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석평전의 철쭉' = 영신봉과 촛대봉의 철쭉. 세석평전은 화개 영신봉과 산청 촛대봉의 사이 해발 1,600m 고지대에 수만 그루의 철쭉꽃 평야
5월 하순 경 화려한 철쭉꽃의 요염한 붉은 색 오색 물결 등산객 인파에 신열을 앓는 지리산.
.....1463년(세조 9년) 이륙 유두류록 중...... "시내는 영신사의 작은 샘으로부터 근원이 되어 신흥사 앞에 이르러는 이미 큰 시내가 되어 섬진강으로 흘러들어 간다."고 밝혔다. ..............................................
.........산자분수령(山者分水嶺) 이론........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 벽소령에서 흐르는 물은 섬진강으로 흐르게 된다.
그러나 영신봉에서 흐르는 물은 방향 따라 섬진강으로도, 또는 낙동강으로도 흘러간다.
그러므로 경상도 서남부 일대 산지를 포함한 낙남정맥 그 시발점은 영신봉이 되는 것이다. ............................................
1. 화개 제일 1봉 영신봉(1652m). 2. 화개동천 젖줄이 되는 발원지. 3. 낙남정맥(落南正脈)의 시발점. 4. 불교문화 요람 화개 성산(聖山). 5. 눈보라에 탈진 조난사고 많은 곳.
영신봉은 낙남정맥의 분수령이다. 서남쪽 김해 신어산까지 뻗은 산맥.
낙동강을 사이에 둔 낙남정맥과 낙동정맥 언어, 풍습, 문화 등등에서 영호남의 분기점.
태백산에서부터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 부산 영남권을 동쪽으로 감싸안고 있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은 무슨 뜻일까?'
'산은 물을 건너지 않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 이조의 사학자 여암 신경준의 지형적 개념이다.
1903년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 산맥 제안. '백두대간은 1정간과 13 정맥을 거느린다. '
지리산은 백두산 한라산과 더불어 3 신산. 지리산 3 신이 살고 있다는 세 봉우리 이름. 청학동을 감싼 삼신봉, 내삼신봉. 외삼신봉.
'영신봉에 신(神)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신봉은 음양샘 전설 속 영신의 이름을 본딴 곳. 호야가 아내 영신의 죽음을 슬퍼하다 바위가 된 곳. 이곳은 호야의 아내 이름에서 유래된 지명이..이색적.
'<음양샘의 전설>에서 유래된 지명일까?'
작은 샘물이 거대한 산봉우리 이름을 빚어낸 듯 싶다. 세석을 사이에 두고 영신봉은 촛대봉과 마주 보고 있다. 영신봉은 주 능선 上에서 <청학동 가는 길>의 들머리이다.
영신봉은 낙남정맥의 시발점이고 섬진강 따라 남해 바다로 뻗은 산맥.
호야가 영신을 향한 그리움을 잊지 못하는 듯. 섬진강 물결에 그리움 싣고 바다를 바라보는 듯. 원망이 가득한 마음으로 삼신봉을 내려다 보는 듯.
지리산에는 도를 닦거나, 기도 푸닥거리 굿판 벌이는 곳이 많다. 백무동 입구의 굴바위를 비롯한 곳곳에 무속신앙인들이 몰려든다. 지리산에서 도를 깨우치겠다며 명당자리 찾는 구도자가 많은 영신봉. 이런 기도처들은 일반 등산객들의 눈엔 쉽게 목격되지 않는 곳에 있다.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라고 입을 모으는 명당이.. 영신사 터. 영신봉 바로 남쪽 사면의 대성계곡 본류가 발원하는 곳에 위치 이곳 가는 길은 세석평전에서 주능선 따라가는 것이가장 빠르다. 영신사 터에 기도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접근로이다.
영신봉 등산 코스로는 대성골 따라 오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대성동-대성골>, <대성교∼세석평전> 두 코스는 등산지도에 표시. 그러나, 대성골 본류 따라 영신봉을 오르는 코스는 은밀히 숨어있다.
주민들은 이 비밀 루트를 오가며 당귀와 같은 약초를 채취하고 구도자들의 기도처인 영신사 터(영신대)로 물품을 운반해 준다. 의신마을 주민들은 이 루트 중간지점 대성폭포에서 봄맞이 놀이.
이 코스는 큰세개골 이정표에서 처음 찾아드는 길이 애매해, 상당한 혼란을 느낄만한 곳도 있어 경험자 안내를 받아야 한다. 영신대 가는 길은 큰세개골 이정표까지 대성골 코스를 따라간다.
대성동을 지나 작은 세 개골 다음 골짜기가 큰세개골이다. 큰세개골 이정표에서 세석 오른쪽 길을 따라 200m 쯤 지점. 그곳에서 왼쪽(계곡 방향) 숲속으로 영신대 비밀 통로 시작.
이 들머리는 꼼꼼하게 주의를 하며 보지 않으면 찾기가 어렵다. 일반 등산객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걸음 들어가면 호젓하고 기분좋은 오솔길이 연결돼 있다. 큰세개골에서 세석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온통 너덜지대 투박한 험로.
대성계곡 코스 가운데 가장 투박하고 힘이 드는 코스이다. 그런데, 큰세개골 영신대 비밀통로는 평탄한 길로 이어진다.
작은 지계곡을 건너가면 집터 흔적 같은 것이 나타나고, 부드러운 오솔길로 30분 오르면 대성계곡 본류와 만난다. 큰세개골 이정표 오른쪽 큰 계곡보다 오르는 시간이.. 절반.
그곳부터 오솔길은 계곡 오른쪽으로 20분 가량 더 이어진다. 그 뒤로는 무조건 계곡을 따라 오르면 대성골 상류 끝, 영신대. 대성골 본류 끝지점이고, 큰세개골 위 3Km부터는.. 계곡산행
이 계곡 주변은 설악산 산세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다. 골 양쪽의 암벽들이 내리꽂히면서 협곡을 이룬 경치가 그렇다. 그런데도 계곡은 폭이 넓어, 오르는데 아무 지장 없는 무릉도원.
대성골 상류는 마치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 길 같은 느낌마저 준다. 어떤 곳은 반석 사이로 맑은 물이 휘감아 흘러 '수중 궁전'과 같다. 대성폭포의 거대한 바위벽을 타고 오를 때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길.
계곡을 따라 계속 오르다보면 눈을 의심하게 하는 대성폭포. '대성골 상류의 학소대'라고 불리울 만큼 똑같은 모양의 3 봉. 사람이 오를 수 없는 암봉 위에 독야청청 우뚝 서있는 소나무들.
첫 봉 아래에서 대성폭포(일명 : 선유동 폭포)가 쏟아져 내린다. 지리산에서 가장 큰 폭포인 듯 한데, 지도 상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 폭포는 갈 之자로 4 단에 걸쳐 120m 높이에서부터 떨어지는데 아래 쪽에서는 폭포 상단 부분을 볼 수 없을 만큼 아득한 높이이다.
이 폭포의 왼편으로 누구나 무난하게 오를 수 있는 길이 나있다. 4단 폭포 중간에는 100 명 정도 앉아 놀 수 있는 마당바위가 있다. 마당바위 뒤쪽에는 '선녀탕'으로 불리는 직사각형 욕조 반석이 있다. 이 폭포 왼쪽의 마지막 3봉 아래에 영신사 터(영신대)가 자리잡고 있다.
대성폭포에서 영신대까지는 약 1시간 거리의 계곡길이다. 마지막 구간은 극심한 비탈을 이루고 있어 체력소모가 크다. 급비탈을 올라 영신대에 닿으면 이곳 절경은 별세계를 빚는다. 이곳 초막이 헐린 흔적이 있고 샘터 제단 석문을 통과하면 용왕당.
이곳을 지나면 넓은 마당이 있고 학소대 같은 독립 암봉의 바로 앞 마당에는 서북쪽으로 미륵불, 칠성당이라 불리는 곳이 나란히 있다. 그 건너 숲속에 천막이 있고, 이곳 기도객들의 빨래가 널려 있는 곳.
영신대 주변은 바위마다 촛농, 타다 남은 향, 제기, 생필품 싼 비닐. 이곳에 많은 기도객들이 장터처럼 몰려들고 있는 사실을 대변한다. 이곳에서 '천왕성모 생일'에는 많은 음식을 차려놓고 제를 올린다
크고 작은 바위마다 잔돌을 쌓아 올려놓고, 어떤 바위에는 돼지머리. 영신대는 이제 도를 닦는 곳이 아니라 온갖 무속신앙터로 전락한 느낌
1472년 김종직이 지리산을 산행하며 이곳에 있던 영신사에 들렀다. 당시 영신사에는 스님이 한 사람, 벼랑 아래 돌부처 1좌가 있었단다. 그의 '유두류록'에는 이곳에 대한 소견과 경관에 대한 기록이 적혀있다.
김종직은 이조 시대에 '전설 속의 청학동'을 찾아나섰던 인물. 하여, 이곳을 '전설 속 청학동'이라 믿는 구도자가 많은 듯 싶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도 왜침이 잦았던 듯.
...............김종직의 '유두류록'지리산 산행기 ............................ 김종직(金宗直)은 1431∼1492(세종 13∼성종 23) 이조 전기 문신 호는 점필재. 고려말 정몽주·길재의 학풍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 후일 사림의 조종(祖宗)으로 문장·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통하였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정여창·유호인 등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김굉필은 조광조(趙光祖)를 배출시켜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사림학자들이 훈척계열(勳戚系列)의 비리와 비도를 비판하고 나서자, 중국 고사를 인용하여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며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당파싸움의 구실을 삼아 훈척계열 유자광·정문형 등이 일으킨 무오사화.
이륙은 1449년(연산군 4)에 귀양을 가고, 사후에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저서로는 점필재집 청구풍아 당후일기, 편저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 ...........................................................
유두류록' 지리산 산행기 - <1472년 기록> .................................................................................................. 세조대왕 시절에 자주 사람을 보내시어 향화를 받들게 하였던 곳이다. 돌부처 머리 한쪽이 일그러졌는데, 이것은 왜구가 찍은 것이라고 한다. " 아, 왜구는 참으로 잔인한 도적. 생사람 껍질을 얼마나 많이 벗겼는가?"
천왕봉 성모석상과 이곳 돌부처처럼, 사람들에게도 해를 끼쳤을 것이다. 돌부처는 오른 팔에도 반점같은 상처를 입었는데, 이것은 불에 태운 흉터. 돌부처를 태우면 미륵을 만날 것이라며 상처를 남겼다니, 아!~황당무계함.'
어리석은 자들이 내세에서 이익을 얻으려고 돈과 포목을 바치니.., 그 정성이 가증스러울 뿐이다...돌부처 북쪽에는 두 바위가 솟았는데 소위, 창불대..한쪽 바위의 아랫 부분은 패이고 튀어나와 울퉁불퉁한데, 위는 날카롭고 쭈뼛..그 위에 네모꼴 평평한 돌을 얹어 넓이가 겨우 1 자. 스님 왈, 소원 이루기 바라는 사람들이 위태로움 무릅 쓰고 그 위에서 기도.
동쪽 바위틈 옥천 샘은 달인 차 맛과 같고 차다 하였지만 가보지 못했다. 샘의 서쪽엔 흙벽돌로 쌓아올린 높은 건물이 보였는데 옛 영신사라 하였다. 서북쪽 작은 석탑은 왜구들이 넘어뜨린 것을 쇠기둥을 꾀어 고쳐 세웠기 때문에 몇 층은 떨어져 나가고 없고, 영신대에서 오른편 비탈로 오르는 길이 있다. -중략 - .......................................................................................................................
이곳에서 10 분 오르면 영신봉 이정표가 있고 세석산장은 10분 거리. 세석산장에서 영신대까지 찾아가는 길은 30분 거리로 어려움이 없다. 의신마을에서 대성골 따라 영신대에 오르는 시간은 4 시간 정도 소요.
세석으로 오른 후 하산길은 대성골 또는 거림 코스가 안전. 영신대서 대성골로 하산길은 험하고 길 찾기 어려워 위험.
이곳에 이르러서야 베일 속 수수께끼가 풀리는 듯 하다. '음양샘의 전설'의 여주인공 '영신'은 실존인물인 듯 하다. 아울러, 대성골 역시 역사의 한 시점에는 가락국 영토인 듯.
조선시대에 김종직이 이곳을 다녀간 시기는 1472년 이었다. 대성골은 임진왜란(1592년) 당시 왜적에게 고초를 겪었던 곳.
그렇다면, 임진왜란 120년 전에도 왜적의 만행이 심했다는 사실. 산 사람을 껍질 벗겨 나무에 걸어 둘 만큼 잔인했던 왜적의 만행. 당시 이조왕조가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
이 깊은 곳까지 왜적의 만행 흔적이 남아있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조는 왜적의 만행을 응징도 하지 못한 채 또 다시 겪은 임진왜란.
영신사는 세조대왕이 늘 사람을 보내 향을 피우고 꽃을 받치던 곳. 김종직이 찾을 무렵에는 스님 한 사람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 불교가 이조 중반 이후 얼마나 박해를 받았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그당시 영신사는 이미 잘 알려진 유서 깊은 고찰이었다는 사실.'
그렇다면, 천왕성모를 숭배한 유래는 이조시대 훨씬 이전. '노고단 선도성모'나 '마야계곡의 마야부인'보다 유서깊다.
천왕성모의 8 딸이 전국으로 퍼졌고 셋째 딸이 하동에 정착. 그것은 곧, <천왕성모의 전설>은 고대국가 시대 이전의 전설. 그렇다면, <천왕성모의 전설>은 신석기시대로부터 유래된 듯.
................................ ................................ 눈보라에 갇혀 조난사고 많은 곳. ................................. .................................
요즘은 1박 2일에 지리산 종주. 성삼재 출발, 세석산장 일박 일정. 칠선봉 험로에서 영신봉까지가 고비.
'벽소령에서 세석산장 = 마의 구간.'
하여, '마의 구간'은 조난 겪기 쉬운 곳. 칠선봉 험로에서 지친 후 나타난 영신봉. 여기쯤 오면 이미 탈진상태에 이르게 된다.
사실, 1박 2일 지리산종주 일정은 무리. 그러나, 그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운 현실. 주말 여가를 이용해 완주를 하고 싶은 욕심.
어렵게 세석산장까지 예약한 상황이면 강행군. 초죽음을 무릎쓰고 목표를 향해 돌진하게 된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고전.
해는 저무는데 발걸음은 점점 더 무겁다. 세석산장은 아득한데도 힘든 칠선봉 험로 어둠속 그곳을 겨우 빠져나오면 영신봉이다.
'마치, 신기루와 같은 세석산장 불빛.'
발자국 옮길 때마다 다리가 무겁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멀어지는 산장 불빛. 특히, 겨울엔 눈보라 속 환상방황 잦은 곳.
산장 불빛이 보이면 긴장감이 풀어지는 탓. 그러나, 눈밭에 빠지면 진로 찾기가 어렵다. 키 넘게 쌓인 눈이 함정처럼 진로을 막는 탓.
'눈보라 칼바람에 파묻힌 등산로 찾아 방황.'
때로는 진로를 찾아 멀리 우회해야 한다. 그러나 지독스러운 눈보라에 가려진 시야. 이쯤 되면, 한치 앞이 안보여 눈벌판을 방황.
영신봉에서부터 세석평전까지는 광활한 평원. 하얀 눈속에 파묻혀 편안하게 잠들고 싶은 충동. 순간의 편안함이 죽음을 부르는 곳이 영신봉이다.
칠흙 같은 어둠과 지척을 분간못할 눈보라. 허리까지 빠지는 눈벌판을 헤쳐나가는 러셀. 눈앞에 빤히 보이는듯해도 머나 먼 산장 불빛.
'과연, 내가 살 수 있을까?'
이쯤되면 꿈도 부질없는 것. 부귀영화 명예도 소용없는 것 간절한 바램은 살고싶은 마음 뿐.
때로는 논앞에서 교차하는..삶과 죽음. 이때 치즈 한쪽은 불꽃같은 에너지 공급원. 생명력이 꺼져갈 때에 기적 같은 힘이 된다.
'평소에는 지극히 평온한 곳이..영신봉.'
산행을 하다보면 안전한 곳일수록 방심은 금물. 눈벌판 헤메이면 동상으로 발가락 절단하기 십상. 가벼운 산행이라도 장비를 제대로 갖추는 것이 정석.
'눈보라에 탈진 조난 초보자 많은.. 영신봉.'
.......... 영신사지 ...........
옛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나타나는 영신사지 기록 이륙, 김종직, 남효온, 김일손, 유몽인 이상의 5편 외 약 4편이 더 있어 모두 10여 편 정도에 소개된, 영신사.
대부분 천왕봉을 출발하여 영신사에서 일박 또는 영신사를 거쳐 갔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영신사 창건 연대는.. 어느 시대일까?
신라 사찰에 등장하는 가섭불 운운한 것. 좌고대에 최고운의 각자가 있었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면 신라시대의 사찰인듯.
1611년 유몽인이 영신사에 다녀왔던 기록 그 이후로 영신사를 보았다는 기록이 없다.
“옛 영신사 터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다만 우물터만 남아서 흐르고 있었다.”
1752년, 시천면 남사부락 선비 박래오. 기록을 보아 폐사 시기는 17세기 후반 쯤.
박래오 이후 그 곳을 다녀온 선비들의 기록 영신사 고허지(古虛址), 혹은 유허지(幽墟址)
한편, 기록 속 영신사에 상주하는 스님은 두어 사람 아니면, 없다고 하였으므로 영신사는 암자 수준인듯. 영신사 기록에 등장하는 좌고대, 창불대, 가섭전 지명.
<좌고대>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尺]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1472년 유두류록 -
2006년 현재 좌고대 최상단 부분은 붕괴된 흔적이 있으며, 실제로 그위에 올라가 보면 세석평전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섭대>
"……절의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일구(一軀). 세조 대왕 때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다. 그 석가섭의 목[項]에도 이지러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인은 참으로 구적(寇賊)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단참(斷斬)의 화를 입었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인형(人形)을 닮은 때문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괴(荒怪)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자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전포(錢布)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 1472년 유두류록 -
가섭대는 가부좌한 부처를 대좌에 안치한 형상 영신사지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가섭대.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라고 표현을 한 본문의 대목에서 알 수가 있듯이 영신사지의 가섭불은 부처를 닮은 바윗덩어리이다.
<창불대>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
여기에서 두원곶, 여수곶, 섬진강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1472년 유두류록 -
남부능선 상에 위치한 일명 병풍바위라고 부르는 곳이다. 창불대와 영신사지와의 거리는 직선으로 약 300m 정도로 영신사지에서 이곳까지 길이 뚜렷하고, 이 곳에 올라서면 영신사지는 발아래 펼쳐져 섬진강 물줄기가 조망된다.
<옥청수와 우청수>
")……그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中?), 혜산(惠山)도 이보다 낫지 못할 듯.……"
- 1472년 유두류록 -
절터 양 가장자리 부분에 아직도 샘터 흔적이 있으며, 샘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영계(靈溪)와 옥천(玉泉)으로, 지금도 작은 내를 이루어 명경같은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영신사 산 아래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6.25 전까지는 여섯 가구 화전민 마을터. 농사를 짓고, 약초를 캐며 살았다고 한다.
기온이 너무 차고 바람이 심해 오직 감자 농사 뿐. 6.25 전쟁이 일어나 그 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단다.
그 때까지만 해도 가섭불 아래에는 작은 당집이 있어 멀리 산 아래에서 찾아오는 기도객 들이 있었다고 하며, 세석 군데군데 살던 주민들이 치성을 드렸던 곳이라 한다.
현재 영신사지로 추정되는 수천평 터는 화전 흔적 아직도 화전민들의 세간살이 흔적이 나뒹굴고 있다. 천년 가람터 '영신사지'는 옛 기록속에만 존재할 뿐
............ 낙남정맥. .............
지리산 주능선에서 가장 신령스러운 영신봉에서 시작 경남의 산들을 거쳐 낙동강 하구에 잠기는 221㎞ 능선
'북쪽으로 줄곧 낙동강을 받드는 낙남정맥.'
지리산 영신봉에서 남하하다가 옥산(614m)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곡산(543m), 여항산(744m), 무학산(763m), 구룡산(434m), 대암산(655m)을 거쳐 낙동강 하구를 지키는 분산(盆山)에서 가라앉는다.
영신봉에서 시작해 삼신봉 지나 하동까지 내려와 고성의 대곡산 넘어 함안 여항산 타고 마산 무학산 창원 정병산, 김해 동신어산 밟고, 낙동강에서 마감.
동북으로는 임천강, 경호강, 남강이 합류하는 낙동강 남서쪽으로 섬진강이 스며든 남해바다를 경계 지으며 남부 해안지방의 수분령 낙남정맥은 옛가야국 문화권.
<낙남정맥 1차~ 20차 구간>
1차 구간은 낙동강변에서 신어산을 넘어 영운리고개까지. 2차 구간 김해 신어산 서봉 영운리 고개~ 덕암 공원묘지 3차 구간 경남 김해 덕암 공원묘지- 불모산 용지봉까지. 4차 구간 불모산 용지봉- 경남 창원 소복재까지 5차 구간 소목재~송정고개 14.2km
6차 구간 경남 마산시 화성동 송정고개~ 예곡동 쌀재 9.72km 7차 구간 마산시 예곡동 쌀재- 대산 - 광려산 - 한치 8.05km 8차 구간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한치 - 봉화산 서북산 여항산 오곡재 12.67km 9차 구간 오곡제 - 발산재 8.85km 10차 구간 마산시 진전면 발산재 - 고성군 구만면 새터재 9.3km
11차 구간 새터재 - 성지산 - 큰재 10km 12차 구간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 큰재 - 절골 고개 9.6km (1998.06.24) 13차 구간 고성군 상리면 망림리 절골재- 백운산 -부련이재 -봉대산 - 돌장고개 15.4 km 14차 구간 진주시 금곡면 사천읍 돌장고개 - 무선산 - 170m봉 - 94m봉 11.4km 15차 구간 진주시 정촌면 94m봉 - 모산재 - 실봉산 - 유수재 9.3km (1998.09.02)
16차 구간 유수재 - 선들재 10.3km (1998.09.25) 17차 구간 선들재 ~ 오랑동 9.8km (1998.10.29) 18차 구간 사천시 곤명면 오랑동 -배토재 - 602m -547m - 돌고지재 13.9km 19차 구간 돌고지재 ~ 묵계치 14.75km 20차 구간 묵계치~영신봉 10.3km (1998.12.10)
지리산 산신령 셋이 모여 산다는 전설의 고향. 영신과 호야에게 혹독한 형벌을 내렸다는 산신령. 3 산신령이 살고 있다는 곳으로 한번 찾아가 보자. .................................................................................
'백두대간 풍수지리학'을 탄생하게 한 뿌리를 갖고 있는 곳. '이조시대의 예언서' 정감록에 의하면 '이상향'은 삼신봉 아래. 지리산 주능선에서 남쪽으로 벗어나 청학동을 감싼듯한 삼신봉.
영신봉에서 남부능선따라 정남향 10km 아래 삼신봉 <영신봉>. <내,외삼신봉> <삼신봉>은 각각 10Km 간격. <삼신봉, 내 삼신봉, 외삼신봉> 3봉은 3神이 산다는 곳.
<삼신봉> 등산 코스는 오른쪽 외삼신봉, 가운데 내삼신봉, 왼쪽 쇠통바위.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100 리 주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는 '지리산의 전망대'. 청학동 마을에서 한바퀴 돌아오는 산행은 이 마을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 된다.
2004년 7월 지리산 순환도로 개통에 따라 진주-대전 고속도로 산청IC에서 1시간 이내. 터널이 뚫려 청학동을 찾는 사람이 늘어났다.
삼신봉에서 동쪽으로 10분쯤 내려가면 청학동으로 빠지는 길 원삼신봉에서 청학동 1시간, 구경할만한 곳은 '터골'의 <삼선궁> ............................................................................................
지리산 남쪽 전망대로 알려진 삼신봉 그곳에서 영신봉까지 이어진 남부능선.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등산로.
등산로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붉게 녹슨 포탄들. 붉은 녹은 지난 반세기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듯. 남부군을 소탕하려 대성골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흔적.
<반란의 역사> 격전지였던 남부능선. 아직 끝나지 않은 이데올르기의 상처들 아직도 아물지 못한 상처로 남아있는 곳
모순된 역사와 낡은 이데올로기가 빚은 참상. 그로 인해 비참하게 목숨을 잃고 떠도는 영혼들. 세월이 흘렀어도 당시 참상이 서려있는 남부능선.
인간의 본능적 절규가 터져나왔을 그곳 골짜기 부모형제 아내와 아들 딸 떠올리며 숨져간 그들 사슴의 눈물 만큼 깨끗했을 맑은 개울에 흘린 피.
뜨거운 피를 품으며 고꾸라져간 수많은 생명들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단 하나의 목숨. 그것을 버린 그들의 궁극적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죽음앞에서 마지막 부르짖고 싶었던 절규.
아침이슬처럼 남부능선에서 흔적없이 사라진 그들. 그들이 목숨을 받쳐가면서 지키려한 것은 무엇일까?
반세기 세월 속에 묻어버린 역사의 현장 뼈속깊이 시린 애환은 차라리 서러운 희열. 그들이 지리산의 품속에 남기고 간 통곡의 한. 이젠 미래의 역사에 그 서러움 묻어야 할 영혼들.
'이젠 여기에서 고이 잠드시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토벌군이 부른 '남부군' 이현상 부대 또는 '나팔부대'라고 불리던 좌익. 정식 호칭은 '조선인민 유격대 독립 제 4 지대'.
남한 최초의 조직적인 좌익 빨치산 부대였고,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 이현상의 직속부대.
1949년 이래 소백산·지리산 지구 공비토벌전 교전 횟수 1만 717회, 전몰군경 수는 6,333 명 빨치산 사망자는 대략 1만 수천 명으로 추정된다.
1952년 3월 15일 전북 남원 백선엽 야전군 사령부. 일명 '백야전사'는 토벌임무를 마치고 해체되었다. 1952년 4월 남한에서 활동해온 빨치산 지대는 해체
남한 전역이 5개 지구당으로 개편되면서 분산활동. 정순덕 여인을 마지막으로 이땅에서 사라진 남부군. 그 역사를 떠오르게 하는 흔적이자 지명인 남부능선.
'세석평전의 철쭉' = 영신봉과 촛대봉의 철쭉. 세석평전은 화개 영신봉과 산청 촛대봉의 사이 해발 1,600m 고지대에 수만 그루의 철쭉꽃 평야
5월 하순 경 화려한 철쭉꽃의 요염한 붉은 색 오색 물결 등산객 인파에 신열을 앓는 지리산.
.....1463년(세조 9년) 이륙 유두류록 중...... "시내는 영신사의 작은 샘으로부터 근원이 되어 신흥사 앞에 이르러는 이미 큰 시내가 되어 섬진강으로 흘러들어 간다."고 밝혔다. ..............................................
.........산자분수령(山者分水嶺) 이론........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 벽소령에서 흐르는 물은 섬진강으로 흐르게 된다.
그러나 영신봉에서 흐르는 물은 방향 따라 섬진강으로도, 또는 낙동강으로도 흘러간다.
그러므로 경상도 서남부 일대 산지를 포함한 낙남정맥 그 시발점은 영신봉이 되는 것이다. ............................................
1. 화개 제일 1봉 영신봉(1652m). 2. 화개동천 젖줄이 되는 발원지. 3. 낙남정맥(落南正脈)의 시발점. 4. 불교문화 요람 화개 성산(聖山). 5. 눈보라에 탈진 조난사고 많은 곳.
영신봉은 낙남정맥의 분수령이다. 서남쪽 김해 신어산까지 뻗은 산맥.
낙동강을 사이에 둔 낙남정맥과 낙동정맥 언어, 풍습, 문화 등등에서 영호남의 분기점.
태백산에서부터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 부산 영남권을 동쪽으로 감싸안고 있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은 무슨 뜻일까?'
'산은 물을 건너지 않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 이조의 사학자 여암 신경준의 지형적 개념이다.
1903년 지리학자 '고토 분지로' 산맥 제안. '백두대간은 1정간과 13 정맥을 거느린다. '
지리산은 백두산 한라산과 더불어 3 신산. 지리산 3 신이 살고 있다는 세 봉우리 이름. 청학동을 감싼 삼신봉, 내삼신봉. 외삼신봉.
'영신봉에 신(神)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신봉은 음양샘 전설 속 영신의 이름을 본딴 곳. 호야가 아내 영신의 죽음을 슬퍼하다 바위가 된 곳. 이곳은 호야의 아내 이름에서 유래된 지명이..이색적.
'<음양샘의 전설>에서 유래된 지명일까?'
작은 샘물이 거대한 산봉우리 이름을 빚어낸 듯 싶다. 세석을 사이에 두고 영신봉은 촛대봉과 마주 보고 있다. 영신봉은 주 능선 上에서 <청학동 가는 길>의 들머리이다.
영신봉은 낙남정맥의 시발점이고 섬진강 따라 남해 바다로 뻗은 산맥.
호야가 영신을 향한 그리움을 잊지 못하는 듯. 섬진강 물결에 그리움 싣고 바다를 바라보는 듯. 원망이 가득한 마음으로 삼신봉을 내려다 보는 듯.
지리산에는 도를 닦거나, 기도 푸닥거리 굿판 벌이는 곳이 많다. 백무동 입구의 굴바위를 비롯한 곳곳에 무속신앙인들이 몰려든다. 지리산에서 도를 깨우치겠다며 명당자리 찾는 구도자가 많은 영신봉. 이런 기도처들은 일반 등산객들의 눈엔 쉽게 목격되지 않는 곳에 있다.
'지리산 최고의 기도처'라고 입을 모으는 명당이.. 영신사 터. 영신봉 바로 남쪽 사면의 대성계곡 본류가 발원하는 곳에 위치 이곳 가는 길은 세석평전에서 주능선 따라가는 것이가장 빠르다. 영신사 터에 기도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접근로이다.
영신봉 등산 코스로는 대성골 따라 오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대성동-대성골>, <대성교∼세석평전> 두 코스는 등산지도에 표시. 그러나, 대성골 본류 따라 영신봉을 오르는 코스는 은밀히 숨어있다.
주민들은 이 비밀 루트를 오가며 당귀와 같은 약초를 채취하고 구도자들의 기도처인 영신사 터(영신대)로 물품을 운반해 준다. 의신마을 주민들은 이 루트 중간지점 대성폭포에서 봄맞이 놀이.
이 코스는 큰세개골 이정표에서 처음 찾아드는 길이 애매해, 상당한 혼란을 느낄만한 곳도 있어 경험자 안내를 받아야 한다. 영신대 가는 길은 큰세개골 이정표까지 대성골 코스를 따라간다.
대성동을 지나 작은 세 개골 다음 골짜기가 큰세개골이다. 큰세개골 이정표에서 세석 오른쪽 길을 따라 200m 쯤 지점. 그곳에서 왼쪽(계곡 방향) 숲속으로 영신대 비밀 통로 시작.
이 들머리는 꼼꼼하게 주의를 하며 보지 않으면 찾기가 어렵다. 일반 등산객들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걸음 들어가면 호젓하고 기분좋은 오솔길이 연결돼 있다. 큰세개골에서 세석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온통 너덜지대 투박한 험로.
대성계곡 코스 가운데 가장 투박하고 힘이 드는 코스이다. 그런데, 큰세개골 영신대 비밀통로는 평탄한 길로 이어진다.
작은 지계곡을 건너가면 집터 흔적 같은 것이 나타나고, 부드러운 오솔길로 30분 오르면 대성계곡 본류와 만난다. 큰세개골 이정표 오른쪽 큰 계곡보다 오르는 시간이.. 절반.
그곳부터 오솔길은 계곡 오른쪽으로 20분 가량 더 이어진다. 그 뒤로는 무조건 계곡을 따라 오르면 대성골 상류 끝, 영신대. 대성골 본류 끝지점이고, 큰세개골 위 3Km부터는.. 계곡산행
이 계곡 주변은 설악산 산세를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다. 골 양쪽의 암벽들이 내리꽂히면서 협곡을 이룬 경치가 그렇다. 그런데도 계곡은 폭이 넓어, 오르는데 아무 지장 없는 무릉도원.
대성골 상류는 마치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 길 같은 느낌마저 준다. 어떤 곳은 반석 사이로 맑은 물이 휘감아 흘러 '수중 궁전'과 같다. 대성폭포의 거대한 바위벽을 타고 오를 때는 천국으로 가는 계단길.
계곡을 따라 계속 오르다보면 눈을 의심하게 하는 대성폭포. '대성골 상류의 학소대'라고 불리울 만큼 똑같은 모양의 3 봉. 사람이 오를 수 없는 암봉 위에 독야청청 우뚝 서있는 소나무들.
첫 봉 아래에서 대성폭포(일명 : 선유동 폭포)가 쏟아져 내린다. 지리산에서 가장 큰 폭포인 듯 한데, 지도 상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 폭포는 갈 之자로 4 단에 걸쳐 120m 높이에서부터 떨어지는데 아래 쪽에서는 폭포 상단 부분을 볼 수 없을 만큼 아득한 높이이다.
이 폭포의 왼편으로 누구나 무난하게 오를 수 있는 길이 나있다. 4단 폭포 중간에는 100 명 정도 앉아 놀 수 있는 마당바위가 있다. 마당바위 뒤쪽에는 '선녀탕'으로 불리는 직사각형 욕조 반석이 있다. 이 폭포 왼쪽의 마지막 3봉 아래에 영신사 터(영신대)가 자리잡고 있다.
대성폭포에서 영신대까지는 약 1시간 거리의 계곡길이다. 마지막 구간은 극심한 비탈을 이루고 있어 체력소모가 크다. 급비탈을 올라 영신대에 닿으면 이곳 절경은 별세계를 빚는다. 이곳 초막이 헐린 흔적이 있고 샘터 제단 석문을 통과하면 용왕당.
이곳을 지나면 넓은 마당이 있고 학소대 같은 독립 암봉의 바로 앞 마당에는 서북쪽으로 미륵불, 칠성당이라 불리는 곳이 나란히 있다. 그 건너 숲속에 천막이 있고, 이곳 기도객들의 빨래가 널려 있는 곳.
영신대 주변은 바위마다 촛농, 타다 남은 향, 제기, 생필품 싼 비닐. 이곳에 많은 기도객들이 장터처럼 몰려들고 있는 사실을 대변한다. 이곳에서 '천왕성모 생일'에는 많은 음식을 차려놓고 제를 올린다
크고 작은 바위마다 잔돌을 쌓아 올려놓고, 어떤 바위에는 돼지머리. 영신대는 이제 도를 닦는 곳이 아니라 온갖 무속신앙터로 전락한 느낌
1472년 김종직이 지리산을 산행하며 이곳에 있던 영신사에 들렀다. 당시 영신사에는 스님이 한 사람, 벼랑 아래 돌부처 1좌가 있었단다. 그의 '유두류록'에는 이곳에 대한 소견과 경관에 대한 기록이 적혀있다.
김종직은 이조 시대에 '전설 속의 청학동'을 찾아나섰던 인물. 하여, 이곳을 '전설 속 청학동'이라 믿는 구도자가 많은 듯 싶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도 왜침이 잦았던 듯.
...............김종직의 '유두류록'지리산 산행기 ............................ 김종직(金宗直)은 1431∼1492(세종 13∼성종 23) 이조 전기 문신 호는 점필재. 고려말 정몽주·길재의 학풍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 후일 사림의 조종(祖宗)으로 문장·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통하였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정여창·유호인 등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김굉필은 조광조(趙光祖)를 배출시켜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사림학자들이 훈척계열(勳戚系列)의 비리와 비도를 비판하고 나서자, 중국 고사를 인용하여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며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당파싸움의 구실을 삼아 훈척계열 유자광·정문형 등이 일으킨 무오사화.
이륙은 1449년(연산군 4)에 귀양을 가고, 사후에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저서로는 점필재집 청구풍아 당후일기, 편저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 ...........................................................
유두류록' 지리산 산행기 - <1472년 기록> .................................................................................................. 세조대왕 시절에 자주 사람을 보내시어 향화를 받들게 하였던 곳이다. 돌부처 머리 한쪽이 일그러졌는데, 이것은 왜구가 찍은 것이라고 한다. " 아, 왜구는 참으로 잔인한 도적. 생사람 껍질을 얼마나 많이 벗겼는가?"
천왕봉 성모석상과 이곳 돌부처처럼, 사람들에게도 해를 끼쳤을 것이다. 돌부처는 오른 팔에도 반점같은 상처를 입었는데, 이것은 불에 태운 흉터. 돌부처를 태우면 미륵을 만날 것이라며 상처를 남겼다니, 아!~황당무계함.'
어리석은 자들이 내세에서 이익을 얻으려고 돈과 포목을 바치니.., 그 정성이 가증스러울 뿐이다...돌부처 북쪽에는 두 바위가 솟았는데 소위, 창불대..한쪽 바위의 아랫 부분은 패이고 튀어나와 울퉁불퉁한데, 위는 날카롭고 쭈뼛..그 위에 네모꼴 평평한 돌을 얹어 넓이가 겨우 1 자. 스님 왈, 소원 이루기 바라는 사람들이 위태로움 무릅 쓰고 그 위에서 기도.
동쪽 바위틈 옥천 샘은 달인 차 맛과 같고 차다 하였지만 가보지 못했다. 샘의 서쪽엔 흙벽돌로 쌓아올린 높은 건물이 보였는데 옛 영신사라 하였다. 서북쪽 작은 석탑은 왜구들이 넘어뜨린 것을 쇠기둥을 꾀어 고쳐 세웠기 때문에 몇 층은 떨어져 나가고 없고, 영신대에서 오른편 비탈로 오르는 길이 있다. -중략 - .......................................................................................................................
이곳에서 10 분 오르면 영신봉 이정표가 있고 세석산장은 10분 거리. 세석산장에서 영신대까지 찾아가는 길은 30분 거리로 어려움이 없다. 의신마을에서 대성골 따라 영신대에 오르는 시간은 4 시간 정도 소요.
세석으로 오른 후 하산길은 대성골 또는 거림 코스가 안전. 영신대서 대성골로 하산길은 험하고 길 찾기 어려워 위험.
이곳에 이르러서야 베일 속 수수께끼가 풀리는 듯 하다. '음양샘의 전설'의 여주인공 '영신'은 실존인물인 듯 하다. 아울러, 대성골 역시 역사의 한 시점에는 가락국 영토인 듯.
조선시대에 김종직이 이곳을 다녀간 시기는 1472년 이었다. 대성골은 임진왜란(1592년) 당시 왜적에게 고초를 겪었던 곳.
그렇다면, 임진왜란 120년 전에도 왜적의 만행이 심했다는 사실. 산 사람을 껍질 벗겨 나무에 걸어 둘 만큼 잔인했던 왜적의 만행. 당시 이조왕조가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
이 깊은 곳까지 왜적의 만행 흔적이 남아있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조는 왜적의 만행을 응징도 하지 못한 채 또 다시 겪은 임진왜란.
영신사는 세조대왕이 늘 사람을 보내 향을 피우고 꽃을 받치던 곳. 김종직이 찾을 무렵에는 스님 한 사람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 불교가 이조 중반 이후 얼마나 박해를 받았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그당시 영신사는 이미 잘 알려진 유서 깊은 고찰이었다는 사실.'
그렇다면, 천왕성모를 숭배한 유래는 이조시대 훨씬 이전. '노고단 선도성모'나 '마야계곡의 마야부인'보다 유서깊다.
천왕성모의 8 딸이 전국으로 퍼졌고 셋째 딸이 하동에 정착. 그것은 곧, <천왕성모의 전설>은 고대국가 시대 이전의 전설. 그렇다면, <천왕성모의 전설>은 신석기시대로부터 유래된 듯.
................................ ................................ 눈보라에 갇혀 조난사고 많은 곳. ................................. .................................
요즘은 1박 2일에 지리산 종주. 성삼재 출발, 세석산장 일박 일정. 칠선봉 험로에서 영신봉까지가 고비.
'벽소령에서 세석산장 = 마의 구간.'
하여, '마의 구간'은 조난 겪기 쉬운 곳. 칠선봉 험로에서 지친 후 나타난 영신봉. 여기쯤 오면 이미 탈진상태에 이르게 된다.
사실, 1박 2일 지리산종주 일정은 무리. 그러나, 그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운 현실. 주말 여가를 이용해 완주를 하고 싶은 욕심.
어렵게 세석산장까지 예약한 상황이면 강행군. 초죽음을 무릎쓰고 목표를 향해 돌진하게 된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고전.
해는 저무는데 발걸음은 점점 더 무겁다. 세석산장은 아득한데도 힘든 칠선봉 험로 어둠속 그곳을 겨우 빠져나오면 영신봉이다.
'마치, 신기루와 같은 세석산장 불빛.'
발자국 옮길 때마다 다리가 무겁다. 가까이 다가설수록 멀어지는 산장 불빛. 특히, 겨울엔 눈보라 속 환상방황 잦은 곳.
산장 불빛이 보이면 긴장감이 풀어지는 탓. 그러나, 눈밭에 빠지면 진로 찾기가 어렵다. 키 넘게 쌓인 눈이 함정처럼 진로을 막는 탓.
'눈보라 칼바람에 파묻힌 등산로 찾아 방황.'
때로는 진로를 찾아 멀리 우회해야 한다. 그러나 지독스러운 눈보라에 가려진 시야. 이쯤 되면, 한치 앞이 안보여 눈벌판을 방황.
영신봉에서부터 세석평전까지는 광활한 평원. 하얀 눈속에 파묻혀 편안하게 잠들고 싶은 충동. 순간의 편안함이 죽음을 부르는 곳이 영신봉이다.
칠흙 같은 어둠과 지척을 분간못할 눈보라. 허리까지 빠지는 눈벌판을 헤쳐나가는 러셀. 눈앞에 빤히 보이는듯해도 머나 먼 산장 불빛.
'과연, 내가 살 수 있을까?'
이쯤되면 꿈도 부질없는 것. 부귀영화 명예도 소용없는 것 간절한 바램은 살고싶은 마음 뿐.
때로는 논앞에서 교차하는..삶과 죽음. 이때 치즈 한쪽은 불꽃같은 에너지 공급원. 생명력이 꺼져갈 때에 기적 같은 힘이 된다.
'평소에는 지극히 평온한 곳이..영신봉.'
산행을 하다보면 안전한 곳일수록 방심은 금물. 눈벌판 헤메이면 동상으로 발가락 절단하기 십상. 가벼운 산행이라도 장비를 제대로 갖추는 것이 정석.
'눈보라에 탈진 조난 초보자 많은.. 영신봉.'
.......... 영신사지 ...........
옛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록에 나타나는 영신사지 기록 이륙, 김종직, 남효온, 김일손, 유몽인 이상의 5편 외 약 4편이 더 있어 모두 10여 편 정도에 소개된, 영신사.
대부분 천왕봉을 출발하여 영신사에서 일박 또는 영신사를 거쳐 갔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영신사 창건 연대는.. 어느 시대일까?
신라 사찰에 등장하는 가섭불 운운한 것. 좌고대에 최고운의 각자가 있었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면 신라시대의 사찰인듯.
1611년 유몽인이 영신사에 다녀왔던 기록 그 이후로 영신사를 보았다는 기록이 없다.
“옛 영신사 터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다만 우물터만 남아서 흐르고 있었다.”
1752년, 시천면 남사부락 선비 박래오. 기록을 보아 폐사 시기는 17세기 후반 쯤.
박래오 이후 그 곳을 다녀온 선비들의 기록 영신사 고허지(古虛址), 혹은 유허지(幽墟址)
한편, 기록 속 영신사에 상주하는 스님은 두어 사람 아니면, 없다고 하였으므로 영신사는 암자 수준인듯. 영신사 기록에 등장하는 좌고대, 창불대, 가섭전 지명.
<좌고대>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尺]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를 얻는다고 한다.…" -1472년 유두류록 -
2006년 현재 좌고대 최상단 부분은 붕괴된 흔적이 있으며, 실제로 그위에 올라가 보면 세석평전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섭대>
"……절의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일구(一軀). 세조 대왕 때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다. 그 석가섭의 목[項]에도 이지러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인은 참으로 구적(寇賊)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단참(斷斬)의 화를 입었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인형(人形)을 닮은 때문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괴(荒怪)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자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전포(錢布)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 1472년 유두류록 -
가섭대는 가부좌한 부처를 대좌에 안치한 형상 영신사지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가섭대.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라고 표현을 한 본문의 대목에서 알 수가 있듯이 영신사지의 가섭불은 부처를 닮은 바윗덩어리이다.
<창불대>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
여기에서 두원곶, 여수곶, 섬진강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1472년 유두류록 -
남부능선 상에 위치한 일명 병풍바위라고 부르는 곳이다. 창불대와 영신사지와의 거리는 직선으로 약 300m 정도로 영신사지에서 이곳까지 길이 뚜렷하고, 이 곳에 올라서면 영신사지는 발아래 펼쳐져 섬진강 물줄기가 조망된다.
<옥청수와 우청수>
")……그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中?), 혜산(惠山)도 이보다 낫지 못할 듯.……"
- 1472년 유두류록 -
절터 양 가장자리 부분에 아직도 샘터 흔적이 있으며, 샘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영계(靈溪)와 옥천(玉泉)으로, 지금도 작은 내를 이루어 명경같은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영신사 산 아래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6.25 전까지는 여섯 가구 화전민 마을터. 농사를 짓고, 약초를 캐며 살았다고 한다.
기온이 너무 차고 바람이 심해 오직 감자 농사 뿐. 6.25 전쟁이 일어나 그 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단다.
그 때까지만 해도 가섭불 아래에는 작은 당집이 있어 멀리 산 아래에서 찾아오는 기도객 들이 있었다고 하며, 세석 군데군데 살던 주민들이 치성을 드렸던 곳이라 한다.
현재 영신사지로 추정되는 수천평 터는 화전 흔적 아직도 화전민들의 세간살이 흔적이 나뒹굴고 있다. 천년 가람터 '영신사지'는 옛 기록속에만 존재할 뿐
............ 낙남정맥. .............
지리산 주능선에서 가장 신령스러운 영신봉에서 시작 경남의 산들을 거쳐 낙동강 하구에 잠기는 221㎞ 능선
'북쪽으로 줄곧 낙동강을 받드는 낙남정맥.'
지리산 영신봉에서 남하하다가 옥산(614m)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곡산(543m), 여항산(744m), 무학산(763m), 구룡산(434m), 대암산(655m)을 거쳐 낙동강 하구를 지키는 분산(盆山)에서 가라앉는다.
영신봉에서 시작해 삼신봉 지나 하동까지 내려와 고성의 대곡산 넘어 함안 여항산 타고 마산 무학산 창원 정병산, 김해 동신어산 밟고, 낙동강에서 마감.
동북으로는 임천강, 경호강, 남강이 합류하는 낙동강 남서쪽으로 섬진강이 스며든 남해바다를 경계 지으며 남부 해안지방의 수분령 낙남정맥은 옛가야국 문화권.
<낙남정맥 1차~ 20차 구간>
1차 구간은 낙동강변에서 신어산을 넘어 영운리고개까지. 2차 구간 김해 신어산 서봉 영운리 고개~ 덕암 공원묘지 3차 구간 경남 김해 덕암 공원묘지- 불모산 용지봉까지. 4차 구간 불모산 용지봉- 경남 창원 소복재까지 5차 구간 소목재~송정고개 14.2km
6차 구간 경남 마산시 화성동 송정고개~ 예곡동 쌀재 9.72km 7차 구간 마산시 예곡동 쌀재- 대산 - 광려산 - 한치 8.05km 8차 구간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한치 - 봉화산 서북산 여항산 오곡재 12.67km 9차 구간 오곡제 - 발산재 8.85km 10차 구간 마산시 진전면 발산재 - 고성군 구만면 새터재 9.3km
11차 구간 새터재 - 성지산 - 큰재 10km 12차 구간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 큰재 - 절골 고개 9.6km (1998.06.24) 13차 구간 고성군 상리면 망림리 절골재- 백운산 -부련이재 -봉대산 - 돌장고개 15.4 km 14차 구간 진주시 금곡면 사천읍 돌장고개 - 무선산 - 170m봉 - 94m봉 11.4km 15차 구간 진주시 정촌면 94m봉 - 모산재 - 실봉산 - 유수재 9.3km (1998.09.02)
16차 구간 유수재 - 선들재 10.3km (1998.09.25) 17차 구간 선들재 ~ 오랑동 9.8km (1998.10.29) 18차 구간 사천시 곤명면 오랑동 -배토재 - 602m -547m - 돌고지재 13.9km 19차 구간 돌고지재 ~ 묵계치 14.75km 20차 구간 묵계치~영신봉 10.3km (1998.12.10)
지리산 산신령 셋이 모여 산다는 전설의 고향. 영신과 호야에게 혹독한 형벌을 내렸다는 산신령. 3 산신령이 살고 있다는 곳으로 한번 찾아가 보자. .................................................................................
'백두대간 풍수지리학'을 탄생하게 한 뿌리를 갖고 있는 곳. '이조시대의 예언서' 정감록에 의하면 '이상향'은 삼신봉 아래. 지리산 주능선에서 남쪽으로 벗어나 청학동을 감싼듯한 삼신봉.
영신봉에서 남부능선따라 정남향 10km 아래 삼신봉 <영신봉>. <내,외삼신봉> <삼신봉>은 각각 10Km 간격. <삼신봉, 내 삼신봉, 외삼신봉> 3봉은 3神이 산다는 곳.
<삼신봉> 등산 코스는 오른쪽 외삼신봉, 가운데 내삼신봉, 왼쪽 쇠통바위.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100 리 주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는 '지리산의 전망대'. 청학동 마을에서 한바퀴 돌아오는 산행은 이 마을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 된다.
2004년 7월 지리산 순환도로 개통에 따라 진주-대전 고속도로 산청IC에서 1시간 이내. 터널이 뚫려 청학동을 찾는 사람이 늘어났다.
삼신봉에서 동쪽으로 10분쯤 내려가면 청학동으로 빠지는 길 원삼신봉에서 청학동 1시간, 구경할만한 곳은 '터골'의 <삼선궁> ............................................................................................
지리산 남쪽 전망대로 알려진 삼신봉 그곳에서 영신봉까지 이어진 남부능선.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등산로.
등산로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붉게 녹슨 포탄들. 붉은 녹은 지난 반세기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듯. 남부군을 소탕하려 대성골을 불바다로 만들었던 흔적.
<반란의 역사> 격전지였던 남부능선. 아직 끝나지 않은 이데올르기의 상처들 아직도 아물지 못한 상처로 남아있는 곳
모순된 역사와 낡은 이데올로기가 빚은 참상. 그로 인해 비참하게 목숨을 잃고 떠도는 영혼들. 세월이 흘렀어도 당시 참상이 서려있는 남부능선.
인간의 본능적 절규가 터져나왔을 그곳 골짜기 부모형제 아내와 아들 딸 떠올리며 숨져간 그들 사슴의 눈물 만큼 깨끗했을 맑은 개울에 흘린 피.
뜨거운 피를 품으며 고꾸라져간 수많은 생명들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단 하나의 목숨. 그것을 버린 그들의 궁극적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죽음앞에서 마지막 부르짖고 싶었던 절규.
아침이슬처럼 남부능선에서 흔적없이 사라진 그들. 그들이 목숨을 받쳐가면서 지키려한 것은 무엇일까?
반세기 세월 속에 묻어버린 역사의 현장 뼈속깊이 시린 애환은 차라리 서러운 희열. 그들이 지리산의 품속에 남기고 간 통곡의 한. 이젠 미래의 역사에 그 서러움 묻어야 할 영혼들.
'이젠 여기에서 고이 잠드시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후 토벌군이 부른 '남부군' 이현상 부대 또는 '나팔부대'라고 불리던 좌익. 정식 호칭은 '조선인민 유격대 독립 제 4 지대'.
남한 최초의 조직적인 좌익 빨치산 부대였고,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 총수 이현상의 직속부대.
1949년 이래 소백산·지리산 지구 공비토벌전 교전 횟수 1만 717회, 전몰군경 수는 6,333 명 빨치산 사망자는 대략 1만 수천 명으로 추정된다.
1952년 3월 15일 전북 남원 백선엽 야전군 사령부. 일명 '백야전사'는 토벌임무를 마치고 해체되었다. 1952년 4월 남한에서 활동해온 빨치산 지대는 해체
남한 전역이 5개 지구당으로 개편되면서 분산활동. 정순덕 여인을 마지막으로 이땅에서 사라진 남부군. 그 역사를 떠오르게 하는 흔적이자 지명인 남부능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