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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 주비위원회(籌備委員會) 사무국에서 정리함.
김좌진은 동화나라 사람이 아닙니다. 김좌진은 실존인물입니다.
2020년에 지은이 김정헌, 발행인 유성필로 출판한 책을 《수정•교정》 할 것을 요청합니다.
*도서명: 주먹대장에서 독립군 영웅으로, 백야 김좌진
*지은이: 김정헌
*발행인: 유성필
*발행처: 도서출판 행복한소통
*초판 인쇄: 2020년 10월 5일
*발 신 :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주) (연락처: 사무총장 전재진 010-4488-0824)
*제 목 : 백야 김좌진 관련 출판 도서 수정•교정•배포금지•폐기•재출판 요청
요청하는 취지
책 “주먹대장에서 독립군 영웅으로 백야 김좌진”의 잘못된 역사 기록과 가족사를 바로잡아 김좌진 장군의 명예를 회복하고, 만주반일무장독립군으로 일본침략군과 맞서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의 얼을 기리고자 함.
요청하는 이유
1. 실존 인물에 대한 허구적 묘사
[김좌진이 7살 때 일어난 일들]
⑴땅벌과 싸움 (책 26쪽)
▷땅벌 수백수천 마리한테 쏘여…(책 27쪽), 삽 한자루 찾아가지고 나왔다. 삽으로 벌집을 파내기 시작했다. 땅벌들은 수백 수천마리가 새카맣게 몰려와서 공격했다.…(책 30쪽)
:7살 어린 나이에 수백수천마리 땅벌에 쏘이며 벌집을 혼자서 파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수십명의 나한상…(책 29쪽)
:당시 삼불암의 규모를 입증하여 과연 수 십 명의 나한상이 있었는지 증명해야 합니다.
⑵대단한 힘자랑(책 32쪽)
▷마당에 쌓아놓은 볏가마를 하인들이 두 명씩 짝을 지어 들어 옮겼다.… 하인들을 창고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는 무거운 볏가마를 한 개씩 들어서 창고 안쪽으로 집어 던졌다.… 하인들 둘이서 간신히 드는 볏가마였다.… 좌진은 마당에서 볏가마를 집어 던지고, 하인들은 창고 안에서 받아 쌓기만 했다.…(책 33쪽)
:김좌진은 동화나라 사람이 아닙니다. 갈산면에서 태어난 실존인물입니다.
▷목수들이 커다란 못을 망치로 힘들게 땅땅 때려서 나무에 박았다.… 좌진은 목수에게서 못과 망치를 빼앗았다. 못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망치는 옆으로 집어 던졌다.… 끄응! 좌진이 못을 나무에 대고 엄지손가락으로 힘껏 밀었다. 커다란 쇠못이 미끄러지듯이 나무 몸통으로 깊숙하게 밀려 들어갔다.(책 34쪽)
:김좌진은 7살에 무협지에 나오는 무술이나 장풍을 연마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무협영화에도 최소한 10년 이상 연마하는 것으로 합니다.
▷좌진은 이처럼 무거운 들돌을 번쩍 들어 머리 뒤로 내던졌다.(책 34쪽)
:김좌진은 7살에 차력술을 연마하지 않았습니다.
▷집 앞 와룡천 백사장에서 친구들과 줄다리기를 했다.… 열 명도 넘는 친구들과 마주섰다.…(책 34쪽) 열 명이 넘는 친구들이 우르르 쏠려왔다.…(책 35쪽)
:인터넷, 핸드폰으로 온갖 정보를 접하는 어린이들에게 교육적 폐해가 우려됩니다.
▷단단한 놋쇠 그릇을 손가락으로 종이쪽처럼 쭈글쭈글 구부려 놓지 않나, 방안에서 엉덩이를 씰룩씰룩 방구들을 무너뜨리지 않나… 마당에 한가하게 누워있는 황소를 번쩍 들었다 놓지 않나… (책 35쪽)
:김좌진은 중국 드라마 의천도룡기의 주인공 장무기가 아닙니다. 이 같은 어른들의 허구적 묘사는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이렇게 김좌진은 동화나라 사람으로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⑶산신령의 가르침(책 36쪽)
▷좌진의 주먹이 땅바닥 속으로 쑤욱 들어갔다.…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며 시멘트처럼 단단한 땅바닥이었다.… 상주의 주먹이 땅에 닿았다. 팔뚝 전체가 땅속을 깊숙하게 파고 들어간 것이다. 상주가 팔을 빼낸 땅속이 어두컴컴해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다.…(책 44쪽)
:삼불산 산신령은 가능하겠으나 좌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2. 열세살 새신랑과 신랑달기(책 66쪽)
▷좌진은 외양간 안으로 들어가더니 황소의 네 다리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황소가 깜짝 놀라서 버둥거리며 공중으로 떠올랐다.…좌진은 황소를 번쩍 들고 안마당을 한바퀴 비잉 돌았다. 그리고는 다시 외양간으로 가서 점잖게 내려놓았다. (책 72쪽)
:13세에 장가가서 신부집에 간 김좌진은 힘센 산적 두목도 아니었고, 중국 중원을 배경으로 한 무협지에 나오는 무인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허구적 묘사는 2020년 10월 18일과 25일 “MBC-TV ‘선을 넘는 녀석들’”에 출연한 송일국과 설민석, 전현무, 김종민, 유병재로 이어져 마치 송일국이 김좌진의 혈족인 양 “장군의 유전설, 장군의 키를 닮아 제(송일국) 키가 185cm, 장군의 피가 흐르는 일국, 홍성이 낳은 손자”라는 근거 없는 엉터리 방송이 전파를 타는 중대한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복하기에는 너무 난해한 《국민기만》 문제입니다.
3. 한밤중의 귀중한 여인(책 116쪽)
이 단락은 홍성군이 발행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에서 답습한 듯합니다. 의도적인 듯 저자가 김좌진이 김계월 집으로 뛰어들었다는 날짜를 빠뜨림으로서 논란을 피해가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김좌진과 김계월이 만났다는 날은 1917년 9월10일이라는 설이 압도적입니다. 물론 당시 한성의 13세 어린 여자아이 김계월이 충청도 사투리 “능정게”라는 말을 할 정도로 소설적입니다. 하지만 김좌진은 이미 대한광복회 길림지부 부사령으로 발령받아 1917년 8월에 대한광복회의 한성 거점지인 어재하의 집에서 사령관 박상진,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 그리고 김재풍과 함께 송별회를 갖고 만주로 향했습니다. 그러므로 9월10일에는 서울에 없었으며, 더구나 김계월 집에서 3개월 처가살이니, 한 달이니 하는 설은 근거 없는 허무맹랑한 조작입니다. 미래세대에 이런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역사를 물려줘서는 안된다는 관점입니다. 13세 어린이를 여인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좌진이 몸을 피한 곳은 혼자 사는 여인 김계월의 집이었다. 김계월이 외출에서 돌아와 막 대문을 닫고 막 현관에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책 118쪽) 김계월의 집에 몸을 숨기고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책 122쪽) 둘은 어느새 깊은 정이 들었다.…(책 122쪽)
: 홍성군 출신 전직 공무원과 작가들도 김좌진과 김계월의 조우 순간을 말하면서 어느 이는 “화장품 냄새와 여자냄새가 코를 찌르는 방”이라고 하고, 어느 이는 “현관에 들어가는 순간”이라고 하는군요. 김좌진과 김계월의 조우설은 근거 없는 풍설임을 반증하는 대목입니다. 김두한이 1918년 5월생이라는 것이므로 13세 여아가 팔삭둥이를 출산했다는 것도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정헌의 책 127쪽에는 1917년 8월에 만주지역 부사령으로 떠났다고 해놓았고(책 127쪽), 전옥진의 책에는 김계월을 9월10일에 만났다면 이건 유령과의 밤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유령이 아이를 낳는 사례는 홍성군에서만 존재하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4. 청산리대첩의 시작, 백운평전투
▷자기편끼리 쏜 총에 맞아 쓰러진 일본군의 시체가 백운평 골짜기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책 173쪽)
▶배경해석
백운평전투에서 일본군끼리 맞불질은 없었습니다. 야스가와 1개 중대가 먼저 백운평에 들어갔고, 나카무라 1개 중대가 뒤따라 들어갔습니다. 일본 정규군 2개 중대라면 총 병력수가 400~600명을 넘지 않습니다. 후에 상해임시정부는 독립신문을 통하여 일본군 전사자가 1,254명이라 발표했고, 해방 후 귀국한 이범석은 3,300명이라 했습니다만 백운평 전투에서 일본군을 모조리 사살했다 해도 1.254~3,300명은 아니라는 것이 중국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박창욱 교수의 연구 결론입니다. 이 같은 과대평가는 또 다시 김좌진과 청산리 백운평 전쟁사를 끊임없이 왜곡하는 도미노현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5. 책 “주먹대장에서 독립군 영웅으로 백야 김좌진” 121~122쪽에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좌진은 당분간 김계월의 집에서 숨어지냈다. 다행이도 김계월은 우리 민족의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여장부였다. “당분간 이곳에 숨어 계세요. 제가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독립투쟁에 나선 분을 도울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긴급한 연락이 필요하면 저에게 맡겨주세요.” 김계월은 좌진을 안심시켰다. (중략) 어느새 김계월은 좌진의 늠름한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 듯했다. 얼굴이 붉게 물들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많은 남자들을 보았지만 이렇게 마음이 떨리는 것도 처음인 것 같았다. 좌진의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아리따운 여인과 마주 앉으니 경찰에 쫓기고 있다는 생각도 잊을 정도였다. 김계월의 역할은 광복회원이나 다름없었다. 좌진의 긴급한 연락사항을 한치 오차도 없이 외부로 전달해 주었다. 좌진이 김계월 집에 몸을 숨기고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호출 명령이 떨어졌다. “좌진 동생! 지금 빨리 남대문 남문여관으로 오게! 박상진.” 좌진은 김계월이 전해주는 쪽지를 받아들었다. 뭔지 모르게 다급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김계월을 통해서 서신으로 주고 받았지만 이번에는 직접 만나자는 얘기가 아닌가. (중략) “동생은 지금 당장 만주로 떠나야겠네.” (중략) 같은책 127쪽. 좌진이 만주지역 부사령으로 책임을 맡아 떠나던 때가 1917년 8월이었다.》
▶배경해석
저자 김정헌의 책에 기술한 김좌진과 김계월의 동거설이며 만주파견설이다. 저자 김정헌의 기술에 의하면 김좌진은 1917년 8월 만주로 떠나기 전에 한 달 이상 김계월이라는 아리따운 여인과 동거한 것으로 된다. 김두한의 생년월일에 짜깁기한 느낌이 든다. 전옥진은 9월 10일 밤에 최부잣집을 야습한 뒤 경찰에 쫓겨 뛰어든 집에는 여인이 화장품 냄새를 풍기는 방에서 잠을 자고 있다고 하고, 김정헌은 좌진이 뛰어든 집이 혼자 사는 여자의 집이었는데 외출에서 돌아와 대문을 닫고 막 현관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라고 했다. 그 심야 아니면 새벽에 말이다. 전옥진에 의하면 김좌진과 김계월이 처음 만난 날은 9월 10일이고, 김정헌에 의하면 김좌진이 만주로 파견된 8월 이전에 한 달 이상 동거한 것으로 된다. 도대체 김좌진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란 말인가! 김좌진의 고향 홍성에서도 이런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일이 소위 학자들이란 사람들의 고귀한 노력으로 펼쳐졌다. 이를 홍성군과 충청남도가 지원했다.
6. 김계월은 누구인가?
①홍성군이 발간한 책과 저자 김정헌의 책으로 보면 김좌진이 김계월을 만나 잉태하여 1918년 5월15일생으로 된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셈인데, 8월에 만주로 떠난 김좌진이 9월에 김계월을 만나 한 달 또는 3개월을 동거했다는 설(說)은 누가 분석해도 앞뒤가 안 맞는 일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또한 1917년 당시 김계월은 13살이었다. 김두한의 생모라면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사람중에 한사람일텐데 책에는 생몰 조차도 없다. 김두한도 자서전에서 김계월을 피해가려 했는지 “상궁의 딸” “김참판”이라고 운운했다.
②김계월은 조선일보 1930년 3월17일자 보도에 따르면 1930년 당시 26살이었으므로 1905년생이 된다. 김좌진과 조우했다는 1917년에는 13살이다. 13살에 임신 가능성도 재고해야 할 문제이다.
7. 과연 김계월이 김좌진의 씨로 잉태했을까?
김계월은 김좌진의 정자로 잉태될 수 없었다. 만주에서 서울은 하룻밤에 다녀갈 거리도 아니다. 또 김좌진이 그런 성품도 아니며, 그럴 겨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광복회가 일제 경찰이 쫙 깔린 종로 바닥에서 군자금을 강모하라고 김좌진에게 명령할 정도로 그렇게 어수룩한 조직이 아니었다. 1917년 9월 10일 첫날부터 임신이 성사됐다 해도 김두한이 1918년 5월15일생이라는 것이므로 팔삭둥이가 된다. 13세 여아가 8개월만에 정상출산이란 상상하기 어렵다. 저자 김정헌은 김좌진이 8월에 만주로 파견되었다고 하였으므로 김좌진이 만주로 가기 전에 김계월과 만났다는 얘긴데 이건 더더욱 아니다.
8. 김좌진 장군과 오숙근 여사의 유택 합장설의 문제
책 229쪽에 “좌진의 장례는 교포들의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해림시 외곽에 묘를 썼다. 10년 후인 1940년 9월에 오숙근 여사가 비밀리에 중국으로 들어갔다. 오숙근 여사는 방물장사로 가장하여 좌진의 유해를 국내로 모셔왔다.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묘를 썼다. 이후 1945년에 조국 광복을 맞이했다. 1958년에는 부인 오숙근 여사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좌진과 부인 오숙근 여사를 현 위치로 합장하여 모셨다. 현재 산소 위치는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묘역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 오숙근 여사의 큰아들 창렬은 1947년 만주땅에서 김좌진의 반대급부인 친일주구들의 모함과 음해에 걸려 중국 토지개혁 야외심판대에서 몽둥이와 농기구로 맞아 죽었습니다. 이 처참한 광경을 지켜본 어머니는 몸져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두 달 뒤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 사실은 《중국공산당 보청현 만금산남향총지위원회》와 《중국공산당 취란삼림공업엽위원회 조직부》의 당안에 기록돼 있습니다.
홍성군에서 발간한 책 “대한독립군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전기” 463쪽에는 “시어머니와 둘째 딸을 데리고 서울 필동에서 은거하면서 장군의 혈육인 김두한을 찾아 이재희(李載熙)와 결혼시켜 동거하면서 살다가 1934년에 방물장사를 가장하여 장군의 유해를 북만에서 보따리에 모시고 왜경의 눈을 피하여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했다가 1958년 1월 15일 오숙근 여사도 노환으로 사망함으로써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 51번지에, 장군의 유해는 홍성에서 이장하여 오여사의 장례와 같은 날 합장했다.”라 기록한바 여기서 “시어머니와 둘째 딸을 데리고 서울 필동에서 은거하면서 장군의 혈육인 김두한을 찾아 이재희(李載熙)와 결혼시켜 동거하면서 살다가 1934년에…”라 하였으므로 1934년이면 김두한 나이 16세입니다. 김두한이 16세에 결혼했단 말일까요?
또한 책 “주먹대장에서 독립군 영웅으로 백야 김좌진”에는 “10년 후인 1940년 9월에 오숙근 여사가 비밀리에 중국으로 들어갔다. 오숙근 여사는 방물장사로 가장하여 좌진의 유해를 국내로 모셔왔다.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묘를 썼다.”고 했습니다. 김좌진의 고향 홍성군에서도 어느 이는 1934년, 어느 이는 1940년이라 썼습니다. 오숙근 여사는 1947년 사망에 이르기까지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오숙근 여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고 1934년생인 손자 명환이 있었기에, 두 아들과 어린 손자를 만주에 두고, 당신의 몸으로 낳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하는 두한을 찾아 동거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1940년에 비밀리에 중국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근거자료를 통한 고찰과 증명이 필요합니다.
9. 독자 여러분께 또 하나의 해괴한 사건을 참고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책 “위대한 한국인 백야 김좌진, 저자 윤병석(인하대 교수)” 338~339쪽을 인용하여 살펴보면 김좌진의 가족사를 조작했음이 여실히 나타납니다. 윤병석은 책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16년만의 해후
《북만주의 망명지 김좌진의 집에는 때 아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돼지를 잡고 떡을 쪘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김좌진이 집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아무리 영문을 물어보아도 막무가내로 시종 하나같이 묵묵부답이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도착했다. 행상대원들이 말달구지를 옹위하여 김좌진의 집 앞에 밀려들었다. 그 말달구지에는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그의 노모, 아내 김계월 여사 그리고 낯선 소녀 하나가 타고 있었다. 뜻하지 않은 감격적인 가족 상봉은 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려 16년만의 극적인 상봉이었다. 16세의 처녀티가 나는 용남은 바로 16년 전 황망히 고향을 등지고 떠날 때 엄마의 뱃속에서 고고의 성을 지를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들의 딸이었던 것이다.》
▶배경 해석
*용남이가 고고의 성을 지른 엄마의 뱃속은 누구의 뱃속이란 말인가? 김계월이 함께 간 것으로 돼 있으므로 16살 용남이는 김계월이 낳은 딸이라는 말일 것이다. “엄마의 뱃속에서 고고의 성을 지를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그들의 딸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들의”는 김좌진과 김계월을 지칭한다. 정말로 김계월의 뱃속이라면 김두한과 쌍둥이여야 한다. 김두한이 여자와 이란성 쌍둥이라는 사실은 기록이나 구전으로도 전해진 적이 없습니다.
*또한 김계월이 김두한을 낳았다는 것이므로 첫 출산은 김두한의 생년월일이 1918년 5월 15일이므로, 16년만의 해후는 1934년 즉 김좌진 장군이 서거한 지 4년 뒤가 됩니다. 유령이 아니라면 이런 해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인하대학교 윤병석 교수의 자질이 의심되네요.
*김계월이 갔다면 김두한이 왜 빠졌을까?
“1917년 10월말 서울 계동에서 그 어린 것 김계월을 데리고 단장斷腸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홍성군 발행 책 225~227쪽. (중략) 계월이 붓을 놓고 다가왔다. “지금 몇 달 되었지?” 김좌진이 불어 오른 계월의 배를 가리켰다. “두 달 되었어요.” 이어서 김좌진은 “아들을 낳으면 두한이라 하고 딸을 낳으면 옥한이라 부르게 하라”고 했다.” 용남은 누구이고 옥한은 또 누구인가?
윤병석 교수님! 이렇게 아들을 낳으면 두한이라 하라고 이름까지 지어놓고 떠났는데, 김계월은 그 소중한 아들은 왜 데리고 가지 않았을까요?
요청 사항
1. 책 “주먹대장에서 독립군 영웅으로 백야 김좌진”의 내용을 수정하기 위한 《김좌진장군학술연토회》를 저자와 발행인이 요청인과 관련자를 포함하여 공개적으로 개최할 것을 요청합니다.
2. 책 “주먹대장에서 독립군 영웅으로 백야 김좌진”을 수정•교정해야 합니다. 수정이 불가능할 때는 시중 또는 각 학교에 배포를 금지할 것을 요청합니다. 책의 표지에 쓰여있는 대로 “자녀에게 선물 로 주고 싶은 책”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3. 위 1항이 시행되지 아니하면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주)에서 김좌진장군역사•가족사연토회를 시행하고 출판할 것인바 이 행사의 제반 경비를 해당 관련자(기관)이 지출할 것을 요구합니다.
결 론
김좌진 장군의 역사와 가족사가 왜곡과 조작으로 얼룩짐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으므로 이를 바르게 고쳐야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은 가해자의 편이다. 다시 말하면 일제침략사와 만주항일무장독립군 전쟁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아니한 폐단이 감염된 일제잔재중증환자 형세이다. 김좌진 장군의 역사 왜곡과 조작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여 2020년을 기점으로 이처럼 조작•왜곡된 역사를 미래세대에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관점이며, 조작•왜곡된 역사로 국민이 기만당한다면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우매한 민족이 될 것이다. 따라서 조국통일의 길을 가로막는 요원지화(爎原之火)라 할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역사를 왜곡하거나 미래세대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데 적용하라는 규정이 아닐 것이므로, 본 김좌진장군역사정립회(주)는 왜곡된 역사를 답습한다거나 역사정의를 상실한 붓을 배제한다. -끝
[2021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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