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껏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면 늦깍기 인생이였다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내가 전공하고 있는 조선해양공학도 소위 말하는 첨단분야가 아니어서 사회적으로 각광받지 못하다 요즘엔 워낙 경제가 좋지 않으니까 수출 잘하는 효자산업이라고 부추킨다. 게다가 연구비를 신청해도 첫 해에 되는 법이 없다. 이름하여 "세컨드 맨"이다.
며칠 전 우리의 영원한 총무 박완배한테서 40주년문집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제야 펜을 잡았다. 흔히들 여자가 싫어하는 것이 남자가 군대가서 축구한 이야기라 하는데, 엔지니어는 대부분 연설하기 싫어하고 더군다나 글쓰기는 죽기보다싫어한다. 가끔씩 김국호 같은 예외도 있지만...
어쨌든 나는 엔지니어라 글쓰기를 싫어할 뿐 아니라 두렵기까지 한다. 게다가 인생역정을 쓰라하니 내용도 문제지만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찌 도대체 종잡을 수 없다. 그렇다고 마냥 붙들고 있을 수도 없어 고민끝에 시점을 1972년으로 잡기로 했다. 몇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해에 장가들어 지금의 마누라를 만나 지금껏 살아오고 있으며, 특히 앞으로 내 노후를 의탁해야할 처지이기 때문이다.
내 늦깍이 인생에서 결혼만큼은 남보다 빨리 치렀다. 그러나 장가간 다음 열흘 만에 예쁜 색시 홀로 두고 이역만리 독일로 떠났으니 그 때의 안타까운 마음은 지금도 기억이 새롭다. 독일어 연수받던 남독의 싱그러운 풍광도 사진속의 그림이요, 이제는 고인이 된 이진형과 함께 쏘다니던 뮨헨올림픽 경기장도 그냥 TV속에 스쳐가는 한 장면에 불과했으니. 다행히 그 해 첫 눈이 함브르크의 스산한 거리풍경을 하얗게 감쌀 때 집사람은 내게로 날라왔다.
그 다음부터는 기다림도 사라지고 집과 연구소를 개미 쳇바퀴 돌 듯 학업과 연구에 매달리는 일상 속에 시간이 흘러갔다. 함브르크에서 첫 놈(사진의 왼쪽)을 낳았는데, 둘 다 처음 애를 키워보는 터라 무조건 육아책에 써있는 대로 따라했다.
예를 들어 젖먹이기 전에 애를 저울에 달아 몸무게를 살펴보고 한참 먹인 다음엔 다시 저울에 달아 의사가 추천한 125그람을 먹었는지 확인하다 만약 10그람이 모자라면 우는 애에게 다시 억지로라도 정량을 채워야 잘하는 부모로 생각했었다.
그래서인지 첫 놈은 지금도 좀 까다로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 얼마 전엔 사귀던 아가씨가 소리내며 밥을 먹는다 하여 헤어졌단다. 아무리 지 엄마가 장가보내려 방을 빼라 위협해도 꼼짝도 않는다.
둘째 놈은 우리가 독일생활에도 익숙해지고 경제적으로도 좀 여유가 있을 때 세상 빛을 보아서인지 행동이 여유롭다. 게다가 냉정한 프로이센의 고장인 북독일이 아닌, 술마시기 좋아하는 합스브르크가의 뮨헨에서 태어나서인지 첫 놈과는 달리 술도 잘 마시고 떠들기도 잘한다. 그러나 이 녀석 역시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직 장가를 가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두 녀석 모두 나의 재빠른 연애솜씨는 닮지 못했나 보다.
마누라는 지금도 자신이 처녀때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나에게 각인시키느라 끝없이 시도한다.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의 내 눈엔 사내 3명 사이에서 남성화된 내 인생의 반려자란 느낌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시어머니 끝까지 잘 모셨고, 가끔씩 투덜대지만 그래도 우리 사내 셋을 뒷바라지 잘 해준 집사람이 더없이 고맙다.
덧붙여 한가지 더 좋은 것은 아들만 낳고 늙어가니까, 집사람이 이젠 더 이상 여자편만 들지 않고 남자편,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시어머니 입장에서 요즘 젊은 여자들의 괴이(?)한 행실을 질타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남성적 집안 분위기를 녹녹하게 만들어 준 우리 강아지 딸 이야기를 잠시 꺼내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비록 아들은 S대에 한명도 보내지 못했지만 우리 멍멍이는 워낙 눈치 빠르고 똑똑해 강아지 대학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S대에 합격했을 거라는 우리 마누라 주장에 이 강아지를 아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정도였으니까.
그토록 사랑받던 멍멍이가 지난 여름 수명을 다했을 때 온 식구가 눈이 빨개지도록 슬퍼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하얀 털 뭉치 같은 그 강아지가 똥그란 눈동자로 쳐다보며 달려 나올 것 같은 착각이 드는데, 그 강아지가 없어진 다음 달라진 상황이 하나 있다. 즉, 연휴가 되어도 강아지 때문에 며칠씩 걸리는 여행은 시도하지 못했는데, 지난 설에는 정말 오랜만에 온 식구가 장가계를 다녀왔다. 함께하여 좋았고, 압도하는 풍경이 좋았고, 설맞이 불꽃놀이가 좋았는데, 아래의 사진은 장가계 입구에서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2005년도 댓글
1. 추호경
형수님도 훌륭하시지만 아들들이 멋있구만요. 우리 딸도 예쁜데...
2. 최항순
느닷없이 나타난 이상명이 이 글에 붙인 사진을 보며 대학시절 내 밀애설(?)을 언급하길래 백여일만에 들어왔더니 반가운 댓글이 보여 남긴다. 추 영감, 사진에 보인 녀석중 소위 말하는 필이 꽂이는 녀석이 누구인지 응답하라. -항순-
3. 추호경
딸 가진 애비 맘은 아들만 있는 사람은 모를겨. 솔직히 나는 둘 다 맘에 드는데... 최 교수 닮았으면(몸과 마음) 무조건 OK! 그런데 우리 아이 나이가 스물다섯밖에 안된 것이 참고가 될 걸세. 우리 가족 사진은 문집 원고 8번에 완배가 올려 놓았네 그려.
댓글은 아래 댓글난에 부탁합니다
첫댓글 죄 교수,
지금 와서 2005년도 댓글을 읽어보니 그야말로 금석지감이네.
우리 딸은 지금 형수님과 같은 신세가 되어 세 남자를 잘 뒷바라지하고 있는데 아주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네.
봄 되면 여기 양평 寓居에 형수님 모시고 와 옛얘기나 나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