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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嚴淨土分) 第十
(五, 斷釋迦燃燈取說疑)
(六, 斷嚴土違於不取說疑)
(七, 斷受得報身有取疑)
※
5)
[斷釋迦燃燈取說疑,
석가모니불도 옛날 연등불에게 설법을 듣지
않았는가? 하는 의심을 끊음] :
6)
[斷嚴土違於不取疑,
보살들이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도 아무 것도
취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끊음] :
(莊嚴淨土分第十, 須菩提於意云何.....
應無所住而生起心)
7)
[斷受得報身有取疑,
보신(報身)을 얻는 것도 일종의 취함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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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嚴淨土分) 第十
佛告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昔在燃燈佛所 於法 有所得不
不也 世尊
如來 在燃燈佛所 於法 實無所得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不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 爲大不
須菩提言 甚大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圭峰:
第五는
斷釋迦然燈取說疑라
석가와 연등불이 얻어 가지고 說했다는
의심을 끊은 것이다.
論에 云하되
釋迦는 昔於然燈佛所에 受法하시고
彼佛은 爲此佛說法이거늘
云何言不可取不可說인가하는
故로 經에 斷之니라하다
규봉:
5.(疑斷)
석가와 연등불이 얻어 가지고 說했다는
의심을 끊은 것이다.
論에 이르되
“석가는 옛날에 연등불 처소에서
법을 받으시고
연등불은 석가모니를 위해 說하셨거늘
‘어째서 취하지 않고 설하지 않았다’
라고 이르는가 하는 (의심이 있는) 까닭으로
經에서는 이 의심을 끊어주신 것이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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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 告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昔在然燈佛所 於法 有所得不
不也 世尊 如來在然燈佛所
於法 實無所得.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 연등불 처소에 있을 때
법을 얻은 것이 있었다 하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부처님 처소에 계실 때,
법을 실로 얻은 바가 없사옵니다.”
淸峯:
무설설 무문문이니,
설해도 설함이 없고 들어도 들음이 없음이다.
법은 말과 글에 있음이 아니요,
자성이 본래 청정하여
본래 고요함을 구족한 것을 깨달음으로써
스스로 불(佛)이기 때문이니,
진여법신은 그 자체가 근본이므로
인을 쫓지 않음인 것이다.
說誼:
己明聲聞無取了하시고 將現菩薩亦無取하시어
先擧自己因地上에 師亦無言己無聞하시니 空生이
知佛明無得하여 果能答以無所得이로다
因甚道無所得일까 以迹論之則釋迦가 彼時에
因聞然燈所說法要하시어 熏成正覺하시니
豈是無得이리오 然이나 此는 但以借緣見道로
爲得耳니라 以實言之則釋迦는 本是天上天下에
獨尊獨貴底人이라
位過諸佛이시며 富有萬德이시니 何曾受他點眼이며
何容有法更得이리오
所以로 道하되 謂得然燈記라면 寧知是舊身하니라.
설의:
이미 聲聞들이 取할 것이 없음을 밝히시고
장차 보살도 또한 취함이 없음을 나타내려 하시어
먼저 自己(세존)가 처음 수행 당시(因地上)에
스승도 말이 없으셨고 또 자기도 들음이 없음을
먼저 드시니,
수보리가 부처님께서 얻은 바가 없음을 밝히기
위함을 알고, 과연 능히 얻을 것이 없음으로써
답하였노라.
무슨 연고로 무소득이라고 말했을까?
자취(방편문)로써 그것을 논한다면
석가가 그때에 연등불의 설하신 법문의
요점을 들음으로 인하여 正覺을
이루셨으니 어찌 얻은 것이 없다 하리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인연을 빌려 도를
봄(證)으로써 얻음일 뿐이니라.
실로 말하면 석가는 본래(자성이)
천상 천하에 홀로 높고 홀로 귀한 이라.
그 법위가 모든 부처님을 지나시며(같고)
만가지 덕을 넉넉히 갖추었으니,
어찌 일찍이 남이 점안해 주는 것을 받으며
또 어찌 다시 얻을 만한 법이 있음을
용납하리오?
그런 까닭으로 말하되
‘연등불께 수기를 얻었다 한다면
어찌 옛 몸(本來面目)을 알리오?’ 하니라
청봉착어:
소승인 성문연각을 들어 밝히고
다시 대승 보살도 취할 것이 없으며,
석가모니 스스로 연등불께 법을 설해듣고
수기를 받았으나 실로 듣고 받음이
본질적으로 없음을 들어내신 것이다.
스스로 천상천하에 홀로 존귀한
자성은 일체를 구족하고 있었음이니
듣고 얻음이 있다 하면 실로 본성을
모르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
圭峰:
於法에 實無所得者는 然燈佛說은 說是語言이요
釋迦所聞도 唯聞語言이니 語言은 非實智證法故니라
論에 云하되 釋迦가 於然燈佛所에서 言語所說은
不取證法이니 以是義故로 顯彼證智는
不可說不可取라하다
규봉:
法에 實無所得이라는 것은,
연등불이 말씀하신 說이란 것은 말인 소리요,
석가가 들은 바도 말인 소리이니,
말이란 실다운 지혜를 증득한 것
(法)이 아닌 까닭이다.
[다만 무분별의 지혜로 스스로
무분별의 진리를 증한 것이니
지혜가 진리와 더불어 그윽하게
계합하고 경계를 영묘하게
깨달은 것인데 어찌 설하고
얻음이 있겠는가?]
論에 이르되
“釋迦가 연등불 처소에서 말로써 설한 것은
깨달은 법을 取한 것이 아니니,
이러한 뜻인 까닭으로 저 밝게 증득한 지혜는
설하지 못하고 가지지 못함을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법을 설한다는 것은 말을 여읜 것이기 때문에
불가설(不可說)이요, 법을 증한다는 것은
마음의 인연인 상을 여읜 까닭으로
불가취(不可取) 라는 것이다]
---
청봉착어:
설해도 설함이 없고 받아도 받음이 없음이여
물을 말한들 입술을 적시지 못함이고
내 주머니 보물 찾음이 누구에게 받음이랴?
연등불이 말로써 설한 그 말 참이 아니니
석가는 그 말을 얻어가진 것이 아니요
본래 법(眞理)이란 말로써 이를 수 없으니
설해도 설함이 없고 들어도 들음이 없는 것이니라.
---
六祖:
佛이 恐須菩提가 有得法之心하여
爲遣此疑故로 問之이나
須菩提가 知法無所得하시고
而白佛言하되 不也라니라
然燈佛은 是釋迦牟尼佛께 授記之師니라
故로 問須菩提하시되 我於師處聽法에서
有法可得不하시니
須菩提가 卽謂法卽因師開示이나
而實無所得이라하니 但悟自性이
本來淸淨하며 本無塵勞하고
寂而常照卽自成佛이니라
當知世尊이 在然登佛所에서
於法을 實無所得也니라
如來法者는 譬如日光이
明照하여 無有邊際이나
而不可取니라
육조:
부처님께서 수보리가
법을 얻었다는 마음이 있을까 염려해서,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한 까닭으로 물었으나
수보리가 법을 얻은 바가 없음을 알고,
부처님께 말씀드리되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연등불은 석가모니께 수기한 스승이다.
그러므로 수보리에게 물으시되
“내가 스승의 처소에서 법을 들을 때
얻을 만한 법이 있었느냐?” 하시니
수보리가 곧 이르되
"법은 곧 스승으로 인해서 열어 보이긴 하나,
실로 얻을 것은 없습니다”하니,
다만 自性을 깨달으매 본래 청정하며
본래 번뇌(塵勞)가 없고 고요하되
항상 비추고 있음이
곧 스스로 부처를 이룬 것이다.
마땅히 알라
세존이 연등불 처소에 계실 때
법을 실로 얻은 것이 없는 것이다.
如來法은 비유컨대 햇빛이 밝게 비쳐
끝이 없으나 가히 취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
傅大士:
昔時에는 稱善慧였고 今日에는 號能仁이로다
看緣緣是妄하고 識體體非眞이로다 法性은 非因果요
如理는 不從因이니 謂得然燈記라면 寧知是舊身이리오
부대사
옛날에는 善慧라 일컬었고
오늘날엔 能仁(佛)이라 부르도다.
인연을 보니 인연은 허망하고
몸을 알면 몸은 참이 아니로다.
法性은 因果가 아니어서 진여의
이치는 因을 따르지 않으니
연등불께 수기를 얻었다 한다면
어찌 이 옛 몸(本來面目)을 알리오?
---
冶父:
古之今之로다
說誼:
非但昔年에 無所得이라
至今出世라도 亦無得이니
伊麽則古亦只如是며 今亦只如是로다
야부:
옛날이 지금이로다.
설의:
비단 옛날에만 얻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지금 세상에 나도 또한 얻을 게 없으니,
이러한즉 옛날에도 또한 다만 이 같았으며
지금에도 또한 다만 이 같도다.
---
청봉착어:
일체가 幻이요, 색신 또한 實 아니니
실다움은 법성이나, 그 또한 공 한데
어디에 因이 있어 果를 받으며
연등불이 무얼 주어 석가가 받았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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冶父:
一手指天하고 一手指地하시니
南北東西에 秋毫不視로다
生來心膽이 大如天하시니
無限群魔가 倒赤幡로다
說誼:
指天指地를 會也未인가 南北東西一釋迦로다
一釋迦여 誰籠罩이리오 心膽이 恢恢大如天이시어
一口呑盡諸佛祖로다 佛祖도 尙被渠呑却이니
魔外가 如何得不降이리오
야부: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땅을 가리키시나
사방에 추호도 볼 수가 없도다.
태어나면서부터 心膽이 하늘같이 크시어
한량없는 마구니들이 붉은 깃발을 꺼꾸러 뜨리도다.
설의:
하늘을 가리키고 땅을 가리킴을 아는가? 모르는가?
사방이 오직 한 석가로다.
한 석가여! 누가 감쌀 수 있으랴.
심담(心膽)이 넓고 넓어 하늘같이 크시어
한 입으로 모든 부처와 조사를 삼킴이로다.
佛祖도 저것에 삼킴을 당했거늘 마구니와
외도가 어찌 항복하지 않을 수 있으리요?
---
청봉착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여!
어찌 석가를 칭함이랴
간이 커서 부처와 조사들을 삼킴이여
일체중생의 실상면목이 그러하니라.
---
圭峰:
第六은 斷嚴土違於不取疑니라 論에 云하되
若法不可取라면 云何諸菩薩이 取莊嚴淨土며
云何自受法王身이라하다
此中에서 且斷嚴土之疑니라 斷之文이 三이니
一은 擧取相莊嚴問이니라
규봉:
6.(疑斷)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취함이 없다는
(의심) 것을 어긴다는 의심을 끊은 것이다.
論에 이르되
“만약 법을 취하지 않을진대 어찌하여
모든 보살이 정토를 장엄하는 것을 취하며,
어찌하여 스스로 法王身을 받는가?” 했다.
이 가운데서 또 불국토 장엄에 관한
의심을 끊은 것이다.
끊어준 글이 셋이니
(1)은
相을 들어 취하여 장엄 한다는 것을
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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須菩提 於意云何 菩薩 莊嚴佛土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한다 하겠느냐?”
圭峰:
佛意가 欲明法性眞土이니
故問取形相莊嚴土不인가하니라
二는 釋離相莊嚴答이라
규봉:
부처님의 뜻이 일체의 근본 성품인
참 바탕 (法性 眞土)을 밝히고자 함이니,
그러므로 물으시길 형상을 가지고
불토를 장엄하느냐? 고 하시었다.
(2)는
相을 떠난 장엄을 해석하여 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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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 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이름이 장엄인 것이옵니다.”
淸峯:
장엄이라는 것은
형상을 지어 만든다는 것이니,
곧 상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본래 실상은 모양을 갖춘 바 없이 깨끗하며
내외가 명철하니, 차별상은 인연에 의하여
허상으로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따로 이 장엄할 것이 없는
본래 그대로가 참으로 불국 정토이다.
따라서 정, 혜로 미혹을 거두면
청정함을 요달하리니
말하자면(이름이) 장엄이라 하는 것이다.
곧 “눈을 비비면 허공 꽃이 생기는 것이다.”
장엄이라 하는 것을 형상이 있는 것과
형상이 없는 것으로 나누어 설명한다면
세간의 불국토 장엄은 형상 있음이니
절을 짓고, 경을 펴고, 보시 공양하는 등
일체 모든 이를 널리 공경하는 것이요,
형상 없는 장엄은 마음이 깨끗한 것이
곧 불국토가 깨끗함이고
생각 생각에 항상 집착함이 없는 것을
인하여 장엄이라 하는 것이나
실상으로 보면 이 또한 이름인 것이다.
마음이 청정하면
마음의 그림자인 세계가
바로 정토가 되는 것이므로
온종일 국토를 장엄 한다 해도
실제 취할 만한 장엄의
차별적인 형상이 없고
집착할 만한 장엄의 법도 없는 것이다.
집착이 없다 한 것은
모든 유위법의 경계에
집착심(끄달림)으로 안주하지 않음이며,
마음을 낸다하는 것은
육도 만행의 마음을 나툰다 하는 뜻이다.
본래의 마음은
인위적인 조작이 없는 것이다.
마음 밖에 국토가 없음을 요달하여
마음이 깨끗하면 마음의 그림자로 생긴
세계가 곧 깨끗한 정토이므로
국토를 장엄 한다는 것은
차별적인 장엄의 모습도,
집착할 장엄의 모든 것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을 진여의 세계인
부처의 세계(佛國土)를
장엄 한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차별 현상인 육진 경계는
성주괴공하는 환일 뿐,
참으로 장식하는 것이
되지 않는 것이다.
집착함이 없이 청정한 생각을 내기 때문에
마음의 그림자로 나타난 육진 경계의 모습에
집착하여 끄달리지 않게 된다.
색, 성, 향, 미, 촉,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체에 끄달리지 않고 모든 유위법의 모습에
집착하여 안주하지 않음이며,
마음을 낸다는 것은
육도 만행의 생각을 낸다는 뜻인 것이다.
소승인은 마음과 지혜를
불 꺼진 재처럼 아예 생명 없이 끊어 버리나
이것은 변견에 치우친 것으로 아견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옳지 않는 것이다.
또 차별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에 집착하여
일체의 상을 떠난다 하여 아예 없는 단멸한
공을 취하는 변견에 떨어져 생멸에 따르는
인과법을 무시하려 하는 삿된 소견을 짓게
되면 크게 그르치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존께서도 “차라리 수미산 같은 유상(有相)에
집착하여 있다고 생각하는 유견(有見)을
일으킬지언정
겨자씨만큼도
모든 상을 일체 부정하는 공견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실상은 일체 환망인 상을 집착으로부터
여의되
실상의 자체 성품은 단멸의 공(空)이 아닌
묘유공(妙有空)인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言及虛空有骨胎 언급허공유골태 하고
說道無心一關隔 설도무심일관격 이니
大道無門君了知 대도무문군요지 하라
東西南北皆是門 동서남북개시문 이니라
허공이라면 뼈가 있고
무심에도 한 관문이 있으니
대도는 문이 없음을 그대여 똑똑히 알라
동서남북이 모두 문이니라
說誼:
內而根身과 外而器界가
皆是淸淨智境이며 一一無爲佛土니라
根身器界를 因甚喚作淸淨智境과 無爲佛土인가
捏目하면 空花亂墜하고 不然이면 滿目蒼蒼이니라
作麽生莊嚴인가 情忘勿疎親이고 見盡無內外로다
作麽生이 是非莊嚴인가 情見忘處에
不留蹤하면 見佛見祖를 若寃讎리라
설의:
안으로 육근(六根)을 지닌 몸(根身)과
밖으로 기구인 세계(器界:차별 현상의 세계)가
모두 청정한 지혜의 경계이며
낱낱이 함이 없는 불토니라.
몸의 근본(根身)과 器界를 무엇 때문에
청정한 지혜의 경계와
함이 없는 불국토라 하는가?
눈을 누르면 헛 꽃이 어지럽게 떨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눈 가득히 푸르름(맑음)이니라.
어떻게 장엄 하는가?
식정을 잊으면 멀고 가까움(차별)이 없고,
보는 것이 다하면 내외가 없음이로다.
어떻게 함이 장엄하지 않음인가?
식정과 보는 것이 잊혀진 곳에서도
자취를 남기지 않으면, 부처를 보고
祖師를 보는 것이 마치 원수와 같으리라.
청봉착어:
장엄이라 장엄이라.
식정 경계는 치장이 장엄이나
실상 장엄은 함이 없음이 장엄이니
불국정토는 청정한 그대로 장엄이니라.
---
圭峰:
偈에 云하되 智習唯識通이라 如是取淨土라
非形이 第一體이고 非嚴이 莊嚴意라하고
論에 釋云하되
諸佛은 無有莊嚴國土事하고 唯眞實智慧로
習識通達이니 故不可取라하다
莊嚴이 有二하니
一은 形相이요 二는 第一義相이니라
非嚴者는 無形相故이고
莊嚴意者는 卽是第一莊嚴이니
以一切功德으로 成就莊嚴故라하다
규봉:
偈에 이르되
“지혜의 습기(智習)와 심식
(알음알이:唯識)으로 오직 通하는 것이라.
이와 같이 정토를 取(장엄)하는 지라.
形相이 아닌 것이 제일의 體(진불)이고
장엄이 아닌 것이 장엄의 뜻이라”고 하였고,
論에 해석해 이르되
“모든 부처는 불국토를 장엄 하는 일이 없고
오직 진실한 지혜로 익혀 앎(習識)으로서
통달한 까닭에 不可取라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장엄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형상이요,
둘째는 절대의 도리(第一義相)이다.
장엄하지 않는다는 것은 形相이 없는 까닭이고
장엄의 뜻은 곧 이것이 최고의 장엄이니,
일체 공덕(定,慧)으로써
장엄을 성취한 까닭이다.
---
六祖:
佛土淸淨하여 無相無形이니 何物로 而能莊嚴耶인가
唯以定慧之寶를 假名莊嚴이니라 莊嚴은 有三이니
第一莊嚴은 世間佛土로 造寺寫經과
布施供養이 是也요 第二莊嚴은 身佛土이니
見一切人에 普行恭敬이 是也요 第三莊嚴은 心佛土이니
心淨하면 卽佛土淨이라 念念常行無所得心이 是也니라
육조:
불국토가 청정해서 상대도 없고 형상도 없으니
무슨 물건으로 능히 장엄할 것인가?
오직 定과 慧의 보배를 거짓으로 장엄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장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第一
장엄은 世間佛土로써 절을 짓고 경을 쓰고,
보시 공양하는 것이 이것이고,
第二
장엄은 身佛土이니 모든 사람을 보고
널리 공경하는 것이 이것이요,
第三
장엄은 心佛土이니 마음이 淸淨(깨끗:공적)하면
곧 불국토가 청정한 것이라 생각 생각이 얻고자 하는
것이 없는 마음으로 항상 행하는 것이 이것이다.
---
冶父:
孃生袴子요 靑州布衫이로다
說誼:
孃生袴子는 純而無雜이니라 然이나 唯古非今이요
靑州布衫은 儉而無華이나 然이나 但質無文이니
本始合體하여 文質이 彬彬하여야
始可名爲十成莊嚴이니라
야부:
어머니의 속옷이요
靑州의 베적삼이로다
설의:
어머니의 속옷은 순수하여
잡됨이 없음(볼 수 없음)이니라.
그러나 오직 옛(드러나지 않는 본래 體)이고
지금(用)이 아님이요,
청주의 布衫은 검소해서 화려하지 않으나
다만 그 바탕이 무늬가 없음(조작이 없음:慧)이니,
본체(本)와 비롯함(始)이 몸에 합(自性, 性品)하여
무늬(慧)와 바탕(體)이 밝고 밝아야 비로소
만족(十成)할 만한 장엄이라 하느니라.
---
청봉착어:
형상 있는 불사도 장엄이요
두루 베풂도 장엄이요
청정한 定과 밝은 慧가 그대로 장엄이니
그 가운데 정혜의 청정함이 제일 장엄이라.
어머니의 속옷은 보이지 않으니 드러나지 않는
체인 정이요
청주의 베적삼은 소박한 지혜의 반야라
꾸미는 건 조작이요 더럽힘이니
참 장엄이란 원래의 정과 혜가 그것이니라.
---
冶父:
抖擻渾身하니 白勝霜하고 蘆花雪月은
轉爭光이로다 幸有九皐翹足勢하니
更添朱頂又何妨이랴
說誼:
功中就位는 脫盡廉纖하고
位裏轉身하여 更添光彩로다
야부:
온몸을 털어 버리니
희기가 서리 보다 뛰어나고
갈대꽃과 雪月은 더욱 빛을 다투도다.
다행히 그윽한 못에서 발을 든 형세이니
다시 이마에 붉음을 더한들 무엇이 방해되랴?
설의:
功(수행)가운데서 위의에 나아감은 자질구레한 것
(廉纖)을 모두 벗어버리고, 위의(진불:定)속에서
몸을 굴려 다시 광채(慧)를 더함이로다.
---
청봉착어:
번뇌를 제하면 그대로 청정하니
정과 혜가 밝게 드러나도다
그러나 그대로 머물러 있음이
밝은 대로 쓰고 씀에 어찌 미치랴?
---
圭峰:
三은 依淨心莊嚴勸이라
규봉:
(3)은 깨끗한 마음을 의지하도록
이끌어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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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이런 까닭으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 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색에 머물러서 생각을 내지 말며
마땅히 소리, 냄새, 맛, 촉감과 법(모든 것)에
머물러서 생각을 내지 말 것이요.
淸峯:
보살 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모든 이들로 봄이 옳다.
집착하고 취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으니,
응당 정‧혜를 갖춰 혜안으로 관(觀)하여
본래 일체가 취할 것이 없는 공적함을
요달하게 되는 것이다.
머물지 않는다 하는 것은
집착하고 분별하지 않는 것이니
생각 생각에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욕심과 헤아림이 없으면 그것인 것이다.
불성이 무위의 공적함임을 요달하지
못하고 유위의 형상으로 분별하여
성취했다는 집착이 있으면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깨끗한 것에 애착하여 머물러도,
상에 집착하여 생각을 내도
미혹을 더하는 중생이요,
집착함이 없으면 곧 부처인 것이다.
說誼:
何謂淸淨心인가 無取無着이 是니라
若欲無取着라면 須開智慧眼이리니
一切賢聖이 以開智慧眼故로 善能分別諸根境界하되
於中無着하여 而得自在니라 由是로 根塵識界를
廓達無礙하고 一一明妙하고 一一淸淨如虛空이니
是可謂天水相連爲一色이라 更無纖靄隔淸光이로다
般若利用이 如是甚深하며 如是自在하니
須開慧眼하여 普應根門하면 念念淸淨하여
塵塵解脫이요 不應無智이면 染著諸境이니라
설의:
무엇을 청정심이라 하는가?
취함도 없고 집착도 없는 것이 이것이니라.
만약 취하고 집착함이 없고자 하면 모름지기
智慧의 눈을 떠야 하니,
일체 현성이 지혜의 눈을 뜬 까닭으로 능히
모든 근본과 境界를 바르게 분별하되
그 가운데서 집착함이 없이 自在함을 얻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육근, 육진 경계를 확연히 통달하여
걸림이 없고, 낱낱이 묘하게 밝고 낱낱이 청정하여
허공같이 맑으니 이것은 가히 하늘과 물이 서로
이어져 한 빛이 됨과 같으니라.
다시 조각구름 같은 망념(纖靄)도
맑은 빛(慧)을 막음이 없도다.
반야의 날카로운 작용이 이와 같이 심히 깊으며
이와 같이 자재하니 모름지기 지혜의 눈을 열어
널리 根門(자성)에 계합하면, 생각 생각마다
청정하여 낱낱이 해탈인 것이요,
응당 지혜가 없으면
모든 경계에 물들어 집착하게 되느니라.
청봉착어:
법계가 공함을 통달하면 취할 것이 없고
집착함이 없게 되어 묘한 지혜가 밝게
드러나나니
걸림 없는 청정심이 곧 이 해탈이로다.
---
圭峰:
云하되
若人이 分別佛土하여 是有爲形相으로
而言是我成就者하면 彼住於色等境中이니
爲遮此故로 云하되 應如是生淸淨心하여
不應住色等也라니라
而生其心者는 則是正智이고 此是眞心이니
若都無心이라면 便同空見이라하다
규봉:
論에 이르되
“만약 어떤 사람이 불국(淨)토를 분별하여
有爲의 形相으로 ‘내가 성취했다’고 말하면
그는 色 等(6진 경계)의 경계 가운데 머무는 것이니,
이것을 막기 위한 까닭으로 이르되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심을 내어서 마땅히
色 等에 머물지 말라하신 것이다.
그 마음을 낸다고 하는 것은 곧 바른 지혜이고,
이것이 참다운 마음이니, 만약 마음이라는 것이
아예(모두) 없다 하면 空見
(텅 비어 없다는 단멸공의 소견)과 같은 것이다” 했다.
---
六祖:
諸修行人은 不應說他是非하며 自言我能我解하여
心輕未學이면 此非淸淨心也니라 自性에서
常生智慧하여 行平等慈하고 下心恭敬一切衆生이
是修行人의 淸淨心也니라
若不自淨其心하고 愛着淸淨處하여 心有所住하면
卽是着法相이니 見色着色하여 住色生心은
卽是迷人이요 見色離色하여 不住色生心은
卽是悟人이니라 住色生心은 如雲蔽天이고
不住色生心은 如空無雲하여 日月이 長照며
住色生心은 卽是妄念이요 不住色生心은
卽是眞智니 妄念이 生하면 卽暗이고 眞智가 照하면
卽明이니라 明하면 卽煩惱가 不生하고
暗하면 卽六塵이 競起니라
육조:
모든 수행인은 응당히 남의 是非를 말하지 말며,
스스로 말하되 “내가 能하고 나는 안다”하여 마음을
가벼이 하여 배우지 않으면 이것은 청정한 마음이
아닌 것이다.
自性에서 항상 지혜를 내어서 평등한 자비를 행하고,
마음을 낮추어 일체 중생을 공경하는
이것이 수행인의 청정심인 것이다.
만약 그 마음을 스스로 깨끗하게 하지 않고
청정한 곳을 애착해서 마음에 머무는 바가
있으면 곧 모든 것(法相)에 집착하는 것이니,
色을 보면 색에 집착하여 색에 머무는 마음을
내는 것은 곧 미혹한 사람이요,
색을 보되 색을 여의어서 색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는 것은 곧 깨달은 사람이다.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고
색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는 것은
마치 허공에 구름이 없어서 해와 달이
늘 비춤과 같으며,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은 곧 이 망념이요
색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는 것은 곧 참다운 지혜이니,
망념이 일어나면 곧 어둡고
참다운 지혜가 비추면 곧 밝은 것이다.
밝으면 곧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어두우면
곧 육진이 다투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
傅大士:
掃除心意地하면 名爲淨土因이니
無論福與智하고 先且離貪瞋하라
莊嚴은 絶能所라 無我亦無人이니
斷常에 俱不染하면
穎脫出囂塵하리라
부대사:
마음과 뜻 깨끗이 하면
이것이 맑은 국토의 因이니
복과 혜를 논하지 말고 먼저 탐진을 여의라
장엄은 能所를 끊음이라 我도 없고 人도 없어
斷과 常에 함께 물들지 않으면
시끄러운 티끌세상 끝내 벗어나리라.
---
冶父:
雖然恁麽나 爭奈目前은 何이리오
說誼:
雖然不應住於色聲이나 色聲이 爭奈目前何오
야부:
비록 이러하나
눈앞의 다툼(눈앞의 경계)을 어쩌리오.
설의:
비록 빛과 소리에 마땅히 머물지 않으나,
色聲이 눈앞에 다툼을 어쩌리오.
---
청봉착어:
교만은 내가 있음이요
집착은 사람이라 고집함이니
경계 속에 살되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시비 속에 살되 시비를 여읨이 불국정토니라.
---
冶父:
見色非干色하고 聞聲不是聲이면
色聲不礙處인 親到法王城이로다
說誼:
目前諸法이 鏡裏看形이니 鏡裏看形不礙我이니
眉目分明非別人이니 非別人이 此是相見法王處로다
所以로 道하되 鏡裏에 見誰形인가
谷中에 聞自聲이로다 見聞而不惑이니
何處匪通程하시도다
야부:
色을 보나 색에 간섭받지 않고
소리를 들으나 소리가 아니면
색과 소리가 걸림 없는 곳인
法王城에 친히 이르도다.
설의:
눈앞의 모든 것이 거울 안에 형상을 보는 듯하니
거울 속의 형상을 봄은 나에게 걸리지 않아,
눈썹과 눈이 분명하여 다른 사람이 아니니
이것이 이 서로 法王을 보는 곳이로다.
그런 때문에 말하되
“거울 속의 누구의 형상을 보는가?
골짜기 속에서 제 소리를 들음(계합)이로다.
보고 들음에 미혹하지 않으니 어느 곳인들
통하는 길이 아니리오 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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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無所住하여 而生其心하니라
마땅히 머무는 바(집착) 없이
그 마음(생각)을 낼지니라
淸峯:
응무소주는
곧 본성을 일컬음이니 주인이다.
처소에 국한됨이 없어 내외가 없고,
가운데도 없고, 형상이 없고,
동함이 없이 존재하되,
항상 하는 마음(心)이라는 본체요,
우주 삼라만상의 본래 면목인 것으로
주처가 없이 머무는 집착할 것과
처소가 없이 일체처에 두루한 절대 평등한 것이다.
이생기심
이라는 것은 그 본성(住)인 마음(性品)에서
일으키는 마음이니 객인 것이다.
객은 항상 하지 않음이니 머물렀던 곳으로부터
항상 떠남(滅)인 것이다.
알기 쉽게 구분하면,
마음과 생각이라 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물은 마음(主,能)이요
파도는 생각(客,所)이니
마음은 청정하고 고요하며 부동한 것이며,
이 가운데 집착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
생각을 내라는 것(無爲)을 말씀하신 것이다.
공적한 성품을 요달하여 지혜의 눈이 밝아지면
도무지 형상(幻)에 집착하지 않고 행하게 되니
곧 보살행인 것이다.
“공적 영지한 것으로부터 나투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但心生生 단심생생 하여도
應無所住 응무소주 이니
波上月影 파상월영 하니
散如不散 산여불산 이니라
다만 마음을 내고 내어도
머무는 바 없이 머무니
물결 위에 잠긴 달이
흩뜨려도 흩어지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說誼:
不須空然逐風波하고 常在滅定應諸根하니
是可謂暗中有明이로다 又 無所住者는
了無內外中虛無物하여 如鑑空衡平하여
而不以善惡是非를 介於胸中也요 生其心者는
以無住之心으로 應之於事하되 而不爲物累也니라
孔夫子는 云하되 君子之於天下也에 無適也하고
無莫也하여 義之與此라하니
此는 言心無所倚하여 而當事以義也니라
當事以義則必不爲物累矣며
不爲物累則必不失其宜矣니라하나니
聖人이 時異而道同하고 語異而相須於斯를
可見也已거늘 謝氏가 於無適莫註中에 引經此句하여
以爲猖狂自恣하여 而卒得罪於聖人하니
何其言之不審이 至於如是之甚耶일까
昔者에 盧能이 於五祖忍大師處에서
聞說此經으로 到此하여 心花頓發하여
得傳衣盂하고 爲第六祖로다
自爾로 五葉이 結果하여 芬芳天下하니
故知只此一句가 出生無盡人天師也로다
嗚呼라 謝氏여 何將管見으로 擬謗蒼蒼乎이던가
설의:
모름지기 공연히 바람을 쫓아
파도를 일으키지 말고
항상 멸진정에 머물며
모든 根機에 응해야 하니,
이것이 가히 어두운 가운데서
밝음이 있는 것이라 할 만 하니라.
또는 머무는 곳 없다는 것은
내외가 없고 중간도 비어서
무엇도 없는 것을 깨달아
마치 텅 빈 거울과
저울대가 고른 것 같이
선악시비를 가슴속에 두지 않는 것이요,
生其心이란 머무는 바 없는 마음으로써
만사에 응하되 만물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니라.
공자는 이르기를
“군자(賢人)는 천하에 가(可)한 것도 없고
(無適) 불가(不可)한 것도 없어서(無莫)
의(義)와 더불어 따른다” 했으니
이것은 마음이 의지하는 바가 없어서
(비고 크고 넓어 우주를 감싸서 더불어 있되
한 곳에 집착해 머무는 처소나 따로 모습이
존재함이 없어서, 있음이(相) 없이 있어,
연(緣)에 따라 작용함) 일을 당함에
바른 것(義)으로써 행함을 말하는 것이니라.
“바른 것(義)으로써 일을 감당하면
반드시 사물에 곧 얽매이지 않으며,
사물에 얽매이지 않으면
반드시 그 옳은(宜)것을 잃지 않게 되는 것이니라"
하였나니 聖人이 비록 태어난 때는 다르나
道는 같으며, 말은 비록 다르나 서로 구하는 것은
다르지 않는 이것을 가히 보아야 하거늘,
양좌(謝氏)가 無適莫에 대한(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공한 것과 바르게 쓰임에
치우침이 없음) 주석 가운데
經의 이 구절을 인용하여 미쳐서(猖狂)
스스로
방자하게도 마침내 ‘성인(석가세존)께서
죄를 지었다(得)'하니 어찌 말을 살피지
못함이 이같이 심한 데까지이르렀을까?
옛날에 혜능(盧能)이 五祖 홍인대사의
처소에서 이 經 설함을 듣고, 여기에 이르러
마음 꽃이 몰록 피어서 가사와 발우를 전해
받으시고 제六조가 되셨도다.
그로부터 다섯 잎이 열매를 맺어 천하를
향기롭게 하였으니,
그러므로 알라.
다만 이 한 구절
(應無所住 而生其心)이
다함이 없는 인간과 천상의
스승을 나게 하였도다.
오호라 양좌(謝氏)여!
어찌 좁은 소견으로
저 창창함(넓고 깊은 도리)를
비방하려 하였던가?
청봉착어:
경계에 끄달려 망상을 일으킴이 옳지 못하니
정(應無所住)가운데 계합 해 있으되
혜로써 경계에 응(而生其心)하는
마땅히 취함이 없는 이것이 바른 행이니
육진 경계에 집착하지 않음이
곧 머무름 없는 것이다
---
冶父:
退後退後하여 看看하라 頑石動也로다
說誼:
明中에서 莫留蹤하고 却向暗中歸이니
看看하라 可不動底가 如今動也이니
動還無動이어야
是得이로다
야부:
뒤로 물러서고 물러서서 보고 보아라.
굳은 돌이 움직이도다.
설의:
밝은 가운데서 자취를 머물지 말고 도리어
어두운 가운데를 향해 돌아올지니
보고 보아라.
움직이지 않는 것(응무소주)이
지금같이 움직(이생기심)이니,
움직이는 것이 도리어
움직임이 없어야 비로소 올바른 얻음이니라.
---
청봉착어:
굳은 돌이 움직임은 거북이 털 남이요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곧 움직임이네
본래 부동의 체는 항상 작용하나
작용이 집착이 없을 때 곧 옳은 것이로다.
---
冶父:
山堂靜夜坐無言하니 寂寂寥寥本自然이라
何事西風은 動林野하여 一聲寒雁唳長天인가
說誼:
本自無動이거늘 何須動也인가
須信道하라 四海의 浪靜龍穩睡하고
九天에 雲淨鶴飛高니라
야부:
고요한 밤 산사에 말없이 앉았으니
적적하고 요요함이 본래 그대로라.
무슨 일로 西風은 들 숲을 움직여
한 마리 기러기의 찬 소리가
아득한 하늘을 울리게 하는가.
설의:
본래 스스로 동함이 없거늘
어찌하여 움직일까?
바라노니 믿을지니라
四海의 물결이 고요하면
용이 편안히 잠을 자고
높은 하늘에 구름 개이면
학이 높이 나니라.
---
청봉착어:
산사에 말없이 앉음은
요요적적 본 진여요
기러기 맑은 소리 허공을 흔듦은
걸림 없는 반야 작용의 묘함이로다.
---
圭峰:
第七은
斷受得報身有取疑니 疑意는 如前이다
斷之文이 二니 一은 問答斷疑니라
규봉:
7.(疑斷) 報身을 받는 것도 取함이 있다는
의심을 끊어주신 것이니 의심하는 뜻은 앞과 같다.
의심을 끊는 글이 두 가지니
(1)은
問答으로 의심을 끊은 것이다.
-------------------------------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 爲大不 須菩提言 甚大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의 몸이 큰 수미산 왕 같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몸이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리기를 “매우 크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했사옵니다.”
淸峯:
무슨 뜻인가? 형상 있는 몸(色身)은 아무리 커도
한계가 있는 큼이나 형상 없는 몸(법신체)은
불가사량의 한량없고 측량할 수 없는 무한대의
몸인 것이다.
형상 있는 것은 크기를 말할 수 있으나
형상 없는 것은 크다는 것까지를 초월한 것이며
크기로 말한다면 삼천세계의 가운데 있는
큰 수미산이 아무리 커도 형상 없는 법신 가운데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육진 경계가 실상이 공적하며
이 법신 가운데 구족된 것이니 비교가
불가능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색신의 큼은 상대적인 큼이기 때문에
크다 할 수 있으나
본질은 공하기에 크다 할 것이 없고
법신은 마하의 공적한 큼이기 때문에
절대 큼이므로 크다는 말 자체를 여읜 것이다.
[수미산은 산 가운데 가장 큰산으로 그 높이와
넓이가 삼백 삼십 육 만리나 되는
삼천대천세계에서 가장 큰산이다]
따라서 법신불의 큼(마하)을 상대적으로 가장 큰
수미산 왕을 비유로 들어 큼을 말씀하셨으나
이것은 차별적인 큰 것이 아니요
본성이 공하기 때문에 절대의 큼인
보편(일체, 절대) 평등한 큼인 것이다.
說誼:
放下根塵識하여 淸淨至無餘이니
圓滿空寂體가 豁爾於焉現이도다
體同龜毛像嵬嵬하여 須彌橫海落群峰이로다
擧問空生深有以시니 恐人於斯을 生認着로다
空生이 果能知佛意하여 答以非身好知音이로다
只如非身底道理를 作麽生道인가
未曾暫有像宛然이나 像雖宛然이나
同兎角이로다
설의:
육근과 육진과 육식(18계)을 모두 놓아버려
(공으로 돌아가)서 청정하여 남음이 없으니,
원만하고 공적한 體(바탕)가 활연히 어느덧
드러나도다.
體는 거북이 털과 같으나(없이 있는 것)
그 모습은 뛰어나 수미산도 바다에 떨어져
비껴선 뭇 봉우리로다.
수보리에게 들어 물은 것은
깊은 까닭이 있으니 사람들이 이것을 잘못
생각할까 (알까) 두려워하심 이셨도다.
수보리가
과연 능히 부처님의 뜻을 알아서
몸이 아님으로써 답한 것은
좋은 음을 아는 것이(知音者:
부처님의 뜻을 잘 앎)로다.
다만 저 몸 아님의 도리를 어떻게 말할 건가?
일찍이 잠시도 있지 않으나 모습은 완연하고
상이 비록 완연하나 토끼 뿔과 같도다.
청봉착어:
산 가운데 수미산이 왕이라 크고 크나
거북이 털 같은 몸은 큼이 한량없어
그 가운데 작음이라
경계는 비유로써 크다 작다 헤아려도
진여는 토끼 뿔 같아 비할 수 없는 큼이로다.
---
圭峰:
論에 云하되 如須彌山이 勢力高遠이니
故名爲大로되而不取我是山王은
以無分別故이니 報佛도 如是하여
以得無上法王體이니 故名爲大로되
而不取我是法王은 以無分別故라하다
故로 偈에 云하되 如山王無取하여
受報도 亦復然이라하다
非身名身者는 非有漏有爲身이요
是無漏無爲身이라 故로 偈에 云하되
遠離於諸漏와 及有爲法故라하다
論에 云하되
若如是면 卽無有物이요 唯有淸淨法身이니
以遠離有爲法故라 以是義故로 實有我體이니
以不依他緣住故라하다
규봉:
論에 이르되
“수미산의 세력이 높고 멀므로 크다고 하되
‘나는 이 山中의 王이라’고 취하지 않는 것은
분별이 없는 까닭이니 보신불도 이와 같아서
위없는 法王의 몸을 얻었음이니 그러므로 크다고
하는 것이나, 내가 이 法王이라고 취하지 않는 것은
분별이 없는 까닭으로서다” 라고 했다.
그러므로 偈에 이르되
“山王이 취함이 없는 것과 같이 報를 받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고 했다.
몸 아닌 것을 몸이라고 하는 것은 샘이 있고
(有漏) 함이 있는(有爲) 몸이 아니요,
이것은 샘이 없고(無漏) 함이 없는(無爲) 몸인 것이다.
그러므로 偈에 이르되
“모든 샘이 있고 또 함이 있는 것을
멀리 여읜 까닭이라”고 했다.
論에 이르기를
“만약 이와 같으면 곧 만물이 있음이 없음이요
오직 淸淨法身이 있을 뿐이니
함이 있는 모든 것을 여윈 까닭으로써이다.
이런 뜻인 연고로 실로 나의 실체(근본심체)가
있다고 하는 것이니 다른 인연(함이 있는 오온)을
의지하여 머물지 않는(집착함이 없음)
까닭으로써이다” 라고 했다.
---
六祖:
色身雖大나 內心量小면 不名大身이고
內心量大하여 等虛空界라야
方名大身이니 色身이 縱如須彌라도
終不爲大니라
육조:
몸이 비록 커도 속마음의 量이 작으면
큰 몸이라 이름할 수 없고,
속마음의 量이 커서 허공계와 같아야
비로소 큰 몸이라 이름하니,
몸이 비록 수미산 같다 하더라도
마침내 큰 것이 되지 않는 것이다.
---
傅大士:
須彌高且大을 將喩法王身이니
七寶齊圍繞도 六度自相隣이요
(自字는 他本에 作次字라)
四色成山相하고 慈悲作佛因이라
有形終不大요 無相乃爲眞이니라
부대사:
수미산이 높고 또한 큼을 法王身에 비유하니
칠보를 가지런히 두른 것도 六度를 스스로
서로 이웃함이요
四色(청황적백)은 山의 모습을 이루고
자비는 부처 될 인을 지음이라
형상은 마침내 큰 것이 아니요
상이 없어야 이에 참다움이 되느니라.
---
冶父:
設有인들 向甚麽處着인가
說誼:
賴同兎角이니 設有인들 向什麽處着인가
大烘焰裏에는 難停物이로다
야부:
설사 있다 한들
어느 곳을 향해서 손을 댈 것인가?
설의:
토끼 뿔과 같으니 설사 있다 한들
어느 곳을 향해서 손 댈 것인가?
큰 불꽃 속에는 만물이 머물기 어렵도다.
---
청봉착어:
수미산이 크다 하나 진신에
칠보의 보시는 샘이 있고
인을 심어 과를 받고
유위는 환과 같아
경계에 끄달리게 하나
샘이 없는 무위의 실상이 참 큼이니라.
---
冶父:
擬把須彌作幻軀하여 饒君膽大更心麤하여
目前指出千般有라도 我道其中一也無라하리
便從這裏入이니라
說誼:
大身說非身이여 心膽이 大麤生이로다
幸而喚作非身하니 設使喚作是身이라도
我道龜毛滿目前이라하리
伏請諸人이여 須從這裏入하라
야부:
수미산으로 환화 같은 몸뚱이를 삼으려하여
설사 그대가 담이 크고 또 마음이 커서
눈앞에서 천만 가지 가리켜 보여도
나는 그(빈) 가운데 하나도 없다 말하리라.
문득 이 속을 쫓아 들어갈지니라.
설의:
큰 몸을 몸이 아니라 함이여!
심담이 크고 크도다.
다행히 몸이 아니라 불렀으니,
설사 이 몸이라 부를지라도
나는 눈앞에는 거북이 털이
가득하다고 말하리라.
엎드려 청하노니
모든 사람들이여 모름지기
이 도리 속을 쫓아 들어갈지니라
---
청봉착어:
참 큼은 무엇으로도 비유하지 못해
감히 가리켜 비유해 보이는 모두가
법계의 빈 성품가운데 먼지 같으니
무엇이라도 크게 있다 없다 못하니라
산 넘어 연기 남을 보아
연기 일으킨 곳을 쫓아 계합할 지니라.
---
宗鏡:
如來가 續熖然燈이나 實無可得之法이며
菩薩이 莊嚴佛土하나 應無所住之心이라
諸妄消亡이니 一眞淸淨이로다
昔究法華妙旨하다 親感普賢誨言하여
淸淨身心하고 安居求實하여 冥符奧義하니
豁悟前因하여 直得心法兩忘하고
根塵俱泯이로다且道하라
莊嚴箇什麽인가 彈指에 圓成八萬門하고
刹那에 滅却三祇劫이로다
說誼:
雖曰續熖然燈하나 傳介什麽인가 得介什麽인가
雖曰莊嚴佛土이나 所嚴은 何土며 能嚴은 何人인가
能所旣無이니 心應無住이며 心旣無住하면
諸妄消하니 妄旣消亡하면 一眞現이로다
昔究法華妙旨하다 感驗契實直得心法兩亡하고
根塵俱泯이로다 且道하라 莊嚴介什麽인가
一彈指間에 無法不圓이요 一刹那際에 無罪不滅이라
莊嚴淨土事如是이니 而與實相不違背로다
종경:
여래가 지혜의 불꽃(밝은 지혜)을 연등불로부터
이으셨으나 실로 가히 얻은 법이 없으며,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나
마땅히 머무는 바(執着)가 없는 마음이라
모든 망념이 사라져서 없으니
한 가지 참만(眞身)이 청정하도다.
옛날
法華經의 묘한 뜻을 참구하다가 보현보살이
가르친 말씀을 직접 깨달아(親感) 몸과 마음이
청정하고 편안히 머물게 되어 실다움을 구하여
그윽히 심오한 뜻에 계합하니 활연히 과거의
원인(因)을 깨달아 곧 마음도 법도 모두 잊었고
근과 육진이 함께 없어짐을 얻었도다.
자, 일러라!
무엇으로 장엄할 것인가?
손가락 퉁기는 사이(彈指)에
팔만 사천 바라밀 문을 원만히 이루고
찰나에 삼대 아승지겁을 멸하도다.
설의:
비록 지혜의 불꽃을 연등불로부터 이었다 하나
전한 것은 그 무엇이며 얻은 것은 무엇인가?
비록 불국토를 장엄 한다 이르나 장엄할 곳은
어느 국토이며 능히 장엄 하는 이는 누구인가?
能과 所가 이미 없으니 마음이 마땅히 머물지
않으며, 마음이 이미 머물지 않으면 모든 망념이
사라져 없게 되고 망념이 이미 소멸되면
하나의 참만이 나타나도다.
옛날에 법화경의 묘한 뜻을 참구 하다가 영험을
깨달아 얻어서 실다움에 계합해서 바로 마음과
법을 모두 잊고 육근과 육진도 모두 멸함을 얻었도다.
자 말해보라!
장엄한 것이 무엇인가?
한번 손가락을 퉁기는 사이에 법마다
원만하지 않음이 없으며 한 순간에
멸하지 못할 죄가 없음이로다.
정토를 장엄 하는 일이 이와 같으니
실상과 더불어 어긋나지 않도다.
宗鏡:
正法眼中에 無所得이거늘
涅槃心外에 謾莊嚴이라네
六塵空寂을 無人會이니
推倒須彌浸玉蟾하리라
說誼:
莊嚴淨土事如何인가 得正法眼眞宗要로다
何謂正法眼인가 了法無所有이니 法旣無所有이니
一切心亦無라 無心無所得을 是謂涅槃心이니
此眞莊嚴을 人不會하여 取相身土謾莊嚴하도다
故號大身說非身하시어 致令知見無所寄시니라
종경:
正法의 눈 가운데 얻을 것이 없거늘
涅槃心 밖에서 공연히 장엄 한다 하네
육진이 공적 함을 아는 사람 없으니
수미산을 넘어뜨려 달빛(玉蟾)에 잠기게 하리라.
설의:
정토를 장엄 하는 일이 어떠한가?
정법의 눈 참으로 요긴한 종지를 얻음이로다.
무엇을 정법의 눈이라 하는가?
法이 있음이 없음을 요달함이니 일체가
이미 있음이 없을진대 모든 마음 또한 없는지라,
無心과 무소득을 열반심이라 하나니,
이 참다운 장엄을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相을 취하여 몸과 땅에 부질없이 장엄하도다.
그러므로 큰 몸이란 몸이 아니라고 설하시어
알음알이 소견을 부칠 데가 없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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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봉착어:
상이 없으니 내가 없고
능소가 없으니 상이 없도다
상대가 없으니 장엄할 主도
장엄 받을 客도 없느니
공적함을 요달해 정안을 얻어
일체가 비고 고요함을
밝게 알면 무심, 무아가
곧 열반 그것이니
얻을 것도 꾸밀 것도 없는 것이
참 장엄이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