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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돈으로 살수 없는 것들’, ‘공정하다는 착각’(마이클 센델 저) 중 2권을 통해 20대에 필요한 정의로움에 관하여 논하시오
샨티학교 청년 과정(호스피티움) 문예준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의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정의가 무엇이 있을까?’ 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 우리가 먼저 정해야 하는 것은 사회의 범위다. 사회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 목적에 정의가 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 집단’이라는 뜻으로 군대, 학교, 회사 등이 이에 대한 예이다. 이 외에도 소규모, 대규모로 이루어진 집단 또한 하나의 사회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범위가 잡혔으니‘필요한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해야한다. 여기서 정의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를 뜻하는데,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동의하고 암묵적으로 따라야 하는 정의를 구해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정의를 구하고 어떤 정의를 따르고 싶은가?
아무래도 사회 구성원 모두가 따라야 하니 혼자서 정할 수는 없다. 따라 의사소통(논쟁)을 통해 정의를 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최대한 이익이 돌아가는 쪽으로, 어떤 사람은 약자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쪽으로, 어떤 사람은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에 맞춰 정의를 구하는 쪽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기 위해 사회를 구축하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 몇 가지 정의관를 정리하고 내가 생각하기에 어떤 정의가 사회에 필요한 정의관인지 이야기해 보겠다.
공리주의
공리주의부터 알아보자, 공리주의를 창안한 학자는 ‘제레미 벤담’으로, 당시 영국의 법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일반인이 이해하기까지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벤담은 작게는 일상생활에서의 도덕적 행동부터 크게는 법의 기준까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도록 설계하여 공리주의를 창안해 내었다.
공리주의의 ‘공리’라는 단어는 ‘이익에 힘쓴다’라는 뜻이다. 즉, ‘어떤 행동이 우리에게 혹은 사회에게 얼마나 더 많은 이익을 주는가?, 결과적으로 어떤 행동이 우리, 사회에게 더 많은 행복을 줄 수 있는가?’라는 공식을 가지고 사회에 이익을 가져다 주면 좋은 행동, 이에 반대되면 나쁜 행동을 가르는 것이 공리주의의 기본이다. 행복은 고통이 없고 쾌락을 느끼는 상태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공리주의자에게 쾌락은 선, 고통은 악으로 계산된다. 벤담은 앞에서 말한 공식을 기반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의 행복을 최대로 만드는 것’이 사회가 이끌어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예시를 들어보겠다. 100명이 살아가고 있는 사회에서 부유층에게 세금을 걷어 복지제도를 시행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100명 중 10명의 부자에게 세금을 걷어 각각의 10의 고통이 생겨났다. 그럼, 사회 전체적으로 100의 고통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90명의 가난한 이들에게 복지제도를 통해 각각 5의 행복을 만들어 낸다면? 450의 행복이 생겨난 것이다. 따라 -100+450의 값은 350이고,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부자의 세금을 걷어 복지제도를 시행한 결과 350의 행복을 가져다준 것이다.
따라 공리가 증가하고 350만큼 사회가 이득을 본 것이다. 이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의 기본 공식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공리의 원리, 혹은 유용성의 원리이고 이 원리에 따른 행동이 곧 도덕적이라는 것이다.
앞에 이야기한 것을 정리해 보자, 어떤 상황에서도 결과적으로 또는 효율적으로 고통을 최소화하고 쾌락을 최대화하여 공리를 증진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공리주의의 핵심 행동 원리이다. 이런 공리의 원리를 개인적 삶에서의 선택 상황에서도 적용할 수 있지만, 벤담은 앞서 이야기했듯 법을 만드는 과정까지 이런 공리의 원리를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사회 속 모든 사람들의 전체적인 행복을 양적으로 증진시킬 목적으로 말이다.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벤담은 세상에 다양한 쾌락이 있으나, 그들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없으며 양적인 차이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질의 차이보다 양의 차이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바라본다면, 크기를 재고 계산하는 단순한 문제가 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크기, 혹은 양의 계산은 어떻게 하는가?’라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에 벤담은 각 행위가 제공하는 쾌락의 크기를 계산하는 일곱 가지의 기준을 제시했다.
첫 번째, 얼마나 강한 쾌락인가? (강도)
두 번째, 얼마나 쾌락이 지속되는가? (지속성)
세 번째, 쾌락이 발생할 가능성이 확실한가? (확실성)
네 번째, 얼마나 빨리 쾌락을 느끼는가? (근접성)
다섯 번째, 추가적인 쾌락을 많이 발생시킬 수 있는가? (생산성)
여섯 번째, 이 쾌락이 반대로 고통을 발생시키는가? (순수성)
일곱번째,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영향을 받는 쾌락인가? (범위성)
일곱 가지 기준을 통해 끊임없이 쾌락과 고통의 양을 계산해 공리를 증진해야 한다고 벤담은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벤담이 사망하고 벤담의 공리주의를 이어받은 제자,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시각의 공리주의를 알렸다. 스튜어트 밀은 벤담과 다르게 다양한 쾌락 중에 질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스튜어트 밀은 양적으로 동일하더라도 정신적 쾌락이 육체적, 감각적 쾌락에 비해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두 가지 쾌락에 대해 똑같이 잘 알고 그 둘을 똑같이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더 높은 능력이 동원되어야 하는 특정 삶의 방식을 더 선호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짐승이 누리는 쾌락을 즐기게 해 준다고 해서 하급 동물이 되겠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것이 낫다.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다.”
(존 스튜어트 밀)
스튜어트 밀이 말한 내용을 보면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잘 알 수 있다.
벤담의 공리주의가 ‘양적 공리주의’이고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는 ‘질적 공리주의’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는 일반적인 행위부터 법까지 하나하나에 공리주의의 원칙을 적용해 도덕적 가치를 판단해야 한다는 ‘행위 공리주의’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 ‘규칙 공리주의’가 등장하면서 행위 공리주의의 한계를 이야기하며 새로운 시각의 공리주의가 또 등장한다.
규칙 공리주의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규칙 공리주의자가 말한 행위 공리주의의 한계에 관해서 이야기해보겠다.
한계점 첫 번째, ‘도덕적 상식에 어긋나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예를 들어 A와 A의 친구들이 바다에서 조난 당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때 A의 친구 B를 죽여서 B를 먹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한다. 이때 행위 공리주의를 적용한다면, B를 죽여 먹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B의 죽음으로 A와 그의 친구들은 목숨을 건졌으니, 결과적으로 유용성이 증진되는 것이다. 따라 B를 죽여 먹는 것이 도덕적인 행동으로 변질된다.
한계점 두 번째, ‘개별 행위의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고, 매번 행위를 할 때마다 쾌락과 고통을 계산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강도, 지속성, 확실성, 근접성, 생산성, 순수성, 범위성 등의 기준에 따라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계산하고 실행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만약 C가 공리주의에 따르는 사람이며 도덕적인 행위를 위해 길거리의 쓰레기를 어디에 버릴지 생각하고 계산한다고 가정해 보자, C는 너무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작 길거리 쓰레기 하나 때문에 C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다.’라는 논리이다.
그래서 규칙 공리주의는 행위 공리주의의 대안으로 행동할 때마다 공리를 계산하는 것이 아닌, 일반적으로 사회적 유용성을 최대화하는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을 따르는 것이 옳은 행동이라고 보기로 한다. 예를 들어, 살인이라는 행위는 보통 공리를 저해하는 경우가 많으니 ‘살인하지 말자!’라는 규칙을 정해놓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 규칙을 따르기로 한다면 일반적으로 사회의 공리가 증진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언뜻보기에 공리주의는 매력적이다. 깊게 생각할 필요 없이 간단한 크기 계산을 하고 이에 맞는 행동을 한다면 그 자체가 도덕적 행동이 되어버리니 머리 아픈 인간관계에 있어 큰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것 자체가 큰 오점이다. 공리주의를 다르게 말하면 ‘결과주의’다. 아무리 틀린 행동이라도 사회적 이익을 보는 사람이 다수라면 소수는 어떤 고통이라도 감내해야 한다. ‘풍족하게 사는 사람이 다수, 희생하는 사람이 소수’라는 계산이 나오면 소수는 무조건 희생해야 하고 이것이 곧 도덕적 행동이 되어버린다.
규칙 공리주의를 잘 활용하여 소수의 희생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공리주의의 핵심 행동 원리가 깨지게 되므로 더 이상 공리주의라고 볼 수 없다.
동기주의
동기주의에 대해서 알아보자, 동기주의의 시초는 ‘이마누엘 칸트’라는 사람에게서 시작된다. 칸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의무론’의 범주에 속해있는데, 이것을 쉽게 말하면 ‘착하게 살자, 그것이 인간의 의무다.’라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칸트에 따르면 윤리적 측면에서 우리 인간은 ‘자연적 경향성’과 ‘실천 이성’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지닌 존재라고 한다.
‘자연적 경향성’은 감정, 식욕, 성욕과 같이 다른 동물들도 지닌 본성을 뜻하고, ‘실천 이성’은 도덕적인 행동을 판단하며 도덕 법칙을 실천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해 주는 이성적인 능력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깡패가 사람을 때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깡패가 사람을 때리고 있어, 하지만 내가 깡패를 말렸다간 나도 맞을 것 같아. 무서워! 도망가자’라는 예시에서‘무섭다’라는 감정에 이끌려 도망간 사람은 ‘자연적 경향성’을 따른 사람이고, ‘깡패가 사람을 때리고 있어. 내가 가서 말려야지!’라는 예시에서 ‘실천 이성’을 통해 자신이 깡패에게 맞는 한이 있더라도 도덕적 의무를 위해 용감하게 나서 깡패를 말리는 것을 뜻한다.
이때 실천 이성에 따라 발생하는 ‘선한 것을 실천하고 싶다’라는 의지를 ‘선의지’ 또 ‘도덕 법칙을 지켜야 한다’라는 의식을 ‘의무 의식’이라고 한다. 칸트는 선의지를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 자체만으로 선한 것”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래서 칸트는 윤리적 행동을 할 때 자연적 경향성이 아닌, 의무 의식이나 선의지를 통한 윤리적 행동만 인정했다. 쉽게 비유하자면, 부자가 아프리카에 기부하였을 때 기부를 한 동기가 ‘사회적 이득이 있어서’, 또는 ‘동정심과 같은 감정이 동기가 돼서 기부한 것’이라면 칸트에 기준에선 이것은 윤리적 가치가 없는 행동이다. 하지만, 기부한 이유가 ‘돈 많은 사람이 돈 없는 사람을 돕는 것’, ‘사람을 돕는 것이 의무니까’라면 칸트의 기준에서 이것은 윤리적 가치가 있는 행동이다.
어떤 행위가 윤리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닌 동기에 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칸트의 사상을 ‘동기주의’라고도 한다. 언뜻 보기에 공리주의와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정 반대되는 사상이다. 벤담의 공리주의는 다수를 위한, 즉, 공리의 증진을 위한 행동이라면 그 행동이 무조건 도덕적 행위로 분류된다. 반면, 동기주의는 실천 이성에 따라 행위의 동기에 중심이 잡힘으로 공리의 증진을 위한 행동이어도 의무 의식을 따랐는지 혹은 선의지를 따랐는지, 동기에 따라 그 행동이 도덕적인지 아닌지를 분류한다. 그래서 원초적으로 공리주의와 칸트의 의무론은 다양한 도덕적 딜레마 상황에서 사사건건 대립할 수밖에 없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선한 것을 실천하고 싶다’라는 의지를 ‘선의지’ 또 ‘도덕 법칙을 지켜야 한다’라는 의식을 ‘의무 의식’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도덕 법칙’은 무엇이냐? 칸트는 ‘이건 도덕 법칙이고 저건 도덕 법칙이 아니야’라는 것보다 어떤 원칙들이 도덕 법칙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조건을 제시했다. 먼저 도덕 법칙은 ‘가언명령’이 아니라 ‘정언명령’이라고 한다. ‘가언명령’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내리는 조건부 명령이다. 예를 들어 ‘살인을 저지르면 감옥에 가니까 살인을 저질러선 안 돼!’와 같이 어떤 목적을 승인하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 보편타당성이 없는 것을 뜻한다.
‘정언명령’은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든 적용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라야만 하는 규칙이다. 예를 들어 ‘살인과 같이 나쁜 행동들은 결과와 상관없이 무조건, 절대로 저지르면 안 돼!’와 같이 행위의 결과에 상관없이 행위 자체가 선이기 때문에 무조건 그 수행이 요구되는 도덕적 명령을 뜻한다. 칸트는 도덕법칙은 반드시 이런 정언명령의 형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이 도덕법칙, 즉 정언명령이 성립되려면 조건이 있어야 한다. 칸트의 표현으로 ‘정식’이라고 하는 이 조건들은 ‘보편화 정식’, ‘인격성 정식’으로 2가지가 있다.
1. 보편화 정식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하라’ 쉽게 말을 풀면 ‘네가 생각한 준칙이 세상에 보편화되었을 때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생각해 봐라’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내가 이득을 취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여도 상관없어’라는 준칙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세상의 도덕법칙이 되었을 때 서로서로 죽이는, 즉, 나쁜 문제들이 일어난다면 정언명령에 성립되지 않는다.
2. 인격성 정식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절대로 수단으로만 대하지 말고 언제나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동하라’ 인간을 그 자체로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서비스직의 사람에게 막말하고 반말하며 본인이 원하는 서비스를 받는 ‘수단’으로만 서비스 직원을 대하면 도덕법칙에 어긋나므로 정언명령에 성립되지 않는다. 서비스 직원도 하나의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서비스 수단으로 이용하되 사람으로 존중을 해달라는 것이다.
동기주의는 평화를 목적으로 사회를 구축한다면 제일 적합한 정의관이라고 생각한다. 인간관계에 있어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는 근거가 ‘해당 사람의 동기’가 된다면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피곤한 일들이 극히 줄어들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 사소한 다툼, 사회적인 논란, 법의 허점을 노린 범죄 등 극히 줄어들 것이라 본다. 하지만, 그만큼 새로운 법과 도덕에 딜레마가 생기고, 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고 예상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칸트의 의무론에서 도덕적 딜레마를 예시로 이야기를 펼쳤다. 이야기의 전제를 거짓말로 시작한다. 칸트의 의무론에 따르면 거짓말이라는 행위는 도덕적이지 못하고, 정언명령에 어긋나기 때문에 칸트는 거짓말에 대해서 반대한다. 그렇다면 선의의 거짓말은 어떨까?
‘정의란 무엇인가’ 책에서 도덕적 딜레마 문제를 꺼내며 선의의 거짓말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살인마가 당신에게 찾아와서 당신의 친구 A가 어디 있는지 묻는다면,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하여 친구를 살리는 게 옳은 행위일까? 칸트는 아니라고 말한다. 정언명령에 따라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는 결과에 상관없이 항상 존재한다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칸트의 이런 융통성 없는 행동에 탄신을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칸트는 ‘거짓말은 옳은 행위에 위반되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거짓말에 반대하는 것뿐이다. ‘거짓말을 당한 상대가 피해를 입어서, 상대방도 진실을 알 자격이 있기 때문에’라는 이유에서 거짓말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거짓말이든 진실의 원천을 해진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정직)은 그 어떤 편의상 예외도 인정할 수 없는 신성하고 무조건적인 이성의 법칙이다.”-임마누엘 칸트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하면 잘못일까?
분명 칸트의 정언명령은 사회를 구축하기에 좋은 시스템의 거름이 되기 충분해보인다. 그러나 선의의 거짓말과 관련된 도덕적 딜레마는 해결하기 어려워보인다.
자유지상주의
마지막 자유지상주의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존 롤스’라는 사람에 관해서 소개하겠다. 존 롤스는 40년 가까이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한 철학자이다. 그가 40년 동안 고민하며 생각하다가 나온 책이 ‘정의론’이다.
정의론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절차’이다. 절차는 ‘순서, 과정’을 뜻하는데, 롤스에 따르면 ‘공정한 절차를 통하기만 하면 그에 따라 나온 결과도 정의로울 것이다.’, ‘정의에 있어서 결과보다 중요한 것이 공정한 과정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롤스의 정의관을 ‘절차적 정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 롤스는 한가지 사고 실험을 하게 된다. 사고 실험의 내용은 ‘당신이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고 했을 때, 사회적 희소가치를 사회구성원에게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이다. 이때 롤스는 중요한 전제조건을 건다. 바로 ‘무지의 베일’이라는 것을 쓴 상태로 사회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지의 베일’이란 ‘앞으로 구축하고 살아갈 사회에서 당신의 지위, 능력, 인종, 종교, 가치관 등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상태’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 베일을 쓴 상태의 인간을 마치 사회가 성립되기 이전 원초적인 인간과 비슷하다고 해서 ‘원초적 입장’ 상태에 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본인이 사회를 만드는데 그 사회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해지지 않은 상태이다. 자신의 부모님이 부자인지 거지인지, 성별이 남자일지 여자일지, 직업이 전문직일지 아르바이트생일지, 성격이 내향형일지 외향형일지, 나이가 많을지 적을지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사회의 규칙을 만들라는 거다. 무지의 베일, 원초적 입장을 굳이 넣은 이유에 대해서 롤스는 두 가지 이유를 댔다.
첫 번째, ‘자신이 우연히 가지고 태어난 사회적 지위, 재능과 노력, 인종과 젠더 등은 객관적 입장에서 정의로운 사회 제도를 만드는 데 방해가 된다.’ 자신의 지위와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제도를 만들 때 조금이라도 자신 능력과 위치에 유리한 요소를 제도로 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이기심이 정의로운 제도를 망칠 가능성이 있으니 말이다.
두 번째, ‘아무리 이기적인 인간이어도 무지의 베일, 원초적 입장 상태로 사회를 만들게 되면, 정의로운 방향으로 원칙을 만들게 될 것이다. 자신이 최소수혜자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최소수혜자’란 ‘혜택을 가장 적게 받는 사람’을 뜻한다.
롤스는 이 사고 실험 속에서 원초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아래 두 원칙에 꼭 합의할 것이라고 보았다.
1. 평등한 자유의 원칙
어떤 사람에게는 자유가 주어지고 어떤 사람에는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라면, 자신 또한 자유를 뺏길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따라 모든 사회 구성원이 ‘기본적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합의한다. 여기에는 재산을 가질 자유, 의견을 표현할 자유, 종교를 가질 자유 등 다양한 자유가 포함된다.
2. 불평등의 정당화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아래 두 가지 원칙에서만 정당화 될 수 있다.
2-1. 기회 균등의 원칙
외모와 지능, 부모님의 재산 등 타고 태어난 것들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닌, 우연히 가지게 된 것이다. 따라 우연성에 의해 사회적, 경제적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사회구성원 누구든 사회적, 경제적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균등하게 돌아가도록 합의한다.
2-2. 차등의 원칙
무지의 베일, 원초적 입장 상태를 통해 우린 각자가 최소수혜자 일지 최대수혜자일지 알지 못한다. 따라 사회적 약자인 최소수혜자에게 가능한 높은 이익이 돌아가게 하도록 합의한다.
‘기회균등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이 지켜지면 사회 불평등은 어느 정도 허용될 수 있다. 그러나 두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상태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불평등은 정의롭지 않다.’라는 것이 롤스의 입장이다. 위에 두 가지 원칙이 제도를 통해서 잘 지켜지고 있고, 사회 구성원들이 이 원칙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이상 사회’라고 롤스는 말했다.
정의론 책이 나오고 3년 후 ‘로버트 노직’이라는 사람이 등장해 롤스를 정면 비판하는 책을 내버리게 된다. 노직은 인간의 생명과 자유에 관한 권리는 최대한으로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아야 할 권리는 ‘소유권’이라 보았고, 이 소유권은 절대적으로 보상받아야 하며 타인이 침해할 수 없는 배타적 권리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국가 혹은 사회가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은 괜찮은 것인가?’ 노직에 따르면 절대 국가 혹은 사회가 개인의 소유권에 침해해선 안 된다. 정당하게 얻은 재화의 소유권은 해당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소유권 침해하는 행위는 그 사람의 자유권을 침해한다고 보았다. 따라 자유를 가장 중시하는 노직의 정의관을 ‘자유지상주의’ 또는 소유권을 강조하는 ‘소유권으로서의 정의’라고 사람들은 부른다.
노직은 기준 같은 것 없이 ‘무조건’ 개인의 소유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직이 강조하는 소유권은 항상 ‘정당하게 취득, 혹은 양도됐을 때만’ 인정되고 취득과 양도의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했을 때는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노직는 아래의 3원칙을 만들어 기준을 정했다.
1. 취득의 원칙
‘정의의 원리에 맞도록 합법적으로 어떤 재화를 취득한 사람은 그 재화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다.’ 여기서 정의의 원리라면 ‘정당하게 취득, 혹은 양도됐을 때만 인정되고 취득과 양도의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했을 때는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노동력으로 특정 재산을 얻는 과정에서 다른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재산을 얻었다면 배타적, 절대적 소유권이 있는 것이다.
2. 양도의 원칙
‘취득의 원칙으로 획득한 재화가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속임수 없는 교환을 통해 이전, 혹은 양도되면 소유권이 정당하게 넘어갈 수 있다.’ 당신이 친구에게 특정 재산을 주기로 합의했고, 속임수 없이 친구가 특정 재산을 받았다면, 정당하게 양도된 것이므로 특정 재산의 소유권은 친구에게 넘어간다는 것이다.
3. 교정의 원칙
‘취득 및 양도 과정에서 부정의로 잘못된 소유가 발생한다면, 국가 또는 사회가 개입하여 원래 소유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 돌려준다.’ 만약 당신이 친구에게 특정 재산을 양도한다고 가정해 보자, 자신의 노동력으로 얻은 재산이 아닌,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착취하여 얻은 재산인 상태로 친구에게 특정 재산을 넘겨준다면, 교정의 원칙에 따라 당신은 특정 재산에 관한 소유권이 없고 국가 또는 사회가 개입해 당신에게서 재산을 뺏을 것이다. 다른 예시로 친구가 당신의 재산을 훔쳐 빼갔다면, 마찬가지로 교정의 원칙에 따라 국가 또는 사회가 개입해 친구에게서 빼앗긴 재산을 돌려줄 것이다.
이 세 가지 원칙을 통해 알 수 있는 노직의 분배정의의 핵심은 ‘분배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 즉 분배의 역사적 과정을 살펴본다.’이다. 따라 취득, 양도의 과정이 정의로웠을 때만 소유자의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노직도 롤스와 같이 ‘절차적 정의관’ 즉, ‘규칙이 정당하면 항상 결과도 공정하다.’라는 입장은 똑같다.
노직에 따르면 국가 또는 사회가 개입할 수 있는 경우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교정의 원칙을 위반했을 시에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즉, 교정을 위해서만 국가와 사회가 개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국가, 사회가 교정이 목적이 아닌 다른 이외의 목적으로 개입한다면, 그것은 개인 침해고 그것 자체로 정의롭지 않다고 말했다. 따라 복지를 위해 근로 소득에 대한 과세를 하는 건 개인의 절대적 소유권을 침해하는 것이라 보았고, 그 세금의 양만큼 개인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보기도 하였다.
노직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게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 개인 정당하게 재화를 획득했으면, 그 재화의 분배 또한 개인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정당한 소유권을 가지고 개인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노직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국가의 형태는 무엇일까? 이에 노직은 ‘시민의 자산 및 인권 보호와 계약 집행의 감독만을 수행하는 국가’ 즉, ‘최소국가’라고 답했다.
결론
지금까지 공리주의, 동기주의, 자유지상주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각 정의관마다 장점, 단점이 있지만, 내 주관적 생각으론 가장 큰 장점과 가장 적은 단점을 보유한 정의관은 ‘자유지상주의’ 사상이다.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것과 국가가 개인의 소유권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말이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정해야 할 것은 내가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정의이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공리주의는 사회에 절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물론 규칙 공리주의에서 규칙을 일반적인 도덕선에 잘 맞추어 활용하면 손볼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규칙을 일반적인 도덕선에 맞추는 것부터 이미 공리주의라 볼 수 없다.
무엇보다 공리주의의 또 다른 핵심 원리, 질의 차이를 따지지 않고 양의 차이를 중요시하는 것이 매력적이었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뿐더러 인간 또한 하나의 숫자로 측정될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기에 차마 공리주가 사회에 필요한 정의라고 말 못 하겠다.
그럼, 동기주의와 자유지상주의가 남았는데,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정의관이 새롭게 나와, 그 정의관을 채택하고 싶다. 물론 동기주의와 자유지상주의는 전혀 다른 맥락의 정의관이다. 나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무엇보다 칸트의 동기주의에서 ‘선의지, 가언명령, 정언명령’ 부분을 실현하기까지 불가능한 부분이 많다 느꼈고, 현재로선 답할 수 없는 도덕적 딜레마에 문제가 너무 많다. 칸트의 동기주의에 따라 행동하려면, 인간은 항상 이성적인 존재여야 하는데, ‘우리 인간이 항상 이성적일 수 있는가?’라는 딜레마에 빠져 답을 할 수 없다.
도덕적 딜레마에 빠져 답을 내릴 수 없는 동기주의에 반해 자유지상주의는 실현 가능성도 높을뿐더러 자유를 보장해 준다. 개인의 소유권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노직의 주장에 나 또한 적극적으로 동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노직의 정의관에 따르면 힘없는 사람은 쉽사리 사회에서 힘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그렇기에 롤스가 했던 사고 실험에 영감을 받아 ‘만약 내가 사회의 체제 만든다고 한다면?’으로 주제를 변형시켜 답변해 보겠다. 우선 전체적인 규칙에 전제는 자유지상주의로 정의관을 잡을 것이다. 그런 다음 동기주의의 ‘실천 이성’의 정의관만 가져와 사회의 혼란을 막고, 최소수혜자에 대한 이익이 최대한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이때 실천 이성에 속한 ‘선의지’와 ‘의무 의식’를 각각 분류해 선의지는 버릴 것이고 의무 의식만 가져와 사회에 적용할 것이다. 선의지는 자유지상주의의 핵심 원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선의지까지 사회에 적용하게 된다면, 굳이 선한 행동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의 자유가 침해당할뿐더러, 선한 것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생길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지상주의에 선의지와 의무 의식을 적용하게 된다면, 선의지를 지키지 않은 사람은 의무를 다하지 않은 사람으로 치부됨과 동시에 ‘선의지를 지키지 않는 사람의 행동은 의무적으로 옳은 것인가?’에 관한 도덕적 딜레마 문제가 생기게 된다. 따라 선의지는 가져다 버리고 의무 의식만 가져와 사회에 적용할 거다.
물론 나의 주관적인 생각에서 나온 윗글의 사고 실험은 말로만 쉽다. 동기주의와 자유지상주의의 정의관은 완전히 다른 맥락이기에 이 두 정의관을 합치려면 ‘선의지를 지키지 않는 사람의 행동은 의무적으로 옳은 것인가?’ 와 비슷한 도덕적 딜레마 문제가 많이 생겨날 것이라 예상한다. 그 때문에 본론의 질문인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의란 무엇인가?’에 관한 나의 답변은 자유지상주의이다. 그나마 모든 정의론 중에서 가장 낫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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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필자가 자유지상주의와 롤즈 사이에서 쉽게 선택하지 않고 고민을 이어갔듯이, 기존 현대 서구의 정의론이 우리에게 시원스런 답을 주기보다는 문제의 복잡성을 더 첨예하게 인식시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복잡성을 떨쳐버리기보다 환영하는 태도가 철학적일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철학은 '정답'이 주는 안도감의 유혹을 떨치고, 서로 충돌하는 여러 '해답'들 사이의 긴장을 견디는 힘일 테니까요.
- 한석훈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