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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마태복음 21:1-11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이 안 식후 첫날 즉 주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날을 기념해서 종려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약 3Km정도 떨어진 베다니에서 하루 밤을 보내신 후에 다음날 벳바게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벳바게에서 제자 두 사람을 맞은 편 마을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맞은편 마을로 가서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거든 풀어서 내게로 끌고 와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귀를 끌고 왔고,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수많은 무리들은 자신들의 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라고 크게 외치며 주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1. 예수님은 만물의 주가 되십니다.
본문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맞은 편 마을로 보내시면서 나귀 새끼를 풀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귀의 주인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세상만물은 예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골로새서 1:16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만물이 주님에 의해서 창조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다 주님이 창조하셨고 주님을 위하여 창조 되었습니다. 주님이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이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피조물인 인간이 할 일은 주인이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시자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마가복음 11장에 보면 제자들이 이 나귀를 발견하고 풀어오려고 하자 사람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이르신 대로 말했습니다. “주게서 쓰신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제자들이 나귀를 가져가는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주님의 요청에 순종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 생각, 내 감정, 내 기분, 내 계획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해드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인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31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날마다 자신을 죽였습니다. 날마다 자아를 부인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렇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자를 넘어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을 따르려면 꼭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24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제자의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람은 주의 말씀과 감동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어제 제가 김장환목사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은혜로운 간증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오래전에 서울 서대문 불광동 장로교회에 황영일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육군 중령으로 제대하고 퇴직금을 받아서 어느 분하고 동업을 하다가 망했습니다. 서대문 영천, 산 비탈길에 작은 방 하나를 얻어가지고 지게를 하나 사서 지게 품팔이를 했습니다. 겨울이 닥쳐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짐 운반해 달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택시 정거장 옆에 한 아주머니가 커다란 짐을 하나 놓고 택시를 기다리는데 암만 기다려도 택시가 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아주머니 제가 그 짐을 지고 갈테니 택시 한 구간 값만 주세요” 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택시가 안 오자 아주머니가 이분에게 짐을 맡겼습니다. 이분이 짐을 지고 아주머니를 따라 한참을 가서 그 집 앞에 다다랐습니다. 아주머니가 택시 한 구간 값으로 60원을 주었습니다. 그 당시는 그랬습니다. 이분이 60원을 받고는 “아주머니, 이렇게 멀리 까지 왔는데 좀 더 처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아주머니가 “택시 한 구간 값만 달라고 해 놓고 왜 여러 소리 하고 그래요.”라고 하더니 짐을 들고 집으로 들어가더랍니다.
돈 60원을 받아서 해가 어둑어둑 넘어 갈 무렵 집에 가려고 하는데 수요일 저녁 예배당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냥 집에까지 가면 예배를 못 드릴 것 같아서 근처 교회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가 끝난 다음에 목사님이 광고를 하시는데 크리스마스가 임박해서 구제 헌금을 한다고 하더니 잠자리채 같은 헌금대를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이 예배당 뒤에 앉았다가 잠자리채 헌금대가 오기 전에 나갔습니다. 그 60원으로 라면 2개를 사야 가족이 끓여 먹을 수 있는 형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분이 예배당에서 나가서 지게를 지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너 헌금하고 가라.”, “못합니다.”, “헌금 하고 가라.”, “못합니다.” 결국 이분이 성령님의 음성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시 예배당으로 돌아가 60원 헌금했습니다. 정말 피 같은 돈을 헌금한 것입니다. 이 분이 헌금을 하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와 보니까 부인이 성경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여보 나왔어.”, “왜 이렇게 늦었어요?”, “예배드리고 오느라고.”, “어서 씻으세요. 제가 밥상 차릴게요.” 밥상이 들어왔는데 반찬이 대여섯 가지에다 흰 쌀밥까지 나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쌀밥 먹기도 힘들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분이 놀라서 “여보, 이게 어찌된 밥상이요?”라고 물으니 부인이 “그냥 어서 드세요. 다 드시고 나서 제가 자초지종을 말씀해 드릴게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밥을 반 쯤 먹고 보니까 애가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누워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니, 쟤 머리가 왜 저래요?”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딸이 학교에서 도시락 안 싸온 사람에게 나누어준 카스테라 빵 하나와 우유 하나를 집에 있는 동생 먹이려고 가방 속에 넣어 뒀답니다. 그런데 오후에 출출해진 반 친구들이 그 빵을 먹겠다고 빼앗으려 해서 수업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얼른 가방을 싸서 도망치듯이 2층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이마가 깨어졌답니다. 선생님들이 그 소리를 듣고 돈 6천원을 걷어서 쌀을 좀 사고 반찬과 미역도 샀다는 것입니다. “지금 먹고 있는 밥이 그 밥이에요.” 그러니 밥 먹다 말고 넘어 가질 않습니다. “하나님, 우리 어른들은 배고픈 것을 참을 수 있지만 저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울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어느 아주머니가 핸드백에서 돈 3만원을 꺼내 “내가 가진 것이 이거 밖에 없어요. 이거 가지고 애 치료하세요” 이러는 겁니다. “아니, 누구신데 우리에게 돈을 주십니까?”, “나는 아까 당신이 왔던 교회에서 안내하는 권사입니다. 내가 안내하다 보니까 당신이 예배를 드리고 들락날락 하며 수상하게 행동을 해서 혹시 간첩이 아닌가 뒤를 따라왔다가 문 밖에서 이야기를 듣고 딱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내일 혹시 지프차가 오면 타고 와 보세요” 하고 가더랍니다. 다음날 정말 지프차가 한 대가 왔는데 그 권사님 남편이 대기업 사장님이었어요. 인터뷰를 했습니다. “학벌이 어떻게 되오?”, “육사 6기생입니다.”, “군대 있을 때 뭐 했습니까?”, “행정을 봤습니다.” 그랬더니 그 회사의 기획실장으로 발령이 내더랍니다. 이 분은 돈 60원을 헌금하라는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을 뿌리치지 못하고 순종했더니 하나님께서 60원보다 수천수만 배 많은 것을 주신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 주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진짜 신앙생활인줄 알고 늘 순종하셔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넘치게 받기를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일반적으로 왕이 성에 입성할 때는 나귀를 타는 것이 아니라 말을 탑니다. 왜냐하면 왕의 위엄 때문입니다. 왕이 초라한 나귀를 타고 입성한다면 그 위엄이 세워지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4절에 보니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였습니다. 본문 4-5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주님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선지자가 뭐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인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이 사건이 있기 약 500년 전에 사역했던 스가랴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근거하면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스가랴 9:9을 보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 말씀에 보면 왕이 오실 것인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이랍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임현수목사님의 글에 보니 다른 종교의 경전에는 예언이 없다고 합니다. 불교의 팔만대장경에도 유교의 논어나 도교의 도덕경에도 예언은 없답니다. 이슬람의 코란에도 예언은 거의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번 예언이 빗나간다면 그 종교 자체가 한꺼번에 무너져버릴 판국이니 어찌 확실하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함부로 예언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성경은 예언의 책입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해석할 수도 있는 애매한 예언이 아니라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예언이 많습니다. 한번만 잘못 되도 단번에 기독교가 무너질만한 예언이 성경에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단 한 번의 실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역사의 주인이 됨을 입증하기 위해 미리 예언을 하신 다음 그 일을 역사의 현장에서 그대로 성취하셨습니다. [과학의 소리]라는 책에서 Peter Stoner는 예언 8개가 한 사람에게 적중되는 수학적인 확률을 과학적으로 10의 17승 분의 1이라”고 했습니다. ‘1/100,000,000,000,000,000’ 거의 확률이 제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메시야에 대한 예언은 300가지가 넘습니다. 과학적인 확률로 따지면 이런 예언들이 예수님에게 성취될 가능성은 거의 불가능 한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에 관한 300여 가지의 예언 중에 주님의 재림과 관련된 예언을 제외하고는 다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늘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가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출생부터 십자가와 부활까지 구약의 말씀을 이루시며 사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는 작은 예수입니다. 예수님께서 신자 안에 오셔서 신자와 하나 되어서 사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통해서 사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처럼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저는 첫 번째 대지에서 예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대지에서도 동일한 결론입니다. 주님이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그 주님이 내 안에서 나를 통해서 사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큰 복이 되는 삶입니다.
3.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힘을 상징하는 코끼리를 타고 입성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승리를 상징하는 말을 타고 입성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5절에 보니 예수님은 하필이면 힘없는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스가랴는 겸손이라고 답합니다. 스가랴 9:9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셨는데 왜 나귀를 타셨다고 했습니까?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셨다고 했습니다.
왕이 겸손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듣고 모든 사람의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며 무엇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리가 왕의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는데 겸손하기는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만물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동일하기가 어렵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을 때에는 겸손하더니 조금 높아지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교만해지고 말이 거칠어지고 다른 사람을 하찮게 보며 무시합니다. 목사가 개척교회 때에는 겸손하더니 교회가 커지고 교만해졌다는 말을 간혹 들었습니다. 그 사람 집사 때에는 겸손하더니 장로 된 후에는 교만해지더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성도가 가난할 때는 겸손하더니 축복 받은 후에는 눈에 뵈는 것이 없더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교회생활을 척하며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령한 척, 사랑하는 척, 온유한 척, 겸손한 척하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경건하게 살기는 해야 하겠는데 경건하게 살 수 없으니까 경건한척합니다. 겸손하게 살기는 해야 겠는데 겸손하게 살 수 없으니 겸손한 척합니다.
어떤 사람이 동물원에 취직했습니다. 죽은 반달곰 대신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새로운 곰이 들어올 때까지 곰 노릇하는 것이었습니다. 월급이 꽤 많았지만 하필이면 더위가 한창일 때라 그 고충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은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엉금엉금 기어 다니거나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다가 몰려오는 사람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어느 날, 한참 늘어지게 자고 부스스 일어나려는데 호랑이가 자기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너무 놀란 나머지 지금 자기가 곰인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나 두 발로 줄행랑을 치며 “사람 살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슬렁거리며 곰을 따라오던 호랑이가 벌떡 두 발로 일어서며 “야 임마. 나도 사람이야!” 하더랍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비참한 것입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바리새인들처럼 경건한 척, 겸손한 척 종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한 척하지 말고 진짜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두 가지를 하십시오. ➀자기를 알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거룩한 것은 예수님의 공로 때문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은 것도, 내가 의로워진 것도, 내가 천국에 가는 것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다 예수님의 공로 때문입니다. 나는 예수님 안에 거할 때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벗어나면 나는 멸망 받아야 할 죄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알면 교만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알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절대 교만할 수 없습니다. ➁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우리 안에 예수님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축복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축복만 받는 사람은 절대 온유와 겸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시고 예수님이 나의 세포 하나하나에 가득할 만큼 예수님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예수님이 겸손하셨듯이 우리도 언제나 겸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대통령 재직하던 시절 한 배우가 링컨의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잠을 자다가 링컨의 기도소리를 들었습니다. 그의 기도의 내용은 단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기도였고 나머지 한 가지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링컨은 사람 앞에서도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링컨은 대통령 시절에도 자신의 신발을 자신이 닦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겸손한 삶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아브라함 링컨을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은 낮추시고 겸손한 사람을 높이십니다. 잠언 18:12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교만하면 멸망합니다. 겸손하면 존귀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교만한 사람과 겸손한 사람을 대하시는 것의 차이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5:5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여러분! 교만하면 안 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대적하면 이길 사람이 없습니다. 다 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겸손해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탈북자 구출하시는 슈퍼맨 목사님을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저는 슈퍼맨 목사님이 너무 존귀해보입니다. 그래서 이분하고 친하고 싶어서 자주 전화통화를 합니다. 어제도 슈퍼맨목사님과 통화했습니다. 제가 전화 통화를 하고 난 후에 역시 주의 일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슈퍼맨목사님이 돈 없을 때에는 탈북자를 4천 명이나 구출하셨습니다. 지금은 돈이 4억이 모금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금년에는 4명밖에 구출하지 못했습니다. 우한 코로나 때문에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길이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탈북자들이 수백 명이 대기하고 있는데 그 분들을 데리고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슈퍼맨 목사님이 교만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한 분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만큼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돈이 있고,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4.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9절에 보면 사람들이 주님께 찬송을 올렸습니다. 내용은 호산나입니다. 호산나의 뜻은 “구원하소서”입니다. 이 말은 주님이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구원자로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권세를 잡으시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므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죽음이 나의 죽이고 그분의 부활이 나의 생명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수고가 아니라 주님의 고난과 주님의 부활을 나의 것으로 받아드리므로 구원을 받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죄와 사망을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이사야 53:5-6을 보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해야 하는 모든 죄와 사망의 짐을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제 작은 아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데 너무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제가 큰 아들을 불러서 큰 아들에게 “네가 대신 들어줘라”라고 말했습니다. 큰 아들이 제 말에 순종해서 작은 아들이 지고 있는 짐을 대신 짊어져줬습니다. 그러면 작은 아들은 그 짐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사망의 짐을 예수님에게 대신 지게 하셨고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사망의 짐을 대신 지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을 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두 형제 강도가 은행에서 돈을 훔쳤습니다. 돈다발을 들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자 동생 강도가 형 강도에게 말했습니다. “형님, 우리가 얼마나 가져왔는지 세어봅시다.” 형님 강도가 말했습니다. “이런 바보 같은 놈, 이 돈을 다 세려면 얼마나 힘들겠냐? 오늘 밤 뉴스에서 알려줄 테니 그때까지 편하게 쉬며 기다려봐라.” 강도들이 은행을 떠난 뒤 은행은 정신없이 요란했습니다. 은행원이 자기 상관에게 빨리 경찰에게 신고하자고 했습니다. 그때 상관이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잠깐, 경찰을 부르기 전에 일단 10억은 우리 몫으로 빼놓고, 70억은 지금까지 우리가 횡령했던 것을 메꾸자.” 상관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강도가 한 달에 한 번씩만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강도가 잡히지 말아야 할 텐데...” 저녁 뉴스에 은행에서 100억이 강탈되었다고 보도가 되었습니다. 강도 형제는 하도 이상해서 결국 돈을 세어보았습니다. 아무리 세어 봐도 20억입니다. 강도형제는 땅을 치며 소리쳤습니다. “우린 목숨을 걸고 20억을 벌었는데, 저놈들은 손가락으로 80억을 버는구나.” 주님의 십자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예화입니다.
이번에는 주님의 대속과 어울리는 예화를 해보겠습니다. 어떤 선교사가 정글 속을 지나다가 강을 만났습니다. 물속에는 수많은 피라니아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피라니아는 턱과 이빨이 강한 물고기로 사람이나 짐승이나 어떤 것이든 물속에 들어오면 수많은 피라니아가 한꺼번에 달라붙어 다 뜯어 먹어 버립니다. 선교사님이 이 강을 어떻게 건너갈까 고민하는데, 한 쪽에서 원주민이 가축을 끌고 오는 것입니다. 원주민이 강을 건너려고 하기에 선교사가 만류했더니, 원주민은 “걱정하지 마시고, 우리 뒤만 따라오면 됩니다.”하며 끌고 온 가축 중 한 마리를 물속에 집어 던졌습니다. 모든 피라니아가 가축에 달려들어 물어뜯는 사이, 원주민은 “바로 이때에 빨리 건너가야 합니다.”하며 선교사와 함께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한 마리의 가축이 원주민과 선교사와 다른 가축들을 살린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 한분의 죽음이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고, 지옥에 던져질 우리들을 살리셨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 백성으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구원자이십니다.
오늘 설교는 나귀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성경을 들고 믿음의 고백을 합시다. “나는 나귀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만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겸손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구원자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성령충만하여 예수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겠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샬롬입니다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