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도청과 포도청 순교자
1. 포도청은 최대의 신앙 증거 터
▲우포도청 위치: 현 종로 1가 89번지, 광화문 우체국과 옛 동아일보사 사이.
▲좌포도청 위치: 현 종로구 묘동 56번지, 옛 단성사 자리, 귀금속 상가.
1) 포도청 순교사의 의의
1801년의 신유박해 때 ‘하느님의 종’ 최창현 회장 등이 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이래 1866년의 병인박해 때까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신앙을 증거 함으로써 포도청은 한국 천주교 최대의 신앙 증거 터가 되었다.
그 안에는 성 김대건(안드레아)신부, 성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주교 등 프랑스 선교사들, 성 정하상(바 오로)과 동료 순교자들, ‘하느님의 종’ 주문모(야고보) 신부 등이 포함되어 있다.
2) 행정 체제 및 직제
① 행정 업무 : 형조 담당. [인원 관리 및 녹봉 급여 : 병조 담당]
② 관할 구역 : 좌포도청 : 한성부의 동부, 중부, 남부와 경기좌도
우포도청 : 한성부의 서부, 북부와 경기우도
③ 직제 : 포도대장 : 종2품 무관, 좌, 우변 각 1인,
오위의 총관 혹은 오군영의 대장, 한성 판윤(한성부 벼슬) 등을 겸직
3) 좌, 우포도청의 기찰
좌, 우포도청의 기찰
천주교 신자 기찰(염탐, 검문), 체포가 포도청의 업무에 포함된 것은 고종 때였다.
그러나 실제 규정과는 달리 천주교 신자들의 기찰, 체포에 대한 임무는 그 이전부터 수행되어왔다.
체포 범위가 확대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 때였다. 즉 경포(京捕)가 성지십리 (서울의 도성(都城) 밖 십 리 안에 해당하는 지역지역)을 넘어 경기도 지역까지 기찰 하면서 신자들을 체포하였다. 포도청의 기찰, 체포 범위가 충청도 지역까지 확대된 것은 1859년 말부터 1860년 초까지 계속된 경신박해 때였다. 그리다가 1866〜1874년의 병인박해 때는 포도청의 기찰, 체포 범위가 더욱 확대되어 서울과 경기도는 물론 충청도와 경상도 북부 지역까지 경포들이 파견되어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게 된다.
병인박해 때는 프랑스 선교사와 지도층 신자들을 체포한 좌, 우포도청의 군관들에게 그 공로에 따라 1, 2, 3등으로 구분하여 상을 내렸다.
포교들이 경쟁적으로 천주교 신자 체포에 집착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포교와 포졸들에게 체포된 신자들은 오라로 결박당하고 행차 칼과 축(목 수갑)을 찬 뒤 포도청으로 압송되었으며, 선교사들에게는 머리에 몽두, 목에는 행차칼을, 손에는 축을 채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때로는 마소(말과소) 위에 얹은 짚둥우리(짚으로 만든 큰 바구니)가 포도청 이송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포도청으로 이송된 신자들은 차꼬(족쇄)를 차고 옥살이를 하면서 자신의 차례가 되면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신자들이 받은 형벌로는 곤형, 장형, 치도곤형,그리고 팔 다리를 부러트리는 주리형(주뢰형) 등이 있었고, 때로는 혁편, 주장,톱질, 삼모장, 학춤 등이 적용되었다.
2.. 포도청 감옥과 옥살이
페레올(Ferreol, 1808〜1853)서한 기록에나타나는 옥살이
1) 감옥소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안에 줄지어 선 여러 판잣집이 있다. 집을 드나드는 매우 작은 문은 있지만, 창문은 전혀 없어서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못한다. 겨울에는 추위로, 여름에는 더 위로 견딜 수가 없다 바닥에는 거친 짚으로 엮은 멍석이 깔려있다. 좁은 감방 안에 갇힌 신자들이 하도 많아서 다리를 뻗을 수조차 없다.
2) 끔찍스러운 감방에서 당한 고통은 위에 언급된 고문보다 훨씬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신자들 모두가 증언했다. 왜냐하면 매 맞는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와 고름에 젖은 멍석이 이내 썩어서 사방에 퍼진 악취로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3) 그러나 신자들을 가장 가혹하게 괴롭힌 것은 굶주림이다. 다른 고문을 견뎌냈던 몇몇 사람들도 배고픔 앞에서는 견디기 어려웠다. 갇힌 신자들은 주먹만 한 분량의 삶은 좁쌀을 하루에 두 번밖에 받지 못했기 때문에, 배가 너무 고파서 깔고 누워 있던 썩은 멍석을 뜯어 먹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감옥 안에 이, 벼룩, 빈대가 어찌나 많았는지, 갇힌 신자들이 그것을 한 움큼씩 쥐어 잡을 정도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시장기를 달래려고 그것을(이, 벼룩) 끔찍하게도 먹기까지 하였다.
포도청에서의 형벌은 그 자체로 죽음 즉 순교의길이나 진배없었다.
신자들에게는 형 전에 기록되어 있는 결 옥 일한(구속 일수) 규정이 지켜지지 않았고, 그 결과 신자들은 형벌보다 무섭다는 옥살이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포도청 옥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병사한 때도 많았고, 굶주림과 갈증으로 인해 배교하는 신자들도 발생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포도청의 재판 과정에서 굳게 신앙을 증거 하면서도 계속되는 형벌로 순교(즉 ‘장살. 곤장으로 인한 상처의 독 )하는 때도 있었다. 천주교 신자들의 기찰, 체포 기관인 포도청이 신앙의 증거 터가 되고, 순교 터가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3. 서울의 첫 순교 터요. 마지막 순교 터
1795년의 을 묘 박해 때 ‘하느님의 종’ 윤유일, 지황, 최 인길 등이 장살로 순교한 이래 1879년에 일어난 마지막의 기묘 박해로 이병교, 김덕빈, 이용헌 등이 아사로 순교하기까지 수많은신자들이 포도청에서 천상의 화관을 얻었다. 이처럼 서울의 좌. 우포도청은 서울의 첫 순교자들이 탄생한 곳이요, 한국 천 주교회의 마지막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곳이었다.
이들 중에는 최경환, 유대철등 22명의 성인과 윤유일, 김이우 등 5명의 ‘하느님의 종’ 이 들어 있다. 대부분 장사, 병사, 교수형으로 순교한 분들이다. 포도청은 끝까지 신앙의 끈을 놓지 않은 이들의 고통과 애환, 그리고 영광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중요한 순교 터이다. 〈103위 성인 중 포도청 순교자〉(22명)
포도청은 한국 천주교 최대의 신앙 증거터요, 따라서 서소문 밖 형장은 물론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그리고 각 지방 형장 즉 순교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순교사의 중요한 과정에 위치한다는 의미를갖는다. 포도청의 성인, 증거자는 70명 , 복자 증거자 31명, 하느님의 종 증거자는 18명 등 모두 119명에 이른다.
4. 포도청의 순교자
포도청(좌.우포청) 순교자 명단 | ||||
순 | 성명 | 구분 | ||
순교 성인(22위) | ||||
1 | 정국보 프로타시오(1799〜183) | 양반 | 장사 | 한때선공감사령 |
2 | 장성집 요셉(1786〜1839) | 환부 | 장사 | 한때 광흥창 인부 |
3 | 이 바르바라(1825〜1839) | 동정 | 병사 | 이정희바르바라의조카 |
4 | 최경환 프린:치스코(1805〜1839) | 회장 | 장사 | 최양업신부 부친 |
5 | 김루치아(1769〜1839) | 옥사 | 꼽추 루시아 | |
6 | 이 가타리나(1783〜1839) | 과부 | 병사 | 조막달레나 모친 |
7 | 조 막달레나(1807〜1839) | 동정 | 병사 | 이카타리나의딸 |
8 | 유대철 베드로(1826〜1939) | 중인.동정 | 교수 | 유진길아우구스티노아들 |
9 | 유조이 체칠리아(1761〜1839) | 과부 | 옥사 | 정하상바오로모친 |
10 | 김 데레사(1796〜1840) | 교수 | 김대건신부 당고모 | |
11 | 이 아가타(1823~1840) | 동정 | 교수 |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딸 |
12 | 민극가 스테파노(1787-1840) | 회장.양반 | 교수 | |
13 | 정화경 안드레아(1807〜1840) | 회장.복사 | 교수 | 앵베르주교밀고 |
14 | 허임 바오로(1796〜1840) | 군인 | 장살 | |
15 | 김성우 안토니오(1795〜1841) | 회장 | 교수 | |
16 | 남경문 베드로(1796〜1846) | 회장.군인.복사 | 교수 | |
17 | 임치백 요셉(1804〜1846) | 교수 | 선주,임성룔베드로부친 | |
18 | 한이형 라우련시오(1799〜1846) | 회장.양반 | 교수 | |
19 | 우술임 수산나(1803〜1846) | 과부 | 교수 | |
20 | 김임이 데레사(1811 〜1846) | 동정 | 교수 | |
21 | 이간난아가타(1814〜1846) | 과부 | 교수 | |
22 | 정철염 가하리나(1817〜1846) | 교수 | ||
하느님의 종(5위) | ||||
1 | 윤유일 바오로(1760〜1795) | 밀사.양반 | 장살 | |
2 | 최인일 마티아(1765〜1795) | 신부댁주인 | 장살 | |
3 | 지황 사바(1767〜1795) | 밀사.중인 | 장살 | |
4 | 심아기 바르바라(1783〜1801) | 동정 | 장살 | |
5 | 김이우 바르나바(?〜1801) | 중인 | 장살 |
1) 순교 성인(22위)
정국보 프로타시오(1799〜183): 성 정국보 프로타시오는 개성(송도)의 양반 출신이었으나,그의 조 부가 벼슬을 하다가 죄를 지은 뒤 서울로 이주하여 신분과 가문을 감 추고 상민으로 행세하며 살았다. 본래 순량하고 겸손하였던 그는 선 공감(錯I監,토목이나 영선을 맡아보던 관청) 사령을 하던 30여 세 에 이르러 천주 교리를 듣고는 이를 진리로 받아들여 세례를 받게 되 었다. 1834년 1월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유방제(중국 이름은 여항덕,파 치피코) 신부는 프로타시오의 성실함으로 보고는 집 한 채를 사서 그 에게 살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유방제 신부의 복사로 성사를 받 으러 오는 교우들을 보살폈는데,부부가 함께 어떠한 위험과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이 일에 힘쓰면서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였다.
특히 프로타시오는 가난과 잦은 신병을 신앙으로 극복하여 어려워 하는 빛을 나타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자녀 14명이 차례로 사망하 여 자녀가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인내심으로 그 충격을 잘 참아냈다. 그는 항상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며 강론 듣기를 매우 좋아하였고, 자비심과 넓은 이웃 사랑으로 모든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다.
1839년 3월,기해박해로 체포된 정국보 프로타시오는 아내와 함께 포도청에 투옥되어 갖은 형벌을 받았으며,형조로 이송되어 다시 혹 독한 고문을 받던 중에 형관의 감언이설과 유혹에 넘어가 배교하고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진 그에게 내려준 하느님의 시련일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 는 즉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신의 죄를 뉘우쳤으며,이를 보속하기 위해 날마다 침식을 잊은 채 참회의 기도를 올리고 주야로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프로타시오는 이웃에 사는 열심한 교우의 격려로 용기를 얻 어 관청에 자수하기로 결심하고는 즉시 형조의 문을 두드렸다. 이때 형조의 사령들이 다시 찾아온 이유를 묻자 그는 “내가 배교한 것을 스 스로 취소하고 천주교 신자로서 속죄하기를 원한다.”고 대답하였다. 사령들이 ‘미친놈’ 이라고 내쫓자,그는 이튿날 다시 형조로 가서 형조 판서를 만나게 해달라고 애원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타시오는 5월 12일(음력 3월 그몸날) 세 번 째로 자수를 결심하였다. 이때 그는 포도청과 형조에서의 형벌로 얻 은 상처가 덧나 걸을 수조차 없는 상태였지만, 억지로 들것에 들려 형 조로 갔으며,사령들이 들여보내주지 않자 형조 근처에서 판서가 나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판서가 나오자,그는 판서 앞에 엎드려 배 교한 것을 뉘우친 천주교인이니 체포하여 죽여 달라고 청하였다.
결국 프로타시오는 자신의 소원대로 다시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 송되었고,장형(杖刑) 25대를 맞고는 하옥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장티푸스로 기력이 쇠한 상태인 데다가 장독으로 죽어가고 있었으니, 그가 순교의 영광을 얻은 것은 1839년 5월 20일(음력 4월 8일, 혹은 9일)로,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장성집 요셉(1786〜1839): 일명 ‘성진’,서울 출신,서강 거주 / 하급 관리,약국 하인 / 포도청 장살
성 장성집 요셉은 서울에서 태어나 한강변 서강에서 살았으며,한 때 광흥창(廣興倉,서교동에 있던 호조의 녹봉 창고)에서 하급 관리로 생활하였다. 이후 그 자리를 잃고 아내마저 죽자, 천주교 신자인 이모 집으로 가서 생활하다가 재혼하였으나 다시 상처하고 약국의 하인으 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요셉이 천주 교리에 대해 듣고 세례를 받은 것은 약국에서 생활하 던 30세 무렵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천주 강생(天主降生) 교리 에 대한 의심을 품고는 냉담 상태에 빠졌으며,비신자 친구들과 어울 려 세속 향락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한 열성적인 교우의 권 면으로 신앙을 되찾고 이전보다 더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이 무 렵 그의 딸도 현경련(베네딕타)을 대모로 세우고,중국인 유방제(파치 피코) 신부로부터 ‘사라’ 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하였다.
1838년 4월에 견진성사를 받은 요셉의 신앙은 더욱 견고해지게 되 었다. 비신자인 집안 사람들이나 친구들이 유혹할 때마다 그는 이렇 게 대답하였다.
“지난날의 죄는 오로지 의식을 풍족히 하려는 욕망에서 나 온 것이었소. 이제 따뜻한 옷을 입고 잘 먹기보다는 차라리 주 님과 추위를 택하려고 하오. 이 세상에서 잠시 괴로움을 견디 어 냄으로써 죽은 후 천국에 가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면 이 어 찌 즐거운 일이 아니겠소?”
이듬해 기해박해가 일어나 교우들이 체포되고,용덕을 발해 순교하 는 것을 목격한 장성집 요셉은 자수할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그 의 뜻을 안 대부가 ‘주님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고 하자 자수를 단념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렸다.
5월 18일(음력 4월 6일), 요셉은 그의 딸 로사의 시동생 밀고로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장티푸스에 걸려 있었는데, 포졸들이 그를 가마에 태워 가려고 하자 “나 같은 죄인이 감히 교군(輸軍)을 타 고 갈 수 있겠는가?” 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포교와 포졸들은 그의 성품에 감탄하여 그를 배교의 길로 유인하고 자 하였다. 이전의 비신자 친구들도 갖가지 말로 그를 유혹하였으나 그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요셉은 포도청에 투옥되었다. 그러 나 이튿날 아침까지도 아무런 기별이 없자,그는 “사형에 처하려고 잡 아온 사람을 어째서 형벌도 아니하고 이렇게 버려두는가”라고 항의까 지 하였다.
며칠 후 포도대장은 그를 불러내 문초와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결같이 교리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굳은 신앙심만을 표시할 뿐이었다. 포도대장은 여러 차례 태형을 가한 다 음 치도곤 20대를 치도록 하고는 투옥시키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이 것이 세상에서 보여준 요셉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감옥으로 끌려간 그날 밤에 그는 천상의 영광을 얻었으니,이때가 1839년 5월 26일(음 력 4월 14일,혹은 24일)로, 그의 나이 53세 였다.
이 바르바라(1825〜1839):시흥 봉천 거주 / 동정,성녀 이영희 막달레나의 조카 / 포도청 옥사(병사)
성녀 이 바르바라는 성가정의 딸로 태어났으나,일찍이 양친을 여 의고 시흥 봉천(현 서울 봉천동)에 살던 외조모인 허계임(막달레나)과 이모들인 이영희(막달레나), 이정희(바르바라) 아래서 성장하였다. 본 래 온순하고 다정다감하였던 그녀는 어려서부터 열심히 교리를 실천 하고 가난을 잘 참아냈으며,외조모와 이모들의 모범을 잘 따랐다.
1839년 2월(음력)에 체포된 바르바라는 혹독한 형벌 가운데서 어린 나이와 가날픈 여성의 힘을 초월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포도청을 거쳐 형조로 이송된 뒤 형관이 어르고 달래 배교시키려 하였지만 도 무지 말을 듣지 않았으며,용렬한 말을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이에 형관은 동정심이 일어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명목 아래 포도청 으로 되돌려 보냈다.
포도청에서의 옥중 생활은 굶주림과 목마름의 날들이었으나,어린 바르바라는 같은 또래의 어린들 세 명과 서로 권면하면서 조금도 흔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불행히도 옥중에 유행하던 장티푸스에 걸려 1개월여의 병고를 겪다가 5월 27일(음력 4월 15일)에 순교하였으니, 그녀의 나이 겨우 14살이었다.
최경환: 프린:치스코(1805〜1839): 충청도 홍주 출생,안양 수리산 거주 / 회장,최양업 신부 부친 / 포도청 장살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1839년의 기해박해 순교자 이성례(마리아)의 남편이요 두 번째 한국인 사제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부친으로 홍 주 다리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 새터)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교회와 칠극의 가르침을 신심의 바탕으로 삼 고 묵상과 독서를 통한 신심 함양에 힘썼으며, 이웃과의 나눔 운동과 극기의 실천에 모범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늘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 순교자들의 생애를 따르고자 하는 신심을 지니고 일찍부터 순 교 원의를 품고 살았다.
1827년경 프란치스코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가족들을 데 리고 서울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박해의 위험이 있자 강원도 김성과 경기도 부평으로 다시 이주하였으며,1838년에는 과천 수리산 뒤뜸이 (현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 9동)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구는 데 노력하였다. 이에 앞서 장남 토마스는 1836년 초에 최초의 신학생으 로 선발되어 서울의 모방(나 베드로) 신부댁을 거쳐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모방 신부에 의해 수리산 교우촌 회장으로 임명 되어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이끌었고,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신자듣과 함께 상경하여 여러 명의 순교자 시신을 안장해 주었다. 그 런 다음 수리산으로 내려와 신자들을 권면하면서 순교의 때를 기다리 고 있다가 7월(음력)에 가족들,교우촌 신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에는 그들 일행을 지켜보던 비신자들이 악담을 하거나 불쌍하게 생각하였지만,프란치스코 회장은 이렇게 말 하면서 일행들을 끊임없이 격려하였다.
“우리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 시고 갈바리아 산(골고타)으로 올라가는 것을 생각합시다.”
그들 일행은 포도청의 옥에 투옥되어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 하였다. 이때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회장인 데다가 아들이 신학생으로 공부하러 갔다는 이유 때문에 더 많은 형벌을 받아야만 했으나, “천지 만물의 대주재(大主幸) 하느님을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배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굳게 신앙을 지켰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지켜보던 비신자들조차 천주 신앙을 찬미하게 만들 정도였다. 프란치스코는 40일 이상 참혹한 고문을 당하면서 치도곤 110대,주장과 태장 합고40돼를 맞아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형벌로 인한 상처 때문에 포도청에서 옥사하고 말았으니,그때가 1839년 9월 12일(음력 8월 5일)로,그의 나이 34세(혹은 35세)였다.
순교 후 최경환의 시신은 중형 최영겸 부자에 의해 거두어져 이름 이 적힌 사발과 함께 노구산(현 마포구 노고산동의 노구산)에 안장되 었다가 여러 해 뒤에 그 유해가 발굴되어 수리산 뒤뜸이 앞산으로 옮 겨져 안장되었다. 이어 1928년에는 그의 유해가 수리산에서 발굴되어 명동성당 지하 묘역으로 옮겨졌고, 1967년에는 다시 절두산순교기념 관 지하의 성해실로 옮겨지게 되었다.
김루치아(1769〜1839): 일명 ‘꼽추 루치아' / 과부 / 포도청 장살.
성녀 김 루치아는 어렸을 때부터 교우였으며, 불구의 몸이었기 때 문에 교우들 사이에서는 ‘꼽추 루치아’ 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장성한 뒤에 루치아는 어느 비신자에게 출가하였는데,비신자였던 남편은 신자로서의 생활을 반대하는 데다가 교우들을 만나는 것조차 훼방하였다. 이에 그녀는 오랜 세월을 고통으로 보내다가 더 이상 이 를 견디지 못하고 남편과 집을 버리게 되었다.
루치아는 집을 나온 뒤에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며 어렵게 생활했 지만,기쁘게 이를 받아들였으며, 교우들도 언제나 그녀를 즐거운 마 음으로 대해 주었다. 그녀는 교우들을 도와주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펴 주는 데 열심이었다. 이내 그녀 의 열심과 겸손은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하루는 어느 양반 비신자가 루치아에게 “지옥이 그렇게 좁다고 하 는데,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단 말이오?” 하고 물었 다. 그러자 루치아는 전혀 머뭇거림이 없이 이렇게 반문하였다.
“당신의 작은 마음에 만 권의 서적을 품고 있다고 생각해 봐 요. 당신은 이것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좁다고 생각하신 적이 한 번이라도 있나요?”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루치아도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포도대장은 늙고 불구인 그녀를 보고는 쉽게 그녀의 마음을 꺾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큰 오산이었다. 그녀는 오직 순교 의지만을 나타낼 뿐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옥중 에서도 그녀는 함께 있던 병자들을 보살펴주거나 자신의 돈을 나누어 주어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루치아는 태형 30대를 맞고는 다시 옥에 갇히게 되 었다. 그녀가 매를 맞을 때는 막대기로 뼈를 때리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너무 말랐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마지막 형벌을 받은 뒤 더 이 상 일어나지 못하고 교우들의 간호 속에 ‘예수,마리아’ 의 이름을 거 듭해서 부르며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때는 1839년 8월(음력,혹은 7월)로,그녀의 나이 70세였다.
이 가타리나(1783〜1839): 서울 서강 거주 / 과부,성녀 조 막달레나의 모친 / 포도청 옥사(병사)
성녀 이 가타리나는 시골에 사는 교우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부 모가 모두 교리에 밝지 못한 탓에 깊이 신봉하지는 않고 있었다. 게다 가 14세 때 비신자와 혼인한 탓에 교리를 철저히 배울 수가 없었고, 신자의 본분도 제대로 이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되자 남편에게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대 세를 받고 죽음에 이를 수 있도록 하였다.
남편이 사망하자 비신자였던 시집 식구들은 가타리나의 신앙생활을 방해하였고,이에 그녀는 자유로운 신앙을 위해 자녀들을 데리고 친 정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녀들 중에서 맏딸인 조 막달레 나가 특히 어머니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우고 따랐는데,막달레나가 성장하여 수정할 원의를 품게 되자 가타리나는 그녀를 서울 교우의 하인으로 들여보내 이웃의 의심과 박해를 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로부터 5〜6년 후 막달레나가 집으로 돌아오자 모녀는 더욱 열심 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던 중 1838년에 이르러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 모녀를 괴롭혔다. 이에 가타리나는 딸 막달레나와 함께 서울 로 이주했으며,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주교가 주선해 준 서강 독갑이 골 조 바르바라의 집에서 그녀의 두 딸인 이영덕(막달레나) , 이인덕 (마리아) 자매와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 들은 함께 ‘주교님께서 체포되면 우리도 자수하자’ 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은 자수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어느 날 포졸들이 갑자기 그 집으로 들이닥쳐 모두를 체포했기 때문이다.
이내 포도청으로 압송된 가타리나는 갖은 문초와 형벌 속에서도 굴 하지 않았으며,딸 막달레나와 동료 여 인들과 함께 서로를 권면하며 3 개월 여의 옥중생활을 꿋끗하게 참아냈다. 그러다가 계속되는 형벌로 몸이 쇠약해져 딸 막달레나와 함께 옥중에 만연하던 장티푸스에 걸려 1839년 8월(음력)에 옥사하였으니,이때 가타리나의 나이 56세였다.
조 막달레나(1807〜1839) : 서울 서강 거주 / 동정,성녀 이 가타리나의 딸 / 포도청 옥사(병사)
성녀 조 막달레나는 이 가타리나의 맏딸이다. 그녀의 부친은 신자 가 아니었으나 부인의 권유로 대세를 받고 사망했으며,모친 가타리 나는 독실한 교우로 그녀와 함께 거의 같은 날에 옥사하였다.
부친이 사망한 뒤 막달레나의 모친은 비신자 친척들의 탄압을 피해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였다. 7〜8세 된 막달레나는 이때부터 모친의 가르침을 열심히 따랐으며,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드렸고,성장하면서는 길쌈과 바느질을 부지런 히 하여 가사를 도왔다.
18세에 이르자,집안에서는 그녀를 어떤 교우에게 출가시키고자 하 였다. 그러나 수정할 원의가 있던 막달레나는 모친에게 이를 고백하 고, 의심하는 비신자들을 피해 상경한 뒤 어떤 교우 집안의 하인으로 들어가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5〜6년 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모친을 봉양하며 애긍 생활로 모든 교우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녀는 무식한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쳐주고,불쌍한 사람들을 위로해 주며,병자 들을 간호하고 죽을 위험에 있는 외교인 어린이들에게 대세를 주는 데 헌신하였다.
1838년에 고향에서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자 조 막달레나는 모친 과 함께 상경하였다. 그런 다음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주교가 주선해 준 서강 독갑이골 조 바르바라의 집에서 그녀의 두 딸인 이영덕(막달 레나), 이인덕(마리아) 자매와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기해박해 가 일어나자 그들은 함께 ‘주교님께서 체포되면 우리도 자수하자’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그녀들은 자수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어느 날 포졸들이 갑자기 그 집으로 들이닥쳐 모두를 체포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 막달레나는 32세의 동정녀였다. 그녀는 포도청으로 압송되 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않았고,3개월 여의 옥중생활 동안 모친을 보살피면서 끗꿋하게 참아냈다. 그러던 중 계속되는 형벌로 몸이 쇠약해져 모친 가타리나와 함께 옥중에 만연하던 장티푸스에 걸려 1839년 8월(음력)에 옥사하였으니,이때 막달레나의 나이 32세였다.
유대철 베드로(1826〜1939) : 서울 역관 집안 출신 / 동정,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의 장남 / 포도청 교수
성 유대철 베드로는 오랫동안 교회 밀사로 활약한 유진길(아우구스 티노)의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성이 충실하고 관후하였던 베드로는 일찍부터 부친을 본받아 모든 신심의 의무를 충실히 실천하 였다. 그러나 비신자였던 그의 모친과 누님은 이러한 그의 신앙생활 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집안의 미신 행위에 참여하도록 유혹하기 까지 하였다.
모친이 “어째서 너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일을 고집하느냐?”고 하면,베드로는 언제나 공손한 말로 하늘의 임금,만 물의 주인을 따르는 일이 바로 진리의 길임을 설명하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모친과 누님의 눈이 어두운 것을 탄식하고 기도하면서 향상 지극한 효성으로 모친을 봉양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시작되자,베드로의 어린 마음에는 순교 원의가 불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옥에 갇혀 있던 부친과 여러 순교자들이 보여 준 훌륭한 모범은 이러한 그의 원의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결국 베드로 는 스스로 포도청으로 가서 천주교 신자임을 밝혔고, 포도대장은 그의 집안 내력을 자세히 듣고는 유진길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이후 포도청에서는 베드로에게서 배교의 말을 이끌어내기 위해 갖 은 위협과 고문을 가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방에서 흘러내리는 자신의 피를 보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하루는 포졸이 구리 대통으로 허벅지 살점을 떼어냈으나 그의 입에 서 나온 말은 더욱 단호하였다.
“어떠한 형 벌로 다스린다 해도 천주교 를 믿는 제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믿음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포졸이 시뻘건 숯덩이를 집게로 꺼내 성인의 입에 갖다 대며 말하였다.
“네가 천주교를 끝까지 믿는다면 입을 벌려라.”
“그래요. 그 숯덩이를 제 입에 넣어보세요. 제 마음이 변할 줄아세요.”
포졸은 놀란 나머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고 말았다. 교우들이 “너 는 그것을 가지고 많은 괴로움을 당한 줄로 생각하겠지만,큰 형벌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면,그는 “저도 알아요.”라 고 대답하였다.
하루는 오랫동안 매를 맞고 기절한 채 다시 옥으로 끌 려오자,교우들이 정신을 들게 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깨어나 게 하였다. 이때 그는 깨어나자마자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이런 것 쯤으로 죽지 않아요.”라고 하면서 끝까지 굴하지 않는 의지를 나타냈다.
베드로는 문초 열네 차례,형벌 열네 차례에 태장 6백 대 이상, 치 도곤 40대 이상을 맞았다. 가녀리게 어린 몸이 피투성이가 되고,뼈 가 부러지고 살이 헤어졌으나 그는 기쁜 낯빛을 잃지 아니하였다. 하 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어린 나이에 이러한 형벌 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작은 천사의 용기는 언제나 흉악한 박해자들의 손길을 뛰어넘고 있 었다. 결국 그들은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 이 어린 천사를 형장으로 끌 고 가지 못하고 포도청의 옥에서 교살하고 말았으니,때는 1839년 10 월 31일(음력 9월 25일)이었다.
교회사가들은 말한다. 한국 천주교회의 성 베난시오(Venantius). 카메리노(Camerino)에서 참수형으로 순교의 화관을 쓴 성 베난시오 가 있다면,한국에는 포도청에서 교수형으로 화관을 쓴 성 유대철이 있다.
유조이 체칠리아(1761〜1839) : 성녀 유조이 체칠리아는 비신자였으나,1801년의 신유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후실로 들어간 뒤에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남편 정약종이 체포될 당시 체칠리아도 세 아이와 함께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남편이 순교한 뒤 석방된 그녀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 었으므로 아이들을 데리고 광주 마재(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시댁으로 갔으나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괴롭힘과 박해뿐이었다. 게다가 얼마 되지 않아 맏딸을 잃고 말았다.
체칠리아는 그녀의 곁에 남아 있는 아들 정하상(바오로)과 딸 정정혜(엘리사벳)를 키우며 힘들게 생활하였지만,신자 본분만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지키면서 자식들을 하느님의 종으로 키우는 데 열중하였 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 아우구스티노가 그녀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것이었다.
“나는 천국에 방이 여덟 개 있는 집을 지었소, 그 중 다섯은 찼는데 나머지 세 방은 아직 빈 채로 있다오. 그러니 생활의 곤궁함을 잘 참아내고 반드시 우리를 만나러 오시오. ”
실제로 그때는 체칠리아의 가족 8명 중에서 5명이 사망하고 3명만 이 남아 있던 상황이었다. 꿈속에서 들은 남편의 이 말은 그녀에게 새 로운 용기를 갖도록 하였고,그녀는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특히 아들 바오로가 성장하자,체칠리아는 그가 교회 재건을 위해 봉 사할 수 있도록 온갖 뒷받침을 다해 주었다. 바오로가 선교사를 영입 하기 위해 북경 길을 떠날 때마다 체칠리아는 이별의 아픔과 두려움 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곤 하였다.
그 후 중국인 유방제(파치피코)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 모방(나 베드 로) 신부 등이 입국하자 체칠리아는 딸 엘리사벳과 함께 아들 바오로를 따라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특히 그녀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기 위하여 자신의 식사를 빠트릴 정도로 이웃 사랑과 나눔을 실천 하곤 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조카 한 명이 그녀에게 와서 피신 처를 제공하겠다고 하였으나,그녀는 “나는 늘 순교하기를 원하였는 데,이제 그 기회가 왔으니 아들 바오로와 함께 순교할 생각이다.”라 고 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던 중 7월 11일(양력)에 아들이 체포 되고,7월 19일에는 그녀도 딸 엘리사벳과 같은 날에 체포되었다.
포도청의 문초와 형벌이 시작되자,체칠리아의 용기는 더욱 빛을 발하였다.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떠한 위협과 유혹, 형벌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태형을 230대나 맞으면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고령의 몸으로 혹독한 형벌을 받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 다. 거듭된 문초와 형벌 속에서 몇 달 동안 옥살이를 하던 체칠리아는 결국 장독으로 인한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11월 23일(음력 10월 18 일) ‘예수, 마리아’ 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며 하느님 대전에 목숨을 바 쳤으니,이때 그셔의 나이 78세였다.
김 데레사(1796〜1840) : 충청도 면천 출생 / 과부,성 김대건 신부의 당고모 / 포도청 교수
성녀 김 테레사는 충청도 면천 솔뫼(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일찍부터 집안의 신앙을 이어받아 열심한 신자가 되었 다. 1814년 해미에서 순교한 하느님의 종 김진후(비오)는 그녀의 조부 이고,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종한(안드레아)은 그녀의 부친이니, 그녀는 성 김 대건(안드레아) 신부의 당고모가 된다.
본래 성품이 순량하며 덕행 실천에 뛰어났고,애주애인(愛主愛人) 의 표양이 드러났던 테레사는 박해가 시작된 후 부모들을 따라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살아야만 하였다. 게다가 모친이 일찍 선종 하고,부친마저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생활해야만 했으므로,그녀는 따로 외가에서 지내게 되었다.
테레사는 성장하면서 동정 원의를 품기도 하였다. 그러나 열일곱 살 되던 해에 부친 안드레아의 인도에 따라 홍주 출신의 열심한 교우 손연욱(요셉)에게 출가하게 되었고,이후로는 여러 자녀들을 낳아 모 두 홀륭한 신자로 교육함으로써 집안을 모범적인 성가정으로 만드는 데 노력하였다.
1824년에 남편 요셉이 해미에서 순교한 뒤로 테레사는 정절을 지 키고 가난의 고통을 불평 없이 참아냄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 았다. 그녀는 일주일에 세 차례 대재를 지키면서 고행에 전심하였고, 염경(기도)이나 묵상에도 열심이어서 항상 간절한 통회를 발하였다. 그 후 서울로 이주한 테레사는 친척 집에 있다가 다시 시골에 있는 계모에게로 내려가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유방제(파치피코) 신부가 입국하자 정정혜(엘리사벳)와 함께 신부의 처소를 보살피는 일을 맡았 다. 이 소임을 맡은 이후 그녀는 드물게 보이는 겸손으로 봉사하였고, 따라서 신부와 모든 교우들은 그녀의 겸손함을 언제 어디에서나 칭찬 하곤 하였다.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주교가 입국하자,그녀는 다시 주교의 처소 를 보살피게 되었다. 그러던 중 1839년의 기해박해가 시작되었지만,테레사는 피신하지 않고 있다가 7월 19일(음력 6월 9일)에 정정혜 등 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옥중에서 테레사는 나이가 어린 이 아가타를 만났다. 아가타는 이 미 여러 달 전에 체포되어 고초를 당하고 있던 중이었다. 데레사는 여 러 차례의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여기에 전혀 굴하지 않았고,신자 들이나 선교사들을 고발하는 말을 조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녀 는 어린 아가타와 서로 권면하면서 도합 여섯 차례에 걸쳐 형벌을 받 으면서 태장 280대를 맞았다.
한편 조정에서는 체포된 천주교인들을 하루 빨리 처형하고 새해를 맞으려 하였고, 성급한 나머지 천주교인들을 교살(紋殺)시키라는 명 을 내리게 되었다. 그 결과 데레사와 아가타는 옥중의 다른 방으로 끌 려가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때는 1840년 1월 9일(음력 1839년 12월 5일)로,그녀의 나이 44세였다.
이 아가타(1823~1840) : 서울 출신 / 동정,성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의 딸 / 포도청 교수
성녀 이 아가타는 이광헌(아우구스티노) 회장과 권희(바르바라)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교회의 젖을 먹고 자랐다. 1839년에 기해 박해가 일어났을 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열여섯이었다.
당시 아가타의 집은.남명혁(다미아노) 회장의 집과 이웃하여 있었 는데,4월 초(양력) 어느 날 배교자의 밀고로 들이닥친 포교와 포졸들 이 두 집안 식구를 모두 체포하여 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 이때 아가 타는 12세 된 남동생과 같은 나이의 다미아노 회장 아들과 함께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두 집안 식구들에게 문초와 형벌을 계속하던 포도대장은 어른들이 너무나 완강하여 도저히 꺾을 수 없자,우선 어린이들을 유혹하고 매 질하여 배교시킴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 은 단순한 생각이었다. 은총의 힘으로 굳센 마음을 갖게 된 아가타는 나이 어린 동생들을 권면하면서 어떠한 위협이나 유혹,매질에도 넘 어가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단호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와 같은 아가타와 어린이들의 용기는 포도청 담 밖에 있는 교우 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이매임(데레사)의 집에 모여 생 활하던 여섯 명의 여교우들도 이러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이에 그 들은 거룩한 순교 열정이 불타올라 스스로 포졸들을 찾아가 자수하기 에 이르렀다.
포도대장은 마침내 손을 들고 말았다. 어린이들조차 어찌할 수 없 다는 것을 안 그는 어린이들을 그들의 부모와 함께 형조로 이송하도 록 명하였다. 그러나 형조에서도 이 용감한 어린들을 마음대로 다루 지 못하였고, 끝내는 ‘어린이들을 형벌로 다루는 것은 국법에 어긋난 다’ 는 구실을 붙여 포도청으로 돌려보내고 말았다.
아가타는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과 함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하였으 나 소용이 없었다. 다시 포도청으로 이송된 그녀는 굶주림과 목마름, 거듭되는 강요,열병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3백 대 이상이나 되는 태장과 90대의 곤장을 맞아야만 하였다. 그 동안 포졸들이 거짓으로 ‘부 모들은 배교하고 석방되 었으니,너도 그리하라’고 했지만,아가타는 도리어 이렇게 말하였다.
“부모님이 배교하고 안하고는 그분들의 일입니다. 저는 제 가 항상 섬겨온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
이렇듯 고통 속에서 9개월 동안을 갇혀 있으면서도 아가타는 인내 심과 강건함으로 모든 것을 참아 받았다. 또 옥중에서 김 테레사를 만 나 서로를 권면하였다. 그러다가 조정의 명에 따라 교수형으로 순교 의 영광을 얻었으니,이때가 1840년 1월 9일(음력 1839년 12월 5일) 로,그녀의 나이 17세였다.
민극가 스테파노(1787-1840): 인천 출신,서울과 경기도에서 전교 / 회장,양반,교리 교사 / 포도청 교수
성 민극가 스테파노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출생하여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친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본래 그는 비신자 집안 출신이었 으나,어느 날 천주 신앙에 대해 듣고는 부친과 형제들이 모두 함께 입교하게 되었다.
온화하면서도 냉정한 판단력을 지녔던 스테파노는 입교한 이후로 공공연하게 천주교 신자임을 내세우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20세쯤 되었을 때 교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아내를 잃고 서울의 모화관(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경기도 갓등이 교우촌(현 화성시 봉담음 왕림리) 등지에서 혼자 살았다. 그러다가 친 구들의 반복된 권고와 부친의 의견에 따라 재혼을 했지만, 6〜7년 만 에 다시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외동딸마저 잃고 말았다.
혼자 몸이 된 스테파노는 인천, 수원, 부평 등지를 다니면서 교우 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신심 서적을 베껴 판 돈으로 자선 사업과 전 교 활동을 해서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이제 그의 열심은 교우들 의 모범이 되었으며, 유방제(파치피코) 신부는 그의 열성을 높이 사서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또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수원 양간의 송교(현 화성시 서신면 송교리)에 전답을 사서 그에게 맡기기도 하였 다.
민극가 스테파노는 1839년의 기해박해가 거의 끝날 무렵에 밀고되 었다. 그는 곧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으며, 포도대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포도대장이 그에게 배교를 강 요하면서 주뢰형과 함께 꼬챙이로 찌르는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지만, 그는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 만 약 에 저를 놓아주신다면 더욱 열심히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비신자들에게도 천주 신앙을 전 하여 그들을 회두시키겠습니다. ”
포도대장은 이 말에 더욱 화가 나서 치도곤을 치도록 명한 다음, 40대에 이르자 형을 그치고 옥에 가두도록 하였다. 이때 스테파노는 배교자들을 꾸짖고,죽음을 두려워하는 교우들을 권면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 덕택에 김절벽(도미니코)과 이사영(고스마)은 뒤에 용감히 배교를 철회하고 교수형을 받게 된다.
이후에도 스테파노는 다시 포도대장 앞으로 끌려 나가 형벌을 받아 야만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따르려는 그의 마 음 은 조 금 도 흔 들 림 이 없 었 고, 결 국 포 도 대 장 은 포 졸 들 에 게 목 졸 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스테파노는 옥에 갇힌 지 5?6일 후인 1840년 1월 30일(음력 1839년 12월 26일)에 교수형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이때 그의 나이 53세였다.
정화경 안드레아(1807〜1840) : 충청도 정산 출신,수원 양간 이주 / 앵베르 주교 복사 / 포도청 교수
성 정화경 안드레아 회장은 충청도 정산에 사는 부유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성이 순박하고 양순했던 반면에 머리가 둔하고 너 무 고지식하여,훗날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 앵베르(범 라우렌 시오) 주교와 여러 교우들을 밀고하게 된 사건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릴때 부터 집안에서 배워온 신앙생활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고 언제나 교리의 본분을 지켜나갔다.
성장한 뒤 안드레아는 신앙생활에 불편함이 따르자 수원 양간으로 이주하였고,이때 고향에 있던 재산을 앵베르 주교에게 봉헌하였다. 그런 다음 회장으로 임명되자 자신을 본분을 다하며 교우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배교자 김순성(일명 김여상)이 주교 의 피신처를 찾기 위하여 이리저리 다니던 중 안드레아와 만나게 되 었다. 이때 김순성은 거짓으로 말을 지어 내서 안드레아에게 말하였 고,그는 이를 진실로 믿고 배교자를 주교의 은신처로 안내하였다.
주교가 체포된 후에도 정화경 안드레아는 종교의 자유가 선포될 것이 라는 포졸들의 말에 속아 몇몇 교우들의 집을 일러주었다. 그러다가 복 사 이재의(토마스)와 최 베드로(신학생 최방제의 형)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하는 동안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그는 성 모방(나 베드로)과 샤스탕(정 야고보) 신부를 찾아가 성사를 본 뒤 신부들 을 피신시켰다.
안 드 레 아 는 이 후 배교자 김순성을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신부의 말씀대로 그의 말을 한마디도 듣지 않았으며, 오직 천주 교리와 자신 의 신앙만을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배교자 김순성은 더 이상 안드레 아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포졸들에게 인도하였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후 안드레아는 주뢰형과 치도곤 등 갖가지 형벌 을 받았으며,대꼬챙이로 온몸이 찔리는 가운데서도 신앙을 잃지 않 았다. 그런 다음 옥에 갇힌 지 5개월 만인 1840년 1월 23일(음력)1839년 12월 19일) 옥중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이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허임 바오로(1796〜1840) : 일명 ‘협’,서울 거주 / 군인 / 포도청 장살
성 허임 바오로의 출생지나 입교 과정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 다. 성장한 뒤 서울 훈련도감 군인으로 있으면서 열심히 교리의 본분 을 실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한창이던 8월경에 체포된 그는 포도청으로 압송된 뒤 누구보다 심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가 군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포도대장은 그를 배교시키기 위하여 주뢰형을 가하고 꼬 챙이로 찌르며,치도곤을 70대나 때리도록 하였지만, 그의 신앙은 조 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가혹한 형벌이 몇 주일 계속되자,용감했던 바오로의 마음은 일시 적으로 약해지게 되었다. 그래서 형벌 중에 배교하겠다는 말을 입 밖 에 내고 말았다. 그러자 포도대장은 자신의 목표가 이루어졌음을 기 뻐하면서 그를 석방하여 주었다.
이때 바오로에게 주님의 은총이 내려졌다. 그는 석방되자마자 자신이 범한 죄를 뉘우치고는 즉시 포도청으로 달려가 배교를 공공연하게 철회하였다. 이에 더욱 화가 난 포도대장은 다시 형벌을 가하고 옥에 가두라고 명하였다.
옥졸들은 석방되었던 그가 다시 옥으로 끌려온 것을 의아하게 생각 하고는 그의 신앙이 과연 어떤 정도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를 괴롭 히면서 “말로만 배교를 취소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니, 네가 뉘우친다 는 표시를 우리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대소변이 가득한 통을 가리키며 “네가 진실로 뉘우친다면,이 사발로 저 통 에 있는 것을 퍼서 마시도록 해라.”고 놀려댔다.
이때 바오로는 서슴지 않고 인분 한 사발을 듬툭 떠서 단숨에 마셔 버리고는 다시 사발을 인분에 갖다 댔다. 그러자 옥졸들이 도리어 그 를 말리면서 십자가를 내어 놓고는 “네가 천주교를 정말로 배반하기 싫으면 이 십자가 앞에 엎드려라.”고 명하였다.
허임 바오로는 즉시 십자가 앞에 꿇어 앉아 이마를 땅에 조아렸고,입으로 배반하였던 예수 그리스도를 온 마음으로 숭배하면서 그분을 위해 순교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제 용기로 가득 찬 바오로의 마음은어떠한 갈등도 느끼지 않았 으며,되풀이되는 문초와 형벌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치도곤을 130대 이상 맞으면서 살이 터져 피가 솟고 뼈가 드러났지만, 그의 신 앙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가 육체적으로 이를 극복하지 못 한 채 옥중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때는 1840년 1월 30일(음력 1839년 12월 26일)로, 그의 나이 44세였다.
김성우 안토니오(1795〜1841): 성 김성우 안토니오는 경기도 광주의 구산(현 하남시 구산동)에 있는 부유한 양반 집에서 태어났다. 혼인한 뒤 안토니오는 평소에 가깝 게 지내던 서당 훈장 이 서방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게 되었고,그 교리가 진리라고 생각하여 셋째인 김문집(베드로)과 함께 신앙을 받아 들였다. 이때가 1830년으로, 김성우의 나이 36세였다.
둘째인 김만집 (아우구스티노)은 처음에 입교하기를 꺼려하였으나,얼마 안 되어 형 제들의 모범을 따르게 되었다. 이후 삼형제의 신앙 실천과 전교 활동은 눈부시게 결실을 맺어 구산 마을 전체가 교우촌 으로 일구어 지게 되었다.
안토니오는 중국인 유방제(파치피코) 신부가 입국하자,성사를 자 주 받기 위해 서울 느리골(현 서울 효제동)로 이주하였다가 동대문 밖 가까이 있는 마장안(현 서울 마장동)으로 이주하였다. 그런 다음 자신 의 집에 작은 경당을 마련하여 집회소로 삼았고, 1836년 여름 동안 프랑스 선교사 모방(나 베드로) 신부를 이 집에서 모셨다. 이때 모방 신부는 안토니오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안토니오 회장은 서울에 사는 동안 상처를 하고 재가하였는데,새 아내도 매우 열심한 신자였으므로 그가 회장 직분을 다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다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구산 교우촌에도 포 졸들이 들이닥쳐 둘째인 김만집과 셋째인 김문집 형제를 비롯하여 여 러 신자들을 체포하였다. 이후 김만집은 1841년 남한산성 옥에서 순 교하였으며,김문집은 석방되었다가 1866년의 병인박해 때 다시 체포 되어 1868년에 순교하였다.
김성우 안토니오는 박해 소식을 듣고는 지방으로 피신하였으나,끝 내 포졸들의 수색망에 걸려 1839년 12월경에 체포되었다. 서울 포도 청 으 로 압 송 된 그 는 옥 중 에 서 도 자 신 의 집 에 온 것 처 럼 행 동 하 였 으 며,비신자 죄수들에게 교리를 전하여 그중 2명을 입교시키기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포도청과 형조에서 거듭 형벌을 받으면서도 교회 에 해가 되는 말은 조금도 입 밖에 내지 않았고,순교 원의를 굳게 다져나갔다.
체포된 지 1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오의 순교 열망 은 사라지지 않았으며,마지막으로 치도곤 60대를 맞고도 고통을 느 끼기는커녕 오히려 순교가 가까워졌음을 알고는 즐거운 낯으로 포졸 들을 대하였다. 문초와 형 벌을 받는 동안 그는 다음과 같이 신앙을 고 백하곤 하였다.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죽어도 천 주교 인으로 죽고자 할 따름이오. ” 결국 포도대장은 안토니오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것을 알고는 그에게 교수형을 언도하였으니, 이때가 1841년 4월 28일(음력 윤3월 8일)로, 의 나이 47세였다.
순교 후 안토니오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거두어져 고향 구산에 안장 되었다가 1927년 5월 30일 구산 현지에서 발굴되어 서울 용산 신학교로 옮겨졌다가 명동대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져 안치되었으며 , 1967년에는 다시 절두산기념관의 지하 성해실로 옮겨져 안치되었다.
남경문 베드로(1796〜1846) : 서울 출신 / 회장,유방제 신부 복사,중인, 군인 / 좌포도청 장살
성 남경문 베드로는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병중에 있다가 박 베드로의 권유로 대세를 받고 입교하였다. 본 래 베드로의 부친은 신유박해 이전부터 신자였으나,일찍 세상을 떠 난 까닭에 그에게 신앙을 전해줄 수 없었다고 한다.
22살 되던 해에 베드로는 허 바르바라와 혼인하였다. 이때 그는 금 위영의 군인으로 있다가 나와서 조개젓 장사를 하였고,교리를 깊이 알고 있지 못한 탓에 고리대금업까지 하였다. 그러나 유방제(파치피 코) 신부에게 가르침을 받고는 대금업에서 손을 됐으며, 신부가 순회 할 때마다 따라다니며 열성적으로 도와 드렸다. 이러한 열성으로 인 해 그는 훗날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베드로는 비신자인 형제들 덕 택으로 체포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냉담자가 되 어 첩을 두기도 하는 등 3년 동안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회두하여 다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경문 베드로는 순교 원의를 드러내곤 하였다. 또한 매일 기도를
빠트리지 않았고, 보속 하는 마음에서 한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고 생활하였다.
이로 인해 몸이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1846년의 병오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체포 대상에 오르게 되었 다. 또 체포될 때는 부인이 매달리면서 배교를 종용하였으나, 그는 순교를 작정한 사람처럼 아내를 뿌리쳤다고 한다.
이내 좌포도청으로 압송된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종종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포도대장은 세속의 영달과 가족, 친구들을 내세우면서 베드로를 배교로 유혹하고자 하였고, 베드 로의 친구들과 형제들까지 찾아와서 배교를 권유하였다. 그러나 순교 를 각오하고 있던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 는 교우들의 이름은 모두 이미 죽은 사람들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더욱 화가 난 포도대장은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고,그 와중에 서 곤장이 베드로의 어깨 위에서 부러지기도 하였다.
결국 포도대장은 배교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매로써 죽이겠다는 결 심을 하였으며,이에 그를 공중에 매달고는 심하게 매질하는 학춤 형 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그러던 중 베드로는 이를 견디어내지 못하고 순교에 이르렀으니, 때는 1846년 9월 20일(음력 8월 1일)로, 그의 나 이 50세였다.
임치백 요셉(1804〜1846) : 성 임치백 요셉은 서울 한강변에 살던 비신자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모친을 여의고 부유한 편부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서당에 다니며 공부하기도 하였고, 무술과 예도(藝道)를 익히면서 향 락 을 즐 기 는 친 구 들 과 상 종 하 기 도 하 였 다 . 그러나 본성이 유순 하고 효심이 지극했던 까닭에 조금도 덕행에 어긋나는
일은 없었다.
1830년경 아내와 자식들이 천주교에 입교한 뒤 요셉 자신도 여기 에 마음을 기울였으나, 세속과의 관계를 끊지 못하고 입교 시기를 미 루기만 하였다. 그러면서도 교우들을 완전히 믿고 형제처럼 대하며, 곤란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 중에서 4?5명을 데려다 함께 생활하기 도 하였다.
1835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요셉은 교우들을 보호해 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며,나중에는 스스로 포졸이 되어 교우들을 보살펴주 기도 하였다. 그 후 요셉은 삼개(현 마포) 마을로 이사하였는데, 천주 교 신자들이 그의 집에 빈번히 왕래하는 것을 보고는 비신자들이 갖은 모함과 욕설을 퍼부었지만 그는 조금도 이것을 두려 워 하지 않았다.
1846년 6월 아들 임성룡이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를 따라 황해도 연안으로 나갔다가 신부와 함께 체포되자,요셉은 아들을 보기 위해 찾아갔다가 스스로 해주 감영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며칠 후 그들 부 자는 함께 서울로 이송되었고, 요셉은 포도청의 옥에서 김대건 신부 를 만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의 마음은 감동으로 넘쳐 입교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요셉은 이제 여러 사람들 앞에서 “오늘부터 천주교를 믿겠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너무나 오래 기다렸습니다 . ” 라고 단언 하기까지 하였다. 김대건 신부는 요셉에게 ‘옥에 갇힌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이니 정성껏 그에 보답해야 하며 죽을 때까지 충실해야 한다.’ 고 설명하였다. 요셉은 이에 순종할 것을 약속하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는 김대건 신부에게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전에 그와 친했던 포졸들은 이러한 요셉을 보고는 배교시키려 하 였지만,그는 이를 물리치면서 ‘하느님을 위해 죽기를 결심하였노라.’ 고 명백히 이야기하였다 . 포졸 들이 요셉의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와서 다시 배교를 권유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러자 포졸 들은 화가 나서 요셉을 거꾸로 매달고는 심하게 매질을 한 후 다시 옥 에 가두었다.
옥에 갇힌 지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좌포도대장이 요셉을 불러내 어 사형을 내리겠노라고 이야기하자,그는 기쁨에 넘쳐 옥중 교우들 에<이렇게 말하였다.
“오늘 법정에서 나에게 사형을 내린다고 하오. 나는 아무런 공로도 없지만 주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하늘나라에 가게 된다 면,당신들의 손을 이끌고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하겠소. 무엇 보다 용기를 가지시오. ”
이때 포도대장이 다시 요셉을 불러내 십계명을 외워보라고 하였다. 그가 십계명을 외우지 못하자, 포도대장은 ‘아직 완전한 신자도 아니니 배교하고 석방되도록 하라’ 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요셉은 “저는 비록 무식하지만 천주께서 나의 아버지이신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이만하면 된 것입니다.”라고 답하면서 참수형을 받게 해달라고 청하였 다. 화가 난 포도대장이 그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하도록 하였지만 그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다시 옥으로 돌아온 요셉은 웃는 빛으로 이야기하며 태연히 바닥에 누웠다. 그리고 잠시 후 남경문(베드로)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들어오자,그를 위로하며 상처를 감싸주었다. 결국 포도대장은 ‘그를 매질로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요셉은 자신이 바라지 않던 장살로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으니, 때는 1846년 9월 20일(음력 8 월 1일)로,그의 나이 42세였다.
한이형 라우련시오(1799〜1846) : 일명 ‘병심’,충청도 덕산 출신,경기도 은이 거주 / 회장 / 우포도청 장살
성 한이형 라우렌시오는 충청도 덕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14세 때 천주 교리를 배운 후 즉시 입교하여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다. 여러 시간 동안 십자가 앞에서 묵상하며 자신의 죄를 진실하 게 통회하기도 하고,주일과 축일에는 10리 떨어져 있는 공소에 가서 신심 행사에 참례하기를 거르지 않았다.
21세 때 교우 처녀와 혼인한 라우렌시오는 경기도 양지의 은이(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로 이사한 뒤 헌신적인 생활로 여러 사 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가난하거나 곤궁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언제 나 구원의 손길을 내밀곤 했으며,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들을 위해 자 신의 옷을 벗어주기도 하였다. 그의 집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려와 주 막집 같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간혹 지나치게 애긍시사를 한 다고 말할 때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헐벗은 사람을 입히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은 그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오면 주님께서 보다 큰 이자를 붙여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당시 그는 약간의 밭을 갖고 있었는데, 농사일이 아무리 바쁘다고 할지라도 주일 파공만은 철저히 지켰다. 그리고 밤마다 한 시간 남짓 묵상을 하였고,사순 시기에는 매일 대재를 실천하였다. 이러한 사실 을 알게 된 앵베르(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라우렌시오를 회장에 임명 하여 신자들을 보살피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학식과 덕 행과 끊임없는 모범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1846년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되면서 병오박해가 시작된 뒤,포졸들은 은이 마을로 몰려들어 라우렌시오와 가족들, 마을 교우들을 체포하였다 . 그러나 라우 렌시오만을 남겨 놓고 다른 사람 들은 즉시 석방하였다.
포졸들은 라우렌시오의 옷을 벗기고 대들보에 매단 후 혹독하게 매 질을 하면서 배교하고 동료들을 대라고 강요하였다. 그가 이를 거절 하자,포졸들은 다시 그의 다리를 묶고 그 사이에 깨진 그릇 조각들을 끼우고 나서 굵은 밧줄로 톱질을 하여 살이 파이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견디어냈다. 포졸들은 도리 어 여기에 감탄하여 다른 신자들에게 “너희들도 진실한 천주교인이 되려면 라우렌시오처럼 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결국 포졸들은 라우렌시오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 하였다. 이 때 그는 몸의상처로 걸을 수 조차 없었으므로 포졸들이 말에태우려고 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고, 신조차 신지 못한 채 서울까지 가야만 하였다.
라우렌시오는 포도청에서 다시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 였다. 그러나 그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으며, 처음의 신앙을 끝까지 굳게 지켰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곤장 70대를 맞고는 예수 그리스도 를 따라 순교의 길로 나아갔으니, 이때가 1846년 9월 20일(음력 8월 1일)로,그의 나이 47세였다.
우술임 수산나(1803〜1846): 경기도 양주 출신,인천과 서울 거주 / 과부,양반 / 우포도청 장살
성녀 우술임 수산나는 경기도 양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15세 때 인천의 교우와 혼인한 뒤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되었다. 그 녀가 처음 체포된 것은 1828년이었는데,이때 그녀가 임신 중이었으 므로 관장은 2개월여 동안 형벌을 가하기만 하고 석방하였다. 이후 그녀는 이때의 형벌로 인하여 평생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만 하였다.
그 후 남편을 여왼 수산나는 1841년에 서울로 이주하였고,이때부 터 여러 교우들의 집을 옮겨 다니며 하인 노릇으로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기도와 인내 안에서 가난과 온갖 고통을 참아 냈고,천주를 사랑하는 신심생활과 훌륭한 덕행으로 인해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 그녀는 교우들을 만날 때마다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전에 순교의 기회를 놓친 것뿐이다.”라고 하면서 순교의 원의 를 드러내곤 하였다.
1846년에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체포되었을 때, 수산나는 다른 여교우들과 함께 돌우물골(현 서울 소공동의 석정동)에 있던 신부댁에 서 생활하고 있었다. 이를 알고 있던 현석문(가롤로) 회장은 즉시 그 집으로 와사 수산나를 잣골(현 서울 종로구 동숭동의 백동) 이간난(아 가타)의 집으로 피신하도록 하고,그 자신은 김임이(데레사)와 정철염 (가타리나)이 있는 김조이의 사포서동(현 서울 종로구 수송동) 새집으 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포졸들은 이미 이러한 상황을 눈치 채고는 수소문 끝에 이 간난의 집을 급습하였고,그곳에 있던 우술임 수산나를 먼저 체포하 였다. 그리고 현석문 회장이 있던 사포서동 집으로 몰려가서 그곳에 와있던 이간난을 비롯하여 현석문 회장,김임이,정철염을 함께 체포 하였다.
이내 동료들과 함께 우포도청으로 압송된 수산나는 두 달 이상을 갇혀 있으면서 치도곤,태형,주뢰형 등 갖가지 형벌을 받았으나 인내 와 용기로 이를 극복하였다. 그런 다음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고는 매질아래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그러다가 혹독한 매질을 당해 순교의 영광의 얻었으 니,때는 1846년 9월 20일(음력 8월 1일)로,그녀의 나이 43세였다.
김임이 데레사(1811 〜1846): 서울 관우물골 출신 / 동정,김대건 신부 복사 / 우포도청 장살
성녀 김임이 데레사는 서울 관우물골(관정동)의 서자 집안에서 태 어나 어려서부터 성인전을 즐겨 읽으며 그들의 덕행을 본받는 데 노 력하였다. 17세에 이르러 그녀는 수정의 결심을 굳혔고,하느님을 사 랑하며 자신의 영혼을 구하는 일,그리고 남을 위한 헌신에 모든 것을 바쳤다. 여교우들이 임종할 때면 선종하도록 격려해 주고,죽은 후에 는 장사를 지내주었으며,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자신의 직분처럼 생각하였다.
20세에 부친을 여왼 테레사는 오빠 김 베드로와 함께 몇몇 친척집 으로 다니며 생활하였으나,주변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는 그녀를 이 상하게 생각하자 왕비궁의 침모로 들어가 3년을 지내기도 하였다. 또 1839년의 기해박해 이후에는 이문우(요한)의 양모 집으로 가서 5년 동안 생활하였다.
1844년부터 데레사는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부제 때 매입해 놓 은 돌우물골(서울 소공동의 석정동) 집에 살면서 교회와 집안일을 도 왔다.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것이 바로 그때였다. 이후 테레사는 박해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면서도 절대로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언제고 신부님이 체포되면 나는 자수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신 부님의 뒤를 따르겠다”고 항상 이야기하였다.
1846년의 병오박해로 체포되기 전날 김임이 테레사는 동생 집에 들 렸다. 이때 동생이 자고 가라고 하였으나 그녀는 현석문(가롤로) 회장 과 여교우들이 기다리고 있는 사포서동(현 서울 종로구 수송동)의 새 집으로 갔다가 그들과 함께 체포되 었다.
이내 우포도청 으로 압송된 데레사는 동료들 과 마찬가지로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녀는 용기 있는 행동과 애덕과 겸손의 모범을 나타냈으며, 천주의 성의에 온전히 복종하자고 동료들을 권 면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혹독한 매질을 당해 순교의 영광의 얻었으 니,때는 1846년 9월 20일(음력 8월 1일)로, 그녀의 나이 35세였다.
이간난아가타(1814〜1846) : 서울 잣골 거주 / 과부 / 우포도청 장살
성녀 이간난 아가타는 비신자 집안에서 태어나 17세 때 혼인했으 나,3년 후에 남편을 여의게 되었다. 아가타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천주 교리에 대해 듣게 되면서 아가타는 곧 그 가르침을 깊이 깨우 치게 되었고, 개가를 권고하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물리치고는 모친 께 청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마침 친척 중 에 천주교 신자가 한 명 있었으므로 그녀의 소망은 쉽게 이루어질 수 가 있었다.
아가타의 친척 교우는 이때부터 그녀와 그녀의 모친,그리고 그녀의 오라버니 에게 도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 하였다 . 그 런 다 음 유 방 제 (파치피코) 신부에게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완고한 비신자였던 아가타의 부친은 가족들이 천주교 신자가 된 것 을 알고는 크게 화를 내면서 아내와 아들을 경상도로 쫓아 보내고, 아가타는 시댁으로 돌려보냈다. 이때 그녀는 부친의 뜻을 어기지 않 고 시댁으로 들어가 온순하고 친절한 행동을 보이며 생활하였다. 그 리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고신 극기를 행하였고,특 히 대재를 자주 지킴으로써 “거울같이 맑고 눈같이 희다.”라는 평판 을 교우들로부터 듣게 되었다.
1846년 병오박해가 일어난 뒤,아가타는 잣골(현 서울 종로구 동숭 동의 백동)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온 우술임(수산나)과 함께 있다가 잠시 사포서동(현 서울 종로구 수송동)으로 현석문(가롤로) 회장을 방 문하였다. 바로 그때 우술임을 체포한 포졸들이 그곳으로 몰려와 집 안에 있던 모든 교우들을 체포하였다. 이때 아가타는 낯빛도 변하지 않은 채 포졸들을 향하여 “우선 내 집에 가서 옷가지를 가지고 떠납시 다.”라고 침착하게 말하였다.
우포도청으로 압송된 아가타는 동료들과 함께 갖가지 혹독한 형벌 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신앙심을 굽히지 않았다. 어느 기록에는,그녀가 배교의 유혹을 받아 잠시 마음이 약해졌는데 교우들의 궘면으로 용기를 갖게 더ㅣ었다고한다.
그러던 중 아가타는 마지막으러 곤장 50대를 맞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때는1846년9월20일(음력8월1일)로 그녀의 나이 32세였다.
정철염 가하리나(1817〜1846): 일명 ‘덕이’,수원 출신,서울 돌우물골 거주 / 비녀 / 우포도청 장살
성녀 정철염 가타리나는 수원 출신으로,재질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하였으나 온순하면서도 용감하였다. 비신자 양반의 종으로 있던 그 녀는 18세가 되던 해에 주인 집 가족 중의 한 교우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뒤 교리의 본분을 지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20세가 되었을 때,가타리나의 주인은 마을의 미신 행위에 참석하 도록 그녀에게 강요했으나 그녀는 신앙을 지키려는 마음에서 이를 단 호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대노하여 그녀의 팔을 결박하고 몸 에는 큰 맷돌을 매단 후 미신 행위가 끝날 때까지 장작더미 위에 앉혀 두도록 하였고, 제사가 끝난 다음에는 그녀를 끌어내려 직접 혹독한 매질을 하였다. 이로 인해 그녀는 몇 주일 지난 뒤에야 몸을 회복할 수가 있었다.
이듬 해 춘분 제삿날에도 주인은 다시 가타리나에게 미신 행위에 참여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이를 거절하였고,주인 의 매질은 더욱 혹독해졌다.
상처로 인한 몸이 회복되자,가타리나는 서울로 도망하여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상경한 뒤 교우집을 전전하며 살다가 이간난(아가타\ 김임이(데레사) 등과 함께 돌우물골(서울 소 공동의 석정동)에 있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집을 돌보면서 생 활하게 되었다.
1846년의 병오박해로 김대건 신부가 체포된 후,정철염 가타리나 는 사포서동(현 종로구 수송동) 김조이의 집에 있다가 먼저 체포된 우 술임(수산나)을 앞세우고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김임이,이간난,현석 문(가롤로) 회장과 함께 체포되 었다.
이내 포도청으로 압송된 가타리나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 으나 끝까지 배교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다가 9월 20일(음력 8월 1 일) 혹독한 매질 가운데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이때 그녀의 나이 29세였다.
2) 복자(5위)
윤유일 바오로(1760〜1795) : 경기도 여주 출신,양근 거주 / 최초의 밀사,양반 / 좌포도청 장살 하느님의 종 윤유일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감개(현 양평군 강 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양근으로 이주한 뒤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바오로는 그 후 서적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 다. 그런 다음 스승의 아우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이후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 중하였다.
1789년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북경의 구베아(탕 알렉산델) 주교 에게 밀사를 보내 그 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 기로 하였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신자가 바로 바오로였는데, 그 이유 는 그의 성격이 온순한 데다가 심지가 굳고 학식과 교리에도 밝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바오로는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가장하고,주교에게 보내는 신자들의 서한을 옷안에 숨긴 후 1789년 10월 조선을 떠나 북 경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는 북당에 있는 라자로회 선교 사들과 남당에 있는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었다. 또 바오로는 북경 에 머무는 동안 라자로회의 로오(나 니콜라오) 신부로부터 조건 세례 를,구베아 주교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았다. 아울러 구베아 주교로부 터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 에 대해 들었다.
1790년 봄 바오로가 귀국하자,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 영입을 위 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일 때문에 바오로는 그 해에 다시 한 번 북 경을 다녀와야만 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다음해 조선 신자들과의 약속에 따라 도스 레메디오 스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 신부는 조선 밀사들과 만나지 못함으로써 조선에 입국할 수 없었다. 바오로는 이에 실망하지 않 고 지황(사바),최인길(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 영입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으며,1794년 말에는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윤유일 바오로는 북경 교회와 연락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 려지면서 이와 관련된 모든 신자들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주 신부는 신자들의 재빠른 행동 때문에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 만,신부집 주인 최인길은 신부의 피신을 돕기 위해 그 대신 신부 노 릇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박해자들은 마침내 신부의 입국 경위를 알게 되었다.또 신부의 입국을 도운 윤유일 바오로와 지황의 이름도 알아내고 말았다. 결코 신부의 행적을그 결과 그들은 즉시 체포되어 최인길과 함께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결코 신부의 행적을 발설하지 않았으며,끝까지 굳은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사정없이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한 뒤,비밀리에 그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당시 바오로의 나이는 35세였다.
이후 구베아 주교는 조선의 밀사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전해듣고는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 당시에 보여준 용기를 다음과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군 질문에 용 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 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 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최인길 마티아(1765〜1795) : 서울 출신 / 주문모 신부의 신부댁 주인,역관 / 좌포도청 장살
1765년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길 마티아는,1784년 한 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 를 배워 입교하였다.
마티아는 입교 초기 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데 앞장섰으며,
1790년 윤유일(바오로)이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그가 맡은 일은 선교사 가 은신할 거처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이후 마티아는 서울 계동(현 서 울 종로구 계동)에 집을 마련하고 선교사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1794년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마침내 조선에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는 이듬해 초 마티아의 집으로 인도되었다. 마티 아는 이때부터 주 신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지만, 얼 마 안되어 한 밀고자에 의해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 았다. 다행히 교우들의 재빠른 처신으로 주 신부는 마티아의 집에서 빠져 나와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에 앞서 마티아는 주문모 신부에게 피신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자신이 신부로 위장하고 집에서 포졸들을 기다렸다. 그가 역관 집안 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알았으므로 이런 계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위장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체포된 지 얼마 안되어 마 티아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었고,이에 놀란 포졸들은 다시 신부의 행 방을 쫓으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처럼 마티아는 주 신부를 안 전하게 피신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곧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 혀지고, 그의 입국을 도운 밀사 윤유일과 지황(사바)도 체포되고 말았다.
최인길 마티아와 동료들은 체포된 날부터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 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그들의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굳은 인내 와 결심, 그리고 지혜로운 답변은 박해자들을 당황케 하였다. 그들은 주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수없이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이제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때 려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과 마티아와 동료들은 그날로 사정없이 매를 맞고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당시 마티아의 나이는 30세였다. 순교 후 그들의 시신을 강 물에 던져져 버렸다.
그 후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회의 밀사로부터 모든 이야기 를 들은 후,마티아가 보여준 용기와 그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 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 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 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 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최인길은 이승훈(베드로)이 신앙 전파를 위해 선발한 최초의 회장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또 하느님의 영광을 증진하는 데 있어 열성과 믿음과 신심이 뛰 어난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지황 사바(1767〜1795): 일명 ‘지홍’ , 서울 출신 / 교회 밀사,중인 / 좌포도청 장살
하느님의 종 지황 사바는 1767년 서울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 났으며,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원하여 교리를 배웠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자 마자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하였고,하느님을 위해 목숨 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위험이나 궁핍,고통을 당할 때에도 결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1789년 이래 조선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었다. 그러나 1791년에 있었던 첫 번째의 영입 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며,바로 그 해 말에 일어난 박해로 인해 이러한 노력은 한 동안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성직자 영입 운동이 재개된 것은 1793년이었다. 이때 이미 북경을 다녀온 적이 있는 윤유일(바오로)을 비롯하여 사바와 박 요한이 밀사 로 선발되어 함께 조선의 국경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 다음 윤유일은 그곳에 남고, 사바와 요한이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향하 였다.
북경에 도착한 지황 사바는 얼마 안되어 구베아 주교를 만날 수 있 었는데,이때 사바의 신심에서 감명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훗날 다음 과 같이 증언하였다.
“우리는 1793년에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일간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북경의 교우들은 그의 신심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
1794년 초 구베아 주교는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조선 선교 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사바는 주 신부와 만나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각각 다른 길로 국경으로 가서 상봉하였다. 그러나 감시가 심한 데다가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려야만 하였으므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져야만 하였다.
지황 사바는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국경으로 가서 주문 모 신부를 만났으며,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에는 그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윤유일과 함께 신부를 안내하 여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주 신부는 몇 개월 동안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한 밀고자에 의해 그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위험에 처하게 되 었다. 이때 신부는 신자들의 재빠른 행동 때문에 다른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집주인 최인길을 비롯하여 신부의 입국을 도운 사바와 윤유일은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내 지황 사바와 동료들은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 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신부의 행적을 발설하지 않았으며,끝 까지 굳은 신앙을 고백하였다. 형벌을 받는 중에도 그들의 마음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쳐 얼굴에까지 번졌다. 그러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정없이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하 였다. 그런 다음 비밀리에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렸으니, 이때 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당시 사바의 나이는 28세였다.
이후 구베아 주교는 조선 교회의 밀사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고는 사바와 그의 동료들이 순교 당시에 보여준 용기를 다음과 같 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 감히 그렇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 자,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 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되어 있 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심아기 바르바라(1783〜1801) : 경기도 광주 출신 / 동정 / 포도청 장살
하느님의 종 심아기 바르바라는 오빠 심낙훈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 교한 뒤 신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 던 중 성인들의 모범에 감동하여 하느님께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하였 으며,이후로는 조용히 집안에서만 지내면서 모범적으로 교회의 법규 를 지켜 나갔다.
1801년의 신유박해로 오빠가 체포되자, 바르바라는 포졸들이 얼마 안되어 자신도 찾아올 것이라 예상하고 그들을 기다렸다. 마침내 포 졸들이 들이닥쳐 체포하려고 하자,그녀는 어머니를 향해 “너무 슬퍼 하지 마시고 제가 천주의 성스러운 뜻에 순종하도록 놓아두십시오.” 라고 말한 뒤, 스스로 그들 앞으로 나아가 분명하게 신앙을 고백하였 다. 그런 다음 동요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고서 서울로 끌려갔다.
이후 심아기 바르바라는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모진 형벌 을 받았지만,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계속 되는 형벌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순교하였으니,그때가 1801년 4월 초 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18세였다.
반면에 바르바라에 앞서 체포된 오빠는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전라 도 무안으로 유배되었다. 그녀가 매를 맞다가 순교한 뒤에, 그녀의 오 빠가 박해자들에게 진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는 제 누이 바르바라에게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쳐 포도 청에서 매를 맞아 죽게 하였는데, 누이는 끝까지 (신앙의 가르 침을 믿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김이우 바르나바(?〜1801)
서울 명례방 출신 / 중인, 김범우(토마스)의 이복 동생 / 포도청 장살
하느님의 종 김이우 바르나바는 서울 명례방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 서 서자로 태어났다. 1786년경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범우(토마스)는 그의 맏형이자 이복형이고,1801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김현우(마 태오)는 그의 아우이다.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되어 이복형 토마스로부터 교리 를 배워 입교한 바르나바는 아우와 함께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당시 그들 형제에게 세례를 준 사람은 이승훈(베드로)이었다.
이어 1785년에 일어난 ‘명례방 사건’으로 맏형 토마스가 유배를 가게 되 자,그들 형제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들은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비밀리에 기도 생활을 계속해 나 갔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바르나바는 아우 마태오와 함께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홍필주(필립보)의 집으로 가서 주 신부를 만났으며,정인혁(타대오), 최필제(베드로) 등 몇몇 교우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들 은 이 공동체 안에서 자주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강습하였다.
이후 바르나바는 주 신부가 박해의 위험 때문에 피신하게 되자,자 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하고 그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하였다. 그 리고 주 신부가 설립한 평신도 단체 ‘명도회’ 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또 1800년에 주 신부가 다시 한 번 자신의 집을 방문하여 미사를 집 전하게 되었을 때는 미사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하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바르나바는 아우 마태오와 함께 체 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바르나바는 엄한 문 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는데,특히 박해자들은 그에 게 그 동안의 행적을 무섭게 추궁하였다. 그의 집이 신자들의 집회 장소였고, 그가 주문모 신부를 숨겨준 사실이 아미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나바는 아무 것도 발설하지 않았으며,여러 차례의 형벌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다. 그러다가 결국 형벌을 끝까 지 견디어내지 못하고 포도청에서 장사(杖死)로 순교하였으니,이때 가 18이년 5월경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