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2일, 세종시 전의향교의 문화대학생 33명이 논산나들이에 나섰다. 오전에는 문화원에서 논산관광홍보동영상을 관람하였다. 관촉사 부근의 미륵어머니를 찾은 다음 점심 식사는 『산아래』 토속음식점에서 하였다. 식후 논산시민공원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부적면 경계선 너머 연산면 돈암서원으로 향하였다. 여기까지 동행한 기자는 일행과 헤어져 1번 국도로 나왔다. 돈암서원 초입, 계백로 갈림길이다.
돈암서원은 3위1체형이다. 아직 정식 오픈은 안 했지만 한옥 스테이가 가능한 한옥마을이 있다. 사계 김장생 선생이 제창한 예학(禮學)의 유교체험장인 예학관이 한창 건축중인데, 예학이라는 이름은 외성리에서 신교리쪽으로 빠지는 길 이름 ‘예학로’에도 나타난다. 어쨌든 이 삼각 지역에서 백제군사박물관쪽으로 가면 솔바람길이다. 그러나 그 반대, 큰길 건너편 과선교 넘어가 보았다. “돈암서원은 저 밑 동네에서 그대로 뜯어서 옮겨왔다.”는 이숙실 문화관광해설사의 말에 점화된 것이다. 눈에 띄는 건물이 염술재였고 지붕 공사중이었다. 동네 사람에게 물어보니, 사계 김장생선생의 4세손 김진망(1659~1720)의 재실이란다.
차를 다시 돌려 논산쪽으로 조금 나아가니 임리1리 돌간판이 하나 서 있다. 급하게 접어드니 완전 시골길이다. 발음도 어려운 임리1리는 수풀 림(林)이고 ‘숲말’로 불리는 동네이다. 울창한 숲이라 보기에는 큰 길 옆이고, 철도가 지나가고, 연산천이 흐르니 아직은 실감이 덜 난다. 마을회관을 지나 더 들어가니 사계 김장생 선생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1574~1656)의 사당이다. 사람이 생활하는 이곳 역시 집주인은 안 보이고 공사업자들만 지붕 공사중이었다. 이리하여 첫날은 이렇다 할 취재도 못한 채 돌아갔지만, 다음날 약속 없이 다시 찾아가 14대 장손인 김선오 씨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돼지엄마 이발소 그림 진원지
돼지 엄마가 새끼들 주렁주렁 달고서 젖먹이는 그림을, 이발소 주인들은 왜 그리 한결같이 걸어놓았을까? 지금 돈암서원이 옮겨간 곳은 상림, 원래 있던 아래 임리는 하림으로도 부르는 모양이다. 하림 숲말 동네로 호남선이 코 앞이다. 연산역과 부황역은 지름길이 따로 있다. 일제가 호남선을 낼 때 경비가 훨 절감되는 그 첩경을 놔두고 굳이 이 동네 앞을 대패 밀 듯 밀착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14세 장손인 김선오 씨(69세)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돈암(遯巖)이란 돼지바위라는 뜻이예요. 여기 숲말 전체 지형을 보면, 부황역쪽은 돼지머리고, 연산역쪽은 꼬리, 그래서 돼지 엄마가 새끼를 품은 채 젖을 먹이는 형태이죠.” 돈암서원은 머리쪽 아래에 위치해 있었고, 사계 선생은 돼지 머리 입 부근에 연못을 하나 팠다. ‘구수’라고도 하는 먹이통 구유를 갖다놓아서 돼지 엄마가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놓은 것이다.
일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십만양병설을 제창한 율곡의 학풍을 그대로 이어받은 기호학파의 거두, 사계 김장생이 거하고 기라성 같은 후학들 양성해낸 곳이 바로 여기 숲말이다. 상하를 견지하는 영남학파와는 달리, 평등을 제창하는 경기호남 기호학파는 군국주의의 요시찰 인물이다.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 숲말의 돼지엄마를 도살해야만 했다. 그래서 철로 공사를 할 때, 선로를 최대한 구부려서 최소한 앞머리와 꼬리 부분이라도 쳐내 버린 것이다. 점입가경(漸入佳境), 이러한 일제의 복심을 감지조차 못한 대한민국 철도청은 호남선 복선공사때 굽은 철도를 펴기는커녕, 동네쪽으로 한밭 더 앞당겨 공사를 하고 말았다.
이런 얘기를 듣다 보니 풍수지리설을 떠나 경제면에서도 가성비를 아니 따져 볼 수가 없다. 연산역에서 좀더 거슬러 올라가, 현재는 계룡역으로 불리는 두마역과 개태사역(광석역) 구간도 상당히 비경제적이다.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해서 양장(羊腸)이라 했다는 계룡시 ‘양정’은, 이제는 철도와 무관한 지역이다. 이제라도 그 굽은 노선을 쫙 편다면 연료비 절감액이 백성들 굽은 허리를 조금이라도 펴줄 성싶다.
계백로 vs. 관창로
김선오 장손의 이야기는 벌곡에서 연산으로 넘어오는 ‘누리기재’로 번져간다. 지금은 ‘황룡재’로 굳어진 이름은, 신비의 동물 용(龍)이 들어 있어서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원래는 황영재이고, 여기서 ‘영’은 구비침을 의미하는 한자어이다. 벌곡면에서 연산면사무소로 넘어오는 길은 굽이굽이 누리기재이다. 이 고개를 분기점으로 하여서 신라군은 벌곡쪽에, 백제군 본진은 연산 관동리에 진을 쳤다. 용호상박, 마침내 연산면 신양리 황산벌에서 둘은 맞붙었다. 계백장군은 그러나 고정리 뒷산까지 몰렸고, 결국 그 산에서 목이 떨어졌다. 벌곡의 수락(水落) 계곡은 물이 떨어지지만, 백제군사박물관이 있는 이곳 산은 계백장군 머리가 떨어진 수락산(首落山)이다.
현재는 계백장군 묘지로 당연시하고 있는 커다란 봉분 앞 안내판에는 “구전에 의하면” 이곳이 계백장군 묘라는 뉘앙스의 ‘전(傳)’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중요하다면 아주 중요할 수 있는 이 한 글자 傳을, 전일순 시장시절 떼어내 버렸다고 한다. 목 잘린 패장에게 묘가 있을 수 있었을까? 상식 차원에서의 질문을 던져 봄직도 한 장면이다.
승부와는 상관 없이 연산에서 부적 넘어오는 길은 계백로이다. 국도와 나란한 철도 건너길은 관창로이다. 이 도로 작명가가 화랑 관창을 염두에 뒀을 확률이 높겠지만, 백제군 본진이 있던 관동리의 ‘관’자도 무관하지 않을 성싶다. 황산성 초입인 관동리! 연산시장 순대집 옆의 철도 건널목 건너편 농로는 한참 후 임도로 이어지고, 이윽고 연산사람도 그닥 익숙지 않은 ‘황산성’이다. 거기가 본진이라면, 후방부대는 지금 황산벌자동차극장 자리의 토성산이겠다. 흙으로 쌓은 이곳 ‘외성산성’은 노성산성과 교신하는 교두보였다. 이 산성을 기준으로 하여 연산면과 부적면이 갈린다. 외성리(外城里)는 밖에 있는 성, 즉 바깥성이다. 이제는 흔적만 남아 있는 도지정문화재 토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열려 있기는 하지만, 여름철 비교적 접근이 편한 곳은 분동이란다. 클 태(泰)자를 써서 태성산이라고도 하는 ‘외성산성’의 봉우리 이름은 성태봉이다. 자동차극장 한복판에 또다른 흙성이 쌓인 걸 보아, 황산벌극장도 폐업한 지 시간이 된 모양이다.
기차와 정면 충돌하는 듯한 짜릿 질주
자동차를 탄 채 짜릿 묘미를 맛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호남선 철로에서 연산면 임리와 부적면 외성리의 접경지가 바로 그곳이다. 철로와 일반도로가 거의 붙어 있다시피한 구간인데, 그 사이가 1m도 채 안 된다. 자동차를 몰고 외성리쪽으로 가는 길에 상행선 열차와 맞닥뜨리는 경우, 그 엑스터시는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온 몸으로 빨아들이는 서바이벌급이다.
알고 보면 그 자리는, 돼지 머리요 입구(入口)였다. 기찻길옆 오막살이라고, 복선 철길이 자기 집으로 바짝 더 다가와서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건널목 간수 다음으로 최근접한 기찻길옆 집주인을 만났다. 서바이벌 구간 바로 아랫집 주인이다. 바위에 새겨진 ‘돈암’이라는 글자를 보았느냐고 묻는다. 종종걸음으로 가보니, 큰 바위에 담쟁이 잎새들만 무성하다. 뭔가 보이는 듯싶어서 걷어내 보니 또렷한 각인 돈암(遯巖)..... ‘돈’으로 발음하는 이 遯은 원래 은둔(隱遯)할 때 쓰는 ‘둔’이 정상 발음이다. 책받침을 뺀 돼지 豚이 진짜 ‘돈’이다. 이 둘 사이의 관계 규명은 차치하고라도, 어쨌거나 ‘돈암’이라는 두 글자는 은둔 방치 상태였다.
또 하나, 잘 노출되지 않는 게 있다. 여기는 사계 김장생 선생의 유허비가 있던 곳이다. 서울에서 내려와 후학을 양성(養成)하기 위하여 양성당도 지었지만, 당연히 근방에가 본인이 거처할 집도 지었다. 생가비는 태어난 집, 유허비는 생활한 집 표시이다. 그것을 사람들이 좀더 잘 보라고 도로쪽으로 옮겨놓았다. 은행나무가 있는 낚시바위쪽이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앞 벌판에는 연산천이 흐른다. 그 연산천이 철도 바깥으로까지 밀려난 걸로 추측이 된다. 물론 근거가 있다. 지금도 땅을 파면 모래가 나온다. 강이 나갔던 자리라는 증거다. 조금 떨어진 앞 벌판을 사갑뜰이라고 부른다. 모래 사(沙)자이다. 산의 꼬리부분 아래쪽은 낚시터였고, 그래서 낚시바위 작암(釣巖)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거기에 있는 유허비를 원래 돈암서원이 있던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으면 좋겠다는 것이 김선오 장손의 소망이다. 정리하면 3가지이다.
(1) 원래 돈암서원이 있던 일대를 지형도와 함께 표시해 두자. (2) 돈암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 바위를 정화하여 돋보이게 하자. (3) 그러면서 여기에 유허비도 옮겨서, 사계고택였음을 명시라도 해놓자.
사계고택, 진품명품 나간다면?
이 얘기를 들으며 기자는 깜짝 놀랐다. 사계고택이라 하면, 계룡시 8경 중의 하나가 아닌가?? 장손의 얘기를 들어보니, 본인이 사는 이 집은 사계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의 사당으로, 이 집 역시 돈암서원 자리에 있다가 거기 철거하면서 몇 백 미터 남쪽으로 옮겨다 놓은 상황이라고 한다.(신도로명 ‘사계로’는 사포리, ‘신독재’로는 한천리 부근으로 북쪽에 배치되어 있다.) 계룡시에서 성역화하다시피한 사계고택은 사계 선생의 8째아들 집이었다. 사계 선생은 자녀를 모두 아홉명 두었는데, 그 중 3명만이 정실 소생이라고 한다. 나머지 6명은 서자였고, 당시 사계 선생이 장손이나 정실 아들 제쳐두고 굳이 여덟째 집에서 유하지는 않았을 거라 보는 시각이다.
그러나 이 또한 남의 집안 일이다. 연산에 광산김씨가 참 많아서 연산김씨로도 통한다는 기찻길옆 아저씨의 말은 광산김씨 장손 입장에서는 동의하기가 마뜩찮은 모양이다. “돈암서원 문하생 중의 하나인 우암 송시열은 은진 송씨인데, 회덕에 살아서 회덕송씨라고도 하지만...” 하면서 말을 흐린다. 건양대 김희수 총장과의 관계를 물으니, 같은 광김이지만 도중에 파가 갈린 경우라고 한다. 족보 얘기는 피차 복잡하여, 집 뜯어간 얘기로 되돌아갔다.
돈암서원은 1881년 고종 18년에 이사를 간다. 저지대가 되다 보니 목조주택이 견뎌내지 못해서이다. 지금처럼 트럭이 없던 시절, 조립식 한옥을 해체한 다음 우마차로 이동하였다. 그림이 그려질 듯 말 듯이다. 당시 예산이 부족했던지, 양성당은 덩그라니 남겨두었다. 양성당 있던 부지는 그나마 좀 높아서 견딜 만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1971년 드디어 양성당도 해체한 다음, 마지막 이사를 간다. 경운기 속칭 딸딸이가 동원되었다. 집 떠난 자리는 지금 논으로 변해 모가 자라고 있다. 가뭄에도 바닥이 안 갈라지는 걸 보니 습지대임은 분명하다. 돼지밥통였던 구수 연못은 한동안 그대로였지만, 돌보는 사람 없고 하니 우거져 있다가, 지금은 합배미가 되어 있다. 외진 이곳까지 차 몰고 들어오는 외지인도 별로 없거니와, 기자처럼 맘 먹고 들어와본들 사람 드문 시골에서 유허지(遺墟地) 흔적 찾기란 쉽지 않다. 마침 대전에 살면서 이곳에 농사를 지으러 다니는 온 부부를 만나 물었더니, 손가락으로 안 되겠다 싶었던지 결국 5~10분 동행하여서 양성당 있던 곳을 정확히 일러주었다. 기찻길옆 아저씨를 만난 것은 다음날, 그것도 일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시간이었기에 가능하였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절하나요
40여 년 전 이 동네 들어온 아저씨는 양성당 서 있던 사실만 기억하였다. 산쪽으로 아저씨 윗집은 대나무로 삥 둘러쌓여 있는데 집은 비어 있단다. 이사 가서이냐고 되물으니, 들판에서 수박 메론 하는데 거기 하우스 속에 살림집이 따로 있어서란다. 사람들 동네 떠나는 방법도 가지가지이다. 하림, 아래숲말은 지금은 10여 가구이지만, 한때 이 동네는 40~50호였으며, 그들 모두가 산신제를 지냈다고, 기찻길옆 아저씨는 묻지도 않았는데 신이 났다. 한동안은 길거리에서 노제로 지내다가 요즘은 다시 산당을 지어 산제로 지낸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다. 거기 안내 좀 해달라고 했더니 쭈삣쭈삣하시다가 결국 길라잡이다. 동네 한복판 김집 선생 사당 뒤편까지 와 보니, 수풀 지천이다. 이번에는 기자가 쭈뼛대니, 앞장 서서 길을 낸다. 아니, 길은 수풀 속에 숨어 있었는데 그 출구를 찾아내 그 입구로 정확히 걸음한 것이다. 빽빽한 대나무 숲 속으로 낸 오솔길 통과하니 나타나는 오두막 하나!
사진을 찍고 내려와 보니 신독재 선생 장손인 김선오 씨가 의아해한다. “아니, 지금 이 시간에 거기는 왜 댕겨와?” 오디주스를 앞에 두고 엉겁결 상견례다. 초창기 산신제는 동네에서 토성으로 올라가는 중간쯤 옹달샘에서 드렸단다. 동네 중간 외딴집 쪽에서 올라가면 나오는 옹달샘인데, 거기서 동네 중심신인 이사지신, 즉 산신령에게 소원을 빌어 올리는 토속신앙이라고 한다. 오십여 가구는 매년 유사집을 돌아가며 하였는데, 유사집은 정월 초하루부터 외출을 삼간다. 부정 타지 말라고 금줄도 치고 제사나 초상집에 다녀오지 않는 등 각별 몸단장이다. 13일쯤이면 동네에서는 천막을 치고 제물을 차리고 징 장구 소리로 시끌벅쩍이다. 보름 전날에는 제주가 잠을 안 자고 집집마다 세대주 생년월일과 소원이 적힌 소지를 정성껏 올린다. 부자집도 몇 있었다. 그러다가 길거리 노제로 바뀌기도 했고, 지금 다시 산당을 하나 지어 10여 가구가 밤 12시에 지성 드려오는 중이다.
상전벽해도 가지가지
산제가 이나마 이어져 오니, 이런 경우도 흔치 않은 숲말이다. 장손 김선오 씨는 자신처럼 종가집을 지키는 경우가 흔치 사례라고 한다. 종친회 같은 데 가서 얘기를 들어보면 열에 아홉은 아파트 생활하는 편이고, 집안 행사때나 돼야 사당과 고택 찾는 게 요즘 현실이라고 한다. 이 현상은 호주제 폐지 이후 더 급속하게 퍼져가는 거 같다며, 지금 도회지에서 개인 사업을 하는 당신 아들이 나중에라도 여기 들어와 살지는, 미지수라고 한숨이다. 장손은 물려받은 재산이 많아서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거라 추측했는데, 이 또한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 모양이다.
커피를 청한 기자에게 나온 음료는 오디원액이었든데, 알고 보니 김선호 씨는 논산시 오디작목회장이었다. 3천여평이 뽕나무란다. 산도 깎여나가고, 강도 밀려나가고, 집도 통째로 이전해가고, 사람도 도회지로 빠져나가고, 역사도 살짝살짝 바뀐 채 굳어져가고,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도 바뀐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다. 그러고 보니 숲말, 그 좋은 어감도 임리일리? 에효~ ‘숲말’이라도 되살려 쓴다면 얼마나 좋을꼬.....
이진영 기자
논산여행33팁
[솔바람길에서 만나는 33서원]
계백혼이 살아숨쉬는 솔바람길은 부적면 충곡리와 연산면 임리 일원 약 6km 힐링 산책로이다. 돈암서원 : 사우(숭례사)에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특히 강당인 응도당은 예서의 하옥제도를 따라 지어진 것이 특징이다. 동춘당 송준길, 초려 이유태, 우암 송시열 3총각 선 본 이야기가 흥미롭다.
충곡서원 : 계백장군의 위패를 주벽으로 하고 18위의 위패가 함께 배향되어 있는 이곳은 숙종 6년(1680)에 세워졌으며 성삼문 선생의 유허비가 있다.
휴정서원 : 1700년에 창건하였으며 1705년에 준공하여 1944년 탑정저수지 완공으로 현재의 위치에 단소를 설치하여 단제를 지내왔으며 총 8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돈암서원 3건물 관전포인트]
돈암서원 건축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건물로 이곳 한옥을 본따 용인민속촌에도 똑같은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본전이라 하여 네 분의 위패를 모신 12칸의 건물이 있다. 양성당 10칸, 응도당이라 하여 유생을 가르치던 큰 강당이 24칸이 있다.
1. 응도당 : 구조가 오랜 고대 가옥제도를 본따서 지어 너무 웅장하고 크고 넓고 하여 옮겨 짓기가 어려워 사당 앞에 모형으로 세운 것이 현재의 강당이라 전해지고 있다.
2. 양성당 : 사계 선생이 건립한 작은 강당이었는데, 1971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옛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사진 65
3. 내삼문 : 내삼문은 3칸으로 본전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외삼문은 3칸으로 본 서원의 정문이다. 내삼문 좌우의 담장은 김장생과 그의 후손들의 예학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물 꽃담이다. 김장생의 사상은 열두 자의 글씨를 통해 생생히 밝혀주고 있다.
- 지부해함(地負海涵) : 땅이 온갖 것을 다 실어주고, 바다가 모든 물을 다 받아주듯 모든 것을 포용하라 - 박문약례(博文約禮) : 지식은 넓게 가지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 서일화풍(瑞日和風) :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단비 즉,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
[숲숲숲 33하게 놀기]
1. 계백장군 유적지 충혼의 숲 교육(숲체험 사무실 041-746-8457) 2. 논산시민공원 숲해설(산림공원과 공원팀 041-746-6135) 3. 숲속 버스킹 공연(문화예술과 문화예술 041-746-539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