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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집(淸溪集) 홍위(洪葳)생년1620년(광해군 12)몰년1660년(현종 1)자군실(君實)호청계(淸溪)본관남양(南陽)특기사항이단상(李端相), 김수항(金壽恒) 등과 교유
淸溪先生集序 / [序] / 淸溪先生集序[金昌協]
公之胤子郡守天敍。嘗以公遺稿。就先君子刪定。未卒而禍作。郡守君又以是託不佞。且責一言。不佞誼不忍辭。爲之執簡流涕而書其所感者如此。公少學於舅氏樂靜趙公。詩文淸雅典裁。不務叫呶激詭。而以理致勝。章箚尤明白剴切。足以感悟人主意。大抵本之經訓而得於樂靜公者爲多云。乙亥仲春上旬。安東後人金昌協謹書。
숙종 | 21 | 1695 | 을해 | 康熙 | 34 | - | 아들 洪天敍가 문집을 간행하다.(金昌協의 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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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巖集卷之二十二 / 序 / 淸溪集序
숙종 | 21 | 1695 | 을해 | 康熙 | 34 | 45 | 1월, 이조 참의가 되었으나 사직, 체차되다. ○ 3월, 農巖으로 들어가다. ○ 4월, 부제학이 되었으나 사직, 체차되다. ○ 7월, 開城 留守가 되고, 8월, 형조 참판이 되었으나 사직하다. ○ 9월, 農巖에 들어가다. ○ 11월, 대사헌이 되다. 楊州 石室書院에 머물며 講學하다. ○ 12월, 사직, 체차되다. |
金壽恒 1629 1689 安東 久之 文谷, 文翁 文忠
不佞少侍家庭。每聞先君子語及平生執友。必亟稱君實。及長。奉敎於靜觀李先生。亦聞其亟稱君實。君實卽故監司淸溪洪公諱葳字也。方公在世時。不佞尙幼。不及供灑掃其門以奉音旨。然以先君子與靜觀公。交游傾一世。而於公獨亹亹焉。則公之爲公。可知矣。蓋當孝廟之世。聖人在上。髦俊應運。雲烝鱗集。蔚然相章。而公首以其卽位之元年對策。魁多士登第。其明年。先君子又擢魁科。而靜觀公。亦先公一年登第。相繼立於朝。俱以文學行誼。爲後來領袖。旣更迭侍講玉堂。又同賜暇讀書。其相得如律呂之和鳴。芝蘭之同臭。而雖他人論者。亦無敢輕爲軒輊。於是進而論思啓沃。退而切劘砥礪。要以激揚淸議。左右儒賢。以仰贊聖主有爲之志。而公遽沒矣。始朝廷以公兼有政事才。間試州郡。最後擧以畀嶺南節。公益感激自勵。殫竭心力。遂致勞㞃成疾。時尤齋宋先生在朝。數從公前後奏狀。見其致意精勤。無一備數文字。心識之。及聞公卒。謂人曰。向吾見其用精神弘多。固已知其不能久矣。噫。若公者。殆所謂鞠躬盡瘁。以死勤事者歟。然公沒時。年財四十。當世之人。無不惜其蚤世。而先君子與靜觀公。傷悼尤深。旣久而猶追思不已者。以其相期之遠也。公沒前一年。孝廟上賓。時事因亦漸變。靜觀公退遯於野。後公十年卒。而其壽僅贏公一歲。獨先君子立朝最久。名位最隆。而又卒罹罔極之禍。後之論世者。觀於其盛衰存亡禍福之際。而世道之消長。時勢之升降。邦運之否泰。皆可以見焉。其有不喟然太息於斯者乎。嗚呼欷矣。公之胤子郡守天敍。嘗以公遺稿。就先君子删定。未卒而禍作。郡守君又以是託不佞。且責一言。不佞誼不忍辭。爲之執簡流涕。而書其所感者如此。公少
學於舅氏樂靜趙公。詩文淸雅典裁。不務叫呶激詭。而以理致勝。章箚尤明白剴切。足以感悟人主意。大抵本之經訓。而得於樂靜公者爲多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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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332책 (탈초본 17책) 숙종 14년 12월 3일 임인 5/18 기사 1688년 康熙(淸/聖祖) 27년
洪天敍 등이 하직함
○ 下直, 礪山郡守洪天敍, 石城縣監尹推。
*승정원일기 346책 (탈초본 18책) 숙종 17년 7월 11일 갑오 13/14 기사 1691년 康熙(淸/聖祖) 30년
宋相 등은 拿囚했고 李聖麟 등은 身死했다고 보고하고 李衡祥 등은 書吏 등을 보내 拿來할 것을 청하는 義禁府의 계
○ 義禁府啓曰, 京畿三南大同儲置米, 五十石以上擅貸守令, 拿問定配, 十石以上及未捧中千石以上, 拿問科罪, 分給與未捧中十石以上決杖事, 傳旨啓下矣。宋相·南益熏·鄭載厚·柳鳳徵·李文長·李行周·崔紀·趙聖輔·黃欽·尹葕·李舜岳·成至善·尹
·尹棆·韓宗運·洪天敍·鄭檝·柳晑·牟世蕃·任後昌·李世澤·鄭䎖·權持·洪命興·李世翊·柳聖和·趙脩·安世徵·李煿·高後適·孔尙濂·白世興等, 時在京中, 卽已拿囚,
*승정원일기 365책 (탈초본 19책) 숙종 22년 5월 15일 경오 12/13 기사 1696년 康熙(淸/聖祖) 35년
韓配夏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以洪天敍爲戶曹正郞
*승정원일기 365책 (탈초본 19책) 숙종 22년 5월 16일 신미 3/10 기사 1696년 康熙(淸/聖祖) 35년
尹德駿 등이 사은함
○ 謝恩, 舒川郡守尹德駿, 淳昌郡守李溭, 成均博士曺善徽, 鳥島萬戶金胄寬, 南原縣監李浚, 濟州判官李碩臣, 奉常判官韓㙉, 平壤判官尹聖瑀, 司僕僉正元夢翼, 戶曹正郞洪天敍,
*승정원일기 366책 (탈초본 19책) 숙종 22년 6월 16일 경자 15/18 기사 1696년 康熙(淸/聖祖) 35년
尹趾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有政。吏批, 以尹趾仁爲兵曹正郞, 徐文重爲大司憲, 鄭齊泰爲副修撰, 沈權爲輔德, 洪天敍爲麻田郡守
*승정원일기 366책 (탈초본 19책) 숙종 22년 6월 24일 무신 2/16 기사 1696년 康熙(淸/聖祖) 35년
洪柱震 등이 하직함
○ 下直, 靑松府使洪柱震, 載寧郡守洪九齡, 麻田郡守洪天敍, 永柔縣令李蓍徵。
*승정원일기 373책 (탈초본 19책) 숙종 23년 9월 2일 기묘 6/24 기사 1697년 康熙(淸/聖祖) 36년
민폐를 진달하는 洪天敍 등의 상소를 올려보낸다는 京畿監司의 서목
○ 京畿監司書目, 長湍府使李宏, 坡州牧使金斗明, 豐德府使權相夏, 高陽郡守趙泰期, 麻田郡守洪天敍, 爲陳民弊事上疏上送事。啓。答曰, 省疏具悉。疏辭, 令該司, 稟處。
*승정원일기 376책 (탈초본 20책) 숙종 24년 2월 4일 기유 8/9 기사 1698년 康熙(淸/聖祖) 37년
官衙에 眷屬을 많이 거느린 守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누락되는 실수를 범한 宋昌의 推考, 悖妄한 鄭世沃의 汰去를 청하는 司憲府의 계
○ 府啓, 頃日濫率衙眷之守令, 本道査啓也, 畿內數邑, 先入査問之中, 俱被只推勿罷之命, 旋因御史廉問, 郡守洪天敍, 以濫率坐罷, 此是當初本道査啓中, 見漏之人, 其査出不嚴之狀, 據此可知, 不可無警責之道, 京畿監司宋昌推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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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재집 제3권 / 시(詩) / 홍군실에 대한 만사〔洪君實挽〕
1
그대를 곡한 뒤로 나는 천치 같으니 / 自哭君來我若癡
내 마음을 구천에 있는 그대가 알리라 / 我心君在九原知
어제 일 같은 그대와 나의 평생사를 / 依然君我平生事
애사에 쓰자니 한자 한자가 슬픔일세 / 寫入哀詞字字悲
2
예전에 심보 통해 그대와 친해졌으니 / 昔從心甫與君親
처음 만나 알게 된 건 무자년 봄이었지 / 傾蓋初逢戊子春
덧없는 세상에 건성 만남이야 무수하지만 / 浮世面交何足數
진심으로 사귄 친구는 뇌의와 진중이라오 / 襟期相照卽雷陳
3
대과에 합격한 건 내가 조금 앞섰지만 / 金門射策我差先
그대는 낙방하고서 뜻이 더 확고해졌지 / 君困公車志益堅
논의가 훗날에 영수가 될 정도였으니 / 論議後來爲領袖
현관에서 계속 사림의 중추가 되었다네 / 賢關仍掌士林權
4
곧이어 우뚝하게 대과에 급제하였으니 / 裒然俄作大庭魁
조정에 준재 얻은 것 다투어 하례했네 / 爭賀淸朝得俊才
나는 근반에서 붓 잡은 것 부끄러워하며 / 秉筆我慙叨邇列
그대가 시종 난대 사양한 것 찬탄했지 / 歎君終始讓蘭臺
5
청운의 벼슬길 기세 좋게 함께 올라선 / 靑雲高步共騰騫
금란전에서 상번 하번으로 수직하였지 / 對直金鑾上下番
그댄 강석에서 삼매 솜씨 발휘했으니 / 君是講筵三昧手
이치 밝고 말 간략하며 안색도 온화했네 / 理明詞約色仍溫
6
내가 그대와 이조 낭관에 재직할 때 / 逮我同君忝吏郞
그댄 청의 견지해 인재선발 공정했지 / 君持淸議任明揚
미원과 백부에 전후로 근무하였는데 / 薇垣柏府仍先後
그대 간초는 서릿발같이 늠연하였네 / 諫草君能凜有霜
7
무능한 이 몸 문회루에 끼게 되었으니 / 文會樓中着不才
부끄럽게도 당백따라 함께 어울렸지 / 愧隨堂伯共徘徊
명망 있는 그대야 이 선발이 당연하니 / 惟君雅望宜斯選
본래부터 도도하게 펼칠 필력 지녔다오 / 自有詞源浩浩開
8
사월 동호에서 달밤에 뱃놀이 하였으니 / 四月東湖泛月遊
취하여 붓 휘두르매 저마다 풍류객일세 / 醉來揮洒各風流
왼편엔 구지요 오른편엔 운경인데 / 久之在左雲卿右
온극은 그대를 한 수 위로 추킨다네 / 溫克推君地一頭
9
내가 견책 받아 교외로 나가 있을 때 / 我因嚴譴出郊時
그대는 호당의 응제시에 으뜸을 했지 / 君冠湖堂應製詩
당대에 광영을 입었다 모두들 말하니 / 共道恩光榮一世
친히 이불 갖고 대전에서 내려오셨네 / 手携珍褥下天墀
10
그대는 천거 통해 유양의 목사 되니 / 君由剡薦宰維楊
문사인데도 외려 관리성적 양호했네 / 文士還能吏績良
상동문 통해 도성으로 들어올 때면 / 時向上東門內過
죽루에서 마주앉아 근황을 얘기했지 / 竹樓相對說閑忙
11
동래는 아득히 먼 남쪽 끝에 있건만 / 萊州迢遞杳南陲
그대는 내색 않고 언제나 한결같았지 / 君不幾微等險夷
인편 있으면 편지 보내고 편지엔 시 읊으니 / 有使有書書有詠
같은 하늘 밝은 달이 그리운 얼굴 비춰줬지 / 一天明月照相思
12
그대 부절 잡고 관찰사로 부임하니 / 君仍持節任觀風
해마다 승진함은 성심에서 나왔다오 / 連歲超遷出聖衷
서울에 당도하여 나를 찾아오자마자 / 纔到洛中來訪我
또다시 서둘러 떠나야 함을 어이하랴 / 可堪行色又悤悤
13
해마다 멀리 떠나 이별시름 서글프니 / 頻年遠別悵離愁
한강가에서 떠나는 그대 전송을 하네 / 我送君行漢水頭
끝없는 상념 속에 묵묵히 헤어지노라니 / 脈脈臨分無限意
지는 해는 강 복판 외로운 배를 비추네 / 半江斜日在孤舟
14
나는 호남의 암행에서 돌아오고 나서 / 我經湖外夜行還
봄 내내 병으로 낮에도 문 닫아걸었지 / 一病三春晝掩關
그댄 경상 감영에서 자주 약 부쳤으니 / 君在嶺營頻寄藥
편지 가득 담긴 내용에 눈물이 흘렀네 / 書來滿紙語堪潸
15
성상이 오월에 승하하여 통곡하던 끝에 / 五月天崩痛哭餘
그대는 과로로 비장이 허한 병에 걸렸네 / 君因勞瘁病脾虛
돌아와 은대의 모임에서 해후하였는데 / 歸來邂逅銀臺會
말이나 모습이 예전 같지 않아 놀랐다오 / 言貌驚非舊日如
16
남북으로 마주한 골목에서 병에 시달리며 / 巷分南北病支離
그리움에 서로가 꿈에서도 보고파하였네 / 各抱憧憧費夢思
내가 정양을 하기 위해 서호로 떠나가자 / 我向西湖便靜養
그댄 때로 안부 물으며 새 시를 청하였지 / 君時有問索新詩
17
이윽고 위독하단 소식에 황급히 찾아가서 / 俄聞病谻促鞭行
현랑과 마주해 소리 죽여 눈물 흘렸네 / 及對賢郞淚暗傾
그댄 내가 온 것 반겨 나를 맞아들이고는 / 君喜我來邀我入
소리가 목에 잠겨 희미하게 몇 마디 했지 / 喉間數語不分明
18
억지로 웃어가며 그대를 위로하고 와선 / 強爲歡笑慰君來
날마다 심부름꾼 보내 병세를 물었다네 / 日日伻人問症廻
어느 날 문후하기 전 문득 부음 받으니 / 一夕未伻承訃遽
침문에서의 슬픈 눈물 구천에 사무치네 / 寢門哀淚徹泉臺
19
고당에 홀로 계신 연로한 모친의 봉양과 / 高堂鶴髮奉偏慈
아래로 처자식 건사는 결국 누구에게 맡길꼬 / 下有妻兒竟託誰
뒷일은 그대의 큰형님이 알아서 하리니 / 後事賴君賢伯在
그댈 안장하고 이어 선산에 이장하려 하네 / 葬君仍欲故山移
20
낙정공 사망해 세상이 귀감 잃었는데 / 樂靜公亡世失模
이제 그대마저 또 가버려 전형이 없구려 / 君今又逝典刑無
한 시대 풍류가 적막하게 다 끝나버렸으니 / 蕭條一代風流盡
쓸쓸한 인간 세상 병든 나만 홀로 남았네 / 踽踽人間獨病吾
21
아아 그대 황망하게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 嗟嗟君遽止於斯
아득하기만 한 천리가 참으로 의심스럽구려 / 天理冥茫信可疑
예로부터 조여와 이지 같은 소인배들은 / 何限古來蜍志輩
경상에 오르고 장수 누린 이가 허다했다오 / 位尊卿相壽期頤
22
술 한 잔 올리고 곡하며 그대를 부르니 / 一杯爲奠哭呼君
그대 얼굴 대한 듯한데 듣는 이가 없구려 / 怳對君顏奈莫聞
벽만 남은 허름한 집엔 아무 것 없고 / 壁立弊廬無一物
상자 속에 예전의 시문만 담겨 있구나 / 篋中惟有舊詩文
23
뜰의 꽃은 주인도 없는데 누굴 위해 피었나 / 園花無主爲誰開
변함없이 친구들만 차례차례 오는구나 / 依舊親朋次第來
작은 방에 드리운 삼베 휘장만 보이니 / 惟見小堂垂繐帳
문 앞에 벌써 푸른 이끼 낀 것 못 견디겠네 / 更堪門巷已蒼苔
24
강가에서 곡하고 보내니 슬프기 그지없네 / 臨江哭送有餘悲
오늘 그대 떠나가면 언제나 돌아올까 / 此日君行返幾時
만사가 이제 와선 모두 다 그만이니 / 萬事卽今都已矣
아홉 겹 저승길에서 다시 교유하세나 / 九重泉路又交期
[주-D001] 홍군실(洪君實) : 홍위(洪葳, 1620~1660)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군실, 호는 청계(淸溪)이다. 외삼촌인 조석윤(趙錫胤)에게 수학하였으며, 정관재와 친밀하게 교유하였다. 1650년(효종1)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1655년에 김수항(金壽恒)ㆍ이단상(李端相)ㆍ이은상(李殷相)ㆍ남용익(南龍翼)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조 좌랑, 수찬, 양주 목사(楊州牧使), 동래 부사(東萊府使), 경상도 관찰사,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문집인 《청계집》이 전한다.[주-D002] 홍군실에 대한 만사 : 홍위의 문집인 《청계집》 부록에 실린 정관재가 지은 만시(挽詩)에 따르면 이 시는 총 24수인데, 저본에는 21수만 실려 있다. 이에 저본에 빠진 19~21을 《청계집》에 의거해 역자가 임의로 보충하여 번역하였다.[주-D003] 심보(心甫) : 이만웅(李萬雄, 1620~1661)으로,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심보, 호는 몽탄(夢灘)이다. 1650년(효종1)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교리, 영동 현감(永同縣監), 사간, 동래 부사(東萊府使), 연안 부사(延安府使), 황해 감사(黃海監司) 등을 역임하였다. 《문곡집(文谷集)》 권21에 행장이, 《남계집(南溪集)》 권76에 묘지명이 실려 있다.[주-D004] 무자년(戊子年) : 1648년(인조25)으로, 당시 정관재는 21세였다.[주-D005] 진심으로 …… 진중(陳重)이라오 : 정관재가 홍위와 자신의 관계를 후한(後漢)의 뇌의(雷義)와 진중에 비긴 것이다. 뇌의와 진중은 젊어서부터 교정(交情)이 매우 두터워 일찍이 태수가 진중을 효렴(孝廉)으로 천거했을 때는 진중이 이를 뇌의에게 양보하여 뇌의 또한 그 이듬해에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뒤에 둘이 똑같이 상서랑(尙書郞)에 임명되었다가 뇌의가 파출되자 진중 또한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 후 뇌의가 무재(茂才)에 천거되어서는 이를 진중에게 양보했으나 자사가 들어주지 않자, 뇌의는 마침내 거짓으로 미치광이가 되어 무재의 천거에 끝내 응하지 않았으므로, 향리 사람들이 “교칠이 스스로 견고하다고 하지만, 뇌의와 진중의 사이만은 못하리라.[膠漆自謂堅, 不如陳與雷.]”라고 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獨行列傳》[주-D006] 대과(大科)에 …… 앞섰지만 : 정관재는 1649년(인조27) 4월 정시(庭試)에 합격하였고, 홍위는 이듬해인 1650년(효종1)에 합격하였다.[주-D007] 논의가 …… 되었다네 : 홍위가 태학생으로서 논의를 주도해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의미이다. ‘현관’은 태학(太學) 즉 성균관으로, 태학생 홍위 등 수백 명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기사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효종 즉위년 11월과 12월에 걸쳐 여러 차례 실려 있다.[주-D008] 나는 …… 찬탄했지 : 홍위는 1650년 12월에 증광시에 합격하였는데, 《정관재연보》에 따르면 그 즈음 정관재는 1650년 10월에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2월에 주서(注書)로 옮겼다. 따라서 ‘근반(近班)에서 붓 잡은 것’이란 이들 직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근반’이란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반열이란 의미이다. 반면 홍위는 등과한 이후 처음 보이는 관직이 1652년 2월에 설서에 제수된 것이고 그 이전은 확인이 안 되는데, 아마도 시에서 읊은 것처럼 사양을 해서인 듯하다. ‘난대(蘭臺)’는 원래 한(漢)나라 궁중의 장서각(藏書閣)으로, 이후 춘추관(春秋館), 비서성(祕書省), 어사대(御史臺) 등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특정할 수 없다.[주-D009] 금란전(金鑾殿)에서 …… 수직(守直)하였지 : 정관재와 홍위가 등과한 뒤인 1650년대 초반에 정관재는 예문관 검열과 봉교 등을 역임하였는데, 홍위는 이 기간의 관직이 확인되지 않는다. ‘금란전’은 당나라 덕종(德宗) 때 학사원(學士院)을 금란파(金鑾坡) 위의 금란전 곁으로 옮긴 이후 한림원의 별칭이 되었는데, 여기서는 예문관을 가리키는 듯하다.[주-D010] 삼매 솜씨[三昧手] : ‘삼매’는 불교에서 말하는 오묘한 경지로, 탁월한 솜씨나 재능을 말한다.[주-D011] 내가 …… 공정했지 : 이조 낭관은 인사 추천권을 지니고 있었기에 한 말이다. 원문 ‘명양(明揚)’은 《서경》 〈요전(堯典)〉에 “현위(顯位)에 있는 자를 드러내어 밝히고, 미천한 사람을 천거하라.[明明, 揚側陋.]”라고 한 데서 온 말로, 귀천(貴賤)에 구애받지 않고 덕 있는 자를 기용하는 것을 뜻한다.[주-D012] 미원(薇垣)과 …… 근무하였는데 : ‘미원’은 사간원(司諫院)이고 ‘백부(柏府)’는 사헌부(司憲府)이다. 정관재는 헌납(獻納)과 집의(執義) 등을 지냈고, 홍위는 정언(正言)과 지평(持平) 등을 지냈다.[주-D013] 간초(諫草) : 임금에게 간하는 글의 초고이다.[주-D014] 당백(堂伯) : 정관재의 사촌 형인 이은상(李殷相, 1617~1678)으로, 자는 열경(說卿), 호는 동리(東里),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초명은 원상(元相)이고 초자(初字)는 장경(長卿)이다.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손자이자 이소한(李昭漢)의 아들로, 1651년(효종2)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ㆍ정언ㆍ지평ㆍ문학 등을 지내고, 1655년에 김수항(金壽恒)ㆍ남용익(南龍翼)ㆍ홍위(洪葳)ㆍ정관재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656년 중시에 장원을 하고 사복시 정이 되었으며, 이해에 호당(湖堂) 별제(別製)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1660년(현종1) 교리로서 통정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1663년 승지가 되었으며, 이후 대사간ㆍ도승지ㆍ형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동리집》, 《동리소설》 등이 있다.[주-D015] 무능한 …… 지녔다오 : 1655년(효종6)에 정관재는 홍위 및 김수항(金壽恒), 남용익(南龍翼), 이은상(李殷相)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어 호당(湖堂)에서 독서하였다. 호당은 나라에서 인재를 모아 기르는 곳으로 문학에 능한 선비를 극선(極選)하여 충원했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문회루(文會樓)’는 동호(東湖)에 있는 누각이다.[주-D016] 구지(久之) : 김수항(金壽恒, 1629~1689)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구지, 호는 문곡(文谷),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651년(효종2) 알성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내직을 두루 거친 뒤, 1655년 정관재ㆍ이은상ㆍ남용익 등과 함께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를 하였다. 육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한 뒤 1672년 44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1680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시문에 뛰어났으며 글씨 또한 능하였다. 저서에 《문곡집》 등이 있다.[주-D017] 운경(雲卿) : 남용익(南龍翼, 1628~1692)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경, 호는 호곡(壺谷),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646년(인조24) 진사가 되고 1648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시강원 설서, 성균관 전적과 삼사를 거쳐, 병조 좌랑, 홍문관 부수찬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656년 호당에 뽑혀 들어갔고 문신 중시에 장원을 하였다. 그 뒤 양주 목사, 대사간, 대사성, 형조 판서, 예문관 제학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술로 신라 시대부터 조선 인조대까지의 명인 497인의 시를 모아 엮은 《기아(箕雅)》와 《부상록(扶桑錄)》, 《호곡집》 등이 있다.[주-D018] 온극(溫克) : 《시경》 〈소완(小宛)〉에 “엄숙하고 성스러운 사람은 술을 마시되 온순함으로 이겨낸다.[人之齊聖, 飮酒溫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19] 그대는 …… 했지 : 이때 지은 시가 《청계집(淸溪集)》 권2에 〈명사금련촉(命賜金蓮燭)〉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주-D020] 그대는 …… 양호했네 : ‘유양(維楊)’은 양주(楊州)로, 홍위는 1657년 1월에 양주 목사에 제수되었다. 《承政院日記 孝宗 8年 1月 3日》 홍위가 문필에 능한 서생인데도 행정능력까지 뛰어났다는 말이다.[주-D021] 상동문(上東門) : 본래 한(漢)나라 장안(長安)의 동도문(東都門)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한양의 동대문인 흥인문(興仁門)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주-D022] 동래(東萊)는 …… 한결같았지 : 홍위는 1657년 6월에 동래 부사에 제수되었다. 《孝宗實錄 8年 6月 23日》[주-D023] 같은 …… 비춰줬지 : 두보(杜甫)의 시 〈몽이백(夢李白)〉에 “지는 달빛 들보에 가득하니, 그대 얼굴 보이는 듯하네.[落月滿屋梁, 猶疑照顔色.]”라고 한 구절에 의거하여 쓴 것이다. 《古文眞寶 前集 卷3》[주-D024] 그대 …… 부임하니 : 홍위는 1658년 5월에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孝宗實錄 9年 5月 25日》[주-D025] 나는 …… 부쳤으니 : 정관재는 1658년 11월에 호남 암행 어사로 떠났다가 이듬해 1월에 복명하였고, 이 당시 홍위는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었다.[주-D026] 성상이 …… 끝에 : 1659년 5월에 효종(孝宗)이 승하하였다.[주-D027] 돌아와 …… 해후하였는데 : 홍위는 1659년 9월에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은대(銀臺)’는 승정원의 이칭이다. 《顯宗實錄 卽位年 9月 25日》[주-D028]
현랑(賢郞) : 남의 자제를 일컫는 말이다. 홍위의 아들은 홍천서(洪天敍, 1639~?)로, 1666년(현종7)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 연기 현감(燕岐縣監), 여산 군수(礪山郡守), 마전 군수(麻田郡守) 등을 지냈다.
[주-D029] 큰형님 : 홍무(洪茂, 1615~?)로, 본관은 남양, 자는 자실(子實)이다. 1635년(인조13) 진사시에 합격하였다.[주-D030] 그댈 …… 하네 : 홍위는 처음에 광주부(廣州府)에 안장했다가 뒤에 양주(楊州) 선영으로 이장하였다. 《淸溪集 附錄 墓誌銘》[주-D031] 낙정공(樂靜公) : 조석윤(趙錫胤, 1606~1655)으로,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윤지(胤之), 호는 낙정,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1626년(인조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파방(罷榜)되고, 1628년 다시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정언을 지냈다. 이듬해 조경(趙絅) 등과 함께 호당에서 사가독서를 한 뒤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1650년(효종1)에 양관 대제학이 되고 김상헌(金尙憲)의 추천으로 《인조실록》 수찬에 참여하였으며, 그 뒤 대사간ㆍ대사헌ㆍ동지중추부사ㆍ이조 참판ㆍ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오래도록 문형(文衡)을 장악하였으며, 절개를 굽히지 않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저서에 《낙정집》이 있다.[주-D032] 한 …… 끝나버렸으니 : 당대에 존경 받던 뛰어난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근거한 것으로, 〈곡이상시역 2수(哭李常侍嶧二首)〉 가운데 첫째 수에 “한 시대 풍류가 다하였으니, 깊은 지하에서 수문랑이 되었으리. 이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으니, 늙어가는 때에 지음을 잃었도다.[一代風流盡, 修文地下深. 斯人不重見, 將老失知音.]”라고 하였다. 《全唐詩 卷233 哭李常侍嶧二首》[주-D033] 아아 …… 허다했다오 : 소인배들 가운데 출세하고 장수한 이가 허다한 반면 홍위 같은 인사는 단명하였으므로 천리가 의심스럽다고 한 것이다. ‘조여(曹蜍)와 이지(李志)’는 진(晉)나라 때 사람으로, 왕희지(王羲之)에 견줄 정도로 글씨에 뛰어났으나 인품이 용렬하여 소인배를 일컬을 때 흔히 병칭되는 인물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 〈품조(品藻)〉에 “염파와 인상여는 비록 천 년 전에 죽었어도 사람들로 하여금 늠름한 기상을 느끼게 하여 항상 생기를 발산하는 듯하고, 조여나 이지는 비록 살아 있어도 미미하여 마치 구천 아래 있는 사람과 같다.[廉頗、藺相如雖千載上, 使人懍懍, 恒如有生氣; 曹蜍、李志雖見在, 厭厭如九泉下人.]”라고 하였다.[주-D034] 벽만 남은 : 이에 해당하는 원문 ‘벽립(壁立)’은 한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의 고사에서 온 것이다. 사마상여는 임공(臨卭)의 부호(富戶)인 탁왕손(卓王孫)의 딸 탁문군(卓文君)과 좋아하여 탁문군이 밤에 도망 나와 사마상여를 찾아가자 함께 성도(成都)로 갔다. 그런데 성도에 있는 사마상여의 집에는 물건 하나 없이 사면에 벽뿐이었다[徒四壁立]고 한다. 이에 근거하여 ‘벽만 남아 있다’는 것이 가난한 생활을 의미하게 되었다. 《史記 司馬相如列傳》[주-D035] 삼베 휘장[繐帳] : 관(棺) 앞이나 영전(靈前)에 치는 휘장이다.
ⓒ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강여진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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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溪先生集附錄 / [墓誌銘]
有明朝鮮國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同知春秋館成均館事。世子右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洪公墓誌銘。[宋時烈]
我孝宗大王朝。有臣曰洪公葳。字君實。自登第以來。以文字言事。殆無虛日。爲正言。請勿削黜諫臣。又應旨上言。請卞賢否以破朋黨。明體統以立紀綱。又言內司宮家之弊。又言隣族病民之政。終以歸之於人主之一心。又嘗言推疏決庶獄之心。以恤窮困之民。又請昭儉禮下。治怒窒慾。仍又悉數病之尤者。而又言大臣不能任責。其所條奏。蓋萬餘言。上甚嘉賞。悉令廟堂變通弊政。而又敎公卿曰。宜體予意。悅而容之。以盡交修之道。自是上眷彌隆焉。公亦隨事盡言。在筵席進講。規諷尤多焉。以吏曹郞兼世子侍講院司書。極論輔翼之道。俄移修撰。又疏陳時事。而於蘇殘恤軍緩刑求賢之道。尤致意焉。又極論諸宮家作弊之狀。上又嘉奬曰。不覺嗟嘆。使人人皆如爾之誠心。國事豈至於此。痛嘆而已。以御史廉察湖西。還言報恩縣吏。侵徵軍卒。遂梟示以懲其餘。出爲楊州牧使。極陳兵民之困弊。又以爲欲除弊政以撫軍民。則其本在正君心淸朝廷。故又以此爲窮源之論。上又優答焉。俄陞通政。爲東萊府使。蓋籌司僉同薦也。未幾仍陞爲本道監司。入京謝恩。到營未幾。按牘如洗。遂條具道內弊瘼。纖悉無遺。其大者如罷萊釜分防而以土兵募立。移兩兵營以當要衝。孝廟皆嘉納。己亥五月。孝廟上賓。公遞還爲承旨。而卒於翌年庚子十月十五日。賻祭如儀。以子天敍從勳。追贈吏曹判書。始葬廣州府西。後移楊州某山先兆庚向之原。夫人李氏祔焉。公天資精敏。器局峻整。居家事親。承順無違。與伯氏同居湛樂。未嘗相離。其孝友之修於家者如此。及其出身事主。久在論思之職。竭其忠誠。老成切實。不爲空言。前後章疏。殆累萬言。而必根極於人主之一心。蓋其淵源。出於其舅氏趙樂靜錫胤。故論議正而知要。雖置之古名臣奏議。可相上下也。其在藩府。夙夜勤勞。經事綜物。細大不遺。而又未嘗不以朝廷爲本。民事爲急。故凡所奏請。宰執雖堅持不許。而上必允從。蓋知其忠懇在於尊主庇民也。主知方深。輿望日隆。方將引置輔弼之地。俾展其才識矣。不幸聖主厭世。公又病矣。幽問所至。有識之士。無不歎惜。公南陽人。始祖殷悅。麗祖功臣。本朝有龍官贊成。曾祖翼俊郡守。祖琡。考遠湖皆不仕。以公貴追榮顯職。公以泰昌庚申。生于衿川外王考趙公諱廷虎第。趙公仁祖朝名臣。而樂靜其胤也。公自幼及長。常依外氏。旣資性明敏。濡染甚熟。論人而必本其父兄師友者。蓋觀於公而益驗之矣。配德水李氏。牧使梣之女。柔順慈惠。在家父母愛之。及歸事姑無違。家雖貧甚。而不敢以一毫累夫子。後公二十七年而卒于丙寅。壽六十六。生二男三女。男長卽天敍官郡守。次龜敍有俊才早夭。女適監司金萬吉,鄭敷,張鼎顯。郡守男曰晥,暄。一女幼。龜敍男曰㬇。鄭壻三男。張壻二女。晥二女。暄二男一女幼。記昔戊巳年中。余忝在籌司。每見公狀申文字。明白條暢。詞理俱到。竊嘆其才之可添一開封矣。及其還朝則已見其精華消落。又嘆其賢勞王事也。今郡守爲謁幽誌。義不可辭。遂略敍如右云。銘曰。
有美洪公。金閨之彥。文如錦繡。器則瑚璉。盛之玉堂。黼黻王猷。君德朝論。國計民憂。知無不言。言豈不盡。聖主知公。屢賜開允。公亦感奮。一心圖報。出殿南服。提挈綱要。罷置之請。動合機宜。功緖未汔。世運已陂。泣弓之痛。歸益靡逮。送往事居。庶幾自勵。積瘁成疾。兪扁技窮。彼天茫茫。何以勸忠。惟其志業。不隨死亡。我作銘詞。以識其藏。領府事宋時烈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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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子大全卷一百八十四 / 墓誌 / 慶尙監司贈判書洪公墓誌銘 幷序
我孝宗大王朝有臣。曰洪公葳。字君實。自登第以來。以文字言事。殆無虛日。爲正言。請勿削黜諫臣。又應旨上言。請辨賢否以破朋黨。明體統以立紀綱。又言內司宮家之弊。又言隣族病民之政。終以歸之於人主之一心。又嘗言推疏決庶獄之心。以恤窮困之民。又請昭儉禮下。治怒窒慾。仍又悉數病之尤者。而又言大臣不能任責。其所條奏。蓋萬餘言。上甚嘉賞。悉令廟堂變通弊政。而又敎公卿曰。宜體予意悅而容之。以盡交修之道。自是上眷彌隆焉。公亦隨事盡言。在筵席進講。規諷尤多焉。以吏曹郞。兼世子侍講院司書。極論輔翼之道。俄移修撰。又疏陳時事。而於蘇殘。恤軍緩刑。求賢之道。尤致意焉。又極論諸宮家作弊之狀。上又嘉奬曰。不覺嗟嘆。使人人皆如爾之誠心。國事豈至於此。痛嘆而已。以御史廉察湖西還。言報恩縣吏侵徵軍卒。遂梟示以懲其餘。出爲楊州牧使。極陳兵民之困弊。又以爲欲除弊政以撫軍民。則其本在正君心淸朝廷。故又以此爲窮源之論。上又優答焉。俄陞通政爲東萊府使。蓋籌司僉同薦也。未幾仍陞爲本道監司。入京謝恩。到營未幾。案牘如洗。遂條具道內弊瘼。纖悉無遺。其大者如罷萊釜分防。而以土兵募立。移兩兵營。以當要衝。孝廟皆嘉納。己亥五月。孝廟上賓。公遞還爲承旨。而卒於翌年庚子十月十五日。賻祭如儀。以子天敍從勳。追贈吏曹判書。始葬廣州府西。後移楊州某山先兆庚向之原。夫人李氏祔焉。公天資精敏。器局峻整。居家事親。承順無違。與伯氏同居湛樂。未嘗相離。其孝友之修於家者如此。及其出身事主。久在論思之職。竭其忠誠。老成切實。不爲空言。前後章疏殆累萬言。而必根極於人主之一心。蓋其淵源出於其舅氏趙樂靜錫胤。故論議正而知要。雖置之古名臣奏議。可相上下也。其在藩府。夙夜勤勞。經事綜物。細大不遺。而又未嘗不以朝廷爲本民事爲急。故凡所奏請。宰執雖堅持不許。而上必允從。蓋知其忠懇在於尊主庇民也。主知方深。輿望日隆。方將引置輔弼之地。俾展其才識矣。不幸聖主厭世。公又病矣。幽問所至。有識之士。無不歎惜。公南陽人。始祖殷悅。麗祖功臣。本朝。有龍官贊成。曾祖翼俊郡守。祖琡,考遠湖。皆不仕。以公貴追榮顯職。公以泰昌庚申。生于衿川外王考趙公諱廷虎第。趙公仁祖朝名臣。而樂靜其胤也。公自幼及長。常依外氏。旣資性明敏。擩染甚熟。論人而必本其父兄師友者。蓋觀於公而益驗之矣。配德水李氏。牧使梣之女。柔順慈惠。在家父母愛之。及歸事姑無違。家雖貧甚。而不敢以一毫累夫子。後公二十七年而卒于丙寅。壽六十六。生二男三女。男長卽天敍。官郡守。次龜敍有俊才早夭。女適監司金萬吉,鄭敷,張鼎顯。郡守男曰晥,暄。一女幼。龜敍男曰㬇。鄭壻三男。張壻二女。晥二女。暄二男一女幼。記昔戊己年中。余忝在籌司。每見公狀申文字。明白條暢。詞理俱到。竊嘆其才之可添一開封矣。及其還朝。則已見其精華消落。又嘆其賢勞王事也。今郡守爲謁幽誌。義不可辭。遂略敍如右云。銘曰。
有美洪公。金閨之彥。文如錦繡。器則瑚璉。盛之王堂。黼黻王猷。君德朝論。國計民憂。知無不言。言豈不盡。聖主知公。屢賜開允。公亦感奮。一心圖報。出殿南服。提挈綱要。罷置之請。動合機宜。功緖未訖。世運已陂。泣弓之痛。歸益靡逮。送往事居。庶幾自勵。積瘁成疾。兪扁技窮。彼天茫茫。何以勸忠。惟其志業。不隨死亡。我作銘詞。以識其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