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안 동학의 진산, 백화산(白華山) >
갑오년 태안 원북면 방갈리(학암포)에서
첫 기포를 한 동학도들은
백화산에 진을 갖추고 주변지역에서 동참한 동학도들과
태안관아를 점령하고 군수와, 순무사, 아속들의 목을 쳤다.
이웃한 서산에서도 군수 박정기, 아전들이 참수되었다.
태안, 서산, 당진, 예산, 아산 등 충남 내포 지방에서도
동학군이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고,
승전곡(당진시 면천면 사기소리)과
관작리(예산군 예산읍 관작리) 전투에서는
일본군과 관군을 크게 이겨 사기는 오르고
동학군의 세는 크게 불어났다.
동학군은 내포 지방의 중심인 홍주성을 공격했으나,
우금치의 동학군과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 유회군(儒會軍)에게
죽창과 쇠스랑 등으로 무장한 동학군은
크게 타격을 입고 패하여 이때부터 쫓기기 시작했다.
동학군은 일본군과 관군에 쫓기다가 붙잡히거나 처형되었다.
태안의 주산인 백화산(284m)에 있는 교장바위는
그때 내포 동학군을 잔인하게 죽인 처형지로 알려졌다.
교장바위에서 일본군들이 동학군들을 목 졸라 죽이고,
때려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총살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잔인하고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다.
붉은 피가 계곡을 흘러 선혈이 낭자하고
시신은 골짜기에 가득 쌓였다고 전해온다.
바위 이름도 목을 졸라 죽인다는 교살(絞殺)과
몽둥이로 때려죽인다는 장살(杖殺)에서 유래한다.
백화산에서 피신한 동학군 일부는 근흥면 수룡리 토성산에서
소 여물을 썰 때 사용하는 작두로 목이 잘려서 희생되었다.
그 참혹한 역사적 증거물인 작두 같은 유물들이
현재 독립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고 한다.
교장바위 아래에는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이 세워져
동학군의 넋을 기리고 있다. 추모탑 주변에는
'천도교도정청암김학서송덕비'와
'원암문원덕선생공적비'가 있다.
원암 문원덕 선생은
충청도 내포지역 동학농민군 희생자 명단을 발굴했고,
백화산에 추모탑을 건립하고 매년 위령제를 지냈다.
또한 동학농민군 지도자 기록인
'문장준 역사', '조석헌 역사'를 알렸고,
평생을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에 바쳤다.
문원덕 선생의 조부 문장로 의사는
동학혁명 2차 봉기 당시 태안접주로 태안관아,
승전곡, 신례원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해미, 매현, 홍주성의 전투를 치뤘다.
문원덕 선생의 부친인 문병석 의사는
기미년 3.1혁명 당시 예산 등지에서 만세시위에 앞장섰다.
문원덕 선생의 딸인 문영식 회장은
'동학농민혁명태안군유족회' 회장으로
가업이 되어버린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에 매진하며
추모탑 아래에 현재 마무리 공사중인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 건립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문원덕 선생 위, 아래 4대에 걸쳐 동학정신
선양사업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집안이다.
‘태안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충청지역에 최초로 건립되며,
동학혁명의 상징인 사발통문과 인내천의 정신을 상징화하고,
인근 교장바위와 갑오동학혁명군 추모탑과
어우러지도록 건설되고 있다.
지상 1층에는 기획전시실 및 강당, 추모마당, 상설전시실
등이 들어서고 지상 2층에는 추모탑을 전망하는 휴게실이
설치될 계획이며, 외부공간에는 주변 식생을 끌어들인
정원을 조성해 추모와 휴식을 함께 할 수 있는
‘휴게 및 모임마당’으로 만든다는 방침이다.
'보국안민! 제폭구민! 광제창생! 척양척왜!'
태안 동학농민혁명기념관 : 충남 태안군 태안읍 남문리 산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