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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길선주(吉善宙)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창시자 “길선주”(吉善宙) 목사는 대표적인 부흥운동인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자는 “윤열”(潤悅), 호는 “영계”(靈溪)로 1869년, 길선주는 평안남도 안주 후장동에서 길봉순의 차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유년시절(6세) 한학을 배워 시화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고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11세의 어린나이에 “신선행”과 결혼한 후 장사였던 길선주는 17세때 평양 용악산 기슭에서 관성교(무교계통)에 심취하여 차력술을 연마하였고, 25세때 친구와 함께 선도(仙道)수련에 입문하여 입산수행을 하였으나 3년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내려 왔습니다.
자신에게 선도를 권했던 친구 “김종섭”(金鍾燮)이 마펫(마포삼열) 선교사를 통하여 기독교에 입교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가 권하는 “장원양우상론”(長遠兩友相論)과 “천로역정”(天路歷程, Pilgrim Progress)이라는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장원양우상론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중국선교사 윌리엄 밀른(William Milne)이 지은 19세기 동아시아 베스트셀러 전도지로 장씨와 원씨 두 친구간에 서로 묻고 답하는 대화방식의 전도지였습니다. 천로역정은 17세기 영국의 작가이며 침례교 명설교자인 존번연의 우화시리즈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은 기독교서적이었습니다.
그후 김종섭이 건네준 “그리스도 신문”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칼럼을 읽고 길선주는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897년 8월15일(29세), 길선주 목사는 그레이험 리(Graham Lee)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길선주는 아버지(1911년,소천)와 후처로 들어온 어머니(길선주의 생모,1912년 소천)를 전도하여 세례교인이 되었으며, 아내와 자녀들을 전도하여 온가족이 함께 가정예배를 드리는 첫 번째 가족이 되었습니다.
길선주는 가족예배 시간에 매일 주제별로 기도회를 하였습니다. 월요일은 가족을 위해서, 화요일은 불신친척과 불신자를 위해서, 수요일은 불신 친구들을 위해서, 목요일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금요일은 교육기관과 자선단체를 위해서, 토요일은 해외동포와 혁명유지를 위해서, 주일은 국내외 교회를 위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1898년, 길선주는 30세의 나이에 평양 “널다리골 교회”의 “영수”(미자립교회 목회자)로 피택되었습니다. 길선주는 전도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부흥하였고 비좁은 교회에서 더 이상 예배를 드릴수 없게 되어 1900년, 장대현 언덕에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한식 신축교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온 성도들이 힘에 지치도록 헌금을 하여 5천원을 모금하였고, 미국선교부에서 2천원을 기부하여 총 7천원의 헌금으로 평양 최고의 기념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한편, 한국 선교회 본부에서 커다란 종을 기증하여 10리밖에서도 들을 수 있는 종을 서쪽편 종각에 세웠습니다. 이것이 1907년의 부흥운동의 발원지인 평양 “장대현교회”의 위대한 시작이었습니다.
길선주는 안창호를 비롯하여 17명의 애국지사들로 구성된 독립협회 경성본부를 통하여 평양지회 인준을 받아 사업부장의 직책에 임명되었습니다. 독립협회가 평양 대동관광장에서 개최한 민중대회에 안창호와 길선주는 정치연설을 하였습니다. 그곳에는 평양 관찰사 부윤을 비롯하여 남녀 5천명의 군중들이 안창호와 길선주의 연설에 감동을 받았으며 함께 조국독립의 결의를 다졌습니다. 길선주는 향후 1919년 3.1운동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 대표로 참여하였습니다.
1900년, 길선주 영수는 자신의 시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1904년까지 4년동안 거의 모든 시력을 상실한 길선주 영수는 "파이팅"(Harry C.Whiting) 선교사로부터 눈 수술을 받고 시력을 다소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길선주 영수가 선교사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의 눈은 완전히 상실되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그는 수술후에 돋보기 안경을 쓰고 밝은 빛아래에서 성경을 읽고 사람을 볼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길선주에게 눈이 필요하고 그 눈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가는 것을 보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파이팅 선교사를 길선주에게 보내 주셨고 길선주는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통해 일하시고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길선주 목사와 파이팅 선교사를 통해 증명하였습니다.
1901년, 장대현교회의 “장로”에 취임한 길선주는 이듬해인 1902년, “조사”(전도사)로 임명되었고, 황해도와 평안도의 “도조사”에 까지 취임하여 그의 관할지역이 몇배로 확장되었습니다. 당시 길선주는 약국을 겸영하고 있었습니다. 장대현교회 전임조사로서 하나님의 사역에 전념하려면 약국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길선주는 월 생계비 80원을 약국에서 얻은 수익금으로 충당해왔으나 조사의 급여는 월 6원밖에 되지 않아 모든 생활에는 어려움이 있었고 길선주는 주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그의 아내 신선행은 선도(仙道)에 몰입하여 가정을 떠나있을 때 식량이 떨어진 적이 많았고, 집안에 우환이 있어서 점포가 위기에 처할때에도 선도에만 정진하였거늘 정작 진리를 발견하였을때에는 생계가 염려된다는 것은 옳은 언행이 아니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굳건히 하라는 위로를 하였습니다.
아내의 위로에 힘을 얻은 길선주 조사는 “전도사업”과 “교육사업”과 “문맹퇴치 운동” 등 3대사업을 계획하며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개인전도에 주력하여 교인 1인 1명씩 전도하여 교회로 인도할 것과, 구역을 분할하여 심방대를 조직하고, 가가호호 방문을 통하여 결석자가 없게 할 것과, 여자교회를 설립하여 여성개방운동을 전개할 것과, 해마다 전도대회를 개최하여 복음화 운동에 매진할 것을 기본정책으로 하는 전도사업을 선포하였습니다. 또한 기독교 주간학교를 설립하여 교회의 일군을 양성하고, 극빈가정의 자녀들을 위한 야간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사업을 추진하기로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성인야간학교를 설립하여 한글교육을 실시하고 교인들의 성경공부를 위해 성경야학과 계절사경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길선주 조사는 이러한 사업을 추진하면서 교회를 개방하였습니다. 자신의 계획이 실천에 옮겨지면서 장대현교회는 빠른 속도로 부흥하였고 성도들의 신앙심도 깊어 갔습니다. 그러나 당시 시대적 배경과 유교적 관습으로 관청과 민중들로부터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야유와 비방과 폭언, 폭행으로 시비가 있어도 인내로서 이겨야 했습니다. 특히, 당시 여자들은 규방에 은둔하여 살았습니다. 외간 남자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어 있고 가옥구조도 안채와 사랑채로 분리되어 여자라면 하녀들까지 사랑채로 갈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여자들에게 대문밖 출입도 제한적이었습니다. 남자들이 모이는 곳에 얼굴을 내놓고 다니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1893년, 한국에 교회가 설립되었을 때, 그것은 온전히 남성들만의 교회였습니다. 당시 교회가 주로 사랑방에 설립되었고 사랑방을 중심으로 모였는데 여자들은 사랑방을 사용할수 없고 들어 갈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자들은 오직 남편 또는 친척들의 전도로 기독교에 입신하였으며 그후로도 교회를 다닌 것이 아니라 개인의 집에서 별도로 모임을 이루며 신앙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바라본 길선주 조사는 선교사와 상의하고 평양에 “부인교회”를 별도로 설립하였습니다. 후에 부인교회는 자연스럽게 장대현교회와 병합하고 하나의 통일된 교회가 되었습니다.
길선주 조사는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에 입신하여 조사가 될 때까지 신,구약성경 20독을 하였으며, 예언서와 대선지서와 소선지서와 복음서와 로마서와 요한1,2,3서는 각각 50독을 하였습니다. 길선주 조사는 성경의 심오한 진리에 감동을 받아 성경속으로 들어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길선주 조사를 향하여 “기도와 성경의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매일 새벽 5시와 밤 10시를 기도시간으로 정하고 때로 교회와 나라를 위해 금식기도와 철야기도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마침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경륜을 펼쳐가시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부활의 전제이며,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한 필수조건이라고 길선주 조사는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현신이며, 성령은 자연계와 인간세계에 스스로 내재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하고 계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이신 임마누엘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계의 완전한 존재자이시며,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신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그 본래의 위치에 환원하신 존재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또한 영원한 세계 완성을 위해 인류 가운데 역사하시면서 재림을 대기하고 계신다고 길선주 조사는 고백하였습니다.
길선주 조사의 기도와 말씀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장대현 교회는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장대현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자”는 교회 슬로건을 실천하였습니다. 추수감사절에 농작물과 의류가 높은 산을 이루며 쌓여 있었고 성탄절에는 성도들이 많은 헌금을 드려 자선사업을 할수 있었습니다. 교회내외 중 빈곤에 시달리는 200세대를 구제하고 직업이 없는 교인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하는 등 공동체의 삶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교회의 목적인 전도사업을 위해 지방에 전도대원을 파송하였고 지역마다 교회를 새롭게 설립하였습니다. 길선주 조사는 평양 장대현 교회를 중심으로 황해도와 평안도 각처의 교회를 보살펴야 하는 “도조사”직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길선주 조사는 지방순회와 전도여행을 통하여 대중들에게 자신의 시대적 사명을 전달하는 좋은 기회로 여겼습니다. 민족의 구원과 새로운 희망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로 단결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주어지는 구원을 위해 모든 사람들은 주저없이 나올 것을 역설하는 그의 살아있는 언어에 사람들은 감동하였고 교회는 지체없이 부흥의 불길로 번져갔습니다.
1901년, 길선주 조사는 한국에 최초로 설립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평양신학교는 장로교 선교부와 장로교 공의회가 평양에 설립한 교역자 양성기관으로 한국신학대학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초대 교장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모펫(Moffett,S.A.)이 취임하였습니다. 길선주 조사는 방기창, 김종섭, 한석진, 이기풍, 송인서, 서경조 등 6명과 함께 공부하며 1907년, 최초의 한국인 목사가 되었습니다.
1905년, 길선주 조사는 영국 웨일즈에서 성경의 불길이 발흥하여 서방교회가 크게 부흥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임이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길선주 조사는 우매하고 미개한 동방세계를 개발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속에서 먼저 교회를 부흥시키는 역사가 있을것이라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된 하디선교사의 부흥회는 1906년, 평양으로 이어졌습니다. 평양집회를 방문한 존스턴 선교사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해 가을, 황해도 재령에서 길선주 조사는 사경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김익두 목사도 함께 있었으며 그는 길선주 조사의 설교를 듣고 크게 감동하였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돌아온 길선주 조사는 “박치록” 장로와 함께 “새벽기도회”를 시작하였습니다. 민족의 위기앞에서 평양의 새벽을 깨우려는 두사람이 비밀리에 시작한 새벽기도회에 다른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평양의 새벽을 깨우는 새벽기도운동은 한국교회의 기도운동으로 발전하는 효시가 되었습니다. 2개월반 작정으로 4시에 시작한 새벽기도는 4시30분 교인들이 참여하는 자발적인 새벽기도운동으로 확산되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매일 새벽에 장대현교회는 새벽종을 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하고 모이기를 힘썼던 교인들은 새벽 1시부터 모이기 시작하였고 2시가 되었을때에는 이미 수백명이 기도하고 있었으며 4시30분에는 500여명의 교인들이 기도의 자리로 나아와 통성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새벽기도가 끝난후 나가서 전도하는 일에 더욱더 헌신하였고 이러한 기적적인 사역은 참으로 놀라운 역사로 기록되었습니다.
장대현교회의 부흥은 4개의 분립개척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 1903년, “남문밖교회”를 분립개척하여 스왈른부부와 스눅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1905년 12월에는 “사창골교회”가 설립되었으며 블레어 선교사가 파송되어 450명이 출석하는 평양의 대형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1906년 1월, 장대현교회는 3번째 분립개척교회인 “산정현교회”를 설립하고 번하이셀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1909년에 분립개척한 “서문밖교회”는 마펫선교사가 파송되었는데 1911년, 1천명의 교회로 성장하여 평양을 대표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1907년 1월6일, 장대현교회에는 2천여명이 참석한 부흥사경회가 개최되었습니다. 1월2일부터 15일까지 이어진 “평안남도 겨울남자 도사경회”는 아침경건회와 찬양을 시작으로 선교사들의 성경공부, 오후에는 노방전도와 저녁전도집회로 이어지는 모든 일상이 정지되는 집회였습니다. 농한기를 이용하여 2주간 계속되는 집회에는 매회 1,500명이상이 참여하였고 1월6일, 저녁집회에서 길선주 조사는 “맛을잃은 말라빠진 사람들아”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길선주 조사의 말씀에 교인들은 통회하는 심령으로 자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성령의 임재하심을 감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한사람씩 일어나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습니다. 죄를 고백한 사람들은 고꾸라지고 넘어지고, 하나님께 애원하면서 용서를 구하였습니다.이러한 성령의 임재속에서 하나님은 그들의 죄와 용서를 결코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더러운 죄를 고백하고도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동안 숨겨졌던 자신의 치부와 부패한 냄새가 진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향하여 정죄하는 대신 용서와 화해와 평화를 선택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를 죽이고, 어떤 사람은 사기행각을 일삼았으며, 어떤 사람은 여자를 강간하고 겁탈하며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이 사람들의 죄는 결코 용납될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각 사람의 죄를 듣고 선입견을 갖거나 편견을 가지고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죄가 없는 사람이 없었고, 오직 예수님만이 흠없고 죄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와같이 놀랍고 일방적인 것이었으며 장대현교회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어가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1907년 6월10일,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식이 장대현교회 광장에서 거행되었습니다. 한국장로교회 제1회 독노회에서 길선주(40세,평양), 양전백(39세,구성), 서경조(58세,의주), 한석진(41세,의주), 송인서(40세,평양), 방기창(58세,평양), 이기풍(40세,평양) 등 7명이 한국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한국 오순절부흥의 발원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조사가 목사안수를 받는 장면을 바라본 교인들은 감격하였고 우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길선주 목사에게는 “한국기독교의 아버지”, “한국의 바울”이라는 슬로건이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길선주 목사는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역량과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1시간의 기도와 매주 3일간의 금식기도와 매년 1주간의 금식기도를 잊지 않았습니다. 평생동안 구약성경 30독, 신약성경 100독, 요한계시록 1만독 등 성경읽고 연구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전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길에서나 집에서나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었고 평생에 걸쳐 가족들과 친척들과 친구들과 이웃들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전도하였습니다.
방은덕 순경은 길선주 조사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범인을 잡기 위해 참석하였다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통회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승복을 입은 김덕화 스님은 기독교에서 흠집을 찾으려다가 길선주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후 예수믿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카톨릭신부가 길선주의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은후 기독교의 구속의 역사를 믿고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평생 유교사상에 빠져있던 부모를 전도하고 불신 아내와 자녀들을 복음의 일군으로 세워간 길선주 목사의 전도자로서의 삶은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었습니다. 길선주가 전도한 친구들은 한결같이 목사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고, 평양의 주일은 상거래를 하기 어려울 만큼 한산해지는 놀라운 역사로 이어졌습니다.
1911년,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길선주 목사의 장남 “길진형”이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습니다. 신민회사건으로 알려진 105인 사건은 일본제국이 민족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거짓누명을 씌워 무차별적으로 탄압한 조작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 김홍량, 김구, 최명식, 이승길, 도인권, 김용제, 이유필과 같은 민족지도자들이 아무런 연관성없이 대거 투옥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평양숭실대학을 졸업하고 선천읍 기독신성중학교에서 교사로 헌신하고 있던 길진형이 일본경찰에 강제로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받게되었습니다. 단지 신민회 회원이라는 이유 하나로 영문조차 알지 못했던 길진형은 가죽채찍과 몽둥이에 온몸이 부서지고 담뱃불에 생살이 타는 고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장남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권력의 힘을 빌리려 하였거나 의욕을 상실하여 목회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기도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길진형은 감옥에서 고문을 이기지 못한채 석방되었지만, 그의 몸은 이미 중태에 빠져있었습니다. 해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까지 가서 수술을 하였지만 결국 아무런 기대없이 귀국해야만 했고 귀국한지 3일만에 소천하는 안타까운일이 일어났습니다. 1917년, 평양대부흥 10주년에 일어난 장남의 사망사건은 길선주 목사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그는 한국교회를 이끌어 가야할 목사였습니다. 길진형의 동생인 “길진경” 또한 독립신문에 관여한 이유로 18세의 나이에 고문을 당하고 1년6개월의 징역을 살았으며 후에 아버지를 이어 목사가 되었습니다. 3남인 “길진섭”은 목회자의 길로 가지 않았고 화가가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열심히 전도하였던 길선주 목사에게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된 나라없는 땅에서 민족의 회복과 독립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가족들과 자녀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였고 성도들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민족의 아픔은 백성들의 고단함으로 이어졌고, 사람들은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자신의 죄를 발견할 수 있었던 믿음을 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민족의 해방과 압제자들을 처벌하는 것 보다 길선주 목사와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앙을 지키고 성장하게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 듯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수없이 읽었던 길선주 목사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1919년 3.1운동에서 기독교 지도자 대표로 참여하였고 자신의 이름을 그 위에 올렸습니다. 이것은 독립투사로서의 길선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역행하는 일본제국을 향한 정의와 공평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함태영 목사와 이승훈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습니다. 평양 숭실대학교 기숙사 학생 100여명을 집으로 초대하여 배포구역을 정하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서문거리와 종로와 신창리 등 각 구역에서 일제히 만세운동을 하며 가두시위를 할 계획을 마련하였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2월20일 가정예배를 드린후에 장연읍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하고 사리원을 경유하여 서울로 향하였으나 3월1일, 늦은 시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독립선언식에 참여하지 못한 길선주 목사는 서울역에서 검문검색에 걸려 투옥되었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평양 장대현교회에서도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구타와 함께 구금당하고 길선주 목사의 차남인 길진경마져 독립신문 복사중에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길선주 목사의 아내 신선행 사모는 남편과 아들이 감옥에 투옥되자 눈물로 밤을 지새며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옥에 갇힌 길선주 목사는 자신의 안위보다 교회와 가족과 교인들을 염려하며 위로와 격려의 서신을 보냈습니다. 환난중에 믿음을 굳게하여 교인들과 지도자들은 교회를 발전시키는데 마음을 다하고 하나님을 믿으며 기도와 전도에 힘쓰면 민족의 장래에는 반드시 서광이 비춰질 것이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옥중에서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성경을 읽고, 밤에는 기도와 요한계시록 암송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더욱 굳게 하며 오히려 교회를 염려 하였습니다.
1921년, 2년간의 감옥생활을 이겨낸 길선주 목사는 “인가귀도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고문으로 인하여 길선주 목사는 한동안 자택에서 휴양을 해야만 했습니다.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었을 때 길선주 목사는 1923년 11월14일부터 순회전도에 나섰습니다. 평안북도 강계읍교회 사경회를 시작으로 각처를 순회하며 전도집회를 인도하던 중, 안동교회에서 요한계시록과 말세론을 교육하는 가운데 일본경찰에 연행되어 다시 조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일본경찰들은 요한계시록과 말세론을 유언비어로 여겼고, 이것이 일본제국의 종말과 연관성을 갖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세기말적 강의를 특별히 경계하였습니다.
1927년, 원산 석우동교회의 부흥사경회에서 길선주 목사는 교인들에게 믿음을 굳건히 할 것과 지금의 환난을 신앙으로 이겨낼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설교가 중반쯤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전기가 꺼지고 괴한 30여명이 단상으로 뛰어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석우동교회 예배당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누군가의 소행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강단으로 여신도들이 환급히 뛰어 올라가 길선주 목사를 에워싸고 강단 후문으로 길선주 목사를 안내하여 다행히 위험을 피할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특히 그들 가운데 우두머리 된 자는 원산 마르다신학교와 요코하마 신학교를 졸업한 독실한 여성전도사 “김애신”의 남편이었습니다. 유물론 사관을 주장하는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배격하고 말살하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타도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폭력으로 길선주 목사와 교회를 전복시키려 한 것이었습니다.
1932년, 길선주 목사가 목사로 부임하여 시무한지 25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이 시기에 평양에서는 불한당에 의한 중국인 살해난동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비슷한 시기에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였습니다. 한때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명성을 들었던 성령의 도시 평양이 죄악의 도성으로 추락해 가는 현실을 개탄하였습니다. 평양에서 일어난 중국인 살해난동사건은 인륜과 도덕을 말할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만행이라고 규정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버리고 믿음을 잃은 교회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오직 회개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한국교회에 전례없는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 오고 있음을 예견한 길선주 목사는 교인들에게 깨어 기도하며 회개해야 할 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1934년, 1월에서 7월까지 길선주 목사는 북간도 용정 중앙교회와 남녀중학교와 중국인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고, 연길지역에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연합부흥사경회를 인도하며 함경도지방을 순회하면서 부흥사경회를 이어갔습니다. 1935년, 평안북도 선천교회당에서 개최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갑자기 뇌일혈로 인하여 강단에서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즉시 선천기독병원으로 호송되었고 2주간의 치료를 받고서야 간신히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1935년 11월20일, 평안남도 강서군 고창교회에서 평서노회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던 중이었습니다. 모든 집회가 끝나고 25일 마지막 새벽집회 시간이었습니다. 단상에서 설교를 하던 길선주 목사는 다시한번 뇌일혈로 쓰러졌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입을 열었지만 말을 할수 없었고, 땅에다 무슨 글을 쓰는 듯 하였으나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1936년 11월26일 오전 9시10분, 길선주 목사는 67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12월4일, 길선주 목사의 장례식에는 10만명에 이르는 조문 행렬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길선주 목사는 찬송가 162장, 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를 불렀습니다. 이 찬송은 장례식 내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쉼없이 달려온 목회의 현장이었습니다. 1927년, 장대현교회 담임목사직에서 사임한 후에도 길선주 목사는 끊임없는 부흥사경회의 요청이 있었고 그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복음의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35년의 목회기간중 매년 30주를 부흥회사역에 보냈고, 13,360회의 설교를 하였습니다. 한때 무신론자로 선도에 심취하였던 길선주는 하나님을 만난후로 단 한번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나라와 교회와 민족의 부흥을 위해 쉼없이 달려갔습니다. 그의 손에는 언제나 성경이 들려져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을 가슴에 묻고 상처가 아물기 전에 복음을 들어야 했던 길선주는 한국의 바울이었고, 위대한 믿음의 선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