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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전투 ©브레이크뉴스 |
-일본 총독부가 왜곡한 역사는 어떤 내용들입니까?
▲예! 일본이 임진전쟁을 왜곡한 것을 일일이 다 열거하기에는 너무나 많아 주요한 사항만 말씀드리겠습니다. 1910년대에 다시 돌아온 일본인들은 황석산성순국선열을 모시는
-황암사을 불태우고 제례행사를 못하게 하고
-안음현청을 허물고 그 자리에 안의초등학교를 세웠고
-일본국사대사전까지 조작하여 일본군의 거짓 기동로를 삽입하고
-황석산의 정기를 말살하려고 1815년 이래 군이었던 안의군을 1914년3월1일 파군하는 등,
황석산성에 대한 역사적인 복수로 대첩의 진실을 왜곡하고 지움으로써 황석산성 대첩은 한국과 일본에서 잃어버린 역사가 되었습니다. 수년간의 조사 끝에 조선백성들의 처절하고도 강력한 저항의지를 확인하였고 1차 임진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에게 논공행상을 할 수 없었던 풍신수길은 정유전쟁에 참전하는 일본군에게 조선인의 코를 베어 돈을 벌어라, 는 「코베기 명령」을 내려 조선인의 코는 물론 조선인과 차별이 없는 동료들의 코를 베어 스스로 궤멸되는 기적의 전투가 일어난 곳이 황석산성입니다.
황석산성전투에서 우군대장 모리데루모도와 조오소가베모도지가 장군들이 죽음직전의 부상으로 식물인간이 되어 8월부터 다음해 철수하는 3월까지 8개월간이나 지휘권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총독부는 황석산성 관련 전투기록을 왜곡하고 지우면서 증간목표인 황석산성의 직전인 거창에서 재편성을 했다라고 이렇게 조작을 했습니다.
-일본우군은 황석산성이라는 중간목표를 앞에 두고 경남거창에서 재편성을 하여 본대는 황석산성을 공격하지도 않고 지나쳐서 먼저가고
-뒤따라가던 가도오기요마사가 육십령고개를 올라가다가 황석산성에 안음거창함양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소리를 듣고 되돌아 와서 2만7천명이 공격을 하였다라고 수정하고
-우군대장도 모리데루모도가 아닌 사촌인 모리히데모드로 수정하고
-천안까지 올라가는 기동로를 그려서 일본국사대사전에 삽입하고
-우군대장 모리데루모도는 유군(遊軍)이 되었다, 라고 기록을 조작하였습니다.
유군(遊軍)을 언급한 것은 부상을 당하여 지휘는 할 수 없지만 아직도 전투현장에는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군이란 군사적으로는 게릴라나 빨찌산 등 떠돌이나 편의대 등으로 표현을 하는데 우군대장이 궤멸되어 패잔병을 이끌고 유격대 활동을 했다는 말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일본국사대사전상의 일본군 기동로
일본 우군이 경남의 거창에서 중간 목표인 황석산성을 앞에 두고 적전분열을 하는 재편성을 실시하여 본대는 황석산성을 지나서 먼저가고 뒤를 따르던 가도오기요마사가 육십령 고개를 올라가다가 황석산성에 안음거창함양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돌아와서 공격을 하였다라고 조작하였다. 일본국사대사전은 1887년에 창간을 하였기 때문에 국사대사전의 기록은 1910년대에 했다는 것이 증명되고 이러한 조작에 총독부가 깊이 관여하였다는 것이 증명이 됩니다. 또한 1597년 4월18일에 거창에서 일본첩자를 체포했는데 취조한 결과 황석산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것이 들어났다. 따라서 가도오기요사가 황석산성을 모르고 지나쳤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 자료 하나만으로도 임진전란사의 황석산성 전투는 조작이라는 사실이 증명이 된다. 지도상의 모리지도상히데모도(毛利秀元)는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의 사촌이고 양자(養子)이며 부하다. 3만명이 올라는 갔는데 내려온 흔적이 없으니 지금도 천안에 있어야 합니다. 대장으로 등장한 毛利秀元은 毛利輝元의 3만명 중 기동이 가능한 2천명을 데리고 구로다5천명의 일부로 직산전투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국사대사전의 기동로는 첫째로 중간목표인 황석산성 앞에서 분열하는 엉터리 전술을 구사하였다는 것은 군사상식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두 번째로는 올라갔으면 내려가는 길이나 돌아가는 길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습니다.
셋째로는 천안에 도착한 후 어떤 작전을 했는지 투입과 산출이 전혀 일치하지 않아 거짓임이 뚜렷합니다.
넷째 지도상의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는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의 사촌이고 양자(養子)이며 부하입니다. 3만명이 올라는 갔는데 내려온 흔적이 없으니 지금도 천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 당시에는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는 궤멸된 모리데루모도의 3만명 중 기동이 가능한 2천명을 데리고 구로다의 5천 명 중의 일부로 직산전투에 참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석산성에서 7만5천3백명이 작전을 했다는 기록은 많습니다. 황석산성 대첩은 임진전쟁 7년 중 가장 많은 일본의 지상군이 궤멸된 전투로 일본인들이 끝까지 숨기고 싶은 특급비밀입니다. 5일간의 전투에서 우군 7만5천3백 명 중 2만7천명만이 전투가 가능하고 48,300명이 전사 또는 부상자로 전투력을 완벽하게 상실한 전투로 일본인들이 기록한 내용입니다. 그 증거는
-『임진전란사(壬辰戰亂史)』의 황석산성 참전일본군 전투편성표를 2만7천명으로 조작
-일본국사대사전의 기동로와 거창에서의 적전분열을 했다라고 재편성 조작
-전주성에서의 깃가와히로이에의 9.1일의 코베기 보고서는 우군대장의 전주성 존재를 인정
-종군승 멘고렌조보의 『고려일기(高麗日記)』의 1〜2차 재편성표에 모리데루모도 등장
-나베시마나오시게가문의 기록 7만 여 명의 일본군이 황석산성 포위공격 기록
-2016년 11월16일 함양군문회원의 황석산성 학술회에서 황석선성을 공격한 우군이 7만5천3백 명이 편성되었다, 라고 인정함으로써 제도권 역사학계의 해양대학교 김강식교수가 근거를 밝힘으로써 확실하게 증명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역사의 전문가들이 학술회를 통하여 전문가들이 신속하게 보완하여 주기를 당부 드립니다.
남원성을 공격하고 승리한 좌군은 남원성 공격을 지원 나온 일본수군 6천여 명을 구례를 거쳐 섬진강을 통하여 해상으로 돌려보내고 18일 남원을 출발하여 20일 전주성에 무혈 입성한 우기다히데이에이는 우군이 궤멸되자 24일 긴급히 좌우군 전체회의를 소집하고 재편성을 실시했습니다. 부상자 치료보다도 더 시급한 것은 조명연합군의 전라도 공격을 차단하여 전주성에 널 부러진 부상자들의 전멸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황석산성을 공격한 우군이 궤멸된 사실을 감추고 일본군의 건재를 과시하기 위한 양동작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군과 좌군을 폐지하고 지상군의 총대장이 되어 우선적으로 조명연합군의 남하를 막을 긴급북진부대를 편성하고, 북진양동본대, 남진양동부대, 부상자치료를 위한 잔류부대 등으로 4개 부대를 편성했습니다.
긴급북진부대는 구로다5천명과 가도오의 1만명 총 1만5천명은 조명연합군을 경상도로 유인하기 위하여 28일 새벽에 긴급북진을 시키고 급조된 긴급북진부대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29일에 북진한 양동(陽動)북진본대는 우군의 나베시마나오시게부대 1만2천명를 포함하여 시마쓰요시히로 1만명, 하지스가이에마사 1만1천1백명, 우기다히데이에 1만명 등 4만1천1백명이 우군 7만 여명이 전체가 올라가는 것처럼 북진을 했습니다. 동시에 양동남진부대 고니시 유기나가 1만4천7백여 명은 남원성을 공격했던 좌군 5만 여명이 내려가는 것처럼 양동남진을 시켰습니다. 잔류부대는 완벽하게 궤멸된 모리데루모도 부대와 조오소가베모도지가, 구로다나가마사의 일부로 두 장군이 부상으로 지휘권을 행사할 수가 없어 잔류부대장은 모리데루모대장의 집사인 깃가와히로이에(吉川廣家)를 임명했습니다.
긴급 북진하여 조명연합군을 경상도로의 유인할 부대 1만5천 명 중 구로다 5천명은 명나라군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부대>로 천안-직산으로 바로 올라가고 가도오 1만 명은 구로다가 유인해오는 병력을 청주에서 몰살을 시키기 위한 <타격부대>로서 청주로 올라갔습니다. 29일에 출발한 우기다히데이에의 <북진본대>는 공주방면으로 올라가는 길을 택하여 3개의 방향에서 마치 일본군 전체가 한양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당당한 위세를 유지했습니다. 양동작전에 놀란 선조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흉적이 간사하고 용병(用兵)을 잘하여 변환하는 것이 한이 없다. 지금 왜적이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경기도를 공격하다가 까닭 없이 갑자기 퇴각하고 있다. 만약 왜적이 거짓으로 물러가는 체 하면 그 꾐에 빠져 다 따라가고 난 후 다른 길로 돌아와서 서울을 공격한다면 어떻게 될지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럴 이치는 절대로 없겠지만 그렇다고 꼭 그 일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거짓인지 사실인지를 확인하라!」
급조하여 올라간 긴급북진부대 중 구로다 5천명은 직산에서 명나라군 8천명을 만나 전투를 하고 1백여 명의 사상자를 낸 뒤 패한 것처럼 청주방면으로 명나라군을 유인하였으나 명나라 군이 추격을 멈추자 경상도 방향으로 도망을 치는 체 하면서 코를 베고 찢어죽이고 사람을 잡아먹고 온갖 난동을 부려 일본군이 경상도로 간다는 것을 온 천하가 알도록 노출을 시켰습니다. 조명연합군이 일본군의 양동작전에 속아서 부상자들이 가득한 전주성 공격은 생각지도 못하고 경상도로 뒤늦게 따라가니 12월에야 울산성 전투가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양동작전의 결과 전주성의 일본군들은 부상을 회복하는 시간을 벌었습니다.
한편 전남으로 내려간 고니시는 자신의 부대가 양동작전으로 내려왔다는 사실을 잘 아는 그는 전라도 의병들에게 자기들도 언제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순천에서 성을 쌓는 일에 전력 집중함으로서 기타지역은 관심을 가질 수가 없어 전라도는 일본군이 없는 무주공간이 되어 이순신이 수군을 재건하고 명량전투를 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황석산성 전투에서 일본군이 궤멸되지 않았다면 명량대첩은 있을 수가 없고 그때에 조선 또한 사라졌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야무황석산성대첩(若無黃石山城大捷) 시무명량대첩(是無鳴梁大捷) 야무조선국(也無朝鮮國)입니다.
전쟁의 주력인 일본지상군 7만5천여명이 8월16일 황석산성에서 궤멸되고 전투물자를 보급하는 수군이 9월16일 명량대첩에서 궤멸됨으로써 일본군이 더 이상 전쟁을 지속 할 수 없도록 하여 조선을 지키고 7년 임진전쟁을 종료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황석산성을 공격한 우군(右軍)은 전주성을 거쳐서 북진하여 조명연합군이 전라도 방면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임무를 부여 받았는데 황석산성에서 전투의 주력군이 70% 이상이 궤멸되는 바람에 그들의 주 임무인 조명연합군을 차단을 위한 북진 임무를 수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원성을 공격하여 승리한 좌군이 북진을 하는 바람에 고니시가 주둔하던 순천을 제외한 전라남도는 전주성에 입성하는 20일부터 9월19일까지 30일간 군사적으로 빈 공간이 되어 이순신 장군이 고문의 여독이 풀리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하루에도 300리길이나 이동을 하고 인적 물적 보충을 하면서 조선수군을 재건하고 명량전투를 준비하는데 시간과 공간을 제공하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주성 입성 후부터 지상군의 총대장이 된 우기다 히데이에가 9월16일에 있었던 이순신의 명량전투 소식을 전남 보성에 도착하는 9월19일에야 들었습니다. 일본지상군의 총대장 우기다 히데이에이는 이순신의 명량전투가 진행되고 있는 그 시간에는 전북김제에서 패퇴한 나베시마나오시게부대를 위로하고 전북익산용안현에서 했던 1차재편성을 취소하고 전라북도는 위험하다고 하여 9월16일 정읍애서 전라남도로 부대를 재배치하는 2차 재편성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황석산성에서 8월16일 일본지상군이 궤멸되고 9월16일 명량전투로 보급로가 끊어진 일본군은 10월 중순까지 전라도에서 철수하여 경상도 바닷가 왜성으로 돌아감으로서 4도 분할이라는 정유전쟁의 목표를 상실하였고 풍신수길에게는 소득 없는 7년간의 전쟁을 포기케 하였으며 전쟁의 참패로 지친 풍신수길은 1597년10월부터 헛소리 하다가 고황(膏肓)병이 들어 1598년 7월17일에 죽고 일본군이 철수를 함으로서 풍전등화였던 조선이 다시 살아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도권 역사학회는 황석산성 대첩을 왜 모르고 있습니까?
▲예 황석산성 전투를 기존의 역사학계가 모르는 이유는 일본인들의 복수로 감추어져 잃어버린 역사가 되어 알 수가 없었던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에 더하여 황석산성대첩을 이야기 하면 임진전쟁에 미친 크나큰 영향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상으로 한쪽에 치우친 지역만 생각하고 역사적 중요성보다는 지엽적인 지역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난해 2018년 11월19일 동아일보에 한국프레스센타에서 김병연 (전 주노르웨이대사)동북아평화제단 이사장의 <정유재란사(범우사)> 출판 기념회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100여명의 전현직 대학총장들을 비롯한 유명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재단이사장은 “정유재란사는 정유재란의 실상과 민중의 수난 등을 조명한 국제학술 논총이다,” 리고 했고 재단 이사를 맡고 있는 이대순 전 호남대총장은 “정유재란 당시 농부는 호미를 던지고 어부는 배를 버리고 이순신산하에서 의병으로 일본군을 물리쳤다.”라고 하며 정유재란 유적지에 평화공원을 조성하고 비참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모색하는 교육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아주 반가운 일입니다.
연구책임을 맡은 조원래 명예교수는 “고령의 기타지마 만지(北鳥万次) 전 일본 교리쓰여대교수의 논문<정유재란과 전라도의 민중>을 보내고 안타깝게 돌아가셨다, 라며 ”집필에 참여한 15명의 학지들의 노고가 적지 않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전라도 지방의 일은 이렇게도 잘도 돌아가는데 경상도의 위대한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은 왜 그리 안 풀리는지 답답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인터넷검색을 하고 서점을 여러 곳을 방문을 해봐도 동북아평화재단의 이름으로 발간했다는 <정유재란사>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무언가 내부적으로나 연구내용에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이것은 추측입니다만 아마도 정유재란사에서 가장 중요한 황석산성 대첩이 누락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일본인 교수의 논문으로 보아서 역사연구가 지역주의 색채가 너무 강조된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도 듭니다. 백성의전쟁 황석산성대첩은 임진전쟁의 핵으로 임진전쟁이나 정유전쟁에서 황석산성 대첩이 빠질 수는 없습니다.
지역사회유지나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대학의 학자들은 세뇌된 식민사관의 틀을 벗어나서 조선인의 입장에서 정유전쟁과 황석산성의 대첩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당부 드립니다.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역사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향토사학자든 전문역사학자든 생산적인 연구라고 판단되면 연구를 할 수 있는 그런 체제가 되든가 결과물을 검증하여 지원하는 그런 제도적 장치가 있다면 식민사관을 탈피하는 보다 많은 연구가 지속될 것으로 판단이 됩니다.
-그동안 황석산서대첩을 진실을 위하여 자저로써 어떤 노력을 했습니까?
박선호: 예! 이러한 잃어버린 역사는 수십억 원의 돈을 준다고 한들 하늘의 도움이나 조상들의 영적 도움, 미치지 않고는 연구를 할 수도 없고 긴 세월을 끈질기게 버틸 수도 없는 것으로, 돈으로는 그 가치를 환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밝혀진 진실조차도 순수하게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식민사관에 빠져 조선인들이 얼마나 역동적이며 웅장하고 그 능력이 다양하고 대단한지 스스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수년전 황석산성 전투연구가 진전이 없어서 고민을 하던 중 지인으로부터 동북아역사연구재단을 소개받았습니다. 동북아역사연구재단은 정부가 200여억 원을 출연하여 운영하는 공공기관인데 필자의 책 1권과 황석산성 전투는 우리들이 잃어버린 역사라는 설명과 함께 필자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든지 아니면 그 연구재단에서 주관하여 연구를 해달라고 간절한 부탁을 했습니다. 특히 필자는 역사에 대한 비전문가로서 재야사학자라고도 하기도 어려우니 제도권 학자들의 이름으로 연구주제로라도 포함을 시켜서 연구를 해줄 것을 부탁을 했습니다.
그 재단에서 답변을 하기를 “당신은 본 연구재단의 소속이 아니라서 포함을 시켜 줄 수가 없고 그런 주제로 연구를 하고자 하는 사람도 없다고 하면서 지원해주지 못하여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변을 하기를 “그렇게라도 답변을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동안 거절을 당하는 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서 거절에도 이력이 붙어서 덤덤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답을 했습니다. 그렇게 되어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의 연구는 제도권 안으로 발을 붙일 수도 없었습니다.
통상적으로 제도권 사학계는 재야사학자들의 연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듯합니다. 아니면 기득권이 무너질까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도 연구하지 않은 잃어버린 역사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과 같은 것은 너무나 지엽적이라고 아예 무시를 하거나 잃어버린 역사는 전문가라도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임진전쟁이나 정유전쟁에서 황석산성 대첩이 없으면 연구를 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7년 임진전쟁 중 가장 많은 지상군을 궤멸시킨 것이나, 이순신의 수군재건과 명량대첩의 기반을 제공한 것이나, 풍전등화인 나라를 구한 것이나, 자수성가하여 삶의 절정에 이른 풍신수길을 절망에 빠뜨려 그 스트레스로 고황병이 들고 헛소리를 하다가 죽게 만든 결정적인 전투, 일본총독부가 그렇게 감추고 싶었던 전투로 임진전쟁이나 정유전쟁에서 황석산성 전투가 빠지면 그림을 그리다가 눈을 그리지 않은 것, 즉 점안(點眼)을 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잃어버린 역사!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의 연구는 자치단체에서 스스로 찾아서 도와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와주기는커녕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끈질기게 방해를 하였고 부정과 부패로 썩고 허물어져 자정능력을 상실하고 급기야는 20여년 7천여일 수백 여 날, 밤잠을 설치며 엮고 엮은 연구서 백성의전쟁 황석산성 대첩을 폐기처분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만행은 1910년대에 총칼을 든 헌병을 앞세워 역사책들을 수거하던 헌병보다도 더 무섭고 1922년 엉터리 조선사를 발표하여 식민사관을 심은 서울대학교 이병도 보다도 더 악랄한 민족적 배반행위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필자를 놀라게 하고 연구에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기존의 역사학계에 드리고 싶으신 말은 무엇입니까?
▲ 예! 역사학계에서는 임진전란사는 임진전쟁의 교과서가 아니라 참고서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참고서일 뿐인 이 책에 대해 의심을 한다거나 믿지 못하는 것을 불경으로 생각하는 식민사관으로부터 탈출을 해야 만이 임진전쟁을 새롭게 볼 수가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1차 임진전쟁애서 실패한 일본은 이순신이 존재하는 한 전쟁을 한다고 해도 승산이 없었던 풍신수길은 정유전쟁을 계획하면서 이순신을 제거하는 작전을 오랫동안 구상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작전이 <풍신수길의 이순신 참수작전>입니다.
-먼저 1597년 1월7일 부산앞바다에 가도오기요마사를 미끼로 던진다.
-이순신이 공격을 하도록 고니시와 요시라를 이용하여 조선의 대신들을 농락한다.
-전략이나 전술을 모르는 선조를 동원하여 이순신을 공격하라고 다그친다.
-이순신은 적이 제공하는 첩보를 믿을 수 없어 공격을 하지 않고 항명을 할 것이다.
-조선왕 선조는 왕명에 대한 불복종이라고 이순신을 고문하고 사형을 시킨다.
-풍신수길의 입장에서는 손해를 볼일이 전혀 없는 작전입니다.
풍신수길의 입장에서는 이순신이 가도오와 싸움을 하여 참수를 당하든지, 아니면 선조왕에게 항명을 하여 사형을 당하든지 이순신만 제거하면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풍신수길의 이순신 참수작전>입니다. 만약 당시에 이순신이 가도오를 공격을 했더라면 십중팔구는 이순신은 패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의 이순신의 전투는 이순신이 선택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자신이 원하는 작전으로 성공을 한 것입니다. 부산앞바다는 이순신이 선택하는 장소도 아닐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조선수군은 넓은 바다에서 전투를 해본 경험도 없었고 수군의 편성자체가 대규모 전투를 할 수 있도록 편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할 확율이 훨씬 높았습니다. 전투라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야만 승리의 가능성 높아지는 것입니다.
작전에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이순신이 공격을 하지 않고 항명을 할 것이라는 것도 풍신수길은 이미 계산이 된 것입니다. 2월26일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채포를 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고문을 받는 전 과정을 풍신수길은 거울같이 보고 있었습니다. 죽음직전의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이순신은 4월1일 백의종군을 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풍신수길은 이순신의 재기는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4월 말에 시마쓰요시히로부대를 가덕도에 상륙을 시켰습니다. 풍신수길은 조명연합군의 움직임보다도 이순신의 상황과 동향에 따라서 일본군의 상륙부대를 조절했습니다. 7월16일 조선수군이 궤멸되자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바다를 건너 상륙을 했습니다. 이러한 일본군의 작전을 미루어 보면 이순신 참수작전은 사전에 철저하게 계산된 것으로 돌다리도 두들기며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작전을 했다고 생각됩니다. 일본군은 1차 임진전쟁에서 실패한 경험을 되살려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작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이 재기 불능상태가 되고 칠천량에서 조선수군이 궤멸되고 원균이 죽자 일본군이 대대적으로 바다를 건너 상륙을 합니다. 참수작전에 실패하고 기장성에 갇혀 지내던 가도오부대는 7월 25일 성문을 열고 나와 부산에서 올라오는 모리데루모도 본대를 양산에서 만나 전투대형을 갖추어 전주성을 향하여 진격을 시작합니다.
1차 임진전쟁에서 한달음에 서울과 평양을 점령당한 제승방략 전술을 폐하고 진지고수를 하는 진관제로 전환한다고 1594년 3월 29일 선언은 했으나 4년이 지난 1597년 그때까지도 진지고수를 위한 축성이 이루어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경상도감찰사 김수는 “제승방략을 해온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진관제로 전환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라고 했습니다. 이순신이 선조에게 항명을 하고 2월 26일 한산도에서 체포되고 서울로 압송된 그 후 3월부터 황석산성은 축성을 시작하여 7월말에 축성을 완료를 하고 8월3일 권율의 휘하에서 말똥을 치우던 이순신이 복권을 합니다. 이와 같이 이순신이 항명을 함으로써 조선군들이 성을 쌓을 수 있는 약 7개월간의 시간을 벌어주어 이순신의 항명은 조선을 구하는 위대한 항명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풍신수길의 계획대로 부산앞바다에서 이순신이 가도오에게 참수를 당했더라면 진지전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은 조선군은 일본군이 그 여세로 공격을 했더라면 조선은 그때에 사라지고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모리데루모도우군이 화왕산성을 통과하는 8원3일 이순신은 진주애서 복권되어 수군통제사로 다시 기용되고 안음 거창 함양백성들은 8월 5일과 6일에 황석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황석산성의 일본군의 작전계획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 예! 일본군은 북동문이나 서문에 비하여 그런대로 전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곽준과 안음사람들이 지키는 전투정면이 비교적 넓은 남문에는 모리데루모도 우군대장군 3만명과 조오소가베모도지가군 1만3천3백명 등, 두개부대 4만3천3백명을 배치하고 화강암절벽인 성주 백사림이하 거창사람들이 지키는 북문과 동문은 가도오기요마사군 1만명, 산세가 임신부의 배처럼 가운데가 불쑥하게 튀어나온 경사로 이루어진 조종도와 함양사람들이 지키는 서문능선은 나베시마나오시게군 1만2천명 등, 1만 명의 구로다는 함양을 유린한 후 예비대로 총 7만5천3백명이 황석산성을 완벽하게 포위를 하고 단시일에 전투를 종료시키는 방안을 선택했습니다.
일본군은 현지에서의 군량조달이 용이한 수확기를 이용하여 작전을 개시하였지만 조선군의 청야작전으로 그들이 부산에서 출발하여 거창에 도착할 때까지 원하는 군량을 확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8월7일 고령에서 정기룡장군에게 패한 나베시마가 패퇴하여 8월8일 삼가, 초계, 합천과 악견산성을 유린한 모리데루모도의 본대와 합류하여 10일까지 약탈 작전을 전개했으나 군량미를 제대로 확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11일에 거창에 도착하여 웅양의 적하산성과 거열산성, 민가 등 13일까지 거창을 유린했으나 역시 소득이 없었습니다.
14일 오전에 거창에서 남상면 오계마을을 거쳐서 중간목표인 황석산성에는 반드시 식량이 있다는 정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안음현 관술령을 넘어 관동과 숲골, 독자, 황곡을 거쳐서 7만의 일본군은 보무도 당당하게 안음현으로 들어와 현청을 점령하고 주둔지를 편성하고 부대배치를 위한 정찰을 실시했습니다. 선봉 가도오의 뒤를 따라 오던 구로다나가마사부대는 함양으로 바로 진출하여 예비대의 유무를 확인하는 작전을 밤을 새우며 유린하고 23개 코를 베었다라고 보고서를 냈는데 이 코베기 보고서가 일본군이 조선에서 보고하는 최초의 코베기 보고서입니다. 모리데루모도 대장이하 조오소가베 모도지가, 가도오 기요마사, 나베시마나오시게 등이 정찰을 실시한 결과 「황석산성을 일주하여 보니 산은 높고 성은 견고하여 뚫을 수도 없었고 넘을 수도 없었다. 7만의 일본군은 황석산성을 완전히 포위를 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라고 나베시마 가문의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거창군사에 의하면 1597년 4월 18일 거창에서 일본의 첩자 3명이 체포되었는데 취조결과 그들은 황석산성에 대한 정탐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 것으로 보면 일본군은 사전에 많은 첩자를 운영하였고 황석산성에 대한 충분한 연구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14일에 황석산성 대한 정찰을 마친 일본군은 최후의 통첩을 했습니다. “성안의 곡식을 일본군에게 넘기고 성을 비우고 나가면 추격하지 않겠다.” 라고 회유를 했으나 백성군들이 응하지 않고 결전의 의지를 보임으로서 전투가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15일 추석날아침 새벽부터 일본군들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북문과 동문공격을 담당한 가도오기요마사가 동문에서 조선군의 공격에 큰 부상을 당하여 “ 가도오가 죽었다.” 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일본군들 사이에 퍼져나갔으나 조선인들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함양운봉작전을 마치고 돌아오던 구로다 부대와 부대교체를 당하여 가도오는 황석산성에서 전투를 할 수가 없었고 밤을 새워 작전을 하고 지친 구로다 부대는 쉬지도 못하고 공격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임진전란사』에서는 황석산성대첩 참전일본군이 2만7천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전투기간을 16일 하루 밤 전투로 기록하고 조선군만 500명이 죽었다라고 기록함으로써 황석산성 대첩을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한 전투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조사결과 참전 일본군은 7만5천3백명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전투기간도 5일간입니다. 원래 재래전쟁애서 공자와 방자의 병력비율은 3 : 1로 공격하는 사람들은 노출이 되기 때문에 더 많이 죽는다는 전제하에 만들어진 비율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공격하는 일본군은 한명도 죽지 않고 방어하는 조선사람만 죽었다는 것은 성립 될 수 없습니다. 전투기간은 직접 전투에 참전한 군무장유명개년보에 8월14일부터 18일까지 5일간으로 되어 있어 이를 중심으로 정리를 합니다.
-조선군이 대승한 날은 전투 중 며칠째 날입니까?
▲ 예! 추석 이튿날인 8월16일이 조선군의 대승하는 날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추석날 실시했던 공격에 대한 단점을 보완하여 대나무로 만든 방패를 들고 새벽부터 인해전술로 달려들었습니다. 조선군 또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황석산성의 지형적인 특징은 모든 산들이 그러하겠지만 산의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기동공간이 좁아집니다. 특히 황석산성은 남문 전면에 이르는 양쪽 날개에 해당하는 산줄기가 교묘하게 기동공간이 좁아지고 사라져 대군이 한꺼번에 달려들 수가 없습니다. 우측능선으로 올라가도 기동공간이 소멸되어 결국은 남문 앞으로 들어가야 하고 좌측능선으로 올라가도 좌우의 산세가 절벽이고 칼날 같아 기동공간이 소멸되어 결국은 남문 성벽 앞으로 붙어야만 전투가 가능합니다. 발사속도가 1분정도인 조총을 한발이라도 쏘려면 조선군의 화살에 노출되어야만 사격이 가능합니다. 그것도 활의 즉사유효사거리인 50m에서 100m이내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는 특수한 지형입니다.
이날은 추석날인 15일의 첫날전투에서 울고불고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부녀자나 노약자, 농민들도 어느 정도 심리적인 안정을 회복하고 숙달되어 올라오는 일본군을 향하여 신나게 활을 쏘아대고 있었습니다. 곽준이나 유명개 이하 지휘관이나 장교인 교위들이 굳이 활을 잡지 않고도 병사들에게 화살을 분주히 대어주면서 「잘 한다! 잘 한다.」를 연발하면 일본군은 여지없이 죽어 나갔습니다. 조총은 장전하고 발사하는데 1분간이 소요되나 조선군의 화살은 쏘는데 급하면 2초요 정조준을 한다고 해도 5초나 10초면 가능하니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일본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일본군의 시체는 산을 이루어 갔습니다. 일본군은 아무리 쏘아도 성안의 조선군이 총을 맞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도 없었고 늘어나는 것은 일본군의 시체였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상황은 일본군에게 불리하였습니다.
일본군은 부대별 식수운반이나 밥을 공급하는 것도 쉽지는 않은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이 올라가기만 하면 물러갈 줄 알았던 조선군은 오히려 강력하게 버텼습니다. 단시간에 산성을 점령하여 식량을 뺏어 굶주림을 해결해야 하는데 산성이 무너지거나 조선군이 항복할 아무런 기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조선군이나 일본군이나 이날은 쉴 수도 없고 한잠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단지 조선군은 밥을 먹어가면서 전투를 하지만 일본군은 밥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굶어가면서 전투를 하고 밤을 지새우는 결과가 되어 일본군은 동료들의 시체를 뜯어먹으면서 전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의 백성군과 일본의 정규군 양군이 대치하면서 꼬박 밤을 지새우고 17일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전투4일차인 17일 이 날 밤을 지새운 전투는 지속하여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습니다. 전투에는 진주성 전투에서 사용되었던 종류의 장비가 사용되었습니다. 십여 발을 한꺼번에 쏘는 신기전이나 활, 각종 포, 헌겊에 화약과 자갈이나 모래 등을 넣어서 던지는 수류탄 형태의 질려탄, 박격포 역할을 하는 비격진천뢰, 포탄이나 바위를 날려 보내는 대완구, 활은 대궁 보다는 반궁이라고 하는 2m이하의 작은 활이었습니다. 일본군이 벽에 붙으면 여지없이 끓는 물과 기름을 머리위에다 쏟아 부었습니다. 일본으로서는 대군으로 한꺼번에 산성을 쓸어버리고 싶지만 조선군이 총을 맞았는지 죽었는지 볼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는 산성의 속을 모르는 답답한 인해전술(人海戰術)이 밤을 새워 18일 새벽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식수를 조달하는데 엄청난 병력의 투입되었고 물이 있는 곳까지 거리가 거의 2-3km에 이르고 밥도 정상적으로 제공을 할 수 없었습니다. 17일에는 심리전을 실시하며 시간을 끌고 있었습니다. 18일 새벽에는 조선군의 전투장비가 소진되었고 불안했던 백사림은 새벽순찰을 나온 유명개에게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지쳤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물었습니다. 공격하는 일본군은 자기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공격을 하지만 방어를 하는 백성들은 5일 동안 한순간도 잠을 자거나 쉴 수도 없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으로 군무장 유명개는 ”지치기로 말할 것 같으면 지키는 우리보다 공격하는 일본군이 더 지쳤을 것입니다. 북문은 지키기가 쉬우니 장군께서는 동문에 집중하여 지키면 일본군은 곧 물러 갈 것입니다. 장군님 힘을 내시지요!“. 하고 곽준이 지키는 남문으로 와서 대책을 의논하는 데 연락병 송인련과 가노 물금이 와서 “ 백장군께서는 벌써 나가셨는데 아직도 여기에 계십니까?” 성주 백사림은 구로다와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주고 데리고 온 밀양사람 김필동과 수하 몇 명을 데리고 진영을 이탈하여 백성군 모두가 옥쇄하여 어륙이 되도록 했습니다.
구로다 병력 1만명 중 70%를 잃어 백사림이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곧 무너지는 상황이었고 남문의 병력 3만의 모리루모도는 90%, 1만3천3백명의 조오소가베부대는 100%로 완벽하게 궤멸이 되어 조선군이 전투물자가 떨어진 줄을 알았아도 성벽을 넘어 성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을 정도로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평균신장 140cm의 작은 체구의 병사들이지만 통일전쟁에서 숙달된 백병전에서는 부녀자 노약자들이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주성에서 북진을 하는데 모리데루모도부대는 2천명만 지원하여 90% 이상이 궤멸되었고 조오소가베모도지가는 한명도 지원을 할 수가 없어 100% 궤멸입니다.
-백성군들이 일본정규군을 궤멸시킨 힘의 원천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 예! 전쟁 중 피난은 대부분 가족단위로 산성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합니다. 일본군 7만5천3백 명을 궤멸시킬 수 힘의 원천도 가족을 지키려는 가족에 대한 사랑의 힘이고 죽음의 고통도 인내할 수 있는 것도 가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힘입니다. 이러한 가족에 대한 희생정신 그것이 황석산의 정신입니다. 자동차에 깔려 죽는 아들을 본 엄마는 순간적으로 차를 뒤집는 괴력이 나오고 적의 칼날에 쓰러지는 가족을 보는 아버지는 세상을 뒤집는 괴력이 나옵니다. 바로 이렇게 자신을 희생하여 가족을 지키려고 총 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이 7만5천명을 궤멸시킨 황석산의 정신입니다.
조상들의 피가 강물처럼 흘렀고 400 여년이 지난 오늘 이순간도 그 붉은 상처 아물지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총 칼에 찢어지고 코를 베이고 죽어가는 수천 에비(殪鼻)들이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는 처절한 마지막 절규가 들리는 듯합니다. 죽어도 죽은 줄도 모르고 옆에 있어도 있는지도 모르고 너무나 억울하고 너무나 분하여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며 천국에 가고 싶어도 갈수가 없어 구천을 떠도는 영혼! 이제는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말하는 조작된 임진란이 아니라 조선 사람인 우리가 우리의 입장에서 밝힌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의 역사를 바로 세워 아직도 갈 곳을 찾지 못한 그들을 구원해야 할 것입니다.
“사는 것 보다 아낄 것은 없지만 사는 것도 구차하게 살지는 않을 것이요. 죽는 것 보다 싫은 것은 없지만 죽는 것도 구차하게 면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곽준 안음현감의 애국충정에 불타는 그의 확고한 사생관은 황석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생관이 될 것이며 “죽는 것이 마땅하면 당연히 죽어야지!” “나라와 백성을 사랑함에 신분상의 차별은 없다.”라는 명예퇴직자 조종도 전 함양현감의 공직관은 오늘날의 모든 공직자들의 귀감이 될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도 남에게 베푼다는 것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400여 년 전 거창과 안음에 16개의 사설교육기관인 공회당을 설치하여 이 땅에 최초의 교육입국(敎育立國)의 기초를 놓았으며 황석산성전투의 모든 장비와 물자를 부담하여 400년 전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이미 실천한 만석군이요 전략가인 유명개 장군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하는 일에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바치고도 자신의 목숨과 가족들의 목숨까지 함께한 그의 애향애민의 정신은 황석산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이어 갈 것입니다.
가족을 위하고 나라를 지키는 일에 자신들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 정유문 3형제와 그의 일가족과 정언남부부, 류세홍과 류강부자, 임진전쟁 중 김면경상의병도대장의 휘하에서 전투 중 남편을 잃은 전설의 피바위 옥녀부인, 거창 현감 한형의 부인 이씨, 급박한 전장에서도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던 청야담당 정대익 형제와 늙은 아버지를 구하려다가 함께 전사한 박은호의 충효정신은 황석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이어져 갈 것입니다.
잃어버린 역사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을 연구하면서 필자는 이순신 장군이 망망대해 한 가운데에서 기댈 곳이 전혀 없어진 그는 외로운 기러기처럼 수루(水樓)에 혼자앉아, 아군인지? 일본군의 공격신호인지? 알 수도 없는 풀피리 소리를 듣는 한없는 고독감과 핏줄이 거꾸로 솟구치는 억울함과 긴장의 고통을 당했을 이순신 장군에 대한 동병상린의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세계전쟁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가 힘든 웅장하고 역동적이며 기적 같은 전쟁! 조선 총독부가 그렇게도 감추고 싶었던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의 진실을 찾고 역사를 바로 잡아 배달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라는 소명이 필자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것은 거부할 수도 없었고 멈출 수도 없었습니다. 황석산성에서 술이 나오나 밥이 나오느냐는 집사람의 하소연에도 필자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황석산성 대첩의 뚜렷한 윤각이 전문가도 아닌 필자에게만 보이고 유능한 전문학자들에게는 왜? 안 보이는지? 이것은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니요 이익도 없는 일을 끈질기게 하는 필자를 보고는 안타까움에 “당신은 열사다! 지사다!” 라고 격려와 칭찬의 말들을 하지만 필자는 전혀 즐겁지도 않고 밤잠을 설치는 날들만 허다합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어떤 민족을 말살을 하려면 그 나라의 역사를 말살을 시키면 된다,” 라고 했습니다. 조상들의 불굴의 투지와 희생을 만년(萬年)의 영광으로 크게 엮어갈 『長大之』에 지위의 고하나 신분의 차이를 막론하고 일고의 가치들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
잃어버린 역사! 이대로는 잠들 수 없는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의 진실을 그대로 덮어 버리기에는 나 자신이 더욱 용서가 될 수 없는 우리들의 억울한 역사입니다. 이제는 그들을 음지에서 양지로 모시고 싶습니다.
-일본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예! 임진전쟁은 태생적신분사회인 조선의 양반사회와 총칼을 다루는 능력으로 신분을 구분하는 일본의 능력제일신분사회가 충돌한 것으로 일본이 승리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능력제일주의의 단점은 자신의 능력만 우수한 줄은 알지만 남들과 공존하려는 배려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내 것이요 저것도 내 것이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라고 하고 “100번을 우기면 진실이 된다.”라고 억지를 부리고 역사를 왜곡하여 후손들을 속이는 한 일본은 절대로 지배국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일본인들이 감추었던 백성의전쟁 황석산성대첩을 밝히는 것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벌이는 자신들만의 잔치에서 신국(神國)이라는 떠벌리는 오만함에 대한 경종을 주는 것입니다. 신국(神國)이라고 하면 일본(日本)이 아니라 역사가 만 년에 이르고 문화와 언어와 종족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조선(朝鮮)이야 말로 신국(神國)입니다. 앞으로 일본이 말하는 신국(神國)이라 함은 대조선(大朝鮮)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일본의 조선침략목적은 임진전쟁이나 정유전쟁이나 일본인을 조선으로 이주시키기 위해 조선인을 말살시키려는 목적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그기에 더하여 정유전쟁에서는 보다 더 많이 보다 더 빠르게 조선사람을 죽이려고 개인적으로 또는 부대들 사이에 경쟁을 시킨 것으로 조선사람 코 3개를 벤 후에는 포로를 잡아서 팔고 돈을 벌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것이 특징입니다. 1차 임진전쟁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여 돌아갔으나 기대했던 풍신수길의 논공행상이 없고 또다시 전쟁터로 내 몰린 정유전쟁에서는 살아서 돌아간다고 해도 논공행상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그들은 풍신수길이 허락한 돈벌이용 <코베가 명령>에 지휘관이나 병사나 조선사람의 코를 베는데 집착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투 중 일본군은 조선인과 명나라의 군인과 일반인은 물론, 전사한 일본군 동료나 부상자들의 코까지도 무자비하게 베어 일본군 스스로가 궤멸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잔인한 코베기명령은 1597년 6월 15일 부산에서 하달이 되었는데 이것 또한 이순신은 절대로 재기할 수 없다고 보고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다고 판단한 오만한 자신감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무라 싸워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 조선군의 코는 보이지도 않고 벨 수도 없었고 16일 밤과 17일 18일 새벽 성주 백사림이 구로다와 내통하는 그 순간까지 일본군의 전투는 성안의 조선군의 코가 목표가 아니라 자기들끼리 동료들의 코를 베는 집단 난투극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모리대루도 우군대장과 조오소가베 모도지가 장군들이 부상을 당하여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전주성에 도착하자마자 보고를 시작하여 90% 궤멸된 부대의 집사 깃가와히로이에는 28,390개, 100% 궤멸된 조오소가베부대는 6,040개, 70% 궤멸된 구로다부대는 3,000개, 나베시마부대는 3,369개를 보고합니다.
거의 모든 부대장들이 출동한 병력의 3배의 코베기 목표를 모두 채웠습니다. 특히 가도오기요마사 같은 경우는 황석산성에서 본인의 부상으로 부대교체를 당하여 전투를 할 수도 없었고 코를 베어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자 부하들의 원성이 높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도오는 조명연합군을 경상도로 유인하는 양동작전을 지속하면서 청주- 진천- 청산- 상주- 영천- 울산으로 이동하면서 상주에 이를 때까지 3만개의 코를 베어 할당된 부대목표를 채운 다음 9월29일 영천에서 노예로서 가장 인기가 좋고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젊은 포로를 잡는 대대적인 포획작전을 전개하여 부하들의 불만을 무마시키고 가도오의 구마모토 성을 쌓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당시 풍신수길의 주요 수입원이 되는 기업장사꾼 인신매매단이 군인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는데 이들은 군인과는 별개의 조직으로 운영이 되었으며 군인들이 잡아주는 포로를 인수하는 즉시 현금을 지불하였습니다.
남원성에서 좌군전체가 벤 코가 총 3,726개인데, 황석산성대첩에 참전한 일본장수들이 보고한 코베기보고서 중 출처가 불분명한 코가 무려 40,799개로 남원성의 열배가 넘는 것으로 보아 황석산성에 참전한 부대장들은 코를 베어 돈벌이를 하는 데에 엄청난 집착을 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정유전쟁 기간 중 일본군은 조선 사람의 코 185,738개 명나라군 코 29,014개 총 214,752개의 코를 베고 매매용으로 잡은 포로는 총 214,752개 ∗ 3개 = 71,584명으로 이것은 일본군들이 장사꾼들에게 팔고 돈을 받은 조선인 포로의 최소 숫자입니다. 누구든지 3개의 코를 벤 후, 잡을 수 있는 포로의 숫자는 제한이 없었으니 쇠사슬 새끼줄에 꿰어 짐승처럼 끌려간 조선인은 얼마인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214,752개의 코 중에는 일본 군인들의 코가 상당한 분량으로 4만〜5만개는 충분이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동료들의 코가 돈벌이 대상이 되어 죽은 자는 일본군인데 이들 대신 포로가 된 자들은 조선인으로 이들은 유럽의 각 지역으로 노예로 팔려가서 「한복 입은 조선청년」 등 루벤스와 같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프랑스화가의 그림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이탈리아 꼬레아 성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상품의 가치가 가장 높았던 젊은 포로는 대부분이 경북영천사람들이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사례가 없는 잔인한 코베기는 일본인들도 인간인 이상 자신들도 비도덕적인 사실에 분노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집권하자마자 바로 코무덤(鼻塚)은 귀무덤(耳塚)으로 그 이름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 코무덤은 귀무덤이 되어 일본 동경 동쪽 국립박물관 뒤 방광사(方廣寺)와 풍국신사(豊國神社) 건너편에 방치되고 있습니다.
-황석산성대첩이 사회에 미친 영향은 어떤 것입니까?
▲ 예! 전쟁의 결과 명나라는 망하고 일본은 풍신수길의 시대가 끝나고 도쿠가와가 집권하는 등 정치에 큰 변화와 영향을 미쳤으나 전쟁의 피해자인 조선만이 유명개의 만인평등의 사상은 묵살되어 백성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또다시 태생적인 양반사회로 돌아감으로서 정유전쟁에서 당하고 30여년 후 1636년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에서 또다시 당하였습니다. 이에 태생적신분사회의 한계에 대한 울분으로 1728년 3월28일 동방오현 중의 한사람인 안음현위천 동계 정온(鄭蘊)의 증손인 정희량(鄭希亮)의 거창거병사건 역시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는 명분으로 수백여 명이 처형되고 천여 명을 귀양을 보냈고 100여 년간 안음현 사람들의 벼슬길을 박탈함으로서 안음현사람들은 인재등용이 안 되는 안음현의 암흑시대가 100년이나 지속되었으니 인적황무지가 되었으며 유명개의 만인평등사상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300여 년 만에 제국주의로 다시 침략한 일본군은 1597년 황석산성에서 궤멸된 원한에 찬 역사적 복수로 1914년 3월1일 안의군을 파군(破郡)하여 안의면으로 강등을 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연속된 안음현의 암흑시대(Dark Age)에 당했던 고통과 울분과 허탈에서 역사적정체성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서부경남에는 혼자만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각개도생의 기회주의가 만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소아적 지역주의와 부정과 부패, 죄의식의 부재현상이 식민사관에 붙어서 지금도 유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황석산성을 공격한 코베기대장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의 성(城)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탄이 폭발하여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1914년 3월1일 파군당한 억울한 안의군은 아직도 조선총독부의 명령 그대로 쇠락한 안의면이 되어 분노(憤怒)가 목구멍에 걸려 억울함을 토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자신의 땅에서마저 기를 펴지도 못하고 자유롭게 살수 없도록 하고 거듭되는 백성의 고통을 아랑곳 하지도 않는 군주가 다시는 등장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연구를 하면서 어려웠던 일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 예! 고향의 잃어버린 역사!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의 연구는 가난한 함양군이지만 스스로 찾아서 도와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정을 해도 도와주기는커녕 의도적이고 조직적으로 끈질기게 방해를 하였던 것이 참으로 큰 고통이었습니다. 역사문화에 관심이 부족했던 함양군은 끝내는 부정과 부패로 썩고 허물어져 자정능력을 상실하고 급기야는 20년 수천 일, 수백 여 날, 밤잠을 설치며 엮고 엮은 연구서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을 폐기처분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만행은 1910년대에 총칼을 든 헌병을 앞세워 역사책들을 수거하던 헌병보다도 더 무섭고 1922년부터 엉터리 조선사를 발표하여 식민사관을 심은 서울대학교 이병도 보다도 더 악랄한 민족적 배반행위입니다. 이러한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다는 것은 수십억 원의 돈을 준다고 한들 하늘의 도움이나 조상들의 영적 도움, 미치지 않고는 연구를 할 수도 없고 긴 세월을 끈질기게 버틸 수도 없는 것으로, 돈으로는 그 가치를 환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밝혀진 진실조차도 순수한 마음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식민사관에 빠져 조선인들이 얼마나 역동적이며 웅장하고 그 능력이 다양하고 대단한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단체장은 지역의 거대한 역사를 연구하는데 지원은커녕 무엇을 해야 할지 우선순위도 모르고 역사문화의식이 전혀 없는 사람, 숟가락이라도 챙겨서 놓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판을 깨려는 단체장도 있었습니다. 다른 지방의 자치단체에서는 단체장과 의회가 스스로 주인이 되어 남들이 보기에 별것이 아닌 것 같은 것도 엄청난 투자를 구사하는 열정을 가진 똑똑한 단체장과 지방의원들도 많습니다. 함양군공무원이 고향의 역사적 진실을 밝힌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을 폐기처분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은 식민사관에 의해 고향의 역사나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한 긍정적인 자아관과 역사관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문화정책의 부재요 역사교육의 부재에서 오는 부작용입니다. 이렇게 조선이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일본의 식민사관입니다. 전국 260여개의 자치단체 중 청렴도가 가장 낮고 부패지수가 가장 높은 내 고향 자치단체가 앞으로는 만인이 찾아오고 살고 싶은 자랑스러운 파라다이스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백성군 7천, 열배도 넘는 7만5천3백 일본군의 총칼에 찢어지고 코를 베이고 자신을 희생하여 가족을 지키려 했던 수천 영혼을 말살하려는 행위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영혼을 잃은 자는 괴물입니다.
필자가 밤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수천 날의 고통과 연구에 쏟았던 열정과 자존심이 무시당하는 것도 괴롭고 슬픈 일이지만 황석산성 대첩의 진실이 또다시 왜곡되고 사라질까 그것이 더 두렵습니다. 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정체감이 개인의 가치관을 흔들고 부정과 부패를 답습하는 원인이 됩니다. 특히 부정과 부패지수가 높고 죄의식이 하나도 없이 고향의 역사를 밝힌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을 페기 처분할 수 있는 것은 식민사관에 함몰된 함양군의 지금까지의 문화역사정책은 지옥중의 지옥이고 아수라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뚜렷한 증거가 됩니다.
특히 남명연구소는 황석산성 대첩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황석산성대첩에서 가장 주요지휘관인 곽준 안음현감, 조종도 함양현감, 거창좌수 군무장 유명개는 모두가 남명의 교육을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받은 지식인들이고 소단위 지휘자인 교위로 참전한 수십 명의 유생들은 대부분이 남명의 영향을 받은 의병출신들입니다. 일본총독부가 1910년 일본국사대사전에 투입과 산출이 일치되지 않는 일본우군의 기동로를 삽입하여 조선과 일본의 후손들을 속이고 순국선열들을 모시는 황암사를 불태우고 안음현청을 흔적도 없이 파괴하고 안의군(安義郡)을 파군하는 등, 400여년전 황석산성 대첩에서 발휘된 강력한 저항정신과 전투의지를 말살하려고 총독부가 총력을 기울여 지워버린 진실을 찾아 다시 밝힌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을 남명연구소가 ”일고의 가치도 없다,“ 라고 하는 망언은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남명연구소가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을 어떤 이유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증명한다면 필자는 20년의 세월뿐만 아니라 7만5천3백 명을 궤멸시킨 백성의 전쟁을 언제든지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증명하지 못한다면 식민사관에 세뇌된 남명의 후손이나 연구원이 남명의 품격을 스스로 떨어뜨리는 좀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일고의 가치“ 발언에 대해서는 공개적인 사과를 요구합니다.
수 십 여명의 의병지도자를 배출한 남명의 사상은 오늘날과 같이 자신의 노력이 부족한 줄은 모르고 오로지 평등만을 주장하는 이율배반적인 시대를 바르게 잡을 수 있는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경남의 한 지역에서마저도 지배적 중심이데올로기가 되지도 못하고 생활이데올로기로써 정착도 하지 못하여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사회가 됨으로써 남명의 사상이 박물관의 전시이데올로기로 전락한 것은 식민사관에 세뇌된 사람들 때문이 아닌가라고 생각이 됩니다.
남명의 사상은 청출어람 유명개의 만인평등사상으로 이어져서 1597년8월 황석산성대첩을 구국의 전쟁으로 이끌었고, 능력제일주의 신분사회인 일본과 청나라가 태생적 신분사회인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수 없는 국가적 모순을 타파하려는 정희량의 1728년3월23일의 거창궐기를 잉태하였으며, 해방 후 안의면 심진동에서 1946.4.23일 모든 권위와 권력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自由)와 정의(正義)와 인도(人道)의 가치(價値)를 추구하는 아나키즘선언으로 독립노농당을 창당하고 인재양성을 목표로 안의중학교를 설립함으로써 그 맥이 이어지지만 표절이 난무하는 시대에 영혼이 없는 감투박사를 만능의 열쇠로 생각하는 오만한 식민사관에 세뇌된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고귀한 남명의 구국사상은 퇴행의 길로 들어선듯합니다. 표절이 난무하는 시대에 감투가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초등학교를 나오지 못한 석가모니, 예수, 마호멧과 같은 선구자들이 고향에서는 대우를 받지 못했지만 그들이 세상을 구원했듯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사람은 학력이나 감투가 아니라 좌고우면하지 않고 가족을 사랑하는 긍정적 의지를 끈질기게 실천을 하는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400여년이 지난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의 진실을 밝혀 수천 년 이어갈 역사를 세우는 일은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긍지와 자부심으로 삶이 자랑스럽고 당당한 자신감을 갖게 하는 일은 더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정부나 지방자단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예!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부정과 부패의 일소라는 차원에서도 올바른 역사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해야 하고 고향과 역사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계발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며 정부는 잃어버린 역사 황석산성은 물론 황암사와 현청을 복원하여 저항의지와 전투의지를 고취하는 자랑스러운 역사교육의 장으로 개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으나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는 말처럼 7만5천3백여 명 중 4만8천3백여 명의 사상자(死傷者)를 발생시킨 백성들의 저항의지와 전투의지를 말살시키려는 역사전쟁을 일본은 100여 년 전에 이미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그들이 만든 식민사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남아 있던 기억마저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최고의 지식인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의 역사를 폄하를 하고 해당지역의 자치단체장이 연구를 의도적으로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식민사관에 빠져서 황석산성 대첩의 중요성을 모르기 때문인데 국민적인 공감대 형성을 위하여 알리고 신념화를 위한 대책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그런데 그것 또한 마음대로 되지를 않았습니다. 교육이라면 받는 사람이나 시키는 사람이나 신물이 난 것이지요. 앞으로는 전투내용을 영화나 만화, 드라마 등으로 국민들에게 알리는 다양한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이 로마의 디도 장군의 공격으로 망하고 전 세계로 흩어져 나라 없는 설움과 엄청난 고통을 인내하며 갖은 고생을 하며 살다가 독일의 가스실에서 600만명이 사라져도 호소할 곳도 없고 들어 주는 곳도 없어 나라를 잃은 지 2000여 년 만인 1948년 5월14일에 나라를 다시 세웠듯이, 부녀자, 노약자, 농민 등 순수한 백성들이 난도질을 당하고 코를 빼앗기며 처절하게 목숨을 바쳐 지킨 잃어버린 역사!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이 400여 년 만에 민족의 정사(正史)가 되는 그날을 기대합니다. 이순신의 조선수군재건과 명량대첩을 지원하고 풍전등화 나라를 구하고 풍신수길을 징계하고 동북아시아 역사적 흐름을 바꾼 세계전쟁사에서도 사례를 찾기가 힘든 거대한 기적(奇蹟)의 역사!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비를 크게 세우고 싶습니다.
궤멸된 일본군 조상들의 잘못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잘못만난 군주 때문에 이역만리(異域萬里) 조선의 심심산골 황석산에서 돈벌이에 미친 지휘관들과 동료들에게 코를 빼앗기고 목숨마저 빼앗긴 일본의 젊은 병사들의 억울한 영혼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후손들이 가슴을 치며 울 수 있는 「통곡(痛哭)의 절벽(絶壁)」을 만들고 인간이 얼마나 더 잔인하여 질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코를 베어 돈을 벌고 사람을 잡아서 가죽을 벗기고 생고기로 뜯어먹고 삶아먹는 일본인의 잔인함을 전 세계인에게 알리고 전쟁사에서 가장 잔인했던 사례들을 비교분석하고 전시하는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전쟁교육장』 일본인이 그렇게도 감추고 싶었던 세계인의 황석산을 만들고 싶습니다.
-박 선생님. 장시간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대담을 여기서 마치고자 합니다. 책 출간을 다시한번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대담진행:송현(시인)=한국인문대학석좌교수. 저서: 시인 함 석헌. 영적스승 라즈니쉬. 한글 기계화의 아버지 공병우 외)
백성의전쟁 황석산성 대첩의 박선호 저자 약력
경남함양출생
육군3사관학교군사학학사과정수료
방송통신대학행정학사
동국대학교불교대학원에서 불교학공부
자유중국정치작전학교원붕반수료
육군대학과정수료
유네스코청소년전문지도자과정수료 '
-약 력
예비역육군소령
새마을중안연수원교수
몽골리아, 베트남 등 현지새마을교육전수
황석역사연구소장
시인
-저 서
황석산성전투와 임진대전쟁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 nowhs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