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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의 산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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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알아보 기☜ 스크랩 지 설흔들...영신봉,삼신봉,남부능선,한벗샘,자빠진골
이제학(백두) 추천 0 조회 18 12.09.15 06: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영신봉



................한신(백무동)계곡↙.........................연하봉.
.......................................↖.........................../
.....................,,,..................↖............. ........촛대봉 ........도장골..길상사.
..................... ........................↖................세석 산장...음양샘~~.......거림
................................................................영신봉....한벗샘...........↗..삼신봉..... .........청학동.
.............................................................../................↘ ........↗
.......................................................... ..선비샘~~.......대성골
..........................................↙..............벽소령 산장.........↘


'세석평전의 철쭉' = 영신봉과 촛대봉의 철쭉.
세석평전은 화개 영신봉과 산청 촛대봉의 사이
해발 1,600m 고지대에 수만 그루의 철쭉꽃 평야

5월 하순 경 화려한 철쭉꽃의 요염한 붉은 색
오색 물결 등산객 인파에 신열을 앓는 지리산.

.....1463년(세조 9년) 이륙 유두류록 중......
"시내는 영신사의 작은 샘으로부터 근원이 되어
신흥사 앞에 이르러는 이미 큰 시내가 되어
섬진강으로 흘러들어 간다."고 밝혔다.
..............................................

.........산자분수령(山者分水嶺) 이론........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
벽소령에서 흐르는 물은 섬진강으로 흐르게 된다.

그러나 영신봉에서 흐르는 물은 방향 따라
섬진강으로도, 또는 낙동강으로도 흘러간다.

그러므로 경상도 서남부 일대 산지를 포함한
낙남정맥 그 시발점은 영신봉이 되는 것이다.
............................................

1. 화개 제일 1봉 영신봉(1652m).
2. 화개동천 젖줄이 되는 발원지.
3. 낙남정맥(落南正脈)의 시발점.
4. 불교문화 요람 화개 성산(聖山).
5. 눈보라에 탈진 조난사고 많은 곳.


영신봉은 낙남정맥의 분수령이다.
서남쪽 김해 신어산까지 뻗은 산맥.

낙동강을 사이에 둔 낙남정맥과 낙동정맥
언어, 풍습, 문화 등등에서 영호남의 분기점.

태백산에서부터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
부산 영남권을 동쪽으로 감싸안고 있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은 무슨 뜻일까?'

'산은 물을 건너지 않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
이조의 사학자 여암 신경준의 지형적 개념이다.

1903년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 산맥 제안.
'백두대간은 1정간과 13 정맥을 거느린다. '

지리산은 백두산 한라산과 더불어 3 신산.
지리산 3 신이 살고 있다는 세 봉우리 이름.
청학동을 감싼 삼신봉, 내삼신봉. 외삼신봉.

'영신봉에 신(神)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신봉은 음양샘 전설 속 영신의 이름을 본딴 곳.
호야가 아내 영신의 죽음을 슬퍼하다 바위가 된 곳.
이곳은 호야의 아내 이름에서 유래된 지명이..이색적.

'<음양샘의 전설>에서 유래된 지명일까?'

작은 샘물이 거대한 산봉우리 이름을 빚어낸 듯 싶다.
세석을 사이에 두고 영신봉은 촛대봉과 마주 보고 있다.
영신봉은 주 능선 上에서 <청학동 가는 길>의 들머리이다.

영신봉은 낙남정맥의 시발점이고
섬진강 따라 남해 바다로 뻗은 산맥.

호야가 영신을 향한 그리움을 잊지 못하는 듯.
섬진강 물결에 그리움 싣고 바다를 바라보는 듯.
원망이 가득한 마음으로 삼신봉을 내려다 보는 듯.

.........................................................
.........................................................

촛대봉은 음양샘의 전설 속 영신이 돌이 된 곳.
영신봉은 음양샘의 전설 속 호야가 돌이 된 곳.

혹시, 촛대봉은 비구니의 상징 아닐까?
그렇다면, 영신봉은 비구의 상징 일까?

불교에서는 비구보다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이 많다.
여성이 남성보다 전생의 업보가 많다고 여기는 탓이다.
전설 속 영신과 호야는 비구니와 비구의 상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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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초(靈神草)는 원지과(遠志科 Polygalaceae) 다년생초.
봄순은 나물, 가을 줄기와 잎은 진해, 거담, 강장 한약재
영신 = 사람의 영(靈) + 신(神) = 득도에 도달한다는 의미.

호야꽃(엉겅퀴) 원산지 : 한국, 만주, 중국 등등
꽃말 : 독립, 고덕한 사람, 근엄, 권위, 고독한 자랑
국화과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70cm-1m가량 잎과 줄기
자주색 꽃이 피면 꿀이 많아 벌과 나비가 많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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乎(호)는 '그런가?' 의문 또는 감탄 어조사
소리를 길게 끌어 마음 속 생각을 나타낸다.

也(야)는 '...라 이르다. 또' 라는 뜻의 어조사
땅 속에 겨울잠 자던 뱀이 고개들고 나오는 모양.

호야 = '이제야. 이에 있어서., 라 이르다. 또'란 뜻
즉, 호야는 인간의 본능적인 성애를 상징하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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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는 도를 닦거나, 기도 푸닥거리 굿판 벌이는 곳이 많다.
백무동 입구의 굴바위를 비롯한 곳곳에 무속신앙인들이 몰려든다.
지리산에서 도를 깨우치겠다며 명당자리 찾는 구도자가 많은 영신봉.
이런 기도처들은 일반 등산객들의 눈엔 쉽게 목격되지 않는 곳에 있다.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라고 입을 모으는 명당이.. 영신사 터.
영신봉 바로 남쪽 사면의 대성계곡 본류가 발원하는 곳에 위치
이곳 가는 길은 세석평전에서 주능선 따라가는 것이가장 빠르다.
영신사 터에 기도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접근로이다.

영신봉 등산 코스로는 대성골 따라 오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대성동-대성골>, <대성교∼세석평전> 두 코스는 등산지도에 표시.
그러나, 대성골 본류 따라 영신봉을 오르는 코스는 은밀히 숨어있다.

주민들은 이 비밀 루트를 오가며 당귀와 같은 약초를 채취하고
구도자들의 기도처인 영신사 터(영신대)로 물품을 운반해 준다.
의신마을 주민들은 이 루트 중간지점 대성폭포에서 봄맞이 놀이.

이 코스는 큰세개골 이정표에서 처음 찾아드는 길이 애매해,
상당한 혼란을 느낄만한 곳도 있어 경험자 안내를 받아야 한다.
영신대 가는 길은 큰세개골 이정표까지 대성골 코스를 따라간다.

대성동을 지나 작은 세 개골 다음 골짜기가 큰세개골이다.
큰세개골 이정표에서 세석 오른쪽 길을 따라 200m 쯤 지점.
그곳에서 왼쪽(계곡 방향) 숲속으로 영신대 비밀 통로 시작.

이 들머리는 꼼꼼하게 주의를 하며 보지 않으면 찾기가 어렵다.
일반 등산객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걸음 들어가면 호젓하고 기분좋은 오솔길이 연결돼 있다.
큰세개골에서 세석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온통 너덜지대 투박한 험로.

대성계곡 코스 가운데 가장 투박하고 힘이 드는 코스이다.
그런데, 큰세개골 영신대 비밀통로는 평탄한 길로 이어진다.

작은 지계곡을 건너가면 집터 흔적 같은 것이 나타나고,
부드러운 오솔길로 30분 오르면 대성계곡 본류와 만난다.
큰세개골 이정표 오른쪽 큰 계곡보다 오르는 시간이.. 절반.

그곳부터 오솔길은 계곡 오른쪽으로 20분 가량 더 이어진다.
그 뒤로는 무조건 계곡을 따라 오르면 대성골 상류 끝, 영신대.
대성골 본류 끝지점이고, 큰세개골 위 3Km부터는.. 계곡산행

이 계곡 주변은 설악산 산세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다.
골 양쪽의 암벽들이 내리꽂히면서 협곡을 이룬 경치가 그렇다.
그런데도 계곡은 폭이 넓어, 오르는데 아무 지장 없는 무릉도원.

대성골 상류는 마치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 길 같은 느낌마저 준다.
어떤 곳은 반석 사이로 맑은 물이 휘감아 흘러 '수중 궁전'과 같다.
대성폭포의 거대한 바위벽을 타고 오를 때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길.

계곡을 따라 계속 오르다보면 눈을 의심하게 하는 대성폭포.
'대성골 상류의 학소대'라고 불리울 만큼 똑같은 모양의 3 봉.
사람이 오를 수 없는 암봉 위에 독야청청 우뚝 서있는 소나무들.

첫 봉 아래에서 대성폭포(일명 : 선유동 폭포)가 쏟아져 내린다.
지리산에서 가장 큰 폭포인 듯 한데, 지도 상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 폭포는 갈 之자로 4 단에 걸쳐 120m 높이에서부터 떨어지는데
아래 쪽에서는 폭포 상단 부분을 볼 수 없을 만큼 아득한 높이이다.

이 폭포의 왼편으로 누구나 무난하게 오를 수 있는 길이 나있다.
4단 폭포 중간에는 100 명 정도 앉아 놀 수 있는 마당바위가 있다.
마당바위 뒤쪽에는 '선녀탕'으로 불리는 직사각형 욕조 반석이 있다.
이 폭포 왼쪽의 마지막 3봉 아래에 영신사 터(영신대)가 자리잡고 있다.

대성폭포에서 영신대까지는 약 1시간 거리의 계곡길이다.
마지막 구간은 극심한 비탈을 이루고 있어 체력소모가 크다.
급비탈을 올라 영신대에 닿으면 이곳 절경은 별세계를 빚는다.
이곳 초막이 헐린 흔적이 있고 샘터 제단 석문을 통과하면 용왕당.

이곳을 지나면 넓은 마당이 있고 학소대 같은 독립 암봉의 바로 앞
마당에는 서북쪽으로 미륵불, 칠성당이라 불리는 곳이 나란히 있다.
그 건너 숲속에 천막이 있고, 이곳 기도객들의 빨래가 널려 있는 곳.

영신대 주변은 바위마다 촛농, 타다 남은 향, 제기, 생필품 싼 비닐.
이곳에 많은 기도객들이 장터처럼 몰려들고 있는 사실을 대변한다.
이곳에서 '천왕성모 생일'에는 많은 음식을 차려놓고 제를 올린다

크고 작은 바위마다 잔돌을 쌓아 올려놓고, 어떤 바위에는 돼지머리.
영신대는 이제 도를 닦는 곳이 아니라 온갖 무속신앙터로 전락한 느낌

1472년 김종직이 지리산을 산행하며 이곳에 있던 영신사에 들렀다.
당시 영신사에는 스님이 한 사람, 벼랑 아래 돌부처 1좌가 있었단다.
그의 '유두류록'에는 이곳에 대한 소견과 경관에 대한 기록이 적혀있다.

김종직은 이조 시대에 '전설 속의 청학동'을 찾아나섰던 인물.
하여, 이곳을 '전설 속 청학동'이라 믿는 구도자가 많은 듯 싶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도 왜침이 잦았던 듯.

...............김종직의 '유두류록'지리산 산행기 ............................
김종직(金宗直)은 1431∼1492(세종 13∼성종 23) 이조 전기 문신
호는 점필재. 고려말 정몽주·길재의 학풍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
후일 사림의 조종(祖宗)으로 문장·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통하였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정여창·유호인 등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김굉필은 조광조(趙光祖)를 배출시켜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사림학자들이 훈척계열(勳戚系列)의 비리와 비도를 비판하고 나서자,
중국 고사를 인용하여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며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당파싸움의 구실을 삼아
훈척계열 유자광·정문형 등이 일으킨 무오사화.

이륙은 1449년(연산군 4)에 귀양을 가고,
사후에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저서로는 점필재집 청구풍아 당후일기,
편저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
...........................................................


유두류록' 지리산 산행기 - <1472년 기록>
..................................................................................................
세조대왕 시절에 자주 사람을 보내시어 향화를 받들게 하였던 곳이다.
돌부처 머리 한쪽이 일그러졌는데, 이것은 왜구가 찍은 것이라고 한다.
" 아, 왜구는 참으로 잔인한 도적. 생사람 껍질을 얼마나 많이 벗겼는가?"

천왕봉 성모석상과 이곳 돌부처처럼, 사람들에게도 해를 끼쳤을 것이다.
돌부처는 오른 팔에도 반점같은 상처를 입었는데, 이것은 불에 태운 흉터.
돌부처를 태우면 미륵을 만날 것이라며 상처를 남겼다니, 아!~황당무계함.'

어리석은 자들이 내세에서 이익을 얻으려고 돈과 포목을 바치니..,
그 정성이 가증스러울 뿐이다...돌부처 북쪽에는 두 바위가 솟았는데
소위, 창불대..한쪽 바위의 아랫 부분은 패이고 튀어나와 울퉁불퉁한데,
위는 날카롭고 쭈뼛..그 위에 네모꼴 평평한 돌을 얹어 넓이가 겨우 1 자.
스님 왈, 소원 이루기 바라는 사람들이 위태로움 무릅 쓰고 그 위에서 기도.

동쪽 바위틈 옥천 샘은 달인 차 맛과 같고 차다 하였지만 가보지 못했다.
샘의 서쪽엔 흙벽돌로 쌓아올린 높은 건물이 보였는데 옛 영신사라 하였다.
서북쪽 작은 석탑은 왜구들이 넘어뜨린 것을 쇠기둥을 꾀어 고쳐 세웠기 때문에
몇 층은 떨어져 나가고 없고, 영신대에서 오른편 비탈로 오르는 길이 있다. -중략 -
.......................................................................................................................

이곳에서 10 분 오르면 영신봉 이정표가 있고 세석산장은 10분 거리.
세석산장에서 영신대까지 찾아가는 길은 30분 거리로 어려움이 없다.
의신마을에서 대성골 따라 영신대에 오르는 시간은 4 시간 정도 소요.

세석으로 오른 후 하산길은 대성골 또는 거림 코스가 안전.
영신대서 대성골로 하산길은 험하고 길 찾기 어려워 위험.

이곳에 이르러서야 베일 속 수수께끼가 풀리는 듯 하다.
'음양샘의 전설'의 여주인공 '영신'은 실존인물인 듯 하다.
아울러, 대성골 역시 역사의 한 시점에는 가락국 영토인 듯.

조선시대에 김종직이 이곳을 다녀간 시기는 1472년 이었다.
대성골은 임진왜란(1592년) 당시 왜적에게 고초를 겪었던 곳.

그렇다면, 임진왜란 120년 전에도 왜적의 만행이 심했다는 사실.
산 사람을 껍질 벗겨 나무에 걸어 둘 만큼 잔인했던 왜적의 만행.
당시 이조왕조가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

이 깊은 곳까지 왜적의 만행 흔적이 남아있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조는 왜적의 만행을 응징도 하지 못한 채 또 다시 겪은 임진왜란.

영신사는 세조대왕이 늘 사람을 보내 향을 피우고 꽃을 받치던 곳.
김종직이 찾을 무렵에는 스님 한 사람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
불교가 이조 중반 이후 얼마나 박해를 받았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그당시 영신사는 이미 잘 알려진 유서 깊은 고찰이었다는 사실.'

그렇다면, 천왕성모를 숭배한 유래는 이조시대 훨씬 이전.
'노고단 선도성모'나 '마야계곡의 마야부인'보다 유서깊다.

천왕성모의 8 딸이 전국으로 퍼졌고 셋째 딸이 하동에 정착.
그것은 곧, <천왕성모의 전설>은 고대국가 시대 이전의 전설.
그렇다면, <천왕성모의 전설>은 신석기시대로부터 유래된 듯.

................................
................................
눈보라에 갇혀 조난사고 많은 곳.
.................................
.................................

요즘은 1박 2일에 지리산 종주.
성삼재 출발, 세석산장 일박 일정.
칠선봉 험로에서 영신봉까지가 고비.

'벽소령에서 세석산장 = 마의 구간.'

하여, '마의 구간'은 조난 겪기 쉬운 곳.
칠선봉 험로에서 지친 후 나타난 영신봉.
여기쯤 오면 이미 탈진상태에 이르게 된다.

사실, 1박 2일 지리산종주 일정은 무리.
그러나, 그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운 현실.
주말 여가를 이용해 완주를 하고 싶은 욕심.

어렵게 세석산장까지 예약한 상황이면 강행군.
초죽음을 무릎쓰고 목표를 향해 돌진하게 된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고전.

해는 저무는데 발걸음은 점점 더 무겁다.
세석산장은 아득한데도 힘든 칠선봉 험로
어둠속 그곳을 겨우 빠져나오면 영신봉이다.

'마치, 신기루와 같은 세석산장 불빛.'

발자국 옮길 때마다 다리가 무겁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멀어지는 산장 불빛.
특히, 겨울엔 눈보라 속 환상방황 잦은 곳.

산장 불빛이 보이면 긴장감이 풀어지는 탓.
그러나, 눈밭에 빠지면 진로 찾기가 어렵다.
키 넘게 쌓인 눈이 함정처럼 진로을 막는 탓.

'눈보라 칼바람에 파묻힌 등산로 찾아 방황.'

때로는 진로를 찾아 멀리 우회해야 한다.
그러나 지독스러운 눈보라에 가려진 시야.
이쯤 되면, 한치 앞이 안보여 눈벌판을 방황.

영신봉에서부터 세석평전까지는 광활한 평원.
하얀 눈속에 파묻혀 편안하게 잠들고 싶은 충동.
순간의 편안함이 죽음을 부르는 곳이 영신봉이다.

칠흙 같은 어둠과 지척을 분간못할 눈보라.
허리까지 빠지는 눈벌판을 헤쳐나가는 러셀.
눈앞에 빤히 보이는듯해도 머나 먼 산장 불빛.

'과연, 내가 살 수 있을까?'

이쯤되면 꿈도 부질없는 것.
부귀영화 명예도 소용없는 것
간절한 바램은 살고싶은 마음 뿐.

때로는 논앞에서 교차하는..삶과 죽음.
이때 치즈 한쪽은 불꽃같은 에너지 공급원.
생명력이 꺼져갈 때에 기적 같은 힘이 된다.

'평소에는 지극히 평온한 곳이..영신봉.'

산행을 하다보면 안전한 곳일수록 방심은 금물.
눈벌판 헤메이면 동상으로 발가락 절단하기 십상.
가벼운 산행이라도 장비를 제대로 갖추는 것이 정석.

'눈보라에 탈진 조난 초보자 많은.. 영신봉.'



..........
영신사지
...........


옛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나타나는 영신사지 기록
이륙, 김종직, 남효온, 김일손, 유몽인 이상의 5편 외
약 4편이 더 있어 모두 10여 편 정도에 소개된, 영신사.

대부분 천왕봉을 출발하여 영신사에서 일박
또는 영신사를 거쳐 갔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영신사 창건 연대는.. 어느 시대일까?

신라 사찰에 등장하는 가섭불 운운한 것.
좌고대에 최고운의 각자가 있었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면 신라시대의 사찰인듯.

1611년 유몽인이 영신사에 다녀왔던 기록
그 이후로 영신사를 보았다는 기록이 없다.

“옛 영신사 터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다만 우물터만 남아서 흐르고 있었다.”

1752년, 시천면 남사부락 선비 박래오.
기록을 보아 폐사 시기는 17세기 후반 쯤.

박래오 이후 그 곳을 다녀온 선비들의 기록
영신사 고허지(古虛址), 혹은 유허지(幽墟址)

한편, 기록 속 영신사에 상주하는 스님은 두어 사람
아니면, 없다고 하였으므로 영신사는 암자 수준인듯.
영신사 기록에 등장하는 좌고대, 창불대, 가섭전 지명.

<좌고대>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尺]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1472년 유두류록 -

2006년 현재 좌고대 최상단 부분은 붕괴된 흔적이 있으며,
실제로 그위에 올라가 보면 세석평전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섭대>

"……절의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일구(一軀).
세조 대왕 때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다.
그 석가섭의 목[項]에도 이지러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인은 참으로 구적(寇賊)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단참(斷斬)의
화를 입었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인형(人形)을 닮은 때문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괴(荒怪)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자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전포(錢布)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 1472년 유두류록 -

가섭대는 가부좌한 부처를 대좌에 안치한 형상
영신사지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가섭대.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라고 표현을 한 본문의 대목에서 알 수가 있듯이
영신사지의 가섭불은 부처를 닮은 바윗덩어리이다.


<창불대>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

여기에서 두원곶, 여수곶, 섬진강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1472년 유두류록 -

남부능선 상에 위치한 일명 병풍바위라고 부르는 곳이다.
창불대와 영신사지와의 거리는 직선으로 약 300m 정도로
영신사지에서 이곳까지 길이 뚜렷하고, 이 곳에 올라서면
영신사지는 발아래 펼쳐져 섬진강 물줄기가 조망된다.


<옥청수와 우청수>

")……그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中?), 혜산(惠山)도 이보다 낫지 못할 듯.……"

- 1472년 유두류록 -

절터 양 가장자리 부분에 아직도 샘터 흔적이 있으며,
샘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영계(靈溪)와 옥천(玉泉)으로,
지금도 작은 내를 이루어 명경같은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영신사 산 아래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6.25 전까지는 여섯 가구 화전민 마을터.
농사를 짓고, 약초를 캐며 살았다고 한다.

기온이 너무 차고 바람이 심해 오직 감자 농사 뿐.
6.25 전쟁이 일어나 그 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단다.

그 때까지만 해도 가섭불 아래에는 작은 당집이 있어
멀리 산 아래에서 찾아오는 기도객 들이 있었다고 하며,
세석 군데군데 살던 주민들이 치성을 드렸던 곳이라 한다.

현재 영신사지로 추정되는 수천평 터는 화전 흔적
아직도 화전민들의 세간살이 흔적이 나뒹굴고 있다.
천년 가람터 '영신사지'는 옛 기록속에만 존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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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정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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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주능선에서 가장 신령스러운 영신봉에서 시작
경남의 산들을 거쳐 낙동강 하구에 잠기는 221㎞ 능선

'북쪽으로 줄곧 낙동강을 받드는 낙남정맥.'

지리산 영신봉에서 남하하다가 옥산(614m)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곡산(543m), 여항산(744m),
무학산(763m), 구룡산(434m), 대암산(655m)을 거쳐
낙동강 하구를 지키는 분산(盆山)에서 가라앉는다.

영신봉에서 시작해 삼신봉 지나 하동까지 내려와
고성의 대곡산 넘어 함안 여항산 타고 마산 무학산
창원 정병산, 김해 동신어산 밟고, 낙동강에서 마감.

동북으로는 임천강, 경호강, 남강이 합류하는 낙동강
남서쪽으로 섬진강이 스며든 남해바다를 경계 지으며
남부 해안지방의 수분령 낙남정맥은 옛가야국 문화권.


<낙남정맥 1차~ 20차 구간>

1차 구간은 낙동강변에서 신어산을 넘어 영운리고개까지.
2차 구간 김해 신어산 서봉 영운리 고개~ 덕암 공원묘지
3차 구간 경남 김해 덕암 공원묘지- 불모산 용지봉까지.
4차 구간 불모산 용지봉- 경남 창원 소복재까지
5차 구간 소목재~송정고개 14.2km

6차 구간 경남 마산시 화성동 송정고개~ 예곡동 쌀재 9.72km
7차 구간 마산시 예곡동 쌀재- 대산 - 광려산 - 한치 8.05km
8차 구간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한치 - 봉화산 서북산 여항산 오곡재 12.67km
9차 구간 오곡제 - 발산재 8.85km
10차 구간 마산시 진전면 발산재 - 고성군 구만면 새터재 9.3km

11차 구간 새터재 - 성지산 - 큰재 10km
12차 구간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 큰재 - 절골 고개 9.6km (1998.06.24)
13차 구간 고성군 상리면 망림리 절골재- 백운산 -부련이재 -봉대산 - 돌장고개 15.4 km
14차 구간 진주시 금곡면 사천읍 돌장고개 - 무선산 - 170m봉 - 94m봉 11.4km
15차 구간 진주시 정촌면 94m봉 - 모산재 - 실봉산 - 유수재 9.3km (1998.09.02)

16차 구간 유수재 - 선들재 10.3km (1998.09.25)
17차 구간 선들재 ~ 오랑동 9.8km (1998.10.29)
18차 구간 사천시 곤명면 오랑동 -배토재 - 602m -547m - 돌고지재 13.9km
19차 구간 돌고지재 ~ 묵계치 14.75km
20차 구간 묵계치~영신봉 10.3km (1998.12.10)




삼신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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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샘의 전설'속 산신령은 어디에 살까?

지리산 산신령 셋이 모여 산다는 전설의 고향.
영신과 호야에게 혹독한 형벌을 내렸다는 산신령.
3 산신령이 살고 있다는 곳으로 한번 찾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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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풍수지리학'을 탄생하게 한 뿌리를 갖고 있는 곳.
'이조시대의 예언서' 정감록에 의하면 '이상향'은 삼신봉 아래.
지리산 주능선에서 남쪽으로 벗어나 청학동을 감싼듯한 삼신봉.

영신봉에서 남부능선따라 정남향 10km 아래 삼신봉
<영신봉>. <내,외삼신봉> <삼신봉>은 각각 10Km 간격.
<삼신봉, 내 삼신봉, 외삼신봉> 3봉은 3神이 산다는 곳.

<삼신봉> 등산 코스는 오른쪽 외삼신봉, 가운데 내삼신봉, 왼쪽 쇠통바위.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100 리 주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는 '지리산의 전망대'.
청학동 마을에서 한바퀴 돌아오는 산행은 이 마을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 된다.

2004년 7월 지리산 순환도로 개통에 따라
진주-대전 고속도로 산청IC에서 1시간 이내.
터널이 뚫려 청학동을 찾는 사람이 늘어났다.

삼신봉(三神峯)은 지리산 주능선 전망대
악양 형제봉 능선과 남해의 탁트인 전경
인적 드문 남부능선 한가운데 솟은 삼신봉.

동으로 가면 묵계치,
서로 생불재(상불재),
남으로 가면 청학동,
북으로 수곡재와 세석

사통팔달 요충지

청암면 묵계리 청학동
삼신봉 3km 아래 위치
천년전 이상향 청학동.

고운 최치원 선생의 자취를 비롯.
쌍계사, 화개동천 수많은 시인묵객
이상향을 찾아 이 일대 중심으로 입산

세석에서 10km 남쪽으로 뻗어내린 삼신봉
남부능선 코스= 내삼신봉-상불재 - 형제봉
남부능선 전체구간은 세석에서 근 1백여리.

'주능선에 버금가는 장대한 능선.'

삼신봉 아래 쌍계사, 청학동, 세석산장 이정표
여기서 쌍계사 방면 능선길을 따라가면 송정굴,
내삼신봉, 쇠통바위를 거쳐 상불재까지 5km 남짓

'환상적으로 어우러져 있는 기암절벽.'

송정굴을 길이 20m, 폭 10m, 높이 1.5∼2m 관통굴.
송정 하수일 선생의 피난처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
여기서 좀 더 가면 만나는 거대한 암봉이 내삼신봉

'마치 금강산 한 부분을 옮긴듯 하여 일명 신선대.'

신선대 절경을 지나 자물쇠 형태의 쇠통바위
학동마을 열쇠 바위로 열면 천지개벽이 일고
천국이 열린다고 청학동 주민들은 믿고 있다.

두 개의 큰 바위가 머리를 맞댄 채
그 사이에 구멍이 일명 열쇠구멍이다.
이 구멍이 열리는 날 천지개벽 후 천국.

쇠통바위를 지나면 나오는 삼거리가 상불재.

상불재는 3리로 불일폭포로 향하는 등산로
남부능선을 이어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다시 청학동 마을로 돌아가는 등산로 등이 그것.

상불재는 불일폭포의 계곡 이름 중 계곡 하류,
불일폭포 주변은 하불(下佛), 상류는 상불(上佛)
상불재 생불(生佛)재 또는 성불(成佛)재로 불린다.

佛자 지명은 쌍계사를 중심으로 한 불교문화 영향
삼신봉 바로 발아래로 흐르는 단천골, 선유동계곡
단천골과 선유동 화개동천 등산로는 연이어진 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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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삼신봉은 도교에서 신선이 산다는 상상의 산.
중앙 아시아 지상에서 가장 높은 마고성 여신의 영역
동해가 3번 뽕밭 될 만큼 오래 산 할머니 신이..마고.

중앙아시아 지역 '인간의 시조'이자 창조신..마고.

풍기 쪽 죽령 옛길 풍광 인근 산에 마고할미 전설.
힘이 장사라 앞치마로 이곳에 돌을 날라 쌓았다 한다.
또한 충주 일대의 마고할미들이 이곳에서 서로 힘자랑

'마고할미들이 던진 돌이... 입석리의 선돌.'

그밖에 지리산, 해남, 강화도, 경기도 양주, 충북 보은 등지
마고할미 설화에서 유래된 지명이 노고단, 노고산, 노고산성.
그밖 여신으로 지리산 성모, 가야산신 정견모주, 하백녀 유화

한편 중국 대모신(大母神)으로 인류를 창조한 여와(女)가 있고,
서왕모, 무라(武羅), 출산을 돌보는 해와 달의 어머니 희화(羲和)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나오는 가이아와 헤라 또한.. 서양의 지모신

지리산 삼신봉은 이조시대 역사적 배경이 물씬 풍기는 듯.
지리산 곳곳마다 배여있는 가락국의 흔적에서 벗어난 느낌.
삼신봉은 지리산에서도 특이한 사상적 배경을 안고 있는 곳.

'영신봉 아래 남쪽으로 뻗은 '남부능선'에 있는 삼신봉.'




남부능선



지리산에서 최고 비경 코스는 단연, 남부능선.
지리산에서 가장 비극적인 역사현장, 남부능선.
빨치산 정예 유격대 남부군은 남부능선에서 유래.

.................주능선 전망대 같은 비경 코스........................
세석 -2Km- 1,050m갈림길 -3Km- 한벗샘 -5Km- 삼신봉
-1.5Km- 송정굴 -3.5Km- 생불재삼거리 -2.5Km- 불일폭포
-3Km- 쌍계사 -0.5Km- 용강리(총 20 Km, 오르막 7시간 40분)

삼신봉에서 동쪽으로 10분쯤 내려가면 청학동으로 빠지는 길
원삼신봉에서 청학동 1시간, 구경할만한 곳은 '터골'의 <삼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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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남쪽 전망대로 알려진 삼신봉
그곳에서 영신봉까지 이어진 남부능선.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등산로.

등산로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붉게 녹슨 포탄들.
붉은 녹은 지난 반세기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듯.
남부군을 소탕하려 대성골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흔적.

<반란의 역사> 격전지였던 남부능선.
아직 끝나지 않은 이데올르기의 상처들
아직도 아물지 못한 상처로 남아있는 곳

모순된 역사와 낡은 이데올로기가 빚은 참상.
그로 인해 비참하게 목숨을 잃고 떠도는 영혼들.
세월이 흘렀어도 당시 참상이 서려있는 남부능선.

인간의 본능적 절규가 터져나왔을 그곳 골짜기
부모형제 아내와 아들 딸 떠올리며 숨져간 그들
사슴의 눈물 만큼 깨끗했을 맑은 개울에 흘린 피.

뜨거운 피를 품으며 고꾸라져간 수많은 생명들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단 하나의 목숨.
그것을 버린 그들의 궁극적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죽음앞에서 마지막 부르짖고 싶었던 절규.

아침이슬처럼 남부능선에서 흔적없이 사라진 그들.
그들이 목숨을 받쳐가면서 지키려한 것은 무엇일까?

반세기 세월 속에 묻어버린 역사의 현장
뼈속깊이 시린 애환은 차라리 서러운 희열.
그들이 지리산의 품속에 남기고 간 통곡의 한.
이젠 미래의 역사에 그 서러움 묻어야 할 영혼들.

'이젠 여기에서 고이 잠드시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토벌군이 부른 '남부군'
이현상 부대 또는 '나팔부대'라고 불리던 좌익.
정식 호칭은 '조선인민 유격대 독립 제 4 지대'.

남한 최초의 조직적인 좌익 빨치산 부대였고,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 이현상의 직속부대.

1949년 이래 소백산·지리산 지구 공비토벌전
교전 횟수 1만 717회, 전몰군경 수는 6,333 명
빨치산 사망자는 대략 1만 수천 명으로 추정된다.

1952년 3월 15일 전북 남원 백선엽 야전군 사령부.
일명 '백야전사'는 토벌임무를 마치고 해체되었다.
1952년 4월 남한에서 활동해온 빨치산 지대는 해체

남한 전역이 5개 지구당으로 개편되면서 분산활동.
정순덕 여인을 마지막으로 이땅에서 사라진 남부군.
그 역사를 떠오르게 하는 흔적이자 지명인 남부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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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신봉에서 영신대 거쳐 삼신봉으로 뻗어 내린 남부능선
세석에서 전나무와 활엽수 숲길을 따라 쌍계사 쪽으로 30분.
기도 터와 음양샘을 지나 조금 더 가다보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은 거림골로 하산하는 길
오른쪽으로 10 분 더가면 갈림길
오른쪽은 대성동 거쳐 쌍계사 가는 길.

왼쪽은 남부능선 가는 길이고 10분 후 큰 석문이 나온다.
두 길 넘는 바위벽 사이로 길이 있고 천정바위가 덮혀있다.

대패로 깍아 세운 듯한 바위 사이로 들어서면
대성골 바람이 땀을 식혀주는 골 안은 온통 숲.
구름 속에서 솟은 봉우리들이 다도해로 변한다.

석문에서 듬성듬성 바위가 솟은 돼지바위 능선길 1시간.
산죽 봉우리 북쪽으로 촛대봉과 연하봉, 제석봉, 천왕봉
특히 촛대봉은 팔을 쭉 뻗으면 잡힐 듯이 가깝게 보인다.

눈이 덮인 겨울엔 큰 나무가 적은 촛대봉은 만년설 고산.
서쪽으로는 노고단으로 이어진 100리 주능이 시야에 가득.
발목까지 빠지는 눈속 능선길은 온갖 동물들의 발자국 흔적.

손바닥만한 꽃 무늬 야생동물 발자국부터
멧돼지, 고라니 등등 이름모를 동물 발자국.

남부능선이 워낙 인적이 드문 탓일까?

천왕봉을 왼쪽 지척에 두고 발걸음마다 그 모습이 달라진다.
헬기 착륙장이 있는 초원지대에서 10분 가면 박단재가 나온다.
오른쪽은 단천 왼쪽으로는 거림으로 내려가는 길이 마주치는 곳.

박단재는 수곡재라고도 하고 '엎어진 뜰'이라고도 부른다.
박단재에서 거림 방향으로 150 m 내려가면 맑은 샘이 나온다.
음양수와 삼신봉 사이의 유일한 이 샘을 한벗샘( 수곡샘, 박단샘).

등산로에서 40m 떨어진 숲속의 빈터..한벗샘.

한벗샘에 들어서면 주변 경관이 아늑하게 들어온다.
한벗샘 가까이 3~4용 텐트 한 동 칠 수 있는 야영장.
예전에는 남부군 식수원, 지금은 야생동물에게 식수원.

여기서 삼신봉까지는 3 km 정도 될까?

거리는 얼마 안되지만 여러 재와 봉우리를 넘다보면 힘든다.
첩첩산중 멀리 왕시루봉, 노고단, 반야봉 연봉들의 웅장한 모습.

병풍처럼 시야를 가로막는 능선을 지나면 돌단이 있는 삼신봉.
청엄, 화개, 시천 3개 면의 삼각지점에 정걸방이 쌓았다는 돌단.
매년 곡우날, 삼신봉 아래 청학동 사람들이 삼신제를 올리는 곳.

삼신봉(1,284 m)에서는 다도해와 남해 섬이 보인다.
동쪽 진주와 함께 멀리 진양호가 손바닥처럼 보인다.
삼신봉에서 계속 종주하려면 오른쪽으로 전진해야 한다.

삼신봉에서 오른쪽 능선따라 5백 m 후 봉우리 하나 넘으면
동쪽으로 길이 꺽이면서 부처님처럼 보이는 암봉이 미륵바위
10m 높이 바위 주변엔 금강산 일부를 옮겨 놓은 듯한 기암괴석.

미륵바위 오른쪽 망실봉을 지나
암봉 서쪽으로 아슬아슬 트래바스

조금 더 가면 오른쪽 능선 아래로
갈림길 10m 지점에 송정굴이 있다.

송정굴 동쪽 능선에는 높이 100m 신선대.
옛 신선이 쌓아 놓았다 하여 신선대이다.
이곳 내삼신봉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삼신동.

삼신동 가는 길 건너편 능선 아래 자물쇠 같은 <쇠통바위>
학동 어가정 위의 바위 열쇄로 열면 이상향 문이 열린단다.
사람이 쌓은 듯한 돌무덤 위에 얹힌 미륵머리 형태의 독바위.

독바위에서 두 세 시간 더 가면 성불재가 나온다.
성불재 못 미쳐 오른쪽 길로 40분 내려가면 불일폭포.
성불재에서 보면 능선 끝에 우뚝 선 형제봉(1,114m)

성불재에서 내원재까지 관목지대는 헤쳐나가기 애먹는 곳.
내원재에에서부터는 길이 편해 3시간이면 형제봉에 닿는다.
내원재에서 한시간 쯤 걷다보면 우뚝 솟은 시루봉이 나타난다.

시루봉과 이어진 능선은 오른쪽에 횡천강과 왼쪽의 악양골
그리고, 칠성봉, 구재봉을 연이어 하봉읍까지 계속 뻗어 있다.
시루봉 못 미쳐 왼쪽 능선길로 가면 원강재 건너 형제봉에 이른다.

형제봉 정상에 서면 발 아래 신선봉(600m)이 있고
그 아래 능선은 섬진강으로 흘러 서서히 잠겨 간다.
형제봉에서 악양골로 내려오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

삼신봉에서 남부능선 종주를 끝내려면 왼쪽 능선을 타면 된다.
초원길을 10 분 내려가 <갓거리재> 왼쪽 길따라 내려가면 거림.
능선길로 30분 가면 미륵봉 아래에 미륵암터.(6.25 전란에 소실).

'나무아미타불' 이라 새겨 놓은 큰 절벽 아래에 샘이 음양수.

삼신봉에서 청학동으로 가려는 사람은 갓거리재에서 오른쪽 길.
개울 따라 40분 내려와 개울 건너 오른쪽 비탈길 10분이면 청학동.




한벗샘.




한벗샘은 자빠진골(엎어진 뜰) 발원지.
남부능선 상 깊고도 외딴 산속 옹달샘.
그 작은 샘이 빚어낸 광활한 자빠진골.

거림과 도장골 사이에 있는 자빠진골.
거림은 세석평전 가는 지름길 들머리.
연하봉과 촛대봉 사이에 있는 도장골.

세석평전에서 삼신봉으로 이어지는 남부능선
남부능선 중간 오른쪽 40m 아래 있는 한벗샘.
남부능선 상에 한벗샘 위치를 알려주는 이정표.

계곡의 본류 만도 60리에 이르는 거림골
철쭉꽃 피는 봄이면, 등산객 인파의 물결.

산청군 시천면 덕산에서 중산리로 가다가
곡점마을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면 거림.

산꾼들은 밋밋한 거림골 산행보다
남부능선으로 오르는 자빠진골이나
촛대봉으로 오르는 도장골을 찾는다.

'자빠진 골' '엎어진 뜰'로 부르는 남부능선 상 계곡
이름그대로 산이 자빠진 듯, 엎어진듯 완만한 경사면.
그러나 계곡의 수려한 경관은 어느 골짜기 못지 않다.

골짜기가 자빠지고 엎어지며 패인 원시성이 돋보인다.
단지 아쉬움이 있다면, 접근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거림 매표소를 지나 한동안 걸어야 하는 것은 물론,
지리산 등산로에도 나와 있지 않을 정도로 감추진 길.
반면, 도장골은 와룡폭포까지 길이 또렷해 찾기는 쉽다.

도장골 윗용소로 올라가면 이현상 남부군 지휘소 흔적.
그 만큼 도장골이 은밀하고 깊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
늦가을 낙엽이 떨어지고 나면 잡목 사이로 토굴과 돌담.

한벗샘에서 최단 남부능선 하산길은 거림
거림 인근에는 찾아가볼만한 명소가 많다.

산청 양수발전소,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
남명 조식유적지, 대원사, 내원사, 덕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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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벗샘에서 세석평전이 가까워지면 음양수.
남부능선 등산로가 끝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하여, 한벗샘은 남부능선 중간에 유일한 샘물.



덧말.


삼신봉에서 출발해 남부능선이 끝날 무렵
'나무아미타불' 바위벽 아래 있는 음양수.
음양수 팻말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는 곳,

세석평전에 도착하기 직전 양지바른 휴식처.
바위벽 아래 두 구멍에서 각각 샘물이 나와
하나로 합쳐진 음양수는 '전설의 고향'이다.




자빠진골.



세석평전 오르는 길에 자빠진골(일명: 엎어진 뜰).
거림골에서 남부능선 중턱으로 이어지는 자빠진골
세석평전으로 오르는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는 골.

골짜기가 자빠진듯 경사가 완만해..자빠진골.
뜰이 엎어진 듯 약간 기운 산세라..엎어진뜰.

빨치산들 시신이 즐비하게 자빠져..자빠진골
총맞고 부상당한 빨치산들이 엎어져..엎어진뜰
대성골 빨치산 토벌작전 당시 격전장..자빠진골.

반세기전 토벌군 화염공격으로 사라진 원시림
지금은 무성한 잡목 숲으로 빼곡하게 뒤덮혔다.
불과 반세기만에 옛 모습을 찾아가는 무성한 숲.

자빠진골은 거림과 대성골 주민들 삶의 통로.

현재 이 길을 오가는 주민들은 거의 없지만,
고로쇠물 채취를 위해 거림 주민들이 오른다.

세석평전 ~ 거림마을(경남 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8Km.
한신계곡 따라 오르는 북쪽길 10Km 보다 거리도 가깝고
경사도가 완만해 3시간 정도이면 넉넉하게 오를 수 있다.

거림~세석평전은 지리산 능선으로 오르는 최단코스.

세석평전에 철쭉꽃 필 무렵에는 정체현상이 심각.
그러나, 거림마을에서 일박하고 오르면 편안하다.

거림마을은 지리산 산간마을 중 비교적 깨끗한 편이다.
시천면 소재지 덕산을 지나 중산리 5Km 못 미친 곡점리
그곳에서 7Km 거슬러 오른 해발 600m 깊은 산중에 있다.

왕복 1차선 진입도로 7Km가 좁은 것이 결점이지만,
적당한 간격의 갓길 포켓이 있어 차량 소통이 원활.

거림마을을 산행 기점과 종점으로 정했을 경우
가장 좋은 코스는 자빠진골을 이용한 타원 루트.
거림마을 -세석평전-음양수-수곡재-자빠진골-거림

거림에서 도장골 입구를 건너 매표소를 통과하면
신선바위가 반겨주고, 이곳 숲사이 오솔길이 시작.
세석까지 8Km 구간 중 1,050m 갈림길 1Km만 오르막

원래 이 코스는 거림 다음 850m 갈림길에 첫 이정표
<표고 850m, 세석 5.5Km, 거림 2.5Km> <<통행금지>>

<<통행금지>> 그 갈림길은 자빠진골을 따라
남부능선 한가운데 지점인 수곡재를 넘어서
반대편 수곡을 따라 대성마을로 이어져 있다.

대성동 주민들이 거림을 거쳐 덕산시장으로 가던 길,
또 이곳 주민들이 산채나 약초를 뜯고 목기를 깎거나
사냥하던 길이고 자빠진골은 지난날 대규모 도벌 현장.

원시림이 도벌로 자빠지고 엎어져 '자빠진 골' '엎어진 뜰'

1952년 1월 백야전(白野戰) 사령부 제3기 토벌작전 때
토벌군이 대성골을 불바다로 만들며 빨치산을 토끼몰이
빨치산 생존자들의 몸부림이 핏빛으로 아로새겨졌던 곳

그들의 몸부림이 아직도 자빠진골에 남아있는듯.

자빠진골 입구는 거림 주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들로부터 안내받아도 십중팔구 중간에서 길을 잃는다.
고로쇠 수액 채취길이 산길보다 뚜렷해 길을 잃기 때문.

자빠진골은 7부 능선까지 산죽과 싸리나무 밀림지대
그러므로 '치고 나가는 일'도 결코 만만하지가 않다.
자빠진골 끝 수곡재는 남부능선에서 가장 낮은 고개

서쪽으로 잘록하게 들어간 능선을 표적으로 삼지만
녹음이 울창하면 시야가 막혀 방향감각을 잃게된다.

자빠진골은 거림마을에서 세석고원으로 먼저 오른 뒤,
남부능선따라 삼신봉으로 내려가다가 수곡재에서 한벗샘
한벗샘은 남부능선 수곡재에서 자빠진골 쪽으로 200m 아래

남부능선은 부드러운 흙길로 이어진다.
때로는 큰바위 옆을 돌아가기도 하고,
기암을 통과하는 재미와 장쾌한 전망

세석산장 500m 남쪽 갈림길에서 대성골 방향
여기서 1Km 거리의 음양수샘까지는 평지 같다.
음양수 500m 남쪽 1,400m 갈림길에서 남부능선

서쪽 내리막길은 대성골 루트.

이 갈림길에서 전설의 고향 석문(石門)을 통과
수곡재까지 3Km, 남부능선 10Km 구간의 중간지점.
남부능선(삼신봉~ 세석평전) 수곡재에 한벗샘 이정표

한벗샘 주변에는 텐트를 몇동 설치했던 야영터가 있다.
한벗샘에서 자빠진골 따라 가려면 길을 잘 찾아야 한다.
인적이 없어 한벗샘 흐르는 방향 실개천을 따라가야 한다.

1시간 가량 내려서면 고로쇠 채취 비닐 파이프들.

이제부터는 어느 길이든 거림골로 합류되는 등산로.
수곡재에서 거림골까지 자빠진골은 크고 작은 돌들.
세석평전처럼 돌들이 뒤덮고 있지만, 낙엽수 원시림

지척을 구분못할 만큼 빼곡이 들어차 신빌운 느낌.
고로쇠물 채취가 끝나면 인적조차 느낄 수 없는 곳.
지리산의 적막함 속으로 깊이 빠져볼 수 있는 곳이다.

자빠진골 하산 시간은 1시간 30분 가량이면 충분하고,
다시 거림골을 건너 거림마을까지 닿는데 30분 걸린다.
거림-세석-남부능선 한벗샘-자빠진골-거림은 약 18Km.

'산행 소요시간 : 중식 및 휴식을 포함해 8시간.'

자빠진골은 얼핏보면 돌 투성이 비탈에 활엽수 원시림
그러나, 고로쇠, 석이버섯.등이 많은 주민들의 소득원.
바위 벼랑 끝에서 자라는 석이버섯은 부르는 게 값이다.

석이버섯 채취에 얽힌 여러가지 에피소드도 있다.

이 버섯을 채취해 고소득을 올린 이 일대 주민들이 많다.
수곡재 넘어 의신마을 조봉문 씨도 아내와 함께 가출하여
거림골에 텐트를 쳐놓고 석이버섯 채취로 돈도 제법 모았다.

그밖에 자빠진골에는 황철목, 마가목 한약재 나무가 많다.
거림 주민들이 이 골짜기를 자주 찾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자빠진골-수곡재-수곡골 옛길은 인적 끊긴 잡목숲으로 변모

수곡재에서 아무리 틈을 비집어봐도 길을 뚫을 수 없다.
거림골~ 대성골 옛길은 대성골에서 시작하면 연결이 가능.

대성계곡 문바위에서 계곡건너 수곡폭포를 거쳐 양진암.
스님 한분이 지키는 이 암자 뒤로 수곡재 능선까지 옛길
녹음이 우거지기 전까지는 자빠진골 산행을 시도 해 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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