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망상이다??
아침에 메일을 확인하면서 다음의 글이 와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떤 포럼에서 종교에 대해 말하면서 ‘신의 개념’을 망상이라고 주장하는 글이었다. 그의 주장이 무엇인가를 떠나서 한 포럼에서 발표하는 철학적인 글이 너무 조잡하고 또한 일방적인 주장이라서 ‘종교철학’을 강의하는 한 사람으로 그 오류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위 포럼에서 제시한 칼럼의 핵심은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면서 특히 ‘신을 믿는 이들의 종교’를 망상이라고 비판하고, 종교란 무릇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자기위안’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의 글에는 몇 가지 논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지나치게 자문화중심주의적인 일방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저자는 논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장(결론) : 신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유해한 망상이다.
근거 ① :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는 테러의 주체들은 종교단체들이고 대부분이 ‘이슬람의 신자들’이다.
근거 ② : 프랑스 니스에서 발생한 ‘터럭테러’를 자행한 이들이 “알라는 위대하다”는 말을 외쳤다.
(따라서 이 테러는 알라를 믿는 이슬람인들에 의한 것이다.)
근거 ③ : 이슬람인들은 독특한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 히잡을 쓰는 것과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있는데, 이는 신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비-이성적인 명령을 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근거 ④ : 인도의 힌두교도들도 소를 먹은 사람을 구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근거 ⑤ : 세계에는 신의 이름으로 많은 전쟁이 있었다.
중간 결론(숨은 결론) 1) 히잡을 강제로 쓰게 하거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거나 하는 일 그리고 소고기를 먹었다고 사람을 죽이는 일 그리고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치며 사람을 살육하는 것은 모두 ‘신을 위해서’ 한 것이다. 따라서 신이란 인간에게 아주 유해한 결과를 초래하는 존재로서 이러한 신이 존재할 리가 없다. 신은 망상이다.
최종결론 : 신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끔찍한 행위를 보면, 신을 믿는 종교는 거짓의 종교임이 분명하고, 진정한 종교란 ‘생로병사’에서 위로받고자 하는 것이다.
=위 논의에 대한 논리적인 오류지적 =
위의 근거 ①에서 대부분의 테러분자들이 ‘이슬람신도들’이라는 말은 사실 참도 거짓도 아니다. 이는 테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폭력적 사건이나, 정치적인 보복이나, 학살사건을 테러로 규정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는 이슬람 신도가 아닌 사람들이 저지르는 테러도 많다. 다만 오늘날 특수한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하여 자칭 이슬람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특정한 테러를 일으키고 이 테러가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테러의 대다수가 이슬람신자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는 ‘일반화의 오류’라고 볼 수가 있다. 물론 현재 언론에서 주목하고 있는 대다수의 테러가 이슬람신자들과 관계된 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다.
위의 근거 ②에서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쳤다고 해서 즉 스스로 이슬람신자라고 한다고 해서 진정한 ‘이슬람신자’라고 간주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 신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스스로 ‘기독교신자라고 말하는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가 기독교인답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에 있다. 이는 마치 태극기 집회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스스로 애국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진정한 애국자로 규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정한 애국자는 나라를 사랑하는 행위에 있는 것이지, 그가 애국자라고 주장한다고 애국자인 것은 아니다. 태극기 집회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이 사이비 애국자 일 수가 있듯이,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치면서 테러를 자행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사이비 ‘이슬람신도’가 대다수 일 수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진술은 ‘진위확인의 무시의 오류’라고 볼 수 있다.

= 테러 분자들에 대해 “그들은 종교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코란을 읽은 적조차 없다”라고
가톨릭 수도자들에게 하소연하는 이슬람신자들 : 영화 <신과 인간> 중에서 =
근거 ③에서 ‘히잡을 쓰는 것과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신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비-이성적인 명령을 내린 신이 존재할 리가 없다고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진술은 ‘의도왜곡’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코란에서 있는 모든 말들이 반드시 신이 한 말이라고 추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며, 어떤 명령들은 한 사회에서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이어서 마치 ‘신의 명령’처럼 그렇게 기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문화적 맥락에서 보자면 히잡을 쓰는 것은 여성의 정결을 상징하는 상징적 이미지일 수 있으며, 또한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 쬐는 사막지역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건강상 도움이 되기 때문에 모든 이들이 그렇게 하라는 의미로 ‘알라가 말하였다’고 기록하였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물이 귀한 사막지역에 돼지를 키우는 일은 가난한 사람에게 물을 제한하는 매우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참고로 돼지는 두꺼운 지방질을 굳지 않게 하기위해 스스로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오줌으로 바닥을 질척하게 하며, 돼지 한 마리를 키우기 위해서는 한 다른 가축을 키우는 3배 이상의 물이 필요하다.), 부자들로 하여금 돼지를 키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아예 알라가 돼지고기를 먹지 말하고 하였다고 기록하였을 수도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아랍쪽 사회학자들이 주장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적인 습관을 강제하는 것은 인권침해의 요소가 있겠지만, 이를 두고 ‘알라는 신은 아주 비-이성적인 신’이며, 이러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이는 명백히 ‘의도확대의 오류’라고 볼 수가 있다.
근거 ④는 전후 맥락에 얽힌 복잡한 사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사건 속의 어떤 하나의 펙트만으로 전체사건의 원인관계를 규명하는 것으로 ‘복합원인 무시의 오류’라고 할 수가 있다. 가령 어떤 한국인과 어떤 일본인이 ‘소녀상’에 관한 토론을 하다 말싸움으로 번지고 민족감정과 일제 강점기에 대한 논쟁으로 번져 급기야 칼부림을 하여 ‘일본인’이 죽었다고 가정을 하자. 이러한 사건을 “소녀상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과의 한 계기가 소녀상인 것이지 ‘살인의 원인’이 소녀상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살인을 부르는 소녀상은 망상이다”라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소를 먹는 일’이 계기가 되어 벌어진 사망사건을 ‘힌두교의 신’ 때문에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근거 ⑤는 신의 이름으로 전쟁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제시하지만, 이러한 말은 매우 문학적인 표현이고, 애매모호한 말이어서 그 진위를 확인하거나,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첫째는 전쟁을 일으키는 모든 사람들은 전쟁의 명분으로 그럴듯한 것을 제시한다. 그 이유는 대개 ‘정의확립’ ‘독재로부터의 해방’ ‘자유민주주의 수호’ ‘세계평화’ ‘민족통일’이라는 것을 들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신을 위하여’일 것이다. 따라서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명분으로 삼은 것을 모두 망상이거나 없어져야 할 것이라면, 이 세상에 가장 좋은 가치들을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 즉 전쟁의 명분을 전쟁의 진짜 이유로 오인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러한 근거를 통해 도출한 결론은 “명분과 원인을 혼동하는 오류”라고 할 수가 있다. 둘째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실제로 신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믿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는 한 개인의 인격의 문제이거나 의식의 문제이지 신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결론에서 “신이 망상이라면, 진정한 종교는 ‘생로병사’에서 위로받고자 하는 것이다”는 추론은 논리적인 비약이다. 종교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나 사상이 있을 수 있으며, 그 중 하나가 신을 믿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생로병사에서 위로받는 것이다. 그 외 우주와 교감하는 종교도 있을 것이고, 만물을 신성한 것으로 보는 종교도 있을 것이며 이외 많은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신이 망상’이라고 해서 그 중 하나인 ‘생로병사에서 위로받고자 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인생을 ‘생로병사’로 요약하는 것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생에는 생로병사 외에 무수한 것들이 있다. 사랑도 있고, 행복도 있고, 즐거움도 있고, 아름다운 것도 있고, 축복도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가장 부정적인 요소인 ‘늙음과 병듬과 죽음’이라는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인가? 이는 분명 부분을 보고 전체를 규정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서 왜곡되고 편협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사실 이는 종교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현상을 고찰하는 나약한 인간이성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이성적이고 지성적이라는 사람들도 얼마나 무지함 속에 싸여 살아가고 있는 지를 말해주는 예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신의 문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종교적 삶 안에서 ‘체험될 수 있을 뿐’이며, 이러한 체험들이 경우에 따라서는 참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 망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철학자는 이러한 개인들의 신앙의 구체적인 사실들에 대해서 학문적인 언급을 삼가야 할 것이다. 다만 종교가 가진 본질적인 원리들이나, 일반적인 현상들에 대해서 철학적 차원의 지혜를 끄집어내거나 혹은 어떤 철학적 진리를 통해 이러한 종교에 관한 것을 보다 참된 종교가 될 수 있도록 안내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것이 한 종교를 존중하는 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