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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忠錄跋 庚寅 1890 跋 申得求 農山集
신득구(申得求)생년1850년(철종 1)몰년1900년(고종 37)자익재(益哉)호농산(農山), 온지(溫知), 화당(華堂)본관고령(高靈)특기사항임헌회(任憲晦)의 문인. 송병선(宋秉璿), 전우(田愚), 서정순(徐政淳), 안정회(安貞晦) 등과 교유
農山先生文集卷之八 / 題跋 / 五忠錄跋 庚寅(1890,고종27)
荀淑正言於梁氏用事之日。而荀彧託跡曹操。古今此類踵相接焉。嗚呼其可惜也。嗚呼其可懼也。鷄林鄭氏。老松亭,玉溪,城隱,梅軒,谷口五公。或處或出。其揆不一。而惟視忠義所在。成就之。天之降才爾殊於鄭氏歟。何古今所難者易之。祖孫傳法。兄弟叔侄聯美。使言者長言短說。布諸一世而無愧色。盛哉盛哉。夫治亂相乘理也。顧今國家昇平日久。固無可慮。而萬一一日邊塵忽驚。則奮忠仗義。齊頭並足而出者。安知不爲鄭氏乎。然則聯而書之。豈五公已哉。爲鄭氏諸公願之。鄭生琯鉉篤學力行。吾黨之士。莫敢先焉。間懼是錄之紕繆多失。改寫以俟剞劂。余嘉之而題其尾云。
鄭知年과 鄭思竣 등의 충의를 기린 경주정씨의 「五忠錄」
慶州鄭氏五忠錄 | 鄭濱, 鄭思竣, 鄭思竑, 鄭承復, 鄭知年 | 鄭琯鉉 |
老松亭,玉溪,城隱,梅軒,谷口五公
정지년(鄭知年) | 1395 | 1462 | 경주(慶州) | 유영(有永) | 노송정(老松亭) | 정렴(鄭廉) |
鄭承復 | 1520 | 1580 | 慶州 | 景胤 | 玉溪 |
鄭思竣 | 1553 | 1599 | 慶州 | 謹初 | 城隱 |
鄭思竑 | 15?? | 16?? | 慶州 | 汝仁 | 梅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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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시집 제51권 / 시류(詩類)
정 대사성(鄭大司成) 효항(孝恒) 이 부친 시운(詩韻)에 붓을 달려 차하다 4수
번화한 땅 남원에는 별천지가 있으니 / 佳麗南原別有天
그대 그리면서 못 만난 게 또 삼 년일세 / 思君不見又三年
한 장의 서신에 천금의 가치가 있거니 / 一封信字千金直
온 사람에게 당부하노니 잘 전해 다오 / 說與來人仔細傳
살구꽃 복사꽃 곱게 핀 또 한 봄이 오니 / 杏艶桃嬌又一年
봄바람에 버들개지는 솜보다 더 하얗네 / 春風柳絮白於綿
가련도 하여라 이와 같이 좋은 시절에 / 可憐如此好時節
서로 만나 한번 웃지 못한 게 한이로세 / 恨不相逢一粲然
출처와 행장은 절로 천명이 있는 것이라 / 出處行藏自有天
산림 속에 편히 누워 세월을 보내는구려 / 山林高臥送流年
성군께서 한창 현상 구할 꿈에 급하시니 / 聖君方急思賢夢
부르는 조서를 명일에 역사가 전할 걸세 / 徵詔明朝驛使傳
계절의 경치는 금년도 흡사 거년 같아서 / 雲物今年似去年
천애의 꽃다운 풀도 파랗게 무성하건만 / 天涯芳草綠芊綿
백발의 나이로 반갑게 서로 만나는 곳에 / 白頭靑眼相逢處
술자리 벌여 즐김이야 어찌 우연이겠나 / 樽酒開歡豈偶然
[주-D001] 정 대사성(鄭大司成) : 정효항(鄭孝恒)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정렴(鄭濂)의 손자이고 정지년(鄭知年)의 아들이다. 1451년(문종1) 생원으로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고, 1455년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부교리로서 좌익 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고, 1467년(세조13) 지평이 되었다. 성종(成宗) 때 저자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국통감(東國通鑑)》 편수에 참여하고, 벼슬이 대사성을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주-D002] 성군(聖君)께서……급하시니 : 은 고종(殷高宗)이 상제(上帝)가 어진 보필을 내려 주는 꿈을 꾸고는, 꿈에 보았던 그 형상으로 천하에 널리 구한 끝에 마침내 부암(傅巖)에서 현상(賢相) 부열(傅說)을 얻게 되었던 데서 온 말이다. 《書經 說命》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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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 세조 3년 정축 > 8월 12일 > 최종정보
세조 3년 정축(1457) 8월 12일(계묘)
03-08-12[02] 정연ㆍ김혼지ㆍ권지 등은 원종 공신 2등으로 정흥손은 3등으로 녹훈하게 하다
의정부(議政府)에 하교(下敎)하기를,
“병조 판서(兵曹判書) 정연(鄭淵)ㆍ한성부 윤(漢城府尹) 김혼지(金俒之)ㆍ우부승지(右副承旨) 권지(權摯)ㆍ관찰사(觀察使) 이예손(李禮孫)ㆍ절제사(節制使) 김사우(金師禹)ㆍ참의(參議) 한전(韓磌)ㆍ행 상호군(行上護軍) 권기(權技)ㆍ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어득해(魚得海)ㆍ안무사(按撫使) 설효조(薛孝祖)ㆍ부사(府使) 이사증(李師曾)ㆍ별감(別監) 박덕산(朴德山) 등은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으로 녹훈(錄勳)하라.
판사(判事) 정흥손(鄭興孫)ㆍ손번(孫蕃), 훈련관사(訓鍊觀使) 이수철(李守哲)ㆍ대호군(大護軍) 권숭후(權崇厚), 군사(郡事) 임계중(林繼中), 행 부사정(行副司正) 양계동(楊繼童), 장령(掌令) 김계로(金季老)ㆍ최청강(崔淸江)ㆍ구신충(具信忠), 헌납(獻納) 구종직(丘從直)ㆍ권안세(權安世), 정언(正言) 최종복(崔宗復), 호군(護軍) 황보신(黃保身)ㆍ이직경(李直卿)ㆍ주유비(朱有斐), 경력(經歷) 주백손(朱伯孫), 호군(護軍) 동옥(童玉), 부지(副知) 신자승(申自繩), 행 사직(行司直) 경여(慶餘), 군사(郡事) 임관(任寬), 정언(正言) 이숭원(李崇元)ㆍ임수겸(林守謙), 행 사직(行司直) 노삼(魯參), 진무(鎭撫) 구치명(具致明), 군사(郡事) 정자양(鄭自洋), 판관(判官) 양연(楊淵), 군사(郡事) 정옥경(鄭沃卿), 사직(司直) 변상빙(邊尙聘), 부사 주신명(周新命), 판관(判官) 김우묘(金雨畝), 박사(博士) 김천(金賤), 현감(縣監) 최저(崔渚)ㆍ윤지(尹志), 부사직(副司直) 전태산(全泰山), 별좌(別坐) 최승정(崔承靖), 행 사직(行司直) 안지선(安至善)ㆍ최유강(崔有江), 부령(部令) 유열(柳悅), 행 사직(行司直) 전계손(全繼孫), 부사직(副司直) 이호산(李好山), 별좌(別坐) 조운종(趙云從)ㆍ최옥윤(崔玉潤)ㆍ이중연(李重連)ㆍ남손(南蓀)ㆍ우계충(禹繼忠)ㆍ조금(趙嶔)ㆍ최치우(崔致雨), 현감(縣監) 주봉명(周鳳鳴), 행 알자(行謁者) 송귀행(宋貴行), 부사정(副司正) 유배(柳培), 무공랑(務功郞) 윤성(尹誠), 전 사용(司勇) 이노생(李魯生), 계공랑(啓功郞) 이연(李涓), 승사랑(承仕郞) 이계영(李繼榮), 녹사(錄事) 하연명(河淵明), 선무랑(宣務郞) 전오상(全五常), 무공랑(務功郞) 김계박(金繼朴)ㆍ장유성(張有誠)ㆍ정하손(鄭賀孫), 행 주부(行注簿) 최한(崔漢)ㆍ강계선(姜繼善)ㆍ방계충(方繼忠), 무공랑(務功郞) 구신(仇愼), 사직(司直) 안극변(安克辨), 현감(縣監) 이조원(李調元), 사용(司勇) 성윤문(成允文)ㆍ고태보(高台輔), 사정(司正) 허손(許蓀), 사용(司勇) 유인로(柳仁老), 행 사정(行司勇) 이유분(李有糞), 통덕랑(通德郞) 정복(鄭復), 통선랑(通善郞) 장자학(張自學), 봉직랑(奉直郞) 이종연(李從衍), 주부(注簿) 김효종(金孝宗), 선무랑(宣務郞) 이양산(李陽山), 사정(司正) 김정(金丁), 통사랑(通仕郞) 이사명(李思明), 종사랑(從仕郞) 염승원(廉承原), 행 사정(行司正) 권당(權塘), 사정(司正) 김양수(金楊秀), 행 사용(行司勇) 장자륜(張自綸), 승의 교위(承義校尉) 엄맹의(儼孟義), 행 부사정(行副司正) 강맹리(康孟理), 녹사(錄事) 방순문(房恂文), 별시위(別侍衛) 최진(崔津), 녹사(錄事) 이효상(李孝祥), 서방색(書房色) 김불종(金佛從), 시일(視日) 고윤혁(高允赫), 통사랑(通仕郞) 최치선(崔致善), 부사정(副司正) 이승욱(李承旭), 대부(隊副) 신만년(申萬年), 대장(隊長) 김준행(金俊行), 사용(司勇) 조덕생(趙德生), 승사랑(承仕郞) 이무경(李務敬), 대장(隊長) 김선(金善), 반감(飯監) 김내(金乃)ㆍ최수정(崔壽丁), 전리(典吏) 박충서(朴忠恕)ㆍ황언중(黃彦中), 사용(司勇) 이승조(李承祖), 종[奴] 이춘경(李春敬)ㆍ별감(別監) 윤보(尹寶), 학생(學生) 오효정(吳孝貞)ㆍ간문질(簡文質)ㆍ이매(李梅)ㆍ내자시(內資寺) 종[奴] 오마지(吾磨知), 별감(別監) 강원만(姜元萬)ㆍ초산호(抄山胡)ㆍ한득인(韓得仁), 직장(直長) 최승종(崔承宗), 윤(尹) 최윤형(崔允亨), 판사(判事) 오축(吳軸), 윤(尹) 송휴명(宋休明), 소윤(少尹) 남윤(南倫), 판관(判官) 박보석(朴保錫), 주부(注簿) 안관후(安寬厚)ㆍ조효생(趙孝生)ㆍ우효신(禹孝新)ㆍ김중로(金仲老)ㆍ강숙경(姜叔卿)ㆍ김귀달(金貴達)ㆍ박사분(朴思賁)ㆍ강안복(姜安福)ㆍ강순(姜循)ㆍ이영유(李永蕤), 판관(判官) 정인종(鄭麟踵)ㆍ이균(李畇)ㆍ조운공(趙云恭)ㆍ권우(權虞), 주부(注簿) 이윤(李潤), 겸주부(兼注簿) 신자의(申子儀)ㆍ김임(金臨), 주부(注簿) 송경(宋瓊)ㆍ정지년(鄭知年)ㆍ홍견(洪甄)ㆍ김승중(金承重), 행령(行令) 민신지(閔愼之), 행 부사직(行副司直) 유덕(柳德)ㆍ노식(盧湜)ㆍ신사봉(辛斯鳳)ㆍ박홍신(朴弘信), 부사직(副司直) 정의손(鄭義孫), 행 사정(行司正) 유지신(柳之信), 행 부사정(行副司正) 남육(南陸)ㆍ지혼(池渾), 행 사직(行司直) 유종인(柳宗姻), 행 사정(行司正) 최덕소(崔德紹), 행 사용(行司勇) 박소조(朴紹祖), 별좌(別坐) 박흠(朴欽)ㆍ김이(金理), 직장(直長) 홍제년(洪濟年)ㆍ이심(李諶), 부직장(副直長) 이운석(李云碩), 겸직장(兼直長) 이해(李垓), 행 부승(行副丞) 윤계은(尹季殷), 행 승(行丞) 이신효(李愼孝), 학생(學生) 이흥달(李興達), 역자(驛子) 허득진(許得進)ㆍ이철(李哲)은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으로 녹훈(錄勳)하라.”
하였다.
[주-D001] 부지(副知) : 첨지(僉知).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김구진 (역)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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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 성종 12년 신축 > 1월 4일 > 최종정보
성종 12년 신축(1481) 1월 4일(기묘)
12-01-04[05] 계림군 정효상의 졸기
계림군(雞林君) 정효상(鄭孝常)이 졸(卒)하였다.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하며 예장(禮葬)하기를 전례(前例)와 같이 하였다. 정효상의 자(字)는 가구(可久)이고, 경주(慶州) 사람으로, 증 의정부 좌찬성(贈議政府左贊成) 정지년(鄭知年)의 아들이다. 태어나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였는데, 장성하여서는 저술(著述)에 능숙하였다. 경태(景泰) 신미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갑술년에 문과(文科)의 제 1인으로 발탁되어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에 뽑혀서 보임(補任)되었으며,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ㆍ이조 좌랑(吏曹佐郞)ㆍ세자 문학(世子文學)을 역임(歷任)하였다. 을유년에 세자 필선(世子弼善)으로 승진되었으며, 병술년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였고, 무자년에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남이(南怡)가 반란(叛亂)을 도모하다가 복주(伏誅)되자 그 책공(策功)으로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의 호(號)를 내려 주었으며, 가선 대부(嘉善大夫)를 더하여 계림군(雞林君)으로 봉(封)하였다. 주상(主上)이 즉위하여서는 여러 번 전임(轉任)하여 도승지(都承旨)가 되었으며, 신묘년에 순성 명량 좌리 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에 책훈(策勳)되었고, 정헌 대부(正憲大夫)를 더하여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 내직(內職)으로 들어와서는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었고, 얼마 있다가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옮겼다. 정유년에는 옮겨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고, 기해년에 다시 계림군(雞林君)으로 봉(封)해졌다가 이때에 와서 졸(卒)하였는데, 나이가 50세이다. 시호(諡號)를 제안(齊安)이라고 하였는데, 도와서 함께 완성시킴이 제(齊)이고, 너그럽게 화평함이 안(安)이다. 정효상은 형제(兄弟)들과 화목하게 지냈으므로 향당(鄕黨)에서 그의 우애(友愛)스러움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나라 풍속에 비록 이성(異姓)의 사이라도 근친(近親)은 피(避)하고 혼인(婚姻)을 하지 않았는데, 정효상이 처(妻)의 5촌(寸)인 최영호(崔永灝)를 사위로 삼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의 재물을 좋아하여 예(禮)를 무시한 처사를 기롱(譏弄)하였다. 처(妻)인 기씨(奇氏)의 성품이 매우 사나왔으므로 정효상이 두려워하고 평생토록 첩(妾)을 두지 못하였으며, 집안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주-D001] 경태(景泰) 신미년 : 1451 문종 원년.[주-D002] 갑술년 : 1454 단종 2년.[주-D003] 을유년 : 1465 세조 11년.[주-D004] 병술년 : 1466 세조 12년.[주-D005] 무자년 : 1468 예종 즉위년.[주-D006] 복주(伏誅) : 형벌에 복종하여 죽음을 당함.[주-D007] 책공(策功) : 책훈(策勳).[주-D008] 신묘년 : 1471 성종 2년.[주-D009] 정유년 : 1477 성종 8년.[주-D010] 기해년 : 1479 성종 10년.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조명근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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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 성종 12년 신축 > 6월 17일 > 최종정보
성종 12년 신축(1481) 6월 17일(경신)
12-06-17[02] 정효종이 자신은 탐오하지 않다는 상소를 올리자 영돈녕 이상에게 보이라 명하다
전 내자시 정(內資寺正) 정효종(鄭孝終)이 상언(上言)하기를,
“근일 법사(法司)에서 신(臣)을 탐오(貪汚)하다고 지적하여 논박하니, 신은 몹시 답답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신은 본래 남원(南原)의 포의(布衣)인데, 신의 아비 정지년(鄭知年)이 신들 형제를 낳아 기르면서 무애(撫愛)하는 여가에 반드시 이르기를, ‘학문을 모르면 성조(聖朝)에서 영달(榮達)할 수 없다.’ 하고, 신의 형과 신이 겨우 말하고 웃을 줄 알게 되자, 곧 시서(詩書)를 가르치되, 때로 혹 게을리하면 곧 매를 때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라는 뜻으로 말하여 가훈(家訓)을 세웠습니다. 신들 형제가 아비의 훈계를 잊지 않고 충심(衷心)에 새겨 애써 부지런히 배워 다행히 신과 신의 형이 모두 과거(科擧)에 급제하였고, 처음 벼슬하면서부터 그 뒤로 형제가 대면하면 번번이 충효로써 서로 경계하여 지하(地下)에 있는 아비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라고, 성조(盛朝)에서 충성을 다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난 3월에 본향(本鄕)의 공리(貢吏)가 가져온 공물(貢物)이 방납(防納)에 관계되었으므로, 신이 법에 따라 죄를 다스리려 하였더니, 공리가 도리어 신을 청렴하지 않다고 정소(呈訴)하여 법사에서 고문(拷問)하기를 계청(啓請)하였습니다. 성감(聖鑑)의 밝으신 은혜를 입어 신에게 대문(對問)하도록 허가하시고, 마침내 그 고발한 공리를 형문(刑問)하여 속인 것이 저절로 드러나게까지 하셨습니다. 그 때에 예감(睿鑑)이 비추시는 바가 아니었더라면, 신의 목숨은 이미 형장(刑杖)을 맞다가 끊어져서 끝내 변명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어서 듣건대 법사에서 신의 벼슬을 좌천하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또 성은(聖恩)을 입어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합니다. 성은이 이에 이르렀으니, 신이 자신을 어루만지고, 돌이켜 생각하며 감격하여 말을 못하고 하늘에 맹세하여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듣건대 법사에서 신의 탐오를 거론하여 아뢰었으나, 성상께서 신을 애매하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재단하지 않으시고, 조정의 신하들에게 물은 뒤에 신의 벼슬을 갈도록 명하셨다 하니, 다시 살려 주신 은혜가 하늘처럼 끝이 없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신이 급제한 뒤로 상(喪)을 당하여 정직(停職)한 기간을 빼고, 승문원(承文院)의 직무를 맡은 것이 모두 6년, 동부 주부(東部主簿) 4년,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 5개월,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4년, 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 4년,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 5개월, 참교(參校) 3년이었고, 올봄에 또 이문(吏文)을 제술(製述)하는 데 우등(優等)하였다 하여 승진해서 본직(本職)이 되었으니, 전후 벼슬살이한 것이 모두 20여 년입니다. 그 사이에 사방에 봉사(奉使)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사년에는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매우(梅佑)를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인물을 쇄환(刷還)한 것을 주문(奏聞)하였으며, 병술년 가을에 특별히 세조께서 신을 겸예문(兼藝文) 가운데에 발탁하여 주신 은혜를 입어 신에게 명하여 전라도에 가서 폐막(弊瘼)을 묻게 하셨는데, 신이 거핵(擧劾)한 불법을 행한 자가 모두 5인이었으며, 그해 겨울에 또 범법(犯法)한 수령(守令)을 추고(推考)하는 일로 본도(本道)에 갔습니다. 정해년에는 어유소(魚有沼)를 따라 평안도에 가서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하였으며, 무자년 가을에는 예종(睿宗)께서 즉위하여 반사(頒赦)하는 글을 신이 받들고 영안도에 갔으며, 그해 겨울에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가 되어 김영유(金永濡)ㆍ양순석(梁順石)을 따라 기축년까지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경인년 가을에는 재상전 검심관(災傷田檢審官)으로 전라도에 갔으며, 신묘년에는 이극배(李克培)를 따라 본도에서 진휼(賑恤)하였습니다. 임진년 가을에 또 어유소를 따라 영안도에 가서 올적합(兀狄哈)을 토벌하고, 명에 의하여 군사를 파하고 돌아왔으며, 그해 겨울에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두 진영(鎭營)의 군사를 맡았습니다. 계사년에는 왜사(倭使)를 경상도에 호송하였으며, 갑오년에는 서장관으로서 김질(金礩)을 따라 덕종(德宗)의 고명(誥命)을 주청하고 돌아왔습니다. 병신년 가을에는 형 정효상(鄭孝常)을 따라 북경(北京)에 가서 진하(進賀)하였으며, 그해 가을에 전라좌도(全羅左道)에서 점마(點馬)하였으며, 또 이듬해 봄에는 여제(厲祭)의 헌관(獻官)으로서 황해도에 갔으며, 가을에는 전라우도에서 점마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말하면, 신이 경직(京職)ㆍ외직(外職)을 역임한 것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고, 세월도 오래지 않다고 할 수 없는데, 신이 탐욕하다는 이름이 어찌하여 당시에 드러나지 않고, 다만 오늘에서야 드러나겠습니까?
신이 과연 탐오하다면, 전후의 정조(政曹)에도 이목(耳目)이 있었을 것인데, 신에게 어찌하여 사정(私情)을 두고 20여 년 동안 9품에서 정3품에 이르도록 속여서 주의(注擬)하여 왔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열 눈이 나를 보고 열 손이 나를 가리키면 얼마나 두렵고 조심스럽겠는가?’ 하였거니와, 은미(隱微)한 사이나 혼자 있는 곳일지라도 하는 일을 끝내 엄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야(暮夜)에 바친 금(金)도 오히려 사지(四知)의 두려움이 있는데, 신이 역임한 경직ㆍ외직에 다 이목(耳目)이 있으니, 신의 탐오한 행실을 신이 숨기려 하더라도 어찌 끝내 감출 수 있겠습니까? 신이 서울에서 탐욕하였다고 한다면, 거친 각사(各司)에 동료가 있고, 아전(衙前)ㆍ고자(庫子)가 있으니, 신이 탐욕을 부렸다면 그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어느 때에 신이 어느 관사(官司)를 맡았는데 어느 동료가 보았으며, 어느 아전 종[奴]을 시켜 어떤 물건을 긁어들여 썼느냐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신이 외방(外方)에서 탐오하였다고 말한다면, 신이 거쳐온 각도(各道)에 크면 감사(監司)가 있고 작으면 수령(守令)이 있으니, 신이 탐욕을 부렸다면 반드시 이들에게 청하고서야 얻었을 것입니다. 어느 때에 어떤 사명(使命)으로 가서 어느 관부(官府)에 청하여 어떤 물건을 얻어 썼느냐고 물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출사(出使)할 때에는 거느리는 자가 신의 집의 종이 아니며, 짐을 싣는 것이 신의 집의 말이 아니니, 신이 얻은 것이 있다면 그 주고 받고 나른 것이 저절로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낱낱이 밝혀 물으면, 그들이 어찌 소신(小臣)을 위하여 꾸미고 조정(朝廷)을 속여 숨기려 하겠습니까? 그럴 리가 만무합니다.
더구나 신은 전에 이극배(李克培)ㆍ어유소(魚有沼)ㆍ김영유(金永濡)의 종관(從官)이었는데, 사신과 종관은 따로 거처하고 따로 다니는 것이 아니고 늘 서로 수반하므로, 그 짐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신이 얻은 것이 있다면 같은 길을 서로 수반한 사람으로 위로는 당상관(堂上官)이 있고, 중간에는 종관(從官)이 있고, 아래로는 복례(僕隷)가 있으므로 서로 모를 리가 만무합니다. 이극배ㆍ어유소ㆍ김영유와 같은 때의 종관이었던 김계종(金繼宗)ㆍ원보곤(元甫崐)ㆍ김극유(金克忸) 같은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듣고 본 것이 있으면 또한 어찌 전하께 숨기려 하겠습니까? 신이 따라갔던 김질(金礩)ㆍ매우(梅佑)ㆍ양순석(梁順石)으로 말하면 이미 죽었으나, 북경에 간 부사(副使)로 이계손(李繼孫)ㆍ박양신(朴良信)이 있고, 또 통사(通事)몇 사람이 있으니, 만리를 갈 적에 신의 탐오한 것을 스스로 감추려 하더라도 그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낱낱이 물으면 신의 진위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저 사양하고 받고 얻고 주는 것은 선비의 큰 예절이므로, 신이 어리석기는 하나 왕래를 대강 아는데, 탐욕을 부려 한없이 요구하여 싣고 돌아와 살림을 꾀하는 일을 신이 어찌 감히 남이 싫어하는 것을 무릅쓰고 차마 하겠습니까? 신이 하고 싶더라도 신이 명을 받은 신하로서 탐욕을 못 견디어 한 번 처신을 잘못하면 그들이 얼굴에 침을 뱉고 응하지 않을 것이니, 신이 탐오하다 하더라도 애써서 감히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정리가 그러하고 사세가 그러한 것입니다. 다만 신의 성품이 본래 솔직해서 스스로 닥달하지 못하며, 벗들 사이에서도 마음에 품은 것을 숨기어 참지 못하고 거부와 찬성을 뜻대로 나타내며, 혹 남의 잘못을 보면 곧 숨김 없이 배척하므로, 사람들이 혹 신을 우직하다고 비평합니다. 그러나 신은 바른 도리로 사람을 섬기는데, 내가 패손(敗損)된들 무엇이 상심되겠는가 하고 스스로 생각하였는데, 신의 이 태도는 동료가 아는 바입니다. 봉사(奉使)할 때에는 외관(外官)이 혹 영송(迎送)에 실례(失禮)하거나 공무에 시기를 늦추면, 신의 망령된 생각에 ‘왕인(王人)은 미천하더라도 서열이 제후(諸侯)의 위이니, 신이 미천하기는 하나 이미 명을 받은 신하이므로, 헛되게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할 수 없다.’ 하여 혹 그 일을 맡은 아전을 매질하거나 수령을 면전에서 꾸짖어 조금도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원한이 쌓여서 비방을 만들며, 비방이 모여서 비평을 일으켜 미워하는 한 사람이 앞장서서 말하면, 모르면서 같이 어울리는 자들이 서로 모여들어서 오늘의 악명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은 신이 스스로 얻은 것입니다.
요즈음 법사(法司)에서 탄핵하는 논의에 어찌 근거가 없겠습니까? 혹 눈으로 보았다면 반드시 분명하게 살폈을 것이며, 전해 들었다면 그것을 말하는 자가 어찌 근거 없는 일인데도 말하였겠습니까? 자모(慈母)로서 아들을 아는데도 오히려 살인(殺人)을 의심하였는데, 법사가 밝을지라도 어찌 능히 거꾸로 살펴서 신에게 의심을 두지 않겠습니까? 신은 신을 조옥(詔獄)에 내려 신의 탐오한 절차를 상세히 밝히기를 바랍니다. 신이 변명하면 신에게 다행이겠으나, 변명하지 못한다면 임금을 속인 죄를 어찌 감히 피하겠습니까?
신이 생각하건대, 일국의 신민이 오늘의 성명(聖明)을 만난 것은 참으로 천 년에 한 번 있을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이때에 애매한 정상을 변명하지 못한다면, 변변치 못한 신은 그만이겠으나, 아마도 뒷날 억울한 일을 당하여 원망을 품은 자들이 변명하지 못하여 화기(和氣)를 손상해서 재앙을 부르는 것이 오로지 이로 말미암을 듯합니다. 신이 천위(天威)를 무릅쓰고 변명하려고 생각하는 까닭은 다시 차임(差任)될 것을 생각하여 직위(職位)와 녹봉(祿俸)을 탐내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전하께서 신이 애매하다는 것을 밝게 아시어 특별히 명하여 버려두게 하셨는데 신이 도리어 이 악명을 얻었고, 선부(先父)가 변변치 못한 신을 교육하여 성취해서 지금에 이르렀는데 신이 또 이 악명을 얻었으니, 이것은 위로 전하의 총명을 손상하고, 아래로 선부(先父)의 가르침을 저버린 것이며, 충과 효를 하나라도 잃으면 죽어도 남는 죄가 있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오장(五臟)이 찢어져 무너지는 듯 억울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 재단하여 시행하소서.”
하였는데,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대간(臺諫)에게 보이라고 명하였다. 정창손(鄭昌孫)ㆍ홍응(洪應)이 의논하기를,
“정효종(鄭孝終)의 탐오(貪汚)한 일을 신은 예전에 전혀 눈으로 보지 못하고 들어서 알지도 못하였는데, 이제 대간과 홍문관(弘文館)의 여러 선비의 말로 말미암아서 알았습니다. 과연 그 말과 같다면, 탐오한 형적은 한두 사람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곧 공론(公論)입니다. 이제 벌주지 않고 다만 파직하여 내치고 말았거니와, 오래 지난 일은 다시 따지기 어렵겠습니다.”
하고, 한명회(韓明澮)ㆍ심회(沈澮)ㆍ윤사흔(尹士昕)ㆍ노사신(盧思愼)ㆍ이극배(李克培)가 의논하기를,
“정효종의 탐오한 일을 전에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들은 것이 있다면, 이제 하문(下問)을 받았는데, 어찌 감히 정효종을 비호하여 숨기겠습니까? 이제 대간이 탄핵하는 일을 들으니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밖의 것은 알 수 없습니다마는, 영안도 경차관(永安道敬差官) 때에 곰가죽[熊皮] 18장(張)을 얻고 이성현(利城縣)에 이르러 그 고을 수령 김정(金淀)에게 말하기를, ‘내가 각 고을에서 18장을 얻었는데, 더 얻어서 20장을 채우겠다.’ 하므로, 김정이 더럽게 여겨 관아(官衙)에 곰가죽이 있어도 주지 않았다 하나, 곰은 그 도(道)에 드문 것인데, 그 가죽 18장이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이것을 미루어 보면 그 밖의 것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대저 전해들은 일이란 늘 사실과 어그러지는 것이 많은데, 정효종이 없는 일로 탄핵당하여 종신토록 뜻을 얻지 못하고 억울한 마음을 품은 것을 영영 풀지 못한다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니, 유사(攸司)에 내려 낱낱이 국문(鞫問)하게 하소서. 변명하지 못한다면 전효종에게도 무슨 뒷말이 있겠습니까?”
하고, 윤호(尹壕)는 의논하기를,
“대간ㆍ홍문관이 들은 것이 다 바른 데에서 나왔다면 폐기하고 서용(敍用)하지 않는 것이 옳겠으나, 들은 것에 조금이라도 분명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옳지 않을 듯 합니다. 정효종은 본래 문신(文臣)이고 역임한 지 이미 오랜데, 하루아침에 상세히 국문하지 않고 파직한 것은 미안(未安)합니다.”
하고, 조간(曹幹)ㆍ강자평(姜子平)ㆍ박숙달(朴叔達)ㆍ경준(慶俊)ㆍ유윤겸(柳允謙)ㆍ이평(李枰)ㆍ정이공(鄭而恭)ㆍ박원수(朴元秀)ㆍ서규(徐赳)ㆍ조석보(曹碩輔)ㆍ정광세(鄭光世)가 의논하기를,
“정효종의 탐오함은 신들이 알 뿐더러 온 조정이 다 압니다. 참으로 폐기하고 〈조정의 반열에〉 끼지 못하게 하여 선비의 기풍을 격려해야 마땅하나, 그 벼슬만을 그만두게 하셨으므로 성상이 은혜가 이미 지극합니다. 그런제 이제 스스로 깨끗하다 하고 뻔뻔스러운 얼굴로 외람되게 상언(上言)하여 신들과 함께 시비(是非)를 밝히려하니, 그 대간을 깔보고 천청(天廳)을 속이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죄를 다스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의논이 들어가니 보류하라고 명하였다.
[주-D001] 포의(布衣) :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지칭함.[주-D002] 방납(防納) : 백성들이 그 지방에서 산출되는 토산물로 공물(貢物)을 바치는데, 농민이 생산할 수 없는 가공품이나 토산이 아닌 공물을 바쳐야 할 경우에 공인(貢人)들이 공물을 대신 바치고 그 값을 백성에게서 갑절이나 받던 일을 말함.[주-D003] 신사년 : 1461 세조 7년.[주-D004] 병술년 : 1466 세조 12년.[주-D005] 정해년 : 1467 세조 13년.[주-D006] 무자년 : 1468 세조 14년.[주-D007] 기축년 : 1469 예종 원년.[주-D008] 경인년 : 1470 성종 원년.[주-D009] 신묘년 : 1471 성종 2년.[주-D010] 임진년 : 1472 성종 3년.[주-D011] 계사년 : 1473 성종 4년.[주-D012] 갑오년 : 1474 성종 5년.[주-D013] 병신년 : 1476 성종 7년.[주-D014] 여제(厲祭) : 나라에서 역질(疫疾)이 돌 때에 지내던 제사로서, 봄철에는 청명(淸明)에, 가을철에는 7월 보름에, 겨울철에는 10월 초하루에 지냈음.[주-D015] 주의(注擬) : 관원을 임명할 때에 먼저 문관(文官)은 이조(吏曹), 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세 사람[三望]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것.[주-D016] 모야(暮夜)에 …… 있는데 : 후한(後漢)의 양진(楊震)이 형주 자사(荊州刺史)가 되었을 적에 그가 천거(薦擧)한 왕 밀(王密)이란 사람이 창읍 현령(昌邑縣令)이 되었는데, 그가 양진을 찾아뵈면서 10근을 바치려 하자, 양진이 “나는 그대를 알아주는데 그대가 나를 몰라주는 것은 왜 그런가?” 하니, 왕밀이 “어두운 밤이라서 아무도 모릅니다.” 하였으나, 양진이 “하늘이 알고, 신(神)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떻게 모른다고 하는가?” 하자, 왕밀이 부끄럽게 여겨 되돌아갔다는 고사(故事)임.[주-D017] 왕인(王人) : 임금의 사자.[주-D018] 자모(慈母)로서 …… 의심하였는데 : 옛날 증자(曾子 증삼(曾參))가 비(費) 땅에서 거처할 적에 그 곳의 사람으로 증자와 이름이 같은 자가 살인(殺人)한 사실이 있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증자의 어머니에게 “증삼이 살인하였습니다.” 하였으나, 증자의 어머니는 “나의 아들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면서 태연히 베만 짜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같은 말로 세 사람이 와서 말하자, 증자의 어머니가 두려워서 북[杼]을 놓고 담장을 넘어 도망하였다는 고사인데, 즉 평소의 사람됨을 잘 알면서도 여러 사람이 똑같이 나쁜 말로 말하면 자연 의심하게 된다는 것임.[주-D019] 조옥(詔獄) : 금부옥(禁府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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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23년 기미(1799) 8월 22일(무신)
23-08-22[27] 각 해당 관사에 상언(上言) 114도(度)를 판하(判下)하였다.
○ 전라도의 유생 이규백(李圭伯) 등의 상언에,
“순천(順天)의 정승복(鄭承復)은 3대에 걸쳐 4명의 충신이 나온 집안의 사람으로 이들의 공적은 고금에 드러났으나 아직까지도 어둡게 묻혀 있습니다. 대저 정승복은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정지년(鄭知年)의 현손이자 좌리 공신(佐理功臣) 정효종(鄭孝終)의 증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기질을 지녀 경전과 사서에 널리 통달하였고 또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혀 중묘조(中廟朝) 갑진년(1544, 중종39)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되었습니다. 을묘왜변(乙卯倭變)을 당하자 도원수 이준경(李浚慶)의 좌막(佐幕)으로서 여러 차례 큰 공훈을 세웠고, 기미왜변(己未倭變) 때에는 어란진(於蘭鎭)을 방어하고 추자도(楸子島)에서 대첩을 거두었으므로 이준경이 포계(褒啓)를 올려, 옥구 현감(沃溝縣監)과 함흥 판관(咸興判官)에 올려 제수되었습니다.
정승복의 아들 현감 정사준(鄭思竣)은 임진년(1592, 선조25)에 모친상을 당하여 집에서 시묘살이 중이었으나 조정의 명으로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좌막으로 나아가 복병장(伏兵將)으로서 영남의 경내와 연접한 요충지 및 광양(光陽)의 전탄(錢灘)에 기병(奇兵)을 설치하여 적을 토벌하고 포로로 잡으니 적들이 감히 경내에 접근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조카 정빈(鄭𢣐)과 함께 의곡(義穀)을 모아 배 한 척에 모두 싣고 행재소를 향해 출발하였는데, 중도에 병이 나서 아우인 현감 정사횡(鄭思竑)과 정빈으로 하여금 용만(龍灣 의주(義州))까지 수송하여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야장(冶匠)들을 거느리고서 정철(正鐵)로 된 조총을 처음으로 만들어 주장인 이순신에게 바치니, 이순신이 한 자루는 도원수 권율(權慄)에게 보내고 다섯 자루는 행재소에 바쳐 각 도와 각 읍에 나누어 주어 모양을 본떠서 제조하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사준은 그대로 이순신을 따라 일곱 번의 전투에서 분전하여 적의 전함을 크게 격파하였습니다.
정사횡은 노량해전 때 곡물을 모아 군량으로 조달하여 마침내 왜적을 격파하는 공훈을 거두었으므로, 지평으로 올려 제수되었습니다. 정빈은 집안의 동복(僮僕) 수백 인을 거느리고 의곡 1000여 섬을 조발(調發)하고 배로 의주까지 운송하여 군량에 보태어 쓰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의 크나큰 공적과 위대한 공렬이 사람들의 이목에 널리 전파되어 있음에도 유독 포상하여 장려하는 은전을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가 추증하는 은전을 시행하여 주소서.”
하여, 전교하기를,
“해당 도에 내려보내 실제 사적 및 격식을 자세히 살피게 하고 보고해 오거든 결정하라.”
하였다. - 예조 판서에게 판하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