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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상 왜의 원병 파병은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백제 멸망 직후에 곧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당시 당은 이르는 곳마다 그곳에 토착해 살던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여 그 세력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것이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막강한 것이었으며,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는 일은 곧 그 당과 등지는 일로서 왜로서는 쉽게 결단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백제 부흥군 지도자였던 귀실복신이 원병 요청과 함께 당시 왜국에 인질(백제 왕실의 상주대사)로 체류하고 있던 백제의 왕자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한 것은 660년 10월의 일이었지만[10], 왜 조정에서 부여풍장을 백제로 보낸 것은 661년[11]
하지만 일단 정치적 결단이 내려진 뒤, 왜는 백제부흥운동에 파격적인 원조를 실시했는데, 사이메이 천황이 661년에 급서한 뒤에도 황태자였던 나카노오에662년[12] 이는 왜국 외에 외부 후원을 받을 길이 없었던 백제 부흥군으로서는 귀중한 선물이었다.
왜가 '백제 지원에 나서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린 배경에는 당시 고구려가 661년 12월에 있었던 당의 침략 시도를 좌절시켰다(《일본서기》)[13] 는 소식을 빠르게 접한 부분도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 662년 1월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군대가 평양(平壤)
귀실복신의 죽음과 백제 부흥군 지도부의 분열을 기회로 신라는 서둘러 백제 부흥군을 진압하고자 했고, 당은 웅진도독부의 유인원의 증원요청에 따라 유인궤(劉仁軌)가 인솔하는 수군 7천 명을 한반도에 파병했다.
육지에서는 당의 손인사(孫仁師)·유인원 그리고 신라의 문무왕이 이끄는 군사들이, 바다에서는 당의 두상(杜爽) 및 옛 백제의 태자였던 부여융(扶餘隆)
이때 육지에서는 백제의 기병이 진을 치고 신라군과 맞섰고, 바다에서는 왜에서 온 함선들이 강변의 모래밭에 정박해 있었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차로 인해 당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 모두 대패했다.(이때 백제·왜의 연합군은 당의 수군에 밀려 물러나 있다가 "우리가 먼저 치면 저들은 알아서 물러날 것"이라는 몹시 엉터리같은 작전을 택했다고 한다.)
백강에 집결해 있던 1천 척의 함선 가운데 4백 척이 불탔으며, 신·구《당서》와 《자치통감》, 그리고 이들 사료를 참조한 《삼국사기》는 이때의 싸움을 두고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당시의 처절했던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이때 참가한 당의 수군의 주력은 한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수적으로 우세였던 왜의 수군이 당 신라에 이렇다 할 만한 손실을 입히지도 못한 채 궤멸되고 만 것은 선박 건조 기술이나 수군의 전략, 군사 훈련 차원에서 당시 왜가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는 보여주는 사건으로 꼽힌다. 왜병의 장수였던 에치노 다쿠쓰는 하늘을 보며 맹서한 뒤 이를 갈며 수십 명을 죽이며 분전했지만 끝내 전사했고, 규슈의 호족이었던 치쿠시노기미 사쓰야마(筑紫君薩夜麻)도 당병에 붙들려 8년 동안이나 포로로 당에 억류되어 있다가 귀국을 허락받았다.
백제의 풍장왕은 몇 사람의 측근만 거느린 채 배 한 척에 의지해 고구려로 달아나고, 백강에서 대패한 왜병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왜병과 백제 유민들 중 망명을 원하는 이들을 배에 싣고 당의 수군에 쫓기며 간신히 귀국했다.
육지에서도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기병을 물리치고 주류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백제 부흥 세력은 궤멸된다.
백촌강 싸움의 현장은
1.금강 하구 군산지역
2,부안 동진강 하구...우금산성 복신굴,,백촌.백석리,백산성 내소사,보령원 현존,
대진터,장패들,등 현지 구전 다수 전해오고 있음,
주유성은, ,우금산성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