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 요약]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오늘은 지난주에 전한 말씀을 다시 되짚어보고 또 지난주에 전해드리지 못한 부분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15장 5절을 보면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불러내신 아브라함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해 ‘밤’에 아브라함을 밖으로 이끄십니다.
물론 본문에는 ‘밤’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뭇 별’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그 시간이 ‘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밤’은, 물리적인 밤을 말할 수도 있지만, ‘인간을 포함한 소망이 없는 이 세상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 소망을 주신 시간이 ‘어두운 밤’이었다는 것은~
영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가 나타나 있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얼마 전까지 살았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사회를 또, 갈바를 알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밤’은 어떠합니까?
⇨ 그런 세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 그런 자신도 보이지 않습니다. 또, 나아갈 길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별’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 하나님은, 이 세상도, 자기 자신도 그리고 길~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밤’이라는 시간에~
유일하게 보이는 ‘뭇 별을 통해서 그리스도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를 죽음에서 살리시는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 이 세상은 참 소망이 없는 곳, 그리고 자신에게도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이 세상에는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예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뜻’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낮에는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즉 세상이 더 잘 보여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또 자기 자신이 더 잘 보이고,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있는 낮에는~
‘별’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이 주신 소망, 인간을 향하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밤’이라는 것의 ‘영적 의미’는,
이 땅은 흑암과 어두움의 곳, 소망이 없는 곳, 그런 곳에서 절망의 상태에 빠진 인간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때로는 ‘밤과 같은 시간과 환경’을 주시기도 합니다.
⇨ 그런 절망을 만나면 세상도 보이지 않고, 자신도 보이지 않을 때, 길도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예수님이 보이고, 하나님의 뜻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별’은 갈아디아서 3장 16절에서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이 ‘밤과 같은 환경’을 통해서 ‘그리스도 소망’을 받은 것과 같이
사도 바울도 ‘밤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바울은 스올과 같은 곳, 음부와도 같은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당시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로마는 흑암과 같은 곳, 스올, 음부와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바울은~ 옥중서신을 통해서 밖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끊임없이 감사할 것을, 기뻐할 것을, 기도할 것을 강권합니다.
바울도 아브라함처럼 ‘밤과 같은 환경’속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도 바라볼 수도 없었습니다. 길도 없습니다.
⇨ 그래서 바울이 옥중에서 기록한 서신을 통해서 ‘기뻐하라, 감사하라, 기도하라.’ 한 것은~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하는 ‘오직 한 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 18~25절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한탄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과 같은 사도임에도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 내 속에 죄가 거한다.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아서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다.
그래서 나는 곤고하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며 한탄합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 될 수도 없고, 자기 자신에게서는 아무런 선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바울은 25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하며
‘내 주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 외에는 살길이, 승리할 길이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자기 주도적인 교육으로 자기가 주인이 되는 삶을 가르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흑암의 밤, 흑암의 땅’에서 ‘그리스도 소망’을 품게 되었고
바울과 성도들은 ‘흑암의 밤, 흑암의 땅’에서 ‘자기에게 오신 그리스도 생명으로 산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으로 ‘기뻐하는 것이 승리의 길‘이라는 것을 빌립보서 2장 17~18절에서 알리고 있습니다.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전제‘라는 것은, 번제단에서 제물을 불로 태워서 드리는데 이것을 화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체만으로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인데 제물이 다 태워질 때
마지막에 포도주를 부어 그 재물을 더 향기롭게 하는 것을 ’전제‘라고 합니다.
또, 재물을 다 태우고 아직 남아 있는 불에 짐승의 피를 붇는데 이것을 ’전제‘라고 합니다.
⇨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전제‘로 즉 마지막으로 드려지는 제물이 되어서라도 너희에게 말하노니~
’구원받은 은혜로, 소망이신 예수님으로 기뻐할 것‘을 강권합니다.
⇨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처하든 기뻐하는, 감사하는, 기도하는 존재라는 것을 확신에 찬 고백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이 내 소망이 되는, 예수님이 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변질이 되어, 내 욕망을 이루는데 예수님을 끌어내립니다.
나를 통해서 예수님이 사셔야 하는데, 예수님을 이용해 내가 주인이 되려합니다.
아브라함과 바울이 만난 ’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어두운 곳, 사망과 고통의 땅, 참 소망이 없는 곳으로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실 때 이 땅을~
흑암의 땅, 사망의 땅, 그늘의 땅, 눈먼 땅,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은 땅, 감옥 같은 흑암의 땅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인 그들이 바로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본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이끌어 그리스도 소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이처럼,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오직 구속한 주만 바라보는 자로, 그가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좋은 환경에 살았지만, 기도, 찬양, 감사, 기뻐함이 없어서 사단의 꾀에 넘어갔지만
아무리 어두운 상황이라 해도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면 그곳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는 것, 이것이 우리 안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임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한울타리 교회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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