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2020년5월16일(토) 09시
만난곳:상봉역
산행지: 춘천 금병산 (해발 652미터)
참가자:강신찬, 김부익,김호경,신상기,엄형섭,윤신한,이계혁(산행7명),현지합류 이민우(총8명)
산행기록:윤신한
올 봄 초반에 날씨가 하도 스산하여 꽃이 피기나 할까? 하고 걱정했었는데 5월도 벌써 반이 넘었고 여름을 알리는 아카시아 꽃들도 핀 지 오래다. 이번 달에는 서울을 벗어나 춘천에 있는 금병산을 오르기로 했다. 카톡방에 올라온 참가신청자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보면 코로나19 때문에 아직은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 같다.
집합시간인 8시50분까지 상봉역에 도착하려면 일찍부터 서둘러야 한다. 등산 가는 날 아침이면 왜 그리 시간이 빨리 가는지! 또 늦겠다는 집사람의 훈화(訓話)를 듣고서야 아침을 대충 먹고는 집을 나선다. 상봉역에 도착하니 8시40분. 사방을 둘러보아도 죄다 마스크를 하고 있어 우리팀을 찾기가 어려운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고개를 돌려보니 엄원사, 강총장, 계혁이 손짓을 한다. 매달 보는 얼굴인데도 볼 때마다 더욱 반갑다.
잠시 후 호경이 씩씩하게 걸어 들어왔고 일행은 경춘선 승강장으로 올라간다. 출발시간이 다되도록 신회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강총장이 까치발을 하고 연신 밖을 내어다 본다. 일행은 그렇게 해서 8시58분발 춘천행 열차를 탔다. 다른 열차 편으로 오겠다고 했던 부익이 중간에 청평역을 지났다고 알려왔다.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려 오늘의 목적지인 김유정역에 내리니 바로 뒤에서 부익이 밝게 웃는 낯으로 들어선다. 알고 보니 우린 모두 같은 열차로 도착한 게다. 참석하기로 했던 정우가 먹은 게 탈이 나서 못 오고, 민우는 뒤풀이에 합류하기로 했으니 오늘 참석자는 7명(계혁, 부익, 상기, 신찬, 형섭, 호경, 신한)이다.
10:20 일행은 신회장이 미리 계획한 대로 실레마을로 들어서 김유정 유적지를 따라 조성된 등산로를 들어선다. 여기에서 잠깐 김유정에 관하여 알아본다. 그는 1908년 춘천에서 청풍 김씨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휘문고보와 연희전문을 졸업한다. 그 후 폐결핵에 걸려 실레마을에서 요양을 하게 되는데 이때 낙후된 농촌의 모습을 보고 금병의숙이라는 야학교를 세워 주민들을 가르쳤다. 그 후 생활이 아주 어려워지자 지인의 권유로 1934년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정진하여 1935년 <소낙비>등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한다. 등단 후 2년동안 목숨을 불태우는 열정으로 30여편에 이르는 작품을 저술하였으나 지병인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어 아깝게도 서른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실레는 시루의 강원도 사투리로 마을의 모습이 움푹한 떡시루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원래 이 역의 이름은 신남역이었는데 춘천시가 김유정을 기리기 위하여 역명을 현재와 같이 개명하고 실레마을(지금은 증리(甑里)라고도 한다)에 김유정문학관을 세웠다. 사람이름을 역명으로 사용한 것은 이 역이 처음이라고 한다.
각설하고,
일행은 금병의숙을 지나 등산 안내판 앞에 섰다. 신회장이 오늘 산행은 능선길(산골 나그네길)을 따라 정상으로 올라가고 하산할 때에는 다른 길(동백꽃길)로 내려올 거라고 설명한다. 길 모퉁이 또는 갈라지는 곳에는 아담한 글씨로 그의 소설에 나오는 주요 지점을 표시하는 나무 팻말이 서 있다. 이런 곳을 김박사가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일행은 그의 익숙한 안무에 따라 자리를 잡고 그의 카메라에 찍힌다. 지난 달에 결장한 탓에 오늘 따라 더욱 열성적으로 추억거리를 담으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새벽까지 내리던 이슬비에 목을 축인 수목들이 싱싱해 보이는데 산사나무와 고광나무의 흰 꽃들이 환하게 숲길을 밝히고 있다.
작은 저수지를 지나자 세갈래 길이 나타났고 우리는 오른쪽으로 틀어 능선을 향하여 숲 속으로 들어선다. 하늘이 안 보이게 나무들이 우거진 등산로는 잡목을 베어내고 쓰러진 고목들을 잘 정리하여 시야도 넉넉하니 그야말로 C1(시원)하다. 이런 느낌은 바로 산을 자주 찾는 이들에게 자연이 내리는 은총이리라.
등산로 옆으로 작은 계곡을 따라 물이 비쳤다 숨었다를 되풀이한다. 발 밑은 부드러운 흙길이 이어지는데 질퍽거리지 않아서 좋다. 나뭇잎과 도토리 등이 뒤섞여 흙내음도 향기롭다. 강원도의 산답게 잣나무들이 많은 지 잣을 따지 말라는 경고판도 보인다. 5월이 되었으니 쪽동백도 꽃봉오리들이 올망졸망 매달리기 시작한다. 조금씩 위로 올라가면서 안개인지 박무인지 나무들의 허리 높이에 걸려 있어 신비로운 느낌마저 든다.
길은 아직도 완만한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진다. 650미터급 산이라면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이 있어야 하는데 2시간 가량 비교적 평탄한 길이 이어지니 말이다. 이러다가 필경은 갑작스레 숨이 턱턱 막히도록 급경사길이 나올 게다. 그리 높지도 않은 산인데 하늘을 찌를 듯한 적송들이 우리들의 앞을 막아선다. 이제 능선이 머지 않은 모양이다.
12:30 정상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남은 거리가 각각 1.0Km와 1.32 Km의 두 길이 있었는데 신회장이 일행은 짧은 길로 이끈다. 거긴 그만큼 가파를 텐데….. 그때 그가 말했다. 산은 결코 정상을 거저 내어주지 않는다고. 정말 그랬다. 산정으로 오르는 길은 20도는 족히 되어 보이는 가파른 길이라서 여러 번 쉬고 또 쉬어가며 진땀을 흘려야 했다. 나무 사이로 하늘이 보이기에 능선인 줄 알았더니 능선으로 꺾어지는 지점이다. 그렇게 30여분을 더 걸어 올라간 뒤에야 판자를 이어 조성된 데크(deck)길이 나타났고 그 100미터쯤 위에 전망대가 보였다. 13:00 그 위로 올라서니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오전 내내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사그라진다.
전망대에서 북쪽으로는 춘천 근방의 용화산을 비롯한 명산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높이가 652미터로 그리 높지 않은데도 이렇게 차지한 면적이 넓어 등산로가 길고 수림이 빽빽이 우거진 산도 드문 것 같다. 산이라면 으레 높이부터 물어보는 우리의 습관을 되돌아보게 하는 아름다운 산이다. 금병산은 원래 비단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錦屛山이 맞을 텐데 부익이 힘들여 찾아본 바로는 金屛山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 유래에 비추어 볼 때, 일제가 우리의 명산과 향리의 이름을 제멋대로 바꿀 때 그리 된 것이 아닌가 의심이 간다. 그리고 그런 것을 고치지 못한 채 80년 가까이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는 정부의 처사는 실로 괴이하다.
일행은 전망대와 표지석 앞에서 다시 촬영을 마치고 동백꽃길로 들어서서 하산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얼마 가지 않아 등산로 옆에 마련된 쉼터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 간식을 마치고 하산채비를 하던 다른 팀이 우리를 보자 얼른 자리를 내어준다. 그리고 10분도 지나지 않아 다른 2 팀이 도착하였고 우리도 선선히 한 옆으로 자리를 옮겨 한 지붕 3가족이 아늑한 간식을 즐겼다. 덕분에 바로 옆의 여자팀으로부터 비빔밥도 얻어 먹었다. 산사람들끼리만 나누고 맛볼 수 있는 기쁨이다.
부익이 가지고 온 와인과 아침에 산 지평막걸리에 각자 마련해 온 반찬으로 오늘도 우리 식탁은 진수에다 성찬이었다. 꿈 같은 간식시간이 지나가고 2시가 다 되어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산하는 데에만 1시간 반 가량 걸린다고 한다. 2시까지 실레마을로 오기로 한 민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강총장이 연신 문자를 보내느라고 바쁘다. 올라오는 길이 아름답더니 하산 길 또한 예쁘다. 중간에 엄원사와 호경이 수작(酬酌)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아 사진을 찍어 카톡방에 올렸더니 산행일지 편집인 (최회장)께서 그 사진을 신문에 게재했다고 그 사진과 함께 소식을 전해왔다. 엄원사는 얼굴이 신문에 났다고 환호했고….
출발지점에 돌아오니
15:40.
그 동안은 산행시간이 3시간 안팎이었는데 오늘은 줄잡아도 4시간이 넘는 긴 산행이었다. 3시 전에 도착한 민우는 김유정문학관을 돌아보며 일행을 기렸다고 한다. 이 먼 곳까지 일행을 보러 와준 그의 정성에 모두 고마워했다. 아침에 사진을 찍었던 점순네 닭갈비 집에서 점심을 했다. 긴 시간 동안 모두 힘이 들었던지 닭갈비와 막국수를 깨끗이 비우고 오늘 이 멋진 산행으로 안내한 집행부의 노고에 감사하였다.
일행은 식사를 마치고 마침 열차시간이 임박하여 김유정역에서 열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였다. 즐거운 산행이었다.<끝>
윤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