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춘은 김좌진 장군의 후손이다.
━세상에 알리는 글
*필자성명 : 문일범
*성별 : 남*연령: 68세 *직업 : 왕청현정부 국가공무원
*퇴직일 : 2012년 5월.*신분증번호 : ****242419520505***
*연락전화 : -86*********
나는 김장춘이 김좌진장군의 후손이라는 것을 20년 전부터 부친 문호갑한테서 듣고 부친이 수집한 김좌진장군의 역사재료를 보고 확신하였다.
부친은 생전에 교원사업, 교육국행정사업을 할 때 왕청제2중학교 김병규(별세)교장과 항일투쟁사를 연구•정리하셨다. 그이는 1950년대 연변대학 역사계 본과대학을 졸업한 후부터 역사에 큰 흥취를 갖고 정년퇴직 후에도 연변역사연구소 편외(編外) 일군으로 활약하였다. 부친은 항일투쟁사를 수립하여 제공하였다. 일부 자료는 주(州) 현(縣) 소책자에 발표하였다. 부친은 전국 각지를 다니며 항일에 참가한 노인들을 찾고 북경도서관, 북경역사연구소 재료실도 가서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장군의 친손자 김명환이 있는 흑룡강성 이춘에서 이틀을 묶으며 장군과 후손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조사하였다. 한번은 연변도서관에서 《김좌진전》이란 윤병석 작가가 쓴 책을 가져다 읽는 것이었다. 다 읽고 나서 시간, 명칭 등 여러 곳이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면서 장군의 역사연구에 몰두하셨다. 그 후부터 유관인원을 찾고, 자료수집하고, 자료정리하는 일이 일상으로 되었다.
자료수집 가운데서 김좌진장군의 후손이 왕청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정말 있을 수 있을까? 하면서 의심을 품고 김장춘을 찾아갔었다. 그때는 1988년도였다. 만나고 보니 정말 김장군의 후손이었다. 첫째 김장군을 꼭 닮았다. 둘째 김장군의 이야기를 할라치면 말이 술술 나왔다. 셋째 김장춘은 그때 벌써 김장군이 주둔하고 있던 곳과 전투하던 곳을 다 돌아보았다. 가까운 곳은 몇십번도 더 가보았다. 넷째 제일 중요한 것은 김장군의 유물이 있었다. 김장군의 둘째 아들 김창규(양아버지)에서 물려받은 유물로는 장군의 가족사진, 장군이 말타고 찍은 사진, 장군이 부인과 같이 말타고 찍은 사진, 부대원들과 찍은 사진 등 10여장이 있었다. 그리고 장군의 크고 작은 군사일기책(8권 분량), 군사작전지도, 또 다른 지도 2장, 김창규 일기장 등이다.[그림1]
1989년 김장춘은 김장군의 유물을 부친 문호갑에게 제공하였다. 부친께서는 이런 재료를 다 분석하고 북로군정서 자리와 청산리 전투지를 돌아보시고 이제 장춘이는 김좌진장군의 후손임이 입증됐다. 이제 한국에 가면 된다. 내가 자료를 다 들고 같이 가겠다고 말씀하셨다.
1990년 연변역사연구소 직원인 강용권이 몽땅 가져갔다. 그 후 부친은 강용권을 찾아가 여러 번 돌려달라고 요구하였지만 반납받지 못하였다. 1년여 동안 재료를 돌려받지 못하자 부친은 화가 극도로 치밀었다. 1992년 10월29일 장군의 유물을 되돌려받지 못하고 68세를 일기로 화병으로 영영 세상을 떠나셨다. 부친이 돌아가신 뒤 김장춘은 강용권에게 자료반납을 요구했으나 없어진 뒤였다.
아버지께서 역사연구에 애착한 것은 대학 역사계를 졸업하고서부터인 것 같다. 부친은 자료를 정리하여 연변 소책자에 여러 번 발표하셨다. 그이가 돌아가신 후 유물을 정리하여 보니 수집하고 정리한 자료는 16절지로 높이가 0.6미터나 되었다. 그중에는 김장군의 정리된 완성된 초고도 포함되어 있었다. 책으로 만들기 일보 직전이었다.
연변대학 박창욱 교수는 전국에서도 이름이 있는 역사학자다. 그이는 왕청에 문선생이 쓴 재료는 고칠데가 없고 왕청에서 역사연구를 초과할 사람이 없다고 높이 평가하셨다.
김장춘이 김좌진장군의 후손이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것으로도 하늘나라에 계시는 부친께서는 큰 위로가 될 것이다.
바라건대 첫째 김장군의 삐뚤어진 역사를 바로잡았으면 좋겠고, 둘째 김장춘도 항일영웅 후손들과 같이 나라의 보살핌을 받으며 행복한 생활을 했으면 좋겠고, 셋째는 보안역량을 동원해서라도 잃어버린 김장군의 유물을 찾았으면 좋겠다.
이상의 소원은 한국정부에서 꼭 해결하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한국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 사업이 새로운 성과를 거두기를 기원합니다. 세월이 흘러 위에 적은 사실이 차이가 있다면 양해를 구합니다.
필자 : 문일범 (文日范)
2020年 7月 26日
왕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