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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눌집(小訥集) 노상직(盧相稷)생년1855년(철종 6)몰년1931년자치팔(致八)호소눌(小訥), 눌인(訥人), 자암병수(紫巖病叟)본관광주(光州)특기사항허전(許傳)의 문인. 박치복(朴致馥), 김인섭(金麟燮), 허훈(許薰), 이만도(李晩燾) 등과 교유
小訥先生文集卷之十二 / 書 / 答鄭漢朝
| - | - | 1919 | 기미 | - | - | 65 | 巴里長書에 문도들과 함께 서명했다가 옥고를 치르다. ○ 9월, 노곡에서 조금 떨어진 秣方에 泗南書莊을 마련하고 강학을 하다. |
| - | - | 1926 | 병인 | - | - | 72 | 자암서당을 重修하고 강학을 계속하다. |
| 鄭宗鎬 | 1875 | 1954 | 淸州 | 漢朝 | 磊軒 |
十三日承八日書。以審侍暇棣事有損。貢慮不淺。我我事憤惋憤惋。此事發端於尤庵年譜中。而洪直弼料得癸丑疏之無疵。乃曰此非癸丑疏。乃丁巳擬疏也。誣逼無忌。顧軒集中有辨誣錄。然乃門下諸賢之說。何能爲證於彼輩叢中耶。
| 鄭來錫 | 1808 | 1893 | 淸州 | 致仁, 稚仁 | 顧軒 |
尤譜壬辰條中一篇錄呈。蓋美村說足以助一臂也。尤庵則於文穆公。尊慕之意有素。美村則於此事頗有力。同春則雖論癸丑疏。然聞美村之言。更不加喙。亦不可謂有負於文穆公也。書草頗巽順。恐不合僉意。然稷意則凡有事之書尤加謹。而只達其事曲直而已。延興裔之負文穆。雖是痛憎。然於此事不足有無。故都不擧論也。只當以尤譜中所論癸丑疏。爲宗旨可也。癸丑之化爲丁巳。直弼輩之私論也。雖然此等事。只以一番明之而已。不必用力卞明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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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헌집(四未軒集) 장복추(張福樞)생년1815년(순조 15)몰년1900년(고종 37)자경하(景遐)호사미헌(四未軒), 녹리(甪里)본관인동(仁同)특기사항이진상(李震相), 정삼석(鄭三錫), 허훈(許薰) 등과 교유
四未軒文集卷之十 / 墓碣銘 / 鄭君若中墓碣銘 幷叙
居昌郡之東沙佛村負丁原。吾友兢齋鄭君之藏也。其藏也。余以平日期望之大。情愛之深。搆誄文一闋。哭而送之。老而哭少。猶非常理。况忍銘其墓乎。然孝子之勤請。有不忍終辭。收拾尸居餘氣。淚按狀。君孝友根天。穎悟出倫。自幼奉承嚴敎。少無子弟過。及長。刻勵讀書。日見文詞之就。爲親業公車。屈禮圍。謂從吾所好。遊許性齋傳,鄭顧軒來錫門。發憤忘寢食。又能眞積實踐。晨興盥櫛。適父母之所。左右忠養備至。有有方行。雖大風雨。大寒暑。必趁期返面。戊寅。丁憂。哀毁盡情。斂肂如禮。割己財分。與弟妹。一不自私。日必瞻拜家廟。未薦不食新。遇忌必致如在。御家衆。和敬兼濟。使婢僕。恩威幷用。待隣里。畦畛不設。敦宗族。遠邇無間。接賓友。謙恭謹勑。咸得其歡心。愛安陰山水。家于尋眞洞。趙侯元植。一見公。忘年執弟子禮。甲乙邦亂。人有勸公首倡義旅。辭以老母在。詩以見志曰。終爲禽獸生何益。若辨熊魚死亦安。平生著述有心性四七問答,麟經類解,家禮增註,李子粹語等編。與夫人物性同異之辨。理氣各殊之論。其見得益精。有可以嘉惠者焉。生純廟己亥十一月三日。卒 當宁丁酉十一月望日。君諱趾善。字若中。又號立巖。東萊之鄭。自麗及我朝。有三世封君美謚。曾祖諱致仁。祖諱升民。考諱宗悳。號篔谷。有文行。外祖善山金氏。江湖先生后瓛。配商山金氏。基潤女。男圭興。女李璋世。銘曰。
大嶺古閥。吾林望士。孝至靡終。學優未仕。天嗇其施。莫究所以。爲斯人痛。曷有竆已。
사미헌집 제10권 / 묘갈명(墓碣銘) / 정군 약중 묘갈명 병서 〔鄭君若中墓碣銘 幷叙〕
| 鄭趾善 | 1839 | 1897 | 東萊 | 若中, 若仲, 若重 | 兢齋, 立巖 |
거창군(居昌郡) 동쪽 사불촌(沙佛村) 정좌(丁坐) 언덕은 나의 친구 긍재(兢齋) 정군(鄭君)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군을 장례치를 때 내가 평소에 대단히 기대했던 것과 깊었던 애정으로 뇌문(誄文) 한 편을 지어서 통곡하며 보내었다. 늙은 내가 젊은 사람을 곡하는 것이 오히려 평상의 이치가 아닌데, 하물며 차마 군의 묘갈명을 지으랴. 그러나 효자가 정성스럽게 부탁하기에 차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여, 송장처럼 앉아있던 남은 기운을 가다듬고 눈물을 흘리며 가장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았다.
군은 효우가 천성에 근원하였고 총명함이 뭇 사람들 중에서 빼어났다. 어릴 때부터 엄부의 가르침을 받들어 자제로서의 과실이 조금도 없었으며, 성장하여 부지런히 애써 독서하여 날로 문사(文詞)가 성취함을 볼 수 있었다. 어버이를 위하여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시험에 낙방하고서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리라.”라고 하였다. 성재(性齋) 허전(許傳)과 고헌(顧軒) 정내석(鄭來錫) 문하에서 배웠는데 분발하며 침식을 잊을 정도였으며 또 진정으로 공부를 쌓고 그것을 실천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한 뒤 부모님이 계시는 곳에 나아가 좌우로 충성스럽게 봉양함을 지극히 하였다. 방향을 정해놓은 행차가 있을 때는 비록 심한 폭풍우와 대단한 추위ㆍ더위에도 반드시 기일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와 인사를 드렸다.
무인년(1878, 고종15)에 부모상을 당하자 슬퍼하여 몸이 야위며 정을 다하였고, 염하고 장례 치르기를 예법대로 하였다. 자기의 재산을 내어 남동생과 여동생에게 나누어주고 하나라도 스스로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매일 반드시 가묘에 가서 절하였고, 가묘에 천신(薦新)하지 않은 새로운 음식은 먼저 먹지 않았다. 제삿날이 되면 반드시 조상의 영혼이 강림하는 듯한 정성을 다하였다. 식구를 다스림에는 화목과 공경을 겸하여 이루었고, 종들을 부릴 때는 은혜와 위엄을 함께 사용하였다. 이웃 사람을 대함에 밭두둑의 경계를 만들지 않았고, 종족을 돈독히 대함에는 원근의 차이를 두지 않았으며, 손님과 벗을 대접할 때는 겸손하고 공경하며 삼가고 조심하니, 모두들에게 환심을 얻었다.
안음(安陰 안의(安義))의 산수를 좋아하여 심진동(尋眞洞)에 거주하였다. 고을 원 조원식(趙元植)이 한번 공을 보고는 나이를 잊고 제자의 예를 행하였다. 갑오경장과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공에게 앞장서서 의병을 주창하기를 권하니, 공이 노모가 살아계시는 것으로 사양하였다. 그리고는 시를 지어 뜻을 보였으니 “끝내 금수가 된다면 살아도 무슨 유익하리, 만약 웅어(熊魚)를 분별한다면 죽어도 또한 편안하리.〔終爲禽獸生何益 若辨熊魚死亦安〕”라고 하였다. 평생 저술한 것으로는 《심성사칠문답(心性四七問答)》,《인경유해(麟經類解)》,《가례증주(家禮增註)》,《이자수어(李子粹語)》 등과 〈인물성동이지변(人物性同異之辨)〉과 〈이기각수지론(理氣各殊之論)〉이 있는데, 그 견해가 더욱 정밀하여 후세에 아름다운 은혜를 끼칠 만한 점이 있다. 군은 헌종〔純廟〕 기해년(1839, 헌종5) 11월 3일에 태어나 금상 정유년(1897) 11월 15일에 죽었다.
군의 휘는 지선(趾善)이고 자는 약중(若中)이며 또 다른 호는 입암(立巖)이다. 동래(東萊) 정씨(鄭氏)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봉군(封君)과 아름다운 시호를 가진 분이 있었다. 증조부의 휘는 치인(致仁)이며 조부의 휘는 승민(升民)이다. 아버지의 휘는 종덕(宗悳)이며 호는 운곡(篔谷)으로 훌륭한 문장과 행실이 있었다. 외조부는 선산 김씨(善山金氏) 강호(江湖) 선생의 후손인 환(瓛)이다. 군의 부인은 상산 김씨(商山金氏) 기윤(基潤)의 따님이다.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규흥(圭興)이고 딸은 이장세(李璋世)에게 시집을 갔다.
명은 다음과 같다.
대영남의 옛 문벌 집안으로 / 大嶺古閥
우리 사림들이 우러르는 선비였네 / 吾林望士
효도가 지극하였으나 마치지 못하였고 / 孝至靡終
학문은 넉넉하나 벼슬하지 못하였네 / 學優未仕
하늘이 군에게 베푸는 것을 아끼어 / 天嗇其施
하는 일을 끝까지 하지 못하게 하였네 / 莫究所以
이 때문에 사람들이 애통해하니 / 爲斯人痛
어찌 애통함이 끝이 있겠는가 / 曷有窮已
[주-D001] 정내석(鄭來錫) : 1808~1893.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치인(致仁), 호는 고헌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후손이다. 저서에는 《간서수록상목편(看書隨錄常目篇)》과 《고헌선생문집(顧軒先生文集)》이 있다.[주-D002] 심진동(尋眞洞) : 안음(安陰)의 뛰어난 경치를 안음 삼동(三洞)이라 하니, 화림동(花林洞)ㆍ원학동(猿鶴洞)ㆍ심진동(尋眞洞)이 그것이다. 그중에 심진동은 요즘 말하는 용추계곡을 가리킨다.[주-D003] 조원식(趙元植) : 1842~?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인백(仁伯)으로 1885년(고종2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주-D004] 웅어(熊魚)를 분별한다면 : 곰발바닥〔熊掌〕과 물고기 음식 중에 택일하라면 물고기보다는 웅장을 택한다는 말로서, 생사(生死)의 선택에 있어 구차히 살기보다 떳떳하게 의리(義理)를 따라 죽는 것을 택하는〔捨生取義〕 비유로 쓰인다. 《孟子 告子上》[주-D005] 헌종〔純廟〕 : 순묘(純廟)는 헌묘(憲廟)의 오자이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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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집(響山集) 이만도(李晩燾)생년1842년(헌종 8)몰년1910년(순종 4)자관필(觀必)호향산(響山), 직재(直齋), 모암(某巖)본관진성(眞城)특기사항권승하(權承夏), 권연하(權璉夏)의 문인. 김흥락(金興洛), 유필영(柳必永), 유기호(柳基鎬), 곽종석(郭鍾錫) 등과 교유
響山文集別集卷之六 / 行狀 / 兢齋鄭公行狀
公諱趾善字若仲。鄭氏系出東萊。高麗左僕射諱穆其始祖。自是代有達官錫土。至雪壑齋先生矩。以諫議見我朝受禪。隱于松山謚靖節。歷一世敵愾功臣東平君種謚襄平。是生智耘顯信校尉。始徙居昌。是爲公十四世也。至進士時修。師事鄭桐溪,趙龍洲兩先生。號琴川。鄕人尸祝之。高祖諱復泰。曾祖諱致仁。祖諱升民。考諱宗悳號篔谷。有文行見推于鄕。妣善山金氏。文康公叔滋后士人瓛之女。憲宗己亥十一月三日。公生于大冶村第。幼穎悟端重。儼若成人。及入學。才調出衆。不待敎督。勤篤不怠。弱冠時文蔚然成章。詞垣老宿咸嘖嘖曰必做。嘗一與計偕。屈於南省。自以爲吾學有未至。益復硬着自厲。及見世道日非。無意進取。時則洛中有許性齋。隣鄕有張四未,鄭顧軒。遂從三君子者而遊焉。脫去纂組之習。專心讀書。字究其訓。句賾其旨。時有契悟處。輒欣然不知手舞足蹈。乃曰吾向也枉費功力於無用之地而虛送光陰也。事親竭盡誠力。未嘗有懈怠之意。及丁外艱。哀禮備至。季弟失業。數割財以與之。兩妹貧不資生。至貨丘木而周之。奉先極誠。有時物不薦不入口。至若嚴於奴僕。和於宗族。隣不畦畛。接客不表襮。其踈節也。嘗以窮鄕罕書籍。如二程全書,朱子書節要,心經,家禮等書。手自精寫。與朋友共之。甲午國有大變。至乙丙尤甚。公噓唏出涕。及各邑擧義。有詩曰終爲禽獸生何益。若辨熊魚死亦安。屋後有十丈危石。自號立巖。後又名其室曰兢齋。丁酉四月得疾。母夫人勸之食則必強進之。以十一月十五日歿。享年五十九。葬于沙佛村先兆下丁坐原。配商山金氏。士人基潤女。生一男一女。男圭興女適李民世。圭興一男冕錫一女幼。於乎。公資禀甚高。器量宏深。步趍正而才美充。平居晨興盥櫛。省親闈謁家廟。退處一室。潛心墳典。語默動靜。皆有成法。身不近華靡之物。與人由由。冲和滿面。而至於裁制義理則斬然有不可犯者。與尹胄夏忠汝素善。忠汝嘗主心卽理說及四七發者氣發之者理之說甚力。公極言其非。忠汝亦以公言爲非。往復甚多而兩人終不失和氣。是知忠汝亦善人也。葢二說之誰得誰失。惟知道者能辨之。然公又有所著心性說問答,四七問答及仁經類解,家禮增註諸篇。於此足以見公之所存所學矣。往年圭興遣其從姪。來示公遺文。因請弁語。余辭謝不能。而窃恨生同一省。年又相若。曾無一番傾葢。只得見於卷中。如古人之遙遙也。及此病伏窮山。又以狀行見屬。却念世變日滋。道路梗塞。如復終辭。使之徒勞於四百里之遠甚不可。玆冒昧序次如右。以竢秉筆者采擇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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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구집(晩求集) 이종기(李種杞)생년1837년(헌종 3)몰년1902년(고종 39)자기여(器汝)호만구(晩求), 다원거사(茶園居士)본관전의(全義)초명종도(種燾)특기사항이병희(李炳熹), 곽종석(郭鍾錫)과 교유
晩求先生文集卷之八 / 序 / 顧軒鄭公文集序
| 鄭來錫 | 1808 | 1893 | 淸州 | 致仁, 稚仁 | 顧軒 |
易澤水之彖曰困而不失其所亨。先儒解之曰處險而說身。雖困而道則亨也。顧軒先生鄭公。承賢祖之緖。修家庭之業。自少卽以學問有聞於世。而其所學又必欲見之於行。莊敬而篤實。謙恭而有威。事親孝與人信。葢近世學者。矯者失於粧撰。弱者流於媕婀。質魯則理夫明而辭不達。文過則言有餘而行不逮。若先生無名利之慕而剛柔得中。文質較全。求之林下。殆鮮有其倫焉。顧以生値陽九。困衡拂亂憂慽。無所不有。而向道之志益堅。方其在夙夜齋。靜坐讀書。簞瓢屢空。短褐穿結而不以動其心。寢與俱夢。食與俱嚥者。惟此學而已。陳師道之大冬還衣。胡康侯之口不言貧。未足以語公之全。而其所以爲玉成之地者。未嘗不在於是也。公之道亨有如是矣。而或者以晩年朱芾之來。當公之一亨。則其亦淺之爲論人矣。種杞以鄕井後生。覿德承誨。每一侍坐。便覺淸風灑人。而素絲朱藍。終無以效法其萬一。是可罪已。公之孫允和甫抱遺集而見屬以圖丁乙之役。因盥讀而寓目焉。其天人性命之際。諸說紛糾而必折衷於朱退。箴銘辨圖等作。體驗親切而要不出於誠敬。其他著述。皆淳淳乎老成塗轍。而看書隨錄常目篇。又古人讀書記遺意也。於是乎見公之於此學用功已深。而益恨當日請業之草草也。謹已讎校釐整訖。允和甫又責之以弁卷之文。余固不敢。然區區慕庸之意。不欲自外於論譔。輒忘僭而書之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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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집 별집 제2권 / 서(書) / 하해조 계효 에게 답하다 갑진년(1904, 광무8)〔答河海朝 啓涍 甲辰〕
먼 길을 방문해 주신 것만도 너무나 반갑고 감사한데, 영종(令從) 편에 서신을 보내어 거듭 은근한 정을 표하셨으니, 이로 인해 늦가을의 체후가 만만 안중하신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날 사업에서 군일신로(君逸臣勞)의 효과를 거둔 것이 더욱 많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행장(行狀)과 후지(後識)는 삼가 말씀에 따라 또 주제넘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만, 별도로 부탁하신 것으로 말하면 보내 주신 단편적인 기록으로는 윤곽조차 잡기 어렵습니다. 당시에 지역 유림들이 보내온 만사(輓詞)와 뇌문(誄文) 등을 함께 보내 주시어 제가 살펴보아 근거로 삼을 수 있도록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멀리까지 와서 청하신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워 또한 기초(起草)합니다만, 바퀴 없는 수레로 밤길을 가는 것처럼 동과 서를 전혀 분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당대 대문장가의 문하에 묘도문을 써 드릴 수 있겠습니까.
유고(遺稿)를 간행하고자 하신다면 부디 더욱 꼼꼼하게 교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부록은 너무 많이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혜량해 주실 수 있겠는지요.
최숙중(崔肅仲)의 근황은 어떠합니까? 허문오(許文吾) 역시 사무치게 그립군요.
[주-D001] 하해조(河海朝) : 하계효(河啓涍, 1846~1907)로, 해조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진양(晉陽), 호는 월호(月湖)이다. 진주 대곡면 단목의 단동(丹洞) 지내(池內) 사람이다. 고헌(顧軒) 정내석(鄭來錫, 1808~1893)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면우 곽종석, 교우(膠宇) 윤주하(尹胄夏) 등과 청곡사(靑谷寺)에 모여 《남명선생문집(南冥先生文集)》 교정에 참여했으며, 산천재(山天齋)에서도 김인락 등과 《남명선생문집》 간행에 관여했다. 강좌 지역의 선비들과도 서신을 왕래하여 이만도, 척암 김도화, 만구 이종기 등과 교유하였다.[주-D002] 군일신로(君逸臣勞)의 효과 : 임금은 위에서 편안하고 신하는 아래에서 수고하는 효과라는 말이다. 《남명선생문집》 간행이 어지러운 국내외 정세 속에서 정책 수립과 나아갈 방향에 도움을 주는 사업이었다는 의미로 인용한 것인 듯하다.[주-D003] 최숙중(崔肅仲) : 경남 고성의 학자 최정기(崔正基, 1846~1905)로, 숙중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전주, 호는 가천(可川)이다. 서산 김흥락의 제자이며,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심즉리설(心卽理說)에 영향을 받아 스승인 김흥락과 논변하기도 하였다. 저서에 《가천집》과 《고증성학총요(考證聖學摠要)》 등이 있다.[주-D004] 허문오(許文吾) : 경남 고령 지역의 학자 허균(許
)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후손이다. 자세한 인적 사항은 미상이다. 향산을 비롯하여 면우 곽종석 등과의 서신 교환이 확인된다.
| 許균(禾+勻) | 1845 | 金海 | 文五, 文吾 |
ⓒ 한국고전번역원 | 이규필 (역) |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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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집 제4권 / 서(書) / 허문오 균 에게 답함 계묘년(1903, 광무7) 〔答許文吾 ▼(禾+勻)○癸卯〕
3년 동안 멀리 떨어져 지내다가 한 통의 편지를 받고 가을에 고요히 지내시는 체후가 만중함을 알았으니, 감격스러운 한편 위안이 되었습니다. 만도는 근자에 들어 노쇠한 모습이 더욱 심해졌는데 얼마 전에 수백 리 길을 쓸쓸히 돌아온 뒤로 쓰러져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또 어린 손자들이 연이어 병들어 더욱 심히 애를 태우고 있을 뿐입니다.
이의정(二宜亭) 운운한 것에 대해서는 분수로 볼 때 감당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덕곡서원(德谷書院)과의 갈등이 끝내 그치지 않은 데 있어서이겠습니까. 이미 조정할 좋은 계책이 없으니, 어찌 감히 예악(禮樂)의 자리에 참여하여 의논하고 겸하여 유람의 숙원까지 이룰 수 있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는 처지에 이름을 노출하여 위급한 상황으로 밀어 넣도록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떻겠습니까? 윤우(胤友)는 이미 훌륭한 스승을 따라 학업을 익히고 있으니 그 독실함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내온 편지에 학문에 진전하기를 구하는 데 급급하여 적임자를 가리지 않고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예를 더하였으니, 진실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또 어찌 뻔뻔히 얼굴을 들고 글을 써서 형식적으로 응대하겠습니까. 함께 노쇠한 이때에 후일 만나기를 기약하기 어렵습니다. 편지를 쓰려니 더욱 서글퍼집니다.
[주-D001] 이의정(二宜亭) :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그의 아우인 허의(許懿)와 함께 시서(詩書)를 읽으며 지내던 곳으로, 경상남도 의령군 자굴산(闍堀山) 아래 곡소부락(梏巢部落)에 있었으나 그 뒤 후손들이 중촌리(中村里)로 옮겼다.[주-D002] 덕곡서원(德谷書院) :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덕곡촌(德谷村)에 있다. 1656년(효종7)에 퇴계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60년(헌종1) 사액서원이 되었고, 1869년(고종6)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 목조건물 전부가 철거되었다. 1902년(광무6) 유림들이 강당과 솟을대문을 복원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공근식 (역) |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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俛宇先生文集卷之百三十四 / 序 / 許氏三世忠義錄序 乙巳
忠義者。所以維持人道之綱紀。撑拄宇宙之棟樑也。否者亂臣賊子。將接跡於今古。而夷狄禽獸。食人於中區矣。是豈可一日而少於世哉。人人皆是性也。惟其或時平地隔。湮沉草萊而無所於事。或材詘智短。遭値機會而不克自奮。必其有材勇智略稱其所性。而遇亂時履急地而後。得在野在朝各盡其分。以洩其蓄而暴其赤忱。盖亦千百而鮮二三矣。其又以是爲一家之活計長物。而祖箕孫裘。作述不懈。光前而裕後者。則溯之往籍。尤不可以再僂指。何其難哉。晉之勝山。有駕洛許氏。州之名家也。昔昭敬王壬辰。島夷入寇。有觀瀾公國柱。以前部將。倡義募衆。爲死守州城之圖。招諭使金文忠先生署爲伏兵將。前後力戰。斬獲無算。亂定恬退於濂江上。與一時名勝徜徉吟醉以老焉。其孫蓮塘公東岦事憲文王。丁卯金虜之來侵也。扈鑾于江都。丙子雙嶺之役。朝廷以公有將畧。令權知兵馬事。頗奏捷。及和事成。常撫釼激慨。志雪國恥。累伏閫鉞。鍊勁講鞱以有待。竟未試而卒。又其玄孫鏜。際英廟時。與叛臣希亮爲僚壻。年十六。見婦家濫傲。遂絶不通。未幾婦家果從叛。於是率家僮馳往。爲勦討計。及境聞已獲訊而罷。中武科。未調而夭。惜也。夫蛇豕而恣陸梁。羶𦎬而淫華夏。天地之大變也。盜弄潢池。扇動中外。邦步之至險也。此忠臣義士之所共沫血僇力。以克竪其棟樑。不墜其綱紀者。而許氏輒與其列。傳之爲一家之性業而不匱焉。於乎偉矣。今其晜孫
。叙述其遺蹟。編之爲三世忠義錄。求序於鍾。鍾謂是編不可無作於今世也。異日者國家有事。又安知許氏之不世其性業也。將四世五世十世而累世于是錄矣。夫何必以三世爲準額哉。吾聞許氏之先。有典理判書諱邕。丁麗祚訖。杜門自靖。其子少尹諱少
。有孝行旌其里。忠以造家。孝以貽世。盖許氏之有所本也。是不可以不幷著之。於是乎書。且以俟於其來也。
[주-D001] 伏 : 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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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訥先生文集卷之二十六 / 序 / 逸軒集序
| 鄭五錫 | 1826 | 1869 | 淸州 | 建叔, 健叔 | 逸軒 |
新安多賢士。蓋寒岡先生遺敎之不衰而然也。鄕里尙然。矧氣脈相承之地乎。就先生之世而以近古言之。進庵,顧軒特著而逸軒亦其一也。相稷嘗讀進庵遺事。有曰每講學。顧軒,逸軒鼎席而坐。諸生尤觀感焉。讀顧軒集與逸軒書萬餘言。皆性理之奧經曲之變。且讀省內諸先輩文集。崔止軒許以飭勵向進。柳溪堂約與共斥邪敎。張四未唯夙夜箴集說之論。李寒洲所往復者。聯篇累牘而俱非尋常暄凉語也。於是而信逸軒翁之爲法家聞孫儒苑碩德也。遂從諸士友之後。設契以謀遺集之剞。役事方始。因遺孤遠永氏之謬囑而讀公遺艸。凡所以質討於同志者。不苟守己見。不苟從人言。秪求其合乎理而已。詩文則淸健恬平。絶雕繪態。至論時務。公所不屑。然壬戌一策。猶足爲康濟之具也。但恨天不假年。使一方後進不得被其嘉惠也。噫先生天資旣拔萃。加之以賢父兄義方之敎。師友之盛又如許。深造精詣。得有成就。所履皆實地。所行皆彝倫。所言皆道義。所自期者古之人古之人也。公嘗有詩曰宇宙一身擔負重。聖賢千古典刑存。相稷竊自以爲先生之實錄在此云。先生諱五錫字建叔。純廟丙戌生。四十四歲卒。今距 卒年六十一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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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訥先生文集卷之六 / 書 / 答鄭孟洪 遠永
八耋翁圖闡先徽。奔走百餘里。棲屑羇榻。料理鋟繡之役。此仁人讀書之力也。但勘刷一事。相稷素是謏識者。重以疾恙。雖尋常文字。自不免謬著之恥。况先師大論先輩編摩之卷乎。雖然老兄發書遣子而問之。稷何敢辭。况此事是私自料理者久矣。今見成書。何等欣滿。遂略略閱過。下上目次。若以此爲完則未也。伏乞細細澄覽。隨疵以改。且與同志互眼參酌。然後庶免大悔也。弁文之託。豈末學所能下手哉。兄苟欲使稷獲載名之榮。則或可書于末簡耶。逸軒集徐當奉翫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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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未軒文集卷之七 / 序 / 柳下遺稿序
| 鄭三錫 | 1819 | 1848 | 淸州 | 晉叔 | 柳下 |
於乎。此余亡友柳下鄭公晉叔遺稿也。余嘗從公遊。丰神秀朗。志氣高遠。如天馬之長鳴。秋鷹之整翮。又如天外朱霞。暎望倒影。匪可以人世坌塵。與之梯接也。能折節向學。未弱冠。已自通儒。嘗曰學問之要。只在積眞踐實。寧學聖人而未至。不以一善成名。於彝倫事物之著。天人性命之微。禮儀常變。音律象數。究極其當。思有以反諸身。又曰。文章餘事。本之四子六經。參之左,史,莊,騷,韓,柳,歐,蘓。而會之於朱子書。鞱鋒斂彩。然後庶幾門路得正。軆製兼備。勉焉孜孜。見高識富。成於辭者。以法勝而得於氣者不盡露。世之剽竊爲文。記問爲學者。靡不望門而却走。於乎。斯人也而不幸運値闕齾。竟不得大有所成就。其有憾於天地之大何如也。公歿之十九年。而其弟五錫建叔甫。收拾遺文。泫然謂余曰。吾兄所著若干編。不忍泯沒於塵蠧中。願吾子勘校而惠一言。余敬受而讀之。詩文皆贍麗可喜。性理諸篇。尤多見解超脫。與其如余之生而沒沒無稱。寧公之死而有不朽者存。建叔之不請於當世能言之士。而必於我荒拙。以其知乃兄也。是尙忍無言。遂書其所嘗言者。爲亡友遺稿序。
사미헌집 제7권 / 서(序) / 《유하유고》 서〔柳下遺稿序〕
아! 이것은 고인이 된 나의 친구 유하(柳下) 정공 진숙(鄭公晉叔)의 유고이다. 내가 일찍이 공을 따라 노닐었는데, 풍채와 정신이 밝고 빼어나며 뜻과 기상이 높고도 원대하여 천마(天馬)의 긴 울음과 가을 새매의 정돈한 날개와 같았으며, 또 하늘 밖 붉은 노을의 비춤이 거꾸러진 그림자 같았으니, 티끌 먼지에 사는 세속의 사람이 그와 교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은 능히 태도를 바꾸어 학문으로 향해 약관이 되지도 않아 이미 절로 통유(通儒)가 되었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학문의 요체는 다만 참됨을 축적하여 실천하는 데 있으니, 차라리 성인(聖人)을 배워 지극한 경지에 이르지 못함이 있을지언정 한 가지 잘하는 것으로 이름을 이루지 않겠다.”라고 하고서, 이륜사물(彝倫事物)의 드러남과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은미함과 그리고 예의(禮儀) 상변(常變)과 음률(音律) 상수(象數)에 대해 그 합당함을 궁구하기를 지극히 하여 내 자신의 몸에 돌이킴이 있기를 생각하였다. 또 말하기를 “문장은 여사(餘事)이니,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좌씨전》,《사기(史記)》,《장자(莊子)》,《이소경(離騷經)》,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구양수(歐陽脩),소식(蘇軾)의 글을 참조하고 주자서(朱子書)에서 회통하여, 칼날을 감추고 빛남을 갈무리한 연후에야 거의 학문의 길이 정도를 얻고 체제(體製)가 겸비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힘써 부지런히 공부하여 견해가 높아지고 지식이 풍부해져, 언어로 이루어진 것은 법도로 제어하고 기운에서 얻은 것은 다 드러내지 않았다. 세상에서 표절하여 글을 지음과 기문(記問)으로 학문을 삼는 자가 멀리서 공의 문(門)을 바라보고 물러나 달아나지 않음이 없었다.
아! 이와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궐알(闕齾)의 운수를 만나 끝내 크게 성취할 수가 없었으니, 그 천지의 위대함에도 유감이 있음을 어찌하겠는가?
공이 죽은 지 19년 뒤에 그의 동생 오석(五錫) 건숙(建叔)이 공의 유문을 수습하여 가지고 와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말하기를 “나의 형이 저술한 약간 편의 글을 차마 티끌 가운데 민몰시킬 수가 없으니, 원하건대 그대께서는 교열하시고 한 마디 서문을 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공경히 받아 읽어보니, 시와 문은 모두 부섬하고 아름다워 좋아할 만하고, 성리편(性理篇) 등은 더욱 견해가 탁월함이 많았다. 나처럼 살아 이름이 매몰되고 묻혀 일컬어짐이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공처럼 죽었으나 불후한 작품이 남아있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건숙이 당대의 글을 잘 짓는 선비에게 서문을 청하지 않고 황졸(荒拙)한 나에게 기필코 서문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내가 자기의 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을 오히려 차마 말하지 않으리오? 드디어 그 일찍이 말한 적이 있던 것을 써서 망우(亡友) 유고의 서문으로 삼는다.
[주-D001] 정공 진숙(鄭公晉叔) : 정삼석(鄭三錫, 1819~1848)을 말한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진숙(晉叔), 호는 유하(柳下)이다.[주-D002] 기문(記問) : 단순히 고서(古書)를 외워 남의 질문에만 응답하는 학문. 즉 쓸데없이 옛 글을 외우기만 할 뿐 아무런 깨달음도 활용도 없는 무용한 학문을 말한다.[주-D003] 궐알(闕齾) : 결손의 뜻이나, 여기서는 일찍 죽음을 말한다.[주-D004] 오석(五錫) 건숙(建叔) : 정오석(鄭五錫, 1826~1869)을 말한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건숙, 호는 일헌(逸軒)으로 유하(柳下) 정삼석(鄭三錫)의 동생이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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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헌집 제1권 / 시(詩) / 정건숙오석 에 대한 만시 2수 〔輓鄭建叔 五錫 二絶〕
공의 중씨는 죽어 뼈가 이미 썩었으니 / 仲公骨已朽
한 번 추억함에 한 번 창자가 찢어지네 / 一憶一膓摧
오히려 위로되었던 것은 그대께서 살아서 / 尙慰夫君在
유풍을 만회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네 / 儒風佇挽回
내가 한 편의 잠설을 지음에 / 一部陳箴說
그대가 수정해 주는 은혜를 받았네 / 荷公筆削之
수정한 흔적이 완연하기가 어제와 같으니 / 手痕宛如昨
슬퍼 눈물이 나서 펴 보지 못하겠네 / 凄愴不堪披
[주-D001] 정건숙(鄭建叔) : 정오석(鄭五錫, 1826~1869)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건숙(建叔), 호는 일헌(逸軒)으로 유하(柳下) 정삼석(鄭三錫)의 동생이다.[주-D002] 공의 중씨 : 정삼석(鄭三錫)을 말한다.[주-D003] 한 편의 잠설 : 사미헌이 지은 《숙흥야매잠집설(夙興夜寐箴集說)》을 말한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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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암집(進菴集) 정교(鄭墧)생년1799년(정조 23)몰년1879년(고종 16)자중교(仲喬)호진암(進菴), 하하재(下下齋)본관청주(淸州)특기사항강연흠(姜淵欽), 송천흠(宋天欽), 최효술(崔孝述) 등과 교유
進奄先生文集卷之四 / 雜著 / 丹山書堂講義
小學 直日。張龍煥,李觀煕,宋寅璧。
李承煕讀元亨利貞章。問性有四綱歟。分言則四者爲萬善之綱。統言則性爲四者之綱。而奚獨以四者爲性之綱歟。答曰性之所以爲性。以有四德也。以四德爲萬善之綱則可。以性爲四德之綱則不可。講長問。性是未發之全體。而未有四德之界分。則何以知有仁義禮智。而撰出四德之名目。對曰因其發而知之乎。曰然。
呂軫奎讀顔淵克己復禮章。講長問視箴言心。聽箴言性。對曰視屬心。聽屬性歟。曰此說含胡。由中而應外者心爲主。開眼而接物者視爲先。故視箴必言心。人生而靜。天之性也。詖淫之辭。誘於外而
其性。故聽箴必言性也。
鄭匡錫讀箕子親戚章。問或謂微子之去。欲存宗祀。箕子之不死。以存皇極之法。其說然否。答曰武庚誅而立微子。武王問而陳洪範。此後來適然耳。謂之預必而如是云則未瑩徹。此胡五峰之說所以見非於延平先生也。又問箕子朝周之說是否。答曰箕子渡浿。實有罔僕之志也。若復朝於周。則是僕於武王。箕子必無是理。
張奎斌讀胡文定公與子書。問明道希文門路有異。而並言立志何。答曰士君子爲學。必先立其志。然後可以做將去。而耳目之所逮。莫如程明道之存心愛物。范文定之先憂後樂。故特於立志處並言。
李錫弼讀賢賢易色章。講長問程子言改容易色。朱子言如好好色。二說何從。對曰朱子非不知程子之言。而爲此說。則可見誠心好賢之意精切。
鄭載錫讀三十而有室章。問男子三十而有室。女子二十而嫁何。答曰此是參天兩地。倚數以象天地。周禮有此說。又讀張公藝九世同居章。問九世之久。古今無復有如此者。而忍字之外。不復有別般道乎。答曰皇明鄭湜十世同居。自上問其道。湜曰不聽婦人言爲家法。此說甚善。
宋豊翼讀孟子道性善章。問孟子云性善。而明道云惡亦不可不謂之性何。答曰性一也。而所指者不同。就本源禀受而言。則天命純粹。有善無惡。此孟子所謂性善。就墮在氣質言。則氣禀萬殊。或善或惡。此張子所謂氣質之性。
李九相讀賢哉回也章。講長問貧亦可樂乎。對曰非樂其貧。自有其樂也。講長曰此樂字。周子亦引而不發。未敢妄言。然安貧樂道之說。鄒氏非之。恐樂天知命。其庶幾乎。曰然則孔子飯䟽水飮之樂。亦與此樂同歟。答曰孔子之樂。亦不在飯䟽水飮。聖人隨處而安。樂亦無不在焉。故周程並稱孔顔樂處。
張基運讀致齊散齊章。講長問齊者整齊而一思慮。此章思字無迺煩乎。對曰思雖若煩。而所主而思者一也。講長曰伊川有云澹然純一之謂齊。則思不可若是多了。祭義說不是。當從程說。
鄭旼錫讀親戚不悅章。問孝有不及。悌有不時。答曰如我早孤。讀此未甞不傷感。如君父母未甚老。養體養志。何所不及。雖無親兄。可以推遠兄弟而悌之。身老則無可悌之日。
鄭昊永讀九思章。問終於忿思難見得思義何。答曰忿怒最難制。故朱子曰懲忿如摧山。窒慾如塡壑。心經懲忿窒慾。亦擧此而言。九思終於忿慾。
宋濟翼讀劉康公章。問民受天地之中。答曰眞氏註以降衷爲言是也。天命純粹。無有偏倚。此卽天地之中。而民之所受而爲性者也。
鄭厚錫讀學須靜才須學問。問才須學之才。答曰才有兩㨾。有可以爲善者。有出於氣者。此孟子程子之說所以不同。而此才字當以程子說看。
鄭遠永讀高柴見孔子章。問高柴當此危難之時。不徑不竇。是中行之道歟。答曰此所謂君子以爲難。而謂之中行則恐合商量。然以初學言之。則立志如此然後。可以勇進。又問或者誰。答曰見刖於高子者。
上之四年暮春。進菴從叔以丹塾長。招鄕子弟講小學書。旣次其問答疑難。名曰丹山講錄。命五錫操管而從事焉。五錫窃伏念學而講。欲明理也。講而錄。備不忘也。盖嘗論之。學之道。不外乎身心性情之間。學之方。備見聖賢方策之中。人苟能覔得門路於聖賢之言。反之於身存之於心。則博約明誠。固在是矣。講而錄。不其剩乎。特以人之覺有先後。而知見各不同。言有遠近而義理益無竆。不同故有多岐之惑。無竆故有難明之患。則折其𣏮而會于一理。辨其疑而作爲公案。譬如操丈尺者之棄短取長。明法律者之立斷定例者。此學之貴乎講。而講之不得無錄者也。嗚呼。學天性當近裏。又當知要。自應對而至於盡性。自格致而至於平治。非一超躐致。又非一毫可外求者。則彼世之不知灑掃。而馳心高遠之域。出入四寸。而要爲標幟之資者。豈今日公之所以必講小學而作爲是錄之意也。子夏曰日知其所亡。月無忘其所能。朱夫子曰爲小學者。不由乎敬。無以謹夫灑掃之節與夫六藝之敎。從事於斯。以立基本。則庶幾不負是錄之意。而若其盡心知性。馴致乎約且誠焉而達天德。則亦豈盡以言說求哉。學者要躳行默識。引類而廣之耳。可不勉哉。役旣訖。敬書于尾以獻。丁卯三月下浣。再從姪五錫謹識。
論語 戊辰二月。直日金台應,宋寅濩。參講李震相,鄭五錫。
金台應讀顔淵問仁章。講長問克己復禮則便是仁否。抑爲仁有差別歟。對曰克己復禮便是仁。恐不可以工夫次第言。講長曰不然。克己復禮。已至十分精到。則謂之仁可矣。而方做克己復禮之工。則何可便謂之仁乎。故必著爲字於仁字之上。且其釋不曰仁되오미而仁요미則爲字有深意。胡氏曰非禮勿視。非是仁。眞積力久。自然誠實。則可謂之仁亦可見矣。又問這禮字卽是理。不曰理而曰禮何。對曰理字虗而無形影。禮字實而有準則。所以曰禮也。李震相問一日之內。天下便歸仁否。答曰仁之理。天下之人皆同。近者歸仁則遠者亦可知。此言理當如此。非一日之內。天下便歸仁也。台應問性偏難克處克將去。用工何以則可。答曰剛者每失於褊急。此剛之偏也。柔者每失於惰緩。此柔之偏也。沈潛剛克。高明柔克。乃是克將去道理。而此甚難。故曰難克處。欲變化氣質。先難而後獲。李震相曰非禮者。己之私也。此非禮字。是自外至者歟。抑己心中之非禮者歟。答曰非禮有自外至底。勿視勿聽是也。有自內出底。勿言勿動是也。李震相曰己心之涉於非禮者是也。雖屬外物。而自是己事也。答曰此未可以言內而不言外。亦未可以言外而不言內。有曰制之於外。以安其內者。豈不以自外至者言之乎。姦聲亂色。不留聰明。所以養其外。淫樂慝禮。不接心𧗱。所以養其內。兼內外說得備。台應問何以曰久而誠。答曰誠者天道也。誠之者人道也。久久積功。然後可以言誠。誠則私欲凈盡。天理流行。斯可謂之仁。豈略綽可做底乎。鄭五錫問知誘物化。何獨言於聽箴。李震相曰感於物而動。惟在於聽。故獨於聽箴言之。講長曰聽箴言性而知屬性。胡氏曰聽者知之初。知者聽之後。盖仍知而此心動。故誘於物而遂化其性。此所以特言於聽箴也。五錫曰哲人知幾。志士厲行。先儒或言內外之動。眞西山獨以爲此動箴。非兼內外而言。勿者心也。講長曰思是動之微。爲是動之著。此是哲人志士之別。而朱子曰思於內不可不誠。爲於外不可不守。盖動兼內外之說。極完備。
宋寅濩讀仲弓問仁章。問上二節言工夫。下二節言功效否。答曰上二節言涵養之工。仁之軆也。下二節言化行之效。仁之用也。又問顔淵問仁則直言爲仁之工。仲弓問仁則只言敬恕。不及仁。顔淵之才高於仲弓。而所答有詳略之不同歟。答曰仁非別樣道。敬而持己。恕而及人。無一分人欲之私。有藹然天理之流行。則便是仁之功。爲仁自敬恕求之。則所以爲仁之道尤切。各隨其才質而告之。且以其效言之。天下歸仁。家邦無㤪。有高下淺深之別。又問謹獨便是守之法。所守者何物。答曰此以敬言。未出門未使民之時。敬而無失。是守也。如見賓如承祭之時。敬而察之。亦守也。人所不知。己所獨知之處。必謹而守之。乃所以謹獨也。又問乾道坤道之別。答曰前註朱子說備言之。何必更陳。盖其資質有剛柔健順之異。用工有奮發持養之分。觀其氣象可知。又讀子貢問政章。問信重於食則與舜命稷契。富敎之序不同何。答曰立言各不同。舜之命稷契。治道之常也。夫子之答子貢。直竆而言先後也。
金性魯讀顔淵喟然歎章。問高堅前後。聖人之道。怳惚不可把捉否。答曰聖人之道。遠如天近如地。如中庸所謂高明配天。博厚配地是也。瞻之在前。纔放慢便不及而在前。忽焉在後。做得緊又過了而在後也。此言中庸之不可能。藍田呂氏曰高明不可竆。博厚不可極。中道不可識。此說甚分曉。問博文約禮。答曰博文竆格之事。約禮克復之工也。博而不約則流於雜。略而不博則泥於固。必須博而又約。然後知行兩全而可以無弊。又問如有所立之地。與仰鑽瞻忽先後何居。答曰仰鑽瞻忽。顔子初年之事。克己復禮。眷眷服膺。中年之工。至於欲罷不能。成德以後之事。詳見朱子書。
李承煕讀畏於匡章。問文不在玆之文。答曰文王之後。孔子自任以此文。文卽道之器也。問天生德於予則以德字自居。此章則不曰道而曰文以自謙何。聖人之於命。若是丁寧言必不害予云歟。答曰聖人之言。泛應曲當。事到極竆處。則直以理言之。故程子曰天生德於予。聖人極斷制以理。吳氏曰夫子平日未嘗以聖自居。及遭匡人桓魋之難。則曰天生德於予。文不在玆乎。辭氣毅然。無復退託推讓之意。盖朱子甞言文便是道。而集註以謙辭釋之。未敢妄度。然語類曰論語集註未及修整。而門人不告徑刊云。此等處當更商量。至於命則天道之流行而賦於物者。五十已極其精而不惑。桓魋之不能違天害己。豈不深知之乎。
鄭祚錫讀十有五而志于學章。問不惑則便知命。而猶有不惑知命之異歟。答曰不惑指事而言。知命指理而言。理與事。本無二致。而有淺深精粗之別。
李五相讀子游問孝章。問子游聖門高弟。而以至賤犬馬之養爲言何。答曰子游性簡易。於灑掃應對之節便忽略。恐於養親之道。愛或踰於敬。故夫子警切以告之。
李九相讀學而章。問古註言學者覺也。朱子提出覺字甚多。而此說學之爲言效何。答曰學有自覺處。有效人處。又問首篇三章必言三不亦何。答曰文之下字。如人之發語。語聲低微則不足以聳動人聽。此三不亦字甚有力。足使人鼓動興起也。
宋來欽讀泰伯至德章。問太王仁人也。觀於去豳之事可知。而集註言翦商之志何。答曰然。吾亦尋常未曉也。陳仲亨疑而問朱先生。先生曰若無此事。豈肯自誣其祖。膚淺後生。何敢疑之。
鄭在卨讀子曰道千乘之國章。問道字訓治。願聞其義。答曰道者治之理也。主心而言。又問聖人之言淺近云。而此章之言。恐不可以淺近看。答曰此三節。皆非高遠難行之事。故曰至淺曰至近。然聖人之言。淺而至深。近而該遠。以推其極則堯舜之治。亦不過此。又讀愼終追遠章。問民德歸厚之道。不於養生言之。而必言愼終追遠何。答曰不但惟送死可以當大事。凡於事生之道。下民猶可企而及之。而安能知夫愼其終追其遠乎。必推說得喪祭大節。以明愼禮報本。然後民可以知德之厚矣。又問送終非所敢忽。而今曰易忽何。鄭五錫答曰上古不葬。其後葬亦不封不隧。至孔子然後曰我東西南北之人。始封樹。禮文之未備。人情之易忽。可想得。
鄭五錫讀爲人也孝弟章。李震相曰孝弟而犯上者。余於王祥驗之矣。鄭五錫曰王祥之孝。孝則至矣。而謂之合於聖人所謂孝之道則未也。此一節之孝。豈可與論於時中之道乎。李又問由孝弟似可以至仁。而曰非也何。鄭答曰孝弟仁之一事。而曰由孝弟至仁。則仁與孝弟。却是二致。故曰非也。
[주-B001] 奄 : 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