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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주보 성인과 창설자들
PatronandFounders
주보 성인―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St. Vincent de Paul-Patron of the Society
성인의 젊은 시절
Theearlyyears
빈빈첸시오는 1581년 헨리 3세(HenriⅢ)의 통치 시절, 랑드(Landes) 지방의 중심 닥스(Dax)에서 가까운 푸오이(Puoy)에서 태어났다. 빈첸시오의 고향인 이 작은 마을이 오늘날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요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빈
빈 빈첸시오는 소박한 농민 가정의 6남매 중 세 번째 아들이었다. 그는 시골에서 양을 치며 유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을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보낸 빈첸시오는 평소에 고독과 사색에 잠기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빈 어린 빈첸시오의 영특함은 본당 사제와 마을 사람들을 감동시킬 정도였다. 평소에 빈첸시오를 눈여겨보아 온 본당 사제와 신자들은 그를 닥스(Dax)의 성 프란시스 신학교에 보내도록 부모를 설득하였다. 빈첸시오는 특히 이해력이 뛰어났으며 무엇이나 쉽게 배웠다. 학교생활에서 이미 사제성소가 드러났으며 그의 착한 성품과 깊은 신앙심이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빈 빈첸시오는 1595년에 삭발례를 받은 다음 신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하여 툴루즈로 갔으며 그곳에서 1600년 12월, 20세가 채 되기도 전에 사제품을 받았다.
여러 해의 시련을 거친 후 그는, 1608년말경에 파리의 샌느 가(Rue de Seine)에 거처를 정했다. 이곳은 말그리뜨 드 발로아(Marguerite de Valois; 헨리 4세에게 버림받은 부인)의 집 근처였다. 머지않아 그는 말그리뜨의 지도 신부가 되었다.
빈 그가 드 베뤼유 신부(Father de Berulle)를 만난 것은 ‘성 밥티스트 자선 병원’(Saint Baptists de la Charite)에서 말그리뜨 드 발로아가 베푸는 구호품 담당을 하고 있을 때였다. 신부님은 후에 빈첸시오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영적 지도자로서 그의 생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이었다.
완전한 방향 전환
Acompletechangeofdirection
빈1610년 5월, 헨리 4세가 피살당한 3일 후, 빈첸시오의 장상은 그를 쌩뜨 교구(diocese of Saintes)의 한 수도원으로 임명했다. 모든 상황은 그에게 거룩한 ‘성직 생활’의 시작을 예고해 주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심각한 정신적 시련을 겪게 되었으며 그 결과 갑작스럽고 완전한 방향 전환을 체험하게 된다. 그는 수도원에 머물러 살기를 거부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기로 결정한다.
빈 드 베뤼유 신부의 조언에 따라 빈첸시오 아 바오로 신부는 1612년 5월에 클리쉬(Clichy) 본당으로 배속된다. 그는 다 허물어져 폐허가 된 클리쉬 교회를 완전히 재건하여 모범 본당으로 만들었다.
빈 15개월 후엔 1613년 9월, 드 베뤼유 신부는 빈첸시오 신부에게 클리쉬 본당을 떠나 갤리선 함장인 필립 임마뉴엘 드 공디(Philippe Emmanuel de Gondi) 가(家)로 가기를 권했다. 드 공디 가는 프랑스 북부 지역에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곳에는 800여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빈 그 집안의 가정 교사가 된 빈첸시오 신부는 얼마 가지 않아 그 가문 전체에 큰 감화를 주었으며 그 가족들과 자주 여행을 하게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그는 많은 농민들을 접하고 시골 사제들과 사귀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면서 그는 농민들이 처한 빈곤과 시골 본당 사제들의 빈약한 영성 수준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농촌 지역 복음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농촌 지역 복음화의 필요성
Needtoevangelizecountryareas
빈빈첸시오 신부는 공디 가문의 사람들과의 삶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그러한 심정을 드 베뤼유 신부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그의 마음을 읽은 베뤼유 신부는 그를 브레쓰의 샤티용 레 동브(Chatillon les Dombers in Bress)의 본당 사제로 보냈다. 거기서 그는 버려진 교회와 정신적 물질적으로 황폐해 있는 마을을 만났다.
빈 대부분의 주민들은 빈곤에 찌든 생활을 하고 있었고 돈이 있는 사람은 모두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막중한 임무가 그의 어깨에 지워진 것이다. 그는 리용 교구에 도움을 청했고 그의 요청은 즉시 받아들여졌다.
빈 자신의 모든 시간을 기도와 활동에 바치며 열심히 노력한 결과 상황이 개선되기 시작했다. 본당 신자들이 아낌없는 협조와 노력으로 그를 따라주었다. 빈첸시오 신부는 그곳 가난한 주민들을 물질적 정신적 영성적으로 도와주기 위하여 자선 활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올바르게 살다 올바르게 죽도록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선회’를 세웠다. 자선회 회원들은 자신들을 ‘가난한 이들의 종’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공디 가문에서 그를 다시 요청해 왔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샤티용 레 동브를 떠나 다시 파리로 왔다.
빈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친구인 드 베뤼유 신부와 자주 만났으며 1618~19년에는 자신의 영성 생활에 큰 도움을 준 프랑수아 드 살을 만났다. 그는 자선회를 조직하고 농촌 지역 복음화에 대한 계획을 진행해 갔다. 이 운동을 머지않아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렇게 하여 자선회는 점차 확고한 조직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선교와 더불어 발전해 갔다.
교도소 처우 개선
Improvementstoprisonconditions
빈드 공디 가의 요청으로 빈첸시오 신부는 ‘갤리 교도소의 지도 신부’로 가게 되었다. 그 당시 교도소의 현실은 소름 끼칠 정도로 참혹하였다. 그는 즉시 교도소 상황 개선에 착수하여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으며 그 불쌍한 사람들에게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베풀었다. 자선의 결과는 죄수들의 정신 상태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으며 그것은 사법 당국과 시민들의 여론에 오를 정도였다.
빈 그 시기에 빈첸시오는 활발한 복음 전파와 선교 활동을 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사람들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다. 1625년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다. 그 해 4월 17일에 ‘선교회’(Congregation of the Missions)를 설립하였으며 그의 영성적 반려자 루이 드 마리약과 첫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다.
선교 수도회
TheCongregationoftheMissions
빈빈첸시오 신부는 1632년에 쌩 라자르(Saint Lazare)에 본부를 개설하고 다양한 활동을 펼쳐 나갔다. 그중 일부는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이탈리아, 폴랜드, 복아프리카 그리고 마다가스카르 등으로 진출했다.
빈그가 ‘자선회’의 활동을 강화하고 힘을 결집하는 데엔 루이 드 마리약의 협조가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루이 드 마리약은 그가 죽는 순간까지 유일한 협조자요 친구로서 그를 도왔다. 루이 드 마리약은 빈첸시오 신부가 창설한 모든 단체들을 돌보았다.
사랑의 딸들과 애덕 부인회
DaughtersandLadiesofCharity
빈샤티용 레 동브에서 첫 번째 자선회를 창설한 빈첸시오 신부는 파리의 몇몇 부인들을 모아 ‘자비의 부인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 부인들은 거의가 중산층에 속하는 유력한 사람들로서 빈첸시오 신부의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자비의 부인회’ 회원들은 기도와 자선의 실천으로 빈첸시오 신부의 사업을 도왔다.
빈 자선 사업을 지속해 가기 위한 방편으로 빈첸시오 신부는 1633년 11월 19일에 ‘사랑의 딸회’(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수녀들이라고 부르는)를 설립하였다. 그들이 바로 세계 곳곳에서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수녀들이다.
빈 시골 사제들의 영성적 빈곤을 목격한 빈첸시오 신부는 사제 양성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여기에 모든 힘을 쏟았다. 그의 헌신적 노력으로 오늘날 많은 신학교에서 실시하고 있는 ‘사제 지망자 피정’과 미래 주교들을 위한 ‘화요 강좌’가 시작되었다. 젊은 사제로서 이 강좌에 열심히 참석했던 보슈에는 후에 이렇게 피력했다.
빈 “우리는 사제가 된 후 그 열심한 성직자들의 단체에 가입했습니다. 우리는 매주 만나 빈첸시오 신부의 지도하에 하느님에 대한 공부를 하였습니다. 빈첸시오 신부님은 바로 이 단체의 설립자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에서 사도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설교를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말하십시오.’”
빈 루이 13세(Louis ⅩⅢ), 리슈리유(Richelieu), 오지리의 안느(Anne of Austria and Maxarin)에 대한 영향력으로 빈첸시오 신부는 교회 지도자 임명과 선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화요 강좌’와 ‘윤리 위원회’의 활동은 그를 트렌트 공의회가 시도한 가톨릭 개혁의 주요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왕실의 인정을 받은 빈첸시오 신부는 쌩 라자르 본부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갔다.
빈첸시오―나라의 아버지(國父)
TheFatheroftheCountry
빈우리는 빈첸시오 신부가 펼친 중요한 사업들 중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봉사’(service of founding children)와 ‘전쟁 폐허 지역 원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업은 후에 많은 사회 복지 기관들의 모델이 되었다.
빈 빈첸시오는 버려진 아이들을 위하여 고아원을 세우고 그들의 교육과 직업 훈련을 위한 사업을 하나 하나 일구어 갔다. 30년 전쟁 동안 초토가 된 동부 지역을 지원하기 위하여 빈첸시오는 ‘전국 구제’ 운동을 조직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전 국민에게 대대적 원조를 호소했다. 그는 이렇게 기아 문제를 해결하고 폐허가 된 지역을 재건하고 전염병 퇴치에 공을 세웠다. 쌩 깽땡(Saint Quentin) 지사는 빈첸시오 신부에게 “당신은 우리 국민의 아버지(國父)이십니다.”라고 치하했다.
빈 빈첸시오 신부는 80살이 되도록 잠시도 쉬지 않고 하느님 사업에 열중했다. 그는 사업 운영뿐 아니라 그 사업이 지속될 수 있도록 기반을 확고히 다져 두었다. 그는 1660년 9월 27일, 과로에 지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729년에 복자품에 올랐으며 1737년 6월 16일에 성인품에 올랐다.
자선 사업의 주보 성인
Patronofworksforcharity
빈1833년에 프레데릭 오자남과 그의 동료들은 빈첸시오 성인을 주보 성인으로 모신 새로운 회를 설립하였으며 교황 레오 13세께서는 1895년 5월 12일에 그들 자선 사업의 주보로 선포하였다.
매년 7월 19일에 거행해 오던 그의 축일이 1970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전례력에 따라 9월 27일로 이동되었다.
빈 빈첸시오 성인의 유해는 파리의 세브르 가 95번지에 있는 라자리스트 회(Lazarist Father at 95 Rue de Sevres, Paris)에 안치되어 있다.
빈 Chalumeau 신부가 쓴 의 서문에서 다니엘 롭스는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빈“역사는 빈첸시오를 인류의 가장 뛰어난 인물로 인정할 것입니다. 볼테르(Voltaire) 자신도 그분께 깊은 경의를 표했으며 교회도 그를 탁월한 신앙의 증인으로 인정합니다. 르네 그루쎄(Rene Grousset)가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빈첸시오 신부는 인간의 운명을 숭고한 차원으로 들어올린 위대한 ‘지도자들’의 한 분이십니다.
빈 랑드(Landes)의 농부의 아들이 그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달해 주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가장 본질적인 것을 상실했을 것입니다. 그가 살았던 폭력의 시대, 곧 그리스도 국가인 프랑스가 영성의 절정에 도달했던 그 시대에 빈첸시오의 역할은 하느님의 섭리였습니다. 이를 의심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 관련서적
"St. Vincent de Paul"
byCalvet.PublishedbyAlbinMichel,Paris1948
"St. Vincent de Paul and Charity"
byRev.FatherA.Dodin,C.M.PublishedbySevil,Paris1965
"The Life and Works of St. Vincent de Paul"
InthreevolumesbyPierreCost,C.M.translatedbyJosephLeinard,C.M.NewprintingavailablefromNewCityPress,206SkillmanmAve.Brooklyn,N.Y.11211U.S.A.
"Vincent de Paul - Correspondence, Conferences, Documents"
TheauthoritativecollectionbyPierreCosteC.M.ofalltheavailabletalks,lettersandconferencesoftheSaint.NewtranslationbeingpublishdebyNewCityPress.Firstvolumealreadypublished.
"St. Vincent de Paul"
PopularsytlebookbyW.V.Woodgate,1958.PublishdebybrowneandNolan,RichviewPress,Dublin,Ireland.
"St. Vincent de Paul. - Servant of the Poor"
ReadablebookbyIginoGiordani,translatedbyThomasITobin,1961.PublishedbytheBrucePublishingCo.,Milwaukee,U.S.A.
"The Faith of St. Vincent"
byJacquesDelarue,C.M.translated1979.organizedbyVincentianFather,Australia;currentprintingexhausted.
"Vincent de Paul - Evangelizer of the Poor"
BookcontainingseminartalksonSt.Vincentandhisfollowers,translatedandprintedthroughtheVincentianFathers,Australia1975.
"The Greatest of These"
BookletbyMarieJ.F.Marmontel,1942,reprintedbytheCatecheticalGuild,SaintPaul,Minnesota,U.S.A.
"St. Vincent de Paul"
PamphletbyJanesMcCormark,C.M.PublishedbytheCatholicTruthSociety,38/40EcclestonSquare,LondonSW1V1PDEngland
"Vincent, Louise, Ozanam"
PamphletbySisterLucyArcher,D.C.PublishedfromDarlingtonCarmel,U.K.,1981.ObtainedfromDaughtersofCharity(D.C.)inAustralia.
"The Man Who Said 'Yes'"
Pamphletprintedin"TheAnthonian",1978,fromtheSt.Anthony'sGuild,P.O.Box2948
프레데릭 오자남―주창설자
FredericOzanam―MainFounder
빈앙토안느―프레데릭 오자남(Antoine-Frederic Ozanam)은 1813년 4월 23일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리용 출신인 그의 부모님은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임시로 밀라노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신앙심이 깊은 오자남의 가족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가르쳐 주었고 사회적 불의와 무거운 고통의 짐에 짓눌려 사는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도록 교육하였다.
빈 오자남은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영민하고 통찰력이 깊은 그는 흔히 철학 초보자들이 겪는 일종의 불신과 회의론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탁월한 철학자로 명성을 떨치던 노아로 신부(Father Noirot)를 만나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회의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빈 그러한 의미에서 노아로 신부는 오자남의 가톨릭 신앙을 확고히 다져 준 분이었다. 지식과 성덕을 겸비한 성인 사제 노아로 신부를 사람들은 ‘영혼이 탁월한 교육자’라고 불렀다.
빈이렇게 청년기의 위기를 벗어난 오자남은 열린 정신의 신앙인으로 성숙해 갔다. 그의 신앙은 진리의 원천에서 물을 마실 수 없는 불안한 영혼들을 도와주고 싶은 불타는 열정으로 나타났다. 오자남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도와주는 일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정했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이 목표에 충실하였다.
회의론과 부패에 직면한 젊은 그리스도인
TheyoungchristianfacesscepticismanddecayofParis
빈리용 왕립 대학을 졸업한 오자남은 부친의 권고로 파리 소르본 대학 법대에 등록하였다. 그당시 파리는 혼란과 격동에 휩싸여 모든 것이 거의 마비 상태에 있을 때였다. 1830년은 교회의 지지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꿈을 안고 있던 구(舊) 부르동 군주 체제(Bourdon monarchy)가 무너진 해였다.
빈 당신 파리에서는 쌩 시몽(Saint Simom) 학설의 영향으로 회의론이 대학가를 휩쓸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프레데릭 오자남 역시 사상적 고립과 좌절에 빠져들게 된다. 오자남은 1831년 12월 18일에 친구 팔코네(Falconnet)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파리가 역겨울 뿐이다. 여긴 생명도 신앙도 사랑도 없어. 거대한 시체와 같은 이 도시가 내 젊음을 쇠사슬로 꽁꽁 묶어 두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파리의 냉혹함이 내 존재를 얼어붙게 하고 부패가 나를 질식시키고 있어.”
빈 그러나 그는 곧 정신을 차리게 된다. 앙빼르(Mr. Ampere)를 만나면서부터 그의 삶에 변화가 왔다. ‘파파 앙빼르’라고 불리기를 즐겨 했던 이 명망높은 학자는 프레데릭을 자기 집에 불러 아들의 방을 쓰게 하면서 매일 저녁 마주앉아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모든 대화는 “오자남,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얼마나 위대하신가!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라는 결론으로 끝났다.
오자남의 유일한 위로인 ‘학문과 가톨릭 신앙’
“Knowledgeandcatholicism"-Ozanam'sonlyconsolations
빈오자남은 앙빼르(Mr. Ampere)와의 사귐으로 힘을 얻었고 대도시의 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밝은 미래를 전망하기 시작하였고 현세적 바빌론의 폐허 위에 하느님의 도성을 건설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빈 좌절에 잠겨 있는 한 친구에게 오자남은 이렇게 썼다.
빈“나의 유일한 위로는 학문과 가톨릭 신앙이라네!”
신앙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순간부터 오자남의 삶은 확고한 반석 위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혼란과 사회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치료제는 바로 그리스도교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교의 학문적 역사적 진리를 증명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빈 파리로 떠나기 전에, 18살도 채 되지 않은 오자남은 이미 ‘고대 역사적 종교적 도덕적 신념에 의한 가톨릭 진리의 논증’이라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었다. 후에 교단에 서게 될 이 학생은 이렇게 자신의 학문과 계획을 충실히 진행시켜 갔다.
빈 믿음의 원천인 이 역사 속의 신앙을 친구 동료들과 나누기를 원했던 오자남은 하루에 15시간을 외국어 공부와 가톨릭교 이외의 여러 종교 연구에 몰두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소르본 대학에서 자기와 같은 이상을 가진 친구들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합심하여 지칠 줄 모르고 뛰었다.
빈 그들은 가톨릭 신앙에 대한 교수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반대자들의 논쟁에 당당히 맞서고, 쥬프로아(Jouffroy) 교수의 해명을 받아 내는 등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진리의 증인, 오자남은 무엇보다 먼저 젊은 동료들의 신앙 강화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과감한 결단력으로 대표단을 이끌고 파리의 껠랭(Mgr. Quelin) 대주교를 찾아가 강론을 재개해 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번번히 허탕치고 돌아왔다.
빈 그들의 끈질긴 설득으로 대주교는 1835년에 앙리 라코르데르(Henri Lacordaire) 신부에게 노틀담 대성당의 강론의 맡겼다. 이 미래의 도미니꼬회 신부는 자신의 새로운 설교 방식으로 문제의 핵심을 놓고 그리스도교 반대자들과 1대1로 대결했다.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강의실에서 다루어지는 내용들은 책이나 신문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빈 이러한 고무적인 결과에서 힘을 얻은 오자남은 지성인과 종교인을 위한 이 운동을 널리 확산시키기 위하여 노력을 배가했지만 그의 시도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1830년 이후 프랑스 가톨릭 신자들은 매우 분열된 상태에 있었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무너진 제도의 복구 외에 다른 희망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자남과 그의 동료들의 입장은 달랐다. 이 젊은 친구들은 과거의 제도에 매달릴 것이 아닐 신앙의 본질, 곧 형제적 사랑과 사회 정의 위에 세워진 정신적 인간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빈 이들의 사상은 1832년에 임마뉴엘 베일리(Emmanuel Baily)가 창설한 사제들의 신분인 <가톨릭 트리뷴>(Catholic Tribune)에 발표되었다. 정치면에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글이 실렸다.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지나가고 변화하는 정치적인 것에 우리의 정신을 쏟는 것을 결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학회’에 합류하다
OzanamJoinsthe"societyofgoodstudies"
빈<가톨릭 트리뷴>에 속하는 ‘역사 철학회’가 있었다. 이 학회의 목적은 무엇보다 가톨릭 학생들에게 철학, 역사, 종교에 관한 취미를 고양시키고 맛들이게 하는 것이었다. 오자남의 꿈은 가톨릭 사상을 토대로 학문의 쌓아 가는 동지들의 모임을 갖는 것이었다.
빈 그는 자신의 이념을 동료 친구들에게 전달해 주려고 애를 썼고 친구들은 종교사 연구에 열중하였다. 오자남은 인도 신화에 관하여, 랄리에르(Lallier)는 이슬람학에 관하여, 라마슈(Lamache)는 중세 건축학에 관하여, 타일랑디에(Taillandier)는 수도회에 관한 강연을 담당하였다.
빈 대학생 동아리인 이 ‘역사 철학회’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었고 누구나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었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젊은 학도들은 여기서 가톨릭교의 본질과 교리 그리고 실천에 관하여 마음껏 토론하고 논쟁과 공방도 벌렸다. 그들은 이 동아리에서 자신들의 질문에 대한 교회사적, 그리고 복음의 정연한 답변은 반대자들의 견해를 설득하였고 마침내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빈 그러나 승리는 늘 오자남 편에만 있지 않았다. 때로는 경험이 없는 젊은 친구들이 학회의 입장을 약화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예의 바른 친구들이었지만 학회의 입장을 대변하기엔 아직 미숙한 데가 많았다. 게다가 학회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는 질문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빈 “교회가 지난 수세기 동안 실천해 온 사회복지 사업은 존중되고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교회에 자선 사업 단체들이 존재하는가? 있다면 그들은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는가?” 등의 이러한 공박에 제대로 답을 할 수 없었던 오자남의 동료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행동하는 신앙인
Needtotranslatefaithintoaction
빈그러한 현실 앞에서 오자남과 그의 동료들은 신앙을 되찾기 위하여 논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타일랑디에는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실천합시다. 우리는 자선을 실천에 옮기는 살아 있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매우 절박한 문제입니다.”
빈 어느 해 겨울이었다. 학회 모임이 끝날 무렵 타일랑디에는 동료들에게 순수한 지성 활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재삼 주자했다. 그러자 그 때까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오자남이 일어나 외쳤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일은 하느님을 위한 일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갑시다. 우리는 가난한 형제들에게로 가야 합니다!”
빈 그날 밤, 오자남과 타일랑디에는 추위에 떨고 있는 동네의 한 가난한 사람에게 장작을 한아름 안고 갔다. 그 순간부터 행동하는 사도직이라는 새로운 사상이 이들의 주요 과제가 되었다.
빈 1831년 5월에 오자남은 항상 유익한 조언을 해 주는 베일리와 의논한 후 <가톨릭 트리뷴> 사무실에서 빈민들에게 봉사할 뜻이 있는 친구들과 만났다. 그들은 모두 일곱 사람이었고 그중에는 20살이 채 되지 않은 젊은 친구도 있었다. 그 날이 회의록은 없지만 우리는 필요하다면 참석자들의 진술을 참고하여 그 회합의 정확한 성격을 추정할 수 있었다.
빈 오자남과 그의 동료들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지성적 노력이 기대하는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겸손하게 시인했다. 이들은 가톨릭교의 진리는 이성으로보다는 행동으로 증언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확인했다. 이들은 세상에서 빈곤과 불의가 사라지려면 아직 멀었다고 결론짓고 한 단체를 설립하자는 데에 합의했다.
빈 새로운 경제 상황은 삶의 개선보다는 가증스런 사회적 병폐를 증가시킬 뿐이었다. 갖가지 불의와 빈곤과 굶주림, 추위와 질병과 고통스러운 현실에 맞서 이 젊은 사도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감으로써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답하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했다.
빈
빈 이들은 파리 시에 가장 빈곤한 지역인 무페타르가(Mouffetard)에서 살고 있는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라의 딸회 원장인 로잘리 랑뒤 수녀를 찾아갔다. 그 수녀에게 자신들의 취지를 설명하고 약간의 식료품을 전달할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주소를 구했다. 자선 활동 자금은 이들의 주머니에서 나왔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는 이렇게 출발하였다.
탁월한 학자, 오자남
Ozanam-agreatscholar
빈오자남은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했다. 1836년에 법학 학위를 받고,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당분간 변호사 사업을 하면서 리용 대학에서 상법학 강의를 했다. 1839년에는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840년에는 인문 과학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빈 1841년에는 끄로드 포리엘(Claude Fauriel) 교수의 조교수로 일하였고, 1844년에는 소르본 대학의 외국 문학 교수도 강단에 섰다. 1841년 6월 23일에 그는 리용의 쌩 니지에르(Saint Nizier) 성당에서 아멜리 술라크와(Amelie Soulacroix)와 혼인하고 1845년에 첫딸 마리를 낳았다. 그후 오자남은 가정 생활을 하며 교수, 역사 연구, 문학 활동, 사회 활동, 종교 활동 등으로 분주하게 살았다.
빈 배움은 오자남의 열정이었다. 사도적 열정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는 그의 독특한 문제와 표현의 저서들인 <단테에 관한 논문>, <프란치스코의 시>, <독일 연구> 등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전통에 대한 애착과 역사 비판에 대한 직관적 지식 외에도 그의 장르가 지니고 있는 현대적 특성도 마땅히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빈 그는 학구적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전문인으로서의 투철한 책임 의식과 그것이 요구하는 희생정신을 겸비한 탁월한 스승이었다. 그는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학생들의 감정을 상해 주는 말을 삼갈 줄 알았다. 그러나 진리에 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면서 다른 사람의 의견과 자유를 존중했다.
빈 짧았던 교수직을 끝마칠 무렵인 1850년 7월 14일, 그는 친구 뒤피유(Dufieux)에게 자신의 삶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빈“하느님께서 나에게 일에 대한 열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화려한 천재적 재능을 타고났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내 소망은 나의 위치에서 겸손하게 내 모든 삶을 신앙을 위한 봉사에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보잘것없고 무용한 종에 불과합니다. 마치 포도밭 주인이 친절하게 받아 준 11시에 도착한 일꾼처럼 말입니다.
빈 아무런 공로가 없는데도 나는 보람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내 강의에 매력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교 학문과 원칙을 설명함으로써 그들이 교회와 교도권과 수도자들에 대한 거부감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빈 “내 사상을 몇 권의 책에 담아 내고 싶습니다. 책은 아무래도 내 강의보다 수명이 더 길 것이니까요. 교회가 등진 사람들 중 다만 몇 사람만이라도 내 가르침을 통하여 교회에 대한 편견과 의심을 씻어 버릴 수 있다면, 그리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교회의 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것이 지난 10년 동안 내 삶의 목표였습니다. 나는 출세에 대한 야망도 없었지만 소신과 노력을 포기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학자로서 자선가로서의 생애
Alifetimeofscholarshipandcharitablework
빈프레데릭 오자남의 지평은 대학의 한계선을 넘어 계속 확대되어 갔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창설은 19세기 상반기에 일어난 산업 대혁명에 영향을 미쳤다. 직접 연루되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목격한 가난한 사람들의 처참한 처지와 비인간적 상황들, 그리고 그러한 현실이 빚어낸 무수한 희생자들의 운명에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관연 무관심할 수 있었을까?
빈 오자남은 자신이 천부적 지성과 예리한 시각으로 현실을 분석하고 연구했다. 우리는 랄리에르(Lallier)에게 쓴 그의 편지들 안에서 그의 사상과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빈 “오늘날 인류를 분열시키는 것은 더 이상 정치적 문제들이 아닙니다. 그들을 분열시키는 것은 사회적 문제입니다.”
빈 1848년 2월 22일에 프와쎄(Foisset)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우리의 관심을 대중에게 돌립시다. 이들은 많은 것이 필요한 사람들이지만 너무 작은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 생활에 참여할 권리가 있으며 직업 보증과 빈곤에서 벗어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 개혁에 동참
Activeparticipantinsocialreform
빈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계획을 요청했다. 오자남은 파리 대교구의 아프르(Mgr. Affre) 대주교(1848년 혁명 동안 발기케이트 위에서 사망)의 완전한 승인 하에 시대가 요청하는 새로운 계획을 구상하고 이를 추진시킬 준비로 분주히 보냈다. 우리는 여기서 오자남의 앞선 시각과 선견지명에 대하여 일일이 다룰 수 없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빈 그는 19세기 가톨릭 사회 활동가들 중에서 ‘기본 임금’에 관한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공식화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실업과 산재에 대비하고 노동자들의 퇴직금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1848년 4월 15일에 론느(Rhone) 지역 유권자들을 향한 그의 호소는 과감하고 공정한 것이었따. 그의 사상의 많은 부분이 1891년에 선포된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 <새로운 사태> 안에 반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빈 오자남은 사상가인 동시에 활동가였다. 그는 정의와 사랑 안에 민주주의가 확립되기를 열망했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 기대를 걸었다. 머지않아 그는 그토록 아끼는 빈첸시오회를 통하여 자신의 소망을 성취할 수 있었다. 1841년 5월 1일에 그는 자시의 약혼녀 아멜리에게 이렇게 썼다.
빈 “……당신은 내가 빈첸시오회에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 이해할 날이 올 것이요. 이 회는 위험스러웠던 내 청춘기에 나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나에게 희망과 보람을 주었습니다.”
빈 오자남은 가진 자들과 없는 자들이 서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상호 이해의 가장 확실한 보장은 서로 만남이라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가 빈첸시오회의 규칙에서 고통스럽게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봉사하는 것을 회원들의 기본 의무로 규정하고 그들의 영성적 정신적 인간적 발전을 회의 궁극 목적으로 규정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빈 자신을 돌보지 않은 무리한 희생과 관대함은 머지않아 그의 허약한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에게 휴식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그는 1852년말경에 이탈리아로 휴양을 떠났다. 치료는 기대했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는 차츰 기력을 잃고 우울증과 체념 속에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세상에 남겨 두고 떠나야 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그의 남은 날들을 슬프게 했다. 40번째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그는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겼다.
빈 이탈리아를 떠나 마르세이유에 도전하면서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놀라운 정도로 평온한 자세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하느님께 신뢰하라고 이르는 사제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왜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저는 그분을 깊이 사랑합니다!” 몇 분 후, 그는 “하느님, 나의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는 마지막 말을 하느님께 아뢰며 고요히 눈을 감았다.
빈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탄 축일인 1853년 9월 8일은 그리스도와 인류에 대한 봉사로 자신을 삶을 불태운 오자남이 고통스러웠던 병마와의 오랜 싸움을 끝내고 주님께서 돌아간 날이다. 프레데릭 오자남은 자신의 모든 삶을 바쳐 사랑한 젊은 대학생들의 애도 속에 가르멜 수녀원 지하 성당에 고이 안장되었다.
프레데릭 오자남의 복자품
CauseoftheBeatificationofFredericOzanam
빈프랭크 오 브라이언과 에베르 블롱(Bros. Frank O'Brien and Heber Boland)의 공저 에 기록된 바와 같이 프레데릭 오자남의 시복에 대한 시도는 1912년 파리의 아메트 추기경(Cardinal Amette)에 의해 시작되었따. 그때부터 빈첸시오회원들은 협의회 회합 때 그리고 개인기도 때 그분의 시복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 드리고 있다. 1925년 파리 대교구 대주교 회의에서 오자남의 생애와 저서에 대한 조사를 하기로 결정되었다.
빈 그후 프레데릭의 시복에 대한 작업이 많은 진전을 보임으로써 피에르 슈아르(Pierre Chouard)의 말대로 이제 “오자남은 신자들의 귀감으로 제시될 수 있는 ‘하느님의 종’으로써 교회의 공식 인정”을 받게 되었다.
사도좌는 1954년 1월 12일에 그의 시복 조사를 착수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그의 헌신과 가톨릭 반대자들에 대한 투쟁의 삶을 기려 1997년 8월 22일 그를 복자품에 올렸다.
빈 프레데릭 오자남의 시복에 관해서는 프랭크 오 브라이언과 에베르 블롱드의 공저 를 읽기 바란다.
■ 관련서적
"Ozanam"
Centerarybook,PublishedbyG.Beauchesne,Paris1913.
"Frederic Ozanam"
byLeonceCelier,PublishedbyP.Lethielleux,Paris1956.
"Frederic Ozanam"
SpecialNumber(37/39)of"OzanamNotes",Paris1974.
"Letter of Frederic Ozanam"
1819-1840:PublishedbyBloodandGay-Paris1961
1841-1844:PublishedbyCelse-Paris1971.
"Through the Eye of a Needle"
byMadeleinedesRivieres.
"Frederic Ozanam - A LIFE IN LETTERS"
TranslatedandeditedbyJosephIDirvin,C.M.,PublishedbytheNationalCounciloftheUnitedStates,4140Lindell,SttLouis,Missouri63108
"Ozanam in his Correspondence"
byTheRightReverandMonsignorBaunard.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
St.LouisedeMarillac
빈“고통과 친절과 실천에서 탁월함을 보여준 루이즈 드 마리약에 관하여 연구하는 사람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 견디지 못할 것이다. 빈첸시오 아 바오로 성인에게 많은 은혜를 입은 마리약은 늘 성인께 대한 고마움을 강조하였다. 마리약은 마치 성인의 그림자처럼 그분의 자취를 따랐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리약에 관하여 비교할 수 없는 분의 광채에 가리어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빈 칼베트 주교(Mgr. Calvet)는 1591년 8월 12일에 파리에서 태어나 1660년 3월 15일, 빈첸시오 성인보다 6개월 앞서 세상을 떠난 성녀께 바치는 책에서 그렇게 술회하고 있다.
빈파리의 한 과부가 빈첸시오 신부를 처음으로 만난 후 그의 영성 지도를 받기 시작한 것은 1625년 성탄 전야였다. 이들의 만남이 위대한 자선 사업을 태동시켰을 뿐 아니라 현대 교회에 혁명적 사건을 일으켰다는 의미에서 이들이 만난 날은 현대 교회사에 매우 중요한 날이기도 하다. 이들의 만남은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수도자가 수도원 밖으로 나온 것을 말한다.
빈 고결한 영혼의 소유자 루이즈 드 마리약은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St. Teresa of Avila), 글라라 성녀(St. Claire), 콜레트 성녀(St. Colett)와 같은 대성녀들의 대열에 속한다. 빈첸시오 신부는 그를 성녀로 생각하였다.
빈어늘 날 아르스의 성인은 “죄인들과 함께 사는 것은 짐”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빈첸시오는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하느님께 완전히 속한, 그분의 뜻에 완벽하게 충실한 영혼을 동료 일꾼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위안이 아닐 수 없다.
빈 루이즈 드 마리약의 성덕은 빈첸시오 성인의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마리약의 사명을 키워 주는 데 5년을 바쳤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660년 3월 15일에 마리약이 하느님께로 돌아갔다. 그때 빈첸시오 신부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 눈물은 행복과 감탄의 눈물이었다.
빈 빈첸시오 신부는 병석에서도 사랑의 딸회 수녀들을 자기 방에 불러 그들의 어머니 루이즈 드 마리약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였다. 마리약에 대한 칭송은 바로 그녀의 영성 지도자인 자신에 대한 칭송이기도 했다.
하느님의 종 루이즈 드 마리약과 빈첸시오 신부
AtirelessservanttoGodandMonsieurVincent
빈루이즈 드 마리약 성녀는 순명을 결코 수동적 자세와 혼동하는 일이 없었다. 루이즈 드 마리약은 빈첸시오 신부가 하는 모든 사업, 곧 사라의 딸회와 자선 부녀회를 포함하여 버려진 아이들, 죄수, 노인들을 위한 사업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마리약은 빈첸시오 신부에겐 언제나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양해를 구할 필요 없이도 언제나 무엇이나 부탁할 수 있는 벽이 없는 사람이었다.
빈 빈첸시오 신부는 성 나자로의 집이 가난한 사람들로 넘치면 그들 중 일부를 언제나 지칠 줄 모르고 헌신하는 이웃 자선가인 마리약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리약은 하느님과 빈첸시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빈 사랑의 딸회 수녀들에게 확고한 영성을 심어준 사람은 빈첸시오 성인이었기에 그를 그 수녀회의 창설자라 부를 수 있다. 17세기 수녀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봉사를 하기 위하여 수도원 문을 나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현대인들에게는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 봉헌된 여성들이 거리에 다니는 것은 스캔들이나 다름없었다.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은 그러한 편견들을 과감히 극복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성직자, 귀족, 중산층의 반대에 맞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갔다.
빈 마리약은 현대 간호법과 교육을 사회와 교회에 제공한 사람이다. 모든 여성 수도회는 만사에 철저하고 인정 넘치는 마리약의 은혜를 많이 입었다.
어린 시절에 겪은 두 가지 시련
Twotrialsearlyinlife
빈실제로, 하느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시련을 통하여 마리약의 사명을 준비하고 계셨다. 그녀의 삼촌 중 두 명이 리슈리유(Richelieu) 독재 체제의 희생자였다. 그녀는 가족들의 뜻에 따라 수녀원에 가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결혼을 해야 했다. 마리약은 병석에 누어 있는 남편을 돌보면서 간호하는 법을 익혔다. 그러한 방법으로 하느님께서는 그녀를 이 세상에서 불행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증인으로 삼으셨던 것이다.
빈 1632년 6월 4일, 긴 밤을 지새우는 동안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길을 보여주셨다. 내면의 빛이 그녀의 미래의 사명을 밝혀 주었다. 그녀는 머리 수건과 수녀원이 없는 수녀가 될 것이며 언제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일반 집에서 살 것이라는 예시를 받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다음 해에 빈첸시오 신부와 만나게 된다. 빈첸시오 신부는 5년 동안 그녀의 조언자 역할을 했다. “천천히 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께 기도를 많이 하십시오.”
빈 5년 후, 쉬레스네(Suresne)의 양치기 처녀 말그릿트 나소(Marguerite Naseau)가 빈첸시오 신부와 마리약을 찾아왔다. 말그릿트는 하느님께서 적당한 때에 보내 주신 성소자로서 사랑의 딸회 수녀원의 첫 번째 회원이 되었다. 그녀의 뒤를 이어 프랑스 전역에서는 물론 아르헨티나와 콜롬보에서까지 많은 순박한 처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루이즈 드 마리약은 갈릴래아의 첫 제자들을 가르치신 스승 주 예수님의 표양을 따라 이 아가씨들을 교육시켰다.
빈 사랑과 성덕의 탁월한 결실은 보편 교회의 초자연적 사랑의 체현인 가난한 사람들의 종이 되는 것이었다. 3세기 동안 프랑스와 세계 전역에서 무려 60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하느님과 고통 받는 사람들을 섬기기 위하여 이 사랑의 학교에 들어왔다.
빈 실제로, 교회 역사에서 성 빈첸시오와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의 딸들보다 사랑의 결실을 더 많이 거두어들인 사람들이 있었는가! 빈첸시오는 위대한 하느님의 사업을 시작하려는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맺는 생명의 나무가 되어 주십시오.”
루이즈 드 마리약은 빈첸시오의 소망을 완전하게 실현하였다.
빈 사랑의 딸들은 수백년 묵은 랑퀸의 오크 나무처럼 빈첸시오와 루이즈 드 마리약이 그리스도의 땅에 심은 뿌리 깊은 나무이며 그 가지들은 오늘날 전세계로 무성하게 뻗어 나가고 있다.
이렇게 하여 자선 부녀회 회장 구쏘 여사(Mme Goussault)가 임종의 침대에서 한 예언적 꿈이 실현되었다.
빈 “오, 빈첸시오 몬시뇰님, 저는 하느님 앞에 무리지어 있는 사랑의 딸들을 꿈에 보았는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빈 그녀의 꿈은 참으로 예언적인 것이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빈첸시오 성인에게서 물려받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사랑의 딸들은 1991년 현재 거의 3만 명에 달하고 있으니 말이다.
■ 관련서적
“The Street of the City"
bySisterLucyAarcher,D.C.DaughtersofCharityinAustralia에서 구입할 수 있음.
“Louise de Marillac of the Ladies and Daughters of Charity"
byJosephIDirvin.PublishedbyDoubleday,Toronto,Canada.
호주 사랑의 딸회 수녀들(Daughters of Charity)을 통하여 구입할 수 있음.
로잘리 랑뒤 수녀
Sister Rosalie Rendu
어린 시절부터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신한 로잘리 랑뒤
Devotedtothesickandpoorfromanearlyage
빈프랑스 혁명(1789~1799년) 동안 많은 수도원들이 추방당하고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본당에서 쫓겨났다. 그러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외국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스위스에서 안전을 찾으려는 일부 수도자들이 국경 근처 꽁포르트(Confort) 마을의 랑뒤 가족에게 피난처를 요청했다. 당시 쟌느 마리 랑뒤(Jeanne Marie Rendu)는 애띤 소녀였다.
빈 그녀는 피신 중인 한 사제가 어머니의 지하 골방에서 몰래 드리는 미사에 참례하면서 종교적 체험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어머니를 도와 거리의 병자들과 굶주리는 사람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먹을 것을 주고 자선을 베풀었다.
빈 얼마 후 쟌느 마리는 젝스(Gex)에 다시 문을 열게 된 우술라회 수녀원에 들어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했다. 그녀가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의 사랑의 딸들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1660년경에 빈첸시오 성인이 손수 세운 젝스 병원에서였다. 쟌느 마리는 그 자선 병원의 환자들을 방문하면서 이들이 겪는 고통과 참상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쟌느 마리는 2년간 어머니를 도와 환자들을 돌본 다음 젝스 본당 사제의 조언에 따라 파리에 있는 사랑의 딸회에 입회했다.
사랑의 딸회의 젊은 수녀
YoungDaughterofCharityinParis
빈15세의 쟌느 마리는 1802년 5월 25일에 학교 친구 한 사람과 사랑, 겸손, 단순의 교육을 받기 위해 사랑의 딸회에 입회하였다. 그 다음 해에 에뻬 드 보아 가(Rue de l'Epee de Boie)에 있는 빈민 ‘쉼터’로 발령을 받고 거기서 로잘리 수녀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16세였다. 에뻬 드 보아는 파리에서도 가장 지저분한 빈민가였다.
빈 로잘리 수녀는 거기서 일곱 수녀와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사업에 종사하며 일생을 보냈다.
이 수녀들은 초등학교, 진료소 그리고 의류 보급소에서 일하면서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였다. 로잘리 수녀는 아동반을 담당하였는데 후에 어른들의 야간 학교도 만들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그녀는 다른 수녀들과 어울려 병자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빈민 가정들을 돌며 식료품과 옷을 나누어 주었다.
빈 로잘리 수녀는 21살이 되던 해인 1807년에 가난, 정결, 순명,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 서원을 하고 사랑의 딸회의 정식 수녀가 되었으며 7년 후에는 그 집의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파리에 ‘황금 도시’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 지역에는 1,200명이 넘는 헐벗고 굶주리느 실직자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술고래들에게다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동거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빈 로잘리 원장 수녀는 그 지역 방문 담당자로 튼튼한 한 젊은 수녀를 임명하고 이렇게 말했다. “그들 대부분은 가난하기 때문이 아니라 타락했기 때문에 거기 살고 있습니다. 사랑의 딸들이 그들에게 베풀어야 할 선행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빈 경찰 당국은 수녀가 그 지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원치 않았다. 특히 젊은 수녀가 황금 도시에 가는 것은 위험천만이라며 그 수녀를 수녀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러자 로잘리 수녀는 그 젊은 수녀에게 말했다. “수녀님은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경찰들은 인간 정의를 위하여 거기 있는 사람들이지만 수녀님은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기 위하여 그곳에 갑니다. 수녀님이 할 일을 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수확은 하느님께서 거두실 것입니다. 모든 은총에는 때가 있습니다.”
수련자와 예비자들의 훌륭한 수련장
SuperioresswhotrainedmanySistersandPostulants
빈로잘리 수녀는 40년 동안 한 분원의 원장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수련자와 예비자들을 교육시켰다. 상냥하고 넉넉한 성격의 로잘리 수녀는 젊은 수련자들에게 인자한 어머니와 같았다. 수련자들에게 무엇을 강요하거나 명령하는 법은 거의 없었지만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는 단호하고 과감했다.
빈 그녀는 깊은 이해심과 동정심의 소유자였지만 소심하거나 우유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또한 이웃의 부족한 점을 이해하고 잘못을 쾌히 용서해 주었다. 누구에게나 인정스럽고 이웃의 선익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나 기꺼이 헌신했다. 그녀는 수련장이었지만 수하 수녀들과의 친분 관계는 남달랐다. 수녀들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언제까지 함께 살고 싶어했다. 로잘리 원장 역시 자신이 가르친 수녀들을 다른 곳으로 떠나 보내는 것을 싫어했다.
빈 1855년에 아일랜드의 드로그헤드에 사랑의 딸회를 설립한 베리앵 수녀는 그녀에게 수련을 받은 사람이었다. 로잘리 수녀에게 교육을 받은 수녀들은 후에 그녀의 표양을 따랐으며 착한 의견의 성모회를 설립하여 나이 들고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았다.
그녀의 우선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방문이었다
Visitstothepoorwereherpriority
빈로잘리 수녀는 낮에는 육아실을 밤에는 행려자들의 쉼터를 운영하며 모든 연령층의 사람에게 봉사했다. 1832년, 콜레라가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을 때였다. 수녀들은 70명의 고아들을 돌보며 그들의 부모가 되어 주었다. 수녀들은 자선 활동 자금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선의의 사람들을 보내시어 모든 것을 친히 해결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식료품, 의복, 건물 등 자선에 필요한 모든 물적 지원을 제때에 배려해 주셨다.
빈 1838년에는 한 달 동안 그녀의 무료 급식소에서 밥을 먹은 사람이 2,000명이 넘었다.
로잘리 수녀는 그녀의 우선적 의무인 가난한 사람들의 가정 방문을 한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가난한 형제들은 빈첸시오 성인의 말씀대로 ‘주인이요 선생님들’이었다. 로잘리 수녀는 빈민 구제 사업을 좀더 능률적으로 추진시키기 위하여 장상들에게 더 많은 수녀들을 보내 달라고 청했다.
빈 로잘리 수녀의 협조자들 중에는 대학생들과 교수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를 창설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로잘리 수녀의 지도를 받으며 시간을 절약하여 가난한 사람들과 교도소를 방문하고 주위의 병자들을 돌보아 주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창설에 동참
InvolvementinfoundingtheSocietyofSt.VincentdePaul
빈그들은 ‘역사 철학회’라는 학습 동아리에 속하는 학생들이었으며 여기서 ‘자선 협의회’가 시작되었다. 동아리 회원들은 어느 날 로잘리 수녀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를 청했다. 이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1833년에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첫 번째 협의회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빈 프레데릭 오자남은 로잘리 수녀를 찾아간 학생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거기서 그는 많은 것을 배웠다. 로잘리 수녀와의 만남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일생을 바친 오자남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협의회 초기에 이들은 로잘리 수녀의 수녀원에서 자주 회합을 가졌으며 그 수녀는 자선 활동에 대한 구체적 조언과 더불어 방문할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주소를 주었다. 로잘리 수녀가 빈첸시오 성인의 정신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의 초자연적 정신을 이들에게 깊이 심어 준 사람이었다.
빈 빈첸시오회의 총회장 임마뉴엘 베일리는 1842년에 회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회칙의 근원을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의 회칙은 인간의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성인, 곧 빈첸시오 아 바오로 성인의 말씀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성인의 말씀과 일생을 천상 영광의 면류관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회칙의 내용은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께서 여러 해 동안 한 수도회의 아버지로서의 쌓은 경험을 토대로 쓴
빈 회칙에서 취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빈첸시오 성인의 그러한 생각들은 어디서 왔을까? 그리고 로잘리 랑뒤 수녀가 없었다면 빈첸시오 아 바오로 성인의 정신을 어떻게 그 젊은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겠는가?
로잘리 수녀는 빈첸시오회의 초기 회원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호의, 열성, 사랑의 정신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이들은 로잘리 수녀의 조언과 협력과 지도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그녀의 경험을 소중히 여겼다.
빈 협의회를 둘러 나누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을 때 이를 제안한 회원은 즉시 “이건 제 생각이 아닙니다. 로잘리 수녀님의 생각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제안이 만장 일치로 통과되었다. 그럴 정도로 로잘리 수녀의 의견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전 세계의 모든 빈첸시오회원들이 로잘리 수녀를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창설자의 한 분으로 존경하는 것은 당연하다.
빈로잘리 수녀는 1830년과 1848년의 혁명과 1832년과 1834년의 반란 동안의 그녀의 수많은 영웅적 행적들이 높이 평가받아 프랑스의 최고 훈장인 십자 훈장(Cross of the Legion of Honour)을 받았다. 그녀는 훈장을 취소해 줄 것을 당국에 호소했지만 그녀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옷깃에 훈장을 달아야 했다.
빈 그것은 겸손하게 살아가는 그녀에게 큰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 후인 1854년에 나폴레옹 3세가 방문했을 때 그녀는 훈장을 달고 있지 않았다. 이것을 본 황제는 빈첸시오 성인의 유해를 동봉한 금 십자가를 보냈다. 이렇듯 그녀의 공적이 크게 인정받게 된 것은 20년 동안 끊임없는 봉사와 자선 활동으로써 프랑스 국민의 수난에 동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봉사와 헌신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위한 것이었으며 혁명이 끝난 후에도 12년간 더 계속되었다.
빈 로잘리 수녀는 1840년부터 여러 가지 병을 앓았다. 그러나 그녀는 1856년 2월 7일, 77세의 나이로 하느님께 가기까지 여러 가지 사업들을 손수 이끌어 갔다. “나의 자녀들인 가난한 사람들! 주님, 제가 세상을 떠나고 없더라도 저들을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주보 성인이신 천주의모친, 성모 마리아
Mary,MotherofGod-PatronessoftheSociety
빈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초창기 땜부터 회원들은 천주의 모친이신 성모 마리아께 깊은 신심을 드러냈다. 협의회 회합을 시작하고 마칠 때 우리는 사도직에 항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덕을 충실히 실천할 수 있도록 성모님의 보호와 인도를 청하는 기도를 드린다.
빈 우리의 창설자인 프레데릭 오자남은 천주의 모친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대한 각별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으며 마리아 신심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심화시켜 갔다. 성모님께 대한 그의 깊은 신심은 그의 시복 청구서에도 명시되어 있다.
빈 오자남은 회원들에게 마리아께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호의 천상 주보이심을 늘 상기시켜 주었다. 그는 회가 창설된 후 얼마 가지 않아 티 없으신 마리아, 천주의 모친을 회의 천상 주보로 모시자는 의견을 공식적으로 제시했다.
빈 협의회의 회합시 성모송을 드리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 축일을 회의 축일로 정하자는 것 역시 오자남이 제시한 것이었다. 1853년에 세상을 떠난 오자남은 그가 죽기 바로 전에 자신의 부인과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하며 성당까지 걸어갔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나의 마지막 걸음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나의 마지막 걸음이 하느님과 천주의 모친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방문하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빈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회원들은 천상 주보이신 천주의 모친, 원죄 없으신 마리아께 대한 부드러운 사랑과 신심을 전통으로 간직해 왔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
PrayerofPopeJohnPaulⅡ
| 우리의 어머니이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 저희 안에 생활하시고 활동하시고 저희를 통하여 말씀하소서. 저희 안에서 생각하시고 저희 마음 안에서 사랑하소서. 저희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고 저희를 가르치시고 예수님께 인도해 주소서. 저희 언행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고 밝혀 주시고 확고히 해 주소서. 저희 영혼과 삶과 전 존재를 바치오니 오로지 당신의 것으로 삼으소서. 저희 영혼이 끊임없는 흠숭과 감사를 당신께 드리게 하소서. 저희 안에서 저희를 통하여 전구해 주소서. 저희가 당신 안에 살게 하시고 당신과 영원히 하나되게 하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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