倡義實略(5)
鄭慶雲의 『孤臺日錄』, 金沔의 『倡義錄』, 『忘憂堂集』 등에서 여대로의 倡義 사실을 발췌한 것이다.
鑑湖集 해제
2. 간행 경위
여대로의 증손인 呂文徵이 이전에 정리된 유고를 바탕으로 閔興道(1655-1710)의 서문과 洪萬朝(1645-1725)의 발문을 받아 1710년에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 본은 유포하기 전에 화재로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그 후 후손 呂思汲이 鄭象履(1774- 1848)에게 행장을 받고 부록을 첨가하여 중간하려 했지만 이루지 못하였으며, 9세손 呂纘祖·呂學祖 등이 증보 재편하여 1860년에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므로 1710년에 간행한 초간본은 전하지 않으며, 1860년에 간행된 중간본만이 현재 규장각·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3. 저자 소개 : 呂大老(1552-1619)
여대로의 자는 聖遇, 호는 鑑湖, 본관은 星山이다. 조부는 呂從濩, 아버지는 呂應龜(1523-1577)이며, 어머니는 辛馹의 딸이다. 부인은 豊山柳氏로 대사헌 柳景深의 딸이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여대로는 1583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91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일어나자, 5월에 의병을 일으켜 權應聖을 부장으로 삼고 거창에서 郭䞭·文緯와 합류하였다. 6월 초유사 金誠一이 장계하여 형조좌랑·지례현감에 제수되었다. 8월 松庵 金沔과 협력하여 왜적을 무찔렀다. 정유재란 때 忘憂堂 郭再祐와 화왕산성에 들어가 의병 모집을 상의하였다.
1603년 예조좌랑에 제수되었으며, 이어서 고산찰방·대구 판관 등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종유한 인물로는 東岡 金宇顒, 寒岡 鄭逑, 旅軒 張顯光, 愚伏 鄭經世 등이 있다.
4. 내용 개요
鑑湖先生文集序1(5)
心隱 閔興道(1655-1710)가 1710년에 지었다.
鑑湖先生文集序2(4)
定齋 柳致明(1777-1861)이 1860년에 지은 重刊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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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권선문
도동서원의 중건에 대해서는『道東書院重刱事蹟』을 통해 개략적인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도동서원은 이 시기 여타의 서원과 마찬가지로 김굉필의 내외손 및 一鄕士林의 공동협력 하에 감사 및 本邑과 인근 수령 등 官의 적극적인 협조로 성사되었다. 특히 김굉필의 외증손이자 당시 영남학파를 영도 해 갔던 정구와 감사의 역할이 컸다. 정구는 중건초기 區劃施措에 애를 섰으며 白鹿洞規를 모범으로 한 道東院規를 제정하고 매 朔望에 諸生에게 강마하기도 하였다. 한편 1604년(선조 37) 먼저 중건역사를 관장할 원장으로 郭赾을 천거하였고 1607년(선조 40) 안동대도호부사로 재직당시 영남학파의 중심인사였던 대구도호부사인 鄭經世와 합천군수 呂大老와 함께 重建求助通文을 내기도 하는 등 도동서원 중건을 실질적으로 관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