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세가지 보물=부처님
부처님은 그 장소에서 미소를 띄우시며 휴식을 즐기시면서 2주간을 머무셨습니다.
매일 젖 짜는 여인이 우유와 밥을 가져오고 들소 치는 소년이 그를 만나러 왔습니다. 부처님은 그들에게 지혜와 사랑과 깨달음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팔리어 경전에는 『방우경』이라고 부르는 경전이 있습니다. 그 경전은 들소 치는 사람들이 알아야 될 열한 가지 기능에 대하여 열거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자기 들소를 알아보는 것, 모기를 쫓기 위하여 연기를 피우는 법, 들소가 물을 건너도록 돕는 것, 마실 물과 먹을 풀이 넉넉한 곳을 찾는 것, 들소의 몸에 있는 상처를 보살피는 것 등입니다.
그러한 열한 가지의 기능을 열거하신 뒤에 승려들의 명상도 이와 같다고 하시면서 그것에 비교되는 열한 가지 기능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예를 들어 인간의 다섯 가지 성분을 알아내는 것 등입니다.
부처님의 일생에 관한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곁에 머무시면서 젖 짜는 여인과 들소 치는 소년을 만나서 천천히 거닐면서 그들과 함께 즐겼던 그것을 도외시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일들이 이렇게 해서 일어났다고 확신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부처님께서 어떻게 『방우경』에 대해서 말씀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실제로 그 들소 치는 소년은 성장한 후에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부처님께서 그 경전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적에 대중의 앞자리에 앉아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2주일 후 부처님은 보리수 아래 그의 자리에서 일어나 지혜와 자비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어야 함을 자각하셨습니다. 그는 젓 짜는 여인과 들소치는 소년에게 “섭섭하지만 나는 이제 떠나야만 됩니다. 그간 우리는 서로 행복하게 지냈으나, 이제 나는 다른 이들을 가르치러 떠나야만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를 누구와 나눌까 생각하다가 그와 함께 수행했던 다섯 친구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들을 찾기 위해서 하루 종일을 걸었습니다. 부처님은 그들이 있는 곳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방금 오후의 좌선을 끝마친 뒤였습니다. 그들은 좌선을 많이 했습니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듯이 그들은 바짝 말랐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그가 오더라도 일어나지 맙시다. 그를 환영하기 위해서 문밖으로 나가지 맙시다. 그의 손발을 씻을 물을 길으러 가지 맙시다. 그는 참을성이 없어 밥을 먹고 우유를 마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 그의 모습은 너무나 보기가 좋고 평화스러웠으므로 그들은 그들 스스로 일어나서 그가 손발을 씻을 물을 길어 오고, 그리고 제일 좋은 자리에 모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친구들이여, 나는 지혜와 사랑에 이르는 길을 찾았습니다.
모두 여기에 앉으십시오. 내가 그 길을 당신들에게 가르쳐 드리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처음엔 믿지 않았습니다. “싯달타여, 우리가 함께 수행하는 동안 당신은 밥을 먹고 우유를 마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완벽하게 깨달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믿을 수 없으니 얘기를 해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친구들이여, 내가 거짓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실제로 그는 누구에게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으며, 다섯 친구들은 그것을 기억해냈습니다.
“나는 결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으며, 지금도 당신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완전히 깨달았기 때문에 당신들의 스승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앉아서 내 말을 들으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그 다섯 친구들이 앉아서 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어른을 위한 첫 번째의 설법을 하셨습니다. 당신이 그의 말씀을 읽고 싶으면 불교의 기본 교리인 고통, 고통의 원인, 고통의 제거,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것을 설명하는 훌륭한 경전들이 있습니다.
나는 부처님의 일생에 관한 많은 전기(傳記)들을 읽었는데, 나는 그를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생각합니다. 때때로 화가들은 부처님을 인간으로 알아보기 힘들게 그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인간입니다. 나는 수많은 불상을 보았는데 아름다우면서도 단순한 불상은 별로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부처님을 그리고 싶으면 앉아서 5분이나 10분간 웃으면서 숨을 쉰 다음 펜을 들어 부처님을 그리십시오. 그런 다음 아주 단순한 부처님, 미소를 띄우신 아름다우면서도 단순한 부처님을 그리십시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부처님과 함께 앉아있는 어린이들도 그리십시오. 그 부처님은 젊으시고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계시며, 그렇게 엄격하시거나 심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방향으로 가야만 하며, 그 까닭은 우리가 부처님을 바라볼 때 들소치는 소년이나 젖 짜는 여인처럼 부처님을 좋아하게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는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부처님께서 나에게 귀의합니다’라는 것을 자각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없이는 부처님도 완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깨달음과 지혜와 사랑이 개념이 아닌 실제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 부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합니다. 부처님은 우리의 삶에 진정한 영향을 끼치는 스승이 되어야만 합니다.
내가 ‘나는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고 할 적에 나는 ‘부처님께서 나에게 귀의합니다’라는 것을 듣습니다. 나무나 다른 여러 가지 식물을 심는 일에 관한 노래가 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을 땅에 맡기고 땅은 그 자신을 나에게 맡깁니다. 나는 내 자신을 부처님께 맡기고 부처님은 그 자신을 나에게 맡깁니다.
‘나는 내 자신을 땅에 맡깁니다’는 ‘나는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는 것과 같습니다.(내 자신을 식물로 간주합니다) 식물은 땅으로 인해 살거나 죽습니다. 식물은 땅에, 그 흙에 귀의를 합니다. 그러나 땅은 그 자체를 초목에게 내맡기니 나뭇잎들이 떨어져서 썩으면 땅이 더욱 비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름진 좋은 흙이 식물에 의해서 만들어짐을 압니다. 우리의 지구가 푸르고 아름다운 이유는 초목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초목이 땅을 필요로 하는 동안 땅 또한 그 자체를 아름다운 위성으로 만들기 위하여 초목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는 내 자신을 땅에 맡깁니다’라고 말할 때 이 나, 즉 식물은 ‘땅이 그 자신을 나에게 맡깁니다’라는 구절을 들어야만 합니다. “나는 내 자신을 부처님께 맡기며, 부처님은 그 자신을 나에게 맡깁니다.”
그러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지혜와 이해 그리고 사랑이 이생을 다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함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우 중요한 과제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즉 깨달음을 실현하고 자비를 실천하며 지혜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처님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우리를 통해서만 지혜와 사랑은 구체화 되고 효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틱탄반은 많은 사람들을 도우려는 노력 속에서 죽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훌륭한 불교도였으며, 또한 훌륭한 부처님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깨달음과 지혜와 사랑이 실제적인 것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 즉 범어로 붓다카야라고 부릅니다. 불교가 실천되기 위해서는 깨달음과 행동이 구체화 된 불신이 있어야만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불교는 단지 말에 불과합니다. 틱탄반은 하나의 불신이었습니다.
석가모니도 하나의 불신이었습니다. 우리가 깨닫게 되는 때 우리가 바로 지혜와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 각자는 불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