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윤지충 바오로(5.29) 기본정보
성인명 윤지충 바오로 (尹持忠 Paul)
축일 5월 29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진사, 양반,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759-1791년
같은이름
윤지충(尹持忠) 바오로(Paulus)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우용’이며,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 프란치스코가 그의 동생이다.
본디 총명한 데다가 품행이 단정하였던 윤 바오로는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1783년 봄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또 이 무렵에 고종 사촌 정약용 요한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으며, 다음해부터는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 읽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3년 동안 교리를 공부한 그는, 1787년 인척인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윤 바오로는 어머니와 아우 윤 프란치스코, 외종사촌 권상연 야고보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 인척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자주 오가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권상연(權尙然) 야고보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디 그는 학문에 정진해 오고 있었으나, 고종사촌인 윤지충 바오로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는 기존의 학문을 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그때가 1787년 무렵이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 바오로는 권 야고보와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려고 집 안에 있던 신주(죽은 사람의 위패)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윤 바오로의 어머니(곧 권 야고보의 고모)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가 신주를 불사르고, 전통 예절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소문은 얼마 안 있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그곳을 온통 소란스럽게 하였다. 그리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 소식을 들은 윤 바오로는 충청도 광천으로, 권 야고보는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윤 바오로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전해 들은 그들은 곧바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때가 1791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가 진리임을 역설하면서 ‘절대로 신앙만은 버릴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여러 차례의 설득과 회유가 있었음에도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는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전라 감사는 그들에게서 천주교 신자들의 이름을 얻어 내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신앙을 굳게 지키면서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특히 윤 바오로는,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면서 제사의 불합리함을 조목조목 지적하였고, 이에 화가 난 감사는 그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도록 하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천주를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그들에게서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내 조정은 다시 한 번 소란스러워졌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게 되었다. 결국 임금은 이러한 대신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그들의 처형을 허락하였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곧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를 옥에서 끌어내 전주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이때 윤 바오로는 마치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이었으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들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그때가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이었다. 먼저 칼날을 받은 윤 바오로가 32세였고, 권 야고보는 40세였다.
윤 바오로와 권 야고보의 친척들은 9일 만에 관장의 허락을 얻어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둘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은 그 시신이 조금도 썩은 흔적이 없고, 형구에 묻은 피가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선명한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다. 이후 교우들은 여러 장의 손수건을 순교자들의 피에 적셨으며, 그 가운데 몇 조각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병으로 죽어 가던 사람들이 이 손수건을 만지고 나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윤지충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2. 윤지헌 일가의 신앙생활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72)
윤지충 · 윤지헌 집안 거의 멸문… 숙부 윤징 정사박해 때 순교
-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 소장 「백가보(百家譜)」에 수록된 윤지충 일가 족보. 파란 색으로 표시된 세 사람의 이름 아래 모두 ‘사주(邪誅)’란 표현이 보인다.
숙부 윤징(尹징)도 정사박해 순교자
「남보(南譜)」는 당시 남인 유력 가문의 족보를 모은 책이다. 해남 윤씨 항목에서 윤지충의 이름을 찾으면 윤두서(尹斗緖)의 아홉 아들 중 다섯째 윤덕렬(尹德烈)의 손자로 나온다. 윤덕렬의 아들 윤경(尹憬)에게 다시 두 아들이 있다. 맏이가 윤지충이고, 둘째가 다섯 살 터울의 윤지헌이었다. 다산의 부친 정재원(丁載遠)에게 시집온 아내 윤씨는 윤지충의 여동생이자 윤지헌의 누나였다. 여러 종류의 「남보」에 윤지충과 윤지헌 두 사람의 이름 뒤에는 ‘사폐(邪斃)’ 또는 ‘사주(邪誅)’란 글자가 선명하다. 사학으로 인해 처형되었다는 뜻이다.
「해남윤씨대동보」에는 윤지헌이 부친 윤경의 아우 윤징(尹?, 1730∼1797)에게 입계된 것으로 나온다. 「남보」에는 입계 사실이 적혀있지 않다. 대신 「남보」에는 윤징의 이름 밑에 역시 ‘사주(邪誅)’란 두 글자가 적혀 있다. 윤징 또한 천주교 신자로 처형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천주교 관련해 어떤 문헌에서도 윤징이 천주교인이었고 순교했다는 이야기는 확인된 바 없다. 「해남윤씨대동보」에는 윤징의 자가 유평(儒平)이고, 정사년 즉 1797년에 세상을 떴다고만 했다. 그의 묘소는 진산군(珍山郡) 막현(莫顯)이란 곳에 있었다. 윤지충 형제가 나고 자란 곳이다. 현재는 금산군 진산면 막현리이다.
윤지충의 숙부 윤징이 천주교로 죽임을 당했고 사망한 해가 1797년이었으며, 묻힌 곳이 진산이었다면 이는 그가 정사박해 때 순교했다는 뜻이다. 정사박해는 1795년 주문모 실포 사건 이후 충청도 일원에서 벌어진 대대적인 천주교도 검거령으로 인해 일어난 교난이었다. 윤징 또한 정사박해 당시 서학에 연루되어 죽은 100여 명의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어째서 윤징의 순교 사실을 언급한 기록이 전무한가? 「해남윤씨대동보」에도 그가 사학으로 처형되었다는 기록은 쏙 빠졌다. 여러 「남보」에만 이 사실이 ‘사주’란 두 글자로 또렷하게 남았다.
윤지충 형제는 숙부 윤징에 대한 정이 남달랐다. 1791년 진산 사건으로 윤지충에게 검거령이 떨어졌을 때, 그가 달아나 숨자, 군수는 숙부 윤징을 붙잡아다가 그를 겁박했다. 윤징이 자기 대신 잡혀갔다는 말을 들은 윤지충과 권상연은 바로 자진 출두했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나온다. 또 다블뤼의 「조선주요 순교자 약전」에서는 10월 28일에 윤징이 군수 앞에 끌려가서 “아무개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을 막을 수 없었는가?” 하고 추궁하자, 윤징이 끝까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윤징 또한 이때 이미 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윤지충이 처형된 뒤, 윤지헌의 고산행에 윤징은 합류하지 않고 진산에 그대로 머물렀던 듯하다. 이후 1797년에 그가 사학죄인으로 죽었을 때, 윤지헌은 진산으로 건너가 그의 장례를 주관했을 것이다. 그 외에는 직계 가족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숙부인가 양부인가?
윤징이란 이름은 「사학징의」에 딱 한 차례 등장한다. 전라감사 김달순이 1801년 3월 28일에 보낸 비밀 공문에서다. 윤지헌을 신문하면서 심문관이 물었다. “폐지했던 제사를 새롭게 진설하였다고는 해도, 네 숙부의 상에 또 신주를 세우지 않은 것은 그 범한 죄를 살피건대 도리어 네 형보다 지나침이 있다.” 윤지헌이 대답했다. “제 숙부 윤징(尹징)이 자식 없이 죽어서, 장례의 처리와 상례와 제사는 예법대로 행하였지만, 사당을 주관할 사람이 이미 없고 보니 사판(祠版)을 모실 수가 없어서, 신주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족보로 보면 이미 입양되어 부자의 관계로 설명해야 마땅할 윤징을 윤지헌은 아버지라 하지 않고 숙부라고 했다. 자신이 엄연한 양자였음에도 그가 자식 없이 죽었다고 했다. 요령부득의 문맥이다. 혹 입계되었다가 윤지충이 후사 없이 죽자 큰집의 절손을 염려해 입양을 파양해 원위치시켰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이 경우 전라감사의 문초에서 맥락 설명 없이 그저 네 숙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추안급국안」 중 1801년 9월 11일의 결안에도 “네 뿌리는 아비는 윤경이고, 조부는 덕렬이며, 어미는 권조이(權召史)이고, 장인은 권기징(權沂徵)인데 모두 죽었다”고 했다.
이로 보아 윤지헌은 애초에 윤징에게 입계되지 않았다. 입계는 족보상에만 존재하는 서류상의 처리였다. 윤지충이 사학으로 죽었으니, 이때 죽음을 면한 그 아우 윤지헌을 일단 윤징 쪽으로 돌려서 일종의 족보 세탁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현재 「해남윤씨대동보」에는 윤지헌의 맏아들 윤종건(尹鍾建)이 다시 윤지충의 밑으로 입계되어 대를 이은 것으로 나온다. 이것도 조금 이상하다.
「추안급국안」을 통해 볼 때, 윤지헌은 아내 유종항(柳宗恒)과의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다. 그녀는 유항검의 사촌 동생으로 알려져 있다. 윤지헌이 처형되고 사흘 뒤인 1801년 10월 15일에 이들에 대한 압송 공문이 내려갔다. 아버지 윤지헌이 대역부도로 능지처사 되었으니 당시 국법에 아들도 모두 사형에 처해야 했다. 하지만 이들은 나이가 어려 처형을 면했다. 아내 유종항은 흑산도에 노비로 끌려갔고, 15세 윤종원(尹鍾遠)은 제주목으로, 13세 윤종근(尹鍾近)은 경상도 거제부로, 4살 윤종득(尹鍾得)은 전라도 해남현으로 관노가 되어 끌려갔다. 두 딸도 노비로 끌려가야 했다. 큰딸 윤영일(尹英日)은 함경도 경흥부(慶興府)의 여종이 되어 갔고, 둘째 딸 윤성애(尹成愛)는 평안도 벽동군으로 보내졌다. 이렇게 해서 윤지충·윤지헌의 집안은 거의 멸문의 화를 입었다. 다블뤼의 「조선순교자비망기」에는 유종항이 거제도로 귀양 가서 1828년경에 사망했고, 막내 윤종득은 해남현에 끌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 기록 어디에도 족보에 윤지충에게 입계되었다고 나오는 맏이 윤종건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윤종건이 사형을 면하고, 「추안급국안」의 기록에도 이름이 빠진 것은 윤지충 사망 후에 그를 윤지충에게 입계하여 큰집의 후사를 이었기 때문이다. 이 입양 덕분에 윤종건은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다. 사학으로 인해 국가에 의해 처형된 집안의 족보는 앞서 황사영의 족보가 그러했듯 훼손되어 명확한 실상을 알기가 어렵다. 어떻게든 집안의 명맥을 잇고 사학의 낙인을 지우려는 안간힘이 이같은 혼란을 빚은 원인이다.
윤지충ㆍ윤지헌 집안의 신앙생활
윤지헌의 숙부 윤징이 정사박해 때 교난으로 순교했다고 할 때, 그 또한 충청관찰사가 신부의 종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천주교 신자임이 탄로 나서, 신앙을 증거하다가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사박해 때 이도기, 박취득, 원시보, 정산필, 방 프란치스코, 배관겸, 인언민, 이보현을 비롯해 충청도 출신의 초기 신앙인들이 줄줄이 순교했다. 현재 정사박해로 순교한 사람은 이들 8명의 이름만 알려져 있다. 여기에 윤징의 이름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저구리 교회의 지도자였던 윤지헌은 숙부와 함께 잡혀가지는 않았다. 윤징이 진산에서 살고 있었다는 또 하나의 근거다. 사학죄인으로 죽은 윤징의 장례가 윤지헌의 주관으로 통상 절차에 따라 진행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남은 자료가 없어 자세한 사정을 알기 어렵다.
한편 「추안급국안」에는 윤지충의 부인과 딸 이야기가 후일담처럼 기록되어 있다. 1791년 윤지충이 처형되고, 그의 아내와 13살 난 딸 하나가 가족으로 남았다. 두 사람은 윤지충의 제자였던 아전 출신 김 토마스의 집에 숨었다. 이후 대략 3년쯤 뒤인 1794년 즈음 윤지충의 딸은 나이가 차서 공주 숯방이(炭坊) 사는 송씨에게 출가한 듯하다. 윤지충의 아내는 딸과 함께 사위 집에 들어가 얹혀살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 후 이들의 자취는 더 이상 포착되지 않는다. 이상한 것은 족보에 입계되었다고 적힌 양자 윤종건의 그림자가 두 모녀의 삶 속에 전혀 보이지 않는 점이다. 윤종건의 입양 또한 윤지충의 사후에 족보상으로만 이루어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윤지헌은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던 셈이다.
윤지충은 1782년경 상경해서 명례방 근처에 집을 마련해 공부하다가, 고종사촌인 다산 형제를 통해 천주학에 입문했다. 이후 고향으로 내려온 그가 어머니 안동 권씨와 아우 윤지헌, 그리고 숙부인 윤징 및 아내와 딸에게 전교하여, 온 집안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윤지헌의 아내와 자녀들 또한 저구리에서 아버지를 따라 신앙생활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윤씨 집안의 이같은 신앙에는 앞서 말했듯 이승훈, 이벽, 다산 형제, 유항검 형제 등과 얽히고설킨 인척 관계가 크게 작용했다.
어머니 권씨는 세상을 뜨면서 천주교의 예법에 따라 조금의 어김 없이 장례를 치를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당시 제사가 교계의 뜨거운 쟁점이었으므로, 어머니의 이 같은 유언은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말과 같았다. 윤지충은 어머니의 유언을 준행하다가 어머니의 조카 권상연과 함께 사형당해 죽었다. 두 사람은 국법에 의해 공식적으로 사형에 처해진 첫 번째 케이스였다. 그 이전 김범우가 배교를 거부하고 단양으로 귀양 가서 죽어 순교했지만, 국법으로 사형을 집행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두 사람에게 조선 최초의 순교자란 호칭을 얹는 것은 조금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이후 윤지헌과 윤지충의 아내와 딸은 가산이 적몰되어 근거를 잃고 폐서인이 된 끝에 감시망을 피해 산골로 숨어들어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윤지헌과 숙부 윤징은 밀접한 관계로 얽혀 신앙생활을 이어갔고, 숙부마저 1797년 정사박해로 죽자, 윤지헌은 약방을 운영하는 한편으로 교계, 특별히 주문모 신부와 유항검 형제를 연결하는 연락책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1801년 신유박해 때까지 적극적 활동을 이어가던 윤지헌은 유항검 형제가 검거되면서 함께 붙들려서 외국 선박을 청해 역모를 꾀하려 했다는 대역부도의 죄로 몰려 능지처사에 처해졌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0월 24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3. 정교교리를 주장한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윤지충 하면 많은 이가 제사문제로 순교한 분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윤지충은 한국 초대교회에서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순교자로 기억되어야 한다.
첫째, 윤지충은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사형판결을 받고 순교한 우리 나라 최초의 순교자라는 점이고, 둘째는 한국 초대교회 평신도 가운데 선각자적 지식인으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신앙인으로 조선정부의 정교합일적 통치원리에 저항하여 정교분리의 원리를 주창한 순교자라는 점이다.
그는 비록 제사문제로 사회적인 측면에서 첨예한 충돌을 일으킨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더 의미있는 또 다른 의의를 묻어버리고 단순히 제사를 거부한 순교자로만 기억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윤지충 바오로(1759-1791년)는 전라도 진산군 장구동(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의 조상들은 전라도 해남에 살았는데 아버지 윤경이 의원을 생업으로 삼고 살다가 결혼하고 진산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기에 윤지충은 그곳에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윤지충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품행이 단정했으며 학문으로 일찍부터 평판을 얻었는데, 25세가 되던 해인 1783년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자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진사가 된 이듬해에 윤지충은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 서적 두 권을 발견하고는 그 책들을 필사하였다. 그는 이 때 천주교 교리를 대상 짐작은 했지만 실천하지는 않았다. 이 일이 있은 다음 3년이 지난 뒤에 그의 사촌인 정약종에게서 천주교 교리 전반에 대해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는데 그는 겁이 나서 가지고 있던 천주교 관련 서적들을 불살랐지만 신앙생활만큼은 얼밀히 실천하였다. 그가 다른 교우들과 접촉하거나 드러나게 교회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깊고 단단했던가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이때 한국교회는 제사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초대교회 건설 공로자들인 양반 지식인들도 제사문제로 교회를 떠나는 일들이 많았다. 바로 이런 때 윤지충은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여 집안에 모셨던 신주를 불살랐다. 그의 올바른 신앙생활은 1791년 봄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상례를 치르게 되면서 사람들 앞에 드러났다. 윤지충은 모친의 상을 입고 지극치 애통해 하며 효성을 다해 모든 상례 절차와 예식을 정성으로 지켰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상례에 따른 제사는 지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천주교를 반대하는 세력의 한 선봉인 홍낙인이 그를 고발하여 진산군수 신사운에게 체포당하고 만다.
윤지충이 그의 유일한 동지인 사촌 권상연과 함께 옥고를 치르며 심문을 당하는 과정과 당당히 순교의 길로 나아간 모습은 여러 경로를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그가 옥중에서 직접 기술한 공술서를 통해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진면목을 여기서 잠깐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선 한국에서의 제사문제는 중국의 경우와 쟁점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곧 중국에서 제사문제는 하느님의 호칭에 대한 문제와 함께 대두된 것으로 공자를 숭배하고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순수한 종교적인 의식인가 아니면 순수한 민간의식인가에 있었다. 이에 반해 우리 나라는 하느님이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와 신주를 조상처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것이 왜 불가피한가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 있었다. 이 가운데 신주를 조상처럼 모시고 제가를 지내면 안되는 까닭을 윤지충은 그의 공술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천주교의 십계명 중에 제4계가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 부모가 신주 안에 계신다면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신주를 공경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주들은 나무로 만든 것이고 그것은 저의 살이나 피나 목숨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저를 낳고 기르는 수고에 아무런 몫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영혼은 일단 이 세상에서 나가면 그런 물질적인 것에 붙어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부모의 명칭은 아주 위대하고 매우 존경받을 만한 그 무엇인 만큼, 어떤 일꾼이 만들고 꾸민 물건을 감히 가져다가 제 부모로 사고 또 실제로 그렇게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도 바른 이치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 양심은 그것에 승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 때문에 양반 칭호를 박탈당한다 해도 하느님께 대하여 죄인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윤지충은 지극한 효성의 발로로 드리는 제례를 무조건 미신이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나무토막에 불과한 목수의 제작물인 신주를 부모처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고 부모의 홈이 신주에 붙어있을 수가 없음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그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양반의 법도라면 차라리 양반의 법을 버릴지언정 양심상 하느님의 올바른 법을 어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잠드신 부모님께도 음식을 드리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돌아가신 부모님께 음식을 대접하듯 하는 것은 허식이요 가식적인 것이라 했을 뿐이다.
이제 윤지충의 공술서는 이 모든 이치를 떠나서 한 개인이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든 말든 그것은 개인적 사생활의 영역으로 국가가 관여할 일이 아니며 또 실제로 조선 법에도 그런 규정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신주를 모시지 않는 서민들이 그렇다고 하여 정부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또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제사를 규정대로 지내지 못하는 양반들도 엄한 책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주십시오. 그러므로 제 생각으로는 신주를 모시지 않고 죽은 이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서도 제 집에서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는 것은 결코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윤지충은 여기에서 두 가지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첫째 일반 서민이 신주를 모시지 않는다고 해서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닌데 왜 양반인 내가 신주를 모시지 않는 것이 반정부의 죄가 되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신주를 모시거나 그렇지 않거나 또 제사를 드리거나 드리지 않는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종교적 신앙생활로 국법에 어긋남이 없는데 왜 국법으로 다스리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유교가 분명 양반들만의 전유물이며 유교를 국교의 위치에 놓고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지 않는 정부의 '정교합일'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정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유교 국가에서는 종교가 국가권력의 도구가 되었다. 실제로 조선정부에서 정치와 종교는 혼동되었고 이 현상은 천주교에 대해 한결같이 적대적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쟁에도 종교를 빙자한 정적 타도의 구실로 척사를 논하여 당쟁인지 척사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윤지충은 이러한 문화적 정치적 배경에서 그의 순수한 신앙을 고백했고, 그는 결국 정승인 최제공의 청으로 정조의 명을 받아 참수형을 당하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 12월 8일 오후 3시에 사형은 집행되었고, 그때 그의 나이 33세였으며, 권상연은 41세였다. 그가 죽은 형장의 피에 얽힌 수많은 기적으로 조선 신자들의 손수건에 그 피가 적셔져 북경에 보고되기도 했다. 윤지충 바오로는 선각적 지식인들이 제사문제로 교회를 떠날 때 외롭게 남아 참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한국교회를 지킨 위대한 순교자이다.
[경향잡지, 1999년 10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4.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윤지헌 프란치스코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의 하나로 꼽히는 전주 전동성당은 문화재로서 가치가 커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곳이 아름다운 이유 중 하나는 1791년 윤지충과 권상연, 1801년에 유항검과 동료들이 순교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없앤 윤지충과 그의 이종사촌 권상연
윤지충(尹持忠 바오로, 1759-1791년)은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서 태어났고, 1783년 봄 진사시에 합격하였습니다. 이듬해 겨울 김범우 토마스에게 “천주실의”와 “칠극”을 빌려 보았고, 2-3년 뒤 내외종간인 정약전 · 약용 집에서 천주교 책들을 본 뒤 실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791년 여름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 이종사촌 권상연 야고보와 함께 교회의 제사 금지령에 따라 장례는 치르면서도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없앴습니다. 이 사실을 안 척사론자 홍낙안은 9월 진산군수와 좌의정에게 서한을, 10월 초 여러 유생들에게 통문을 보냈습니다.
윤지충은 10월 말 감옥에 갇혔는데, “천주는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이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사교(邪敎)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습니다.
감옥에서 그는 “천주를 큰 부모로 여기는 이상 천주의 명을 따르지 않는 것은 결코 공경하고 높이는 뜻이 못 됩니다. 사대부 집안의 목주(신주)는 천주교에서 금하는 것이니, 차라리 사대부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천주에게 죄를 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집안에 땅을 파고 신주를 묻었습니다. 신주를 세우지도 않았고 제향도 차리지 않았는데, 이는 천주의 가르침을 위한 것일 뿐 나라의 금범을 범한 일은 아닌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권상연(權尙然 야고보, 1751-1791년)은 같은 마을에 살던 고종사촌 윤지충 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운 뒤 입교하였습니다. 그는 “저는 윤지충과 내외종 사이로 같은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저의 집 신주를 애초에 땅에 묻으려 하였으나, 이목이 번거로울까 두려워 남몰래 불태우고 그 재를 무덤 앞에 묻었습니다.” 하였습니다.
관찰사는 “(두 사람이) 형문을 당할 때, 하나하나 따지는 과정에서 피를 흘리고 살이 터지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음하는 기색을 얼굴이나 말에 보이지 않았고, 말끝마다 천주의 가르침이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임금의 명을 어기고 부모의 명을 어길 수는 있어도, 천주의 가르침은 비록 사형의 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코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니, 확실히 칼날을 받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뜻이 있었습니다.” 하고 보고하였습니다. 이내 조정에서는 그들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았고, 결국 정조도 처형을 윤허하였습니다.
1791년 11월 13일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주 남문 밖에서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서 순교하였습니다. 이것이 천주교인에 대한 공식적인 첫 번째 처형이었습니다. 1795년 4월 유관검이 주문모 신부님을 모시고 두 사람의 무덤 아래를 지나면서, “이는 우리나라의 교회 안에서 고명한 사람의 무덤입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신주님은 “성교(聖敎)에 이른다면 마땅히 그 사람의 무덤 위에 천주당을 건립해야 할 것이니, 후일 조선의 성교가 크게 성행하게 되면 이 두 사람의 무덤은 마땅히 천주당 안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 두 사람이 순교한 그 자리에 1889년 봄에 전동본당이 설립되었고, 성당 건물은 1908년에 기공하여 1914년에 완공, 1931년에 봉헌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윤지충의 막내 동생 윤지헌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 1764-1801)은 윤지충의 막내 동생으로 형에게 교리를 배웠고, 1787년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1791년 형이 순교하자, 진산을 떠나 전북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는 1795년 주문모 신부님에게 성사를 받았으며, 밀사 황심 토마스를 북경에 보내는 데 동참하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 갇혔습니다.
감사는 그에게 “형 윤지충이 사형을 당한 이후에, 무릇 이 사학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너의 형이 절의를 지키다가 죽었다고 여겨서 ‘교의 주관자’[主敎]처럼 존경하니, 너의 집안은 곧 사학하는 집안들의 주인이다.” 하고 비난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평소에 좋아하던 천주교 교리를 끊지 못하였고, 고질병처럼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져있으니, 오로지 만 번 죽겠다는 말씀만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 천당 지옥의 이치를 굳게 믿은 탓에 국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포도청과 형조를 거쳐 의금부에서 마지막 문초를 받은 뒤 사형선고를 받고 전주로 이송되어 9월 17일 순교하였습니다.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경기전과 한옥마을이 함께 자리하고 있어 동서양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신비스런 곳인 전주 전동성당은, 지난날의 순교자들과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만나는 거룩한 땅이기도 합니다. 그분들은 오늘도 우리에게 교회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경향잡지, 2008년 4월호, 여진천 폰시아노 신부(원주교구 배론성지 담임)]
5. 복자들 무덤 소재지와 이장 현황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29일) 3주년
순교의 길 당당히 걸으신 복자들 묘소는 지금 어디에?
- 지난 4월 28일 청주교구 복자 오반지 바오로 묘소 이장위원회가 오반지 복자의 유해를 수습하고 있다.
순교자들은 대부분 유해가 없다. 묘소 또한 있을 리 없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복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박해에도 ‘죽음을 무릅쓴’ 동료와 가족들의 노력으로 수습된 순교 복자들의 유해는 비밀리에 매장됐고, 구전을 통해 전해지는 묘소가 남아 있어 공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묘소가 남아 있는 복자들은 124위 중 18위(14.5%)다. 유해를 남겼든, 남기지 못했든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하느님 사랑을 드러낸 순교 복자에 대한 공경은 유해가 있고 없고와는 상관이 없다. 복자들의 신앙과 삶을 본받는 데도 문제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본받아 피를 흘리며 동화되는 순교의 길을 걸은 복자의 묘소를 통해 우리는 순교자의 모범을 따라 풍성한 구원의 열매를 맺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세 번째로 맞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복자 기념일’을 맞아 복자의 무덤 소재지와 이장 현황을 살폈다.
- 지난 4월 28일 청주교구 윤병훈 신부 등이 오반지 복자의 유해를 관에 모시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복자 오반지(바오로, 1813∼1866)의 유해가 4월 29일 배티순교성지 경내로 이장됐다. 충북 진천군 사석리 산 109의 1, 일명 ‘오소리버덩’에 있던 복자의 묘소를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815, 815-1로 옮겨 신자들이 복자를 공경하는 데 접근성을 높였다. 특히 이번 이장에서 복자의 유해 일부가 가톨릭대 의대 응용해부학연구소 이우영 박사에게 인계돼 의학적 처리를 거쳐 교구 내 서운동ㆍ진천ㆍ이월 본당과 배티성지 등에 분배될 것으로 전해지면서 복자 공경과 함께 124위 복자의 무덤 소재지에 교회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그렇다면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중 다른 복자의 묘소는 어디에 있을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대구 순교자 신석복(마르코, 1828∼1866)ㆍ박대식(빅토리노, 1812∼1868) 복자의 묘소는 모두 김해에 있다. 대구 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한 신석복의 묘소는 김해 노루목(김해시 한림면 장방리 장항)을 거쳐 진영성당 묘지(경남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로 옮겨졌다.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한 박대식의 유해는 김해 차골, 지금의 김해시 진례면 청천리 차골(茶谷)에 매장됐고, 1956년에는 봉분을 확장하고 부인의 묘를 그 옆으로 이장했다고 전해진다.
‘호남의 사도’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6∼1801)과 그의 맏아들 유중철(요한, 1779∼1801)ㆍ이순이(루갈다, 1782∼1802) 동정부부, 둘째 아들 유문석(요한, 1784∼1801), 장조카 유중성(마태오, ?∼1802) 묘소는 유항검의 부인 신희, 제수 이육희를 포함하는 7위 합장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전주 옥과 전주성 남문 밖, 숲정이 형장에서 순교한 유항검 일가의 묘소는 전주 초남리ㆍ제남리를 거쳐 전주 치명자산(전주시 완산구 대성동 산11-1)으로 이장됐다.
1868년 무진박해로 체포된 이양등(베드로, ?∼1868) 회장과 김종륜(루카, 1819∼1868)ㆍ허인백(야고보, 1822∼1868) 복자는 그해 9월 14일 울산병영에서 함께 순교했다.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아내 박조예가 시신을 거둬 비밀리에 울산 동천강 변에 안장했다. 이들의 유해는 진목정 인근 도매산(경주시 산내면 내일리 산365), 구 감천리 묘역, 감천리 묘역 성모상 앞을 거쳐 지금은 대구 복자성당(대구광역시 동구 송라로 22)에 안장돼 있다.
1866년 병인박해 순교자인 구한선(타대오, 1844∼1866)ㆍ정찬문(안토니오, 1822∼1867)ㆍ윤봉문(요셉, 1852∼1888) 등 3위는 진주에 커다란 신앙의 빛을 비췄던 복자들이다.
경남 함안의 미나리골 중인 집안 출신인 구한선 복자는 진주옥에 갇혀 수난을 당하다가 석방돼 집으로 돌아온 지 7일 만에 선종, 함안군 대산면 하기리 새터(新垈) 신씨묘역에 묻혔다가 가등산 교우묘역(함안군 대산면 평림리 733-1)을 거쳐 대산성당(함안군 대산면 구혜리)으로 이장됐다.
진주 허유고개 중촌 출신인 정찬문 복자는 1866년 말 진주포졸에게 체포돼 진주진영 내 군뢰청 옆 옥에 갇혔다가 1867년 1월 말 교수형을 받았고 유해는 그의 조카들이 거둬 장사를 지냈다. 훗날 머리 없는 주검으로 발견돼 마산교구 문산본당 사봉공소 관할 구역 내 허유고개(경남 진주시 사봉면 동부로1751번길)를 거쳐 경남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 사봉공소로 옮겨졌다.
경북 경주 인근 출신인 윤봉문 복자는 1888년 봄 거제도에서 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돼 통영에 압송돼 문초를 받았고, 진주옥으로 이송돼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그해 4월 1일 순교, 진주 비라실(장재리), 거제 진목정 족박골(경남 거제시 옥포2동)을 거쳐 윤봉문요셉성지(현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로 옮겨졌다.
1868년 무진박해 당시 자신의 대자 양재현(마르티노, 1827∼1868)과 함께 동래 수영장대에서 순교한 이정식(요한, 1795∼1868) 복자는 동래 명장동(부산광역시 동래구 명장동 산96)을 거쳐 현재 오륜대 순교자묘역(부산시 동래구 부곡3동)에 안장돼 있다.
정약현ㆍ약전ㆍ약종ㆍ약용으로 이어진 나주 정씨 4형제 중 유일하게 ‘흔들림 없이’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 광주 웃배알미리(경기도 하남시 배일미동), 반월 사사리(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3동 안골)를 거쳐 천진암성지(진토묘)로 이장됐다.
124위 중 안동교구의 유일한 순교복자인 박상근(마티아, 1837∼1867)은 이서(吏胥), 곧 아전을 지낸 인물로, 1867년 1월 상주옥에서 순교, 마원리 박씨 묘역을 거쳐 마원성지(경북 문경시 문경읍 마원리)로 이장됐다.
1795년 순교한 ‘교회 밀사’ 윤유일의 동생 윤유오(야고보, ?∼1801)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돼 양근 관아에서 갖은 문초와 형벌을 당하면서도 배교를 거부했고, 그해 4월 27일 양근 관아 서쪽 큰 길가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이후 이천 어농리(경기도 이천시 모가면 어농리)에 안장됐으며, 훗날 유해 발굴을 거쳐 확인한 뒤 재안장되는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5월 28일, 오세택 기자]
6. 윤지충 · 권상연 묘에서 나온 사발 지석 글씨는 정말 다산의 필적일까?
은밀했던 시신 이장… 위험천만한 일에 다산 관여했을까
본지 10월 17일자 7면에 게재된 정민 교수(베르나르도·한양대학교 국문과)의 기고 ‘윤지충·권상연 묘에서 나온 사발 글씨는 다산의 필적’에 관해 서종태(스테파노) 해미국제성지 신앙문화연구원장이 다른 의견의 글을 보내왔다. 서 원장의 기고문을 싣는다.
지난 9월 24일, 1791년과 1801년에 각각 순교한 복자 윤지충·권상연과 윤지헌의 유해 발굴 보고서가 일반에 공개됐다. 이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윤지충과 권상연의 묘에서 매장된 사람의 인적 사항, 무덤의 소재, 이장한 시기 등이 적혀 있는 사발 지석이 나왔다. 이를 통해 1791년 11월 12일 처형된 직후에 두 순교자의 유해가 수습돼 매장됐다가 약 1년 뒤인 1792년 10월 12일 유항검의 선산에 이장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한 윤지헌의 묘에서 나온 백자제기접시 두 점에는 지문(誌文)이 없는데, 그중 하나의 윗면 중앙에 청화 안료로 그린 원 안에 ‘祭’(제)자가 표기돼 있다.
그런데 다산 정약용의 친필 글씨를 10여 년간 연구해 온 정민 교수(한양대 국문과)는 보고서를 통해 두 사발 지석에 적힌 글씨를 보고 ‘가톨릭평화신문’(10월 10일)·‘조선일보’(10월 11일)·‘가톨릭신문’(10월 17일)에 잇달아 그 글씨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즉, 두 사발 지석의 글씨 47자를 한 자씩 잘라 표를 만들고 그 아래 칸에 다산의 각종 친필 글씨에서 같은 글자를 찾아 채워 비교해 본 결과 두 사발 지석의 글씨는 대부분 다산의 특징적 필체와 일치하고 붓질의 습관과 구성의 특징도 일치한다고 확신하게 됐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을 바탕으로 두 사발 지석의 글씨는 다산이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1주기를 맞아 당시 전주 교회의 지도자인 유항검 형제가 두 순교자 유해의 이장을 전체 교회 차원의 행사로 준비해 진행한 점, 다산은 윤지충과 사촌 간이고 또한 그를 입교시킨 장본인으로 그의 죽음에 대한 부채감이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두 사발 지석의 글씨를 다산이 써서 광주 분원에서 구워 전주 유항검에게 내려 보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정민 교수의 주장은 당시 유항검이나 교회가 처한 상황과 잘 맞지 않는다. 1791년 윤지충이 권상연과 함께 어머니 장례를 천주교식으로 치른 진산사건은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에 그치지 않고 공서파 홍낙안 등이 이를 정치 문제로 확대시켜 그 여파가 다른 지방까지 미쳐 서울·경기도·충청도에서도 박해가 대거 벌어져 그
여진이 1793년까지 이어졌다.
- 복자 윤지충(위)과 권상연의 묘에서 발굴된 백자사발 지석. 매장된 사람의 인적 사항과 무덤 소재 등이 적혀 있다.
또한 정부는 천주교 전파를 막기 위해 홍문관에 소장돼 있던 서학서를 모두 소각했다. 아울러 각 도에 천주교 서적을 은닉하고 있는 자들에게 자수령을 내리도록 하고, 20일간의 기한을 주어 자수하는 자는 죄를 묻지 않겠지만 은닉한 자는 법대로 처리하겠으며, 감사와 수령도 연좌형을 면치 못하리라고 했다.
그러자 김제에 사는 한영필은 유항검의 집에서 빌려온 두 권의 책을 김제 군수에게 갖다 바쳤다. 그리고 유항검은 윤지충이 처형되자 잠시 피신했는데, 그 틈을 타 당질인 유중태는 유항검이 필사한 천주교 서적 3권을 전주 감영에 바쳐, 그의 피신 생활은 1792년 6월까지 계속됐다. 그래서 두 순교자의 시신이 효수된 뒤 9일째 되던 날 임금은 그들 가족에게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허락했지만, 유항검은 그들 시신을 수습해 매장하는 일에 나설 수 없었다.
또한 진산사건의 여파로 진산군은 5년 동안 현으로 강등됐고, 군수 신사원은 삭탈관직돼 유배됐다. 게다가 권상연이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모시지 않은 일을 친족 권상희가 규탄하고, 윤지충이 순교한 뒤 그 친족들이 항렬자 ‘持’(지)자를 개명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임금에게 요청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의 가족들은 두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어 고향에 안장하지 못하고 가까운 용머리 고개에 매장했을 것이다.
그 후 7개월이 지난 1792년 7월 유항검은 감영에 자수하고 잘못을 뉘우치며 바른 데로 돌아오겠다고 맹세해 훈방됐다. 그는 책을 몇 권 수습해 집안에 숨겨두고 금구로 시험을 보러 갔는데, 이 틈을 타 당질인 유중태가 그 숨겨둔 책을 끄집어내 물과 섞어 덩어리로 만들고 말았다. 이런 일들이 벌어진 지 1~3달밖에 되지 않은 10월 12일 과연 유항검이 두 순교자의 시신을 자신의 선산으로 이장하면서 순교 1주년을 기념해 교회 차원에서 그것도 전체 교회 차원에서 준비해 진행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도 은밀하게 두 순교자의 시신을 이장했을 것이다.
그러면 두 사발 지석은 어떻게 준비했을까. 정부의 지시로 윤지충과 권상연의 사형 소식을 전국에 게시한 마당에 윤지충·권상연의 성명·세례명이 노출된 사발 지석을 광주 분원에서 구워 보내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 그러한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윤지충의 입교를 도운 사람은 정약전이니 윤지충의 죽음에 대한 부채감을 정약용에 돌리는 것도 맞지 않는다. 유항검 가족묘에서 나온, 1914년에 제작된 접시 지석에도 윗면 중앙에 청화 안료로 그린 원 안에 ‘祭’(제)자가 표기돼 있으므로, 이러한 백자제기접시를 근거로 두 사발 지석이 광주 분원에서 제작됐다고 주장하는 것도 맞지 않는다. 이장이 은밀하게 이루어졌으므로 두 사발 지석은 이장을 주도한 유항검이나 그 가족들이나 가정교사 한정흠 중에서 누가 썼을 것이고, 제작은 옹기를 구워 생활하는 교우가 담당했을 것이다.
또한 당시 다산이 처한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1790년 10월 조상제사를 금지하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이 조선에 전해져 교회에서 조상제사를 금지한 데다 1791년 진산사건 이후로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지했다. 그런데 다산은 1789년 봄에 문과에 급제한 뒤 1790~1791년에 예문관 검열,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쳐 1792년 3월에 홍문관 수찬이 됐고, 4월에 부친이 사망해 상중에 있으면서도 정조의 명령으로 성을 쌓는 방법을 조목별로 밝혀 바치고 「도서집성」과 「기기도설」을 참고해 기증가도설 등을 작성해 바쳤다. 이처럼 정조의 총애를 받아 요직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하던 다산이 1787년 반촌에서 교회서적을 강습한 일로 공서파들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나라의 금령을 어기고 두 사발 지석을 적어 광주 분원에서 구워 내려보내는 위험천만한 일을 감행했을 것 같지 않다. 이러한 사실은 다산의 「자찬묘지명(광중본)」에 “1787년 이후로 4·5년 동안 매우 열심히 천주교에 마음을 기울였으나 1791년 진산사건 이후로 나라에서 천주교를 엄중히 금지하자 마침내 천주교에서 마음을 끊고 말았다”고 한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내용이 실려 있는 「자찬묘지명(광중본)」은 1935년에야 세상에 공개된 ‘비본’(秘本) 묘지명 7편에 들어 있는 것으로, 진실의 기록이자 다산의 양심선언서다.
아울러 필자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다산의 친필 글씨에 일가견이 있는 학자들 중에는 두 사발 지석의 글씨를 다산의 글씨로 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다산 글씨뿐만 아니라 두 사발 지석 글씨를 썼을 가능성이 있는 유항검 등의 친필 글씨도 아울러 구해 대비해 볼 필요가 있다. 요컨대 여러 가능성을 열어 놓고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규명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톨릭신문, 2021년 10월 24일, 서종태(스테파노, 전 전주대 교수)]
7.윤지충 · 권상연 묘에서 나온 사발 글씨는 다산의 필적
[특별기고]
정약용 필적과 대부분 일치… 정말 배교했다면 지석 썼을까?
- 백자사발 지석 글씨 47자와 다산 친필 필적 대조표. 다산 친필로 제시한 글씨는 「여유당시집」, 「산재냉화」(山齋冷話) 등 여러 친필첩에서 가려 뽑았다. 제시한 글씨 외에도 거의 유사한 형태의 예시가 여러 개씩 반복적으로 확인됐다. 정민 교수 제공.
지난 3월 11일 전북 완주 초남이성지 바우배기에서 발견된 복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의 백자사발 지석의 글이 다산 정약용(요한)의 필체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함께 발견된 윤지헌(프란치스코)의 백자제기도 정약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내용은 ‘다산 전문가’로 정평이 난 한양대학교 국문과 정민(베르나르도) 교수의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정 교수의 기고를 통해 복자들의 지석에 관한 조사, 그 조사를 통해 밝힐 수 있는 교회사적 의미들을 들어본다.
지난 9월 1일, 전주교구의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 세 분 순교자의 유해 발굴 소식에 깜짝 놀랐다. 9월 24일 공개된 보고서를 통해 무덤에서 나온 백자사발 지석의 글씨를 처음 봤다. 한눈에도 필체가 대단히 낯익었다. 다산 연구자인 필자는 그간 다산의 친필 글씨를 수없이 보아왔다. 이것은 다산의 글씨가 아닌가?
고해상도의 사진을 구해보니 느낌이 더 분명했다. 한 글자씩 잘라 표로 만들었다. 그 아래칸에 다산의 각종 친필에서 같은 글자를 찾아 채우기 시작했다. 채집 글자의 모집단이 많아질수록 낱낱의 글자가 보여주는 다산의 특징적 필체와의 일치도가 점점 선명해졌다. 붓질의 습관과 구성의 특징도 대부분 일치했다. 마침내 빈칸을 거의 채우고 나자, 애초의 의구심은 점차 확신 쪽으로 바뀌었다.
예컨대 ‘본’(本)자의 경우 2개의 예시 모두 다산만의 독특한 습관을 보여주는데, 두 글자 모두 거의 똑같은 용례가 여럿 나왔다. ‘휘’(諱)나 ‘권’(權)에서 부수자인 ‘언’(言)과 ‘목’(木)을 작게 쓰는 습관, ‘연’(然)이나 ‘생’(生)자의 기울기 등 다산만의 특징이 반복됐다. 물론 47자의 예시만으로 다산의 친필로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글씨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배열할 때 이 정도의 유사도를 보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사학죄인으로 사형 당한 죄인의 지석 사발을, 당시 배교를 공언한 다산이 쓸 수 있나? 다산은 광중본 「자찬묘지명」에서 자기 입으로 “정미년(1787) 이후 4·5년간 서학에 자못 마음을 기울였다(丁未以後四五年, 頗傾心焉)”고 썼다. 1791년 진산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전심으로 천주교 활동에 힘을 쏟았다는 뜻이다. 그런 그가 윤지충의 죽음 이후 천주교를 버렸다. 그 이유는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진실일까? 1787년에 다산은 성균관의 시험에서 제사에 관한 문제가 출제되자 이승훈과 함께 백지를 제출했다. 그때 두 사람은 제사를 지내는 것은 물론 제사에 대해 글을 쓰는 것조차 천주교에서는 금하기에 백지를 낸다고 말했다. 「송담유록」에 이기경과 강이원의 증언이 남아있다. 그러니 1791년에 새삼 조상 제사를 이유로 배교한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다산은 이때도 신앙생활을 놓지 않았고, 드러나지 않게 더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 지석의 글씨가 거꾸로 이를 증명한다.
그뿐인가? 윤지충의 고모가 다산의 어머니였다. 둘은 사촌 간이었다. 윤지충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파한 것은 다산 형제였다. 윤지충은 서울 생활 당시 명례방에 살았고, 다산은 그 이웃에 살았다. 1787년 윤지충은 정약전을 대부로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사발에 적힌 대로 바오로였다. 이토록 살갑게 지내던 그가 천주교 신앙 문제로 목이 잘려 사형 당했을 때 다산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윤지충은 어머니의 오빠가 낳은 다산 외가 쪽의 적장자였다. 그가 아들도 없이 목이 잘려 죽어 집안의 대가 끊겼으니 다산의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사발에는 1792년 10월 12일이란 날짜가 적혀있다. 11개월 전인 1791년 11월 12일에 그는 처형됐다. 시신은 가매장됐다가, 육탈된 뒤에 1주기를 맞아 바우배기에 이장됐다. 이때 다산은 인근 광주 분원에서 구운 그릇에다 정성껏 글씨를 써서 다시 그 위에 유약을 발라 구워 전주 유항검에게 내려보낸 듯하다. 성명(聖名) 즉 세례명까지 써넣은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복자 윤지충의 묘에서 발견된 백자사발. 사발에 적힌 지석의 필체가 다산의 필체와 흡사하다.
이 같은 추정이 사실일 경우 이는 당시 윤지충, 권상연의 이장이 교계 차원의 공식성을 띤 행사로 진행됐음을 뜻한다. 윤지충의 이종사촌 유항검이 자기 소유의 땅에 이들을 묻고 묘소를 꾸몄다. 1795년 4월 주문모 신부가 호남 사목방문을 내려왔을 때, 유관검은 그 묘소를 가리키며 흠숭의 뜻을 밝혔다. 당시 윤지충과 권상연은 그들의 고결한 죽음을 통해 신앙의 모범으로 우뚝 서서 주교(主敎)로 떠받들어지고 있었고, 이들 묘소는 특별 관리 대상이었다.
사정이 이럴 때 다산이 이들의 지석 사발에 글씨를 쓴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윤지충 사후 다산은 큰 부채감을 지녔을 것이다. 다산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정성껏 글씨를 써서 그와 영결코자 했던 듯하다. 두 사발에는 서로 다른 무덤의 위치를 알려주는 문장이 포함됐다. 어느 한 무덤이 발굴됐을 때, 이 글씨를 보고 다른 무덤을 찾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곳은 애초부터 순교자 묘역으로 조성됐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윤지헌의 묘소에서 나온 제기 사발 2개 중 하나에는 청화로 중앙에 원을 그리고 가운데에 ‘제’(祭)자를 써놓았다. 이와 똑같은 형태의 제기가 1776년에 진도에 귀양 갔다가 1797년에 영암에서 죽은 실학자 이덕리의 묘소에서도 똑같이 출토됐다. 이 제기는 다산의 집 근처에 있는 광주 분원(分院)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이상 글씨체의 대조와 다산과 윤지충과의 개인적 인연 등 제반 정황으로 보아, 필자는 개인적으로 사발의 글씨가 다산의 친필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생각한다.
한편 윤지충과 윤지헌의 삼촌 윤징(尹?·1730~1797)이 1797년 정사박해 때 순교한 사실이 「남보」(南譜)에 나온다. 1791년 윤지충 사후 윤지헌이 고산 저구리로 들어가 이존창과 합력해 세운 신앙공동체와, 이후 주문모 신부와의 관계에서 윤지헌의 활약에 대한 보고도 향후 더 면밀하게 검토돼야 한다. 초기 교회에서 윤지헌의 역할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시성시복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계시처럼 발굴된 세 사람의 무덤과 지석 사발은 그 시절의 생생한 기억 속으로 우리를 소환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21년 10월 17일, 정민(베르나르도, 한양대 국문과 교수)]
8. “이 무덤 위에 교회가 서리라”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70)
순교자 유해 3위 교리당에 안치… 주문모 신부 예언 마침내 실현
- 순교 복자 윤지충 바오로 묘에서 출토된 백자 사발 지석.
무덤에서 출토된 사발
2021년 3월 11일 초남이성지 바우배기 성역화 작업 도중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의 무덤과 유해가 발견되었다. 반 년간의 검증 과정을 거쳐 지난 9월 24일 전주교구의 공식 학술 보고회가 있었다. 출토된 유골에는 목과 팔 등에 난 칼자욱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윤지충, 권상연의 무덤에서는 망자의 인적 사항을 적은 직경 15㎝ 크기의 사발이 묘광의 중간 부분에서 수습되었다. 윤지충의 묘에서 나온 사발에는 “성균생원(成均生員) 윤공지묘(尹公之墓). 속명지충(俗名持忠), 성명보록(聖名保祿), 자우용(字禹庸), 기묘생(己卯生), 본해남(本海南)”이란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다. 특별히 세례명을 성명(聖名)이라 표기하고 바오로(保祿)라 적어 놓았다. 측면에 “권공묘재좌(權公墓在坐)”라 하여 바로 왼편의 무덤이 권상연의 묘임을 밝힌 것도 인상적이다. 반대쪽 하단 측면에는 돌아가며 “건륭(乾隆) 오십칠년(五十七年) 임자(壬子) 십월십이일(十月十二日)”이란 묻은 날짜를 적어 놓았다. 임자년은 1792년이다.
권상연의 사발에 적힌 글은 이렇다. “학생(學生) 권공지묘(權公之墓). 휘상연(諱尙然), 자경삼(字景參), 신미생(辛未生), 본안동(本安東).” 윤지충과 달리 야고보(雅各伯)란 세례명은 쓰지 않았다. 역시 측면에 “윤공묘재우(尹公墓在右)”라고 쓴 것은 훗날 두 무덤 중 어느 하나가 발견되었을 때 두 사람이 나란히 묻혀 있음을 알려주려 한 표지로 보인다. 또 이곳이 유항검 집안 선산이었기에 후대에 무덤이 혼동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이기도 했을 것이다. 특별히 세례명을 성명(聖名)으로 표기한 것도 달리 용례를 찾을 수 없다. 관변 기록은 모두 사호(邪號) 또는 별호(別號)라 했지, 성명이란 표기는처음본다.
- 순교 복자 권상연 야고보의 백자 사발 지석.
필자는 사발을 처음 보고 글씨가 다산의 필체와 흡사해 깜짝 놀랐다. 중간중간 운필의 습관에서 다산의 필획이 보여주는 특성과 일치하는 점이 대단히 많았다. 윤지충과 다산은 고종사촌 간이었고, 무엇보다 윤지충을 천주교로 이끈 것이 바로 다산 형제였다. 두 사람은 봉은사에서 보름간 합숙하며 과거 시험 공부를 함께한 인연도 있었다.
진산 사건 당시의 공초에서 윤지충은 누구에게 사서를 받았는지 자백하라는 문초에 처음엔 생각나지 않는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알아도 댈 수 없다고 버텼다. 고문을 심하게 당한 뒤에는 이미 죽은 김범우의 이름을 댔다. 김범우에게서 「칠극」과 「천주실의」를 받아와 베꼈노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김범우의 이름을 대지 않은 것을 보면 이는 다산 형제를 보호하기 위한 거짓 진술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다산은 겉으로는 배교를 공표했지만 교회 활동에 손을 뗀 상태가 아니었다. 평소 두 사람의 관계로 보나 자신으로 인해 사촌 윤지충이 죽게 되었다는 다산의 부채감으로 보더라도 사발의 글씨를 다산이 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지석에 쓴 글씨는 또박또박 해서로 단정하게 썼다. 다산이 해서로 쓴 다른 친필 글자와 하나하나 필적을 대조해 보았다. 전체적으로 필체의 유사도가 상당하다. 이것만으로 다산 친필이라 단정할 수 없겠지만, 하나의 유력한 가능성으로 제시해둔다.
유골이 전하는 진실
사발에 적힌 매장 일시는 1792년 10월 12일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11월 12일에 처형되었다. 사발에는 정확하게 사망 후 11개월이 지난 날짜를 적어놓았다. 형장에서 시신을 수습하여 가매장 한 뒤 1주기를 한 달 앞두고 시신을 이장하여 모시면서 망자의 인적 사항을 적은 사발을 함께 묻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 두 사람의 1주기를 맞아, 교중이 뜻을 함께 모으고 집행부의 상의를 거쳐 당시 전주 지역 교회 지도자였던 유항검 형제의 주도로 면례(緬禮)를 치렀음을 알려준다. 사발의 글씨가 다산 것이 맞다면, 1주기 행사를 지역을 넘어 전체 교계 차원에서 마련했다는 뜻이 된다. 유항검은 자신 소유의 땅이었던 바우배기 언덕에 두 사람의 유해를 모셨다. 여기에는 두 사람에 대한 교계의 존숭(尊崇)과 흠모가 반영되었다. 유항검 형제와 윤지충도 사촌간이었다. 당시 교회에서 두 사람의 위상은 「사학징의」 속 1801년 3월 28일의 윤지헌의 공초에서 심문관이 “네 형 윤지충이 사형을 당해 죽은 뒤에, 무릇 사학하는 자들이 모두 네 형을 절의에 죽었다고 하면서 주교처럼 높이자, 네 집은 사학하는 집의 주인이 되었다”고 추궁한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윤지충과 권상연 두 사람은 처형 뒤에 순교의 아이콘이 되어, 주교의 예우에 해당하는 존경과 흠숭을 받고 있었다.
시신에는 처형의 자취가 또렷이 남아 당시의 정황을 가늠케 한다. 전주교구의 발굴보고서에 실린 전북대 의대 해부학교실 송창호 교수의 보고에 따르면, 윤지충의 경우 5번째 경추가 칼날에 날카롭게 절단되었고, 권상연의 경우 잘린 머리뼈 일부분과 목뼈 및 견갑골이 없는 상태였다. 능지처사에 처해진 윤지헌의 유해는 두 번째 경추가 잘렸고, 양쪽 상완골과 왼쪽 대퇴골에도 절단의 흔적이 남았다. 팔꿈치와 무릎 아래로는 뼈가 아예 남아 있지 않아, 사지가 잘린 채로 시신이 훼손되었고, 매장 당시 흩어진 팔다리를 수습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팔다리의 관절 아래가 없는 몸체만의 시신을 관에 넣고, 떨어진 머리를 제 자리에 놓을 때의 정경을 생각하면 그 잔혹함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고명한 사람의 무덤입니다”
한편 230년 만에 세상에 나온 세 사람의 유해 소식은 「사학징의」에 실린 유관검의 공초를 새삼 생각나게 한다. 1795년 4월, 전주의 유관검은 내포의 이존창과 함께 상경했다. 당시 주문모 신부는 계동 최인길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지방 교회 교인들의 갈급한 심정을 헤아려 신부가 한 차례 남행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청했다. 이존창의 속내는 이참에 아예 주 신부를 고산으로 모셔갈 작정이었다. 실제로 신부를 중국에서 모셔오는 일을 주도한 사람은 이존창과 유관검이었다. 이렇게 해서 주 신부는 이존창과 유관검의 안내를 받아 초여름의 신록과 함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남녘 사목 여행을 떠났다. 「사학징의」 중 권상문의 공초 기록을 보면 이때 최인길과 최창현, 최필공, 최인철, 윤유일 등이 주 신부의 남행에 동행했다. 교회의 집행부가 총출동한 모양새였다. 신부는 이때의 나들이를 오래도록 잊지 못했을 것이다.
신부를 모시고 가던 일행의 발걸음이 전주에 이르러 윤지충과 권상연의 무덤 아래를 지나게 되었을 때였다. 유관검이 주문모 신부에게 말했다. “이곳은 우리나라 교우 중에 고명한 사람의 무덤입니다.” 4년 전에 순교한 두 사람의 무덤이 바우배기 언덕에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주 신부가 대답했다. “우리 성교(聖敎)의 공부는 성인품에 이르면 마땅히 그 사람의 무덤 위에다 천주당을 세웁니다. 훗날 동방에 성교가 크게 행해지면 이 두 사람의 무덤 또한 마땅히 천주당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오.”
주문모 신부의 이 예언은 발굴된 세 분의 유해가 지난 9월 초남이성지 교리당에 안치되면서 마침내 실현되었다. 스쳐 지나간 기록 속의 장면을 이렇게 현실에서 조우하게 될 줄은 생각지 못한 일이다.
엄동에도 굳지 않은 신선한 피
윤지충과 권상연이 교회 내에서 이같은 존숭을 받게 된 것은 체포 이후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한결같고 의연한 태도 때문이었다.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윤지충은 의젓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고, 잔치에 나아가는 듯한 즐거운 표정이었다고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기술했다. 그는 커다란 나무토막 위에 머리를 얹으면서도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여러 차례 불렀다. 망나니는 시신에 남은 간명한 절단의 흔적처럼 단칼에 그의 머리를 베었다.
혹독한 심문 도중에도 윤지충은 조금도 자신의 신앙을 흐트러뜨림이 없었다. 오히려 틈만 나면 관장들에게까지 천주교의 신앙을 이해시키려 애썼다. 그 자신이 직접 쓴 「죄인지충일기」에 그 경과가 자세하게 남아있다. 이같은 신앙의 자랑스러운 모범을 통해 그는 그 육신 자체로 교회가 되었다.
처형 후 두 사람의 장례는 9일이 지나서야 겨우 허락이 떨어졌다. 달려가서 시신을 본 사람들이 술렁댔다. 죽은 지 9일이 지났는데도 시신은 조금도 부패되지 않았다. 살결은 탄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머리를 자른 나무토막과 결안이 적힌 명패 위에는 방금 전에 흘린 것처럼 묽고 신선한 피가 흥건했다. 음력 11월 21일은 겨울이라 물이 얼 만큼 추운 날씨였기 때문에 그들은 눈앞의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수많은 손수건으로 두 사람의 피를 적셨다. 이후 다 죽어가던 환자가 피에 젖은 명패를 담갔던 물을 마시자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회복하는 이적이 일어났다. 피 묻은 수건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은사를 입었다는 증언이 잇따랐다. 두 사람은 그 보혈로 천주의 임재하심을 증명했다. 이에 고무된 조선 신자들은 1792년 윤유일이 세 번째로 북경에 밀사가 되어 갔을 때, 두 사람의 피에 적신 손수건 몇 조각을 순교 사실을 적은 기록과 함께 이적의 징표로 북경 주교에게 보냈다.
「사학징의」 중 정섭의 공초에 1794년 12월, 아들이 복학증(腹症)으로 위독할 때 윤유일이 왔다가 품속에서 머리카락과 소소한 나무 조각으로 채워진 주머니를 끓는 물에 담갔다가 마시게 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는 흑진(黑珍)이라고 부르는 성혈(聖血)도 함께 있었다고 했는데, 윤지충과 권상연의 시신을 수습할 때 나온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0월 10일,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9.복자 윤지충과 권상연, 윤지헌이 전해준 뜻
[특별기고]
평등사회 서막 열고, 인간 존엄성 위해 맞서는 ‘순교의 자리’ 알리다
- 전주교구장 김선태 주교가 유해성광에 분향하고 있다.
여러모로 교회가 힘든 시기에 첫 순교자들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윤지헌의 묘소가 최종 확인되었다. 특히 이번 발굴에서 교회가 보여준 역사고고학적 작업에서 이제 우리 교회도 역사고고학계의 연구 방법을 존중한다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었다. 역사고고학자와 의학자들이 참여하여 유해에 가해진 칼자국과 토양 분석, 유전자 검사에 이르는 엄밀한 고증이 병행되었다. 이는 이전에 윤지충과 권상연의 후손들로부터 유전자를 미리 얻어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순교자들의 유해가 확인되는 과정을 지켜보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번의 발굴도 각종 문헌 기록을 연구하며 무수한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찾으려던 후손의 노력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으로 생각된다. 때로는 간첩이나 도굴꾼으로 신고되어 곤욕을 치르면서도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밝히기를 40여 년 동안 그치지 않았던 한 사제의 묵묵한 발걸음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협동 작업을 본다. 이번의 발굴을 통해 나는 1995년 바우배기 발굴을 시도했다가 좌절되고서 심한 가슴앓이에도 묵묵히 침묵했던 한 사제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전주교구 원로사목자 김진소 신부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묘소가 확인된 일은 신앙인의 견지에서 볼 때 놀라운 선물과 은총이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을 천주교의 특수 용어나 감성에 국한하거나, 순교의 의미를 교회라는 폐쇄된 공간에만 한정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이들의 죽음을 단지 유교 사회에서 조상제사를 거부한 죄목에만 연결해 이해해서도 안 된다. 조상제사 거부는 이들이 삶으로 고백했던 신앙의 일부였다. 이들을 향한 조선 정부의 형 집행은 궁극적으로 천주교 공동체가 드러내는 새로운 사회와 희망을 겨냥했다. 이 때문에 230년이 지난 시점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그들의 유해는 세상을 바꾸는 힘의 원천을 보여준다. 또한, 이는 하느님이 역사에 개입하시는 장면을 밝혀주는 조명등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순교한 이들이 믿고 실천했던 의리의 새로운 기준인 사랑, 양심, 평등 그리고 믿음의 자유 등에서 우리 사회가 현재에 누리는 평화와 정의, 민주의 가치의 뿌리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그를 따르던 순교자들은 세상을 인식하는 새로운 기준을 터득했던 사람들이다. 당시 일반인들은 ‘국왕의 명령을 하늘의 명령으로’ 여겼다. 당시는 모든 옳고 그름과 가치 판단의 기준이 왕명(王命)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교 신앙을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즉 그들은 천주교 신앙을 통해서 당시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던 국왕의 권위를 상대화시켰다. 그리고 ‘모든 의리의 원천은 천주에 대한 사랑에 있다’고 단언했다. 이러한 이유로 윤지충과 권상연은 국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순교자가 되었다. 이렇게 그들이 주장하고 실천했던 바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윤지충 등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자녀인 인간은 서로 평등한 존재라는 믿음에 공감했다. 그들은 신앙을 통해 성리학적 사회 신분관을 극복하고 인간관을 새롭게 다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양반의 체면을 거부하고 무지렁이 농투성이, 거사패(사당패), 백정들과 함께 어울려 새로운 믿음살이의 기쁨을 나누었다. 이는 자신의 신분적 특권을 포기하고 인간에 대한 큰 사랑을 실천하던 행위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불평등한 사회에서 평등을 주창하며 일종의 사회혁명을 시도하는 사람이라 비난받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의 역사는 여기에서 새로운 평등사회를 추구하고 실천했던 윤지충과 권상연의 신앙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추출해 내고 있다.
동시에, 그들은 양심의 존재를 발견하고 여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여기에서 그들은 개인의 존재에 대한 의식과 자유로운 인간 존재에 대한 어스름한 인식을 드러내 주었다. 양반이었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양반이면 가져야 할 집단의식을 거부하고 양심에 근거하여 개인의 생각을 내세웠던 일은 억압된 전근대를 극복하고 새 사회의 서막을 여는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비록 적극적이고 의도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새로운 사회를 여는 마중물이 되어 보이지 않은 변혁을 이끌어냈다. 이렇게 보면 윤지충과 권상연, 그리고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은 광신이나 맹신의 결과가 아닌 건전한 이성으로 신앙을 받아들여 실천했고 역사 발전의 마중물이 되었다. 우리는 이들의 주검에서 순교라는 단어를 찾더라도 그들의 도타운 신앙심과 함께 이러한 역사 발전의 증좌를 함께 확인해 가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순교는 우리나라 역사의 공동자산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윤지충 등이 순교한 1791년의 박해에 대한 본격적이고 철저한 연구가 우선 요청된다. 그들의 영성과 함께, 그들이 바우배기에 묻히게 된 까닭을 밝혀내는 작업도 진행되기를 희구한다. 그들이 살았던 사회와 당시 천주교 신앙이 가지고 있던 가치를 비교해 본다면, 새롭게 형성된 그 공동체가 갖는 역사적 의미와 복음의 문화화를 향한 참 의미가 밝혀지리라 기대한다.
죽음만을 강조하며 순교를 바라볼 때 종교 자유가 보장된 오늘의 순교자 현양은 방향을 잃게 된다.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려는 열망 안에서 선교사의 도움 없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진리로 고백했던 우리의 교회사는 새로 쓰인 사도행전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했던 그들의 모범은 인간 존엄성을 위협하는 모든 힘듦에 맞서는 자리가 바로 순교의 자리임을 우리에게 역설한다. 우리에게 그들이 묻는다. “진정한 형제애는 무엇인지”, “정녕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대상은 누구인지”, “무엇을 희망하며 이 고난을 겪어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한다. 이 물음에 대해 “예, 저는 천주교인입니다”라고 주저 없이 삶으로 증거하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다섯 번째의 복음서를 쓰게 된다. 필자는 “무명 순교자를 따르리라”는 고백으로 평생을 바친 늙은 사제를 기억한다. 김진소 신부는 피와 땀을 흘렸고 오늘도 흘리고 있는 순교자들과, 손수 지은 선교사 기념관을 보듬으며, 교회를 위한 선교사들의 희생을 기리려 한다. 그의 침묵하는 손길은 우리 모두가 순교자의 자랑스러운 후예임을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0월 10일, 조광 이냐시오(고려대 명예교수,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
|