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원보(淵源譜) 서문
우리 집안이 성(姓)을 얻게 된 연원은 깊고도 오래다. 멀고먼 옛날에 안등(安登) 성모(聖母)께서 신룡(神龍)의 태몽을 꾸고1) 임신하여 염황(炎皇)을 강수(姜水)에서 낳았다. 자라면서 거룩한 덕이 있어 복희(伏羲)의 다음 대에 천자(天子)가 되었다.2) (강수에 태어났다 하여) 태어난 땅의 이름을 따서 성씨(姓氏)를 삼았다.
염황이 쟁기와 보습[耒耟],3) 의약(醫藥)과 시제(市祭)4) 를 처음 만들어 백성들이 머물러 살게5) 해주었다.
7세에 이르러6) 제업(帝業)이 드디어 쇠하여 절경(節莖)과 극(克)7) 이 제위(帝位)를 이어받지 못했다.
유망(楡罔)8) 이 비록 종주(宗主)였지만 동성(同姓) 제후들이 달아났다. 치우(蚩尤)가 천명을 훔친 것9) 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는데, (황제가) 탁록(涿鹿)의 전투에서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안개 덮힌 진을 격파하였다.
이때부터 대대로 (제후로) 습봉(襲封)되다가, 사악(四岳)10) 에 이르러 우순(虞舜)의 질종(秩宗)이 되었다.11)
사악의 후예 사상보(師尙父)12) 가 있는데, 나이 일흔에 문왕(文王)을 만나 제업(帝業)을 이루게 보좌하였지만, 대통(大統)을 이루지 못하였다.13) 무왕(武王)에 와서야 상(商)을 쳐서 이기고 제위에 올랐으며, 제(齊)나라에 봉하였다.
말세에 이르러 강폭한 신하들이 왕의 실권을 빼앗았으며, 그 뒤에는 먼 후손들이 각 나라에 지파 분파별로 흩어져 살았다.
한(漢)나라 말에 이르러 휘 경(冏)이 천수공조(天水功曹)가 되었으며, 아들 유(維)14) 가 충무후(忠武侯)15) 의 유법(遺法)을 이어받아 중원(中原)을 아홉 번이나 쳤지만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에 후손들이 천수(天水)를 관향으로 삼았다.
수(隋)나라 때에 이르러 동번(東藩) 구려(句麗)에 국서를 보냈는데,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겠다[興師征討]”는 구절이 있었다. 휘 이식(以式)이 원수(元帥)가 되어 전몰시켰다.16)
손자 휘 행본(行本)17) 에 이르러 이적(李勣), 설인귀(薛仁貴)와 함께 당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고구려를 평정하였다. 당나라에서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자, (그곳에서) 진무(鎭撫)하였다. 자손들이 대대로 총병(總兵)이 되었다.
고려조(高麗朝)에 이르러 휘 사진(思進)이 군공(軍功)으로 진양(晉陽)에 봉읍(封邑)을 받자, 우리 동방 우리 씨족의 관향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자손들이 왕성하게 늘어나서 남강(南江) 네 군데에 나뉘어 살았으며, 내외 각 구역의 종파들이 팔도에 널리 퍼졌다.
아! 그 시초를 거슬러올라가 보면 한 사람의 몸이었는데, 이 한 사람의 몸이 이제는 길에 지나가는 사람처럼 되었다.18) 소명윤(蘇明允)19) 이 나보다 먼저 (이러한 실태를) 슬퍼했으니, 우리 종족(宗族) 가운데 소원한 자도 친해지고 촌수가 먼 자도 가까워지게 하는 계책으로는 족보를 수합하는 것이 가장 좋다.20)
그러므로 이제 경기, 영남, 호남과 호서 지방의 두드러진 집안 약간을 모았으니, 후대의 먼 후손21) 들이 이를 따라서 계속 서술하면 아마도 전대(前代)의 강령(綱領)을 문란케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경태(景泰)22) 신미년(1451) 3월 상한에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 희안(希顏)이 인재누실(仁齋陋室)에서 쓰다
1) 당(唐)나라 사마정(司馬貞)의 《보사기(補史記)》 〈삼황본기(三皇本紀)〉에 “염제 신농씨는 강성(姜姓)이고, 어머니 여등은 유와씨의 딸이다. 소전(少典)의 비(妃)가 되어 신룡과 감통하여 염제를 낳았는데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가졌다.[炎帝神農氏, 姜姓, 母曰女登, 有媧氏之女. 爲少典妃, 感神龍而生炎帝, 人身牛首.]”라고 하였다.
2) 《십팔사략(十八史略)》에 태호(太昊) 복희씨(伏羲氏),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를 삼황(三皇)이라 하고, 소호(少昊) 금천씨(金天氏), 전욱(顓頊) 고양씨(高陽氏),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 제요(帝堯) 도당씨(陶唐氏), 제순(帝舜) 유우씨(有虞氏)를 오제(五帝)라 하였다. 염제(炎帝)가 삼황에 든다 하여 염황(炎皇)이라 하였다.
3) 《주역》 〈계사 하(繫辭下)〉에, “복희씨가 세상을 떠나자 신농씨가 나무를 쪼개어 쟁기[耒]를 만들고 나무를 깎아서 보습[耟]을 만들어 이 쟁기와 보습의 이익을 천하에 가르쳐 주었다.[包犧氏沒 神農氏作 斲木爲耟 揉木爲耒 耒耨之利 以敎天下]”고 하였다.
4) 〈교특생〉에 “천자의 성대한 사제(蜡祭)는 그 대상이 되는 신(神)이 여덟이니, 이기씨(伊耆氏)가 처음으로 사제를 만들었다.[天子大蜡八, 伊耆氏始爲蜡.]”라고 하였는데, 공영달(孔穎達)의 소에 “이기씨는 신농(神農)이다. 처음으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사제(蜡祭)를 지내서 하늘에 보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호전집》 권49 〈향거요람 서문[鄕居要覽序]〉에 “신농씨(神農氏)가 사람들에게 농기구를 만들어 줌으로써 이롭게 해 주었고, 그런 뒤에 시장(市場)을 개설하여 있고 없는 것을 유통하게 하였으며, 의약(醫藥)을 만들어 요절(夭折)하는 데서 구해 주었다. 그런데도 신농씨라고 부르는 것은 농사를 중요시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5) 원문의 전거(奠居)는 ‘전궐유거(奠厥攸居)’의 준말인데, 《서경(書經)》 〈반경(盤庚)〉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들이 거주할 곳을 정하고, 군신과 상하의 자리를 바로잡았다.[奠厥攸居, 乃正厥位]”
6) 이덕무가 지은 《기년아람(紀年兒覽)》 〈선통기(禪通紀)〉에 7세를 기록하였다. 염제 신농 이후에 제임괴(帝臨魁), 제승(帝承), 제명(帝明), 제선(帝宣), 제래(帝來), 제충(帝衷)까지 7세가 황제에 즉위하였다.
7) 제충(帝衷)이 43년 동안 제위(帝位)에 있으면서 절경을 낳고, 절경이 극을 낳았으나 모두 황제가 되지 못하였다. 극의 아들 유망(楡罔)이 마지막 황제에 올랐다.
8) 제충(帝衷)의 증손자인데, 55년 동안 제위에 있다가 천명이 바뀌었다. 강씨가 모두 520년간 다스렸다.
9) 원문의 절명(絶命)은 신하가 임금의 실권을 빼앗아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10) 사악(四岳)은 사방 산악을 통치하는 일을 맡은 자인데,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는 초주(譙周)의 설을 인용하여 “염제(炎帝)와 백이(伯夷)의 후예로서 사악을 관장하여 공이 있었다.” 하였다.
요 임금이 왕위를 선양하려 하자, 사악이 사양하고서 우순(虞舜)을 추천하였다. 《서경》 〈우서 요전(堯典)〉 제12장에서 사악(四岳)이 순에 대해 말하기를, “아버지는 완악하고 어머니는 어리석으며 이복동생 상(象)은 오만한데도 능히 효로 화하게 하여 점점 다스려서 간악한 데 이르지 않게 하였습니다.[父頑 母嚚 象傲 克諧以孝 烝烝乂 不格姦]”라고 하였다. 요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시험해 보겠다. 그에게 딸을 시집보내어 그 법을 두 딸에게서 관찰하겠다.” 하고, 두 딸을 시집보내어 순의 아내가 되게 하였다.
11) 순(舜)임금이 “오, 사악(四岳)이여! 나의 삼례(三禮)를 맡을 만한 사람이 있는가?” 하니, 여럿이 아뢰기를 “백아가 있습니다.” 하므로, 순 임금이 “오, 백이여 그대를 질종(秩宗 예관)에 임명하니 이른 새벽부터 밤까지 오직 공경하여 곧고 밝게 하라.” 하였다. 《서경(書經)》 〈우서(虞書) 순전(舜典)〉
백이(伯夷)는 염제의 후손으로, 우순(虞舜)의 신하였다. 삼례(三禮)는 천신(天神)ㆍ지기(地祇)ㆍ인귀(人鬼)에 제사지내는 예를 말하니, 백이가 질종(秩宗)에 임명되어 국가의 예(禮)를 관장했다는 뜻이다.
12) 태사(太師) 상보(尙父)의 준밀인데, 여상(呂尙)이라고도 한다. 본성은 강씨인데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스승이 되어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치고 나라를 세운 공으로, 제(齊)나라에 봉작(封爵)되었다.
태공망(太公望), 강태공(姜太公)이라고도 한다.
13) 원문의 ‘대통미집(大統未集)’은 《서경(書經)》 〈무성(武成)〉에 나오는 무왕(武王)의 말이다. “우리 문고(文考)이신 문왕께서 능히 공을 이룩하시어 크게 천명에 응하여 사방의 중하(中夏)를 어루만지시니, 큰 나라는 그 힘을 두려워하고 작은 나라는 그 덕을 그리워한 지가 9년이었다. 그런데 대통을 이루지 못하고 별세하셨으므로 나 소자가 그 뜻을 이었노라.[我文考文王, 克成厥勳, 誕膺天命, 以撫方夏, 大邦畏其力, 小邦懷其德, 惟九年, 大統未集, 予小子其承厥志.]”
14) 강유(姜維, 202~264)의 자는 백약(伯約)으로 천수(天水) 기(冀) 사람이다.
본래 위(魏)나라 장수였다가 촉한으로 귀순하여 제갈량의 신임을 얻어 정서장군(征西將軍)에 올랐다.
제갈량이 죽은 뒤에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여러 차례 위나라를 정벌했는데, 위나라에서는 사마소(司馬昭)가 등애(鄧艾)와 종회(鍾會)를 보내 대적케 하므로 결국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 후주(後主) 염흥(炎興) 연간에 위나라 종회(鍾會)가 촉나라를 공격하여 후주가 항복하자 강유도 투항하였다.
나중에 종회가 위나라를 배반하는 일을 도모하자, 강유도 이에 가담하여 촉나라의 부흥을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 《삼국지(三國志)》 권44 〈촉서(蜀書) 강유전(姜維傳)〉
15)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량(諸葛亮)의 시호이다.
16) 강희안이 지은 〈연원보 서문〉 원문을 옮겨 쓰면서 몇 글자가 빠진 듯하다. 문맥이 부자연스럽다.
17)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 세기(世紀) 권8 〈고구려 3〉에 《자치통감》 기록을 인용하였는데, 당나라 장수 강행본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경자년(640)에 제군이 유주(幽州)에 모두 모였다. 행군총관(行軍摠管) 강행본(姜行本)과 소부 소감(少部少監) 구행엄(邱行淹)을 보내어 먼저 공인(工人)들을 독촉하여 안라산(安蘿山)에서 운제(雲梯)와 충차(衝車)를 제조하게 하였다. 이때에 원근에서 응모하는 용사(勇士)와 성을 공격하는 기계(器械)를 바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는데, 황제가 몸소 손익을 따져 편리하고 좋은 것을 취하였다.”
18) 소순(蘇洵)의 〈족보서(族譜序)〉에 “내가 길거리의 사람처럼 보는 자가 처음에는 형제였고, 형제는 처음에 한 사람의 몸이었으니, 슬프구나![吾所與相視如塗人者, 其初兄弟也. 兄弟其初 一人之身也, 悲夫]”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가 지은 〈족보서(族譜序)〉가 《고문진보후집(古文眞寶後集)》에 실리면서 널리 알려져, 여러 족보 서문에 그의 글이 인용되었다.
19) 명윤은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순(蘇洵, 1009~1066)의 자(字)로, 소동파와 소철 형제의 아버지이다.
20) 소순이 〈족보서〉에서 “한 사람의 몸이 갈라져 길거리의 사람이 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내가 족보를 만드는 까닭이다. 나뉘어 길거리의 남이 되는 것이 추세요, 이 추세는 내가 어찌할 수가 없으니, 다행히도 길거리의 남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 소홀하고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21) 원문의 ‘운잉(雲仍)’은 먼 후손이라는 뜻이다. 《이아(爾雅)》 〈석친(釋親)〉에 “5세손의 아들이 잉손이 되고, 잉손의 아들이 운손이 된다.[晜孫之子爲仍孫, 仍孫之子爲雲孫.]”라고 하였는데, 진(晉)나라 곽박(郭璞)의 주에 “가볍고 먼 것이 뜬 구름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言輕遠如浮雲.]”라고 하였다.
22) 명나라 대종(代宗)이 사용한 연호인데, 정통(正統) 14년(1449)에 연호를 경태로 개정하고 1450년부터 1457년까지 7년 동안 사용하였다.
첫댓글 姜明求(통계공-청풍공-忠烈公종회)님의 자료를 이 곳으로 옮깁니다
제게서 옮긴 글이라 말씀은 고맙지만
조금 부족한듯하여 출처를 추기합니다.
본 연원보서문은 1936년 진주강씨 병자보(일명 은어보 즉 은열공파와 어사공파의 합보)에 올려진 1451년 강희안선조께서 집현전 학사시절 쓰신 서문으로 근년에 강희설 대부께서 연세대 허경진교수에게 전문해석을 다시의뢰하여 발표된 자료이오나
글의 해석에 있어 매끄럽지 못한 것은 오자나 탈자가 있을 수 있다고 하셔서
그 원문과 소장처를 찾고 있었으나 제 성의가 미흡하여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슴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