영원한 저주는 존재하지 않는다.”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지옥 여행은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깊은 표현이다. 루터는 지옥을 어떤 특정한 장소라고 생각지 않았다. “지옥은 세상의 어떤 장소나 지하 세계의 어떤 장소가 아니고 하나의 실존적 경험인데 곧 죄와 하나님 없는 존재 위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의 경험이다.” 그런데 루터에 의하면 이 지옥의 고통을 저주받은 세계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셨다. 몰트만은 이 루터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지옥을 파괴시키기 위해서 지옥의 고통을 겪으셨다고 보고 있다. “겟세마네에서 골고다까지의 버려진 그리스도의 모습은 영원히 저주받은 한 인간의 버려진 모습이다.” 겟세마네에서의 그리스도의 기도는 하늘에 상달되지 않았고 응답되지 않았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옥의 고통의 서곡이었다. “그리스도는 게헨나와 지옥에 떨어지고 있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없는 세계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현재의 진노뿐만 아니라 미래의 진노와 미래의 지옥의 고통까지 겪고 계셨다.” 바로 이 그리스도의 지옥의 경험이 지옥을 열고, 지옥을 파괴시킨 결정적 근거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십자가가 지옥이 파괴되었다는 결정적인 보증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파괴된 지옥을 발견한 몰트만의 발견의 중요성을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대개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인간의 죄의 속죄만을 발견하는 데에 멈추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의 상징이지 파괴된 지옥의 상징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속죄의 상징으로만 멈추고 있으면 지옥은 파괴되어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죄용서 받은 사람만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행운을 얻게 될 뿐이다. 그런데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지옥을 경험하는 고난을 읽었고 여기에서 파괴된 지옥이라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개념을 도출해 내고 있는 것이다.
몰트만은 초대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그리스도의 지옥 여행이란 상징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지옥의 고통의 경험으로 재해석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만인의 죄를 속량하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지옥의 문을 열고 지옥을 파괴시킨 사건으로 이해했다. 이런 이해를 근거로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그리스도의 지옥 여행은 궁극적으로 지옥과 죽임이 하나님 안에서 폐기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지옥의 경험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그 지옥에서부터 꺼내주시는 분이시다. 모든 불행과 모든 버림받음과 모든 죄악과 모든 저주와 죽음과 허무에 굴복되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지옥의 경험으로 폐기되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옥은 열려져 있고, 닫혀진 영원한 지옥은 존재하지 않는다.
4. 죽은 자들에게 전파되는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의 장례식에서 목사는 무엇을 설교할 수 있을까?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들을 위해 죽었다는 것을 설교해야 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그들은 영원히 희망 없는 존재가 된 것이 아니고 믿지 않고 죽은 그 순간에도 여전히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로부터 오게 된 희망의 빛 가운데 있다. 개신교 전통은 믿지 않고 죽은 자들에게는 영원한 형벌밖에 없다고 가르쳤다. 그런 까닭에 믿지 않고 죽은 자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차단했고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도 거부했다. 그러나 몰트만에 의하면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는 초대 교회의 신앙 가운데 하나였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종교개혁자들이 가톨릭교회의 연옥설을 반대하고 교리에서 제외한 것은 몰트만에 의하면 매우 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연옥설은 가르쳐서는 안 되는 업적과 행위를 통한 구원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에 의한 구원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잘못된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연옥설에 대한 반대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교제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 가능성까지 잘라낸 것은 잘못된 발전이었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는 연옥설은 알지 못했지만 산 자와 죽은 자의 교제와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몰트만에 의하면 믿지 않고 죽은 자들도 그리스도 안에 있다. 벧전 4:6에 의하면 “죽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선포된다”고 기록되어 있고, 벧전 3:19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고 언급되어 있다. 몰트만은 이 본문들은 죽은 자들도 그리스도와의 연대성 속에 있다는 뜻이고 그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있다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고 보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은 자들도 희망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 죽은 자들도 복음의 소급하는 능력에 의해 신앙에 이를 수 있다. 죽음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을 기준으로 희망의 가능성을 차단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은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완전히 버려진 자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다. 십자가는 그 누구도 버리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현이다.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들을 바르게 하고 그들을 살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가는 희망과 은총의 빛이 그들에게도 작용하고 있다.
5. 인간의 결정과 하나님의 결정의 질적 차이
만유 구원론이 옳은가 이중적 심판론이 옳은가를 결정하는 문제는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결단과 인간의 결단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유일회적인 하나님의 영원한 결단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뿐만 아니라 ‘세상’을 그 자신과 화해시켰다(고후 5:19). 하나님은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셨다(요 3:16). 멸망에서 구원으로의 위대한 전환은 골고다에서 일어났으며, 우리의 신앙의 결단이나 전향의 시간에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이 전환의 개인적 경험이요 수단이지 그 전환 자체가 아니다. 나의 신앙이 나에게 구원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나에게 신앙을 마련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결정이 영원의 영역에 속한다면 신앙을 거부하는 우리의 결정은 시간의 영역에 속한다. 인간은 자신의 잘못된 결정으로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팔 수 있다. 그러나 그 잘못된 결정은 시간의 세계에 속하는 결정이다. 그는 결코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을 뒤엎을 능력은 없다.
인간의 결정에 의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정해진다면 태어나면서 죽은 아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없는 정신 장애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회교권에서 살다 간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과연 그리스도를 향해 결단할 수 있는 형편에 처해 있었을까? 인간의 결정에 의해 인간의 궁극적 운명이 결정된다면 인간은 자신에 대해 스스로 신이 되는 것이 아닐까? 몰트만에 의하면 인간의 운명을 궁극적으로 정하신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 인간의 궁극적 운명이 십자가에 계시 되었는데, 그것은 구원이고 기쁨이었다.
몰트만에 의하면 인간의 결정과 하나님의 결정은 대칭적인 것이 아니고 심각하게 비대칭적이다. 하나님의 결정이 절대 우위의 능력을 갖고 있다. 인간은 끝없이 그리스도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인간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영원성을 극복할 수 없다. 로빈슨(J. A. T. Robinson)에 의하면 인간의 자유 때문에 천국과 지옥의 양자택일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주는 구원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다. 지옥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의해 한계 지워져 있다. 몰트만은 이와 같은 로빈슨의 관점을 정당하다고 파악하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이미 하나님과 화해되어 있다는 바르트의 견해는 전적으로 옳다.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화해되어 있다. 그들이 그것을 알고 있든지 모르고 있든지 그것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정해진 객관적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되어 있는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믿지 않는 자들의 불신앙을 하나님께서 화해시킨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보다 크게 보면 안 된다. 하나님이 계시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이 원치 않는 어떤 것이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 불신앙과 저주는 인간의 자유와 시간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만유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6. 최후의 심판과 용서하시는 하나님
과거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역사 속에서 최후의 심판의 날은 무서운 날로 각인되어 있다. 그날은 모든 죄악이 드러나는 날인 동시에 그 모든 죄악에 대한 형벌이 시행되는 날이다. 그리고 이 최후의 심판의 날에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다. 물론 의인들은 그날에 상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누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전에 이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떨고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루터는 은총의 신을 발견하고 싶었고, 자신이 선택된 자 속에 들어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그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루터에게 하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도록 크게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 요한네스 폰 슈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z)였다. “네가 예정에 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면 상처받은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면 예정에 관한 논의는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다.” 요한네스 폰 슈타우피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내가 예정된 자인가 아닌가를 종결짓는 결정적인 자리라고 루터를 가르친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보면 내가 예정된 자라는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었다. 요한네스 폰 슈타우피츠의 이 가르침은 루터의 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542년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상처받은 그리스도를 보아라. 거기에 너의 선택이 확실히 있다.” 요한네스 폰 슈타우피츠의 가르침을 20세기에 가장 위대하게 계승한 사람은 칼 바르트였다. 바르트는 그의 예정론에서 십자가가 우리의 선택의 보증이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만민을 선택했다고 가르쳤다.
몰트만은 바르트의 이 예정론을 종말론적 차원으로 확대시켰다. 몰트만에 의하면 만민을 예정하고 만민을 화해시킨 십자가의 복음은 지금은 만민에게 “선포되고” 있고, 마지막 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는 십자가의 복음이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십자가의 그 깊은 곳 속에서 겪으신 것이, 그의 고난을 통해 극복하신 것이, 마지막 날 영광 가운데 드러날 것이다.” 몰트만은 마지막 날이 되면 십자가에서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가 보편적인 용서로 만민이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몰트만은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Jonann Christoph Blumhardt)가 뫼틀링엔(Möttlingen)에서 1872년 성금요일에 행한 “총체적 용서”라는 설교를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다. “ … 성금요일은 전 세계를 향한 총체적 용서를 선포한다. 그리고 이 총체적 용서는 이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헛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세상은 총체적 용서를 향하고 있고, 이 용서는 이제 나타날 것이다! 이 가장 중요한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성금요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만민을 용서하고 만유를 하나님과 화해시킨 십자가의 거룩한 사건의 깊은 의미는 아직 세상에 완전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현재 복음 전파를 통해 선포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거룩한 십자가 사건의 깊은 의미가 역사의 마지막 날에는 구체적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 몰트만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마지막 심판의 날은 기쁜 날이다. 그날은 두려운 날이 아니고 “가장 놀랍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날이다.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은총의 하나님이 심판의 주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 심판은 은혜의 심판이지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심판은 아니다. 죄인에게 죄의 값을 매기는 보복적인 심판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심판과는 거리가 멀다. 마지막 날의 심판은 총체적 용서와 만유의 회복이 구현화 되는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안에서 의도했던 바가 완성되는 날이 마지막 날인 것이다.
몰트만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악을 악으로 갚는 보복의 원칙은 십자가 신학에 모순된다고 보고 있다. 악을 악으로 갚는 보복의 원칙은 유대의 묵시문학 속에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것은 십자가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총과 심각하게 모순된다. 몰트만은 십자가 안에서 마지막 날의 심판자가 어떤 분인지 확실히 알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범죄인을 대신해서 죽으시고 범죄인을 무한한 사랑으로 용서하신 분이 마지막 날의 심판자이시다.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은 지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황제나 임금의 심판과는 다르다. 마지막 날의 심판은 만유를 용서하고 만유를 구원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의 역사의 완성이자 계시이다.
7. 만유의 구원
만유의 회복과 구원은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목표이다. 이 만유의 구원에는 일차적으로 모든 인간의 구원이 내포되어 있다. 악한 자들의 악은 심판받아 없어질 것이다. 죄도 없어지고 하나님이 원치 않는 모든 잘못된 것들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악했던 자들은 구원받을 것이다. 마지막 날까지 그들은 악한 자로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살해당한 사람들도 구원받을 것이지만 그들을 살인한 자들도 구원받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날까지 그들은 살인자로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의 살인은 용서되고, 그들은 악한 데에서부터 변화된 새사람들이 되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회복시키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고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은 마지막에 만인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만유를 구원하실 것이다. 전체 피조물과 우주를 구원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종국이다. 몰트만은 마지막 날에는 세상이 폐기된다는 루터파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있다. 마지막 날 건설된 세상은 현존하는 세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마지막 날 건설될 세계는 현존하는 세계가 아니라 변화된 세계이다. 몰트만은 마지막 날의 세계는 변화된 세계라고 보는 개혁파 신학을 긍정하고 있지만 이것에 한 걸음 더 나가 세상의 신격화를 주장한 동방 정교회의 정신에 더욱 긍정성을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 날 전체 피조물과 우주는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신격화를 주장한 동방 정교회의 신학이 옳다는 것이 몰트만의 견해이다.
그런데 몰트만의 신학에서 대단히 특이한 것은 만유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종국적으로는 마귀도 구원할 것이라는 사상이다. 하나님이 마귀도 구원할 것이라는 사상은 이미 초대 교회 때 오리겐에 의해 주장되기도 했지만, 기독교 전통 속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던 사상이었다. 몰트만에 의하면 불순종의 천사들까지도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된다. 몰트만에 의하면 마귀가 있고 지옥이 있는 한 아직 모든 것이 회복된 것이 아니다. 마지막 날은 끝없는 기쁨의 시작인데, 그날에는 악한 마귀까지 구원받고 만유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의 신성에 동참하게 되는 날이다.
Ⅲ.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에 대한 신학적 평가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은 대단히 충격적인 신학적 주장으로 기존의 전통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상당한 비판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이론이다.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에 대한 예상되는 신학적 비판은 크게 세 가지 영역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첫째,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은 성서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비판의 가능성이다. 이는 바르트의 예정론과 화해론이 성서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비판과 맥을 같이 하는 비판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브룬너와 에벨링과 같은 신학자들이 성서는 이중적 심판을 가르치고 있지 만인이나 만유를 구원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만유 구원론이 성서의 가르침에 상응한다는 몰트만의 성서해석의 중요한 내용들은 이미 밝힌 바와 같다. 그러나 만유 구원론이 옳다고 보는 사람들은 몰트만의 성서해석이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만유 구원론을 받아들이기 꺼리는 사람들은 그의 성서해석을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정초하고 있는 이론이다. 바르트의 예정론과 화해론의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인 것과 마찬가지로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그 근거이다.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의 정당성은 성서의 문자적 해석에서 최종적인 정당성의 여부를 판별하기 어렵다. 바르트와 마찬가지로 몰트만도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성서를 바라보는 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만인을 구원하고 만유를 구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은 기독교 전통과 심각하게 충돌된다는 비판의 가능성이다. 서방 교회의 신학의 신학적 기초를 세운 어거스틴(Augustinus)은 다수의 죄인들 가운데 소수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고 533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만유 구원의 가능성을 황제의 명령으로 거부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런 전통은 개신교회의 거의 모든 교회에 영향을 미쳤고, 세계 교회는 소수의 믿는 자만 구원에 이른다는 신학적 전통을 오늘에까지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신학의 교부였던 오리겐(Origen)이 몰트만과 같이 마귀의 종국적 구원의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었고 계몽시대 이후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와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이미 언급한 독일의 뷔르템베르크의 경건주의 신학자들 그리고 20세기에는 칼 바르트와 몰트만에 이르는 상당수의 신학자들은 영원한 지옥에 대한 부정과 만인 구원 내지는 만유 구원의 가능성을 열었다. 그러나 만인 구원 내지 만유 구원을 가르치는 신학의 흐름은 아직까지 기독교 내에 소수의 흐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은 이 소수의 흐름을 다수의 흐름으로 발전시키는 분수령이 될 가능성은 있지만 그것은 아직은 미래의 일이다.
셋째,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은 기독교 선교를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만유가 종국적으로 구원받는다면 오늘 애써 박해를 받으며 선교할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는 비판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끝없이 계속되는 저주가 있다고 할 때 선교는 여전히 절박한 것일 것이다.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이 기독교 선교를 위태롭게 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중간 과정은 보지 않고 끝에 있는 마지막 결말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잘못된 판단에서 기인한 것이다. 오히려 만유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어떠한 실망과 불가능함 앞에서도 불굴의 용기로 선교할 수 있는 것이다.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은 위와 같은 비판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한 신학적 공헌을 남기고 있다. 첫째,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이 바르트의 화해론 이후 남겨진 거대한 신학적 숙제를 해결했다는 점이다. 바르트가 살아서 구원론을 썼다고 할 때 몰트만과 같은 구원론을 썼을지는 물론 미지수이긴 하지만 몰트만과 유사한 구원론을 남겼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몰트만은 바르트의 예정론과 화해론이 기초를 닦고 기둥을 세운 터전 위에 집을 만들고 방과 창문을 만들고 정원을 만들어서 20세기 신학의 거대한 건축을 완성시켰다. 이제 바르트와 몰트만이 만든 20세기의 거대한 신학의 건축물은 21세기의 교회에 위탁되었다. 21세기의 교회가 이 거대한 신학의 건축물 속에 들어가 살지, 아니면 이 건축물을 버리고 과거의 신학의 집에서 살지는 21세기의 교회가 결정할 일이 되었다.
둘째,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은 수많은 신학의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데 장점이 있다. 우리는 흔히 교회에서 ‘석가도 지옥에 갔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이 질문은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 지옥에 갔다고 가르치는 가르침과 연계되어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의 배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지도 않았는데 그 시대에 살았던 훌륭한 인물들을 영원한 형벌에 처하는 것은 무언가 모순이라는 상식적인 생각이 깔려 있다. 인류의 절대다수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시기에도 도저히 복음을 받을 수 없는 환경 내에 살다가 죽어 갔다. 이들 모두에게 영원한 형벌이 가해진다고 할 때 상식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저을 가능성이 있다. 전통적 신학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은 이런 문제와 관련된 모든 신학적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 있는 것이다.
셋째,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은 만유를 위로하는 기쁨의 복음이라는데 큰 장점이 있다.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에 의하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좌절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다. 믿지 않고 세상을 떠나신 부모 때문에 언제나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신자들이 있다. 부모 생전에 복음에로 인도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영원히 절망할 필요가 없다.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은 영원한 절망을 없게 하고 만유를 희망과 은총의 빛으로 감싸는 데 큰 장점이 있다.
넷째,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은 가톨릭의 잘못된 연옥설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산 자와 죽은 자의 교제를 가르친 초대 교회의 정신을 일깨워 주고 있다는 점에 장점이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산 자나 죽은 자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의 희망 속에 있다. 이 공동의 희망 속에서 죽은 자를 위한 기도와 죽은 자에게 전파되는 복음의 가능성을 몰트만은 열고 있는데, 이것은 원래 초대 교회의 정신이었다. 몰트만은 개신교회가 상실한 산 자와 죽은 자의 교제를 회복시키고 있다는 점에 장점이 있다.
다섯째,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은 바르트의 만인 구원의 가능성을 넘어 구원의 영역을 만유로 확대하고 있다는 데 신학적 장점이 있다. 구원의 영역이 만유로 확대된 것은 1980년대부터 발전된 생태학적 신학의 공헌인데 몰트만은 이 생태학적 신학의 신학적 관점을 받아들여 만유 구원론을 확정한 것이다. 몰트만은 모든 피조물과 우주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르트의 신학을 넘어서고 있다.
위와 같은 모든 신학적 장점을 요약하면서도 넘어서는 가장 큰 몰트만의 만유 구원론의 장점은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이론이라는 점이다. 몰트만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지옥 여행을 발견했고, 죄의 용서뿐만 아니라 열려진 지옥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만유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지를 읽었고 이 하나님의 의지가 종국적으로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