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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자를 어떻게 전도할 것인가?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전도와 양육에 힘쓰는 교회’ 이다. 전도는 교회의 성장을 위한 목표이며, 양육은 교인들의 영적성장을 위한 과제이다. 교회는 교인들을 양육하며 교인들의 전도로 성장한다. 이렇게 성장한 교회는 교회가 없는 지역에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여 자립하도록 돕는다. 이것이 교회의 출산이며 예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지상목표이다.
각 교회가 전도와 양육의 어느 단계에 처해 있는가에 따라 전도중심 교회와 양육중심 교회로 구분할 수 있다. 이미 전도를 통해 어느 정도의 교인을 확보한 교회는 교인의 신앙정도에 따라 각 단계별로 필요한 양육에 주력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양육중심 교회에서는 교인의 양육과 예배를 위한 충분한 면적의 공간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다수의 교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는 대예배실과 소규모 그룹별로 양육할 수 있는 소규모 공간들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새롭게 개척하거나 분립한 교회에서는 기존 교인의 수가 많지 않고 전도활동을 통해 새로운 신자를 확보하여야 하므로 기존 신자를 위한 예배공간보다는 비신자를 위한 공간이 더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척교회에서는 양육중심 교회의 패러다임을 모방하여 예배실을 먼저 마련하고 그 비용 때문에 자립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개척교회는 아직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의 수가 적으므로 목사나 교인의 자택 또는 지인의 사업장을 빌려 예배를 드리고, 전도에 치중하는 전도중심 교회로서 비신자를 위한 문화전도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 이러한 문화전도 공간은 교회전용 공간이 아닌 사회문화 공간 즉, 문화센터나 복지관 또는 저렴하게 빌릴 수 있는 학교 강당이나 회사의 강당 등을 활용할 수 있다. 전도를 통해 교인을 확보하게 되면 점차로 예배와 양육을 위한 교회전용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개척교회의 성장과 자립을 위해 바람직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첫번째로 우리가 꿈꾸는 교회에서는 비신자의 전도를 위해 문화전도에 힘쓴다. 전도중심 교회만이 아니라 양육중심 교회에서도 비신자를 위한 전도는 필요하다. 전도(evangelical work)는 ‘말과 문화와 국경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1] 으로,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희생하는 자세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전도자는 복음을 자신의 신앙인격에 담아 비신자에게 전하며, 비신자는 전도자의 신앙인격을 통해 복음을 수용하고 구도자가 된다.
피터 마스터스(Peter Masters)는 “중생은 일종의 과정이다.” 라고 말하면서, “연속적인 중생은 영적인 생명이 심겨지는 초기단계가 있어야 진리에 대하여 마음을 열 수 있고, 죄에 대한 확신을 수용하며, 자발적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된다. 일단 성령의 능력으로 중생한 사람은, 계속 이어지는 회심(구원)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적으로 깨달으면서 통과하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이 뒤따르는 과정이 초기의 중생과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훨씬 더 길게 지속되는 투쟁의 기간이 있기 마련이다. 이 기간에는, 비록 그가 초기 중생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이 관점에 따르자면 어디까지나 그는 구도자이다.” 라고 설명한다.[2]
피터 마스터스는 회심(구원)의 5단계에 관해, “1단계: 영적 수태(Conception, 초기 중생), 2단계: 각성(Awakening)과 죄에 대한 확신(Conviction), 3단계: 회개(Repentance)와 믿음(Faith), 4단계: 칭의(Justification)와 새 출생(New birth, 중생), 5단계: 구원의 확신(Assurance)” 으로 구분하고 있다. [3]
피터 마스터스의 중생관과 관련하여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는 “외적 부르심과 내적(효과적) 부르심” 으로 구분하면서, “이 두가지 측면이 항상 연합되고 항상 동반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적 부르심이 임하려면 말씀에 의해 중재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일한 말씀이 외적 부르심에서 들려지고, 내적 부르심에서 심령에 효과적이게 된다. 성령의 강력한 작용을 통해 외적 부르심은 즉시 내적 부르심으로 전이된다. 여기에 말씀을 심령에 적용시키는 성령의 강력한 사역이 첨가되어야 한다.” 라고 설명한다.[4]
이와 같이 전도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신자의 영적 반응을 따라 다양한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이므로 각 단계별로 세분화된 전도의 방법을 다양하게 활용하여야 한다. 특히 기독교 복음에 접해보지 않은 비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초기단계의 전도에서는 직접적인 복음의 권유보다는 비신자에게 익숙한 문화적 요소를 활용하여 친근하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덕수는 “기독교 문화권 밖에 있는 사람 전도는 교회 문화권 안에 있는 사람을 향한 전도와 달라야 한다.” 고 주장한다.[5]
그는 랄프 네이버(Ralph W. Neighbour, Jr.)를 인용하면서, “그는 전도 대상자를 Type A 불신자와 Type B 불신자로 구별하여 설명한다.” 고 기술하면서, “타입 A 불신자는 우리 그리스도인과 비슷한 사람들로 전도하기가 수월한 편이다. 반면 타입 B 불신자는 교회를 가본 적이 없거나 의향이 없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은 신을 믿지도 않고 성경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을 펴 읽어가며 설명하는 전도 방식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정하는 것과 달리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그들에게는 복음을 개념적으로 이해시키려고 시도하기 전에, 적절한 관계를 형성하며 마음을 열고 복음 앞에 나오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 설명하고 있다.[6]
그림 1 비신자를 위해 열려 있는 문화전도
한국의 많은 교회가 비신자의 전도를 위해 문화 또는 복지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데 교회의 예배당에서 비신자를 초청하여 열린예배 또는 문화전도 행사를 할 수도 있으나 신자는 물론 비신자에게도 어딘지 자유롭지 못한 부담감을 주게 된다. 그러므로 구도자를 위한 열린예배 또는 찬양예배에서 한단계 더 내려와 문화행사 또는 문화전도와 같은 문화를 매개로 한 신자와 비신자 간의 친밀한 교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신자를 위한 예배의 공간(예배당 또는 예배실)과는 별도로 비신자를 위한 문화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7] 즉, 신자에게는 전통적 의미의 거룩한 공간에서 예배와 기도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고, 별도로 비신자가 개종의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도 마음 편하게 참가할 수 있는 문화센터와 같은 별도의 전도공간을 준비하는 것이다.
히버트(Paul G. Hiebbert)는 이러한 별도의 전도공간에 대해 “복음전도를 위한 중립지대”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 내용 가운데에는 “공원, 경기장 그리고 공연장과 식당과 연회장 그리고 상점과 쇼핑센터 그리고 개인 가정과 캠프와 수양관 그리고 순례지” 등을 들고 있다.[8] 그러므로 비신자를 대상으로 전도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문화전도 공간을 마련하여 지역사회에 대한 문화활동을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즉 문화센터를 통해 문화적 영향력을 확대함으로써 기독교 문화의 전파에 힘쓰고, 이러한 문화전도의 장소에서 복음전도를 통해 복음의 참된 가치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비신자를 위한 문화전도 방식의 복음전도를 위한 전달 방식으로 일인강연식, 모노드라마(1인칭 내러티브)식, 판소리식, 대담식, 동화식, 그림동화식, 인형극식, 드라마식, 시네마식, 뮤지컬식, 담화식 등을 소개하여 다양한 문화전도 방식의 복음전도에 적용하고자 한다.
1) 일인강연(lecture)식
일반적으로 설교라고 하면 대부분 이 방식을 의미한다. 즉 한 사람의 설교자가 설교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혼자서 진행하는 것으로, 때에 따라서는 설교 도중에 질문을 통해 청중과의 대화를 시도하거나 독백 또는 찬양이나 일인드라마를 포함하기도 한다.
일인강연식 설교에서는 설교자가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어 내려가는 원고낭독이나 간략한 메모 또는 아예 설교원고 없이 설교하기도 하는데, 설교를 전달하는 화법에 따라 문어체 또는 구어체(대화체) 설교로 구분한다. 일인강연식은 전통적인 방식의 설교라는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며, 교회의 공예배에서 가장 많이 채용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기독교 설교에 익숙하지 않은 비신자에게는 자칫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2) 모노드라마(monodrama)식
모노드라마식은 한 사람의 연기자가 1인칭의 독백을 통해 극의 흐름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해든 로빈슨(H. Robinson)은 이 방식을 활용한 설교를 1인칭 설교(first-person narrative messages)라고 지칭한다.[9]
해돈 로빈슨은 이 방식에 관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최상의 방법 가운데 하나는 1인칭을 사용하는 것이다. 즉, 이야기의 내부로 들어가 등장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1인칭 관점을 사용하는 것은 시각을 변화시키고, 처음에는 약간 익숙해 보이던 요소에 신선함과 통찰을 제공한다.” 고 설명한다.[10]
로빈슨은 1인칭 설교에 관해, “1인칭 설교(때로는 극적 독백으로 지칭되기도 함)는 성경의 사건을 목격자 관점에서 전하는 설교이다. 1인칭 설교들은 그 이야기 속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의 견지에서 이야기를 재 진술한다.” 고 기술하면서, “강해적 1인칭 설교방식은 성경에 대한 정확한 해석에 기초하며, 듣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의미를 적용한다. 이 일은 성경의 기사를 그 이야기속 인물의 관점에서 재구성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고 설명하고 있다.[11]
모노드라마식은 배경설명이 매우 생략되어 성경본문에 관한 사전 이해가 없이는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성경에 익숙한 신자에게는 사전준비를 통해 충분히 적용할 수 있지만, 성경지식이 전혀 없는 비신자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이다.
3) 판소리(Pansori)식
판소리는 한사람의 공연자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노래와 대사에 몸짓을 섞어 전통적인 서사적 이야기를 엮어가는 극적 음악이다. 판소리는 지역적 특성과 전승계보에 따른 파가 생겼다. 전라도 동북지역의 소리제를 동편제(東便制)라 하고, 전라도 서남지역의 소리제를 서편제(西便制)라 하며, 경기도·충청도의 소리제를 중고제(中高制)라 한다.
판소리 방식은 성경에 담겨있는 극적인 이야기를 판소리의 대사로 채용하여 성경본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12] 기독교 판소리 또는 찬양 판소리 등으로 불리우며 다수의 공연자가 활동적으로 공연하고 있는데, 한국의 전통 문화적 바탕 위에서 한국인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폭넓은 호응과 공감을 얻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이다. [13]
4) 대담(dialogue)식
2인 이상이 대담형식으로 설교를 이끌어가는 방식이다. 이때 질문자와 답변자의 역할로 나누어 진행할 수도 있고, 한사람의 질문자가 다수의 출연자를 대상으로 질문할 수도 있으며, 또는 반대로 다수의 질문자가 순서를 정해 한사람의 답변자에게 질문할 수도 있다. 또한, 출연자 상호간에 서로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이끌어 갈 수도 있다.
대담식은 성경본문에 관한 사전지식을 전제로 대담자들 만이 아니라 신자들도 함께 참여하는 전달방식이다. 그러나 성경지식이 전혀 없는 비신자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칫 소외감을 주는 방식이 될 수 있다.
5) 동화(fairy tale)식
동화의 구연을 통해 성경본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별도의 준비물이나 도구가 없이도 가장 간편하게 언제 어디서나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14]
동화식은 신자와 비신자를 불문하고 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유용한 방식이다.
6) 그림동화(picture fairy tale)식
동화식 설교에 그림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그림동화의 구연을 통해 성경본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그림동화를 위해서는 특수한 형태의 그림동화 틀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신자와 비신자를 불문하고 주로 어린이와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효과적인 방식이다.[15]
7) 인형극(puppet play)식
인형극의 대사를 통해 성경본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신자와 비신자를 불문하고 모든 연령을 대상으로 하는 대단히 효과적인 방식이다.[16]
8) 드라마(drama)식
연극의 대사를 통해 성경본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신자와 비신자를 불문하고 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대단히 효과적인 방식이다.
9) 시네마(cinema)식
영화의 대사를 통해 성경본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TV 에서는, 벤 허(Ben-Hur: A Tale of the Christ), 성의(The Robe), 선 오브 갓(Son of God), 패션(The Passion of the Christ), 킹 오브 킹스(The King of Kings), 골고다의 언덕(Golgotha), 가스펠(Gospel),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 위대한 생애의 이야기(The Greatest Story Ever Told) 등의 기독교 관련 영화들이 자주 방영된다.
이러한 기독교 관련 영화들은 시청자의 기독교 문화에 대한 교양 증진을 위한 것이지만,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비신자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전달하는 귀중한 전도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신자와 비신자를 불문하고 모든 연령을 대상으로 하는 대단히 효과적인 방식이다.
10) 뮤지컬(musical)식
일반적으로 뮤지컬이라고 하면 현대 음악극의 한 형식으로 음악과 노래와 무용을 결합한 것을 말한다. 노래의 가사를 통해 성경본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임현식은 뮤지컬 『시몬 베드로』를 창작하여 공연하고 있으며, 지역 교회나 선교 현장을 찾아가는 공연이 가능할 수 있도록 극적인 오라토리오(dramatic oratorio)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작품으로 각색하였다.[17] 그는 이에 관해 “기존의 오라토리오가 오페라나 뮤지컬과는 달리 동작이나 무대 장치가 없다는 특징을 보이지만, 이 작품은 성서의 내용을 보다 극적으로 연출하고 있으므로 극적인 오라토리오라고 명명되었고, 제목도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로 변경되었다.” 고 설명하고 있다.[18]
뮤지컬 방식은 매우 전문적인 능력을 필요로 하며, 신자와 비신자를 불문하고 모든 연령층에게 대단히 효과적인 전달 방식이다.
11) 담화(talk)식
담화는 담화자가 자유로이 자신의 의사를 청중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성경본문을 따르는 대신에 담화자 본인의 자유의사를 따르는 것이므로 설교라고 말할 수 없다.
김덕수는 더글러스 스튜어트(Douglas Stuart)를 인용하여 “오늘날 강단에는 성경적 설교가 있는가 하면 설교처럼 보이지만 설교가 아닌 단지 기독교식 토크(Spiritual Talk)에 불과한 것이 있다.”라고 말하면서 “이는 전통적인 논리적 강해나 이야기체 설교와 같은 설교방식과 관계없는, 어떤 설교적 경향성을 의미한다.” 고 설명하고 있다.[19]
이처럼 담화는 본질적으로 설교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비신자를 위한 전도의 전달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신자가 비신자인 친구나 가족에게 전도하거나 길거리 등에서 우연히 만난 비신자에게 전도할 때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두번째로 우리가 꿈꾸는 교회에서는 구도자를 위한 말씀전도를 준비한다. 피터 마스터스(Peter Masters)는 교회안에서 정규예배 시간에 행해지는 전도설교의 중요성에 관해, “현대교회는 중요한 전도설교(evangelistic preaching)를 잃어버렸다. 오늘날 우리는 죽어가는 영혼들에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을 보여주면서 강력하게 죄를 깨닫게 하고, 예수 믿도록 설득하는 (전도)설교를 좀처럼 들어볼 수 없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타락한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고귀한 기술인 (전도)설교는 이제 거의 사라져버렸고 대신 세상의 기법과 기술만이 교회에 난무한다.” 고 주장한다.[20]
정창균은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전도설교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전도설교에 관한 관심이 적고 강단에서 전도설교가 힘 있게 선포하지 않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전도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강단에서 전도 메시지 선포를 소홀하게 한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둘째 불신자는 교회 밖에 있고 주일예배에 나와 앉아있는 교인은 모두 신자라는 오해이다. 셋째 지금 같은 시기에 강단에서 천국과 지옥을 말하는 것은 유치하고 시대착오적이며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심판의 필연성과 회개를 말하는 것은 교인들에게 부담을 줘서 교회 성장이나 긍정적 목회에 걸림이 된다는 착각이 강단에서 전도설교를 하는 것을 소홀하게 한다. 넷째 전도를 그리스도의 복음 제시보다 전도 행사에 초점을 맞추어 잘못 이해하는 것이 강단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전도설교를 소홀하게 하는 한 원인이다.”[21]
교회 안에서 정규 예배시간에 구도자를 대상으로 전도설교를 하는 경우에는 일차적으로 구도자의 회개와 중생을 목표로 하지만 함께 참여한 신자에게도 구원의 확신과 전도의 동기부여를 위한 훌륭한 전도 교육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정창균은 교회 안에서 행하는 전도설교에 대해, “전도대상 불신자도 있고 그 사람을 전도할 필요성과 책임감도 느끼지만, 아직 그에게 자신 있게 복음을 제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초청할 용기가 없어서 머뭇거리는 교인들이 강단에서 선포하는 목사님의 전도설교를 들으면서 그 불신자를 주일에 교회로 데리고 나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하고 싶다는 의욕을 가질 수도 있다. 전도설교는 단순히 불신자를 대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신자들이 자신이 얻은 구원을 재확인할 기회를 얻기 위하여 그리고 신자들이 불신자를 전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책임을 의식하고 전도에 나서도록 촉구하기 위해서도 해야 한다. 잘 준비해 선포하는 목회자의 전도설교는 신자에게 복음을 듣게 하며 불신자에게 복음을 제시하는 시범을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전문적인 전도훈련과 실습을 받지 않은 신자라도 목사님이 전하는 전도설교를 반복적으로 들으면 복음을 전하는 요령과 자신감 용기를 얻을 수 있다.” 고 강조한다.[22]
이처럼 교회 안에서 구도자를 대상으로 행해지는 말씀전도는 구도자의 회개와 중생을 위한 것이지만, 신자에게도 자신의 구원을 재확인하고 교회 밖의 비신자에게 전도할 수 있는 교육의 기회가 되기도 한다.
[1] 개역개정,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 Peter Masters, 『영혼의 의사』, 손성은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4), 119-120.
[3] Masters, 『영혼의 의사』, 57-67. 피터 마스티스는 회심의 5단계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한다. 1단계: 영적 수태(초기 중생)는 전체 회심과정의 첫 단계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거나 아니면 생각하는 순간에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수태가 된 사람은 그 순간부터 자신의 영적 필요에 대하여 각성하게 되고 자신의 죄에 대해 깨닫기 시작한다. 2단계: 각성은 죄인이 자신이 영적으로 파산했음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이 구도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는 것에 대해 더 이상 개의치 않는다. 죄에 대한 확신은 죄의식과 불결함에 대한 의식을 주어 죄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3단계: 회개란 개인의 실제적인 죄에 대해 사무치는 슬픔을 느끼는 것이며, 반역적인 삶에서 벗어나 주님의 권위와 통치아래 항복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복음 전체에 대한 신앙, 특별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갈보리 십자가에서 완전히 이루신 구속사역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믿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적은 믿음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간다. 4단계: 칭의란 하늘에서의 선언으로서 어떤 특별한 개인이 이제는 죗값을 치를 필요가 없고, 완전히 의롭게 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모든 축복들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칭의가 하늘에서 선포될 때, 회심한 사람은 이를 인식하게 되고, 자신이 새로워졌음을 보여 주는 가시적인 증표를 가지게 된다. 또한 자신의 삶 속에서 구원의 표지와 새로운 성품을 드러내게 된다. 5단계: 의식적인 출생과 더불어 구원의 확신 혹은 성령께서 인 치시는 단계에 도달한다. 복음이 선포될 때,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혼 속에 수태를 일으키시며, 구도자들은 영적으로 각성하고 죄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된다. 복음의 논증과 간청 그리고 강청은 외적인 도구이다. 죄인은 설교자와 전도자들에게서 회개와 믿음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고, 주님을 발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넘어질 때마다 설교자와 전도자의 권면과 강청으로 다시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게 된다. 최종적으로 구도자가 분명히 새로워지고, 새로운 본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부분적으로 자신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복음의 내용을 인식하는 과정을 통해서이다. 그리하여 구도자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다.
[4] Louis Berkhof, 『벌코프 조직신학』, 권수경·이상은 역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7), 718-719.
[5] 김덕수, 『건강한 목회를 통해 세워가는 건강한 교회』 (서울: 대서, 2008), 373-375.
[6] Ralph W. Neighbour, Jr., Knocking on Doors, OPENING HEARTS (Singapore: Touch Ministries Int., 1986), 20-21; 김덕수, 『건강한 목회를 통해 세워가는 건강한 교회』 (서울: 대서, 2008), 374에서 재인용.
[7] 현승건, “한국 개신교 교회의 갱신을 위한 기독교 세계관의 적용 방안에 관한 연구”, 314.
[8] Paul G. Hiebbert, 『선교현장의 문화이해』, 김영동·안영권 역 (서울: 죠이선교회, 1997), 239-244.
[9] H. Robinson and T. Robinson, 『1인칭 내러티브 설교』, 25. 로빈슨은 “1인칭 설교 (때로는 극적 독백으로 지칭되기도 함) 는 성경의 사건을 목격자 관점에서 전하는 설교이다. 1인칭 설교들은 그 이야기 속의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의 견지에서 이야기를 재 진술한다.”고 기술하면서, “강해적 1인칭 설교 방식은 성경에 대한 정확한 해석에 기초하며, 듣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의미를 적용한다. 이 일은 성경의 기사를 그 이야기 속 인물의 관점에서 재구성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설명하고 있다.
[10] Robinson, 『1인칭 내러티브 설교』, 24-25.
[11] Robinson, 『1인칭 내러티브 설교』, 36-37.
[12] 표현모, “판소리로 예수님 십자가의 길 이야기 전해”, 한국기독공보, http://www.pckworld.com/news/articleView.html?idxno=71366 (2016. 06. 25 접근).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장면을 공연한 김선우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절규하듯 노래해 공연 후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는 "판소리는 설교의 도구"라고 강조하고, 이를 위해 예수님 십자가의 길, 불의한 재판관, 탕자 이야기 등 10여 개의 레퍼토리를 만들어 상황에 맞게 공연하고 있다.
[13] 조경이, “명창 김수미 찬양 70여곡 판소리로 작곡”, 국민일보,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0859212&code=61221211&cp=nv (2016. 08. 15 접근). 판소리명창 김수미는 국악 찬양을 부르는 것뿐만 아니라 70여곡을 직접 작곡했다. 김수미는 최근 3인조 국악찬양그룹 ‘우리’(김수미, 이선희, 노해현)를 결성해 올해 3월 첫 앨범을 발매했다. 노해현 명창은 “한국기독교가 100년이 됐는데 찬양부분이 아쉬운 것 같다.”며 “개혁개정판 찬송을 보니 우리나라 선율로 된 곡들이 10곡 이내였다. 판소리는 대단한 예술이다. 폭넓고 깊이가 있다. 우리 음악을 통해 찬양을 많이 들려드리고 싶다. 또, 크리스천들이 찬양을 통해서 판소리에도 좀더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양할지어다.’라는 말씀을 늘 새기고 있다.”고 전했다.
[14] 성경에 있는 극적 이야기를 구연자를 통해 전달하는 방식으로, 여기에 그림을 곁들이면 그림동화식이 되고, 인형을 사용하면 인형극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15] 일본의 선교현장에서 특히 병원이나 복지시설에서 노인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대단히 유용한 방식이다.
[16] 이동복, “인형극을 통한 전도 전략”, 인형극 선교회 인형나라 어린이 전문 선교회 다음세대, http://blog.daum.net/jl0070/5197481 (2017. 04. 28 접근). 이동복 전도사는 “인형극은 새친구를 동원할 수 있는 동원력을 가지고 있는 신비한 무기이다. 특히 복음을 접해보지 않았던 새친구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전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부모까지 함께 초청을 할 때는 부모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17] 임현식, 『시몬 베드로』 (서울: 챔프출판사, 2014), 7.
[19] 김덕수,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귀납적 강해설교』, 38.
[20] Peter Masters, 『영혼의 의사』, 손성은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4), 15-19.
[22] 정창균, “전도와 전도설교”,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