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서선생문집(巖棲先生文集) 조긍섭(曺兢燮)생년1873년(고종 10)몰년1933년자중근(仲謹)호암서(巖棲), 심재(深齋)본관창녕(昌寧)초명인섭(麟燮)초자노견(魯見)
巖棲先生文集卷之二十九 / 墓碣銘 / 鄭亨櫓墓碣銘 己酉
*鄭濟鎔 1865 1907 迎日 亨櫓 溪齋
溪齋處士鄭君亨櫓。以丁未冬十一月二日己丑沒世。距其生乙丑。得年四十三。先是予友三山宋子敬亦以疾不起。二君皆江表人譽。同年生卒亦如之。噫何其酷而異也。子敬之葬也。亨櫓賦梅山三章以哭之。其亂曰梅山嶷嶷。振古不泐。碩人溫溫。胡不遐福。道之窮矣。歲且云暮。難諶者天。曷不往愬。其言絶悲。嗚乎。孰謂其筆未燥而奄然不少須。豈亦言之深至而自爲之兆歟。予窮居畏處。慶吊不能百里。子敬之終喪。始爲辭以誄之。心常如有所負。今鄭氏諸孤以予爲父友。遠求墓道之銘。而以韓希寗河叔亨二子所爲狀先焉。予又何忍負。已而歎曰嗟乎。世之衰極矣。正人吾不得而見之矣。得見樂善好學者斯可矣。若斯人者。豈誠易得邪。得之艱而喪之遽。吾如天何哉。亨櫓文忠公圃隱先生之後也。生而端愨溫朗。望之知其爲孝友忠讓人。少孤而家蠱叢穰。能上承下接。左右酬酢。鉅理細察。咸有文節。宗戚賓旅靡不懷服。間則諷簡探義。究致要歸。期欲著之於行。甞著四始戒曰修己始不妄語。處世始不報無道。學問始熟玩。論議始不自是。此其平生所受用者。所從事盡一時賢宿。周旋刮劘。無虛月日。而於后山許公俛宇郭公。獨事以師禮。乃二先生不以諸生畜之。所往復多奧言微指。亨櫓謹敏好禮。如冠昏古儀。人多怠畏不能盡。而必依節次行之。凡鄕里有宗儒俎豆文字之擧。未甞無亨櫓。有發自亨櫓而人不能違者。卽人發之而有藉亨櫓以成者。其畢也罔不允治。至歸以功能則欿然惟恐其及也。自世道橫决。新敎肆行。雖平居名有才學者。率多披靡染溺。亨櫓獨毅然不撓。顧益治舊學曰使生爲華人。死爲華鬼足矣。有以異說見者。卽正色拒之。絶不與通。亨櫓氣惠而色夷。心如其貌。接人慮而後言。有橫逆安然受之。予與之遊久。不知其中有剛特之守如此也。豈所謂柔嘉維則。仁者之必勇歟。亨櫓諱濟鎔。鄭氏本延日人。文忠公有孫曰保。司憲府監察。光廟時以直道坐徙丹城。至諱暄號學圃。以遺逸官縣監。始居于晉。曾祖諱學采。祖諱煥俊。考諱碩基。以孝贈童蒙敎官。妣晉陽柳氏。父曰聖禧。亨櫓娶晉陽河氏士人斗源女。生三男一女。男仁永,德永,夏永。女未行。諸孤旣以禮葬于柏谷新安洞負艮之原。請俛宇公誌其壙。是可以不儉其親矣。銘曰。
鄒聖有稱。二中四下。若稽衰末。誰與等者。猗歟亨櫓。旣栽旣殖。豈惟近炙。寔遠柯則。存爲德鄰。殄興人嗟。有石可泯。俾不胥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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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우선생문집(俛宇先生文集) 곽종석(郭鍾錫)생년1846년(헌종 12)몰년1919년자명원(鳴遠), 연길(淵吉)호면우(俛宇), 유석(幼石)본관현풍(玄風)개명도(鋾)
俛宇先生文集卷之百五十一 / 壙誌 / 鄭亨櫓壙銘 幷序○丁未
老醜而病。尙頑不死。强欲爲壯而康而賢而寃者誌厥幽藏。何其忍耶。思以哀窒。視以淚眯。辭其可文耶。嗚呼。此鄭君亨櫓永休之宅也。亨櫓平日謬私於余。余之慟亨櫓爲私歟。曰否。亨櫓自幼而馴。其姿已不畔於繩墨。長而志于學。究經解義。眼路亭當。明辨精思而反之於身。必以踐履爲急。飭躬正行。動無非禮。制事綜物。細大必謹。咸中於則。纔年廿二而孤。當室幹務。冗瑣叢沓。日不暇給。而猶終始于典學。一念存省。久而益專。從諸耆德游。講質諦認。悅而不倦。如崔溪南元則,鄭艾山厚允,金約泉致受,李剛齋啓道,曺復庵衡七。皆其所矜式也。其請事而誠服者。后山許退而先生也。於是而知千聖心法。亶在主理。篤信而深會之。又懲夫世之爲理者談虛想無。不切於己。以爲事之是處便是理。無是事而徒事口耳則妄而已。値時潰訌。人不自保。異說肆行。士或有變守以徇之者。君益硬不撓曰生爲華人。死爲華鬼足矣。嗚呼如此者。豈不足以完蕢功於九仞而做碩果於剝極耶。蕢而虧其功。碩果而有食之者矣。余之慟其爲私耶。嗚呼此亨櫓君之宅也。千古而下。尙其有同余慟而憐其藏者矣。
君諱濟鎔。亨櫓字也。自號曰溪齋。其先延日人。文忠公圃隱先生諱夢周遠祖也。其孫雪谷諱保。我端宗時監察。後與六臣同坐。光廟特宥之。量移于丹城。仍居焉。其耳孫學圃諱暄。擧遺逸仕止靈山縣監。徙居于晉。又八世而諱碩基。以孝贈童蒙敎官。君之考也。妣晉陽柳氏聖禧女。繼妣則鄭壎贇之女也。君以乙丑歲生。生四十三年而夭。葬于柏谷里新安洞背艮之麓。嗚呼惜也。君娶晉陽河斗源女。擧五子。男三仁永,德永,夏永。女二幼。君事親孝。奉先以誠。肅於閨門。睦於宗黨。交朋友以信。周窮濟貧。常若不足。凡斯文有事。必竭力以經紀之。人有善雖䟽遠敬慕之。如恐不及。橫逆之來。處之怡然而不報也。此皆君之䟽節而塗人耳目者也。余又何覼縷之有。銘曰。
爾志之長。爾命之隘。爾目雖瞑。爾心不昧。尙其夙夜。憂我陽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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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서집 제9권 / 서(書) / 정형로제용 에게 답함 정미년(1907, 순종1) 〔答鄭亨櫓 濟鎔 丁未〕
험한 세월에 지구(知舊)는 항상 꿈속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선향(仙鄕)의 풍토와 인물은 제가 일찍이 머물기도 하였고, 의지하여 묵을 만한 분들이니, 더욱 마땅히 어떻게 마음을 가져야겠습니까. 항상 소할하고 게을러 감히 필묵(筆墨)으로 스스로 소식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만, 이경(彜卿)에게는 때로 소식을 부쳤습니다. 지난봄에 보내셨던 편지는 인후(仁厚)함이 지극하였는데, 지체되어 지금에야 비로소 받았습니다. 만나서 인사도 못 드렸는데 문득 새해가 되었습니다. 마음으로는 감사하고 겉으로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하루에 열 번이나 됩니다. 존형(尊兄)께서는 살펴주실지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날씨가 매우 춥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경서를 공부하는 체후의 동지가 모두 복되시며, 자제분들도 각각 잘 지내겠지요? 저는 매우 간절하게 생각합니다.
긍섭은 어버이를 모시고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근년에 근심과 쓸데없는 일에 마음이 빼앗겨 사소한 정신과 의상(意象)이 매번 쇠약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비록 감히 저의 뜻을 때로 수습할 수 없으나, 바로 큰 조화의 작용이 몰고 가는 것이어서 스스로 발을 멈출 용기가 없습니다.
보내오신 편지에서 추켜세워 칭찬하신 것은 무슨 덕으로 그 만분의 일이나마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이것은 오랜 친구들 가운데, 때때로 한두 사람을 뽑아볼 때 항상 스스로 개연(慨然)히 여기던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오직 다시 다리에 힘을 붙여 서로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데 이르게 하지 않을 뿐입니다. 소년으로 기가 날카로운 자들은 더욱 보호하여 지키기가 어려운데, 아드님의 형제들은 의향은 어떠한지요? 생각건대, 평소에 의로운 가르침이 있었으니 전패(顚沛)하는 데는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어류(語類)》에 대해서는 여러 공께서 도를 호위하는 정성에 많은 축하를 드립니다. 뜻이 있는 사람은 일이 마침내 이루어집니다. 《포은선생문집(圃隱先生文集)》의 새로운 판본을 매우 고맙게 보내주셨는데, 몇 차례 되풀이하여 보니, 규모와 조리가 정연하여 사리에 알맞습니다. 오늘날 이런 몇 가지는 우연이 아닌 듯하니, 요컨대 박(剝)괘의 마지막 양효(陽爻)를 기다릴 뿐입니다. 옛날에 이 문집을 익숙하게 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회포와 감흥이 이때만큼 깊고 큰 적은 없었습니다. 매번 한밤중 잠들지 않고 한두 구절을 읊조리고 외우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쳐 일어나려 합니다. 그 가운데 의심스러운 곳이 있어 손 가는 대로 기록해두어 별지에 적어 보내니, 다시 상세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연보 별본은 매우 훌륭하고 매우 훌륭합니다. 그러나 속본(續本)은 중첩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생각건대, 한쪽 방면의 사람들이 찬집한 것이라 싣지 않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조리를 이루지 못한 곳이 매우 많으니, 지금 갖추어 진달하지 못합니다. 만나서 이야기 할 길이 없으니, 바람결에 슬퍼집니다.
[주-D001] 정형로(鄭亨櫓) : 정제용(鄭濟鎔, 1865~1907)을 말한다. 자는 형로(亨櫓), 호는 계재(溪齋),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경상남도 진주 백곡(柏谷)에서 살았다. 후산(后山) 허유(許愈, 1833~1904)ㆍ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의 문인이다.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에 아들 정덕영(鄭德永)이 계재를 추모하기 위해 지은 사양정사(泗陽精舍)가 있다. 저서로는 《계재집》ㆍ《용학차의(庸學箚疑)》가 있다.[주-D002] 의지하여 …… 분들이니 : 인종(因宗)을 풀이한 것인데, 《논어》 〈학이(學而)〉13장에 “유자가 말하기를, 약속이 의리에 가깝게 하면 그 약속한 말을 실천할 수 있으며, 공손함이 예에 가깝게 하면 치욕을 멀리할 수 있으며, 주인을 정할 때에 그 친할 만한 사람을 잃지 않으면 또한 그 사람을 끝까지 종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有子曰 :信近於義, 言可復也; 恭近於禮, 遠恥辱也; 因不失其親, 亦可宗也.〕”라고 한 데서 인용한 말이다.[주-D003] 이경(彜卿) : 조용상(曺庸相, 1870~1930)의 자이다. 호는 현재(弦齋),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大浦里)에서 살았다. 복암(復菴) 조원순(曺垣淳, 1850~1903)의 아들이고, 계남(溪南) 최숙민(崔琡民, 1837~1905)의 문인이다. 《암서집》 권6에 조용상에 대한 만사(挽詞)가 실려 있다. 저서로는 《현재집》이 있다.[주-D004] 추켜세워 칭찬하신 것 : 《계재집(溪齋集)》 권3의 〈조중근에게 답함 병오년〔答曺仲謹 丙午〕〉에서 “지금은 그렇지 못하여 온 천하가 모두 인의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공맹의 말을 말하기를 꺼려하여 종래의 이른바 호걸의 선비라는 사람들이 모두 친히 그 뜻에 물들어 스스로 무너지고 있으니, 아 그 불인함이 용(俑)을 만든 사람보다 심할 것입니다. 오직 현형께서는 이런 풍조를 당해서도 조금도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고, 그 뜻을 더욱 견고히 하여 구학을 요리하고 있으니, 박괘의 마지막 하나가 현형으로부터 조짐이 시작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습니까.〔今則不然, 普天之下, 皆恥言仁義之敎, 諱說孔孟之言, 向來所謂豪傑之士, 率皆親染其指, 自我作壞, 嗚呼! 其亦不仁, 甚於作俑者矣. 惟賢兄, 當此風頭, 不少撓屈, 益堅其志, 料理舊學, 安知剝上一 果不自賢兄作兆朕乎?〕”라고 칭찬한 것을 말한다.[주-D005] 어류(語類)에 …… 드립니다 : 진주에서 주자어류를 새로 판각한 것을 축하한다는 것인데 이 때 정제용이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그 자세한 전말은 면우 곽종석의 〈주자어류중간발 병오〉에 보인다. 요약하면, 1904년에 진주에 사는 하재곤(河載坤)이 거금을 내고 그 밖에 60여 집안에서 조금씩 돈을 내어 새로 판각하였는데, 이때 고령〔靈川〕의 이두훈(李斗勳)이 소장하고 있던 각본을 빌려 베껴서 이도용(李道容)ㆍ정제용(鄭濟鎔)ㆍ하겸진(河謙鎭) 등이 교감하여 2096판으로 1905년 가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주-D006] 박(剝)괘의 …… 뿐 : 어두운 세상 뒤에는 반드시 밝은 세상이 온다는 뜻으로, 박괘(剝卦)는 모두 음효(陰爻)이고 상효(上爻)만 양(陽)으로서 이 양 역시 곧 떨어져나갈 운명에 있어 소인이 지배하는 세상을 말하는데, 이것이 순음(純陰)인 곤괘(坤卦)를 거쳐 복괘(復卦)가 되면 다시 양의 기운이 아래에서부터 시생(始生)하여 희망이 있게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주-D007] 연보 별본 : 정재용이 자신의 아버지 정석기(鄭碩基) 문집인 《가헌실기(稼軒實記)》 가운데 연보 별본을 만들어 심재에게 교정해 달라고 한 것을 말한다. 지금 《가헌실기(稼軒實記)》에는 연보가 보이지 않는다.[주-D008] 한쪽 …… 것입니다 : 《계재집(溪齋集)》 권3의 〈조중근에게 답함〔答曺仲謹〕〉에 의하면, 연보 별본을 자신이 지었지만, 유식한 제가들에게 질정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와 다른 의견을 싣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 남춘우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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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齋集
[刊記]
昭和十年十二月二日印刷
昭和十一年一月二十日發行
慶南山淸郡丹城面南沙里二五六
編輯兼發行者鄭夏永
慶南山淸郡丹城面南沙里二五八
印刷兼發行所泗陽精舍
慶南晉州郡大坪面硯山里三五八
印刷者安定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